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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의 노래

수호자의 노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정상호
작품등록일 :
2020.05.04 01:40
최근연재일 :
2022.03.19 23:50
연재수 :
8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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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5
추천수 :
125
글자수 :
397,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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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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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백야 (4) 에리크

DUMMY

연약한 횃불이 비추는 상록수 너머로 희미한 달빛이 보였다. 에리크는 푹 고개를 숙이며 거친 숨을 골랐다. 지나쳐온 울퉁불퉁한 산길은 꽤 가팔랐다. 나름 단련된 에리크도 고단함을 느낄 정도였다.


“왜 이래, 에리크. 달을 보러 가자고 말을 꺼냈던 건 너잖아.” 테오가 말했다. 길동무로 삼은 테오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에리크가 식은땀을 흘리며 오른 길을, 테오는 가뿐하게 올랐다. 에리크는 그 모습을 보며 새삼 신기함을 느꼈다.


“네가 이상한 거야. 혹시 괴물이야?” 에리크가 말했다.


테오는 축 처진 에리크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운 내. 거의 다 왔으니까, 아마도.” 테오는 작은 횃불을 들고 천천히 앞장섰다.


돌부리가 살짝 고개를 내밀었고, 나무뿌리는 거칠게 발목을 잡아챘다. 답답한 밤안개는 어느덧 눈앞에서 사라졌다. 익숙한 마이아르 뒷산의 밤은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마침내, 산의 중턱에 다다랐다. 고개를 내민 언덕에서는 하늘을 온전히 볼 수 있었다. 거대한 보름달은 마이아르의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테오는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워···.” 테오는 보기 드문 반응을 보였다.


“동감이야.” 에리크는 보름달에 취한 테오의 옆에 섰다. “오길 잘했지?” 에리크가 천천히 물었다.


“···응.” 테오가 작게 말했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테오가 쉽게 취할 만큼, 밤하늘에 뜬 보름달은 아름다웠다.


프레이의 달을 핑계 삼아 테오와 함께 마이아르 산에 오른 것을 에리크는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뒷산의 경치를 이야기했던 올루곤에게 어쩐지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나 에리크는 가득한 달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보름달을 보러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름답게 차오른 달은 언젠가 여름의 무더움이 사라지듯, 한순간 모습을 감췄다.


달을 잃은 밤하늘은 아무것도 없이, 그저 어둠만이 맴돌았다. 그 보이지 않는 달을 프레이의 달이라 불렀다. 운이 따라준다면, 에리크는 오늘 프레이의 달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에리크는 주변에 횃불을 적당히 세워놓았다. 밤바람은 적당히 선선해서 기분 좋았다. 에리크는 여전히 보름달을 바라보는 테오의 옆으로 가 조용히 앉았다. 에리크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테오와 함께 조용히 가을날의 보름달을 올려다보았다.


전혀 싫증 나지 않을 경치에 조금 지루함을 느낄 때쯤, 에리크는 테오를 바라보았다. 테오는 어두컴컴한 수풀 너머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테오?” 에리크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어.” 테오가 싸늘하게 말했다.


“···뭐?” 에리크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오가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았지만, 에리크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테오는 헛소리를 뱉을 인물이 아니었지만, 에리크는 의문을 던졌다.


테오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초리로 말했다. “확실해. ···몇 명인지,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테오는 에리크의 허리춤에 자리한 칼집에 손을 댔다. 그리고 테오는 호신용으로 가져왔던 에리크의 검을 뽑았다.


“무슨 짓이야!” 에리크가 깜짝 놀라 말했다.


“나는 이렇다 할 무기를 챙겨오지 않았으니까.” 테오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검을 휘두르는 편이 훨씬 도움 되지 않겠어?” 테오는 뽑아 든 검을 치켜들었다. 에리크는 테오에게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테오의 실력이 훨씬 뛰어난 것은 에리크가 더욱 잘 알고 있었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 에리크가 물었다.


“아니.” 테오는 수풀을 향해 검을 겨눴다. “적이라면 베는 수밖에.” 테오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들은 그저 어두운 숲을 지켜보았다. 밤바람은 횃불을 간질이며 지나갔다. 밤하늘에는 아직 외로운 달이 빛났다. 짧고 고요한 시간이 흐르며, 긴장감을 주었다.


이윽고 수풀이 흔들리며, 수수께끼의 이들이 나타났다. “눈치 빠른 아이네···.” 여성의 낮은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수풀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모두 두 명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기괴한 은색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짙은 밤이었지만, 에리크는 횃불에 의지하며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두 사람은 꽤 키 차이가 났다. 키가 큰 쪽의 사람은 엄청나게 긴 분홍빛 머리카락을 자랑했다. 윤곽이 두드러지는 가죽 갑옷을 입었는데, 그 때문에 에리크는 키가 큰 사람이 여성임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는 등 뒤에 커다란 낫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런 특이한 모습에 에리크는 기괴함을 느꼈다.


에리크는 키가 작은 쪽을 살폈다. 키가 작은 이는 은색 까마귀 가면 위로 푸른 두건을 걸쳤다. 두건 사이로 검은색 머리카락이 삐죽하고 튀어나왔다. 그도 동료처럼 가죽 갑옷을 걸쳤는데, 그의 팔에는 뭔가 독특한 것이 달려 있었다.


매섭게 칼을 겨눈 테오 대신, 에리크가 물었다. “웬 놈들이냐? 정체를 밝히거라.”


키가 작은 이는 대답하지 않고, 옆의 여성에게 말했다. “···찾을 수고를 덜었군.” 사내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분홍 머리의 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에리크를 향해 물었다. “마이아르의 도련님을 찾고 있거든···.” 그녀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낯선 이들이 어째서 토윈에게? 어쨌든 저들을 마이아르에 들여서는 안 됐다. 그것이 에리크의 의무였다. “···.” 에리크는 경계심을 유지하며 상황을 파악했다.


키가 작은 사내가 여성을 막아 세웠다. “저 녀석 중 하나가 도련님인가 뭔가겠지. 저런 고귀한 차림은 쉽게 볼 수 없으니까.” 짜증과 귀찮음이 섞인 말투였다.


“···확실하지 않잖아요, 에그윈.” 여성이 나긋하게 말했다.


“상관없잖아. 뒤치다꺼리도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사내는 두건을 만지작거렸다.


눈치를 보던 에리크는 상황을 파악했다. 그들의 진의를 파악한 에리크는 속임수를 펼쳤다. “···시끄럽군. 어떤 목적이든 괴한에게 마이아르의 땅을 밟는 것을 허락할 수 없지.” 에리크는 짐짓 근엄한 말투로 말했다.


테오도 눈치를 챈 듯 맞장구쳤다. 테오는 에리크를 가로막으며, 앞으로 나섰다. “물러서시지요, 쓸데없는 말다툼일 뿐입니다.”


“···괜찮겠지.” 키가 작은 사내가 동료에게 물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키가 큰 여자는 포기한 듯 말했다.


사내가 빠르게 품에 손을 넣었다가 빼자, 세워뒀던 횃불이 빛을 잃었다. 언덕에 유일한 빛이 사라지자, 오로지 달빛만이 남았다. 은은한 달빛은 주변을 바라보는 데 큰 도움이 되어 주지 못했다.


에리크는 당황하며 빛을 잃은 횃불을 바라보았다. 횃불의 끝은 날카로운 무언가로 잘린 듯했다. ‘···무언가를 던진 건가.’


키가 작은 사내가 천천히 걸어왔다. “···다치기 싫으면 순순히 붙잡히는 게 좋아. 귀찮거든.” 사내의 팔이 희미하게 빛났다. 사내의 장갑 끝에는 특이한 보석이 박혀있었다.


테오는 낮게 자세를 잡았다. “그리 쉽지는 않을걸. 방심하지 말고 검이나 뽑으라고.” 테오가 말했다.


“검은 필요 없어.” 사내는 두 주먹을 맞부딪쳤다. 거대한 쇳소리가 언덕에 울렸다. 그리고 사내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테오를 덮쳤다.


테오는 힘겹게 칼날로 사내의 주먹을 막아냈다. “···건틀릿인가.” 테오는 낮은 신음을 뱉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에리크는 테오를 도우려고 주변을 살폈다.


“···가만히 있는 게 좋아, 꼬마 도련님. 나도 끼어드는 꼴을 보기 싫으면 말이야.”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여성이 나지막이 말했다.


“···!” 깜짝 놀란 에리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계속 울려 퍼졌다. 안간힘을 쓰며 테오는 건틀릿을 막아냈다.


건틀릿에 박힌 보석이 내뿜는 빛이 아름다운 선을 그려냈다. 빛이 사라진 언덕에, 이목을 끄는 유일한 빛줄기였다.


그러다 순간, 세상에 은은한 달빛이 사라졌다. 에리크는 재빨리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이 사라진 밤하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토록 갈망했던 프레이의 달이었지만, 무척 야속했다.


모든 빛이 사라졌기에 테오와 사내의 결투는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건틀릿이 내뿜는 빛줄기와 강철의 소음만이 결투의 행방을 이야기했다. 옆에 자리한 여성은 그 광경이 보이기는 하는지, 유유히 지켜보고 있었다.


꽤 시간이 흐르자 빛줄기가 멈췄다. “불 좀 밝혀 줘, 모이카.”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네.” 여성은 천천히 횃불로 걸어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언덕에 불빛이 돌아왔다.


에리크는 다시 테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테오는 바닥에 꽂힌 채, 발버둥 치고 있었다. 사내의 건틀릿은 테오의 등을 거칠게 내려찍고 있었다.


“테오를 놔 줘!” 에리크가 소리치며 사내에게 돌진했다.


“···시끄러운 도련님이네.” 뒤편에서 여성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에리크가 언덕에서 들은 마지막 소리였다. 강렬한 통증이 뒤통수를 때렸다. 에리크는 정신을 잃으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밤하늘에는 여전히 달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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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안개빛 희극 (8) 하인츠 21.05.29 28 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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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업의 그림자 (5) 아라기 20.12.19 116 2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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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업의 그림자 (2) 하인츠 20.11.21 36 2 14쪽
54 업의 그림자 (1) 에리크 20.11.14 44 2 8쪽
53 백야 (9) 어린 소년 20.11.07 69 2 7쪽
52 백야 (8) 하인츠 20.10.31 55 2 10쪽
51 백야 (7) 글라드 20.10.24 24 2 10쪽
50 백야 (6) 장소윤 20.10.17 22 2 13쪽
49 백야 (5) 카이 바르도나 20.10.10 24 2 7쪽
» 백야 (4) 에리크 20.10.03 26 2 10쪽
47 백야 (3) 아라기 20.09.26 27 2 8쪽
46 백야 (2) 하인츠 +1 20.09.19 60 3 12쪽
45 백야 (1) 하란 20.09.12 26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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