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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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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정상호
작품등록일 :
2020.05.04 01:40
최근연재일 :
2022.03.19 23:50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3,549
추천수 :
125
글자수 :
397,167

작성
20.08.29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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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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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8쪽

오렌지빛 호수 (6) 에리크

DUMMY

낮게 땅거미가 깔린 시각이었지만, 마구간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양초가 놓인 접시를 손에 든 에리크는 천천히 마구간의 문을 열었다. 동물의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돌바닥에는 지푸라기와 흙이 옅게 흩뿌려져 있었다. 구석에는 볏짚이나 마구가 나란히 정돈되어 있었다.


칙칙한 나무 울타리 너머로 저택의 말들이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울타리 앞에는 뚱보 루드가 작은 의자에 앉아, 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에리크는 양초가 놓인 접시를 적당한 곳에 놓아두고, 마구간지기 루드에게 향했다. 에리크는 몸을 숙인 채 앉아있는 루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뚱뚱한 마구간지기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으아···!”


“진정하세요, 아저씨. 저에요, 에리크.” 에리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구간지기를 타일렀다.


루드는 고개를 돌려 에리크를 바라보았다. “···너였구나. 휴, 깜짝이야. 잠시 잠들었지 뭐니.” 그는 안심한 듯 심호흡했다. 목덜미에 접힌 살을 보며 에리크는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졸리시면 들어가서 주무시지 그러세요.”


루드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저 녀석이 걱정돼서 말이야.” 루드는 손가락으로 축사를 가리켰다. 울타리 너머에는 배가 불룩한 암말이 숨을 고르며 볏짚에 누워있었다.


에리크는 울타리로 다가가, 루드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출산이 임박했나 봐요···?”


“그래, 이르면 이번 달. ···늦어도 프레이의 달 전에는 나오지 않을까?” 루드는 확실하지 않은 듯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서는 다정함이 느껴졌다.


‘프레이의 달···.’ 에리크는 또다시 그 단어에 집중했다. 벌써 다음 달이면 프레이의 달이었다. 에리크는 저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프레이의 달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 시간에 무슨 일이니?” 루드가 물었다.


에리크는 짧은 생각을 접어두고 루드에게 대답했다. “금방 올루곤이 크로텔에서 돌아왔어요.”


“올루곤이···.” 루드는 깜짝 놀라 소리를 높이려다, 이내 잠든 말들의 눈치를 봤다.


“막 밤중에, 말을 타고 돌아왔어요. 지금은 아마도 응접실에서 마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겠지요.” 에리크가 말했다.


“올루곤이 돌아왔으니, 이제 마을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그렇겠지요.” 에리크가 거들었다.


“하지만···.” 루드는 걱정이 섞인 눈빛으로 축사를 바라봤다. “저 녀석을 내버려 두고 가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구나.”


에리크는 루드의 무거운 어깨를 두드렸다. “아저씨의 노고는 모두가 알고 있어요.”


“영주께서 부르신다면 기꺼이 와야지.” 루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탱탱한 볼살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내 기쁨이니까.”


“그렇지요···.” 에리크는 조용히 수긍했다.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중에 날이 밝으면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는 확실한 소식을 가져오지요.”


에리크는 책상에 올려두었던 촛불을 집어 들고, 마구간을 나섰다. 더욱 깊어진 밤의 저택을 해치며, 에리크는 조심스레 저택으로 돌아갔다.


알현실에는 이미 불이 꺼져있었다. 아직 온기는 옅게 남아있었다. 에리크는 사람의 흔적을 찾기 위해, 복도를 따랐다. 복도의 어느 끝에는 조그마한 주방이 있었다.


주방에 딸린 작은 쪽문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에리크는 천천히 쪽문을 열고 주방으로 들어섰다.


주방에는 낡은 식탁이 있었다. 식탁에는 치즈나 과일, 딱딱한 빵이 먹기 좋게 놓여있었다. 다양한 음식 너머로 올루곤의 얼굴이 보였다. 올루곤은 거대한 빵을 양손으로 찢어 무작정 입으로 넣고 있었다.


‘여기 있었군···.’ 올루곤의 얼굴을 보자 에리크는 금세 짜증이 났다. 영주를 따라 프레이루엘에 가지 못했다고 짜증을 내던 올루곤의 표정이 새삼 떠올랐다.


에리크는 식탁에 앉은 올루곤과 눈이 마주쳤다. 올루곤은 빵을 씹으며 말했다. “나한테 할 말 있나?”


“마님과는 대화하셨습니까?” 에리크가 물었다.


올루곤은 반쯤 찢어진 빵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일단 자리에 앉아.” 올루곤은 건성으로 손짓했다.


에리크는 올루곤의 건너편에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그러자 올루곤이 딱딱한 빵을 던졌다. 에리크는 가볍게 빵을 잡아챘다.


“입이 심심할 테니 그거라도 씹고 있어.” 올루곤은 어딘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에리크는 빵을 한입 크기로 찢어 입으로 넣었다. 밋밋한 빵은 아무런 맛이 나지 않았다. 에리크는 달콤한 사과잼이 그리웠다.


“크로텔은 어떠셨습니까?” 빵을 질겅질겅 씹으며 에리크가 물었다.


올루곤은 급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나쁘지 않았지. 귀테르델 경의 대접도 썩 괜찮았고. 날씨도 선선하고 좋았어. 병사들 말로는 이따금 여름에 폭우가 쏟아진다는데, 그때를 피해서 방문한 게 참으로 다행이라더군.” 올루곤이 말했다.


에리크는 올루곤이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제가 그런 것을 묻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도적 이야기를 하는 건가?” 올루곤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사생아한테 쉬이 얘기해줄 것 같은가?”


‘그래, 그런 사람이었지.’ 에리크는 빵 쪼가리를 거칠게 찢었다. 식탁 한편에 놓인 잔에다 천천히 맥주를 채웠다. 맥주는 미지근했지만 씁쓸하고 뒷맛이 깔끔했다.


올루곤은 작은 과일칼로 자두 껍질을 벗겨냈다. “평소라면 그랬겠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그리고 딱히 중요한 얘기도 아니니까. 상관없겠지.”


올루곤은 속살을 드러낸 자두를 입으로 가져갔다. “크로텔은 조용하고 차분한 성이었어. 지루했다고도 할 수 있겠군. 도적들은 그런 지루한 성에 활기를 불어 넣어줬지. 처음 크로텔에 도착했을 때, 성벽 위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을 보며 대충 짐작할 수 있었어. 게니크 경은 쉬이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게니크 경은 강직한 사람이라고 이름이 높지요.” 에리크가 거들었다. 게니크 경은 윗사람에게 충직하고, 아랫사람에게는 존경받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었다.


“어쨌든.” 올루곤은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다. 아마도 자신의 말을 끊은 것에 대한 것이렷다. “게니크 경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어. 상처 입은 들판, 무너져내린 건물의 잔해들이 도적들의 이야기를 해주었지.”


“마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에리크는 본론을 이야기했다.


“보냈던 병사에 추가로 기수 열 명, 궁수 오십 명을 덧붙이시겠다고 하셨지. 물론, 그들을 이끄는 건 나고. 최대한 빨리 크로텔로 향해야 해.” 올루곤의 말은 불평투성이였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바쁜 여정이겠어요.” 에리크는 맘에도 없는 말을 건넸다.


“그래. 그렇겠지. 늦어도 프레이의 달이 뜨기 전까지는 도착할 수 있겠어.”


‘프레이의 달···.’ 에리크는 다시 그 단어에 집중했다.


올루곤은 맥주잔을 크게 비웠다. “이번에는 프레이의 달을 볼 수 없을 것 같아 너무 아쉬워. 지난번에는 뒷산에서 프레이의 달을 맞이했지. 로나트 녀석···. 밤중에 졸린 눈망울로 얼마나 집중하던지···.”


에리크는 잠자코 올루곤의 말에 집중했다. “···.”


“크흠. 너무 많이 말했군. 더 할 얘기가 없다면 들어가 보게. 술친구가 없어도 맥주는 충분히 달고 맛있으니.” 올루곤은 손사래를 치며 에리크를 밀어냈다.


그의 말대로 에리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좁은 쪽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자, 뻥 뚫린 아치형 창 너머로 보름달이 보였다.


보름달은 밤하늘에서 조용하고, 혹은 지루하게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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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업의 그림자 (5) 아라기 20.12.19 116 2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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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업의 그림자 (3) 프리아 20.11.28 52 2 8쪽
55 업의 그림자 (2) 하인츠 20.11.21 36 2 14쪽
54 업의 그림자 (1) 에리크 20.11.14 44 2 8쪽
53 백야 (9) 어린 소년 20.11.07 69 2 7쪽
52 백야 (8) 하인츠 20.10.31 55 2 10쪽
51 백야 (7) 글라드 20.10.24 24 2 10쪽
50 백야 (6) 장소윤 20.10.17 22 2 13쪽
49 백야 (5) 카이 바르도나 20.10.10 23 2 7쪽
48 백야 (4) 에리크 20.10.03 25 2 10쪽
47 백야 (3) 아라기 20.09.26 27 2 8쪽
46 백야 (2) 하인츠 +1 20.09.19 60 3 12쪽
45 백야 (1) 하란 20.09.12 26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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