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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유니버스

두억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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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작품등록일 :
2012.10.08 21:24
최근연재일 :
2017.03.14 08:26
연재수 :
1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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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256
글자수 :
97,337

작성
16.12.23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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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글자
13쪽

Target. 01: 도화선 (7)

DUMMY

태일은 산장을 빠져나와 10분 정도를 더 달리다가 한적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사후 처리업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천. 네, 이번에도 부탁하겠습니다. 차 상태는 좋은 편입니다.”

편 사장(본명은커녕 정말로 성이 ‘편’씨인지도 알 수 없다.)이라고 불리는 처리업자는 태일의 위치를 묻고는 늦어도 20분 안에는 도착하겠다고 했다.

태일은 시계를 보며 가급적 서둘러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의례적인 당부였다. 지금껏 네 번의 거래를 하는 동안 그가 시간약속을 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태일은 전화를 끊고 에쿠스에서 내려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이른 시각이고 외진 장소라 그런지 가끔 매연과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화물트럭 외에는 다행히 오가는 차량은 거의 없다.

근처에 농가라도 있는지 별안간 닭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디쯤인지 방향을 가늠하려고 두리번거리는데 저쪽에서 편 사장이 레커차를 끌고 나타났다.

태일이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한 시간보다 3분이 이른 17분만이었다.

편 사장은 레커차를 에쿠스 앞에 바짝 붙여서 세우더니 차창 밖으로 꼬챙이처럼 깡마른 몸을 내밀고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차에서 내려 ‘물건’ 상태부터 살폈다.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한참이나 차를 살펴보던 편 사장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이야, 에쿠스였네.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깔삼한 놈일세. 공장에서 갓 뽑았나본데 심장소리도 제법 튼튼하고. 몇 킬로 뛰지도 않았구먼. 상태가 양호하네. 도장은 다시 안 해도 될 것 같고 번호판만 갈아치우면 밥값은 하겠는데?”

편 사장은 만면에 웃음을 가득 머금으며 레커차로 가서 신문지로 싼 돈뭉치를 가지고 돌아왔다.

“옛쑤, 차량 대금. 이번 놈은 아주 싱싱해서 맘에 드는 구랴. 항상 이런 놈이 걸렸으면 소원이 없겠네.”

태일은 건네받은 돈을 말없이 보스턴백에 넣었다. 흥정은 따로 하지 않는다. 어차피 가격은 정해져있다. 그리고 대금의 절반은 소령에게 거마비로 줘야 한다.

“어떻게, 서울까지 태워드릴까?”

편 사장이 물었다.

태일이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뭐 좋을 대로 하쇼. 나는 어차피 방향이 같으니 태워주려고 그랬지.”

편 사장이 에쿠스를 크레인에 걸고 레커차에 올라탔다.

태일은 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서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서울까지 걸어갈 생각은 아니다.

“다음에 또 봅시다!”

오 사장의 레커차가 태일의 옆을 지나갔다.

태일은 걸음을 멈추고 레커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꺼내 목록에서 ‘조영배’를 찾았다.

“아, 조형? 나 천인데 혹시 지금 손님을 태우고 있어? 그래? 그러면 이번에도 신세를 좀 질 수 있을까. 항상, 고마워. 여기 위치가······.”

영배는 개인택시를 모는 친구로, 태일과는 두 해 전에 우연히 알게 된 사이다. 그동안 몇 차례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친분을 쌓은, 태일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소수의 사람 중 하나다. 나이는 태일보다 두 살 어리지만 격식을 따지지 않고 그냥 말을 놓고 지냈다. 그는 태일과 달리 매우 유쾌하고 인정이 많은 사내다. 가끔 지금처럼 교통편이 필요할 때 연락하면 어디든 상관없이 흔쾌히 택시를 몰고 찾아와준다.

태일은 보스턴백을 들고 서울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그렇게 30분 남짓 걸었을 때, 맞은편에서 영배의 택시가 달려왔다. 은색 SM5 신형모델. 처음 만났을 때는 회색 소나타 구형 모델이었는데 작년에 차를 바꿨다.

운전석의 영배가 태일을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영배는 종종 동남아 사람으로 오인 받을 정도로 피부가 유난히 까만 편이었다.

“오랜만이네, 천형. 지난번 이후로 처음이니까 아마 석 달만이지?”

영배는 차에서 내려 손수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네.”

태일이 보스턴백을 뒷좌석에 던져놓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집은 아직 거기 그대로인가? 북아현동?”

영배가 물었다.

태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해 보이는데 눈 좀 붙이셔. 내가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릴 테니까.”

대화는 여기까지. 영배는 태일이 하는 일에 대해서 시시콜콜하게 묻지 않는다. 속속들이 알아봐야 자기만 피곤할 뿐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았다.

택시가 출발했다.

태일은 딱히 졸리진 않았지만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영배가 라디오를 끄고 CD플레이어를 켰다. 자신이 평소에 즐겨듣는 트로트가요가 아니라 클래식 음악이었다. 곡명은 모르지만 듣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지는 현악연주곡이었다. 감미로운 바이올린 선율에 태일은 깜빡 잠이 들었다.

덜컹하며 차가 크게 흔들리는 바람에 태일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과속방지턱을 지나간 모양이었다. 눈에 익은 건물들과 고가도로가 보였다. 북아현동을 출발해서 신촌 기차역을 경유하는 마을버스가 우리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영배는 수면을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듯이 태일에게 손을 들어보였다.

택시는 아현역을 지나 추계예술대학 쪽으로 향했다. 거기서 오르막길을 거쳐서 다시 주택가로 진입했다.

“천형, 저 건물이었나? 오랜만이라 그런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영배가 5층짜리 낡은 빌라건물을 가리켰다.

깔끔해 보이는 회백색 화강암 건물로 건축년도는 15년이 넘었다. 건물 외벽에 음각으로 큼지막하게 새긴 ‘은성빌라’라는 명조체 글씨가 멀리서도 또렷이 보인다. 건물 주차장은 따로 없고 출입구에 승용차 두 대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어차피 입주세대 중에 차를 소유한 집이 없어서 주차 문제로 서로 얼굴 붉힐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태일을 포함해서 모두 열 세대가 살고 있는데, 대부분 독거노인이거나 자식들과 따로 사는 노부부, 타인의 간섭을 싫어하는 독신들이다.

소령이 이곳을 안가(安家)로 추천해준 이유도 이웃 간에도 왕래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재작년 가을에 매물이 나오자마자 소령 명의로 즉시 302호를 매입했다. 그때 바로 이사 온 뒤로 아직까지 별다른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지내기엔 더없이 좋은 장소다.

“제대로 기억하네.”

태일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시, 내 촉은 죽지 않았다니까.”

영배가 흡족히 웃으면서 택시를 빌라 입구에 세웠다. 태일은 보스턴백을 열어 편 사장에게서 받은 돈뭉치를 꺼냈다. 그걸 보더니 영배가 정색했다.

“에이, 요금은 됐어. 천형, 이러지 마. 우리 사이에 무슨······.”

“내 성의 표시니까 받아둬.”

태일은 20만원을 세어서 영배에게 건넸다.

영배는 잠시 망설이더니 태일이 억지로 손에 쥐어주자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돈을 받았다.

“그럼 받기는 하겠는데 다음에는 진짜 이러지 말라고. 우리끼리 이게 무슨. 미리 받은 셈 칠 테니까.”

태일이 영배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는 보스턴백을 들고 택시에서 내렸다.

“다음에도 필요하면 연락하셔.”

영배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태일은 멀어져가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나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흘만의 귀가였다.

현관문 밑에 조간신문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물론 구독신청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든 얼굴을 익힐 기회를 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제멋대로 신문을 넣고 있는 것이다. 태일은 발로 신문들을 한쪽으로 밀어버리고는 도어 록의 패스워드를 눌렀다. 아래쪽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가볍고 경쾌한 발소리. 우유배달을 하는 청년이 분명했다. 502호에 사는 노부부가 매달 우유를 시켜먹는다.

태일은 얼굴이 마주치기 싫어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신발장에 워커를 넣고 있는데 우유배달부가 문 앞을 지나 4층으로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보스턴백을 열어 차량 대금으로 받은 돈뭉치는 테이블에 거실 탁자에 올려놓고 사흘간 입었던 속옷들을 담은 비닐봉지를 꺼내 베란다로 나갔다. 비닐봉지에서 속옷들을 꺼내 세탁기에 넣었다. 그러고는 베란다에서 나와 보스턴백을 거실 수납장에 넣고 침실로 갔다.

불은 켜지 않았다. 옷을 벗어 바지만 옷걸이에 걸어두고 나머진 옷장에 넣었다.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 다음, 수건으로 물기만 닦고 욕실에서 나와 침대에 누웠다. 잠깐이나마 택시에서 쪽잠을 잤기 때문에 잠이 올 것 같지 않았지만 담요를 끌어당기고 눈을 감았다. 생각과는 달리 금세 졸음이 쏟아졌다. 태일은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얼마 동안이나 잠을 잤을까.

희미하게 들리는 소음에 잠을 깼다.

눈을 뜨진 않았다.

그사이에 소음이 점점 뚜렷해진다. 알람은 아니었다. 태일을 깨운 건 바지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의 진동음이었다. 수시로 전화기를 바꾸기 때문에 태일의 번호를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틀림없이 소령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가 일상적인 안부전화를 할 리도 없고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연락하다는 건 그새 새로운 의뢰가 들어왔다는 의미다.

태일은 잠시 고민했다. 불과 몇 시간 간격으로 새로운 일을 맡는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더욱이 전례가 없던 일이기도 하다. 소령이나 태일이나, 따로 약속하진 않았지만 일을 맡는 건 한두 달에 한번 꼴이라고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꾸준히 유지해온 리듬을 깨는 건 좋지 않은 징후다.

태일은 눈을 뜨고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서 옷걸이에 걸어둔 바지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고민하는 동안에도 진동음은 끊이지 않았다. 결국 전화를 받기로 했다. 바지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예상했던 대로 소령의 전화였다.

현재시각을 알려주는 액정화면의 숫자는 7시 42분. 두어 시간 정도를 잔 것이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천태일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통화는 간단명료했다.

소령은 단 한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금 바로 장안동 자택에서 봅시다. 직접 보자는 건, 유선이나 무선, 그리고 인터넷상으로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의미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내키지 않아도 일단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다.

태일은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한창 출근 시간에 이동하는 것이라 부담스럽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태일은 침대에서 일어나 갈아입을 옷을 고르기 위해 붙박이장을 열었다. 지난밤에 입었던 검은 옷보다는 가급적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옷차림이 좋다. 태일은 고민 끝에 감색정장을 골랐다. 덤으로 튀지 않는 무난한 색상의 넥타이도 꺼냈다. 정장 재킷 안감에 이중주머니가 있는데 거기에 세라믹 소재의 나이프를 숨겨두었다. 이런 차림으로는 보스턴백이나 다른 장비를 챙길 수 없으니 유사시에 사용할 무기가 필요하다. 태일은 맨손격투를 가장 비효율적인 제압방법이라고 여겼다.

태일은 욕실로 들어가 세안을 하고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매다가 불현듯 모텔에서 마주쳤던 형사가 떠올랐다. 태일은 옷장 안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다양한 디자인과 색상별로 정리한 안경 스무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그중에서 갈색 뿔테 안경을 꺼냈다. 안경을 쓰고 옷매무새를 고치니 영락없는 평범한 샐러리맨이 거울 속에 있었다.

태일은 침실을 나와 편 사장에게서 받은 대금의 절반을 챙기고 신발장에서 약간 때가 탄 검정색 구두를 꺼내 신었다. 문단속을 하고 집을 나왔다. 택시를 타려다가 생각을 고쳐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역은 출근길에 오른 직장인들과 학생들로 붐볐다.

태일은 외따로 있지 않고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열차를 기다렸다. 배차 간격이 짧은 출근 시간대라 그런지 열차가 금방 도착했다. 태일은 사람들에 떠밀려 자연스레 열차에 올라탔다. 직장인인 것처럼 일부러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태일은 열차를 타고 가는 동안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소령이 급하게 보자는 이유가 무엇일지. 그것도 그동안의 관례를 깨면서까지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몹시 궁금했다. 지극히 짧은 통화였기 때문에 목소리에 실린 감정 상태를 읽기 어려웠지만 분명히 평소와는 달랐다. 말을 내뱉기 직전에 다소 격앙된 숨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그때였다. 젊은 여자의 새된 비명소리가 열차 안에 울려 퍼졌다.

“어머나, 내 지갑! 소매치기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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