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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월 이야기

깊은 상흔의 잔향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철의대화
작품등록일 :
2020.05.11 10:15
최근연재일 :
2023.02.2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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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7,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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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8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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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5화_담소 (談笑)

DUMMY

축축함이 베여 있는 날로 상대방의 의표를 찌르고, 이이서 선을 그어버린다.

그러자 선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시컴은 액체가 스믈므슬 베여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리자는 그런 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상대방을 찌르는 것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 지었다.


처리자는 똑같은 방식으로 벌써 수십의 상대를 처리하였으나, 그의 숨소리는 전혀 가쁘지 않았다. 대신 정신적으로 지쳤는지 영혼이 빠져나갈 듯한 한숨을 내쉬었고, 이어서 가로, 세로 30보폭의 책상이라는 전쟁터와 자신이 처리한 적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에스트 미호크는 아직도 처리한 서류들보다 처리해야 할 서류가 더 많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어제부터 사제의 명령에 따른 흑표 군단의 인사 개편 문제로 다른 행정병들이 하나 둘씩 차출되더니 이제는 혼자 남게 되어 ‘상승 행군’ 관련 인사 명령서를 모두 검토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분명 사제들의 쓰잘데기 없는 명령이나 검토 하고 있겠지.”


그렇게 신경질을 내며 다음 명령서를 검토하려던 순간이었다. 그의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에스트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는 대답을 했다.


“들어오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후임이 또 서류 뭉치를 들고 들어오는 것이라면 목을 조르기로 마음 먹은 에스트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의 후임 살인은 훗날로 미뤄졌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 어.. 무슨일?”

갈색 단발 머리에 서글서글한 눈매의 미엔 엘리느가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은 뒤 방안으로 들어와 여기저기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와.. 여기가 네 사무실이구나. 전용 공간이 있는줄 몰랐는데? 물론.. 창문이 없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차라리 없는게 낫거든. 퇴근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체감 하면서 일하는 것만큼 우울한 건 없으니까. 그건 그렇게 여긴 관계자외 출입금지인데?”


“아, 네가 외진을 요청했다고 앞에 계신 분한테 말하고 들어왔어. 그리고 실제로 진찰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아니야?”


산더미처럼 쌓은 서류와 자신을 번갈아 보는 미엔 앞에서, 에스트는 자신의 후임을 죽일 방법에 변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목을 조르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나 나를 생각해줬던 거야? 너무 고마운데.. 하지만 혹시 진짜 이유가 있다면 짝사랑으로 고백 후 차여서 스스로를 혐오하기 전에 말해 주지 않을래?”


“파하하하. 농담도! 그래.. 알았어. 사실 어떤 군부대에 의약품을 보내고 싶은데 말이야..”


“아, 그거라면 내 후임이 전문이지. 월영방국 각지로 하루에도 수십통씩 소포나 우편물을 보내거든.”


“흐음.. 그게 보낼 곳이 월영방국 내부가 아니라 외부거든. 그것도 카릿치오스 지방이라..”


그 말에 에스트는 한숨을 땅이 꺼져라 내쉬었다. 그리고는 잡고 있던 펜을 딱 내려 놓으며 눈 앞의 불청객을 올려다 보았다.


“미엔 엘리느. 나 머리 아픈거 딱 질색인데.. 이렇게 이해해도 될까? 바르나프 가(家)에서 흑표 군단의 소식을 궁금해 한다고.”


나름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 에스트였지만 그럼에도 생글생글한 미소를 잃지 않은 미엔이었다. 과연 내공이 상당치 않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에스트는 그녀의 다음 턴을 기다렸다.


“에이.. 바르나프 가에서 왜 흑표 군단의 소식을 찾겠어. 그저 궁금증이 많은 군의관이 군부대 납품할 의약품이 있을지 아니면 진료가 필요한 사람이 있을지 기웃거리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것뿐이지.”

미엔은 그렇게 말하면서 에스트 책상 맞은편에 형식상 놓여있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일개 군의관 따위가 잡다한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군의관은 환자 진료 및 치료 이외 할 수 있는게 없잖아. 대신 이런 저런 배경을 알고 있으면 환자분에 맞춰서 해야 될 말과 안해애 할 말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 수 있겠지.”


미엔의 이어진 말과 미소에는 씁쓸함이 베여 있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본 페니탈은 자신이 필요 이상의 날을 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바르나프 연락책이 군 내부에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그럼에도 사령부에서 크게 개이치 않는 이유는 미엔이 말한 바와 같앗다.


바르나프 가(家)에게 군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실질적인 힘은 없다.


사제들이 월영군의 내부 및 대외 전권들도 직간접적인 간섭을 했기 때문에 월영군 스스로도 실질적인 힘이 없다고 평가하는 실정이니, 아무리 민간 자본력의 정점에 있는자라 해도 다를바 없다는 생각이었다.


“좋아. 하지만 나랑 이야기 해서 진료에 도움이 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애초에 왜 이야기 상대가 나인거지? 만만해서?”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어떤 사소한 증상이든 알고 있는게 진료에 도움이 되니까. 그리고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내가 바르나프 가 출신 군의관이기 때문에. 그래도 그 만큼 실력엔 자신 있어서 네가 업무 편히 보도록 진료를 잘 할거라 생각하는데?”


미엔의 대답을 이해하는데 그리고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그녀의 뗄수 없는 꼬리표로는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한정적이라 자신이 선택 되었고, 대신 자신 또한 바르나프 측의 정보를 바탕으로 업무를 수월하게 볼 수 있지 않겠냐는 조건.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대화가 재밌지 않아?”

그리고 이어진 미엔이 말이 사실 본심이 아닐까라 생각이 든 에스트였다.


“글쎄.. 진료가 도움이 될지, 너랑 나누는 대화가 재밌을지는 더욱 모르겠는데?”


“그건 나도 처음이니 서로 모르는 건 피차 일반이지. 어때 한번 시험삼아 담소라도 나눠보는게?”


손해볼 것 없다고 생각하며 에스트는 최근 흑표군단 소식중 가장 쓸모없는 소식을 던져보기로 했다.


“사실 큰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현장에서 목재를 옮기다가 발을 찧은 병사가 있거든. 문제는 군과 관련된 현장이 아니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긴 해.”


미엔의 서글서글 한 눈매가 살짝 찡그려지자 이상한 쾌감을 느낀 에스트였고, 그 증상에 자신이 정말로 치료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라 생각이 들던 찰나였다.


“그 목재가 꽤나 무거울거라 큰 부상이 아닐까 걱정되네. 지지대로 쓰이는 용도로 공급 되었거든. 그런데 내가 알기로 그 공사 현장에 목공수들이 그리 만치 않아서 앞으로 그런 사고가 빈번할까 걱정이네.”


“...썩.. 괜찮은 진료네.”


사제들이 조금더 공병(工兵)스럽게 흑표군단의 인사 개편을 요청했기 때문에 다른 행정병들이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던 에스트였지만, 미엔의 말에 어느 정도 감은 잡히는 것이었다.


“그치? 이래뵈도 꽤 실력있다니까. 그럼 외래진료 차 가끔씩 방문 해도 되는거지?”


“.. 좋아. 하지만 불필요한 염문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 굳이 내 사무실로 올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런 염문은.. 안생길 테니 너무 걱정마.”


“이런.. 방금 그 말은 좀 상처가 되는데?”


에스트는 그녀를 최대한 배려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취향도 생각해 달라는 말을 참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나도 지루하지 않는 진료를 하려고 노력 할테니까.”


오늘은 인사치레 방문을 한 것이었는지 미엔은 특별한 말 없이 자리를 뜨려는 듯 했다. 그도 그럴것이 아직 카릿치오스의 일들은 이제 막 보고되는 시점이었기에 추가로 이야기 하고 싶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더 이상의 담소는 서로에게 불편한 것임을 에스트 또한 이해했고, 그렇게 미엔의 배웅을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참! 염문하니까 생각나는데..”

방문을 나서기 직전, 미엔은 깜빡 잊었다는 듯이 발걸음을 멈춰 뒤돌아섰고, 그 모습에 에스트는 살짝 불안해졌다.


“혹시... 최근에 벨로나 단장님에게 연인이 생겼다는 말... 들어본 적 있어?”


“뭐?! 풋,, 크하하,, 말도 안되는 소리!”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에스트는 요 몇 주내 가장 크게 웃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면 말고... 그래도 어때? 이런 담소도 나쁘지 않지?

인정해야 했다. 자신도 꽤나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여긴 편이었으나, 방금의 미엔의 말은 월영군의 신분으로서 자신이 가지는 한계를 뛰어넘는 말이었다.


“인정하지요, 좋은 진료였습니다. 미엔 선생님.”

끝까지 웃는 얼굴로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미엔을 배웅한 뒤, 에스트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업무를 시작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금 펜을 잡고 명령서 첫 줄을 읽으려던 찰나, 문득 그녀의 이야기가 마냥 헛소리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게다가 벨로나 단장의 나이와 또 계급장에 가려진 그녀의 외모를 생각했을 때, 당사자나 대상자 서로가 충족할 부분은 분명히 있었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던 에스트의 눈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 보고서는 ‘상승 행군’과 관련하여, 늘상 따라다니는 ‘취약시점 거점 방어 계획서’였다.

최전방의 군단 교체가 완료 될 때까지, 월영시 전방 초소에 수색대가 투입되는 작전으로 항상 벨로나 단장의 인솔하여 이뤄지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 어느 하나 허투루 작성된 내용은 없었으나, 에스트의 눈에 머문 것은 다름아닌 인솔자 벨로나 세라트너 옆란의 부 인솔자의 이름이었다.


‘카니엘 시닉스’


그 순간, 다시금 에스트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가 대답도 하기 전에자신의 후임이 서류 한 뭉탱이와 함께 들어왔다.

그 모습에 한 마디를 할까 했던 에스트는 후임의 지쳐있는 표정을 보고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대신, 업무의 효율성을 위해 선임자로서 나서야겠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띤채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야! 지친 업무를 날려줄 재미난 소문하나 알려줄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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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4장 - 개벽(開闢)_1화_ 선고 (1) 20.06.05 66 4 10쪽
34 3장 - 효시(嚆矢)_5화_전조_(2) +2 20.06.04 67 4 12쪽
33 3장 - 효시(嚆矢)_5화_전조_(1) 20.06.03 62 3 12쪽
32 3장 - 효시(嚆矢)_4화_구금소 (2) 20.06.02 60 3 7쪽
31 3장 - 효시(嚆矢)_4화_구금소 (1) 20.06.02 63 3 9쪽
30 3장 - 효시(嚆矢)_3화_만인의 적이 지나가는 길(3.끝) +2 20.06.01 60 3 9쪽
29 3장 - 효시(嚆矢)_3화_만인의 적이 지나가는 길(2) 20.06.01 62 3 11쪽
28 3장 - 효시(嚆矢)_3화_만인의 적이 지나가는 길(1) +2 20.05.31 65 4 8쪽
27 3장 - 효시(嚆矢)_2화_하늘층 회의(2) +1 20.05.29 71 4 12쪽
26 3장 - 효시(嚆矢)_2화_하늘층 회의(1) 20.05.29 73 4 7쪽
25 3장 - 효시(嚆矢)_1화_무언 마법사의 조우 20.05.28 77 4 10쪽
24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8화_일체일념(끝) 20.05.28 83 3 11쪽
23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8화_일체일념(4) +1 20.05.25 89 5 10쪽
22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8화_일체일념(3) 20.05.25 85 4 9쪽
21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8화_일체일념(2) +2 20.05.22 91 6 7쪽
20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8화_일체일념(1) 20.05.22 95 5 8쪽
19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7화_ 별빛과 망루(2) 20.05.21 109 5 10쪽
18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7화_ 별빛과 망루(1) +1 20.05.21 102 7 7쪽
17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6화_ 거점 투입 20.05.19 116 5 11쪽
»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5화_담소 (談笑) +1 20.05.18 132 6 10쪽
15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4화_월몰 기도식 20.05.18 121 6 9쪽
14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3화_스승과 제자(2) 20.05.16 133 5 10쪽
13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3화_스승과 제자 20.05.15 177 8 9쪽
12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2화_흠결 20.05.15 176 6 7쪽
11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1화_만인의 죄인 20.05.14 282 7 12쪽
10 1장 - 악몽(9) 20.05.14 248 6 12쪽
9 1장 - 악몽(8) 20.05.13 258 6 11쪽
8 1장 - 악몽(7) 20.05.13 290 7 8쪽
7 1장 - 악몽(6) 20.05.12 300 7 7쪽
6 1장 - 악몽(5) +2 20.05.12 399 1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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