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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진

검마가 독고구검으로 무쌍찍음

웹소설 > 작가연재 > 무협

의진™
작품등록일 :
2024.03.06 06:20
최근연재일 :
2024.03.26 20:30
연재수 :
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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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13,311

작성
24.03.09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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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죽음은 늘 각오하고 있었소

DUMMY

허공에 일렁이는 작은 불꽃.


차가운 두 자루의 검끼리 부딪치며 일으키는 불티가 좌중에 내려앉은 침묵을 연료 삼아 고요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직 귀청을 찢어발기는 거센 파열음만 울려 퍼질 뿐, 숨결을 내뱉는 작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할 반응은 아니었다.


강호의 어느 누가 이 말도 안되는 승부를 앞에두고 쉬이 입을 나불댈 수 있겠는가.


어디서 굴러먹다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뜨내기 칼잡이와 점창을 대표하는 절대 고수가 검을 맞대다니.


애초에 성사조차 되지 않을 싸움이었다.


권태로운 날들에 지친 나머지 변덕을 부려 도전을 받아들였다고 한들 진즉에 끝이 났어야 할 일방적인 승부가 펼쳐져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의 싸움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그들이 치른 경합이 벌써 열 수를 넘기고 있었음에도.


다섯 수 안에 승부가 판가름 낫다면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압도적인 승리였으리라.


그러나 열 번의 경합을 넘어섰음에도 여전히 판가름 짓지 못했다는 의미는 곧 두 사람의 실력이 우위를 논하기 어려운 호각을 이룬다는 뜻이리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노쇠하여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이 무뎌졌다고 한들 호랑이는 여전히 호랑이다.


산중 모든 짐승들을 발 아래로 두는 산군(山君)이 어찌 한낱 먹잇감과 비등할 수 있겠는가.


그 말은 즉, 저 흑의(黑衣)의 사내가 범 무서운줄 모르고 달려드는 하룻강아지가 아닌 노인과 같은 맹수라는 의미이리라.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만약 그들의 사투를 지켜보는이들이 점창의 이름을 짊어진 무인들이 아니었다면.


아무런 관계로 엮이지 않아 평범하게 관망할 숭 있는 그런 강호인들이었다면.


이토록 깊은 좌절감을 느끼지는 않았으리라.


부운검성(浮雲劍聖)이 누구인가.


구파일방의 말석이나 차지하고 있던 점창을 당대 중원제일검문(中原第一劍門)을 앞다투고 있던 무당과 화산에 어깨를 견주게 만든···.


일선에서 물러나 검을 내려놓기 전까지는 강호 십대 고수라 손꼽히던 점창파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자긍심이 아니었던가.


그런 존재가 이토록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점창의 무인들은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모습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후배들의 마음이 무색하게도 부운검성, 일광은 현재의 싸움에 더없는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이정도는 되어야지···.’


크게 들이마쉬는 호흡.


폭발적인 속도를 내기 위한 작은 물러남.


일광이 그려내는 일(一)자의 초승달은 얇고 빠르게 도려내기 위한 갈고리와 같았다.


오로지 쾌(快)에 온 신경을 쏟아낸 가벼운 일격이었으나 그 검 끝은 먹잇감을 노리는 매의 부리처럼 더없이 날카로웠다.


찰나를 가르며 심장을 꿰뚫기 위해 날아드는 일검.


그러나 그 결과는 지금까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진양은 일광의 육신이 보내는 작은 신호를 간파해내어 한 발자국 먼저 앞서 움직였다.


공중으로 치닫는 높은 도약.


그리고 일광을 향해 내리꽂치는 육중한 공격.


단순히 막아내거나 피해낸 것이 아닌, 공격을 공격으로 파훼하는 파죽지세(破竹之勢)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일광 역시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진양의 일격에 응수했다.


짙은 잔상을 남기는 역동장.


뻗어 나가던 흐름을 억지로 통제해낸 일광은 자신을 향해 추락하는 거대한 쐐기를 그대로 올려베었다.


풍압을 일으키는 강렬한 충돌.


서로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한 두 사람의 검무(劍舞)는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수십 번의 합 끝에 마침내 도달하게 된 결론.


상대를 죽이기 위해 휘두르고 내지르는 지독한 살검(殺劍)이 내놓을 수 있는 결과는 오로지 하나뿐이었으니.


“기어코 이 노부(老父)가 마지막까지 감춰놓은 비장의 수를 읽어냈구나···.”


입 밖으로 쏟아내는 검붉은 핏덩어리.


그럼에도 일광의 표정에는 흐뭇함이 담긴 미소가 차오르고 있었다.


“스승께 점창의 검에 대한 가르침을 하사받을 때, 소인에게 줄곧하셨던 속임수였습니다.”


“과연···, 그는 거기까지 내다보고 있었던게야.”


일광이라는 한 검수가 검의 길을 걸으며 마주할 수 있었던 무학(武學)의 마침표.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기술, 줄곧 감쳐왔던 결말이었다.


하나, 이 젊은 사내는 기어코 일광이라는 책을 꺼내들어 마지막 문장까지 읽어내고 말았다.


“참으로 훌륭한 파검식(破劍式)이었느니라.”


일광의 찬사에 진양은 그의 가슴팍에 꽂혀있는 장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이내 스러져가는 위대한 무인을 향해 예를 표했다.


“노장(老將)의 가르침 덕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흐려지는 시야 속 겹쳐지는 모습.


그것은 오 십여 년 전, 자신의 무릎을 꺾었던 검의 잔향(殘香)이었다.


‘훌륭한 쾌검이었다. 하지만 그 마지막이 조금 아쉽더군.’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을 따라서 휘발되는 기억들.


그럼에도 어떠한 것들은 마치 조금 직전에 겪었던 일처럼 잊혀지지 않고 생생이 떠오르는 법이다.


‘귀하에게 패배한 검일 뿐이오. 이만 죽여주시오.’


무공을 완성했다 생각했던 이래 처음으로 겪었던 패배였다.


‘호오···. 대게는 살려달라며 목숨을 구걸하는데 네 녀석은 구태여 죽여달라고 말하는구나.’


자신을 바라보던 그 호기심어린 눈빛은 아직까지 잊을 수 없었다.


‘승패(勝敗)는 병가상사(兵家常事)일 뿐, 강호에서 살아가기로 결심한 그 순간부터 죽음은 늘 각오하고 있었소. 단지 그 순간이 찾아왔을 뿐이오.’


당시에는 무인으로서 당당하고 떳떳하게 눈을 감고 싶었다.


그러나 그 사내는 자신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점창의 검은 고고하고 강대하다. 장엄하게 펼쳐진 점창산의 절경을 담아낸 기상은 화려한 쾌(快)를 그리나 그 검 끝에는 대자연만이 줄 수 있는 웅장함이 깃들어있지. 네 놈을 비롯한 작금의 점창은 그 웅장함을 잊었다. 그러니 다시 만나는 그 날, 점창이 잃어버린 웅장함을 보여다오.’


죽음 대신 건네는 조언.


그리고 기대감.


그때의 일광은 물었다.


어째서 자신은 죽이지 않느냐고.


다른 사형제(師兄弟)들의 목숨은 모조리 목숨을 앗아갔으면서 왜 점창을 대표하는 자신은 살려두느냐고.


‘경험상 목숨을 구결하는 대신 죽여달라고 하는 놈들은 대체로 스스로의 과오를 바로잡을 수 있더라고.’


뜻모를 웃음.


일광이 그 미소에 담긴 의미를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적지않은 점창의 무인들이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고.


하늘높은줄 모르고 치솟던 점창의 위상은 그날부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점창은 되살아날 수 있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척 하고 싶었다.


강호의 십대고수라 손꼽히는 부운검성(浮雲劍聖).


그 눈부신 업적이 점창의 이름을 좀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신의 검을 완성시키기 위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주변을 살피지않고 고독하게 내달렸다.


스스로의 대성(大成)이 본문의 영광을 빛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해 도문(道門)으로서 점창은 망가지고 말았다.


속세를 멀리하고 평생토록 도(道)를 수양해야할 도문(道門)의 제자들이 재물을 취하고 권력을 탐했다.


무(武)로서 협(俠)을 행해야할 무인들이 사사로운 탐욕에 눈이멀어 강호의 도리를 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의 만행을 비난할 수 없었다.


점창의 이름 앞에는 부운검성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버티고 서있었으니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점창은 검마(劍魔)의 검 끝에 피를 흘린 후에 부활할 수 있었다.


명문의 재건이라는 목표아래, 제자들은 뜻을 모아 수련에 전념했다.


속세의 화려한 불빛을 거부하고 초야(草野)에 틀어박혀 검으로서 스스로를 혹사시키기 시작했다.


협(俠)을 관철하기 위해 무(武)로서 도(道)를 수양하는 이상적인···.


일광이 아끼고 자랑스러워 했던 가장 점창다운 모습.


그제야 일광은···.


강호에 십대고수라 이름을 떨치던 부운검성은 깨닫게 되었다.


검마는 점창의 썩은 부위를 도려내고 새생명을 불어넣어준 귀인이라는 것을.


비단 점창뿐만이 아니었다.


강호를 떠받치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이른바 명문이라 불리는 이들은 하나같이 검마의 칼아래에서 갱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검마를 부정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공동의 적이 존재했기에 땅바닥에 떨어진 강호의 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었으니까.


은혜를 되갚기는커녕, 오히려 탓하고 손가락질할 수 밖에 없는 죄인.


강호는 그에게 빚을 진 부끄러운 죄인이었다.


“···또 다시 은혜를 입고 마는구나.”


머릿속을 스쳐가는 옛기억들에서 벗어난 일광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은혜를 갚지도 못했는데···.


아직 죗값을 치르지도 못했는데···.


또 이리 받기만 하는구나.


검마가 휘두르던 무공과 검을 거머쥔 채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젊은 청년.


이는 곧 오 십여 년 전 그때처럼 강호의 기강이, 점창의 눈빛이 흐려졌다는 의미일 터.


어쩌면 다행이라 말할 수 있었다.


작금의 점창을 되살리는데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다시 만나는 그 날, 점창이 잃어버린 웅장함을 보여다오.’


일광은 묻고 싶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보였던 그 검은 정녕 당신이 말하던 웅장함을 되찾았던 것이었느냐고.


오랫동안 품어왔던 이 검이 점창의 부활에 이바지될 수 있는 것이느냐고.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일광을 쓰러트린 것은 검마, 장본인이 아닌 그의 의지를 계승한 제자에 불과했으니까.


“노장의 검은 고고하고 강대했습니다. 장엄하게 펼쳐진 점창산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 쾌(快)를 그림과 동시에 그 웅장함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소인이 노장께서 상대하신 마지막 검이었다는 사실을 평생토록 자랑스레 여기겠습니다.”


그런가···.


다시 만나는 그 날은 당신이 아닌 제자를 뜻하는 것이었나.


그렇다면 나는 마침내 당신에 보여준 것이구나.


웅장함을 되찾은···.


사사로운 탐욕에 눈이 먼 무딘 검이 아닌, 진짜 점창이 추구하던 검을···.


다시금 토해져나오는 검붉은 핏덩어리.


그리고 호탕한 웃음.


자신의 촛불이 영영꺼져가고 있었으나 두렵거나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더없이 자랑스럽고 기쁘기 그지없었다.


진정한 의미의 완성.


부운검성이라는 한 명의 무인으로서.


일광이라는 도호(道號)로 살아가던 도사로서.


이 순간 그는 점창을 위해 완성될 수 있었다.


“점창의 제자들은 듣거라!”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맞이하는 회광반조(廻光返照)의 순간.


일광은 도관에 모여있는 모든 이들에게 마지막 내력이 담긴 사자후(獅子吼)를 퍼트리고 있었다.


“점창의 제자, 부운검성 일광은 치열한 생사결(生死結) 끝에 목숨을 잃는다! 하나, 잊지말거라! 점창의 검이 약한 것이 아닌 나, 일광의 검이 약했기에 진 것뿐이다!”


좌중을 압도하는 비장한 목소리.


그것은 점창의 어느 도사가 후학(後學)들에게 남기는 진심 어린 유언이었다.


“작금의 점창은 약하다. 약했기에 진 것뿐이다! 그러니 당당하게 패배를 받아들여라. 너희들이 정녕 협을 추구하고 도를 수양하는 점창의 제자들이라면 이 노부를 비롯한 본문의 무인들과 정정당당하게 실력을 겨루고 승리를 거둔 이 사내를 보내줄 것이라 믿는다!”


망자의 목소리는 살아있는 자의 목소리보다 무겁다.


하나, 죽어가고 있는 이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부탁은 감히 비교할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점창은 진양에게 오늘의 핏값을 물을 수 없었다.


적어도 그들이 일대일로 당당하게 진양의 검을 꺾을 수 없는 한은.


주변을 살펴보던 일광은 다시 진양을 향해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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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하늘을 우러러 떳떳할 수 있겠습니까? +1 24.03.25 313 9 11쪽
21 애정인가 아니면 죄책감인가 +2 24.03.24 416 9 12쪽
20 직접 알아내도록 하지 +2 24.03.24 460 10 11쪽
19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로구나 +2 24.03.23 511 10 11쪽
18 크나큰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이다 +2 24.03.22 532 12 12쪽
17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2 24.03.21 590 10 10쪽
16 너희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6 24.03.20 607 10 11쪽
15 그래야할 이유가 있나? +2 24.03.19 648 13 12쪽
14 더이상 보여줄 것이 없다면… +2 24.03.18 690 12 12쪽
13 재롱은 끝났나? +2 24.03.17 710 14 11쪽
12 또 다른 누군가의 역사를 베어냈다. +2 24.03.16 765 12 11쪽
11 네놈들은 항상 그런 식이다! +3 24.03.15 826 16 11쪽
10 결국 모든 길은 일법만상(一法萬象)이자 만법귀일(萬法歸一)로 이르는 법 +2 24.03.14 861 16 11쪽
9 여주인공이 되기 전에 확실히 죽여야만 한다고! +2 24.03.13 899 16 12쪽
8 의협심(義俠心)따위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2 24.03.12 943 18 12쪽
7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2 24.03.11 1,000 17 12쪽
6 그 사내가 마음에 든 것이냐? +2 24.03.10 1,135 15 13쪽
» 죽음은 늘 각오하고 있었소 +4 24.03.09 1,244 18 12쪽
4 전부 죽여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2 24.03.08 1,421 23 11쪽
3 호랑이는 결코 고양이를 거두지 않는다 +2 24.03.07 1,739 23 13쪽
2 사람을 찾고 있다 +2 24.03.06 2,142 30 11쪽
1 서(序) +3 24.03.06 2,620 28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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