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들의 사랑법
“ 그럼 인영씨 계약은 없던 걸로 할게요. 전 인영씨가 이번에 시댁에 점수 좀 따서 시부모님 유산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도와준 거뿐이니까 너무 원망하지 마시고요. ”
“ 그게 무슨 소립니까? ”
애나가 열어버린 판도라의 상자에 우성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 두 분이 결혼하면서 시댁이랑 인연도 끊고 유산도 안 주신다고 하셨다면서요. 그래서 인영씨가 이번에 남편분 사업을 도와준 공으로 시댁에 인정받아서 유산을 받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전 인영씨가 유산을 받든 말든 상관없는데 워낙 간절해 보여서 도와준 거에요. ”
“ 우리 인영이가 정말 그랬다고요..? ”
그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 그럼 제가 이 얘기를 어떻게 알겠어요. 걱정마세요. 아무한테도 말은 안 했으니까. ”
“ 실례 많았습니다. ”
마음이 복잡했던 우성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고뇌하는 인간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애나는 픽 하고 비웃었다.
“ 그렇게 사랑하는 척 하다가 한 마디에 바로 저렇게 흔들리기는. 그 사랑이 얼마나 갈지 한 번 시험해볼까? 그 시험에서 통과하면 인정해주고. ”
***
한편, 지연이가 잘 있는지 걱정이 돼서 보러 온 해인은 우연히 우성과 애나가 함께 카페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대화는 들리지 않았지만 시종일관 미소 짓고 있는 애나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묘한 질투심이 일었다.
‘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한테 다 웃어주는 거였나. ’
하긴 저렇게 예쁘고 능력 있는 여자를 남자들이 가만 두는 게 이상했다. 더구나 나와 달리 돈 많고 자존감 쩌는 이 동네 남자들이라면 한 번 도전해 볼 법했다. 저 남자 역시 흑심을 품은 놈들 중 하나일 거다.
그 생각을 하니 왠지 내 것을 빼앗기는 기분에 심장이 뜨거워지면서 열이 올랐다. 그 화기에 이성의 끈이 녹아버려 몸이 먼저 행동하게 됐다.
< 어, 지연아. 나 못 갈 거 같아. 내일 보자. >
난 지연이에게 문자로 못 간다고 말하고 카페로 들어갔다. 그 사이 놈은 사라지고 없었다.
“ 안녕하세요. ”
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 예. 또 보네요. ”
애나는 아까 그 남자에게 보이던 미소로 내게 인사했다.
아무 남자한테나 웃음이 헤픈 여자는 참 별로인데, 이상하게 이 여자에게만은 안달났다.
나도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공부만 하다가 적당히 괜찮은 여자를 만나 연애나 하던 간단한 내 인생에 대변혁이 일어난 거다.
“ 고민 있으면 찾아오라고 하셨죠? 저 지금 고민이 무지 많아서요.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
“ 좋아요. 따라와요. ”
그런데 애나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딜요..? ”
그냥 여기서 몇 마디 나누려던 난 당황해서 물었다.
“ 내가 그림 보여준다고 했잖아요. 그림도 볼 겸 겸사 겸사 우리 집으로 가죠. ”
“ 집이요..? ”
분명 순수한 의도에서 날 집으로 초대한 걸 알지만 내 마음이 워낙 불순한지라 자꾸만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됐다. 거기엔 지연이의 입김도 한몫했다. 걔는 왜 꼬리친다느니 뭐니 이상한 얘기를 해서 사람을 오해하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 그게 불편하면 여기서 얘기해도 되고요. 뭐든 편할 대로 하세요. ”
“ 아니요. 갈게요! 집에··· ”
하지만 난 그림이 있는 곳을 파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림이 있는 곳만이라도 미리 알아와야겠다.
***
애나의 집으로 가는 길, 난 건물에 들어서고 로비에서 한 번,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 번, 그리고 4층에 와서 한 번 신분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렇게 3번의 관문을 거친 후에야 드디어 애나의 집에 들어 온 난 드라마에서 보던 재벌가의 광경에 입이 떠억 벌어졌다.
무슨 집 하나 들어오는데 검사가 이리 오래 걸리나 했는데 이 집을 보니 모든 게 설명됐다. 여긴 그냥 집이 아니라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왕들이 산다던 궁전이나 다름없었다. 천한 서민이 귀하신 왕비를 만나러 오려면 3차 검문 정도는 필수였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자는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 이곳의 여왕이었던 거다. 그 귀하신 분을 몰라뵈었으니 내 죄가 컸다.
“ 거실에 앉아 있어요. 마실 것 좀 가지고 올게요. ”
그 왕비께서 내게 직접 차를 내어주신다고 하니 이보다 더 감개무량할 수 없었다.
“ 일하는 아주머니는 안 계시나봐요? ”
난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고작 30평대 사는 지연이네도 집안 살림이 힘들다면 아주머니를 두는 마당에 그보다 3배는 더 큰 이 집에 일하시는 분이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 청소하시는 분이 일주일에 3번 오시긴 하는데 전 혼자 있는 게 좋아서 나머지 일은 제가 스스로 해요. ”
역시 여왕님은 다른 사람들과 품격부터 달랐다.
난 여왕님이 손수 내어주신 차를 마시며 그 은혜를 몸소 느꼈다. 이게 무슨 차인지 모르겠지만 향기에서부터 비싼 돈냄새가 진하게 느껴졌다. 이 차에 비하면 탑커피에서 파는 3만원짜리 음료는 그저 싸구려 불량식품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 고민이 많으시다고요? ”
“ 아 그게··· ”
일단 홧김에 따라오긴 했는데 도대체 어떤 고민을 말해야 하는지 고민됐다.
여기서 다짜고짜 돈 얘기를 하는 것도 실례가 아닌 거 같고, 그랬다간 날 쓰레기로 보고 거리라도 둘까 걱정이 됐다.
“ 고민이 없으시구나..? ”
“ 아니요. 있는데요! 만나는 남자 있어요? ”
결국 내가 생각해낸 질문이 이 세상에서 가장 경멸하던 제비들이 작업 전에 항상 던지던 멘트였다. 나도 이 놈의 주둥아리를 확 막아버리고 싶었다.
“ 그게 왜 궁금한데요? ”
나의 기습질문에도 애나는 표정 변화 없이 상냥하게 웃으며 물었다. 거기서 난 다시 한 번 자존심이 상했다.
남자가 관심을 보였으면 놀라는 척이라도 해야지. 이건 뭐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는 듯 태연하기만 하니 마치 내가 남자로서 아무런 매력이 없는 놈이 된 거 같아 불쾌했다.
나도 밖에 나가면 만나자고 하는 여자들이 줄을 섰구만, 내가 뭐 어쨌다고!
“ 그냥 궁금해서요. 궁금해하면 안 돼요? ”
난 그녀에게 따지듯 물었다.
“ 안 될 건 없죠. 보다시피 그림만 그리느라 아직 혼자네요. ”
애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 그럼 다행이네요. ”
“ 뭐가요? ”
“ 만나는 사람 없다면서요. ”
그걸로 설명은 다 한 거 같은 해인은 말을 줄였다.
그제야 뜻을 이해한 애나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 왜 웃어요? ”
거기에 또 심장에 스크래치가 난 해인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 나 생각보다 나이 많아요. 이제 곧 마흔인데 그쪽은 아직 이십대 초반이잖아요. 내가 대학생 때 그쪽은 초등학생이었고. 우리가 이런 얘기 나누고 있는 거 알면 남들이 우서요. ”
역시나 우릴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나이 차이였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지금은 숫자에 불과한 나이 따윈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보단 대화를 나눌수록 점점 더 이 여자와 더 긴밀해지고 싶은 열망만 불타올다.
“ 그게 뭐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배우 송연주는 벌써 42살인데. ”
“ 송연주씨는 연예인이시잖아요. ”
“ 저한텐 작가님도 연예인인데요. ”
내가 생각해도 심하게 오글거리는 말이라 순간 손발이 다 사라지는 줄 알았다.
근데 어쩌라고. 어떤 드라마에서 원래 사랑은 유치하고 오글거리는 거라고 그랬다. 난 지금 그 명언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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