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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님의 서재입니다.

현대 중국은 왜 남북으로 갈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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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작품등록일 :
2022.11.21 22:37
최근연재일 :
2023.02.0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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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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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5,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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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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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2. 오리엔테이션 (교수가 수업을 시작하다)

DUMMY

- 교수가 출석 체크를 하고 수업을 시작하다. -


김 교수는 컴퓨터 바탕화면에 있던 PPT 파일을 하나 켰다. 슬라이드에 ‘중국분단과 국제관계사’란 타이틀이 큼지막하게 붙어있었다.


“날씨가 추워지고 있죠?”


교수의 물음에 학생들이 단체로 ‘네’라 답했다.


“제가 2주 전에는 학술 세미나 때문에 부산에 내려갔다 왔는데 거긴 평양보다 훨씬 덥더라고요. 부산에 있다가 또 역사 학술 대회 때문에 며칠 전에는 저기 청진에 있는 함북대학교를 갔더니 같은 여름 날씨래도 분위기가 확 차이가 나더라고요. 좁은 땅이지만 이렇게 차이가 나네요.”


김 교수는 슬라이드를 한 장 넘겼다. 슬라이드에는 그의 사진과 함께 약력이 간략하게 써져있었다.


“일단 제 소개부터 하죠. 나는 김혁 교수라고 합니다. 사학과에서 동양사학을 가르치고 있죠. 개인사를 얘기하자면 우선 억양에서 바로 알 수 있듯이 평안북도 출신입니다. 강계라고 여러분이 고등학교 시절에 한국지리에서 배웠다면 알 수 있듯이 분단 이후 90년대 중반까지는 잠시 자강도로 불렸다가 통일 이후에는 평안북도로 원상 복귀됐죠. 혹시 여기 강계나 주변에서 오신 학생 있나요?”


한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강계는 아니고 만포시에서 왔습니다.”


“아, 근처군요. 사실 일제 시대만 하더라도 원래 만포가 강계에 속했죠.”


“네,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그러니까 통일 세대인 여러분과 달리 분단 시절, 그리고 공산주의 시절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14살까지 강계에 살다가 함흥으로 이주했고 거기서 고등중학교를 마치고 나서 나는 바로 북중국으로 유학했습니다. 성적이 괜찮았거든요. 북경대에서 중국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했습니다. 사학이나 철학이 아닌 외국어를 굳이 북중국까지 가서 공부한 이유가 있다면 처음에는 외교관을 꿈꿨었거든요. 그 당시에는 북한 체제가 무너진다고 전혀 상상을 못했어요.


어쨌든 졸업하고 군관, 오늘날에는 장교라고 하죠. 당시 북한의 수도였던 함흥에서 군 복무를 하고 결혼도 했었는데 그때가 95년에서 96년 사이였죠.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대량 아사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걸 봤습니다. 제 고향에서도 피해를 본 친인척들이 많았죠. 그리고 공산 정권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나고 쿠데타가 일어나고. 남한군과 미군이 평화 유지 명목으로 39도선을 넘어왔고... 이 이야기들은 여러분이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배웠거나 아니면 부모님들께 들어봤을 겁니다. 저는 그걸 직접 경험했죠.


그렇게 세상이 바뀌고 97년이 되면서 저는 대학을 다시 다니기로 결심했습니다. 다행히도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서 최종적으로는 남중국의 국립정치대학에서 동양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죠. 국립정치대학에서 공부할 때 하필이면 남중국이 금융위기를 맞는 바람에 어려움이 있기도 했었습니다만 결론적으로는 무사히 박사 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취득했죠. 그 뒤에는 또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와세다대의 현대중국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최종적으로는 여기 평양대에서 교수로 있습니다. 중간에 몽골국립대학교에서 잠깐 교환교수로도 있었고요.


동양사학자로서 조금 뜬금없겠지만 유럽에도 잠깐 있었어요. 장 모네(Jean Monnet) EU 센터라고 우리 대학에도 있죠. 유럽연합 집행위에서 지원하는 아시아-유럽 학술 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프랑스 파리 대학교에서 1학기 동안 동양사학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어때요. 제 히스토리가 좀 많이 복잡하죠?”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내가 이 얘기를 굳이 하는 이유는 제 학문적, 개인적 경험이 바로 이 현대 동아시아사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저는 지금은 사라진 나라죠. 한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불렸던 구 북한 지역에서 태어나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를 20대 중후반까지 경험했습니다.


대학 교육은 처음에는 북중국에서 받았고 그 다음에는 통일된 한국에서 다시 공부하면서 옛 남한 지역에서 남한식 교육을 받으면서 남한 지역 사람들과 어울리게 됐죠. 그러다가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다시 중국 대륙으로 갔죠. 이번에는 제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중국, 그러니까 남중국의 관점에서 중국사를 연구했습니다. 일본에서 중국을 연구하는 연구원으로도 있었으니 아시아 주요 4개국을 직접 경험했죠. 그 외에 몽골에서도 있었죠. 역사란게 결국 과거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현재 살아가는 우리가 직접 겪는 살아있는 경험이라 할 수 있죠. 그 점이 사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써 느끼는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김혁 교수는 말을 마치고 또다시 슬라이드를 넘겼다. 사진 두 장이 있었다. 왼쪽에 놓인 사진은 파란색 기와가 두 개 놓인 거대한 건물이었고 오른쪽 사진 역시 광장 한가운데 덩그라니 놓인 붉은 지붕의 거대한 영묘였다.


“자 이제 본격적인 우리 강의 주제로 넘어가보려고 합니다. 그 전에 이 사진들을 한번 봅시다. 어딘지 알겠어요?”


여학생 하나가 남경과 북경이라고 넌지시 말했다.


“잘 아는군요! 맞아요. 왼쪽은 남중국 수도 남경의 중정기념당입니다. 장개석 총통을 추모하여 세워진 기념관이지요. 오른쪽은 북중국 수도 북경의 모주석기념당입니다. 모택동 주석의 시신이 안치되어있지요. 모두 제가 찍은 사진들입니다.


장개석과 모택동 이 두 사람은 현대 중국사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각각 남과 북을 상징하는 인물들이죠. 이들이 태어났을 때는 모두 청나라라는 하나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무너진 후 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시절에도 중국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하나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잘 아시죠.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분단국가입니다. 민족이 아닌 이념으로 분단되었던 나라들 중에서는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전의 결과 두 사람은 이 거대한 중국 대륙을 반반으로 나눠 각자 통치하게 되었고 70년이 지난 지금 두 중국은 아주 다른 나라가 되었습니다. 정치는 물론이거니와 사회, 문화도 서로 달라졌고 심지어 쓰는 문자도 달라졌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교수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생수병을 따고 물을 한잔 마셨다. 그리고 또다시 슬라이드를 넘겼다. 이번에는 중국 대륙의 지도였다. 청해성-사천성 일대부터 서안, 황하, 산동성-강소성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경계선이 대륙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수도임을 나타내는 큰 표시가 두 개 붙어있었다. 남경과 북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외국인 학생들이 몇 명 있죠. 혹시 남중국이나 아니면 북중국에서 온 학생 있나요?”


여학생 1명이 손을 들었다.


“아 어디서 왔나요?”


“지금 국적은 남중국이지만 태어난 곳은 북중국입니다.”


이 학생은 유창한 한국어로 대답했다.


“오, 학생은 북중국 어디에서 태어났나요.”


“산서성(山西省, 산시성) 태원(太原, 타이위안)이라 하는데 7살 때 부모님과 같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기억은 많지가 않아요.”


“지금은 어디 사나요?”


“절강성(浙江省, 저장성) 항주(杭州, 항저우)입니다.”


“북중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태어난 곳이자 제 뿌리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다시 가고싶지는 않아요. 부모님으로부터 그 곳에 대해서 좋지 않은 얘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또 집에서 식사를 하면 항상 산서식으로 먹거든요. 식초를 많이 넣는다든가 도삭면을 해먹는다든가. 그러면 또 그곳과 무언가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은 들어요. 정확히는 정치 이런게 아니라 그곳의 문화에 연결감을 느끼는거죠. 그렇지만 저는 그 이후 평생을 남쪽에서 살아왔고 남중국의 자유로운 삶에 익숙하니 거기에 더 친근감을 느끼죠.”


“그렇군요. 어쩌면 학생의 존재가 이 수업이 말하고 싶은 바를 잘 대변하는 것 같네요 하하.”


“사실 그래서 이 수업을 꼭 듣고 싶었습니다.”


학생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이 수업은 분단 중국이라는 역사적인 특수 상황이 발생하게 된 배경과 그 분단사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진행되고 정립되어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국제 관계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자 개설되었습니다. 이 수업을 통해 여러분이 우리의 이웃 나라들을 온전히 이해하고 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길 바랍니다. 본 수업은 사학과 전공 수업이지만 최근의 국제 정치 상황을 봤을 때 타 학과 학생들에게도 유익한 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까전에 제가 제 개인사를 설명하면서 유럽에도 있었다고 잠깐 얘기했죠. 제가 왜 그 얘기를 굳이 꺼냈을까요? 제가 발이 넓다고 자랑하려는 건 아닙니다. 이 수업의 특성과도 연결되어 있어서요. 물론 동양사학과 서양사학은 우리 대학의 교과목상 서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관점에서 적어도 근대에 들어와서 동서양은 절대로 서로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젠 서로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 사이죠. 그 구분이 무의미하진 않지만 또 한편으로 그 경계가 많이 흐려졌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개설한 이 강의가 그렇습니다. 현대 중국사를 중심으로 얘기하지만 역시 주변국과 연계되어있고 또 현대 서양사를 빼놓고서는 이 중국 분단사를 온전히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간 중간에 당대 유럽과 미국의 상황을 설명하고 분석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죠. 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앞서 이 점을 먼저 여러분도 짚고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일단 첫 시간이니 분단사와 분단 배경을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는 걸로 시작하죠. 대략적인 흐름을 이해해야 그 다음부터 본격적인 얘기를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준비가 됐죠?”


학생들은 다시 이구동성으로 ‘네’라고 외쳤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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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 번외: 티베트의 독립 +2 22.12.11 85 2 9쪽
11 11. 북중국의 전쟁 개입 미화 +2 22.12.05 91 3 9쪽
10 10. 양 중국은 한반도에서 어떻게 싸웠는가 +2 22.12.03 102 3 9쪽
9 9. 두 영화 +2 22.12.01 86 3 7쪽
8 8. 남중국은 어떻게 생존했는가 +2 22.11.30 97 3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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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오리엔테이션 (교수가 수업을 시작하다) +4 22.11.22 189 5 10쪽
1 1. 프롤로그 +2 22.11.21 302 5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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