퀵바

수호자의 노래

수호자의 노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정상호
작품등록일 :
2020.05.04 01:40
최근연재일 :
2022.03.19 23:50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3,560
추천수 :
125
글자수 :
397,167

작성
20.05.04 21:50
조회
28
추천
2
글자
10쪽

낯선 내방자 (2) 글라드

DUMMY

칸데이룬을 떠난 지도 벌써 수많은 날이 흘렀다. 칸데이룬을 내려오는 길은 무척이나 가파르고 험해서 말에서 내린 채 고삐를 끌며 내려와야 했다.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았다간 에르칼의 부름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소년이 에르칼의 곁으로 간다 해도 딱히 슬퍼할 이는 세상에 더는 남지 않았지만 말이다.


칸데이룬의 봉우리에서 내려온 소년과 기사는 수풀이 무성한 골짜기를 지났다. 계곡 너머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희미한 햇빛이 그들을 내리쬐었다. 소년과 기사는 말에 올랐다. 그들은 산맥 아래의 최북단에 있는 대도시 메이룬으로 말을 몰기 시작했다.


나뭇잎 아래로 비추던 햇빛이 조금씩 약해졌고, 주변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늘 그렇듯 그들은 잠자리를 청할 곳을 찾았다. 글라드는 나뭇가지를 모아 주변을 밝혔고, 칼렌은 끼니를 때울 것을 찾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소년은 홀로 남아 자신이 피워놓은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넌 날 지킬 수 있었어.’ 뜨거운 불꽃 사이로 오래되고, 또 익숙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글라드는 질근 눈을 감았다. 모닥불을 쬐던 소년의 거친 두 손은 그대로였고, 소년을 괴롭히는 목소리도 그대로였다. 눈을 감자 오래된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낯선 형태가 되었다. 소년이 구하지 못한 형태들은 바뀌어 갔다. 어둡고 외로운 숲에서 따뜻한 추억의 집으로, 그림자들에 둘러싸인 소녀에서 짙은 화마 속에 갇힌 여성으로···.


‘나는 최선을 다했어.’ 소년은 자신을 위로했다. 화마에 갇힌 여성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너는 최선을 다했단다, 아이야.’ 맞아, 나는 최선을 다했어. 나에게 비난할 이는 아무도 없어.


피를 흘리던 여성의 얼굴은 글라드의 얼굴이 되었다. ‘정말 그게 최선이었어?’ 정말 최선이었을까. 글라드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그때도 그랬지. 그리고 언제나 그럴 거야.’ 정말 그랬다. 그가 살던 땅에 거대한 화마가 덮쳤을 때, 글라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가만히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공황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그때···.


모닥불 앞에서 눈을 감고 있던 글라드의 어깨를 칼렌이 두드렸다. “괜찮니, 글라드?” 그러나 소년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칼렌은 그가 잡아 온 고기를 모닥불에 놓았다. 그리곤 조용히 상처 난 투구를 벗었다.


모닥불의 온기가 고기를 익힐 때쯤, 글라드는 진정이 되었다. 소년은 아직 탄내가 나지 않는 고기를 삼켰다. ‘오늘 밤도 길고 두렵겠지.’ 글라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잠을 청하는 와중에도, 잠든 칼렌의 옆을 지키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과거의 망령이 글라드를 괴롭혔다. 글라드가 눈을 감으면 오랜 기억이 그를 괴롭혔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소년과 기사는 물살이 급한 개울을 지났고,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침엽수림을 넘어, 마침내 한 때의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는 활엽수림에 들어섰다. 시원한 바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수풀 사이로 얇은 목소리가 소년의 귀를 찔렀다. ‘이젠 나뭇잎마저 날 괴롭히는구나.’ 글라드는 얇은 목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그러나 얇은 목소리는 갈수록 굵어졌다. 이내 소년은 정신을 차렸다. 그 목소리는 환청이 아니었다. 곧 글라드는 고개를 돌려 소리를 찾았다.


“무슨 소리 안 들려요, 칼렌?” 글라드가 말했다.


“···그래. 들리는구나.” 칼렌이 말했다. 그런데도 앞서서 말을 몰던 기사는 고삐를 죌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숲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려 했다.


글라드는 고삐를 쥐고 자리에 멈춰 섰다. 소년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는 점점 형태를 띠었다. 목소리는 점점 크고 강해졌다. 소년은 목소리를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목소리에 새겨진 다급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누가 도움을 청하고 있나 봐요. 늑대에게 습격이라도 당한 걸까요?”


“신경 쓰지 말렴, 글라드. 갈 길이 멀단다. 그런 거 하나하나 간섭하다간 제때를 못 맞출 거야.” 칼렌이 말했다.


칼렌의 말에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그러나 글라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칼렌이 미처 소년을 말리기도 전에 글라드는 이미 숲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년의 발걸음이 나무뿌리와 진한 흙을 뚫고 깊은 숲으로 들어가자, 조금씩 낯선 이의 목소리 짙어졌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숲은 가파른 절벽에 가로막혔다. 확 트인 절벽 아래로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글라드는 목소리의 행방을 찾았다. 절벽 아래에서 희미한 음성이 들렸다. 소년은 절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글라드의 생기 없는 눈동자는 절벽 아래에서 형체를 찾아냈다. 바위 사이에 몸을 감춘 낯선 형체는 무언가를 갈구하는 목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글라드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년은 세워두었던 말을 향해 돌아가려 했다. 글라드가 뒤를 돌자, 그곳에는 칼렌이 있었다. 기사의 붉은 눈동자가 면갑에 난 오래된 상처를 뚫고 새어 나왔다. 칼렌이 물었다. “뭔가 찾았나, 글라드?”


“예, 칼렌. 저기 절벽 아래에 누군가가 있어요. 아마도 발을 헛디뎌 아래로 떨어진 게 아닐까요?” 글라드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칼렌은 품에서 밧줄 뭉치를 꺼내 들었다. 밧줄을 건네받은 글라드는 주변에 보이는 나무로 향했다. 글라드는 적당한 나무를 골라 밧줄의 한쪽 끝을 묶었다. 나머지 한쪽은 절벽 아래로 내려보냈다. “내려가실 겁니까?” 글라드가 말했다.


칼렌이 말했다. “아니, 네가 내려가거라. 난 여기 있으마.”


글라드는 밧줄을 따라 절벽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소년의 발끝은 가파른 절벽에 향했고, 소년의 몸은 절벽 아래로 향했다. 마침내 절벽 아래에 도달한 소년은 발목을 다친 채 떨고 있는 소녀를 보았다. 그녀는 옅은 회색의 비단옷을 걸쳤는데, 절벽에서 떨어진 것 때문인지 비단옷은 긁히고 찍힌 자국이 가득했다. 소녀의 온몸에도 마찬가지였다.


글라드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소녀는 작지 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글라드는 소녀의 말을 알지 못했다. 아마도 산맥 아래의 것이렷다. 소녀는 눈치를 보며 소년의 손을 잡았다. 글라드는 그녀를 일으켰고, 그녀는 아픔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글라드는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절벽 위와 연결된 밧줄을 수차례 흔들자, 절벽 위에서 칼렌이 내려왔다.


절벽 아래로 내려온 칼렌은 소녀의 모습을 보았다. 이내 이해했다는 듯 칼렌은 소녀를 업은 채 밧줄을 타고 절벽 위를 올랐다. 그러면서 칼렌은 소녀에게 산맥 아래의 말로 무엇이라 말했다. 아마도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것이었다. 글라드는 그들을 따라 절벽을 올랐다.


절벽 위에 오른 그들은 숲을 빠져나와 다시 말고삐를 매어둔 숲길에 도착했다. 칼렌은 글라드의 말 위에 소녀를 앉혔다. “곧 메이룬이 나올 거다. 그러니 잠깐 그 아이를 태워주렴, 글라드.” 그러면서 기사는 자신의 말로 향했다.


글라드는 앞서가는 칼렌의 말을 쫓았다. 소년의 뒤에 탄 소녀는 글라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메이룬으로 향하는 숲길을 따랐다. 글라드는 소녀에게 무엇이라도 말을 붙이려 했지만, 글라드는 여전히 소녀의 말을 알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잎이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거대한 장벽이 보였다. 벽돌로 높이 쌓인 장벽에는 철로 된 관문이 있었다. 관문 위로 기와가 여러 겹 올려진 지붕이 있었다. 장벽 위에는 짙은 보라색 철판으로 만든 갑옷을 입은 경비병이 창을 들고 서 있었다. 소년과 소녀 그리고 기사가 탄 말들은 숲길을 지나 장벽 앞에 도착했다.


메이룬으로 향하는 관문 앞에는 갑옷을 걸친 경비병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는 갑옷이 아닌 짙은 붉은색 비단 두루마기를 걸친 사내도 있었다. 사내의 모습은 어지러운 나뭇잎 아래의 장벽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사내는 검은 관모를 쓰고 있었는데, 그 모양은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관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소년과 기사를 막아 세웠다. 경비병 중에서 하나가 알 수 없는 말, 아마도 산맥 아래의 말로 말했다. 그러자 칼렌이 말에서 내렸고, 경비병들에게 다가갔다. 기사는 경비병과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글라드는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뒤에 타고 있던 소녀가 말에서 뛰어 내렸다. 글라드가 소녀를 제지할 틈도 없이, 낯선 소녀는 고급스러운 옷을 걸친 사내에게 달려갔다. 칼렌도 고개를 돌려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소녀는 귀족처럼 보이는 사내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글라드는 말에서 내려 칼렌에게 다가갔다.


곧 사내와 소녀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귀족 사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반갑습니다, 이방인이여. 제가 하는 산맥 너머의 말이 당신들에게 통하였으면 좋겠군요.” 글라드는 사내의 말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칼렌이 대답했다. “물론이죠. 제 이름은 칼렌입니다. 그저 아홉 대륙을 돌아다니는 평범한 용병이지요. 실례가 안 된다면 관문을 열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저희가 갈 길이 바빠서 말이죠.”


사내가 말했다. “성미가 급하시군요, 산맥 너머에서 온 친구여. 제 이름은 류하입니다. 산맥 아래에 존재하는 수많은 귀족 중 하나지요. 그리고 그녀는 제 하인, 장소윤이라는 아이입니다.” 사내는 칼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팔짱을 낀 칼렌은 사내가 건넨 손을 무시했다. 사내는 내민 손을 천천히 거두면서 말했다. “···제 하인을 구해주신 것은 고맙게 생각합니다, 칼렌.”


칼렌이 말했다. “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사는 팔짱을 풀며 글라드를 가리켰다. “저 아이가 구해준 것이니, 감사 인사는 저 아이에게 하시지요.”


“그렇습니까.” 사내는 살짝 미소지었다. 두루마기를 걸친 사내, 류하는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글라드에게 다가왔다. “고맙네, 어린 친구.” 류하는 아무 상처 없이 고운 손을 내밀었다.


글라드는 낯선 사내가 건넨 손을 잡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수호자의 노래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6 낯선 내방자 (5) 프리아 20.05.04 30 2 7쪽
15 낯선 내방자 (4) 에리크 20.05.04 18 1 10쪽
14 낯선 내방자 (3) 아라기 20.05.04 28 1 11쪽
» 낯선 내방자 (2) 글라드 20.05.04 29 2 10쪽
12 낯선 내방자 (1) 린 20.05.04 18 2 9쪽
11 의혹의 숲 (10) 로이 20.05.04 31 2 7쪽
10 의혹의 숲 (9) 아라기 20.05.04 25 1 14쪽
9 의혹의 숲 (8) 하인츠 20.05.04 30 1 11쪽
8 의혹의 숲 (7) 프리아 20.05.04 36 1 10쪽
7 의혹의 숲 (6) 아라기 20.05.04 40 1 16쪽
6 의혹의 숲 (5) 글라드 20.05.04 40 1 10쪽
5 의혹의 숲 (4) 하인츠 20.05.04 46 1 14쪽
4 의혹의 숲 (3) 프리아 20.05.04 44 1 12쪽
3 의혹의 숲 (2) 아라기 +1 20.05.04 96 2 21쪽
2 의혹의 숲 (1) 로이 +1 20.05.04 205 2 17쪽
1 제1부 빛바랜 기사 프롤로그 +1 20.05.04 463 3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