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훔치자!
“ 예.. 주세요··· ”
손이 더러워지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인영은 시키는 대로 계약서에 지장은 후에 휴지로 손을 벅벅 닦았다.
“ 그럼 이제 된 거죠? ”
“ 여기다 자필로 이름이랑 그림 받을 주소만 적어주시면 돼요. ”
" 예. "
인영은 시큰둥한 얼굴로 이름과 주소를 적었다.
“ 덕분에 제가 이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네요. 정말 고마워요. ”
계약서를 받아든 애나가 흡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고맙긴요. 제가 다 고맙죠! ”
덕분에 내가 2000억이나 벌게 생겼으니까.
나한테 그 정도의 돈을 벌어다 준다면 기분이 더러워도 얼마든지 굽실거리면서 비위를 맞춰줄 수 있었다.
결혼하기 전엔 이것보다 더 더러운 짓도 많이 했는데 이정도가 뭐가 어렵다고.
그녀는 돈 벌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 자꾸만 웃음이 터져나왔다.
“ 그림 완성되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때까지 부디 몸 건강히 지내세요. ”
“ 예. 작가님도요. ”
“ 그럼 계약한 기념으로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 할래요? ”
일이 잘 마무리된 기념으로 에나가 특별히 인심을 써서 제안했다.
이 동네 은따인 인영이 탑클래스 최고의 인싸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분명 다른 여자들이 부러워서 시샘을 해올 거다. 그것만으로 이 여잔 승리감을 느끼며 만족스러워 할 거다.
“ 저야 좋죠. 오늘은 제가 살게요! ”
역시나 인영은 기다렸다는 듯 애나의 팔에 팔짱을 끼며 밖으로 나왔다. 마침 과외를 하러 온 해인은 두 사람이 함께 걷는 장면을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저 여자가 설마 진짜로 그림을 샀나..?!’
안 팔렸다 해도 내가 살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갑자기 매진 임박을 앞둔 홈쇼핑을 보는 듯 조마조마했다.
다른 사람이 그림을 사가도 좋으니 제발 저 여자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제발!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지연이네 집으로 갔더니 예상치 못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 일단 팔 수 있는 가전제품이나 가구에 붙이고! 아, 저기 도자기 비싸 보이네. 거기에도 붙여! ”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빨간 딱지를 붙이고 있었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장면에 난 어리둥절해서 문 앞에 계속 서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런지 아무도 날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 그냥 가야 하나···? ’
이대로 지연이네 가족과 마주치면 서로 어색할 거 같아 문쪽으로 돌아서려던 찰나였다.
“ 몰라! 얼른 해결해 놔! ”
갑자기 지연이가 방문을 열고 나와 날 지나쳐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 뒤로 화가 잔뜩 난 지연이네 어머니께서 따라 나오시다가 날 발견하고 당황한 듯 움찔하셨다.
“ 내 정신 좀 봐···미리 연락을 해줬어야 했는데···”
“ 제가 지연이한테 가볼게요. ”
“ 그래 줄래? 고마워. ”
민망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난 서둘러 지연이를 찾아 밖으로 나왔다. 지연이는 탑클래스 단지 안에 있는 공원 밴치에 앉아서 흐느껴 울고 있었다.
난 지연이의 기분이 진정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옆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내 경험상 이럴 땐 쓸 데 없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보단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게 큰 힘이 됐다.
“ 아빠 사업이 힘들대. 이번에 당장 못 막으면 부도가 날지도 모른대. ”
한참이 지나서 울음이 멎은 지연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선 말했다.
“ 얼마나 필요한대? ”
“ 지금 당장 막아야 할 돈이 20억정도래. ”
“ 20억?! 그렇게 큰 돈을 갑자기 어디서 구하라고..! ”
2천만 원 정도면 나도 어떻게 도와주려고 했는데 20억은 내 능력 밖의 이야기였다.
나한테 그렇게 큰 돈이 있었으면 내가 자존심 상하게 여자친구 집에서 과외 안 하고 내 공부에 올인했지!
“ 몰라! 내 인생은 이제 망했어! 어쩜 이 집에서도 나가야 할지 모른대! ”
“ 너네 집 팔면 35억은 나온다며. 그럼 20억으로 당장 급한 불 끄고 나머지 돈으로 집 얻으면 되겠네! ”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집이 서울에서도 최고의 집값을 자랑하는지라 20억을 갚고도 무려 15억이나 남길 수 있었다. 15억이라면 강남은 아니더라도 서울에 30평대 집을 장만하고도 남을 거다. 지금 지연이가 사는 평수도 그 정도 하니 별로 달라질 건 없을 거다.
“ 미쳤어?! 남의 일이라고 말 함부로 하지마! ”
“ 미안.. ”
난 최선의 방법을 알려줬는데 본인이 경기를 일으키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 이제 곧 전시회 준비도 해야 하는데, 하필 이럴 때 일이 터질 게 뭐야.. 인생 참 거지같아! ”
얜 이런 일이 처음이라 그걸 지금에서야 안 모양이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살아온 인생은 지금까지 단 한 번 거지 같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난 매일 X같다가 한 번 행운이 찾아오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던데, 얜 매번 축복 속에서 살다가 한 번 X같다고 인생 끝난 거처럼 말하니 어이가 없기도 했다.
네 인생이 그렇게 X같으면 나랑 바꾸던가. 그럼 남은 15억으로 내가 잘 굴려서 150억으로 불려줄 테니까.
“ 세상이 원래 그런 거야. 누구는 단 돈 2억도 없어서 집도 못 사는데 누구는 이상한 그림 사겠다고 200억씩 쓰고..”
난 아까 애나와 다정하게 거닐던 바비 인형이 떠올라서 말했다.
지연이네는 지금 20억이 없어서 똥줄을 타고 있는데 그 여잔 가만히 앉아서 남편 돈으로 떼돈 벌 생각에 기뻐할 걸 생각하니 내가 다 억울했다.
“ 맞아. 그림! ”
“ 그래. 그 벗방하는 여자가 네가 좋아하는 애나 그림 살 거 같더라. 그 집 남편이 사법계 집안이라더니 200억이 남아도나 봐. ”
“ 우리가 훔치자! ”
근데 얘가 별 뚱딴지 같은 소리를 했다. 오늘 심한 충격을 받아서 사리 분별이 안 되는 심신 미약 상태에 빠진 거 같았다.
“ 너 돌았냐? 훔치긴 뭘 훔쳐! ”
“ 그 그림이 부를 가져다 준다잖아! 지금 그 행운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 바로 나야! ”
“ 정확히 말하면 판매가에 10배로 불러준다고 했지! 훔치는 건 공짜라서 10배를 곱해 봤자 빵이야! ”
“ 누가 우리 집에 걸어두겠대?! 훔쳐서 다른 사람들한테 비싸게 팔자고! 그럼 못 해도 200억은 받을 수 있을 거 아냐! ”
얘가 하도 귀하게 자라서 그런지 이상적인 말만 하고 있었다.
“ 너 여기 보안이 장난인 줄 알아? 네가 사니까 잘 알 거 아냐. 여긴 외부인이 들어오려면 민증까지 맡겨야 겨우 들어올 수 있는 요새야! 부자들이 여길 찾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 근데 우리가 무슨 수로 그림을 훔치겠냐! 그러다 걸리면 네 인생도 끝이야! ”
“ 같은 주민끼리는 검사 같은 것도 없어! 애초에 도둑질할 사람이면 여기에 못 사니까! 어차피 그 여자 집에 그림 잔뜩 쌓여 있을 거 아냐! 그거 하나 가지고 간다고 모를 걸? ”
“ 됐으니까 아무 짓도 하지 말고 집에 가서 발이나 닦고 잠이나 자! 나도 한 번 해결할 방법 생각해 볼 테니까! ”
“생각한다고 답이 나왔으면 내가 이러지도 않았지! 그러지 말고 한 번 해보자! 성공만 하면 너한테 반 줄게! ”
“ 반이면.. 100억···?! ”
범죄 행위 앞에서 의연하고 싶었지만 액수를 들으니 나도 흔들렸다.
그 돈이면 강남에 30평대 아파트도 사고, 뚜벅이를 벗어나게 해줄 멋진 차도 사고, 또 전문의를 따자마자 서울에 개원을 할 수도 있을 거다. 그게 지금 내가 가장 이루고 싶은 꿈이자 인생의 목표였다.
“ 일단 생각을 해보자.. 생각을··· ”
하지만 상대는 이 탑클래스 안에서도 가장 높고 넓은 집에 사는 팬트하우스 주민이었다. 물건을 얻기 전에 걸렸다간 내 이름에 빨간줄이 그어질지도 몰랐다.
성공과 실패의 대가가 극명히 갈라는 일이라면 조금 더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했다.
***
그 후로 지연이는 1시간 동안 더 오열했고, 난 얼굴이 문어처럼 퉁퉁 부운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고 집에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 참 좋은 일자리였는데, 이제 나도 과외 끊기겠네··· ”
지금 내가 이런 곳에 사는 부자들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월에 200만 원씩 벌어다 주던 좋은 일자리가 곧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니 빨리 다른 돈줄을 알아봐야 했다.
이왕이면 이 동네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싶었다. 여기 아줌마들이 교육열이 높고 돈도 많아서 의대생이라고 하면 과외비로 일단 몇 백씩 불렀다. 그럼 지연이네서 받던 돈 그 이상으로 땡길 수 있을 거다.
마음 같아선 지연이한테 소개해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따귀를 맞을 거 같아서 오늘은 참기로 했다.
그렇게 구만리 같은 내 인생이나 걱정하며 걷는데 분수대 근처에서 애나와 마주쳤다. 그녀는 오늘도 수수한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강림한 천사 같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 무슨 고민이 있나 봐요? ”
듣기만 해도 위안이 되는 다정한 음성에 내 안에 참아왔던 울분이 울컥하고 올라왔다.
왠지 모르겠지만 난 그녀에게 뭐라도 털어 놓고 위로를 받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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