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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칼들고 십자군 시킴?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판타지

물의백작
작품등록일 :
2023.12.20 17:43
최근연재일 :
2024.02.07 18:00
연재수 :
46 회
조회수 :
2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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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5
글자수 :
295,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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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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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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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배관공 마리오스

DUMMY

깊은 숲에서부터 콘스탄티노플 언저리까지.

대략 2백 킬로미터 정도 길이로 수도공급선이 펼쳐져 있다.

그 수도공급선은 수도 인근으로 접어들 즈음이면 지하화되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진행된다.


오염 혹은 비밀 침입 통로로 쓰이는 걸 방지하는 목적이다.

물론 그렇게 만든다고 침입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물 튀기는 요란한 소리.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토비아스님 말대로군. 막힌 것도 없고 일직선이야.”

“루트비히 경, 이쪽이랍니다.”

“그래? 길잡이 잘 감시하고.”


기사 둘에 무장종자가 다섯.

단 일곱이지만 무시무시한 전력임은 분명했다.

일곱은 바닥 낮게 깔린 물을 헤쳐 따라갔다.


“이렇게 큰 수로가 지하를 흐르다니, 놀랍군요.”

“사십만의 목을 축여야 하는 수로라잖나.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나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놀랍군.”

“이대로 앞으로 나가면 곧바로 수도로 닿는다네요.”


일곱의 독일계 무장집단을 이끄는 건 길잡이였다.

그것도 그리스인 주민으로 이뤄진.


“토비아스 경께선 어떻게 길잡이를 구하셨지.”

“그 반 라틴 동맹인가에서 알선해줬겠지. 다들 복수심에 미쳐 날뛰잖나.”

“눈앞의 원한에 미쳐 스스로를 망치는 놈들이군요.”


토비아스가 엄선한 후보답게 글줄 깨나 깨친 무장종자의 말이었다.

모두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앙리만 없어지면 자기들이 황제가 될 거라 생각하다니.”

“오히려 황제 암살을 자기네들이 뒤집어 쓸 텐데.”


이 계획의 집행자인 루트비히가 앞서가는 길잡이를 보았다.

그리곤 천천히 말라빠진 입가를 혀끝으로 적셨다.


“일이 끝나면 저놈들에게 뒤집어 씌우면 완벽하지.”

“십자군과 그리스인이 철천지 원수가 되겠군.”

“그래야만······앙리 놈이 세운 지금까지의 모든 업적을 뒤엎을 수 있으니까. 4차 십자군은······반드시 피와 불로써 콘스탄티노플을 제압해야 한다더군.”


피와 불.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그것만이 온 독일을 떠받치는 기둥,

호엔슈타우펜을 다시 부활하게 만들 제물이다.


적어도 토비아스가 독일 기사들에게 내준 설명은 그랬다.

물론 루트비히는 어딘지 석연찮은 지점이 있다는 건 알았다.

최근 독일왕 필립의 사절이 방문만 하면 소동이 벌어졌으니까.


- 멋대로 황제위를 자처하더니, 이젠 전하의 명령도 거부해?

- 흥, 나도 이제 어쨌든 국왕인데 명령받을 처지는 아니잖소?


에이, 그래도 같은 편이겠지.

필립 왕의 명령대로 고국을 떠난 기사들은 그렇게 여겼다.

만약 이미 그렇지 않게 되었다면······.


꿀꺽.

걸음을 멈추진 않았지만 성마른 침을 삼켰다.

만약 그런 사정이 독일 기사들에게 알려진다면?

보니파시오는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아니길 바라야지.”

“예?”

“아니야. 아직 출구까진 멀었나?”

“아직입니다. 수도교 하나를 더 건너면 시내 구간으로 들어가는 지하로로 이어진다네요.”

“후······.”


아침에 수도관을 부수고 잠입한 지 한참.

수도교로 이어진다는 출구 부분은 한밤중인지 새까맣다.

싸우는 일이라면 이골이 났지만, 잠입-암살의 비밀임무라.


“이거, 괜히 진땀이 나는군.”


습기 가득한 수도관 안에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루트비히는 수하들을 재촉했다.


“좀 더 서두르자.”


물 튀기는 소리와 함께 일곱쌍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

지하화 구간을 통해 수도의 성벽 아래로 이어지는 지하수로.

시내 각처로 물을 제대로 보낼 수 있도록 수압을 가하는 용도의 저수조가 있었다. 군데군데 거미줄처럼 복도와 층계들이 얽혀 있었다.


“우, 우와······. 이거 완전 길 잃겠는데.”


망토와 황제 기사단의 복장 대신 움직이기 편한 복장.

티에리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지하 시설을 살피고 있었다.

예카테린은 그런 티에리에게 설명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저항군이 수도에서 소란을 떨 수 있었지.”

“이 지하로를 타고 들어와서? 신기하네.”


뭘 신기하냐며 타박하려던 예카는 잠깐 말을 멈춰야했다.

과할 정도로 빛내면서 진심으로 탄복한 눈을 봤기 때문이다.


“아니, 뭐······. 이게 그렇게 감격할 일이었어?”

“너무 신기하잖아. 이건 인간 지성의 승리라고!”


물론 독일이나 프랑스의 도시들 중에도 수로를 쓰는 곳은 많았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대규모로, 관리를 썩 잘 한 곳도 드물다.


“뭘 또 그렇게까지, 크흠. 하긴 우리 나라가 좀 문명의 집대성이긴 하지. 애초에 기술을 만든 데가 우리니까 당연히 잘 유지하고 있는 거고.”


이상하네.

어른들이 서유럽 깎아내리며 스스로 문명이라고 하면 꼰대 같았는데.

오늘은 웬지 자신도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라니.


“그래서, 우리 대장은 무슨 작전을 세우셨지?”

“간단해. 세 살 아이도 한 번 들으면 이해할 정도.”

“좀 과장 같은데.”

“그 정도로 쉽다고.”


선을 아슬아슬 타넘으며 장난을 걸던 티에리.

정강이를 한대 걷어차인 정도면 충분히 싼 값이었다.

예카테린의 설명에 금세 티에리는 진지한 빛을 찾았다.


“이곳 수로가 많이 복잡해. 그리고 놈들은 시외에서 들어오는 유입로로 들어오기 때문에 무조건 가장 큰 길을 따라올 거야.”

“매복?”

“그것도 좋지. 하지만 그건 우리가 어느 정도 맞설 전력이 될 때의 얘기지.”


예카는 말을 하면서도 큰 수로 쪽의 동향을 살폈다.


“놈들이 들어오면 우린 군데군데 작은 수로에서 놈들의 후방과 측면을 칠 거야. 놈들이 정신차리면 곧바로 빠져나가고.”

“조금이라도 꼬릴 잡히면 위험하겠는데.”

“걱정마. 다들 처음부터 목숨 걸고 자원한 일이니까.”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다시 찾아왔다.


“이제 물이 거의 안 흐르고 있어.”

“놈들이 딱 뒤따라 오기 좋게 됐지, 응.”


그녀의 말대로였다.

원래라면 높은 수위의 물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와야 할 길.

지금은 낮은 수위에 고인 물만이 미미하게 흐를 뿐이다.


“작정하고 수도를 끊을 정도면 분명히 목적이 있겠지.”

“하지만 아직 적이 수도를 포위할 상황은 아니었는데.”

“암살단 정도는 꾸려서 보낼 수 있을 걸. 아마 생각이 있는 자라면 충분히 계획할 수 있었을 거야.”


암살단.

설마, 황제를?

그냥 간첩이 들어온 거라 가볍게 생각하고 온 것인데.


만약 암살과 관련 있다는 걸 추측했다면 진즉 상부에 보고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는 빠져나가는 것도 곤란한 지경이다.


“그건 막아야······. 하지만 너희는 새 황제나 플랑드르 사람, 십자군에 대해 그렇게 좋은 감정은 아니었을 텐데. 막으려고?”

“무슨 소리야, 지금 와서?”


예카가 이런 비밀작전까지 끌고 왔는데 그걸 묻냐며 코웃음을 쳤다.

그리곤 로브의 모자를 덮어썼다.


“우리는 난리통에 사람이 죽어나가는 걸 막자는 거지 굳이 누가 황제냐 아니냐를 가지고 적대시하는 게 아냐.”

“그, 그렇구나.”

“너희도 참, 그리스인을 뭘로 보고 그런 소릴 하는 거야? 우리가 라틴인이라면 다 구분도 못하고 죽이려 드는 줄 알아? 바보 천치로 보는 거야 뭐야?”


애초에 침입자로 이 땅에 왔다는 점에선 다 똑같았다.

프랑스인 새 황제나 다른 십자군들 모두.

하지만 처음 상륙부터 지금까진 거의 1년의 시간이 흘렀다.

현지 그리스인들 역시 반응이 갈릴 수밖에 없었다.


“엔리 그 사람에 대해서 아직 확신하지는 않아. 아니, 못해.”

“예카.”

“적어도 그 사람이 분명하게 수호자 연기를 하는 동안엔 굳이 적이 되지는 않을 거야. 그건 자신해.”

“······수호자 연기?”


수호자면 수호자지 수호자 연기는 또 뭐란 말인가.

티에리가 의구심을 감추지 못하고 물으려는 찰나.

작게, 그러나 무질서하게 물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


“쉿. 온다.”


티에리는 예카테린을 따라 검지로 입을 막았다.

예카테린은 내내 들고 있던 손전등을 흔들곤 촛불을 껐다.

신호를 따라 좁은 협수로 곳곳에서 불빛이 사라졌다.


“이쪽 벽에서 대기. 수신호 줄게.”


소리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고개만 끄덕해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어렴풋하게나마 고갯짓은 전해졌다.

얼마나 한참을 더 기다렸을까.


좁은 수로 안에서 울려퍼지는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안타깝게도 티에리의 경험으론 거리를 잴 수 없었다.

사방에서 울려대느라 머리만 어지러웠다.


그때마다 어깨를 짚으며 무언의 위안을 건네받았다.

숨막힐 듯한 시간이 한참을 더 지나간 뒤.


“지금이야.”

“확인.”


재빠르게 움직이는 그녀를 따라 티에리도 검을 뽑아 들었다.

기사 서임을 받고 새로 받은 검보단 훨씬 짧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좁은 수로 안에선 훨씬 효율적이군.

티에리는 예카가 준 낡은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뒤따랐다.


“기습이다!”

“사방을 주의해라, 각자 뒤를 맡아!”

“으악!”


예리한 금속의 소리와 발길질 소리가 났다.

그리곤 순식간에 멀어지는 물 튀는 소리.


“모두 무사하냐.”

“셋, 넷, 다섯······. 예, 모두 멀쩡합니다.”

“그, 그런데 길잡이들이 모두 사라졌, 윽!”

“무슨 일이냐.”


두리번대며 길잡이를 부르던 종자가 기겁했다.

이유를 묻던 루트비히도 이내 사정을 알아차렸다.

무엇보다 진한 피 냄새가 물 비린내를 뚫고 전해졌으니까.


“길잡이 셋이 모두······.”

“만약을 위해 데려왔는데, 글러먹었군. 쯧.”

“루트비히 경, 아무래도 이 수로······.”


동행했던 수행기사 하나가 걱정스럽게 둘러보았다.

루트비히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미 숨길 생각도 없는 기척이었다.


“놈들이 제대로 장소를 골랐군. 이런 놈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십자군에 그렇게 쉽게 무너졌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일단 후퇴할까요?”

“후퇴하면 그때부턴 다시는 이 길을 쓸 수 없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루트비히는 선언했다.


“그대로 진입한다. 우리 임무를 최대한 속행한다.”


길잡이를 잃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큰 수로만 따라가면 도심으로 나온다는 걸 알았기에.

다시 움직이는 침착한 발걸음들.


예카는 그 소리를 듣고는 금새 의도를 알아차렸다.


“무시무시한 놈들. 큰 수로로 밀고나갈 생각이네.”

“나가버리면 더 추격할 수 없잖아?”

“나가기 전에······막아야지.”


치고빠지는 전술에서, 차단하고 막는 방법으로.

실력이 어떤지 몰라도 자경단으로 기사를 상대하겠다니.


“내가 나서야겠어.”

“뭐? 일 잘못되면 큰일나. 앞에 나서진 마.”

“걱정 마. 내 몸가짐은 내가 할 줄 아니까.”


티에리를 그저 몸 좀 쓰는 프랑스인으로만 아는 예카의 의구심.

하지만 티에리는 보일지도 불확실한 미소나 지으며 나란히 섰다.


“지금!”


물 튀기는 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인적이 드러났다.

때로는 신경만 쓰이게 하고 나타나진 않았다.

불현듯 어느 수로 입구나 층계 위에서 공격이 들어왔을 뿐.


“악!”

“이 새끼들이, 벽돌을 던져?”

“우리 머리로 벽돌을 깨려고 들어?”


눈에 띄는 투구를 쓸 순 없으니 천이나 가죽으로 둘둘 만 머리.

당연히 벽돌을 집어던지는 타격을 다 막긴 무리였다.

피를 줄줄 흘리는 종자 두어 명이 정신 나간 듯 검을 휘둘렀다.


배관공 마리오스 작전.

오래된 지하수로엔 자체 유지보수용으로 벽돌이 필요하다.

때문에 응급수선용으로 상층부에 벽돌을 저장해두었다.


“최대한 접전은 피하는 거야, 알았어?”

“결사대라길래, 당연히 검으로 달려드는 줄.”

“그건 마지막의 마지막, 놈들이 완전히 지쳤을 때.”


예카는 그 말을 끝으로 벽돌을 집어던졌다.

약 반층 높이 아래로 지나는 놈들을 노린 투척이었다.

예리한 소리와 함께 독일어 욕설이 쏟아졌다.


“튀어!”

“이크.”


저쪽에서도 마구잡이 던져대는 돌조각을 피해 둘은 수로 안으로 피했다.

그렇게 누군가 시비를 걸고 피하는 일을 번갈아가며 하기를 한참.

덕분에 암살단의 전진은 한없이 느려졌다.


“······이제 출구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금방이야.”


적에 비해 훨씬 먼 수로를 돌아갔다 와야 하는 이쪽.

덕분에 예카나 티에리 모두 숨이 차올랐다.

거기다 지난 밤부터 내내 지하도에 있으려니 눅눅한데다 배까지 고팠다.


“으음? 잠깐만.”


배 곯는 소리를 아마 들은 모양이다.

민망해하는 티에리는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곁눈으로 보노라니 예카는 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해?”

“아, 여깄네. 다행이다.”


사라진 벽돌 너머, 옅은 흙가에서 뭔가를 찾더니 건네받았다.

황당하게도 예쁜 과일과도 같은 붉은 색감의······버섯이잖아?


“수로에 나는 버섯이라니. 이거 색깔이 독버섯 아냐?”

“야, 독버섯이라니. 이건 네로가 그렇게 환장했다는 카이사르 버섯이거든?”

“카이사르? 뭔 버섯 이름이······.”

“아, 됐고. 먹어봐. 구워먹는 게 제일 좋지만.”


날 버섯을 이렇게 먹다니.

어릴 적 뭘 모르고 주워먹다 혼난 이후론 처음이었다.


“······맛은 좋네.”

“그렇지? 다음번엔 구워서도 먹어봐. 소금 살살 치면 녹지, 아주.”


그 외에도 견과류 맛 나는 버섯이라든가 몇 가지 버섯을 먹었다.

덜컥 나던 겁도 가라앉고 입가에 스치는 가벼운 맛이 나쁘지 않았다.


“······뭔가 무슨 특수한 힘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졌어.”

“그래? 어떤 힘이길래.”

“막 돌을 날려 적을 잡든지 머리로 돌을 깬다든지······.”

“뭐? 하하, 웃긴 상상이네.”


새벽 중에 지하수로에서 벽돌 던져 머리 깨트리는 짓만 하겠냐.

예카는 티에리의 생각을 모른 채로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그 정도면 배는 좀 채웠지?”

“그래.”

“이제, 그 힘을 좀 써야겠다.”

“······얼마든지.”


드디어 여기선 나도 일인분을 할 수 있구나.

그 생각에 티에리의 눈빛이 밝게 빛을 냈다.



쨍그랑.

몇 번의 합을 맞춰내고는 수로에 자빠지기 전까진 말이다.


“하, 이놈들이나 저놈들이나. 약해빠졌으면 나대질 말아야지. 신경질나게.”


중얼거리는 라틴어 문장이 어떻게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예카테린 역시 자상을 입고 어딘가로 떨어졌는지 목소리만 들려왔다.


“됐다, 이대로 황궁까지 그대로 들어간다.”

“이미 동이 터오는데요, 경?”

“상관없어. 골목길로 줄달음질해서 그대로 앙리의 목을 딴다.”


아, 안 되는데.

뒤늦게야 자신이 앙리의 호위기사란 걸 깨달은 티에리.

그가 한 가지 더 깨닫는데 실패한 것도, 물론 있었다.


“아, 티에리~”

“으······?”


축축하게 젖어버린 티에리의 흐릿한 눈앞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당황했다.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 얼굴인데.


“이 녀석 놀란 것 봐~ 큭큭.”

“그만 놀려, 테오필. 이 분위기에 그럴 기분이 드냐.”

“자기가 놀릴 기회를 안 줬다고 삐지시기는.”

“······됐고. 티에리, 넌 돌아가서 얘기 좀 해야겠다.”


앙리는 신음을 뱉고 있는 쪽에도 시선을 돌렸다.

로브 차림의 검객이지만 누가 봐도 소녀티가 풀풀 났다.

어째 조사해봐도 꼬리털 하나 안 잡히더라니, 이유가 있었다.


“저쪽도 수습해줘.”

“직접 처리하게? 토비아스가 보냈으면 꽤 셀 텐데.”


앙리는 대꾸 없이 몇 발짝을 나아갔다.

온통 수로 안이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이래서야 수도공급을 재개해도 말썽이 많을 예정이다.


“앙리······. 찾기도 힘든 앙리를 이렇게 볼 줄이야.”

“아, 그 목소리. 변경백 곁에 붙어있던 기사 나부랭이군.”

“틀려, 테살로니키의 왕이시지. 그리고 이제,”


얼마나 조급했는지 말 한마디를 끝내기도 전이었다.

루트비히라는 기사가 허리춤의 검을 뽑는 소리가 신호였다.


훅.

모든 채비를 마치고 상태도 쾌적한 앙리였다.

순식간에 상대편과의 거리를 좁혀 접근했다.

루트비히는 헛바람을 삼키며 오른발을 빼려 했다.


“헉, 무슨.”

“허술하구나.”


말이 끝나기도 전 손에 든 벽돌이 기사의 머리를 타격했다.

물론 앙리 역시, 배관공 마리오스 작전에 동의한 덕분이었다.

순식간에, 숨어있던 자경단이 튀어나왔다.

일곱의 인원은 남김없이 포박되었다.


“역시 재밌어, 이 작전. 손맛이 좋아.”


깨진 벽돌 조각을 던져버린 앙리가 손목을 휘둘렀다.

배관공 마리오스 작전을 들먹이는 테오필의 목소리엔 장난기가 더욱 진하게 묻어났다.


“싸움은 수선용 벽돌로, 보급은 지하의 버섯으로. 낭만적이야, 아주~”


테오필이 부축해 일으킨 티에리.

앙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고개를 푹 수그렸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그만 정신이 팔려서.”


쿡.

응?

말없이 지켜보던 앙리가 무심하게 티에리의 볼을 찔렀다.

그리곤 이내 티에리의 표정이 민망한 빛에 물들었다.


“호위기사가 날고 기어봐야 황제는 못 따라오지. 가자, 버섯은 하여간 많이 캐놨는지 구워먹을 게 많더군.”

“예?”

“큭큭, 티에리. 애초에 수도교를 관리하는 게 어디 소속인지 모르는 건 아니지? 이렇게 잘 관리된 수로에 자경대가 맘대로 뛰놀 수 있었다는 것도······.”

“말이 많은 테오필 몫은 내가 다 먹어도 되겠지~?”

“어이쿠.”


당황한 척을 하는 테오필을 따라 티에리는 지하수로를 벗어났다.

부축되어 곁을 지나던 예카도 이쪽을 보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고생했어.’


입 모양만 움직여 내는 빈소리와 치켜 세운 엄지.

그제서야 티에리는 자신이 완벽히 농락당했음을 깨달았다.


“애초에······이 모든 게 파악된 일이었다고?”

“쯧쯧, 아직 배울 게 올림포스 산처럼 드높구나, 티에리야.”


십자군 체제 전복 이후 처음.

콘스탄티노플 황제가 직접 주도한 민사 작전이 끝났다.

자경단을 포섭해 벌였던 장기간의 지하 은둔 작전.


「배관공 마리오스」 작전의 완료였다.


작가의말

콘스탄티노플의 지하수로는 상수로, 하수로 모두 세심하게 설계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심축의 수로에선 물이 차오른 기준으론 사람이 말을 타고 건너가야 하는 정도였다고 전하죠.


주중의 좋은 마무리와 편안한 주말의 기분을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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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61 g9******..
    작성일
    24.01.26 18:36
    No. 1

    역시 벽돌을 부수고 버섯을 먹어야..마리오스..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증오하는자
    작성일
    24.01.27 09:43
    No. 2

    나중에 저 버섯이 탈이 나게 만드는건 아닌가 싶지만 역시 마리오스와 루이지우스 브라더(?)는 버섯이 최고죠 ㅋㅋㅋ

    또 한번 전설을 만들고 기사임을 보인 주인공입니다. ㅋㅋㅋ 후에 수로 위생등 정비 한번 해야되겠지만 좁은 곳에서는 기사라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0 n2******..
    작성일
    24.02.03 23:01
    No. 3

    버서커가 되는건가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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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점령군 대 저항군 +4 24.01.14 381 22 14쪽
25 정복자의 권리 행사 +6 24.01.13 405 28 13쪽
24 빚, 빚, 더 많은 빚을! +4 24.01.12 387 26 17쪽
23 바보야, 문제는 경제다 +7 24.01.11 432 27 14쪽
22 두 번의 대관식 +6 24.01.10 434 28 15쪽
21 내 원조 로마를 봐줘! +8 24.01.09 441 28 13쪽
20 핏빛 선물 수령기 +3 24.01.08 416 25 15쪽
19 선물의 진짜 의미 +4 24.01.07 436 28 12쪽
18 이 황제의 빚 갚는 법 +5 24.01.06 461 28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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