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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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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정상호
작품등록일 :
2020.05.04 01:40
최근연재일 :
2022.03.19 23:50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3,531
추천수 :
125
글자수 :
397,167

작성
20.05.04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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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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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의혹의 숲 (1) 로이

DUMMY

‘오늘은 다를 거야, 아마도.’ 로이가 생각했다.


에런든 서쪽 너머 호수로부터 수풀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호수 바람이 로이의 푸른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푸른 머리의 소년은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의 소년, 이안이 여유롭게 목검을 들고 있었다. 이안의 앳된 외모는 소년의 붉은 머리칼에 어울려 보였다. 소년의 녹색 빛깔 눈동자가 빛났다.


로이는 그의 목검과 함께 이안에게 돌진했다. 이안은 로이의 공격을 가볍게 받아쳤다. “너무 가벼워, 로이.” 곧장 이안은 반격을 가했다. 푸른 머리의 소년은 두 손으로 붙잡은 목검으로 아슬아슬하게 반격을 막아냈다. 두 팔이 후들거렸고, 두 다리가 굽혀졌다. 이안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소년은 자유로운 다리로, 로이의 빈틈을 노렸다.


‘앗!’ 로이가 뒤늦게 자세를 고치려 했지만, 이미 소년은 내동댕이쳐지고 있었고, 목검은 손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내동댕이쳐지며 소년은 다음을 생각했다. 로이는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이안의 칼날이 덮쳐왔다. 로이는 왼쪽으로 가까스로 칼날을 피했다. 그리곤 이안을 향해 어깨를 부딪쳤다. “푸핫!” 이안은 소리치며 날아갔다.


이안은 목검을 잃은 채 쓰러졌고, 로이는 재빠르게 달려가 이안에게 올라타 주먹질을 가했다. 이안은 두 팔로 얼굴을 가로막았다. 로이는 계속해서 주먹질을 이어갔다. “오늘은··· 내가 이겼어···!” 로이의 주먹에는 확신이 담기기 시작했다.


한동안 주먹질을 막고만 있던 이안은 로이를 발로 힘껏 걷어냈다. 둘의 거리는 제법 벌어졌다. 한곳에는 소년들의 목검이 나란히 내팽개쳐 있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동시에 두 소년은 목검을 향해 돌진했다. 로이는 재빨리 자신의 목검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맞서오는 이안에게 재빨리 휘둘렀다. 그러나 목검을 낚아챈 것은 이안도 마찬가지여서, 이안은 쉽게 목검을 받아 쳐낼 수 있었다.


두 소년은 자세를 바로 했고 또다시 수차례의 합이 오갔다. 로이는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이안은 아직 여유로워 보였다. 지난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의 싸움에서 로이가 이긴 적은 손에 꼽았다. 오늘은 다를 거라 여겼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안은 또다시 맹공을 펼쳤다. 푸른 머리의 소년에게는 그 공격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목검은 저 너머로 뿌리쳐졌고, 소년의 두 무릎은 바닥에 밀착했다. “졌어. ···항복이야!”


이른 봄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푸른 들판 사이에 로이는 누웠고, 이안은 그 옆에 앉았다. “아까웠어, 로이!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였다니까!” 이안이 말했다.


이안의 말투에는 전혀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로이는 부아가 치밀었다. “아니,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는걸!” 로이는 악에 받친 듯 말했다. 지난 수백 차례의 시행착오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푸른 머리의 소년은 누구보다도 더 자신을 단련했었다. 하지만 소년에게 이안은 압도적인 상대였다.


두 소년은 한동안 바람을 즐겼다. 곧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흙을 털어내며 말했다. “슬슬 나는 가볼게, 로이.” 이안은 몇 걸음 가지 않은 채 뒤를 돌았다. “맞다. 오늘은 수도원장님이 하실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어. 그러니 일찍 돌아오는 게 좋을 거야. 적당히 쉬다가 와.” 그리곤 붉은 머리의 소년은 수도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로이는 아직도 거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봄바람은 적잖이 도움이 되어 주었고, 마른 잔디는 푹신했다.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싫었다. 소년은 그저 눈을 감은 채 한참이나 그 자리에 누워있었다.


얼마쯤이나 지났을까,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년은 앞서 이안이 향한 길을 따라갔다. 확 트인 잔디밭을 벗어나 풀숲에 들어섰다. 소년은 숲길을 따라 걸었다. 에런든 숲의 키 작은 나무들 아래로 짙은 그늘이 펼쳐졌다. 땅 밖으로 드러난 키 작은 나무뿌리들이 우거진 수풀들 사이로 보였다. 이따금 잠든 등나무 넝쿨들이 숲길을 가로막았다. 로이에겐 이것이 일상이었다.


“이봐! 거기, 푸른 꼬마!” 수풀에서 소리가 들렸다. 로이는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나무들에 등나무 넝쿨이 우거져있었다. 드러난 나무뿌리 사이로 다람쥐 한 마리가 재빠르게 지나갔다. 누군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잘못 들었나?’ 로이는 의아해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다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이봐, 멍청이 꼬마! 이쪽이라고!” 로이는 다시 뒤돌았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있는 거 같아, 요정인가? 어쩌면, 숲의 괴물일 수도!’ 로이는 확신하며 등에 멘 목검을 꺼냈다. 소년은 등나무 넝쿨을 이리저리로 헤집어댔다. 여러 날벌레가 날아올랐다. 그러나 등나무 넝쿨 너머에도 아무도 없었다. 로이는 마침내 소리쳤다. “대체 누구야? 나는 겁먹지 않아! 할 말이 있으면, 당당히 앞으로 나와! 이 괴물 녀석아!”


“난 괴물이 아니야, 멍청한 꼬마 녀석아!”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렸다. 로이는 재빨리 뒤를 돌아 목검을 겨눴다. 하지만 역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혹시···?’ 로이는 순간 닭살이 돋았다. 언젠가 수도원의 책에서 읽었던 그림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들리지 않는 새벽 아래에서 다가온다고 했다. 그림자들은 오래전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했지만···.


“바보 녀석! 위쪽이다, 위쪽!” 로이는 깜짝 놀라 키 작은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키 작은 나무의 얇은 가지 위에 은으로 된 까마귀 가면을 쓴 이가 앉아있었다. “그래, 음···. 이 멍청아! 이제야 봤구나. 음. 음. 이제라도 봤으니 다행이지! 그래, 다행이지 말고!” 소년은 한순간 까마귀가 말을 내뱉는 줄 알았다.


소년은 최대한 긴장을 풀지 않으며, 은까마귀가 앉은 나무 아래로 조금씩 다가갔다. 목검은 여전히 앞으로 유지했고, 보폭은 조금씩 짧아졌다. “그래서, 왜 나를 불렀지?” 소년이 소리쳤다.


까마귀 가면은 고개를 끄덕이고 또 좌우로 흔들어댔다. “음, 그래! 일단은 이게 먼저겠지. 우선, 내 소개를 하지. 친구! 나는 그래. 아홉 대륙의 이곳저곳을 다니는 그런 사람이지! 반가워, 친구!”


소년은 그가 굉장히 수상했지만, 일단은 대답했다. “그래요, 반가워요. 음···. 친구!”


“그래, 친구! 굉장히, 아주 굉장히! ···좋은 말이지!” 까마귀 가면은 마구 고개를 끄덕여댔다. 그리곤 한순간 고개를 멈추고 로이를 쳐다보았다. “내 꼬마 친구의 질문에 답을 해주지! 친구! 나는 굉장히 호기심이 많아! 알고 싶은 게 많지! 여기 숲은 정말 신기해. 그럼. 신기하고말고. 이 나뭇가지들은 얇지만 단단해. 프레이에선 보기 힘들지! 왜 이 지역 나무들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가요?” 로이가 말을 끊었다.


까마귀 가면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내 꼬마 친구는 긴 이야기가 싫나? 음, 그럼 할 수 없지! 바로 본제로 들어갈 수밖에. 나는 내 꼬마 친구에게 여러 질문을 하려고 해! 내 꼬마 친구 이름은 뭐지? 어디서 왔지? 어디에 살지? 고향은? 누구와 살지?” 까마귀 가면이 점차 부들부들 떨렸다.


로이는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제 이름은···. 아니, 우선 당신은 누구죠? 그게 먼저예요!” 로이는 쉽게 겁을 먹는 소년이 아니었지만, 까마귀 가면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까마귀는 처량하게 고개를 지었다. “미안. 내 불쌍한 꼬마 친구. 나에 관한 것은 이야기할 수 없어. 나는 이야기를 듣는 생물이지. 이야기를 파는 생물이 아니야.” 까마귀 가면은 어느 때 보다 또렷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어요! 미안해요, 친구!” 로이는 겁먹은 것을 최대한 숨기며 말했다.


까마귀 가면은 고개를 숙였다. “음, 그럼. 불쌍한 꼬마. 어쩔 수 없지. 음. 이 이상 네게 얻을 수 있는 건 없겠지. 꼬마. 가도 좋아! 시간을 뺏어서 미안!” 그리곤 은색 까마귀 가면을 쓴 사내는 풀숲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의아해하며 로이는 다시 숲길로 돌아왔다.


소년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키 작은 나무들은 여전히 소년의 머리 위로 그늘을 만들어냈다. ‘대체 뭐였을까?’ 소년의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로이는 자신 스스로 이 숲에 꽤 익숙하다고 자부했다.


소년은 에런든 숲에서 산그늘다람쥐, 삼색노루, 달빛날개나방과 같이 독특한 생물들과 조우했었다. 에런든 숲은 책에서만 봤던 특이한 생물체들의 집합체였다. 그렇지만, 방금 소년이 보았던 까마귀 가면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명체였다. 혹여 그것이 괴물이 아닌 사람이었을까? 소년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소년은 그저 한시라도 빨리 수도원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윽고 소년의 발걸음은 소년을 에런든 숲 밖으로 인도했다. 곧 에런든 마을 외곽에 낮게 쌓인 돌담이 보였다. 주변으로 넓게 펼쳐진 휴경지나 자갈밭들이 보였다. 그 사이로 대충 정돈된 흙길이 나 있었다. 익숙한 풍경에 그제야 로이는 거친 숨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소년은 언제 무너졌을지 모를 수도원 돌담 잔해를 넘었다. 텅 비어있는 수도원 뒤뜰을 가로질러, 소년은 곧장 수도원 뒷문을 향했다. 로이는 뒷문으로 부엌에 들어섰다. 부엌에는 검은 머리의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찬장에서 무언가를 꺼내려 하고 있었다. 그러다 소녀는 소년의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로이! 깜짝 놀랐잖아! 왜 여기에···. 아니, 아니지! 왜 이리 늦은 거야. 무슨 일 있었어?” 검은 머리의 소녀, 세린이 호들갑 떨었다.


로이는 방금 겪은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게···.” 그러다 소년은 입을 꾹 닫았다. ‘뭐라 말해야 하지?’ 소년은 자기 자신도 자신이 겪은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겪은 상황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뭐야!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로이?” 세린이 뾰로통했다.


“아니···. 미안, 세린.” 소년은 잠시 말을 가다듬었다. “별일 아니야. 그냥 너무 피곤했었나 봐. 숲에서 잠이 들었었거든.” 로이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소년은 찬장에서 레몬 마멀레이드가 담긴 병을 꺼내, 소녀에게 건넸다.


세린은 가볍게 병을 건네받았다. “아···. 고마워, 로이.” 그리곤 소녀는 덮개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응, 좋아. 이 정도면 괜찮을 거 같아···.”


“수도원장님 심부름이야?” 로이가 물었다.


세린이 대답했다. “응, 너도 알겠지만, 오늘은 원장님이 이야기를 해주시는 날이잖아.” 소녀는 레몬 마멀레이드를 쟁반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다 소녀는 갑자기 소리쳤다. “아, 맞다! 로이, 원장님께서 찾고 계셨어. 로이, 널 보면 빨리 거실로 오라고 말해달라고 하셨어. 빨리 말했어야 했는데.”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세린.” 로이가 말했다. “가는 길이니 내가 가져갈게.” 소년은 조리대에 놓인 쟁반을 집어 들었다.


“고마워, 나도 숟가락이랑 컵이랑 또···. 암튼 필요한 거 찾아서 뒤따라갈게.” 세린이 말했다.


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린은 여러 가지 것들을 찾으려 바삐 움직였다. 소년은 맞은편 찬장에서 숟가락을 꺼내 쟁반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곤 거실로 향했다.


겨울은 이미 지났지만, 거실에는 아직 화로가 피워져 있었다. 수도원장은 구석에서 마른 장작을 가져와 천천히 화로에 채워 넣고 있었다. 이윽고 화로는 다시 타올랐다. 소년은 쟁반을 화로 오른편의 탁자 위에 두었다. 수녀는 화로에 가까이 놓인 흔들의자에 자리 잡았다. 흔들의자 건너편에는 작은 의자 여러 개가 있었다. 그중 맨 앞에 놓인 의자에 이안이 앉아있었다.


“제때 왔구나, 로이. 마침 시작하려던 참이었단다.” 헤드나 수도원장이 말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수도원장님.” 로이는 인사하며 의자들이 놓인 곳으로 향했다. 곧장 소년은 이안 옆자리에 앉았다.


“왜 이리 늦었어, 로이?” 이안이 물었다.


로이가 답했다. “아니, 아무 일 아니야. 신경 쓰지 마.”


곧 헤드나 수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럼,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수녀는 옆 탁자에 놓인 레몬 마멀레이드를 한 숟가락 떠서 입에 가져다 댔다. 흔들의자에 기댄 채 수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그 이야기를 하면 좋겠구나. 루테네르의 마지막 수호자라고 불렸던 히슬렌트의 이야기 말이다.”


루테네르의 마지막 수호자, 히슬렌트는 산맥 너머의 왕 벨리켄시오르 2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모든 루테네르인들의 영웅이었다. 루테네르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라면 그의 이름과 업적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을 것이었다. 로이도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어려서부터 수많은 책이나 수도원을 찾아오는 순례자들, 상인들과 같은 이들로부터 루테네르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루테네르 삼두정의 세 영웅 카이가르와 멜레고르 그리고 라티오드, 용사냥꾼 로이아르, 루테네르 최초의 황제 사르미나스 대제, 위대한 아이케르 라투스, 루테네르의 첫 번째 수호자 티르하, 풍운아 그리판디오르 대제, 친족살해자 카에니오르 7세 등. 그렇지만 어느 영웅들의 이야기보다 소년은 히슬렌트의 이야기를 가장 좋아했다.


“히슬렌트는···. 그래, 어디서부터 말해야 좋을까?” 수녀는 입술을 오물오물했다. “흠, 그래. 지난번에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지? 잘 기억나지 않는구나.”


“아마도 떠났던 히슬렌트가 다시 궁전에 돌아온 직후까지였을 거예요.” 이안이 대답했다.


“그래. 고맙구나, 이안.” 수녀가 대답했다. 때마침 세린이 숟가락이 담긴 컵과 작은 접시를 들고 거실에 들어왔다.


“벌써 이야기 시작하셨나요?” 세린이 황급히 물었다.


“아, 참. 세린을 잊었었구나. 깜빡 시작할 뻔했잖니.” 수녀가 작게 미소 지었다. 세린도 따라 미소 지었다.


소녀는 마멀레이드 병이 놓인 탁자 위에 컵을 올려두곤 이안과 로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로이, 수녀님께 내가 없다고 말 안 했어?”


로이가 말했다. “깜빡했어, 미안.” 소년은 한쪽 손을 들며 사과했다.


이안이 말했다. “오늘은 히슬렌트의 이야기를 해주신대, 세린.”


“그래? 고마워, 이안!” 세린은 웃으며 답했다.


수녀는 세린이 가져온 접시에 레몬 마멀레이드 적당히 덜어냈다. 숟가락으로 레몬 한 조각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냈다. 수녀는 그중에서 가장 작은 조각을 입에 넣고는 천천히 씹었다. “그래, 그러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세린도 왔고, 따뜻한 화로와 적당히 달콤한 레몬 마멀레이드도 있으니 말이다.”


화로의 불은 적당히 타올랐다. 창밖은 곧 오렌지색으로 물들었다. “마침내 프레이의 게드브렌트가 자신의 군사를 몰아 태양대교를 넘어, 스타르니올드 턱 밑까지 치고 올라왔다네. 그러자, 벨리켄시오르 2세의 수호자, 히슬렌트는 수호자의 서약을 저버리고, 친구이자 주인인 황제를 구하기 위해 루테네르로 돌아왔단다. 스타르니올드의 밤하늘은 고요했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았어. 오랜 전투와 행군에 지친 프레이의 침략자들은 방심했고, 수호자는 그 방심을 놓치지 않았지. 히슬렌트는 어디선가 몰고 온 군사를 이끌고, 산맥 너머에서 내려와 프레이의 침략자들을 급습했지. 밤중에 기습을 당한 프레이인들은 황급히 저항했지만, 수호자를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네. 스타르니올드 내부에서도 황제가 직접 응원을 나와, 침략자들은 양쪽으로 포위당한 형국이 되었어. 결국, 침략자들의 왕 게드브렌트가 히슬렌트의 손에 쓰러졌고, 침략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지. 아침이 되자 루테네르의 수호자는 수십 년 만에 스타르니올드에 돌아왔고, 모든 루테네르인들은 새벽의 값진 승리를 만끽했지. 하지만 히슬렌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네. 침략자들의 왕은 죽었지만, 아직 그의 추종자들은 살아있었지. 그들이 살아있는 한, 여전히 위협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수호자는 생각했다네. 그렇기에 채 반나절도 되기 전에, 수호자는 침략자들을 추격할 군사를 꾸렸고, 곧 직접 출정했지. 히슬렌트는 머지않아···.”


‘쾅’


벽 너머 들려오는 투박한 문고리 소리가 수녀의 이야기를 가로챘다. 수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헛기침을 했다. “누군가 온 모양이구나.”


“제가 나가볼게요.” 이안이 일어섰다. 수녀는 레몬 마멀레이드를 한 숟갈 떴다.


곧 이안이 다시 돌아와 수녀에게 말했다. “수녀님. 웨레스 씨에요. 드릴 말씀이 있데요.”


“그 녀석이 갑자기···? 그래. 내 방으로 오라고 좀 전해주렴.” 수녀는 세린의 부축을 받으며 흔들의자에서 일어났다. 이안은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로이는 그저 조용히 의자에 앉아 화로를 바라보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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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3 마병철
    작성일
    21.01.16 05:01
    No. 1

    재능은 참 잔인 한 것 같아요 :( 그리고 상대가 재능에 대해 순수할 수록 혼자 가지게 되는 열등감은 더더욱 커지고 날카로워지는 거 같아요. 개인적으로 제가 까마귀를 봤다면 뒤도 안 보고 도망쳤을듯 한데 말이라도 섞은 용기가 대단하네요 ~

    찬성: 2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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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마지막 장작 (9) 에리크 22.03.19 20 0 12쪽
79 마지막 장작 (8) 하인츠 22.02.26 14 0 12쪽
78 마지막 장작 (7) 아라기 22.02.19 16 0 8쪽
77 마지막 장작 (6) 하란 22.02.12 14 0 7쪽
76 마지막 장작 (5) 로나트 21.11.13 26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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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마지막 장작 (3) 아라기 21.09.04 25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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