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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님의 서재입니다.

전대 성녀의 대체품이 되었으니 탈출을 희망한다.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heide1991
작품등록일 :
2020.05.20 01:46
최근연재일 :
2020.05.22 22:55
연재수 :
6 회
조회수 :
175
추천수 :
18
글자수 :
39,541

작성
20.05.20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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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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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5화.

DUMMY

“뭐냐.”


“..아닙니다.”


키오첸은 ‘흐응?’하고 떠보듯 날 잠시 지켜보았다.

벌써 몇주째일까. 그는 바쁜 일이 없을 땐 반드시 나와 함께 식사를 했다. 그것도 아침 저녁으로. 하루의 시작과 끝을 저 미친놈과 함께 해야한다니. 스트레스로 거의 매일 체하곤 했지만 내겐 거부권이 없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얼굴을 마주봐야 하는 것일까.


‘감시라면 지아노를 통해서 보고받는 걸로도 충분할 텐데 굳이···?’


직접 확인을 해야만 성에 차는 것일까. 어쩌면 내가 체념한 채로 얌전히 지내는 꼴을 보아야만 기분이 좋아지는 걸지도 모른다. 이 사이코패스 새끼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파비오가 그러던데. 배우는게 빠르다고.”


“···악센경은 좋은 선생님이니까요.”


“그런 말도 할 줄 아나?”


그는 의외라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의견을 구하듯 옆에선 란테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란테가 지그시 처다보며 말했다.


“저렇게 대답하는 것도 예법 중 하나일 지 모르겠군요.”


“아. 하긴 그렇지. 그나저나 말을 배우는게 정말 빠른걸. 아직 한달도 채 되지 않았을 텐데.”


‘전부 니가 강행군으로 굴려서 그런거잖니. 이 빨간 파프리카같은 새끼야.’


반질반질한 붉은 머리나 씨앗같이 노란 눈(금색이지만)이 어디로 보나 파프리카다. 옆에 서있는 란테는··· 늙은 호박쯤 되려나. 인성들이 다 핵폐기물 수준이어서 잘생긴 얼굴이나 근육질의 몸도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빠르단 말이지..”


의심하듯 눈을 흘기는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나는 담담하게 스프를 마셨다. 이제 이런 눈길 쯤은 익숙하다. 그리고 나도 이상할 정도로 빠르다는 데엔 동의하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오래 전에 배웠던 것을 복습하는 느낌이었다. 일상회화는 이제 어느정도 할 수 있고, 예의있게 말하는 법도 배웠다.


키오스 이상의 신분을 가진 사람에겐 성과 함께 ‘님’을 붙이고 그 이하는 ‘경’을 붙인다는 것. 그리고 성이 없는 평민은 그냥 이름으로 불러도 된다는 것을.(참고로 어지간히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보통 성으로 부른다고 한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예를 표할 땐 직책과 함께 풀네임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평민의 경우엔 귀족의 이름은 물론이고 성도 부를 수 없고, 오직 풀네임이나 직책으로만 부른다고 한다. 예비 성녀로서의 나는 위치가 좀 애매했다. 일단은 준귀족에 속해서 귀족과 평민의 사이에 있지만, 키오첸이 데려왔기 때문에 키오첸보다 낮은 사람들을 높여 부르는 것은 그의 체면을 상하게 하는 일이란다.

그래서 실제로는 나보다 위인 파비오에겐 존대는 해야하지만 호칭만큼은 ‘님’이 아닌 ‘경’을 붙여 ‘악센경’이라고 불러야 한단다. 이미 반말에 이름까지 부르고 있지만, 단 둘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존대와 호칭에 신경써야 한다고 지아노가 알려주었다.

참고로 기사인 란테나 시종인 지아노는 그냥 ‘란테’, ‘지아노’라고 부르면 된다.


“그러고 보니 연회가 언제였지.”


“3주 후입니다.”


란테는 그렇게 대답하며 날 쳐다보았다.


“그때 선보이실 생각이십니까?”


“계획했던 것보다 이르긴 하지만.. 나쁠 것 없겠지. 한시가 급하니 말이야.”


두 사람이 무언가 상의하기 시작한 틈을 타 나는 내 왼편에 선 지아노에게 물었다.


“지아노. 무슨 연회를 말하는 거야?”


“가농의 탄신연회를 말하는 겁니다. 이제까지 성녀님들은 국가 기념일에 열리는 연회에 소개되었는데, 이번엔 탄신 연회가 되겠군요.”


“탄신연회.. 생일이구나.”


황제 칼로스 첸의 생일. 그렇다는 건 키오스 첸도 곧 생일이라는 말이다. 두 사람은 쌍둥이니까.


“뭐냐. 왜 그렇게 쳐다보지? 혹시 내 부인이 되고싶어지기라도 한 건가?”


“설마요.”


나는 반쯤 포기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웃어보였다. 속으로는 ‘X까 새끼야.’라고 말하면서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는 모르겟지만 키오첸은 맘에 든다는 듯한 얼굴로 ‘그렇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당하는 게 좋은 것일까. 어쩌면 사이코패스 성향 외에 마조히스트 기질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처음 거절했을 때도 낄낄거리며 좋아했었지.


‘미친놈. 저런 새끼랑 결혼한 여자들은 분명 다 불행하겠지.’


얼굴만 멀쩡한 미친 살인마다. 잠자리에서 무슨 짓을 할 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니 잠깐. 나 왜 상상하고 있지. 왜 저딴놈을.. 더러워. 뇌를 꺼내서 씻어버리고 싶다.’


실제로 속이 좋지 않아졌다. 헛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고개를 세차게 저은 뒤 마음을 가다듬으니 키오첸과 란테가 이야기를 하다 말고 날 빤히 바라보았다.


“어딘가 정신이 이상한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3주 후는 무리야.”


“일단 진찰을 받아보도록 할까요.”


‘진짜 정신이 이상한 게 누군데 이 썩을 놈들이.’


욕지거리를 뱉어내고 싶은 걸 꾹 참고 나는 빠르게 식사를 마친 뒤 키오첸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창 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은 식기가 빛났다.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부드러운 바람에 섞인 풀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봄이구나.’


갇혀있는 동안 계절이 바뀌어버렸다. 내가 기다리다 지쳐 감겨오는 눈을 끔뻑거리는데 키오첸이 갑자기 식사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쁜 일이 생겨서 먼저 일어나보도록 하지.”


“아, 네.”


‘바쁜데 무슨 밥은 한시간 씩이나 처먹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나는 황급히 그를 따라 일어나 허리숙여 인사했다. 식사 자리를 파하고 긴장이 풀리니 다시금 졸음이 쏟아졌다. 파비오가 올 때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잠깐이라도 자 두는 게 좋겠다. 요즘 들어 부쩍 몸이 나른하다.


.

.

.


“각 지역에서 보충하고는 있지만, 턱없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골치아프군. 코르반에 가는 마력이 너무 많아.”


“이참에 끊어내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도 많습니다.”


“미친 짓이지. 죽자고 덤벼드는 놈들이 제일 무서운 법이야. 게다가 수인이다. 개개인의 전투력으로 따지면 우리가 한참 밀려.”


“마력을 주입시킨 원거리무기에 대한 연구가 한창 진행중이니, 결과가 나온다면 아주 불가능 한 것도 아닐 듯 싶습니다.”


“아아. 그 연구원 말인가. 파비오의 친척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쪽 핏줄은 하나같이 머리가 좋았지.”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마력은 본인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 그 위력이 급감한다. 무기를 개발해도 직접 손에 쥐고 쓸 수 있는 검이나 창 뿐. 활에 마력을 담으면 대상에 닿기 전에 사라져 평범한 화살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평범한 화살로는 수인족의 살을 파고들기 힘들다. 애당초 이러한 특성 때문에 성녀가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마력은 몸에서 떨어져 나온 순간 빠르게 소모된다. 때문에 개인의 힘으로 땅을 정화시킬 수도, 다른 지역에 나눠줄 수도 없다.

오직 태양의 축복으로 깃든 대지의 마력만이 토양을 정화시키고 다른 땅으로 옮겨가서도 그 위력을 잃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여신의 자애로운 손길이고, 그것과 동일한 성질을 가진 마력을 가진 이가 바로 성스러운 자, ‘엘칸토’가 될 수 있었다.


‘이미 버려진 땅을 살리기 위해 계속해서 소환해왔지. 대체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지..’


키오스 첸은 자신의 붉은 머리칼을 헝클이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창 밖으로 보이는 정원에선 부인들끼리 티파티가 한창이었다. 이따금 키오스의 집무실 쪽을 올려다보는 이들도 있었으나 감히 그에게 아는 척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고 보니 언제가 마지막이었지. 후계자 이야기가 다시 슬슬 나올 때인데. 더럽게 귀찮군.’


“그러고 보니 최근엔 합방을 하지 않으시는군요.”


“······난 가끔 네가 무서워.”


키오스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참모 겸, 호위기사 겸 소꿉친구인 란테를 올려다보았다. 무식할 정도로 키가 큰 남자는 자신의 주군을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오래 모셨으니까요. 잠자리를 하실 거라면 2부인이 좋을 겁니다. 1부인은 몸이 약해서요. 아이를 낳기도 힘들겠지만 낫는다 해도 오래 살지는 못할 겁니다. 그 외의 부인들과는 후계가 생겨 봤자 2부인이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 추천은 못 드리겠군요.”


“여자는 참 무서운 존재야.”


“모두에게 두려움을 사시는 분이, 무서운게 참 많으십니다.”


“아니, 정말로. 난 그렇게 앞에서 웃고 뒤에서 무슨 짓을 벌일 지 모르는 것들은 이제 상종하고 싶지가 않아. 네가 날 대신해서 후계를 만들어 보는 건 어때.”


“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하···”


키오스 첸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걸 검지로 누르며 눈을 감았다. 또 체하기라도 한 것일까. 최근 마력고갈로 4대륙은 아슬아슬한 평화관계를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유일한 마력 공급원인 인데라 제국이 다음 신전개방일 때 원하는 만큼의 마력을 주지 못한다면, 그땐 정말로 이 형식적인 우호관계조차 완전히 깨져 버릴 것이다.

벌써 7년 째다. 전대 성녀가 남겨두고 간 마력은 이미 바닥을 보인지 오래였다. 영지마다 마력을 긁어서 보내주고 있긴 하지만 상처에 침을 발라주는 수준이다. 턱없이 모자랐다.


‘마력. 그 아이가 마력을 다루는 것까지 빠르게 익혀준다면 어쩌면 올해는···’


키오스는 방금전 식탁에서 꾸벅거리며 졸던 서경이 생각나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 참. 화를 내다가 배부르고 따뜻하다고 갑자기 졸다니. 갓난 아기도 아니고..’


자신을 죽이려 할 때도 그랬다. 순수한 적의. 분노. 서경의 행동은 모두 아주 간단하고 순수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분노하고, 절망하고, 슬퍼하고. 복잡할 것이 없었다. 있는 그대로 드러내 주는 그 반응이 키오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사랑한다고 했다가 죽이려 들진 않을 테니.’


“올해도 아무 준비도 하지 말라고 이를까요.”


“아아. 어차피 칼로스의 탄신연회에서 축하라면 질리게 받을 테니.. 그리고 별로 기념하고 싶지 않아.”


생일이 다가온 다는 건, 기일도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전대 성녀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의 영혼은 영원히 이승을 떠돈다지."


“어릴 때 성서 수업에서 그렇게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군.”


작가의말

가입한 지 24시간이 지나지 않아 답댓글을 쓸 수가 없네요 ㅠㅠ

지난 회차에서 서경이 여자였냐고 하셨던 독자님, 제가 여주인공을 너무 터프하게 설정했나 봅니다.

혹시 다른 궁금하신 점이나 작품에 의견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봐주시는 분들 한분 한분 정말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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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성녀의 대체품이 되었으니 탈출을 희망한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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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화. +3 20.05.20 58 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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