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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졸리다

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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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최근연재일 :
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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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2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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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50. 삼월의 토끼(2)

DUMMY

달그르락... 탁.


달그르락... 탁.


달그르락... 탁.


동전은 책상 위에 떨어졌다.

그러면 얇고 넓적한 주화는 파르르 떨듯이 들썩이다가, 착, 하고 나무 표면과 밀착했다.

멈춘 동전은 다시 집어올려져 책상과 손가락 사이에 대고 놀려지다가 또 넘어진다.


달그르락... 탁.


달그르락... 탁.


달그르락... 탁.


마지막 손재간이 끝나고 동전은 엄지로 튕겨져 내 앞에 떨어졌다.

쳬니 주화.

왕가의 정원을 가득 체웠다는 장미가 새겨진 동색 동전.


"화폐 개혁이라는 건 정말 좋아."


아르헤타 경은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말했다.


"누구든 어디든 동전을 고를 필요가 없으니... 목표도 단순해지고 행동도 단순해지고 통제하기 쉽지."


"아니요..."


나는 겨우 대답했다.

머리속이 복잡했다. 지난 일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어디서부터 잘못한 건지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하나도 가늠할 수 없었다.


아니라는 대답은 왜 한 거지.

변명하려는 건가.

변명을 한다고 뭔가 될 수 있는 걸까.

애초에 방금 질문에 아니요라고 대답하는게 말이나 되는 건가.


"흥, 아니라고? 흐흐흣흐..."


뭐가 그리도 우스울까, 아르헤타 경은 음침하게 끌끌 거렸다.

그 사람은 금방 웃음을 멈추고 건조하게 돌아왔다. 아주 건조하게. 평생 한 번도 웃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무서운 얼굴로 겁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길길이 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레이크 아이힐데른."


차라리 그랬으면 더 나았을텐데.


"프리실라 핸드메인은 어디에 있지?"


그러면 좀 더 잘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모른다니까요."


몇 번이나 같은 얘기.

나는 같은 얘기를 몇 번이나 하는 사람답게 단정지어 말했다.


"그 여자의 마지막 행선은 자네와 함께 트리마켓에 간거였는데. 자네가 말한 그 이불 가게 주인의 증언과도 일치해. 그 영감도 프리실라 핸드메인과 함께있는 자네를 봤다더군. 그런데 그것도 잠깐이야. 영감이 창고에서 나왔을 때 그 여자는 이미 없었어. 그 때 자네가 뭘 하고 있었다고?"


"...잠들어 있었죠."


"남의 가게에서? 왜 그런 짓을 하지?"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아,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 정말 도움이 많이 되는 답변이군. 그 외에는 생각나는 건 없나?"


"아니 그러니까 저는..."


아르헤타 경은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듣지 않고, 그저 내 앞에 던져놨던 동전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다시 자기 쪽으로 당겼다.

드르르륵, 하고 동전이 긁히는 소리가 듣기 좋지는 않았다.


"필요없나?"


아르헤타 경은 동전을 다시 집어들어 보이며 말했다.

필요없냐고?


"돈 준다고 생각나면 벌써 말했겠죠!"


사람을 뭘로 보고.


"보고서를 보면 프리실라 핸드메인은 도주의 위험도 없고 위험성도 매우 낮은 요인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아주 완벽하게 거짓말을 했나보군. 전부 다 깜짝 속아넘어가다니."


하며 아르헤타 경은 보란듯이 눈썹을 들썩였다.


"이래서 미인들은 항상 조심해야 한다니까."


혼잣말처럼 하지만 내 말이 맞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프리실라는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내가 말했다.

우선 프리실라가 거짓말을 한 적도 없거니와 할 이유도 없었다.

지금 당황스러운 건 오히려 나였다. 어디로 간거지 갈 곳도 없을 텐데.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 갑자기 왜? 무슨 목적으로.


"오. 나한텐 프리실라 핸드메인을 몇 번 본적 없어서 잘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새 많이도 알아봤나보군?"


아오. 이 귀족 나으리를 정말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분명히 깜빡 잠든 사이 날 깨운 건 이불집 영감님이었다. 그 때 이미 프리실라는 사라진 뒤였고 멍청하게 늘어져있다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을 땐 모든 게 늦은 후였다.

이불집이며 밖의 다른 가게들을 모두 봐도 프리실라를 찾을 수는 없었고 하늘그림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서 아르헤타 경을 맞딱드린 것의 결과가 바로 이거였다.

심문 받기.

그래 이건 심문이었다. 다른 것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클로에의 실력이 좋아서 후풍이 불어닥칠지 누가 알았을라고.


"저기 아까부터 굉장히 그런 기분이 들어서 그런데요."


나는 아르헤타 경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이야기를 꺼냈다.


"아르헤타 경은 절 의심하시는 건가요?"


"의심?"


아르헤타 경은 내 말을 듣자마자 미간을 엄청 구겼다가 폈다.


"뭔가 착각하고 있나보군. 마지막까지 프리실라 핸드메인을 감시하고 있었던 건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자네의 눈이야. 안타깝게도 감고 있었지만."


"프리실라를 도망치게 해준다고 해서 저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데요."


"그걸 알아내려고 이러고 있는 거 아닌가?"


"뭐 때문에 그러겠냐고요!"


답답해 죽겠네, 정말!


"사람이 사라지는데, 자네 생각보다 그렇게 많은 이유가 필요하진 않아."


나는 통발 속의 이미 잡은 물고기를 보듯 유유자적한 아르헤타 경의 태도에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계속 말하잖아요."


"아아, 그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귀신처럼 나타났다 유령처럼 사라져서 자기도 어디있는지 모른다는 양갈래 머리 소녀를 찾으라고?"


아르헤타 경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 진짜 말도 안 되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리처럼 들리긴 한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명백한 사실이었고 프리실라가 사라진 지금 가장 걸리는 녀석은 글리 캐스트 하나뿐이었다.


"그게... 헛소리 같아도 진짜거든요?"


"그게 사실이라면. 그런 다음에 왜 프리실라를 데리고 시장에 간 거지? 상식적으론 그게 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인 것 같은데."


"그건, 그..."


그에 관해서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건 명백한 내 안일함이었고, 설마 글리 캐스트가 이딴 식으로 나올거라곤 상상도 못한 결과였다.

대금을 치러야한다고 해놓고서 이게 지금 무슨 짓이지.


"어쨌거나 지금은 저보다는 그 녀석을 찾는 게 먼저라고요. 아 그리고, 따지고보면 동네 청년한테 대충 떠넘긴 아르헤타 경에게도 잘못이 있는 거 아녜요?"


이러고 꾸물거릴 때가 아닌지라 나는 조급한 마음을 입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아르헤타 경과 내가 그렇게 신뢰가 두터울 사이일진 모르겠으나 어쨌든 믿어준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다.

그보단 이거 한 마디 했다고 째째하게 모욕이라고 노발대발 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덜컥 들었다.

하지만 염려와 달리 아르헤타 경은 무덤덤했다.

오히려 어렴풋이 웃는 것도 같았다.


가소롭기 짝이없군 당장 감옥에 넣어주마.


"일어나게."


아 진짜 그렇게 말하는 줄 알았네.


첫마디부터 다른데도 괜히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었다. 그리 말한 뒤, 아르헤타 경은 유유자적하게 먼저 일어났다. 내가 따라 일어서자 그 사람은 아예 앞서서 심문실을 나가려 했다.


"보여줄 게 있으니."


모로 가도 여기에 갇혀 있는 것보단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아르헤타 경이 밖으로 나가 날 데리고 간 곳은 뻣뻣하게 선 위병이 지키고 있는, 삼엄하고, 어둡고, 딱딱하고, 추운.


감옥이었다.


"아니 저기..."


위병을 통과해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얼음장 같은 벽돌 계단을 밟은 직후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땅 위에선 한 층이 좀 안 될 것 같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들었다.

과연 귀족이 속이 좁은 것인가 평민이 건방졌던 것인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막 집어넣어도 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본인이 원해서 집어넣은 것 뿐인데."


"옉?!"


아니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세상에 감옥을 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적어도 나는 그런 걸 바란 적이 없었다.

이건 음모였다.

아주 사악한... 야우라나 생각할만한 아주 사악한 그런 음모.


"아니 세상에 그런 걸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 사람은 정신이 이상하거나 뭔가 꿍꿍이 속이 있는 거겠죠..."


내가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사이 아르헤타 경이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인가. 여기가 내 자리인가?

나는 날카롭게마조 보이는 사각의 창살을 보았다. 그런데 그 감옥 안에는 이미 사람이 한 명 들어있었다. 세상에나 외롭지 말라고 친구까지 만들어두다니 이렇게 친절한...


"뭐야!"


나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창살을 붙잡고 감옥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귀신처럼 나타났다 유령처럼 사라지는 양갈래 머리 소녀, 글리 캐스트였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내가 거듭 다그치자 녀석은 웃음을 참는 것 같은 묘한 얼굴로 스멀스멀 기어와 창살을 붙잡고 마주 앉았다.


"어우... 정말 감동이야. 레이크가 와줄 줄은 글리는 정말 몰랐어.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아. 보여?"


자랑스레 들이미는 녀석의 눈에는 눈물따윈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봐요. 제 말이 맞죠? 양갈래 머리 이상한 애. 있잖아요!"


나는 아르헤타 경에게 이 녀석 좀 제대로 보라고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리 들어도 헛소리 같은 존재인 글리가 지금 눈앞에 있지 않은가. 의심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이미 잡아놓고서 왜 그렇게 날 들볶았을까.


...


그러게.

왜 그랬을까?


"글리 캐스트는."


아르헤타 경은 이미 모든 걸 달관한 것처럼 단조롭게 말했다.


"자수해서 여기에 수감되어 있지."


"자수요...?"


믿기 힘들었다.


"자수했다고?"


나는 글리에게 다시 물었다.


"어우... 맞아."


글리는 후회되는 옛 일을 기억하듯 아련히 고개를 저었다.


"어제 슐리체에게 엄청 혼났거든. 그래서 글리는 깨닫고 만거야. 아아, 정말 나쁜 짓을 해버린 거구나. 하고 말이야? 용서 받으려면 이 방법뿐이었어. 그래도 레이크가 와줘서 다행이야. 이제 미련없이 형장의 이슬이 될 수 있을테니까."


"헛소리하지마. 사형수를 이렇게 아무렇게나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그 뜬소리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자 녀석은 슬픈체 하던 표정을 거두고 실실 웃으며 고개를 계속 갸웃거렸다.


"하아... 레이크는 정말 똑똑한 친구라니까? 맞아. 글리는 지금, 벌 서는 중이야. 사형이라니. 그런 끔찍한 건 싫어. 글리는 아직 앞날이 창창하다고."


내가 말을 말지.

차라리 아르헤타 경 쪽에다가 말하는 게 나을성 싶었다.


"아, 근데. 얘가 잡혔으면 된 거 아니에요? 제 말이 사실인 거잖아요?"


"글리 캐스트는 오늘 아침에 자수해서 여기에 수감됐다. 자기에겐 죄가 있다면서 감옥에 넣어달라고 했다더군. 하도 생떼를 쓰니까 어쩔수 없이 넣어놓은 거겠지."


아르헤타 경은 느릿느릿 말했다.

새벽에 들어왔다. 그 말인즉슨, 프리실라가 사라진 시기에 글리는 이미 여기에 갇혀 있었다는 거고 그 증명은 내가 해준 셈이었다.


"아니, 이 녀석. 같이 다니는 동료도 있거든요?"


"그 두 사람을 말하는 거라면, 아침부터 쭉 경비대 밖에서 글리 캐스트를 기다리고 있지. 별난 친구니까 잘 좀 봐달라고 했다던데."


별난 친구...?

그렇게 귀엽게 말 할 녀석이 아닐텐데.


"그게 다 거짓말이라니까요."


"그게 거짓말이라면. 자네의 말이 진짜라는 건 누가 보장하지?"


아르헤타 경의 냉담한 이야기에 나는 다시 글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쪽은 도통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


"글리 캐스트...!"


"왜 불러? 레이크, 아이, 힐, 데른?"


녀석은 싱글벙글 웃으며 여유를 부렸다.

분명 갇힌 건 쟤고 나와있는 건 나인데 아무래도 입장이 뒤바뀐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속셈이야!"


"어우, 속셈이라니. 글리는 정말 용서를 받으려는 거라니까? 언젠가 이 어두운 감옥에서 나와 레이크를 만나면 레이크에게도 사과를 하려고 했다고... 방금 전까진 말이야!"


갑자기 빽 소리친 글리는 창살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벽에 기대 앉았다. 그리고는 토라진 어린애처럼 웅크리고 항의했다.


"글리 말을 하나도 안 믿잖아? 그럼 글리도 할 말 없어.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지켜야 할 정도라는 게 있는 거라고. 글리랑 얘기하려면? 적어도 속에 초콜릿이 가득 찬 말랑말랑하고 촉촉한 케이크라도 가져와야 해. 알았지?"


그 뒤로 글리는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변명은 끝났나?"


적당히 이야기가 마무리 지어졌다는 걸 알아챈 아르헤타 경이 말했다.


"이제 내가 자네를.... 의심, 하더라도 군말 없겠지?"


"아니... 뭔가 잘못된 거예요."


글리 캐스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못 했다면, 대체 프리실라는 왜 사라진 거고 어디로 간 거지?


아니아니. 역시 아니었다.


글리 캐스트의 태도는 아무리 봐도 감옥에 갇힌 녀석의 모습이 아니었다. 스스로 자수할 위인도 아니었다. 어디선가, 뭔가, 내가 모르는 부분에서 틀어진 것이 존재했다.

차라리 글리 캐스트가 데려갔다면 훨씬 간단했을 텐데.


"너무 겁먹을 거 없어. 자네가 전부 책임질 필요는 없으니까. 대부분의 사건은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일어나지 않지. 이번엔 어떨까. 고용인의 잘못은 고용주가 책임지는 게 아주 전통적인 관례인데 말이야... 흣."


아르헤타 경은 아주 짧게, 툭 뱉듯이 웃었다.


"비셔스 경이 있는 관저에도 나중에 또 들러봐야겠군. 그 때까지 자네는..."


그리고 격려라도 하듯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 때였다.


"아르헤타 경!"


위병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모두 돌아서자 그 사람은 잠시 숨을 고르고 바로 고쳐서서 말했다.


"웬 패거리가 아르헤타 경을 찾으면서 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농성? 패거리?"


그 두 가지 모두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인듯 아르헤타 경이 되물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패거리?


"예..."


그렇데도 위병은 그저 그렇다고 할 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했더니 돌아가 본 경비대는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아니 난장판이라고 하면 물건이라도 엎어버린 것 같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단지 이질적인 사람이 늘어 요란했고 쓸데없는 고성이 오갔다.

대부분은 야우라의 문제였다.


"어어! 왔다왔다왔다!"


걔는 날보자 대뜸 손가락부터 치켜들고 소리쳤다.


"아직 있었네! 난 벌써 들어간 줄 알았지!"


어딜 들어가,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 아르헤타 경.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분명 뭔가 착오가 있는 걸 거예요."


에반젤린도 아주 반갑다는 얼굴로 한 마디 보탰다.

뒤이어 야우라가 어딘가 숨어있던 레샤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자, 레샤도 한 마디 해줘."


"야우라...! 여기 오면 그런 거 안 시킨다면서요...!"


보아하니 쟤가 어떤 과정으로 여기에 오게 됐는지는 알겠다.


할 말이 많았던 나는 쌓아둔 말들을 하기에 앞서 우선 아르헤타 경의 눈치를 살폈다.

그 사람은 야우라가 머리를 건드린 이후로 처음, 매우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아주 잠깐이었다. 그 사람은 곧 딱딱하기 그지없는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농성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뭐... 농성이긴 하네."


아니 내가 보기에 이건 농성이 아니었다.

변호해주러 온 사람 하나.

내가 감옥에 가나 안 가나, 가면 얼마나 가나 궁금한 사람 하나.

끌려온 사람 하나였으니.

이건 그냥... 난장판이었다.


"야. 감찰관. 레이크 보낼 때는 보내더라도 프리실라는 찾게 해놓고 보내. 우리 손님이란 말이야. 돈도 아직 안 내고 없어졌다니까?"


야우라가 저런 소리도 할 수 있고 참 출세했다.


"그건 당신이 참견할 일이 아닐텐데."


아르헤타 경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아, 아르헤타 경. 제가 대신 말하긴 좀 그렇지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시는 게..."


굉장히 위해주는 이야기 같은데 잘 들어보면 우리 사제님은 이미 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포기할 건 포기한 다음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거였다.


"아직 뭔가 결정된 건 아닙니다. 차분히 기다리시죠..."


이번에도 아르헤타 경은 말투만 친절할 뿐이었다.


그 외에도 이래저래 시끄러운 녀석과 말리려는 위병과 함부로 손대기 힘든 사제가 겹쳐져 애매한 흙탕물이 여기저기 튀겨댔다.


"그런데 대체 누가 이런... 들여보낸거지?"


이런, 뒤에 무슨 단어가 감춰졌을지, 아르헤타 경은 누구에게든 아무에게나 물었다.


"아, 내가 데려왔는데?"


그 와중에 불쑥 손을 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여태 조용해서 몰랐는데 구석에서 이 사태를 구경하고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비셔스 경..."


또 한 번 아르헤타 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짓을 하다니. 경비대장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으시는 군요. 피렌체 경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자네가 지금 하는 짓보다 더 기분 나쁠까. 자네는 감찰관이지 수사관이 아니잖아? 아하하."


비셔스 경은 헐헐 웃으며 말했다.


"나스가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하니 안 와볼 수가 없지. 출세는 이러려고 하는 거 아니겠어. 뭐, 다른 건 겸사겸사."


그렇게 말하며 비셔스 경은 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괜스레 위축되었다.

민폐라고 해야할까. 비셔스 경이 이런 식으로 나설 거라곤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애들도 데리고 왔다는 건 날 도와... 도와... 도와주려는 거였나 그게?

그건 잠시 판단을 미뤄둬야겠다.


"어쩌시겠다는 겁니까."


아르헤타 경이 물었다.


"여기 사제님 말씀처럼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건 어떻냐는 거지."


비셔스 경은 에반젤린 외에도 야우라와 레샤도 한 번씩 눈짓으로 가리켰다.


"기회요?"


"그래. 다른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니 레이크는 겁쟁이라서 납치 같은 건 절대 못 할 거라고 하던데. 그럴듯 하잖아?"


아니...

지금 저 말에 대해 딴지를 걸면 안 되는겠지? 도와주고 있는 거 맞지?

내가 입맛을 다시는 사이 비셔스 경은 다시 나에게 물었다.


"너는 어떠냐, 레이크? 이 모든 게 네가 저지른 일이냐? 뭐, 그럴 수도 있지. 평소에도 세상에 불만이 많으니까."


저걸 질문이라고.


"아 그랬겠냐고요!"


내가 못 참고 소리치자 비셔스 경은 아주아주 크게 웃었다."


"아하하! 그렇다는데. 어때?"


"이대로 놔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본인의 결백은 스스로 증명해야지. 그리고 그 잘못 또한 스스로 책임지고. 안 그러냐, 레이크? 너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뭘 해야할 것 같니?"


비셔스 경은 나에게 물었다.

간단한 문제이지 않은가. 답 또한 간단한 것이었다.

달리 할 말도 없었고, 가지는 정해져 있었다.


"...프리실라를 찾아야죠."


내가 말했다.

과정이 어떻고 누가 어떻게 했든 이건 내 잘못이었다. 변명을 하더라도 적어도 잠들지는 않았어야 변명을 할 수 있다.


"그렇다는데? 아하하."


비셔스 경은 이번엔 아르헤타 경에게 물었다.

답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참, 여기든 저기든 전부 은근히 강압적으로 대하는 사람이었다.


"대체 무슨 권한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뭘 믿고 그런 결정을 내린단 말입니까. 사냥개가 나갈 땐 목줄을 푸는 법입니다. 어디로 갈지 모르죠."


"그거라면 괜찮은 해결책이 하나 있는데."


"해결책...?"


비셔스 경이 팔을 들어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위병의 무리 속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정말 진짜 그냥 지나가는 사람처럼 옷차림도 평범한 그런 사람.


"죄송합니다. 걸렸어요. 나으리..."


그 남자는 굉장히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수그렸다 들기를 반복했다.


"이 친구, 우리집을 계속 보고 있던데. 엄청 한가한가보더라고. 감찰부는 원래 다 그런가?"


나는 절로 아르헤타 경을 보게 되었다.

그 말인즉슨 이 사람, 부하를 시켜 비셔스 경을 감시하고 있었단 뜻이었다.

아르헤타 경의 얼굴은 화난 것도 여유로운 것도 아닌 것처럼 차갑게, 그야말로 차갑고 무섭게 굳어 있었다.

그 입술이 움찔 움직였을 때였다.


"피렌체 경하고는 이미 이야기 다 했는데."


비셔스 경의 선수에 아르헤타 경의 눈가가 찡그려졌다.


"...좋을대로 하시죠."


꾹 눌러 참던 아르헤타 경이 느지막히 말했다.


"하지만. 요인은 반드시 찾아야할 겁니다. 제가 와 있을 때 불경스런 사건이 일어나느 건 질색이니까. 그리고 경비대가 이 특별한 유예에 도움을 주는 일도 없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 알았나?"


마지막으로 아르헤타 경은 날 아주 매섭게 노려보며 물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뒤돌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 부하에게도 말했다.


"고든. 자네는 이 뒤로 비셔스 경의 명령을 따라. 어쨌든 프리실라 핸드메인을 찾을 수 있다면 상관없다."


"네, 나으리."


고든이라는 남자가 반듯이 경례하자 아르헤타 경은 그제야 사람들을 뿌리치고 홀로 밖으로 나섰다.


아르헤타 경이 나가고 나자 경비대 안에는 나비의 날개짓 소리라도 들릴 것만 같이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아주 깊은 정적. 누구 하나 먼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짝.


박수를 친 건 비셔스 경이었다.


"다들 뭐 해? 가서 일 해. 이러다간 내가, 휴가 중인 사람이 왜 와서 훼방이냐, 는 소리 또 듣겠어."


비셔스 경이 손을 휘휘 저어가며 말하자 사람들은 제각기 할 일을 하러 돌아갔다.


그리고 난 뒤 비셔스 경은 나에게 와서 어깨동무를 걸었다.


"레이크. 내가 부담주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다."


아니 그러니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으면.


"이번엔 내 명예가 너한테 달렸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요.


유난히 무거운 비셔스 경의 팔에 나는 어깨가 축 쳐졌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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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 56. 또 손가락 걸고(4) +2 23.06.08 51 1 14쪽
323 56. 또 손가락 걸고(3) +2 23.06.05 50 2 19쪽
322 56. 또 손가락 걸고(2) +4 23.05.05 52 2 14쪽
321 56. 또 손가락 걸고(1) +2 23.04.26 62 2 16쪽
320 55. 기우면 될까(5) 23.02.15 63 2 14쪽
319 55. 기우면 될까(4) +2 23.02.09 68 2 14쪽
318 55. 기우면 될까(3) +2 23.02.03 64 2 18쪽
317 55. 기우면 될까(2) +2 23.01.30 68 2 13쪽
316 55. 기우면 될까(1) +2 23.01.28 64 2 16쪽
315 P.S 옛날 옛날 어느 옛날에 23.01.25 86 2 7쪽
314 54. 조각조각 사각사각(8) 23.01.18 63 2 12쪽
313 54. 조각조각 사각사각(7) +2 23.01.13 84 2 14쪽
312 54. 조각조각 사각사각(6) +1 21.11.06 128 1 16쪽
311 54. 조각조각 사각사각(5) +2 21.10.24 109 2 20쪽
310 54. 조각조각 사각사각(4) 21.10.19 112 2 20쪽
309 54. 조각조각 사각사각(3) +1 21.10.13 125 1 17쪽
308 54. 조각조각 사각사각(2) +2 21.10.05 205 2 12쪽
307 54. 조각조각 사각사각(1) +1 21.10.02 125 3 17쪽
306 드리는 말씀 21.10.02 147 4 2쪽
305 53. 파편의 편파(5) +2 21.01.26 165 3 20쪽
304 53. 파편의 편파(4) +2 21.01.07 137 2 13쪽
303 53. 파편의 편파(3) +2 20.12.31 140 4 27쪽
302 53. 파편의 편파(2) +2 20.12.21 153 4 19쪽
301 53. 파편의 편파(1) +2 20.12.15 136 3 20쪽
300 52. 편파의 파편(6) +2 20.09.19 176 6 24쪽
299 52. 편파의 파편(5) +2 20.09.09 170 3 16쪽
298 52. 편파의 파편(4) +2 20.09.05 141 5 19쪽
297 52. 편파의 파편(3) 20.08.20 138 4 19쪽
296 52. 편파의 파편(2) 20.08.13 144 3 20쪽
295 52. 편파의 파편(1) +8 20.08.07 170 5 17쪽
294 51. 찰박찰박 해(5) +3 20.04.24 187 2 17쪽
293 51. 찰박찰박 해(4) +2 20.04.21 154 2 19쪽
292 51. 찰박찰박 해(3) +4 20.04.13 153 3 20쪽
291 51. 찰박찰박 해(2) +3 20.04.07 156 3 16쪽
290 51. 찰박찰박 해(1) 20.04.07 146 3 12쪽
289 P.S 푹 익혔어 +4 20.04.02 159 3 10쪽
288 50. 삼월의 토끼(5) 20.04.01 151 2 12쪽
287 50. 삼월의 토끼(4) 20.03.27 139 3 14쪽
286 50. 삼월의 토끼(3) +4 20.03.25 154 3 20쪽
» 50. 삼월의 토끼(2) +2 20.03.22 180 3 22쪽
284 50. 삼월의 토끼(1) +2 20.03.17 142 2 15쪽
283 49. 오목과 오목(5) 20.03.13 152 2 16쪽
282 49. 오목과 오목(4) +2 20.03.01 175 2 18쪽
281 49. 오목과 오목(3) +6 20.02.27 157 2 22쪽
280 49. 오목과 오목(2) +4 20.02.21 159 3 23쪽
279 49. 오목과 오목(1) 20.02.19 166 2 26쪽
278 48. 볼록과 볼록(5) 20.02.13 156 2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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