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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님의 서재입니다.

금강반야

웹소설 > 작가연재 > 무협, 퓨전

임산
작품등록일 :
2021.12.26 20:47
최근연재일 :
2022.01.25 18:25
연재수 :
2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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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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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1,834

작성
22.01.0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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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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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글자
9쪽

10. 지관쌍운(止觀雙運)

DUMMY

‘정말 미래에 저들의 도구가 될 미래가 확고해진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차라리 정말 이 육신의 원주인처럼 영혼이 소멸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


‘대법에 애초부터 대법 대상의 영혼을 소멸시키는 작용이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닐까?’


교라는 놈들이 보여주는 사악함으로 보아 얼마든지 가능한 추론이다.

아니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런 사악한 대법을 천 일이나 버틴 이 육신의 주인은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


‘문제는 나다.’


상황을 파악한 것과 상관없이 ,결국 이 대법에 대항할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하면 영혼이 소멸되는 것 아닌가.

정검은 밀려드는 초조함을 필사적으로 진정시켜야만 했다.



***



초조함 속에 시간만 무심히 흘렀다.

겨우 상황에 대한 파악은 되었지만, 그럼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맞았다.

정검이 이 육신에서 의식이 깨어난 지 백 일 정도가 지났다고 느껴질 즈음에 끔찍한 위기가 현실화했다.

사령혈천대법에 의해 뇌리에 새겨지는 사악한 이미지들의 양이 어느 선을 넘었는지, 어느 날부터인가 대법을 펼치던 자들이 퇴실한 시간대에도 사악하고도 흉측한 상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자들이 말했었지. 내가 빙의되기 전 이 육신이 대법에 반응하고 있었다고.’


그 말은 이미 이 육신은 대법 목적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는 의미.

즉 이 육신의 무의식 속에는 대법의 작용으로 인한 사악하고 흉측한 이미지들이 켜켜이 쌓여있다는 것이다.


‘비록 내가 싸마타로 현재의 대법은 방어하고 있지만, 기존에 이 육신에게 쌓여있는 대법의 효력들은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지금의 정검의 상태도 설명된다.

게다가 빙의되고 난 후 정검 또한 때론 지쳐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경우도 잦았지 않은가.


‘위기다. 지금 이 상황이 그대로 진행된다면, 난 저들의 사악한 도구가 되고 말 거다.’


지독한 대법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사악한 대법이면 평생을 수행해온 정검이 빙의된 지 겨우 백 일만에 이런 상태가 된단 말인가.


‘이 끔찍한 대법을 천 일이나 버텼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누군지 모를 이 육신의 원주인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출입식념경을 념송하는 것도 답이 아닌 것 같다.’


정검은 냉정하게 현실을 자각했다.

출입식념경을 념송하는 행위는 출입식념경에 [집중]하는 일종의 [싸마타]이다.

그런데 출입식념경을 념송하는 행위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은, 싸마타만으로는 대법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삼매도 단계가 있어서, 최고 단계에 오르면 모든 업장이 소멸할 정도로 마음이 맑아진다고 한다.

하지만 정검은 아직 그런 단계까지 싸마타를 닦지 못했다.


‘청각 이외의 감각이 모두 마비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싸마타] 수행만을 저항 수단으로 삼은 것이 잘못된 판단 같다. 내 수행은 지관쌍운의 수행. 처음부터 [위빠사나]를 병행했어야 했다.’


정검의 수행은 싸마타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또 하나의 수행의 방법론, 위빠사나도 정검의 수행의 양축 중의 하나였다.



***



위빠사나는 싯다르타 부처께서 부처가 될 수 있었던 수행방법이다.

안반수의경에서 이르는 네 번째 단계의 수행법이다.

싯다르타 부처 이전 인도에서 행해지던 수행방법은 싸마타 위주였다.

위빠사나의 수행법을 행하기 전까지 싯다르타 부처도 전래의 싸마타를 수행했다.

그리하여 싸마타의 최고 경지까지 올랐으나 부처에 이르진 못했다.

그에 싯다르타는 위빠사나를 고안했고, 싸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수행함으로써 결국 부처의 경지에 올라섰다.

이처럼 싸마타와 함께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것을 지관쌍운(止觀雙運)이라 한다.

다른 용어로는 정혜병수(定慧竝修)라고도 하는데, 이는 주로 중국의 선(禪) 전통에서 칭하는 용어다.

두 용어의 미세한 차이를 무시하면,


지(止) = 정(定) = 싸마타

관(觀) = 혜(慧) = 위빠사나


라는 공식이 설립된다.


물론 중국의 선이 말하는 수행법이 싯다르타 부처님의 수행법과 같은가 다른가(同異)를 기준으로 보면, 중국의 선은 분명 싯다르타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결이 다르다.

싯다르타 부처님의 수행법에서 관이 위빠사나라는 하나의 수행방법을 가리키는 용어라면, 중국 선에서의 혜는 정을 닦은 결과 얻어지는 부수적 결과물 정도로 취급된다.

이는 중국 선이 위빠사나를 독자적인 수행법으로 보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중국 선의 수행법은 싯다르타 부처의 수행법이 아니다, 라는 극단적 비판이 존재하는 이유다.

실제 중국선의 가르침을 담은 것으로 유명한 서적 ‘벽암록(碧巖錄)’과 ‘무문관(無門關)’의 내용이나, 이런 중국선의 서적들을 독자적으로 해석한 수행으로 한국선의 중흥을 이끌었다는 경허 스님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싯다르타 부처의 가르침이라기보다는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에 수록된 비전들임을 알 수 있다.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는 싯다르타 부처 이전 우파니샤드 시대의 요가 경전이다.

즉 싯다르타 부처의 수행법이 아닌 요가 탄트라의 수행법이라는 이야기다.

중국선이 불교를 표방하고 있지만 불교가 아닌 요가의 수행법을 가르친다는 비판이 이런 이유로 나오는 것이다.

오죽하면 중국선은 불교의 수행이 아니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겠는가.

그 중국선 중에서도 가장 탄트라적인 수행이 육조(六祖)를 자처한 혜능이 개창한 남종(南宗)인데, 현대 한국의 조계종이 바로 그 남종의 아류다.



***



위빠사나는 안반수의경에서는 관(觀)이라고 번역되었다.

이는 관조(觀照)를 가리킨다.

은은하게 비추듯 본다, 는 관조의 의미 자체가 위빠사나 수행의 방법을 말해준다.

엄마가 아이 보듯 하라, 는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도 있다.


엄마는 아이만을 보지는 않는다.

아이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에서 동시에 뜨개질을 하거나 밥을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아이에게로 향하는 엄마의 애정 어린 시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뜨개질을 하다가도 잘 놀고 있나 살피고, 밥을 하다가도 잘 자고 있는지 살핀다.

계속 시선을 고정해 두는 것은 아니되 항상 시야 안에 아이를 두고 살핀다.

엄마의 마음에는 항상 아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 엄마의 애정 속에서 아이는 ‘스스로’ 자란다.

그러한 엄마의 마음처럼 보라는 것이 바로 위빠사나이다.

위빠사나는 결코 인위적인 변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저 지그시 볼 뿐이다.


은은하게 비추듯 본다는 표현도 살펴보자.

은은하게 비추는 대표적인 것으로 달이 있다.

달은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이지만, 천하 만물을 비춘다.

그 달빛 아래서 만물은 변화한다.

결코 직접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달빛이 비추는 만물은 변화한다.

이렇듯 위빠사나는 달이 다만 달빛을 비추듯이, 엄마의 마음속에 항상 아기가 있듯이 그렇게 보라는 것이다.


다만 위빠사나의 방법이 가장 극대의 효과를 보는 때는 바로 싸마타와 함께 행할 때이다.

다시 엄마가 아기를 보는 상황을 예로 들자.

뜨개질을 하다가도 엄마는 아기가 잘 놀고 있나 살핀다.

이때 노는 아기를 알아채는 행위.

어디에서 노는지, 그 상태는 어떤지 알아채는 행위가 바로 싸마타이다.

왜냐면 어딘지를 알아채거나 아이의 상태를 알아채거나 하기 위해서는 집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아이의 현재 상태를 알아채고 [싸마타],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위빠사나] 행위 두 가지가 병행될 때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듯 이 두 가지를 함께 할 때 [지관쌍운] 수행이 깊어져 부처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싸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운용하라는, 지관쌍운(止觀雙運)의 의미이다.

즉, 집중 상태에서 관조하라는 것이다.

수행 측면에서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예컨대 지나가는 여성을 보고 갑자기 섹스의 충동을 느꼈다고 가정하자.

섹스를 하고 싶다는 충동적인 욕망이 올라왔을 때 욕망이 올라왔음을 날카롭게 알아채는 것은 싸마타의 작용이다.

솟아오른 성욕을 그저 지그시 관조한다면 바로 그것이 위빠사나이다.

올라온 성욕을 없애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가진 존재에게 있어 욕망이란 없애거나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날카롭게 알아채고 지긋이 관조하는 것이 지관쌍운이다.

이렇게 하다보면 욕망은 솟아올랐다가도 조용히 스쳐지나가는 바람처럼 스러진다.



***



지관쌍운의 원칙은 예비단계인 두 수식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수(數)식법이 싸마타의 직접적인 예비단계이듯, 수(隨)식법은 위빠사나의 직접적인 예비단계이다.

수(隨)식법 역시 위빠사나이므로, 엄마가 아기를 보듯, 달빛이 만물을 비추듯 그렇게 숨을 보아야 한다.

즉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들고남을 그저 지그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지관쌍운의 뜻처럼, 이전 단계의 수(數)식법에서 닦은 싸마타의 집중력이 함께 운용된다.

그리하여 수식법(數息法)으로 닦은 집중력을 기반으로 하여, ‘들고나가는 숨을 따라가며(隨息)’ 엄마가 아기 보는 마음으로 지그시 바라보는 것이다.


작가의말

오늘은 정말 수련법에 관한 내용만 가득이어서 관심 없는 분들은 지겹겠네요.

지관쌍운의 이 수행법은 불교 수행의 핵심으로 최고의 명상 비법이기도 합니다.

조금 내용이 진전되면 본격적으로 정검이 활동하는 시기가 옵니다.


본 연재소설 금강반야는 일주일에 네 번, 화수목금에만 올라옵니다.

스토리아레나에 참가중인 [이것저것 다 해보지 뭐]에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이해바랍니다.

다음 주 화요일에 뵙겠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날 되셨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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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 변화 22.01.12 943 17 9쪽
11 11. 동혈영신주(童血靈神呪) 22.01.11 992 14 9쪽
» 10. 지관쌍운(止觀雙運) 22.01.07 1,099 16 9쪽
9 9. 빙의(憑依) 22.01.06 1,114 16 10쪽
8 8. 사령혈천대법(邪靈血天大法) +1 22.01.05 1,167 13 10쪽
7 7.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1 22.01.04 1,277 18 9쪽
6 6. 또 하나의 수식법, 수식법(隨息法) +2 21.12.31 1,310 17 9쪽
5 5. 지독하게 사악하지만 소름 끼칠 정도로 천재적이다 +1 21.12.30 1,437 23 9쪽
4 4. 수식법(數息法) +1 21.12.29 1,654 24 10쪽
3 3. 설마 뇌사? +1 21.12.28 1,860 28 9쪽
2 2. 제발 그 읊조림을 멈춰! +1 21.12.28 2,057 30 10쪽
1 1. 정검, 의인으로 죽다 21.12.28 2,764 39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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