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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맛 님의 서재입니다.

항문외과 이계에 표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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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맛
작품등록일 :
2020.12.20 11:35
최근연재일 :
2021.01.29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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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7,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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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0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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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21. 재회

DUMMY

러셀은 지금 경이로운 표정으로 A4 용지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이미 마을에 오기 전 텔로스에서 A4 용지를 충분히 살펴보고 온 그가 종이 자체에 놀랄 이유는 없었다.

‘그냥 종이만 팔지 말고 폰으로 찍은 사진을 프린터로 뽑아 팔면 어떨까?’

스마트폰으로 러셀의 그곳을 찍을 때 승우가 떠올린 아이디어 때문이었다.

종이에는 마리의 어색해 하는, 그래서 더욱 순수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모습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정말······ 놀라운 마법 아이템이로군요. 제가 본 그 어떤 화가들의 그림보다 정교합니다. 심지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속도라니······.”

러셀이 특히 주목한 부분은 매끄러운 용지의 표면이었다.

원래 A4용지를 높게 평가한 부분 중 하나였는데, 그림이 그려졌음에도 그 표면에 변화가 없음에 감탄한 것이다.

이에 승우가 입을 열었다.

“많이 생산할 순 없습니다.”

잉크도 한계가 있고, 발전기의 남은 용량으로 스마트폰도 언제까지 활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현재 세 사람은 발전기가 돌아갈 때마다 스마트폰을 충전해서 활용하고 있었다.

수술 기기와 비교해 워낙 전력을 적게 먹다보니 할 수 있는 행동이었는데, 그래도 결국 수술 기기와 함께 발전기 연료가 다하면 끝날 운명인 것이다.

하지만 러셀은 전혀 문제될 것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희소성이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좋지요. 이토록 품질이 좋으니 그만큼 가격을 높게 책정하면 됩니다.”

“이 폰이라는 녀석은 특히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멀리 가져가기도 힘들고요.”

“텔로스까지만 가져갈 수 있으면 됩니다. 소문만 제대로 퍼트리면 나라 곳곳의 귀족들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찾아올 겁니다.”

그러면서 러셀은 상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앞으로 금전적인 부분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가 모든 걸 책임지겠습니다.”

승우의 눈이 반짝였다.

값을 후하게 치루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건 숫제 백지 수표를 건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물론 귀족 분들께는 돈이 전부가 아니지요. 그 외 다른 부분도 말씀만 해주신다면 왕국에서 최고로 꼽히는 저희 텔로스 상단에서 뭐든지 지원을 해드리겠습니다.”

사실 러셀 입장에선 당연한 것이었다.

아무리 돈을 펑펑 쓰겠다고 마음먹어도 한계는 있는 법.

귀족의 씀씀이가 헤픈 이유는 인력적인 부분이 크다.

특히 기사와 병사를 키우고, 유지시키는 비용 말이다.

그런데 이들은 이국의 귀족이다.

군사력을 갖추기 힘든 위치인 것이다.

결국 개인의 호의호식으로 나가는 돈이 대부분일 텐데 이조차 결국 세 사람에 불과했으니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곳을 방문할 때만 해도 백작님께 어떤 영향을 줄지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정말이지 엄청난 도움이 되겠어.’

물론 종이와 그림만 보고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니었다.

그가 가장 주목한 부분은 바로 자신이 빠르게 은퇴를 결심할 정도로 괴롭혔던 말의 저주를 고작 며칠 만에 고쳤다는 부분이다.

비록 수술 이후 며칠 동안은 경고대로 화장실에서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말이다.

‘정말 세상이 달라 보였지.’

아직도 수술 부위가 욱신거리긴 했지만, 수술 받기 전까지 받았던 고통을 생각하면 신세계와 다를 바 없었다.

이 말의 저주에 걸리는 건 상인만이 아니었다.

말을 자주 타는 귀족이나 기사들에게도 곧잘 찾아왔다.

그래서 생각 이상으로 저주에 걸린 사람이 많았고, 그들 대부분은 부유했다.

더불어 수술 전 미연에게 이 저주의 원인을 들은 러셀은 다른 가능성을 찾았다.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지만, 만약 내 예상대로라면 이건 정말이지······ 허.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구나.’

전폭적인 지원 약속에 승우는 기쁜 마음으로 러셀의 사진도 찍어 주었다.

“좀 더 자연스럽게 표정을 지어주세요. 네. 좋습니다. 그대로 계세요.”

찰칵.

“흠?”

“또 표정이 굳으시네요. 편하게 계세요.”

찰칵. 찰칵.

하지만 처음 듣는 것 같지 않는 찰칵 대는 소리에 어째 러셀의 표정이 갈수록 굳어졌다.

“그 소리는 분명······”

승우도 뒤늦게 실책을 깨달았다.

“아하하. 사, 사실은 그게······”

결국, 러셀의 채근에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밝혔다.

물론 그게 다 자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였다는 걸 모르지 않았기에 러셀은 화를 낼 수 없었다.

다만 그 뒤로 좀처럼 미연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러셀이 수술로 인해 발이 묶인 사이, 상단은 카난족의 물품을 싣고 텔로스로 갔다가 곧바로 그루 마을로 돌아왔다.

러셀을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물론 마차에는 A4용지가 실렸다.

동윤이 마차에 실린 짐을 보며 질린 얼굴로 말했다.

“와. 정말 마차를 꽉 채웠네요.”

사실 사진 인쇄용으로 쓸 한 박스를 남겨두기도 했고, 애초에 몇 박스 안 되었기에 넘긴 양이 그렇게 많진 않았다.

다만 종이란 게 워낙 습기에 약한 데다 그 가치를 고려해서인지 정말이지 어마무시하게 꽁꽁 싸여 그 부피가 마차를 가득 채울 정도가 된 것이다.

상인들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박스를 꼼꼼하게 싸고 또 싸는 모습을 보며 세 사람은 현대 사회에선 흔하디흔한 A4용지를 이들이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알 수 있었다.

승우의 경우 살짝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기껏 고민해서 골랐는데 결국 헛고생한 게 되었네.”

결과적으로 종이를 제외한 편의점 물건들을 파는 건 포기했다.

사진과 종이의 가치에 비해 다른 생활용품들은 가치가 낮거나, 수가 적어서 굳이 넘길 메리트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상인들과 물물교환을 생각했던 승우로써는 괜찮은 아이템들이었지만, 귀족과 부유한 사람들을 상대로 종이와 사진을 팔게 된 지금은 달랐다.

편의점의 생활 물품을 다 합해봤자 사진 한 장의 가치를 넘지 못했던 것.

동윤이 그런 승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어차피 돌아가면 편의점 주인에게 배상해야 하잖아요? 안 팔아도 된다면 오히려 다행이죠.”

“뭐. 그건 또 그렇지.”

하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과연 돌아갈 수 있을 지 자신할 수 없었다.

어느새 이곳에서 지낸지 두 달이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참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지만 그 중에 그들이 돌아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긍정적인 요소는 거의 없었다.

기껏 해봤자 마르제가 교황을 찾아가 보라고 말한 정도다 전부일 정도였다.

사실 그 조차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첨언했으니 내키는 정보는 아니었다.

마침내 러셀이 마차에 올라탔다.

기껏 조심하라고 치질 방석을 줬는데, 그는 그걸 무슨 국가기밀인양 A4용지처럼 꽁꽁 싸매서 품에 안고 있었다.

대단히 유용한 물건인데 비해 제작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다보니 시장에 선보이기 전까지 보안에 신경 써야 한다는 이유였다.

마을을 떠나는 상단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동윤이 승우에게 말했다.

“아무튼 괜찮게 끝난 거죠? 뭐든 다 해주겠다면서요?”

“우리 사정도 재차 솔직하게 밝혔으니 그러기를 바라야지. 그가 부단주였다가 은퇴한 몸이라지만, 마리의 말을 들어보니 오히려 지금의 권한이 더 높다더라고. 텔로스에 있는 인물 중 몇 안 되는 백작님의 측근이라니까 믿어보자.”

“에휴. 솔직히 몰래 숨어서 준비한 짐을 돌아보는데 정말 암담하더라고요.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으니 뭘 아는 게 있어야죠.”

방송통신장비가 없는 세상이니 옆 마을 소식도 며칠이 지나 사람의 입을 통해서 전달이 되는 세상이다.

동윤이 이상한 게 아니라 그루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이곳 토박이로 이 지방을 벗어난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들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정보 역시 협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때 승우의 귀로 병원 옥상에서 동윤을 부르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야. 애들이 너 부른다.”

“쯧. 저것들은 나 없으면 어찌 살려고 맨날 나만 찾는 건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병원으로 향하는 동윤의 발걸음은 상당히 가벼웠다.

승우는 그런 동윤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놀기만 하는 것 같아도 동윤은 아이들에게 기초적인 산수를 가르치는 한편, 반대로 이곳의 글을 배우고 있었다.

아무래도 며칠 전 도주 준비를 한 게 그에게 이곳에 대해 배워야겠단 생각을 심어준 모양이다.

물론 가르치는 사람이 마리다 보니 숨겨진 의도가 의심스러웠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도 대비를 해야겠지.”

동윤이도 열심히 하고 있고, 미연은 셋 중 가장 고생하며 의술을 펼쳐 주변의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승우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할 일 역시 정해져 있었고.


수술이 가능할 정도로 몸을 제어할 수 있게 된 승우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얀이 권한 수련도 여전히 꾸준히 하고 있었다.

동윤과 일별하고 그가 향한 곳은 어느새 그의 운동 공간이 되어버린 카난족의 임시 거처였다.

그런데 언제나 텅텅 비어있던 그곳에 선객이 와 있었다.

심지어 이 세계에서 얼마 안 되는 지인이었다.

“얀!”

얀이 예의 그 장발의 흰머리를 휘날리며 공터 한 가운데에 서 있었던 것.

그도 승우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얼굴에 살짝 놀란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며 인사를 걸어왔다.

“안녕하셨습니까.”

“저야 잘 지냈습니다. 얀은 어떻게 이렇게 일찍 다시 찾아 온 겁니까? 혹시 뭐 놓고 간 물건이라도?”

“그런 건 아닙니다. 볼 일이 좀 있어 거주지에 돌아갔다가 바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아. 그렇습니까?”

얀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간 꾸준히 해오신 모양입니다.”

주어가 빠졌지만 뭘 말하는지 승우는 바로 알아들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 마다 나뭇가지가 부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 덕분에 지금은 별다른 문제없이 팔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모두 얀 덕분이죠.”

“저야 말로 목숨을 빚졌는걸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승우가 멋쩍게 두 손과 고개를 내저으며 겸양을 하는데 얀의 뒤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회포를 충분히 풀었으면 우리 볼 일 좀 봤으면 싶은데?”

승우는 꽤나 묘한 목소리란 생각이 들었다.

걸걸하면서도 중성적인 목소리랄까?

마치 여자 성우가 중년의 남성 목소리를 낸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얀의 덩치에 가려 목소리의 주인이 보이지 않았기에 승우가 상체를 옆으로 빼서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가볍게 놀랐다.

진하게 컬이 진 수염은 장이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풍성하고 길었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눈에 띈 건 상대의 신장이 너무 작다는 점이었다.

순간 장애우란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라 승우는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그러자 키 작은 사내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입을 열었다.

“이거 이거 일부러 내색을 안 하다니 속이 시커먼 놈일세. 이놈 믿어도 되는 거야? 그냥 죽여서 입을 막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러면서 정말로 등에서 살벌하게 거대하고 묵직한 서양식 도끼를 꺼내 드는 것이 아닌가?

도끼날의 날카로움이 눈을 통해서도 충분히 전해져 왔다.

몸을 갖다 대기만 해도 썰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예기였다.

승우는 처음 본 사내가 느닷없이 살해 예고를 하며 그런 무시무시한 무기를 들이대자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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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32. 반응 21.01.21 192 5 12쪽
31 31. 동굴 21.01.20 203 5 12쪽
30 30. 지하 21.01.19 203 7 11쪽
29 29. 각오 21.01.18 222 6 11쪽
28 28. dwarfs 21.01.17 221 5 12쪽
27 27. 마법 21.01.16 262 6 12쪽
26 26. 심부름 +2 21.01.15 259 7 12쪽
25 25. 교습 21.01.14 256 6 9쪽
24 24. 제의 +2 21.01.13 268 5 10쪽
23 23. 제모 +1 21.01.12 306 5 12쪽
22 22. 가족 상봉 21.01.11 286 9 12쪽
» 21. 재회 +1 21.01.10 320 8 12쪽
20 20. 절약, 수술 +1 21.01.09 332 9 11쪽
19 19. 긴장 +1 21.01.08 313 10 10쪽
18 18. 러셀 21.01.07 335 9 10쪽
17 17. 돼지 날다 21.01.06 383 10 13쪽
16 16. 얀 +1 21.01.05 383 11 10쪽
15 15. 독 21.01.04 377 8 11쪽
14 14. 카난족 21.01.03 402 10 11쪽
13 13. 두 번째 사자 +2 21.01.02 427 11 13쪽
12 12. CPR과 AED +1 21.01.01 440 11 14쪽
11 11. 거대 뱀장어 20.12.31 464 11 12쪽
10 10. 사냥 약속 +2 20.12.30 487 14 13쪽
9 9. 반사 이익 20.12.29 525 1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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