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넘기다가
타닥. 탁. 타다닥.
오늘도 나를 힘겹게 하는 야간업무는 도무지 끝이 날 줄 모른다. 다들 퇴근하고 남은 이 자리에, 나 홀로 뿌연 형광등 빛을 받으며 무감각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데, 내가 슈퍼 직장인이라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차장과 능구렁이 과장 때문이다. 두 사람은 무려 나보다 경력이 어마어마하게ㅡ사실 매번 어마어마하다고 말해주기도 이제 슬슬 짜증나는 참이다.ㅡ 높은 윗사람들로, '준익아, 마무리만 하면 되는 건데. 할 수 있지? 그럼 내일 보자.'고 말하며 구역질나는 서류를 넘겨주고 갔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차장, 빌어먹을 과장, 빌어먹을, 젠장!
쾅.
무감각하기는 개뿔.
내 마음 속의 분노가 끓어오르다가 넘쳐버린 찌개처럼 부글부글하며 걷잡을 수 없이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 분노를 담아 책상을 힘껏 내리쳤는데, 생각보다 아팠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지만 괜히 쪽팔려서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조심스레 내 주먹을 어루만졌다. 꿈쩍도 하지 않는 책상이 야속해서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이제 그 마저도 시들해져,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흐물거리며 의자 위로 무너져내린 나는 건조되고 있는 오징어처럼 늘어졌다.
그래, 말단 직원이 무슨 힘이 있겠냐. 그냥 시키면 '네 알겠습니다.'하고 고개 한 번 못 들고 열심히 일하면 되는 거지. 그래도 나는 나중에 승진하면 이런 부당한 일은 결코 후배들에게 시키지 않을 것이다.
찰칵. 치익-
아무도 없는 사무실인데, 담배 한 가치 정도는 펴도 되겠지ㅡ라는 알량한 자기위로를 하며 연기를 깊숙히 빨아들였다.
"후우ㅡ"
2012년 12월 24일.
밖에서는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기는 바퀴벌레 같은 커플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징글벨과 완벽한 화음을 이루며 울려퍼지고 있겠지. 그 망할 콜라보레이션을 듣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디냐. 그래, 차라리 나 같은 솔로는 이런 날 회사에 처박혀 일이나 하는 게 더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 좋을지도 몰라.
타닥. 탁.
입술로 담배를 살포시 물고 연기 사이로 보이는 모니터에 나에게 돈을 주는 글자들을 입력했다. 그래, 이것만 다 입력하면 내 통장에도 다음 주에는 돈이 입금되잖아? 버티자 버텨.
그런데 다음 달 월급날이 주말이었던 것 같은데, 일찍 들어오려나. 모니터 옆쪽에 있는 탁상 달력을 눈으로 쳐다봤다. 스케줄이 빼곡히 적혀있어 어떤 것이 숫자인지 글자인지 구분조차 희미해진 내 탁상 달력에게 약간의 애도를 표하고, 커피가 담겨있는 종이컵에 담배를 던져넣었다. 탁상 달력을 한 장 넘겨 1월 달력을 확인해보니, 월급날인 20일은 확실히 일요일이었다.
"아싸."
고작 2일 먼저 들어오는 것이고, 다음 월급 날까지 2일이나 더 길어지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순수하게 월급이 조금이라도 일찍 들어온다는 사실이 기뻤다. 2월 달 월급일은 무슨 요일인가해서 달력을 한 장 더 넘겼다.
"수요일이네."
그리고 무심코 3월 달로 달력을 넘기다가, 나는.
"아."
하고 스스로의 마음에 무심코 상처를 주고 말았다. 3월 20일에 조그맣게 쓰여 있는 글씨는 매년 달력을 무심코,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볼 때 마다 나에게 상처를 준다. 이제 상처 받지 않을 만큼 시간이 흐른 것 같지만, 그래도 여전히 볼 때 마다 상처가 되는 것이, 평생 계속 될 것 같다.
남들이 보면 왜 상처를 받는지 모를 것이다. 내 탁상 달력 3월 20일 칸에는 '엄마 생일'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급히 담배를 꺼내 한 가치를 더 태웠다.
"후우ㅡ"
3월. 20일.
그 날은 나의 엄마, 김철숙 여사님의 생신날이다. 9년 전 부터 내가 볼 수 있고 확인 할 수 있는 주변의 모든 달력에는 항상 우리 엄마의 생일을 표시해 놓곤 했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절대로 잊으면 안 되는 날이니까.
우우웅, 우우웅.
괜히 감상에 젖는 나를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듯, 휴대폰이 진절머리를 치며 움직였다. 부르르 떨고 있는 휴대전화의 몸통을 잡고 가볍게 때리듯 터치를 했다.
"응, 왜."
[뭐하냐?]
"형님은 이 아름다운 날 당연히ㅡ, 회사다 임마."
[미친새끼. 좋냐?]
"말이라고 하냐?"
[언제 끝나. 나와.]
"한 시간 쯤 걸려."
[알았다. 일 끝나면 전화해.]
내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야근까지 했는데, 그리고 또 너 같은 녀석을 만나야겠냐ㅡ고 말하고 싶었지만, 워낙에 전화가 빨리 끊기기도 했고 솔직히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계속 있다보니까 조금, 그래 아주 조금 외로운 마음이 들어 누군가를 만나고 싶기도 했다.
탁상 달력을 다시 12월로 넘겨 모니터 옆에 두었다. 이제 며칠 후면 2013년이구나. 그 날로부터도 햇수로 10년이 되어가는 구나. 잠시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를 양 옆으로 돌리며 구부정해진 척추를 펴주며 생각했다. 아버지께 전화라도 드려야겠다고.
막상 효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결심한 지 9년이나 지났건만 제대로 실천해본 적도 없고, 딱히 효도라고 할 만한 것을 해드린 적도 없는 것 같다. 생각난 김에 바로 전화라도 한 통 드려야겠다 싶어 급히 휴대전화를 들어 버튼을 두드렸다.
뚜르르르 ㅡ 찰칵.
마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기라도 한 듯, 신호음은 짧게 끊기고 조금은 술에 취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웬일이냐 네가]
"아버지. 아들한테 웬일이냐라뇨."
[우리 아들 다 컸구만. 먼저 전화도 할 줄 알고, 이런 날에.]
"죄송해요. 일찍 전화했어야 하는데, 아직 야근 중이거든요."
[뭐? 뭔 놈의 회사에서 이런 날에도 야근을 시켜. 걍 때려쳐. 이런 날은 놀아야지! 안 그래? 거 참 야박한 회사구만. 때려쳐 때려쳐! 아, 아들! 설마... 혹시...]
"네?"
야근 중이라는 말을 듣고 뱃속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것과 같은 큰 소리로 우리 회사를 욕하던 아버지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조금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애인이 없어서 자진해서 업무를 받았거나 하는 건 아니지? 그렇지? 이 아빠 슬퍼지려 하기 전에 빨리 답을 주길 바란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아버지."
[에잉~ 그렇지? 그럼 업무 끝나고 애인 만나러 가나.]
"하, 참 아버지도."
[됐고, 3월에 내려올 때 참한 아가씨 옆에 끼고 오길 바란다. 아들.]
"네, 네 노력할게요. 술 적당히 드시고 주무세요."
[그래. 너도 일 후딱 끝내고 아가씨들이랑 놀아라.]
"안 그런다니까요!"
아버지와 전화를 하면, 특히 술에 취한 아버지는 장난 끼가 너무 많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사실 하나 뿐인 자식이라고는 나 밖에 없으니, 내가 살갑게 많이 대해야 하는데 워낙 '대한민국 표준 남성 표본 1'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무신경함과 무뚝뚝함을 가지고 있어서 쉽지가 않다.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던지듯 올려놓고, 다시 탁상달력을 들었다. 한 장, 두 장, 세 장 넘겨 3월 달에 멈춘 달력을 한 참이나 들여다 보다가, 3월 20일을 손으로 한 번 쓱 닦아봤다. ‘엄마 생일' 이라는 단어는 번지지도 않고 뚜렷하게 그 자리에 박혀있었다.
우리 엄마의 생일. 그리고 내 생일.
그리고 ㅡ
우리 엄마의 기일(忌日).
3월 20일.
야근을 하다가, 달력을 넘기다가, 문득 눈물이 났다.
# 탁상 달력을 새로 바꿔 넣으면서 문득 든 생각에 슥슥 써내려가 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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