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he******* 님의 서재입니다.

전대 성녀의 대체품이 되었으니 탈출을 희망한다.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heide1991
작품등록일 :
2020.05.20 01:46
최근연재일 :
2020.05.22 22:55
연재수 :
6 회
조회수 :
177
추천수 :
18
글자수 :
39,541

작성
20.05.20 02:13
조회
33
추천
4
글자
14쪽

2화.

DUMMY

하얀 불빛이 보였다. 눈이 너무 부셔서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가 벌떡 일어났다.


‘···죽었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얀 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천이었다. 바깥이 비쳐보일 정도로 얇은 흰 천이다. 침대 주변을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다. 이걸 뭐라고 하던가. 캐노피? 문득 침대 주변을 둘러싼 천막 형태의 무언가가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침대..’


침대다. 분명 푹신푹신한 침대다. 기둥이 반질거리는 나무인데다 이불은 매끄럽고 하얀 걸 보니 제법 비싸보였다. 얇은 천을 걷어내고 침대 밖을 살펴보니 붉은색 계열의 커다란 양탄자가 깔린 바닥과 원목으로 된 티테이블, 커다란 책장이 보였다.


“······.”


사후세계에서는 개인공간이 주어지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목이 미친듯이 욱신거렸다. 한순간 자신이 얼마나 바보같은 생각을 했는지 깨달았다. 여긴 사후세계 따위가 아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지하공간에서 난 이곳으로 끌려왔고, 아마도 누군가 내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다른 애들은 어떻게 됐지? 혹시 다른 방에 있는건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방문이 열렸다. 나는 다시 자는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늦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침대의 천 밖으로 얼굴을 내민 나를 보더니 조금 놀란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내가 바싹 경계한 채 침대 안쪽으로 물러나자 그는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서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지아노.”


“······?”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니 그는 다시 한 번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지아노.”


“아아···”


이름을 말하는 듯 했다. 방금 전 생사의 고비를 넘긴 참인데 뜬금없이 자기소개타임이라니. 받아들이긴 힘들었지만 일단은 그와 마찬가지로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주서경”


“···주서경.”


그는 처음 나를 보았을 때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뭐지?’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그 또한 내 표정을 읽었는지 빠르게 얼굴을 갈무리했다.

자신을 지아노라고 소개한 남자는 그 이후에도 무어라 혼자 말하다가 갑자기 나가더니 바퀴가 달린 트레이를 밀면서 들어왔다. 그리곤 테이블에 차와 다과를 놓은 뒤 다시 나갔다. 잘은 모르겠지만 혼자 바지런 떠는 모양새가 여기서 일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는 잠시 후 아까보다 훨씬 더 공손한 태도로 천천히 문을 열더니 뒤에 있는 누군가가 들어오도록 비켜섰다.


“···너..!”


붉은 머리의 남자였다. 환한 방 안에서 보니 머리카락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렬한 붉은색을 띄고 있었다. 꿍꿍이를 잔뜩 담고 있는 듯 한 금색 눈동자와 비웃듯 한쪽만 올린 입꼬리를 보니..


‘개새끼가.’


속이 뒤집힌다.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내가 찢어 죽일 기세로 노려보니 그가 뒤에 서있던 키큰 남자를 향해 무어라 말했다. 거구의 남자는 붉은 머리에 눈을 떼지 못하는 나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곤 침대의 천을 잡아 뜯듯 옆으로 걷어버리고, 언제 입혔는지 모를 내 잠옷을 잡고 질질 끌어당기더니 입에 무언가를 강제로 처넣었다.


“읍···! 으읍!!”


저항할 틈도 없이 붙잡혔다.체격 차이가 너무 컸다. 내가 아무리 몸을 뒤틀어도 그는 한 팔만으로 조금도 움직일 수 없게 나를 끌어안고 다른 팔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결국 숨을 쉬지 못해 삼켜버린 무언가는 동그랗고 뜨거웠다. 식도가 타들어가는 느낌에 몸부림쳤지만, 그는 내 입을 억지로 벌려 삼킨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날 놓아주었다.

난 침대에서 숨을 고르며 어느새 테이블에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덩치 큰 남자가 그의 옆으로 돌아가자,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겠군.”


“···어···?”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그가 하는 언어는 그대로 들리지만, 그것이 내가 아는 언어 안에서 어떤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가 영문을 몰라 눈을 끔벅거리니 그는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


“네가 방금 기를 쓰고 먹지 않으려고 했던 마술구는 인데라의 언어를 네가 아는 언어로 이해시켜주는 도구다. 너같은 녀석은 평생 일해도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물건이지.”


“···.”


‘어쩌라고 미친새끼야.’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뻔 했지만 참았다. 지금은 안 된다. 조금 더 참고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수연이나 다른 애들이 살아있는지 확인하는게 먼저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표정에 드러나는군. 나쁘지 않아.”


그는 혼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나중에 뒷통수를 맞는 것보단 낫지.-라고 중얼거리곤 차를 홀짝였다.


“키오스 첸 파시오스 라 그에누. 내 이름이다.”


‘길어.’


이쪽 세계의 이름은 전부 이런 것일까. 하지만 처음에 이름을 알려주었던 또 다른 남자는 자신을 ‘지아노’라고만 했다. 애칭인 것일까? 지금 지아노는 ‘키오스 첸 파시오스 라 그에누’.. 귀찮으니 키오첸으로 줄이기로 하자. 키오첸 옆에서 그의 찻잔을 다시 채워주고 있었다. 역시 시종인 듯 하다.


“네 이름은 뭐지?”


“···주서경.”


“말이 짧군.”


그는 턱을 치켜들며 ‘그냥 죽일걸 그랬나?’하고 태연하게 덧붙였다.


“..주서경입···.”


마지못해 ‘-입니다’라고 말하려는데, 어째서인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내가 영문을 몰라 인상을 쓰니 그가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


“내가 준 마술구는 이쪽 언어를 네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기능만 가지고 있다. 네가 말하는 데 도움은 되겠지만 자동번역 같은 걸 기대하면 곤란해.”


자기 입으로 자동변역 같은 기능은 없다면서 말이 짧다고 지적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인간이다. 내 생각을 읽은 것인지 그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지아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지아노가 내게 설명했다.


“존칭은 ‘시오르’를 붙이면 대부분의 의미는 통합니다.”


이어서 ‘주서경입니다.’와 ‘주서경 이라고 합니다.’라는 말을 그의 언어로 차례대로 알려주었다. 일반적으론 ‘시오르’를 쓰지만 ‘~라고 합니다’는 ‘테’를 붙여 ‘테시오르’라고 하는 모양이다. 내가 어느정도 이해하고는 작게 ‘시오르’, ‘테시오르’를 반복하자 키오첸은 테이블을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고는 말을 이었다.


“네가 왜 이곳으로 오게 됐는지는 아나?”


‘알겠냐.’


“알려줄까?”


생각만 했을 뿐인데 그는 내 생각에 답을 하듯 물어왔다. 떠보듯 말하곤 ‘흐흥.’하고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태도나 표정에서 새로운 장난감을 대하는 듯한 가벼운 흥미가 엿보였다.


“···”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가 나에게 계속 흥미를 가지게 하려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재수없긴 하지만 시간을 벌기 위해선 그의 기분에 맞춰야했다.


‘고분고분해 보일 수 있도록.. 좀 더 공손하게.’


그렇게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였다.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홀린듯 양 손을 가지런히 그 위로 올렸다. 그리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고개는 살짝 숙인 채로 천천히 그를 응시했다.


“키오스 첸 파시오스 라 그에누께서 원하신다면..”


솔직히 어떻게 말했는지 모르겠다. 순간적으로 떠밀리듯 입이 벌어지면서 소리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 마치 무언가에 씌이기라도 한 것처럼, 내 몸인데도 내 몸이 아닌 이질적인 느낌이 들면서 머리가 차분해졌다.

그런 날 보는 키오첸의 눈빛엔 어째서인지 분노가 서려있었다. 그를 제외한 두 사람(지아노와 덩치 큰 남자) 또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이건 예상 못했는데.”


키오첸은 웃으며 말했다. 분명 입은 유쾌하다는 듯 웃고있는데 눈은 찢어죽일 듯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 어떤 부분이 그를 자극한 것일까.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그를 마주하자, 그는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지아노를 향해 말했다.


“데려와.”


“네.”


그의 지시에 지아노는 다시 방을 나갔다. 정적과 함께 공기가 방 안을 무겁게 짓눌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방문이 열리며 지아노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또다른 누군가가 따라 들어왔다. 나는 순간 내가 뭘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눈을 비볐다.


“···수연이?”


“서경아..!!”


수연이가 있었다. 녹색의 나풀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내 쪽으로 달려왔다.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눈으로 침대로 다가와 내 얼굴을 잡고는 감정이 북받친 듯 소리를 죽이며 울었다.


“···다행이야. 살아있어서.”


“나는.. 윽···. 서경아 나는, 니가, 흐윽, 죽은 줄 알고....흑.”


수연이가 내 앞에 있다. 진짜 수연이다.

얼굴에 닿은 수연이의 손은 더이상 차갑지 않았다. 그 온기에 방금 전까지 온 몸에 서려있던 긴장감이 한번에 쭉 풀렸다. 나는 엉망이 된 친구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옆에 있어줘야 했는데···”


“무슨 소리야.. 너는 마지막까지 애썼잖아.”


“재회의 기쁨은 충분히 누렸나?”


그 순간 섬뜩한 목소리가 우리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다른 언어에 정신이 번쩍 들어서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키오첸이 허리를 숙여 우리 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있었다. 히익, 하고. 수연이가 숨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왜 그런 표정들을 짓지? 은인한테 너무한 거 아닌가?”


“사, 사, 사, 살려주세요···”


수연이가 말했다. 그는 의미가 통하지 않아도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 기분이 상하는데.”


그리곤 조금도 기분따위 상하지 않은 상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붉은 머리카락의 일부가 눈썹을 쓸고 반대편으로 떨어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잠깐, 잠깐만요.”


그가 말했다.


“란테. 죽여라.”


아. 이제야 확실해졌다. -마마눅-은 죽이라는 명령어다. 그리고 란테는 저 키 큰 사내의 이름이다. 그때 내 목을 졸랐던 거구의 병사. 그가 허리춤에 찬 단도를 들고 소리없이 다가와 다시한 번 그 커다란 손으로 한순간에 수연이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내 앞에서 목을 그었다. 막으려고 했다. 분명 막으려고 했는데.


“아··· 아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전과는 달랐다. 무언가가 내 몸을 꼼짝없이 옥죄고 있었다. 어디선가 새빨간 피가 뿜어져 나와 내 눈으로 들어왔다. 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계속해서 눈에 차고 넘쳤다. 크고, 괴롭고, 끔찍한 비명이 방 안을 가득 매웠다.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는 걸 한참 후에야 인식했다. 나는 눈을 감고 내가 내지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비명소리는 키오첸이 내 머리채를 잡고 목을 뒤로 꺾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


“정말 소중했다면 끝까지 옆에 있어줬어야지. 나를 죽이려고 한눈을 파니까 이런 일이 벌어진거다. 너는 절대 날 죽일 수 없어. 나는 너의 소환자다. 내가 죽으면 너도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어. 이해했나?”


“······.”


“이해했느냐고 물었다.”


“···지랄, 마.”


쉰 목에서 짧은 소리가 힘겹게 기어나왔다. 그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그 말이 수긍의 의미라 생각했는지,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 없는지, 빙긋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습하면 더 잘 할 수 있게 될 거다. 말도. 행동도. 모든 건 노력하기 나름이지. 전대 성녀가 노력해서 가지고 있던 마력의 20배가 넘는 힘을 발휘했으니, 뭐. 너도 노력하면 보통은 할 수 있겠지. 솔직히 지금은 절망적일 정도로 작지만 근 10년간 그 절망적인 마력조차 가진 이들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대체품 정도라고 생각하도록.”


그는 그렇게 말하곤 내 머리를 던지듯 침대 안으로 밀어넣었다. 나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인지 열심히 이해해보려 노력했으나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온통 피다. 시트가 새빨갛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누워있는 내 몸에 수연이이 체온이 들러붙고 있었다.


“시체는 란테가 처리하고 방은... 지아노가 알아서 해라. 저건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말투나 태도부터 고쳐놔. 식사를 거부하면 란테에게 말해라. 힘으로 억지로 먹이든 협박을 하든. 맡기도록 하지.”


“네.”


“알겠습니다.”


누군가는 방을 나가고, 누군가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난 그대로 누워서 차게 식어가는 침대의 온도를 고스란히 느꼈다. 얼마쯤 지나자 여자 두 명이 들어와 나를 일으켜 세우고 침대 옆에 있던 병풍과 비슷하게 생긴 가림막 뒤로 이끌었다. 물을 받아놓은 욕조가 있었는데, 내 꼴이 심각했는지 자기들끼리 무어라 상의하고는 옷을 입은 채 그대로 물 안으로 밀어넣었다.


“······.”


새빨갛게 퍼져나간 피가 물을 탁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나를 밖으로 빼내서 옷을 벗기고 적신 수건으로 온 몸을 박박 닦아댔다. 그리고 새로 물을 채워넣은 욕조에 들어가게 한 뒤, 다시한 번 비누로 머리부터 발 끝까지 씻겼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전대 성녀의 대체품이 되었으니 탈출을 희망한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 6화. 20.05.22 12 0 15쪽
5 5화. +2 20.05.20 18 2 11쪽
4 4화. 20.05.20 25 2 23쪽
3 3화. +1 20.05.20 30 2 12쪽
» 2화. +3 20.05.20 33 4 14쪽
1 1화. +3 20.05.20 59 8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