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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님의 서재입니다.

현대 중국은 왜 남북으로 갈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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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작품등록일 :
2022.11.21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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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8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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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장개석, 휴전을 파기하다

DUMMY

“자, 2차 중국내전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죠.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1945년부터 50년까지 진행된 중국내전이란 용어는 한국과 일본에서 쓰는 중립적인 표현이고 남북을 통틀은 중국 대륙 내에서는 해당 내전을 부르는 명칭이 서로 다릅니다. 그렇죠 학생? 뭐라고 하나요?”


교수가 수업 첫시간에 손을 들었던 중국인 학생을 쳐다봤다.


“네, 국사 시간에 동원감란시기(動員戡亂時期)라고 배웠습니다.”


“학생이 어렸을 때 북에서 남으로 넘어왔다고 했죠? 그러면 북에서 학교를 다닌 적은 없었겠네요?”


“네, 학교 다니기도 전에 내려와서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다만 나중에 따로 내려온 사촌 오빠가 있는데 그 오빠는 중학교까지 북에서 있다가 내려왔기 때문에 그 시기를 역사 시간에 배웠다고 하더라고요. 해방전쟁 아니면 인민혁명 뭐 이렇게 배웠다는 것 같은데...”


“그래 맞아요. 정확히는 중국인민해방전쟁, 혹은 중국인민혁명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나라도 여기 옛 북한 지역의 경우 조선로동당이라 하죠. 공산 정권 시절 6.25 전쟁,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 이렇게 가르친 것과 비슷한 맥락이죠.


이렇게 명칭이 다른 이유는 체제 차이라고 단순하게 볼 수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게 하나 있습니다. 사건의 성격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관점의 차이죠. 남중국의 관점을 한번 보세요. 동원감란시기라는 용어는 우리말로 풀어쓰자면 동원, 즉 전쟁에서 쓰이는 그 용어입니다. 동원령을 시행해 감란, 한자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반란을 이기다, 진압하다 이런 뜻입니다.


다시 말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을 동원한 시기라고 할 수 있죠. 이 시기는 남북이 대등한 위치에서 싸운 것이 아닌 공산당이라는 반란 세력을 중국 정부가 진압하다가 결국 목표를 완수하지 못한 때이다 이런 의미입니다. 즉 공산당의 합법성이나 남중국 측 입장에서는 미수복지구라고 하죠. 북부 지역에 대한 공산당의 통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는 뜻입니다. 즉 현 중화인민공화국 영토도 엄연히 중화민국의 영토라는 논리죠. 같은 맥락에서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어 분단이 고착화된 것을 가리켜 10.1 사건으로 격하해서 표현하기도 합니다. 지금 남중국 초중고 교과서에도 그렇게 표기되어있죠.


관련해서 남중국에는 지금도 특이한 기관이 하나 있습니다. 북방미수복지구위원회(北方未收復地區委員會)라는 위원회죠. 쉽게 말하면 지금은 중화인민공화국이 통치하는 북부 지역은 공산당 때문에 중화민국이 행정력을 행사하지 못하지만 향후 통일을 위해 직접 다스리지 못하는 행정 구역에도 각 성장(省長) 우리로 따지면 도지사죠, 시장, 현장(縣長)을 임명하고 관리하는 조직입니다. 이 사람들은 실제 북중국 출신, 그러니까 남중국으로 망명한 사람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북중국의 각 행정구역 출신 사람들을 관리하고 통일 관련 사업도 많이 하죠.


지금은 각 지방자치단체에 흡수되어 사라졌지만 우리나라도 이북4도위원회(以北四道委員會)라고 90년대 후반까지 있었습니다. 아마 서울 종로구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네요. 북방미수복지구가 하던 일하고 그때 이 이북4도위원회가 하던 일과 거의 똑같습니다. 그 당시가 기억나네요. 남한 정부가 여기 북한 지역을 통제하게 됐을 때 거기서 일하던 사람들이 실제로 여기로 파견왔습니다. 실제 이 구 북한 지역 출신인데 남한에 정착했던 소위 실향민들이었죠. 지금이야 우리나라는 통일이 되었으니 보통 실향민 하면 중국인들 중에서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로 생각하고 있겠죠. 아니면 남중국 내에서는 실향민보다는 북방민(北方民)이라고 많이 그러죠. 그런데 제가 젊었을때만 해도, 정확히는 남한 지역에서 실향민 하면 보통 우리나라 사람들을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저도 그때 이 최소 환갑은 넘던 실향민 어르신들하고 많이 만나고 같이 일해볼 기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게 거의 30년 가까운 과거의 일이지만 남중국은 현재진행형이란 얘기죠.


얘기가 좀 새나갔군요. 북중국의 경우 당시 인민을 착취하던 국민당 정권. 이건 제 의견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관점을 얘기하는 것 뿐입니다. 국민당에 맞서 공산당의 지도 아래 민중이 봉기를 일으킨 혁명이라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인민해방이라는 단어가 들어간거죠. 자신들이 중국 대륙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고 국민당,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현재 남중국 정부는 인민을 착취하는 정권이기에 정당성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제가 80년대에 북경에서 유학하던 시절에는 이렇게 정식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미완의 혁명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대륙의 북부는 ‘해방’시켰지만 남부는 아직 해방, 즉 적화통일을 하지 못했기에 혁명은 아직 완수되지 못했다는 거죠. 사실 남북한, 남북중국을 모두 겪은 제 개인적 의견으로 국민의 자유 정도나 통치 정당성을 따지면 그 용어를 쓰는게 참으로 웃길 일입니다만...


이렇게 분단 체제에서는 상대방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나에게 정통성이 100프로 있다고 강조하는게 보통입니다. 특히나 서로 전쟁까지 치른 사이기에 더더욱 그렇죠.


서로 대화를 아예 안한 것은 아닙니다. 2~30년대 소위 국공합작으로 잠시 싸움을 멈춘 적이 있었습니다. 중일전쟁 시기에는 일본에 같이 맞서 싸우기로 합의하기도 했었죠. 그러나 그 시기에도 중국 공산당과 모택동은 전쟁을 치르는 국민당과 같이 협력하기보다는 관망하며 세력을 키우는 데에 치중했죠.”


갑자기 강의실 바깥에서 우르릉 하는 소리가 났다. 천둥 소리였다. 김혁 교수가 ‘날씨가 제 수업이 맘에 안든다고 하네요.’하고 농을 치자 학생들이 웃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8월에 국민당간 공산당 간 교섭 회담이 개최되고 같은 날 10월 10일, 쌍십절, 남중국의 국경일이자 신해혁명이 일어난 날이죠. 소위 쌍십 협정이 체결됩니다. 양당간 화평을 추구하고 중국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이었죠. 그러나 공산당은 이러한 협정을 지킬 생각이 없었습니다. 특히 공산당은 당시 중국 유일의 합법 정부였던 국민당의 군대 해체 요구를 전혀 이행하지 않았고 군대를 계속 유지했습니다. 국민당군과 공산당군 간의 국지전도 재개되었죠.


특히 여기 슬라이드에 나와있는 영역을 보세요. 만주와 화북 등 공산당군이 장악한 곳인데 이 곳은 국민당의 통제력이 전혀 미치지 못했죠. 공산당 뿐만 아니라 소련도 문제였습니다. 스탈린은 얘기했던 대로 오히려 공산당에게 물자를 지원하고 만주 지역을 반환할때도 중화민국 정부가 임명한 인사가 아닌 공산당 간부에게 행정권을 무단으로 넘겨주는 등 분단을 계속 부추겼습니다.


특히 위구르스탄. 즉 신강 지역은 아예 소련군이 철수를 하지 않고 계속 주둔해 있었습니다. 주둔 중이던 1945년 11월에 중화민국 소속 1개 중대가 위구르와 카자흐계 민병대를 진압하겠다는 명목으로 위구르스탄의 행정 구역 일부를 넘어왔을 때 소련군이 이를 막다가 발포를 하여 양쪽에서 사상자가 10여명이 난 사건도 있었죠.


이 사건이 벌어지자 장개석은 분노하여 스탈린에게 서한을 보내 위구르스탄에서의 군대 철수를 요구하지만 스탈린은 어차피 나중에 돌려줄 텐데 지금 말고 추후 다시 논의하자며 철수를 거절합니다. 만주를 반환하던 시기에 위구르스탄 역시 중화민국이 아닌 위구르계 반군 세력에게 행정권을 넘겨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독립하죠.


장개석 총통이 은퇴하고 막후에 있던 시기죠. 1973년에 공개한 회고록에서 그는 이 시기 소련의 행동을 보면서 소련과의 대화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무슨 소리냐면 이 시기는 스탈린을 통해서 중국공산당에 압력을 행사하려는 기대를 아주 약간 가지고 있었지만 만주와 위구르스탄에서 소련이 보여주는 행동을 통해 역시 평소 자신의 신념대로 중국공산당에 대해선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음을 확신했다는 거죠. 그리고 나아가 할 수 있다면 미국과 협력해 소련에 무력행사를 하는 것도 희망했다고 합니다. 이 발언은 웨드마이어 대사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증언한 것과 교차검증되는 내용입니다.


웨드마이어 대사 얘기를 좀더 하죠. 그가 중국, 정확히는 장개석과 인연을 맺게 된 건 전쟁 중인 1943년 4월이었습니다. 나중에 미국의 국무장관을 지냈고 마셜플랜으로도 유명하죠. 조지 마셜 장군의 부관이었는데 중국군의 참모장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가 이때 참모장이 된 이유는 전임자가 문제가 많아서 그랬는데 여기 사진 나와 있죠. 조셉 스틸웰 장군 이 사람은 중국어에는 능통했지만 참모장 임기 내내 장개석, 중국 정부와 굉장히 갈등이 심했습니다. 사실 조언을 하려고 참모장이란 직책이 생겼는데 그 직책과 아주 거리가 먼 행동을 했었죠. 중국 정부와 장개석을 면전에서 모욕하고 폄하했고 심지어 공산당을 찬양했었죠. 결국 중국 측에서 전쟁이 한창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참모장 교체를 강력하게 요구했고 그 요구가 받아들여졌습니다. 문제는 스틸웰의 의견이 미국 정계에서 생각하는 것과 비슷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웨드마이어가 참모장이 된 것이죠. 그는 전쟁 중에도 그리고 특히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중국 공산당과 소련의 야망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경계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소련과 공산당을 과소평가하는 의견이 미국 정계에 퍼져있을 때 웨드마이어는 본인 말로는 장개석을 직접 만나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인식과 달리 장개석은 원조 액수가 턱없이 부족함에도 효율적으로 일본에 맞서 싸웠고 승리했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미국 정부에 상황을 알리며 지원 액수를 늘리고 중국군, 오늘날 남중국군이죠. 군대의 현대화 작업을 추진하고 미국에 장개석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정치인들을 설득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국민당-공산당 간 연합 정권은 애초에 불가능한 개념이라고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공산당의 미움을 샀죠.


제 유학 시절 기억이 납니다. 87년 봄으로 기억하는데 북중국 정부가 편찬한 공식 역사서를 대학 도서관에서 읽었습니다. 공산당의 역사관을 담고 있었는데 거기서 현대 중국사의 역적을 거론하면서 장개석, 장경국, 송미령, 대계도(戴季陶, 다이지타오)등을 얘기한건 남중국측 인사라 그렇다고 치는데 거기에 미국인인 웨드마이어가 끼어있었다는 거죠. 역으로 공산당이 이 사람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46년 초에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정전 협정이 맺어져 국지전이 중단되고 그 직후 웨드마이어가 중국 대사로 임명되었을 때 공산당이 강하게 반대하여 대사 임명이 불발됩니다. 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중국 대사로 복귀하지만요.


이 웨드마이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결국 일이 벌어집니다. 장개석은 일단 공산당을 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여 정전 협정을 파기하고 46년 여름 하북성 일대 전면 공세를 감행하면서 중국 내전은 전면전으로 발전합니다. 자. 지금까지는 전쟁의 시작을 다뤘고 앞으로는 이 3~4년간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 양상을 상세하게 다뤄보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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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1. 북중국의 전쟁 개입 미화 +2 22.12.05 91 3 9쪽
10 10. 양 중국은 한반도에서 어떻게 싸웠는가 +2 22.12.03 102 3 9쪽
9 9. 두 영화 +2 22.12.01 86 3 7쪽
8 8. 남중국은 어떻게 생존했는가 +2 22.11.30 97 3 10쪽
7 7. 회하에서 공산당의 진격을 저지하다. +2 22.11.29 110 3 12쪽
» 6. 장개석, 휴전을 파기하다 +2 22.11.28 112 3 12쪽
5 5. 위구르의 분리 그리고 웨드마이어 +2 22.11.25 117 3 9쪽
4 4. 브란덴부르크 문에 성조기를 건 미군 +2 22.11.24 138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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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 오리엔테이션 (교수가 수업을 시작하다) +4 22.11.22 188 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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