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he******* 님의 서재입니다.

전대 성녀의 대체품이 되었으니 탈출을 희망한다.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heide1991
작품등록일 :
2020.05.20 01:46
최근연재일 :
2020.05.22 22:55
연재수 :
6 회
조회수 :
181
추천수 :
18
글자수 :
39,541

작성
20.05.20 02:19
조회
30
추천
2
글자
12쪽

3화.

DUMMY

“서경님, 일어나십시오. 식사시간입니다.”


“···.”


미적미적 몸을 일으키니 지아노가 침대 옆에 서있었다. 나는 멍하니 앉아 얇은 천 너머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짙은 회색 머리에 회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다. 그렇게 인식하고 나니 그의 생김새가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눈동자는 머리색보다 조금 밝고 투명했고, 수수하지만 반듯한 이목구비가 성실해보이는 느낌을 주었다. 반듯한 자세도 눈에 띄었다.


“서경님. 오늘은 피곤하신 것 같아 아침은 거르게 두었습니다만, 점심은 드셔야 합니다. 파시오스께서도 함께 자리하실 것이니 준비를 서둘러주십시오.”


딱히, 반항할 생각이 없었음에도 지아노는 초조한 얼굴로 내 눈치를 보았다.

침대의 천을 걷고 방 중앙으로 나오자 준비하고 있었던 듯 여자 시종들이 다가왔다. 그녀들은 능숙하게 옷을 갈아입혔고, 화장대에 앉힌 뒤 내 머리를 정리했다. 멍하니 있으니 어느새 준비가 끝나있었다. 새하얀 원피스에 단정하게 머리를 땋아내린 여자가 거울 앞에 앉아있다.


‘예쁘네.’


단장을 받은 얼굴은 평범하게 예뻤다. 못봐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를 홀릴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지도 않았다. 딱 그정도로만 예뻤다.


‘정신차리자.”


그가 돌려보내줄 리가 없다. 쓸 수 있는 만큼 처절하게 써먹다 버릴 것이다. 쓸모가 다 하고 나서 친절하게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줄 만큼, 그는 나를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보고있지 않았다. 알지 못하는 세계. 권력자의 납치. 친구의 죽음에도 무력한 나 자신. 선택지는 하나 뿐이다.


‘정보를 최대한 모아서 도망친다. 쓸모가 없어져서 죽기 전에.’


성녀인지 뭔지, 멋대로 이용당할쏘냐.


“서경님, 이 쪽으로.”


화장대에서 일어서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지아노가 눈짓했다. 나는 그를 따라 얌전히 방을 나섰다. 긴 복도를 몇 번 지나니 큰 홀이 나왔다. 어떤 곳인지 살피기도 전에 음식 냄새가 풍겨왔다.

긴 식탁 가장 끝쪽엔 키오첸이 앉아있었고, 그 옆엔 호위하듯 란테가 서있었다. 란테의 옅은 갈색 머리칼이 홀 한쪽의 커다란 창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아 브론즈처럼 반짝거렸고, 그의 큰 체구 때문에 반대편에 거대한 그림자가 생겼다. 이 모든 게 꿈 속에서 보는 것인 양 현실감이 없었다.


“늦었군. 식사에 영주보다 늦다니. 원래대로라면 당장 목을 쳐야 마땅한 일이다.”


“···죄송합니다.”


나는 방에서 나오며 지아노에게 들은 간단한 회화를 구사했다. 주로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와 같은 말들이었다.


“한 번은 봐주도록 하지. 앉도록.”


나는 지아노의 안내에 따라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스프와 빵, 치즈, 작은 과일같은 것들이 접시에 담겨있었다.


“속이 좋지 않을 것 같아 주방에 가벼운 식사를 준비시켰다. 이런 번거로운 짓은 이번 뿐이다. 먹어라.”


“···.감사합니다.”


순간, 이 빌어먹을 자식이 지금 당근과 채찍 전법을 쓰는 것인가 싶어 상을 뒤엎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그의 옆에 선 남자에게 목이 졸렸던 걸 떠올리며 억지로 빵을 입에 밀어넣었다. 키오첸은 식사를 멈추고 냅킨으로 입을 닦은 뒤 천천히 의자에 몸을 기댔다. 먼저 왔다더니 거의 다 먹은 것일까. 그는 날 관찰하듯 가만히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네 친구를 죽였다.”


“······.”


“너는 죽은 줄 알았던 친구가 살아있어서 안심했고, 그와 동시에 내가 그 친구를 죽였다. 딱히 너에게 신뢰감을 준 적은 없지만, 어느정도 배신당했다는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르겠군.”


“···죄송합니다.”


“왜 죄송하다는 말을 하지? 나한테 용서를 구할 만 한 짓을 했나?”


그냥 아는 말이 그것밖에 없었을 뿐이다.


“주서경. 너는 나를 죽이려고 했다. 이건 네 목숨으로 갚아야 하지만, 너는 앞으로 이곳에서 성녀의 역할을 다해야해. 그러니 너 대신 네 친구를 죽인거다. 소중한 인간이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지. 벌이 되지 못하니까. 네가 그녀의 앞을 막고 있을 때부터 관계는 대충 이해했다. ‘저쪽’에서 벗이었겠지. 하지만 어차피 이곳에서는 다 상관 없는 존재들이다. 전부 잊고, 최선을 다해서 이곳에 적응하도록. 그리고 네가 역할을 다하면 언젠가 돌려보내주도록 하지.”


“······.”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빵으로 손을 뻗었다. 저 이야기들로 확실해졌다. 수연이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그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수연이를 살려놓았던 것 또한 내가 내 처지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자신의 발 아래 납작 엎드리게 할 수단이었을 뿐.


“그러고보니 네 이름은 낯이 익군.”


기분탓일까. 그의 말에 내 옆에 서 있던 지아노가 한순간 움찔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잠깐만. 기분탓이 아닌 것 같은데.’


퍼뜩 정신이 들었다. 처음 내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표정에서 느껴졌던 위화감. 문득, 나를 끌어들인 저 빨간머리보다도 이 쪽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의 표정을 자세히 살피기 위해 고개를 들자, 키오첸이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너희쪽 인간들은 전부 이름이 비슷한가?”


너희쪽 인간들이라는 건 한국인을 말하는 걸까. 대부분 세글자에 내가 생각해도 동명이인이 넘쳐나는 나라이니 이곳 기준에서는 다 비슷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내 표정을 보고는 ‘흠. 그렇군.’이라고 납득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생긴것도 비슷한가?”


“······.?”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다. 내가 여기서 만난 유일한 세 남자의 머리색이 전부 제각각이니, 그들의 기준에선 비슷해 보일지도 모른다.

원래 세계에서조차 서양인들은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과 같은 극동아시아인의 외모를 잘 구분하지 못했다. 아마 그것은 동양인이 본 서양인도 마찬가지겠지만, 어쨌든 이곳 사람들이 구분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그것 참 불편하겠군. 누가 누군지 어떻게 구분하지?’라며 되도 않는 소리를 했다.


‘니가 구분을 못하는 것 뿐이다 이 레이시스트야. 쓸데없는 질문 좀 그만하지. 체하겠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를 쳐다보니 키오첸은 ‘또 불경한 생각을 하고있군.’이라며 눈살을 찌푸렸다. 불경한 생각만으로는 죽이지 않는 모양이다. 앞으로도 마음속으로는 쌍욕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스프를 떠마셨다.


‘그나저나 그럼 이쪽으로 소환되는 인간이 대부분 한국인이라는 소리인가?’


소환이니 마술구니 전부 현실감이 없긴 하지만, 다 제쳐놓고 하필 한국인이라는 게 신경쓰였다. 얼핏 지나가듯 한 이야기만 따져봐도 이런 식의 납치가 한 두 번이 아닌 듯 한데.. 단 한 번도 집단 실종사건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열 명이 넘는 인간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데 뉴스에서조차 한 번도 다뤄진 적이 없다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설마 내가 진짜 꿈을 꾸고있는 건가..? 정말 버스가 전복되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던가..'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보지.”


“···..네.”


또냐. 귀찮아서 나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쉰 뒤 빵을 내려놓자 키오첸은 ‘이쪽 세계에서 윗사람 앞에서 한숨을 쉬는 건 버릇없는 짓이다.’라고 지적했다. 그건 우리쪽 세계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전혀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지아노에게 미리 배운대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너는 지금 나의 소유물이고, 수석 시종인 지아노를 붙여두었으니 성 안에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너를 따를 것이다. 하지만 내 비들은 아니지. 그녀들은 언제든 원하는 때에 너를 불러낼 수 있고 생명에 지장이 없는 한 네게 어떤 짓이든 할 권리가 있다.”


“······.”


무슨 짓을 당하든, 이 인간한테 당하는 것보단 덜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나는 괜찮다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을 피하고 싶다면 한 가지 제안할 게 있는데..”


그는 팔짱을 끼며, 턱을 치켜들고 눈을 내리깔았다.


“네가 내 비가 되면 너는 그녀들과 같은 권리를 가지게 된다. 물론 암묵적인 서열은 존재하지만, 터무니 없는 일은 당하지 않을 테지. 어떤가?”


어떤가, 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내가 지아노를 보며 ‘비...?’라고 묻자 지아노가 담담하게 말했다.


“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서경님.”


“······.”


순간, 나도 모르게 먹고있던 걸 뱉을 뻔 했다. 아무리 높으신 분, 그것도 내 생명줄을 쥐고 계신 분 앞이라 해도 이것만큼은 제어가 안된다. 기분이 나쁘다 못해 더럽고 불쾌하고 구역질이 나온다. 내 의지와 아무 상관없이 다른 세계로 날 납치하고, 내 눈앞에서 친구를 잔인하게 죽이고 협박해서 옆에 두려는 것도 모자라 첩이라니. 밤시중까지 들라는 말이 아닌가. 차라리 지금 당장 혀를 깨물거나 눈앞에 있는 접시에 코를 박고 죽는 게 낫겠다.

내가 씹고있던 음식물을 반쯤 뱉어낸 채 마음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를 쳐다보니,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반응에 놀란 듯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란테 또한 나를 아주 기이한 생명체를 보듯 쳐다보았다.


“풉···. 크크킄. 아하하하하하!”


그리고 키오첸은 한참동안 홀이 떠나가라 웃어재꼈다. 나는 더욱 기분이 나빠졌지만 그런 내 반응을 볼수록 그의 웃음만 살 뿐이다.


‘진짜 미친건가.’


그냥 웃게 내버려두었더니 조금 진정한 그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하학···큽. 정말이지 살다살다 그런 표정은 처음보는군.”


‘앞으로 많이 보게 될 텐데.’


“너는 절대로 내 뒷통수를 칠 수 없겠어.”


‘기회만 된다면 니 모가지부터 자를거다.’


“란테. 상상이 가나? 이 녀석이 내 앞에서 살랑거리다가 침대로 들어와 내 목에 칼을 겨누는 게 말이야.”


‘···침대까진 무리겠지만.’


내가 속으로 하나하나 따지며 답을 하는 사이, 질문을 받은 란테는 가만히 날 들여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살랑거리는 것도 상상이 안 되지만, 애초에 침대로 자진해서 들어갈 것 같지도 않군요. 이 상태라면 지금 당장 포크를 들고 덤비는 게 차라리 자연스럽겠습니다.”


‘물론 제가 막을 수 있겠지만요.’라고 쓸데없는 말까지 덧붙인다.


“이야. 아주 마음에 들어. 서경. 넌 계속 그렇게 날 죽이고 싶어해라. 그 모습 그대로 있어주면 돼. 언젠가 네가 마력을 갈고닦아서 정말 성녀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나보다 높은 신분을 얻게 되면 날 죽일 수 있겠지. 부디 분발해 줘.”


그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 말투로 그렇게 말하다 방금 전 내 표정이 생각 난 것인지 다시 배를 잡고 웃었다.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그대로 그가 웃음을 멈출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저 처죽일 면상을 맨손으로 으스러뜨리는 상상을 하면서.


작가의말

 추천과 덧글을 주시면 너무 좋아서 웁니다.ㅜㅜ

 읽어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전대 성녀의 대체품이 되었으니 탈출을 희망한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 6화. 20.05.22 12 0 15쪽
5 5화. +2 20.05.20 19 2 11쪽
4 4화. 20.05.20 26 2 23쪽
» 3화. +1 20.05.20 31 2 12쪽
2 2화. +3 20.05.20 35 4 14쪽
1 1화. +3 20.05.20 59 8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