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 전쟁 속으로(5)
"적이 물러난다! 우리가 승리했다!"
"우와아아아!"
칸타라 성의 병사들은 승리의 기쁨에 한껏 들떠 있었다. 가르투 병력이 점차 멀어짐에 따라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주목!"
우리에크가 크게 소리치며 병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뒤이어 루스카 백작이 한발 앞으로 나서며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자랑스러운 칸타라의 병사들이여!"
루스카 백작이 승리의 분위기에 정점을 찍는 연설을 시작하였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터전을 지켜내...!"
"저게 뭐야...?"
병사들이 루스카 백작의 연설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기 저기서 웅성 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병사들은 성벽 아래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스카 백작도 연설을 멈추고 성벽 아래를 보았다.
"왜 그래요? 뭔데?"
성벽을 올려다 보고 있던 라크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뒤를 돌아 보았다.
"아씨! 뭐야! 왜 일어서 있어!"
라크가 기겁을 하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라크가 돌아본 곳에는 카샤가 똑바로 일어서 있었다. 다만 머리는 없는 채로 몸통만 서 있는 기괴한 모습이었다.
"어우... 저건 또 뭐야... 뭐가 막 나와... 진짜 진상이네..."
카샤의 목에서 끈적거리는 검은 액체가 꿀렁 거리며 흘러 나왔다. 액체는 카샤의 머리가 떨어져 있는 방향으로 마치 연체 동물이 움직이듯이 꾸물거리며 전진했다.
휘리릭— 척—
카샤의 머리에 도달한 검은 액체가 머리를 삼기듯 감쌌다. 그리고 몸통으로 빨려 들어가듯 검은 액체가 순식간에 수축을 했다. 카샤의 머리가 어깨 위에 얹어지고 언제 잘라졌냐는 듯이 다시 붙어 있었다.
스르륵—
머리와 몸통이 다시 합체한 카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진짜... 가지 가지 하네. 나 이런 거 싫어한다고. 나한테 왜 이래..."
다시 눈을 뜬 카샤는 흰자위가 보이지 않았다. 온통 검은 색으로 채워진 기괴한 눈으로 카샤가 라크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쩌억—
그리고 카샤의 이마 중앙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또 다른 눈이 생겨났다.
"에라이... 씨팔... 진짜. 너무하네."
라크는 절대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을 어쩔 수 없이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어 미칠 노릇이었다. 라크의 표정은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엘다... 저게 뭐야?"
아리스가 엘다에게 물었다. 엘다는 폭발로 날아가 버린 아리스가 괜찮은지 살피고 있었다.
"영물...이야."
"영물? 리꼬랑은 완전 다른데? 눈이 왜 저래. 징그러... 웩."
"아주 드물지만... 정신계 영물인 것 같아."
세 개의 눈을 모두 뜬 카샤가 자신의 팔과 다리를 살펴보고는 이리 저리 움직여 보았다.
"어휴— 죽는 줄 알았네. 너 여자한테 너무 한거 아니야? 머리를 그렇게 사정없이 날려 버리고 말야."
카샤가 라크를 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줌마... 그건 죽은 거야. 죽을 뻔 한게 아니고. 이 경우에는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게 맞지. 심성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합시다."
라크는 징그럽다는 표정으로 한껏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흥! 쪼잔하기는. 사소한 거에나 신경 쓰고. 별로인 남자였어. 그냥 죽어!"
쉬이익—
카샤의 등 뒤에서 검은색의 촉수가 뽑아져 나왔다. 촉수는 빠르게 라크를 향해 날아갔다.
깡!
"잌!"
바즈라로 촉수를 막아낸 라크의 손에 저릿한 충격이 전해졌다. 그리고 촉수에 닿는 순간 오러가 뭉텅 빠져나가는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다.
카샤의 등 뒤에 여러 개의 촉수가 뽑아져 나와 꾸물거리고 있었다.
쉬익— 쉭— 깡! 깡!
카샤의 촉수 공격이 또 다시 날아왔다. 이번에도 라크는 촉수를 바즈라로 후려치며 막아 내었다. 그리고 라크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촉수가 닿을 때마다 오러가 뭉텅 뭉텅 빠져나가고 있었다.
"역시 젊고 싱싱해. 맛있네. 게다가 짜릿 짜릿하기까지... 죽이기 또 아까워 지는 걸."
"악취미네. 아줌마. 내가 보약 파우치인 줄 아나..."
쉬익— 쉭— 쉭—
라크를 보며 입맛을 다신 카샤가 촉수를 뻗어내었다. 라크가 이번에는 촉수를 막아내지 않고 피해 버렸다.
피잉— 꽈앙!
그 때 카샤의 등 뒤로 엘다의 화염식가 날아와 꽂혔다. 화염시는 카샤에게 명중하며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카샤가 폭발의 충격으로 허공을 날아갔다.
휘릭— 촤악!
허공에 떠 있는 카샤를 향해 리꼬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솟아 올랐다. 리꼬가 카샤의 몸통을 가르듯이 지나갔다. 카샤의 몸통에서 검은 색의 끈적이는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붕—
라크가 날아 올랐다.
퍼엉!
카샤 보다 더 높이 뛰어 오른 라크가 바즈라를 있는 힘껏 아래로 내리치며 카샤를 가격했다.
꽝! 꽈광! 꽝! 쿠당탕—
라크의 일격에 땅바닥에 내려 꽂히듯이 내동댕이 쳐진 카샤에게 강력한 전격이 내리쳤다. 카샤가 고무공 처럼 바닥을 튕기며 날아갔다.
"후아— 역시 다구리 킹왕짱."
라크가 개운한 표정으로 이마를 닦아내며 카샤가 날아간 방향을 보았다.
"아... 진짜... 징글 징글하다. 아줌마..."
라크의 표정이 바뀌며 진저리를 쳤다. 카샤가 삐걱거리며 다시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샤의 등판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몸통을 가로지르는 이빨 자국에서는 검은 액체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팔다리는 두 개 정도 부러져 있는지 몸을 똑바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후두두둑— 스르륵—
하지만 금세 부러진 뼈는 맞춰졌고 상처도 아물었다. 등판의 구멍도 깨끗하게 메꿔졌다.
"아... 이번에는... 위험했다. 아... 배고프다. 아... 배고프다. 아..."
상처를 완전하게 회복한 카샤가 입을 열었다. 상처는 회복되었지만 카샤의 상태는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무언가 조금 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카샤의 이마에 생겨난 눈이 한층 더 붉게 빛나고 있었다.
피잉—
엘다의 화염시가 다시금 카샤를 겨냥하고 쏘아졌다. 엘다는 이번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엘다의 직감이 지금 확실하게 카샤의 숨통을 끊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꽈앙!
하지만 무언가가 빠른 날아와 카샤를 향해 쏘아진 화염시를 중간에 막아내었다. 화염시를 막아 낸 것은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기사의 가슴에는 붉은 눈을 가진 용이 새겨져 있었다.
"단... 장... 님... 나... 배... 고.... 파..."
카샤가 검은 기사를 보며 말했다. 검은 기사는 카바인 왕이었다.
"탐식. 들어가라."
"싫... 은... 데..."
카바인 왕이 명하자 카샤 이마의 붉은 눈이 감기더니 사라졌다. 붉은 눈이 사라짐과 함께 카샤도 중심을 잃고 한 쪽으로 쓰러졌다.
카바인 왕이 잠시 카샤를 바라 보았다가 라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저씨. 갑옷 멋지네. 나도 그 갑옷 아는데..."
라크가 카바인 왕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용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라크라고 했던가..."
"만나서 반가워. 그동안 많이 궁금했는데 이렇게 만나네."
라크가 카바인 왕에게 인사하며 바즈라를 고쳐 잡고 자세를 잡았다.
"인사는 나중에 하고... 일단 좀 맞고 시작하자고!"
붕—
라크가 번개같이 움직이며 카바인 왕을 향해 바즈라를 휘둘렀다.
채앵— 치이이익—
하지만 라크는 카바인 왕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뒤로 밀려나 버렸다. 카바인 왕이 자신의 키만 한 장검을 휘두르며 라크를 튕겨내었기 때문이다.
"다음 기회에 보도록 하지."
카바인 왕이 쓰러져 있는 카샤를 어깨에 짊어 지며 말했다.
"누구 맘대로!"
라크가 다시 한 번 카바인 왕을 향해 돌진했다.
피잉— 촤악—
라크가 돌진하는 동시에 엘다의 화염시가 카바인 왕을 향해 날아들었고 리꼬 역시 카바인 왕의 그림자에서 솟구쳐 올랐다.
퍼억—
카바인 왕이 그림자에서 솟아 오르는 리꼬를 다리로 걷어차 날려버렸다.
쉬이익—
그리고 리꼬를 걷어 찬 다리를 그대로 땅에 강하게 디디며 대검을 휘둘렀다. 카바인 왕의 대검은 횡으로 원을 그리며 빠르게 휘둘러졌다.
그리고 대검은 휘둘러진 궤적 그대로 어마 어마한 크기의 검기를 쏘아내었다.
꽈앙—
카바인 왕의 검기와 화염시가 충돌하며 폭발을 일으켰다.
"우왁!"
꽈앙— 쿠당탕탕—
라크 역시 검기를 막아내고는 뒤로 날아가 땅바닥에 패대기 쳐졌다.
"아오... 튀었네..."
바닥을 튕기듯이 재빨리 다시 일어난 라크가 카바인 왕이 있던 자리를 확인하며 말했다. 카바인 왕은 라크와 엘다, 리꼬의 합공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키고는 카샤를 데리고 사라졌다.
뿌우우우—
저 멀리서 가르투 병력이 퇴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에 보자고..."
라크가 멀어져 가는 가르투 병력을 보며 말했다. 라크는 왜인지 머지 않아 카바인 왕을 다시 만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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