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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님의 서재입니다.

전대 성녀의 대체품이 되었으니 탈출을 희망한다.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heide1991
작품등록일 :
2020.05.20 01:46
최근연재일 :
2020.05.22 22:55
연재수 :
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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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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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글자수 :
39,541

작성
20.05.20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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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4화.

DUMMY

“침착하시군요.”


“···?”


앞뒤가 잘린 말에 영문을 몰라 바라보니 지아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에 말에 따르면 내가 역대 성녀들 중에 가장 체념이 빠르단다.


‘딱히 체념한 건 아닌데.’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낯선 세계로 끌려와 친구가 눈앞에서 죽임을 당한 지 겨우 일주일. 나는 규칙적으로 일어나서 시종들이 씻겨주면 방에서 아침을 먹고, 시키는대로 이곳의 언어와 역사를 공부하고 저녁에는 키오첸과 식사를 하며 오늘 배운 단어를 써가며 이야기를 하거나 했다.

그야 기회만 된다면 당장이라도 키오첸을 죽이고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는 란테와 간간히 보여지는 기이한 마술구들. 창밖으로 보이는 병사들까지. 전부 내가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직까지는.


“나는 이기적이야.”


갑자기 시무룩한 말이 튀어나왔다. 원래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째서인지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스스로의 눈꼬리가 내려가는 걸 느끼면서,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만 살아있어.”


‘뭐야 내 목소리 왜이래.’


생전 처음 내보는 연약한 목소리에 당황하면서도, 나는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직접 보지 않아 진짜 처연한 지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지아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살기 위해 애쓰는 건 나쁜 게 아닙니다. 누구든 죽음을 피하기 위해선 처절하게 몸부림치죠.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존재가 없는 이상,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가장 우선시 하는게 당연합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존재’라는 부분에 유독 힘을 주어 말했다. 시종인 그에게 있어 그런 존재는 키오첸과 같은 주인인 것일까. 그런 인간 말종한테 충성한다는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지만, 내 상식을 떠나서 이상하게도 그가 키오첸에게 완전히 충성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캐물어볼까? 아니지. 괜히 떠봤다가 쓸데없는 의심을 살 수도 있는데.’


머뭇거리는 사이 휴식시간이 끝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부 비워져 있는 삼단 디저트 접시를 조금 당황해서 바라보고 있자 지아노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디저트를 좋아하시는군요. 다음부터는 오단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나 단 거 안좋아하는데···?’


정말로 싹싹 비웠다. 입에 대자마자 ‘으, 달아.’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 입에 들어간 기억이 희미하다. 단순히 스트레스를 받아서일까. 요 며칠간 귀신에라도 씌인 것처럼 입맛도, 취향도 바뀌어가고 있었다. 말보다는 행동이 먼저 튀어나가는 성격임에도 묘하게 머리가 차분해져서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도, 밀크티와 마카롱에 환장하는 입맛도 어딘가 찜찜하다.


-키오스 첸 파시오스 라 그에누께서 원하신다면..-


‘분명 그때부터인 것 같은데..’


심증은 있으나 확인할 방법이 없다. 아직 말도 잘 못하는데 대체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할지 막막하다.


‘일단 시키는대로 공부부터 하자. 아는게 많아지면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도 떠오르겠지.’


자리에서 일어나 지아노를 따라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치의 언어 공부는 두번째 해가 뜨기 전에 끝냈고 지금부터는 내가 속해있는 이곳, 그에누 영지와 인데라 제국에 대해 배울 차례였다.

어제까지 4대륙이 처음 나뉘게 된 사건과 1200년동안 지속되었던 전쟁에 대해 대략 이야기를 들었으니 오늘부터는 평화조약을 맺은 후 제국 내에서 있었던 전쟁이나 사건에 대해 배울 터였다. 유능한 시종인 지아노는 교사로서의 경험도 풍푸한 것인지 제법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오늘부터 역사는 제대로 된 교사에게 배우게 될 겁니다.”


지아노가 훌륭한 교사라고 생각하며 혼자 끄덕이는 찰나, 갑자기 그가 새로운 교사를 언급했다.


“지아노는?”


“저는 일개 시종이니까요. 사실은 서경님께서 조금 더 적응이 되시면 부르려했습니다만, 파시오스(키오첸)께서 어제 저녁식사 이후에 내일부터는 교사를 불러도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하. 내 상태가 좋아보이니 후딱 공부를 시키려는 속셈이구나.

나는 알겠다고 답한 뒤 그를 따라 언제나 가던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는지 책상에 걸터앉아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남자의 실루엣이 역광으로 빛났다. 하나로 묶은 연보라색의 긴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는 바람에 꽃잎처럼 흔들렸다.


‘···맙소사.’


곁에 있는 사람을 빚다 만 흙 덩어리로 만드는 외모는 키오첸으로 끝일 줄 알았는데,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수려한 미남이 눈을 곱게 접으며 다가오니 이게 현실인지 다시 한 번 의심하게 되었다. 지아노가 말했다.


“소개드리겠습니다. 이쪽은 이번에 성녀소환의식에서 키오스 첸 파시오스 라 그에누의 선택을 받으신...”


“네가 새로 온 성녀님이구나!! 잘 부탁해! 15년 만이네. 아 그 사이에도 몇명 소환되긴 했는데 오자마자 다 키오스가 죽여서 내가 가르칠 일이 없었거든. 이거 그리운걸. 네 이전에 온 성녀도 내가 교육했어. 엄청난 노력가에다 어릴 때 와서 적응도 빨랐지. 너도 일주일만에 날 부를 정도인걸 보면 보통은 아닌 것 같은데! 아, 마력은 적다고 했나? 뭐 괜찮아. 너희쪽 세계 사람들은 소질만 있으면 연습으로 금방 늘어나거든. 우리랑 다르게 말이야. 아, 내 이름은..”


‘뭐지 이 자식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미남이라고 생각하자마자 손을 덥썩 붙잡고 붕붕 흔들어 대는 통에 더 감탄할 틈도 없었다. 내가 당황해서 뭐라 반응을 하지 못하자 지아노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그는 ‘아~ 미안.’하고 내 손을 놓은 뒤 한발짝 물러나며 말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엘칸토시여. 저는 파비오 악센 리르엔 라 그에누. 성녀님의 교육담당으로 지명되었습니다.”


“···저야말로.. 영광, 입니다. 파비오 악센 리르엔 라 그에누님.”


존칭은 익숙하지 않았고, 인사말도 쉽지 않아 더듬거렸지만 지아노는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 큰 성인이 이제와 옹알이를 하는 것처럼 우물거리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괜찮았는지 파비오 또한 ‘습득이 상당히 빠르시군요.’하고 놀라워했다.

배운 바에 따르면 이 남자의 이름은 파비오다. 이곳에서 제일 앞에 오는 건 이름, 그 다음이 성, 그 다음이 신분, 소속된 지역 순이라고 한다. 즉 그는 자신을 그에누라는 지역의 리르엔(백작), 파비오(이름) 악센(성) 이라고 소개한 셈이다.

그 방식에 따르면 키오스 첸 파시오스 라 그에누는 그에누의 파시오스(영주), 키오스 첸이고, 나는 그에누의 성녀 서경으로, 발음해보면 ‘서경 엘칸토(성스러운 인간) 라 그에누’라고 한다. 내 존재가 정식으로 국왕에게 인정받고 난 후엔 이름과 성이 새로 생긴다고 하니 이 이름은 임시로 쓰는 것이었다.


정식으로 소개를 마친 후에 파비오는 다시 원래의 태도로 돌아가 종알거리며 수업을 위해 가져온 지도와 교재들을 꺼냈다. 그중엔 점집에서 볼 법한 수정구처럼 생긴 물건도 있었다.


‘..새로운 마술구인가?'


“그나저나 소환되는 엘칸토들은 하나같이 머리가 검은색이네. 예전엔 다른 색도 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내가 본 성녀들은 전부 검어. 그쪽 세계는 검은 머리가 많은가?”


파비오는 내 옆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키오첸이 했던 질문과 비슷했다. 혹시나 해서 지아노의 반응을 살폈지만, 그는 이번엔 아무런 낌새 없이 잠잠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많지만··· 전부 그렇지 않아, 습니다.”


“존대는 됐어. 익숙해지면 그때 하면 돼. 나도 생략했으니까. 기왕 생략하는 거 그냥 이름으로 불러줘. 나도 성녀님 대신 이름으로 부를게.”


때마침 고마운 말이었다. 나는 그가 말을 무르기 전에 재빨리 ‘고마워 파비오.’라고 뻔뻔스레 대답했다. 지아노가 깜짝 놀라서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모른척 했다.


“음..전부는 아니지만.. 많아. 내가 살던 나라는 거의 다 검정. 다른 나라는 달라.”


“호오. 그럼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쪽 세계에서도 같은 나라 출신들이 성녀로 뽑혀왔다는 말이군. 이거 흥미로운데.”


‘그래 나도 그 점이 흥미롭다.’


“그럼 다른 나라 사람들은? 나 같은 머리색도 있나? 생김새는 어때?”


‘생김새'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나는 휘몰아치는 질문에 미처 다 뜯어보지 못한 그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우선 그는 연보라색의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길다. 관리를 잘 받은 것인지 샴푸 광고라도 찍을 것처럼 반짝거리고 윤기나는 머리칼이 한데 곱게 묶여서 늘어져있다. 눈은 청색과 보라색의 중간쯤 되는 오묘한 색이었고, 얼굴은.. 뭐라 설명하기도 힘들 정도로 정말 ‘잘’ 생겼지만 굳이 표현해보자면 새하얗고 오밀조밀했다. 딱 떨어지는 강한 인상의 키오첸과 대비되는 부드러운 얼굴선을 가지고 있었다. 얼핏 옆선만 보면 여자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 싶을만큼.

파비오 같은 머리색과 생김새라니. 내가 살던 세계에 존재할 리가 없었다.


‘란테나 지아노 정도면 어떻게 섞여볼 수도 있겠지만..’


“아니. 그런색 없어. 생김새도 달라.”


“흠.. 그렇군.”


“파비오님.. 슬슬 수업을 시작해 주심이...”


지아노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말하자 파비오는 ‘아, 그랬지 참.’하고는 완전히 잊고있었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괜찮은걸까 이 교사.’


얼굴만 멀쩡하고 나머지가 멀쩡하지 않은 것 아냐?

하지만 수업이 시작되고, 그런 내 걱정이 곧 쓸데없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지아노가 설명했던 것보다 알기 쉽고 빠르게 이전에 배웠던 4대륙의 전쟁을 훑었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처음 배우는 인데라의 역사를 설명했다.


“이곳 인데라는 4대륙 중에서도 태양의 축복을 가장 많이 받은 땅이야. 맞은 편 수인들의 대륙과는 정 반대지. 다른 대륙들은 수인들의 대륙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둠이 깔리는 건 마찬가지라, 평화조약을 맺은 이후에도 태양의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 여러방면으로 간섭해왔지.”


“태양의 축복?”


“쉽게 말해서 태양신이 이 땅에 내려주는 마력을 말해. 한 달에 한 번밖에 어둠이 찾아오지 않는 이곳은 다른 대륙보다 땅에 녹아있는 마력이 많아. 때문에 다른 대륙보다 농업이 활성화돼 있거든.

하지만 이런 땅에 녹아든 마법을 빨아들일 수 있는 마술구가 있어. 지금은 영주의 허가 없이는 사용이 금지되어 있지만 예전엔 빈번하게 다른 대륙 녀석들이 들어와서 몰래 빼가거나, 이곳 귀족들에게 돈을 주고 사가기도 했어. 덕분에 한창 수확량이 줄어서 곤란했었고."


그는 거기까지 말하곤 지토를 가리켰다. 유난히 크고 검게 표기된 대륙에 '코르반'이라고 적혀있는 것이 보였다. 파비오는 그 옆, 코르반의 절반 크기를 가진 대륙을 손가락으로 훓었다. 금칠이 되어있는 제국의 땅은 지도에서까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듯 보였다.


"4대륙 전쟁이 끝난지 130년이 지나고, 이후 40년 동안은 이 마술구를 팔아 넘기려는 귀족들끼리 땅을 넓히기 위해 쉴 새 없이 토지분쟁을 일으켰어. 토지분쟁이 잠잠해 진 건 더 이상 넘길 마력이 땅에 남아있지 않아서였지. 심각할 정도로 마력이 부족했어. 100년 쯤 지나서야 다시 마력이 채워지기 시작했는데 똑같은 일이 반복됐어.”


“오호라.”


“하지만 선황이신 유스 첸 가농 라 인데라께서 즉위하시고 마술구 관련 법안을 재정했어. 마력을 담을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마술구는 국왕이 영주에게 하사한 것 외엔 전부 몰수하고 발각되면 즉시처형. 이제까지 쏠쏠하게 돈을 챙겼던 귀족들이 반발했지만 그들이 정식으로 탄원서를 넣기 전에 준비해뒀던 부정청탁과 탈세, 불법 마력수출 등등.. 걸고 넘어질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찾아내서 재판에 넘겼고, 그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고 나서야 다들 조용히 물러섰다고 해.”


혼란스러운 시기의 사사로운 부정이야 다들 알면서 서로 묵인해왔던 것인데, 황권을 위협받을 걸 알면서 그것을 굳이 끄집어 내 재판에 회부하는 것은 상당히 번잡스럽고 피곤한 일이었다고 한다. 하다못해 귀족가라면 집에 하나씩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아카데미 부정입학건까지 끄집어 내서 물고늘어졌다. 그렇게 지금의 안정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애쓴 선황제에 대해 파비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번 뱀을 물면 놓치지 않고 죽을 때까지 흔들어 대는 사냥개를 닮았다고 해서, 선대 국왕을 상징하는 동물은 개였어.”


한마디로 개같은 황제.

칭찬인지 욕인지 미묘한 심볼이었지만 나는 일단 순진한 얼굴로 ‘선대 황제 대단하네~‘라며 선심쓰듯 박수를 쳐주었다.

파비오는 턱을 괸채 날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청보라색의 눈동자가 예쁘게 휘어지는 눈매 속에서 아련하게 빛났다.

···괜히 했다. 내 심장에 타격이 크다.


“선대 가농(황제)도 대단하지만 현대 가농도 만만치 않아. 역대 가장 사랑받는 지도자라고 평가받고있지.”


“오오..”


“참고로 키오스의 동생이야.”


“······오.”


키오첸의 동생이라는 말을 듣고 곧바로 표정을 굳히자 그는 키득거리며 ‘진짜로 얼굴에 다 드러나네.’라고 중얼거렸다. 내 반응에 파비오는 기분이 좋은지 그 예쁜 얼굴로 싱글거리며 본격적으로 국왕, 칼로스 첸 가농 라 인데라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의 가농(황제)은 나랑 키오스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야. 같은 선생님한테 교육받았거든. 그때까지만 해도 정식 후계자는 키오스였는데 말이야.. 뭐. 이런 저런 사정이 있어서 칼로스한테 넘어갔지. 아무튼.”


‘잠깐만. 제일 중요한 부분 아냐? 무슨 황제 자리가 반장도 아니고 그냥 넘어가?’


제일 중요한 부분을 ‘아무튼’이라며 얼버무린 파비오는 약간 내 눈치를 살피는 듯 시선을 움직이며 수정구에 손을 댔다.


“이건 사람의 기억을 최대한 끌어내서 재생시키는 마술구야. 가끔 내가 보았던 자료들을 보여주기 위해 쓰는데, 이번엔 특별히 어릴적의 칼로스를 보여줄게.”


‘..별로 보고싶지 않은데.’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뿌옇던 수정구의 안쪽이 안개가 걷히듯 서서히 맑아지고, 곧이어 어린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처음엔 한 명 이었는데 곧이어 한명이 더 등장했다. 둘다 붉은 머리를 한 7~8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나는 금방 그 중 한 명이 키오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둘 다 똑같이 생기긴 했는데 한쪽의 표정이 유독 더러웠다. 분명 그쪽이 키오첸이다. 그리고 아마 좀 더 온화한 눈을 한 소년이 칼로스 첸 가농 라 인데라, 현 국왕일 것이다.


“이쪽이 키오스고, 이쪽이 칼로스야. 구분이 가?”


“응.”


내가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파비오는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보통은 구분 못하는데.. 지금이야 두 사람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지만, 예전엔 정말 구분하기 힘들어서 유모도 종종 속였거든. 이 두 사람, 쌍둥이니까 말이지.”


“쌍둥이..”


하긴. 쌍둥이라도 성격은 다를 수 있지.

나는 처음 듣는 ‘쌍둥이’라는 단어를 읊조리며 수정구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키오첸이 칼로스를 앞지르며 이끌고 있었고,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파비오의 시선에는 밝게 웃는 키오스의 모습이 유독 두드러져 보였다.


“이 때만해도 밝았으니까. 키오스는..”


“······.”


그러고보니 이 인간. 특별히 칼로스를 보여준다고 해놓고 내내 키오스의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계속해서 재생되는 수정구의 영상 속에선 조금씩 커 가는 키오스 첸과 그의 옆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옅게 자리잡은 칼로스 첸의 모습이 보여졌다. 두 사람이 사이 좋게 검술 연습을 하는 모습이라던지, 마법 같은 걸 연습하다 옷을 태워서 아예 웃통을 벗고 있다가 유모한테 혼나는 모습이라던지, 다같이 목욕... 을 하는 모습이라던지. 파비오는 완전히 추억에 젖은 듯 내가 보고 있다는 건 까맣게 잊고 수정구에 집중하고 있었다.

솔직히··· 내 알바 아닌 정보들이다.

나는 더 보고싶지 않아 책상에 펼쳐둔 지도로 시선을 옮겼다. 잠깐 언급됐던 수인들의 대륙이 신경쓰였다. 이제까지 들은 걸로 봐선 이쪽 세계에서 ‘태양의 축복’이라는 건 꽤 중요해 보이는데, 수인들의 대륙엔 그게 거의 없는 것 같았다. 태양의 축복이 있어야 농업도 가능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수인들은 어떻게 살아남고 있는 것일까.


‘수렵···? 제법 큰 강이 있으니까 어업으로 생존하는 간가. 여긴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것 같은데 마법인지 마술인지 하는 것들로 불편한 것들을 해결하니까 어디까지 가능한지 잘 감이 안온단 말이지.. 수인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특별한 능력으로 뭔가를 재배하고 있을지도 몰라.. 언젠가 가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솔직히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키오첸의 발 아래 납작 엎드려 시키는대로 하고 있긴 하지만, 만약 나도 마력수련 이라는 것을 하고 어느정도 이 세계에 익숙해지면 이 끔찍한 저택에서 도망칠 날이 올 지도 모른다. 그 때에는 아예 이 대륙에서 벗어나 키오첸이 절대 찾아오지 못하는 곳.. 이 곳 사람들이 그렇게나 끔찍히 여기는 수인들의 땅으로 도망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파비오가 ‘아.’하고 작게 탄식하듯 소리를 내서 나는 다시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순간 검은 머리카락이 보이는 듯 했으나 지아노가 다가와 손수건으로 수정구를 덮어버리는 바람에 얼굴까지는 보지 못했다.


“···.? 무슨 짓이지?”


파비오는 불쾌한 듯 지아노를 바라보았고,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사과할 대상이 아닌 나를 응시했다.


“그것이··· 서경님께는 보여드리지 않는 게 나을 듯 하여..”


“···? 왜 그런 판단을 한 거지? 딱히 감출 일은 아닐 텐데. 키오스가 명령한 건가?”


“······.”


지아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파비오의 얼굴엔 처음에 보여주었던 장난기 넘치는 모습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가 눈살을 찌푸린 채 상당히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 정말이지 무례하기 짝이 없군. 네 주인과 이야기한 후 처벌을 내리겠다.”


“죄송합니다. 파비오 악센 리르엔 라 그에누님..”


“······.”


상황이 묘하다. 지아노는 수정구에 비친 누군가를 숨기려고 했다. 그 누군가가 그가 숨기고 있는 비밀의 일부분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뒤늦게 흘러내리는 손수건을 보았으나 수정구는 이미 다시 뿌연 구체로 돌아갔을 뿐,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았다. 망연히 그것을 바라보고 나를 향해, 파비오는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거 흉한 모습을 보였네! 뭐, 그래도 이해해 주길 바라. 원래 하인의 처벌은 주인과 상의해서 결정해야 하는 거거든. 당장 벌을 내리지 못하는 게 조금 안좋게 보이겠지만, 소유권의 문제니까.”


“벌? 어떤 벌?”


내 물음에 파비오는 어깨를 으쓱했다.


“허락도 없이 귀족의 물건에 손을 대면 보통 손목을 자르지만.. 지아노는 여기서 오래 일했고 키오스의 신임이 있으니 채찍질 정도로 끝날 지도 모르지. 그보다 서경. 너는 정말 전대 성녀를 닮았구나. 방금 보고 새삼 다시 느꼈어. 머리색도 비슷하긴 하지만 뭐랄까..”


그는 내가 떨고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무렇지 않게 머리카락이나 생김새 따위의 이야기를 했다. 전대 성녀에 관한 이야기가 꽤 즐거운지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어간다. 나는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지아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난감한 듯 신경쓸 것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고, 나는 그의 손목을 바라보며 수연이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아무렇지 않게 목을 자르는 인간들이다. 손목 정도는 가볍게 날아갈 것이 분명했다.


“파비오···”


나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매달리듯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함부로 귀족의 몸에 손을 댔으니 이제 내 손목도 날아가는 것일까.


“어? 왜 그래?”


그는 조금 놀란 듯 했지만 날 쳐내거나 하진 않았다. 나는 최대한 간절한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그에게 말했다.


“파비오 악센 리르엔 라 그에누님. 지아노를 용서해주세요.”


“뭐···? 잠깐만. 서경. 얼굴색이 왜 그래? 어디 아픈거야?”


“부탁드려요.”


내가 다시한 번 지아노를 용서해 달라 말하며 그의 손을 붙잡자 그는 내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며 난감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놓치지 않고 그와 시선을 맞추며 ‘제발..’이라고 간절히 애원했고 그는 못 이긴 척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다. 사과와 선처를 부탁하는 말이 내가 가장 많이 연습한 것들이어서.


“알겠어. 성녀님이 그렇게까지 부탁하는데 거절할 순 없지.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자기 사람에 대한 애착이 강하구나.”


그는 그렇게 말하며 지아노를 벌레보듯 했던 것과는 달리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흠.. 이건 어때? 서경이 내 부탁을 한번 들어주는 거야.”


“부탁..?”


“그래 부탁. 소원이라고도 할 수 있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내가 고개를 기울이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오늘 서경을 다시 만나면서 가설을 하나 세웠거든. 키오스가 모르게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


“키오스가···모르게?”


파비오는 키오첸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착각햇던 것일까. 조금 의아했지만 그정도로 끝낼 수 있다면 나로서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있다고 해도 거절할 수 없다. 손목이 잘린 채로 돌아와 내 옆에서 시중을 들 지아노를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나왔다. 피어 절은 시트의 온기가 떠올랐다.


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파비오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흥분한 듯 청보라색 눈을 빛내며 ‘약속이야.’하고 재차 확인했다.

이미 지아노의 무례는 잊은 듯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보고 나는 한숨 놓았다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지아노는 자신의 손목이 날아갈 뻔 했을 때보다 안색이 좋지 못했다.


수연이의 일이 떠올라서일까. 나는 이후로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어 수업을 중단했고, 이후 저녁식사에서 키오스가 혹시라도 파비오에게 무슨 말을 듣진 않았을까 긴장하며 식사를 마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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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성녀의 대체품이 되었으니 탈출을 희망한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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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화. 20.05.22 12 0 15쪽
5 5화. +2 20.05.20 17 2 11쪽
» 4화. 20.05.20 25 2 23쪽
3 3화. +1 20.05.20 30 2 12쪽
2 2화. +3 20.05.20 33 4 14쪽
1 1화. +3 20.05.20 57 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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