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처음부터 망할 수 밖에 없는 십자군.
처음부터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자리였다.
원하지 않았으나 물려받고, 요구하지 않았으나 주어진 권력.
그리고 원하지 않았던 권력은 줄줄이 엄청난 책임을 불렀다.
《우리 종족을 죽이러 온 학살자다!》
《감히, 이단자와 교섭을 하고 십자군 대의를 흐리다니!》
《네깟 형제들에게 거저 줄 황제 자리가 아니었단 말이다!》
마실 수 없는 잔, 독이 든 성배.
4차 십자군으로 탄생한 《라틴 제국》.
2대 군주 앙리는 원망할 곳조차 찾지 못한 채 잔을 들었다.
악명이나 쌓아버린 사기극 원정에 덜컥 가담해버린 멍청한 맏형.
그럴 듯한 명분을 앞세우곤 약탈과 땅이나 받아가려던 제후들.
갖가지 방식으로 제국을 갉아먹으려는 베네치아까지.
“잠이 오지 않을 때는 한 잔 정도는 괜찮답니다.”
간신히 마련한 어느날 밤의 침실.
몸에 맞지도 않는 술을 권하는 그 목소리가,
어쩐지 오늘만큼은 무척 달디 달았다.
들척지근한 입술을 간신히 들썩여 화답했다.
딱 한 잔만.
이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풀 수 있다면.
“그럼 귀하의 성의를 보아.”
“감사합니다, 폐하.”
억지 웃음을 남기고 잔을 들어올렸다.
일렁이는 붉은 색 액체.
······피를 닮았구나. 마치 내가 죽인 모든.
질끈.
향과 맛, 색을 음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한 모금을 마셨다.
모든 걸 잠시라도 잊을 수 있다면.
“다 되었군요.”
“······그건 무슨 말인가?”
“정해진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죠.”
얼굴도 이름도 모르겠는 방문자.
표정도 기억할 수 없지만, 분명히 웃고 있었다.
“무슨······!”
세상이 갑자기 핑 돌았다.
특별히 주문한 포도주라더니, 그래선가?
몸을 주체할 수 없는 이 황홀경과 혼란함.
“안······.”
시종을 찾으려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정확하겐 무엇인가 힘에 의해 막힌 듯 틀어막혔다.
뒤이어 온몸을 타고 오르는 무력감이란.
“안, 안드······.”
온몸을 휘감는 무력감 속에 뜨뜻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연신 힘을 냈지만 여전히 이름 하나를 부를 수 없었다.
들려온 건 한 마디, 낯선 자의 부드러운 말뿐.
“부디 모든 말썽을 안고, 편히 가소서. 앙리 폐하.”
“······.”
무어라 대답을 해야 했을까.
부질없는 생각만이 찰나의 의식을 스쳤다.
뭔가, 뭔가가 이상했다.
“이건······?”
어두워지는 사방.
천천히 눈앞으로 다가오는 탁자.
나무의 물결치는 무늬가 점점 시야를 차지했다.
탁.
암전.
불이 꺼지듯 모든 시야도, 생각도 어둠 속에 잠겼다.
***
턱.
돌부리에 발이 걸리자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무너지려던 몸의 균형은 금세 복구된다.
“아.”
“괜찮으십니까, 공자님.”
“아, 음. 괜찮아. 생각해보니 별 것 아닌······.”
곁에서 들어오는 부축에 몸을 맡겼다.
깨질 듯한 머리 속에서 뭔가, 뭔가가 떠오른다.
뭐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은?
“공자님?”
“공자님이라고?”
그래, 그 근원은 여기에 있다.
어쩐지 듣는 것만으로 아련한 목소리.
결정적으로 들어본 지 오래된 호칭.
“술기운이 아니라 진짜 아프신 겁니까?”
“······테오필!”
“식은 땀까지. 또 주군께서 무리하게 술을 먹이셨군요.”
“······.”
“공자님?”
믿기 어렵다.
아니 믿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아니야, 테오필. 잠깐, 꿈을 꿨어.”
“주연 자리가 파하고 꿈이라니, 피곤하셨군요.”
피식.
이렇게 사소하면서도 상세한 위로라니.
그것도 이렇게나 스스럼 없는 투로 말이지.
“역시~ 어릴 적부터 봐온 불알친구가 최고네.”
“갑자기 민망하게 무슨 소립니까, 공자.”
“앙리라고 불러주겠어, 테오필?”
살짝 취기가 오른 건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어스름 달빛 사이로 테오필의 뺨도 붉었으니.
우리의 군주, 나의 맏형이 부리는 패악질은 똑같았다.
“민망하게 자꾸 이름을 부르라고.”
“중요한 건 자꾸 되새겨야만 잊지 않으니까.”
“······오늘은 정말 이상하네, 앙리.”
그래.
엉터리 사기극에 휘말린 주군이자 맏형의 실수.
친구와 형을 잃고 이역만리 타지에 남겨진 나.
남들의 죄를 짊어진 채 끊임없이 새로운 죄를 지어야 했던 나.
이 모든 게 아직 꿈일 뿐이고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내야 한다.
“고마워, 테오필. 덕분에 결심했다.”
“응? 오늘 이상한 말을 많이 하는군.”
“쿡, 그래? 하긴, 정말 요상한 꿈이었지.”
괜히 부모만 쓸데없이 잘 만난 무능력한 야심가, 맏형.
그리고 그가 사기꾼들에 속아 무작정 가담한 십자군.
좋은 일을 해주는 척 책임만을 떠넘기는 제후들까지.
꿈, 혹은 꿈같은 경험 속에서 앙리는 확신을 내렸다.
아둥바둥 노력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다.
간신히 재앙을 피해보려다 결국 자신마저 제거되었으니까.
“······테오필, 앞으로 많은 게 달라질 거다.”
“그래, 좀 달라져야지.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
“아마도 내 이 두 손으로 직접, 말이지.”
“진짜 이상하네, 오늘. 계속 헛소리야.”
“뭐, 이 자식아?”
앙리는 벌써 반쯤 술기운을 떨치고 친구의 옆구리를 쳤다.
오랜 친구 겸 영지의 군무총관, 테오필은 엄살을 부렸다.
“아이고, 사람 잡네. 알았어, 알았다! 네가 신성로마 황제도 하고 로마 황제도 하고 두루두루 다 해먹어라!”
“진심이냐?”
웃으며 넘어가려던 앙리는 살짝 멈칫했다.
그리고 차근히 되물었다.
“하하, 내가 말했지? 넌 절대 2인자에서 끝날 놈이 아니라고.”
“보두앵 형의 그늘에 모두 묻혔는걸, 뭐.”
“아니. 분명히 기회가 올 거야. 난 확신해. 그게 언제가 되었든······너는 기회가 오면 절대 놓치지 않을 녀석이니까.”
“그렇다면야 체념할 수는 없겠군.”
“크크, 무슨 지금 바로 모험이라도 떠날 셈이야?”
짤막한 주정이 섞인 대화일 뿐이었다.
하지만 앙리는 오히려 결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시간대. 시간대가 굉장히 절묘한 걸 아까부터 깨달았다.
“지금이 1201년 2월 아니냐?”
“그랬지. 근데 새삼스럽게?”
“이 형님이,”
오랫동안 인생이 꼬여버린 원인으로 꼽았던 사건.
누군가 칼을 들고 협박해야만 갔었던 최악의 선택지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 앙리는 생각을 바꾸었다.
“큰 기회를 한 번 낚아보려고. 세계의 운명을 바꿀.”
“판 깔아줬더니 지랄한다, 크큭.”
“하! 그럴 줄 알았지, 개자식.”
오랜 친구, 테오필이 흰소리라며 웃어댔다.
그렇다. 실현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흰소리.
바로 앞으로 4년, 모든 망상이 현실이 되는 시점에선 말이지.
웃는 녀석의 부축을 받아 한 걸음을 다시 내디뎠다.
그리고 바로 지금, 당장의 할 일을 되새겼다.
앞으로 생길 모든 문제의 근원.
그 새끼부터 죽인다.
바로 내 형, 무능한 야심가.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을.
- 작가의말
예전에 중단하였던 누가 칼들고 십자군 시킴을 다듬어 찾아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Commen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