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가을밤의 격전 - 주은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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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세는 주은백의 여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건방지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위의 무사들이 모용세의 옆으로 모여 주은백을 압박해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주은백은 태연하게 서 있다.
“네놈은 누구냐?”
모용세가 주은백에게 물었다. 좀 전에 물어놓고 다시 또 묻는 것이다.
“좀 전에 묻지 않았소? 늙어 기억이 없는 것이오?”
“이름이 아니라 네놈 사문을 말하는 것이다. 어디 소속이냐?”
“소속은 없소. 혼자요.”
“스승이 있을 것이 아니냐? 네놈 스승이 누구냔 말이다.”
모용세는 분노가 솟아 올랐지만 흥분하지 않으려 애썼다. 분노는 승부에서 독毒과 같은 것이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약藥이기도 했지만.
“내 스승님을 당신이 알 이유는 없소. 설사 말한다고 해도 당신이 아실 분이 아니오.”
주은백의 대답은, 듣기에 따라선, 모용세가 스승의 이름을 들을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리고 모용세는 실제로 그렇게 들었다.
“쳐라”
모용세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호위 무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주위 무사들에게만 공격 명령을 내린 것이다.
모용세 좌우 양 옆에서 각 한 명씩의 무사가 주은백의 상체와 하체를 각각 노리고 찔러왔다.
이번에도 주은백의 움직임은 그리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흐릿한 움직임이 보이는 듯도 했는데정확히 포착하긴 어려웠다. 사람들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또 한번의 바람이 일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윽···
큭~
두 명의 무사가 단발마의 신음소리를 내며 각기 옆으로 털썩 쓰러져 내렸다.
‘빠르구나’
모용세는 속으로 적잖게 놀랐다.
이번에는 네 명의 무사들이 주은백에게로 한 발짝씩 다가서고 있다.
쉽게 쓰러져간 동료를 생각하는지 섣불리 공격해 오지 못했다. 그러나 통상 여럿 중에 한둘은 꼭 공명심이나 과잉충성에 눈이 멀어 객관성을 상실한다. 하나의 사내가 다시 주은백의 얼굴로 검을 찔러 온다. 깊숙하게 찔러 오는 것이 아니다. 상황 봐서 언제든지 뒷걸음을 치겠다는 소극적 공격이다. 객관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소극성도 헛되어 버린다.
으윽~
이번의 신음은 조금 길다. 하지만 쓰러져 버리는 모습은 앞 선 사내들과 다를 바 없다.
동료의 죽음은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지만 용기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나머지 셋이 동시에 주은백에게로 검을 날려왔다.
튕~튕~푹···
두 개의 검이 튕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는 튕겨지지 않았다. 조그맣게 들렸지만 튕겨지지 않은 하나의 검이 살에 깊이 박히는 소리를 냈다.
‘하나는 성공한 것인가?’
모용세는 공격하는 수하들의 뒤에 있었고 검이 튕겨진 두 명의 수하들이 손아귀가 찢어져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튕겨지지 않은 검을 가지고 있는 수하는 주은백과 모용세의 중간 위치에 있었기에 모용세는 수하가 검을 앞으로 뻗고 있는 자세만을 뒤에서 볼 수 있었다. 정말 성공한 것인가? 믿고 싶었지만 내심 그럴 리가? 하는 의문이 더 강하게 들었다. 자신 호위무사들의 실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대임을 이제는 알고 있지 않은가?
털썩~
아니나다를까 호위 무사가 쓰러져 내린다. 주은백이 검을 앞으로 뻗고 있었다. 살을 파고 들었던 검은 주은백의 것이었다.
모용세는 내가 내 수하들을 믿지 못해 결국 이렇게 되었나? 좀 전 순간에 내가 좀 더 수하들을 믿었더라면 성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했다.
열댓 명의 호위무사 숫자가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대다. 그들과의 격차가 너무 컸다. 격차가 조금씩 벌어질수록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해 필요한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자에게 호위무사의 숫자는 그저 약간의 시간을 벌어 주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내가 직접 나설 것인가? 아니면 시간을 벌면서 팽가주가 불측은비를 꺾고 자신을 도와주러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다행이 저 놈이 먼저 움직이려는 마음은 없는 듯 하다.
모용세가 검을 겨눈 채 움직이지 않고 있다. 아마 생각을 가다듬고 있으리라.
주은백은 들고 있던 검을 내려 검첨이 땅을 향하게 하고 섰다. 충분한 시간을 주어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끔 할 생각인 듯했다. 주은백에게도 옛 기억이 흐릿하게 피어 오른다.
주은백이 스승님을 따라간 후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때다.
고된 오전 수련을 마치고 주먹밥으로 점심을 막 때운 후, 이제는 제법 또랑또랑한 눈빛을 내고 있는 어린 주은백이 스승과 나란히 산 정상에 걸쳐 앉았다.
“은백아, 바람이 시원하느냐?”
스승님이 물었다.
“예. 땀을 흘린 뒤라 더욱 시원합니다.”
“그래~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구나. 바람이 보이느냐?”
“보이진 않습니다만 저기 나뭇잎이 흔들리고 있으니 저 즈음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 주은백이 당차게 대답했다.
“그래~ 우리 은백이가 똑똑하구나. 나뭇잎은 흔들리지만 바람은 여전히 볼 수가 없구나. 바람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단다. 하지만 누구나 바람이 분다는 것을 알고 있지. 바람은 상대를 통해서면 보인단다. 아니 존재한단다. 바로 코 앞에 바람이 있어도 내 얼굴에 바람이 닿지 않으면 바람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 바람을 벨 수 있겠느냐?”
“···”
어린 주은백이 대답 없이 스승의 눈을 바라봤다.
“허허~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 벨 수 있겠느냐? 바람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상대는 바람을 맞은 후에야 바람의 존재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은백이가 익히고 있는 무공이 그러한 것이란다. 허허허”
할아버지의 말씀을 어린 주은백은 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 배우고 있는 무공이 바람처럼 오묘하고 강한 것이라고.
모용세는 아직도 그대로 서 있다.
주은백이 고개를 돌려 옆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서은후를 바라 본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수십 개의 비수들이 상하종횡으로 날며 팽윤기를 위협하고 있었다. 팽윤기에게 지금은 지옥 같은 순간이겠지만 주은백이 보는 광경은 아름다웠다.
수십 개의 비수들이 허공을 날며 달빛을 꽃가루처럼 뿌려댔고 별빛을 이슬처럼 흘렸다. 실로 밤하늘에 하얀 눈꽃이 내리는 듯 보이기도 했다.
달 밝은 밤에 눈이 내릴 수 있겠는가? 그런 광경을 본 사람이 있겠는가? 지금의 광경은 그토록 역설적으로 아름다웠다.
팽윤기가 안간힘을 쓰며 도를 휘둘러 날아오는 비수를 쳐내고 있었다. 하지만 도에 튕겨진 비수들은 다시 방향을 바꾸어 팽윤기에게로 날아가거나 아니면 서은후의 품으로 날아왔다가 다시 팽윤기에게로 날아갔기에 팽윤기의 노력은 물거품 같았다.
서은후의 내공이 비수에 실려 있는 한 비수들은 서은후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듯 보였다. 비수에 담긴 서은후의 내공이 소진될 즈음 비수들은 어미 품으로 돌아오는 새끼들 마냥 서은후의 품으로 날아왔고, 곧바로 서은후의 내기를 품은 채 다시 팽윤기에게로 쏘아져 갔다.
주은백은 할머니가 상당한 고수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할머니의 비수들을 보고 있노라니 그 절륜하고 신묘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측은비라 했던가?’
과연 불측不測이었다.
중원에는 기인이사들이 강가 모래알처럼 많고 무공의 다양성이 중원 산 봉오리 수만큼 있다는 스승님의 말씀이 정녕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팽윤기는 허벅지와 어깨, 등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비수들을 쳐 내는 팽윤기의 도법 또한 고절하기 이를 데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승기를 놓쳐 버린 후라 기울어진 전세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세는 이미 명백해진 상태였다.
이윽고 불측은비 서은후의 비수들이 모두 서은후의 품으로 돌아와서는 더 이상 하늘을 날지 않았다.
“힘들다. 여기까지 하자.”
불측은비 서은후가 팽윤기를 노려본 후 돌아서 유혜연과 주은백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 온다.
서은후가 등을 돌렸지만 팽윤기는 말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네 놈도 끝난 듯 하니 이제 그만 가자.”
서은후가 주은백을 보며 말했다.
서은후의 말에 주은백도 검을 검집에 꽂아 넣고 아직도 둘 사이의 중간 즈음에 서 있는 유혜연에게로 걸어갔다.
앞에 있는 모용세는 바라보지도 않았다.
“괜찮으냐?”
서은후가 유혜연에게 물었다.
유혜연이 고개를 끄덕였고 셋은 그렇게 그 자리를 걸어 나갔다.
그들이 걸어 나가는 동안 어느 누구도 공격하지 않았고 몇 몇은 공간을 벌려 오히려 길을 틔어 주었다.
그때 까지도 모용세는 그 자세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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