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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졸리다

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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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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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연재수 :
32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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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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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52. 편파의 파편(4)

DUMMY

다음 날, 직접 나가 피부로 느낀 시내의 분위기는 위화감이 가득했다. 시장통이라는 것이 본래 소란스럽다는 것이야 당연한 모습이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소란스러움보다도 어수선함이었다.


콕 찝어 설명할 수는 없었다..

단지 자연스럽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사람들이 모여 소식을 나누고 물건을 사고팔고 떠드는 것은 당연지사였고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단지.

그 사람들에게서 약간의 서두름이 느껴지는 것이다.

별로 밖에 오래 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좀 더 얘기를 해도 되겠건만 가벼운 안부를 묻는 것이 전부였고 대금을 치르고서 그 거스름을 깜빡하고선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냥 그 사람이 꼼꼼하지 못해 자주 오락가락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곤 해도 그 왜 그런 것이 있지 않은가.


아주 오래된 숯도 모닥불 옆에 있다면 지금 만든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였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있더라도 부모로 보이는 사람이 바로 옆에서 손을 잡고 거의 끌고 다니고 있었다.


이 동네에선 그게 아주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걸 자연스럽게 하지 못 했다.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느낌이.

어디에 그렇게 적혀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말해준 것도 아니었다.


아니. 말해줬다곤 할 수도 있지.

분위기가 영 심상찮다고, 고든이 분명 그러지 않았던가.


그런 본인들도 익숙하지 못한 일상의 풍경 속에서 홀로 자신의 삶을 그대로 살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어디까지나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저기 있네."


고든이 말했다.

저기라는 것은 모퉁이 안 쪽의 모포상 앞이었고, 있다는 것은 당연히 사람을 말하는 거였다.


이름 모를 부랑자.


그 사람은 방금 산 것처럼 보이는 털실 융단에 다른 물건들을 가득 싸안고서는 모포상 아저씨에게 무어라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딱 봐도 손가락이 이리저리 허공을 찔러대는 게 영 얌전해 보이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래저래 드잡이 중인 부랑자에게 다가갔다. 그 사람은 우리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도 모른 체 그게 자신의 사명인양 열심히 시비를 걸고 있었다.


뭘 쳐다보냐느니, 기분이 나쁘니 제값은 못 쳐주겠다느니. 근거 없는 막무가내에 모포상 아저씨가 난처해하자 더 기세를 타서는 신이 나서 주절주절이었다.


저렇게 놔둬도 되는 걸까.


시장판에서 싸움이 나는 거야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정도로 별 것도 아니지만 그냥 지나쳐가는 것과 그걸 보고 있는 건 조금 달랐다. 묘하게 나쁜 짓을 하는 것 같달까. 싸움구경을 안 해본 것도 아닌데 괜히 찔리는 기분이었다.


고든은 어떨까.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당장 행동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고 그 뻔한 풍경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것처럼 진득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물어보기라도 할까.

그러는 사이 상황은 더 심각해져가는 것 같았다.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

거짓말을 당연하게 하고 간사하고 비굴하기까지 하다. 만만한 상대를 만나면 이죽거리기 바쁘고 강해보이는 사람에겐 납작 엎드렸다.

이건 싸움 구경 같은 게 아니었다.


문득 고든이 손을 들어 내 몸을 막았다.

기다리라는 것이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마치 야우라처럼 핑계를 대는 것도 같지만, 정말 아무 짓도 안 했다.


거의 그 직후였다.


모포상 아저씨의 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다가온 것이다. 친구, 동료, 가족. 그 중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응원군이 나타나자 전세는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이제 수세에 몰린 것은 부랑자였다.


등등했던 기세는 사라지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상대방의 머릿수를 세었다. 세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는 건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거였다.


전에 우리에게도 그러했듯이 남자는 살살 빠져나가려 했다.

'알았다고. 진정들 하라고.' 그런 식으로 몰염치한 소리를 하고 있지 않을까.

이 거리에선 들리지 않았다.


고든은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제도 따라다녔으니 비슷한 꼴을 본 적이 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다.


분명히... 그렇겠지.


고든의 말에 의하면 그 이름 모를 부랑자의 마실 경로는 어제와 다르지 않다고 했다. 처음에는 웬 마실 얘기인가 했더니 따라다니다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남자가 하는 행동은 마실이나 다름없었다.

분명 이것저것 사는 걸 보면 물건이 필요해서 돌아다니는 것도 맞지만 어쩐지 시간을 때우는 것 같다는 인상도 지울 수 없었다.


그 남자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외곽의 작은 가정집이었다. 거기가 종착점이라는 것을 알기는 무지 쉬웠다.

그야 들어가기 전에 주변을 무지하게 살펴댔으니까.

누가 봐도, 난 지금 여기에 들어가는 것을 다른 이에게 보여선 안 된다, 하는 것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실제로도 주변에 나랑 고든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쯤에서 고든이 과연 뭘 하는 사람인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분명히 기사단의 감찰부 부총관을 모시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일이 생각과는 달리 암행 능력을 무진장 높게 요구하는 모양이었다.

혹시 숨겨둔 장부 같은 것을 찾는 게 주 업무였다던가.


분명 나는 쉽게 알 수 없는 거리 감각과 시야와 시선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 있을 것이다.


오히려 주변을 살피는 것이 더 의심스러울 지경에 이를 때까지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누가 봐도 몰래 들어가는 것처럼 최소한만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충분히 기다린 후에 그 집을 살피러 갔다.

예상대로 집은 역시 비어 있었다.


전에 나왔던 곳이랑 위치가 달라 긴가민가했었는데, 이 곳 또한 하수도로 통하는 또 다른 통로 중 하나임이 분명해졌다.

문을 열어보니 잠겨 있지도 않다.


창고라고도 부를 수 없는 조악한 내부. 수레에나 쓸법한 여분의 바퀴가 벽 한 구석에 기대 세워져 있고 지푸라기들이 돌바닥을 가득 메꿔 마른 풀 냄새를 풍겼다.


고든과 나는 그 집의 바닥을 먼저 탐색했다.

거창하게 여길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바닥에 깔린 지푸라기는 오래된 것처럼 듬성듬성 했고 먼지가 시커멓게 묻을 만큼 전혀 관리되지 않았다.


똑같이, 위장해 놓은 바닥문만 고정 시켜놓은 지푸라기가 여전히 온전히 남아있어 눈만 뜨고 있다면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문을 열자 바닥 밑으로 캄캄한 어둠이 보였다.

바가지로 퍼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새카만 어둠.


"어떡할 거야? 직접 눈으로 확인도 했고."


고든이 말했다.


"이틀 연속으로 물건을 사는 거라고 했죠?"


내가 묻자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만에 저만큼을 혼자 다 먹는 건 아니겠죠?"


"아직도 그걸 고민하는 거야? 생각에 확신을 가져. 넌 그래도 돼. 그래야 내가 좀 편하거든."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아직도 더 고민해야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단지 확인을 자주하는 버릇이 생겼을 뿐이다.



그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에반젤린은 만일의 사태에 대해 말했고, 레샤는 매우 미심쩍게 모든 것들을 노려봤으며 야우라는 왠지 신나 있었다.


그 신나 있는 것에 대해 말인데... 아니 겉보기엔 신나 있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겉보기에도 신나 있긴 한데 본인이 그걸 숨기려고 했다.


그건 참 요상한 짓이다.

갑자기 어딘가 특별한 세계로 떠나는 것도 아닌데.

이미 가 본 하수도를 다른 방향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이번엔 진짜 조용히 해야 돼."


나는 그 신난 녀석한테 한 번 더 당부해두었다.

그러자 야우라는 기가 찬 듯 헛숨을 뱉었다.


"허. 넌 가끔 보면 날 무슨 딱따구리로 아는 거 같더라?"


"딱따구리든 뭐든."


"그래에. 뭐든 간에 내가 필요하다는 거 아니야. 그지?"


야우라는 씩 웃더니 손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켜 꺼드럭댔다. 할 말이 없었다. 여기에 왔을 때, 그러니까 다시 하수도로 들어갈 거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분명히 야우라에게, 네가 중요하다, 고 말했다.


하여간에 어디 가서 누가 감투 씌워준다고 하면 좋다고 홀랑 속아 넘어갈까봐 걱정이 될 만큼 나서는 걸 좋아했다.


"그러게 처음부터 걔 이상했다니까. 내 말을 들었어야지. 왜 봐주고 난리래."


약간 역정을 부리기도 했다.


"봐준 게 아니라...!"


"하지만 걱정 마시라. 이 아리따운 누님이 미로 같은 어둠속에서 금방 찾아 줄 테니."


"아... 어... 응."


아, 정말 밉상이다.


그렇다곤 해도 야우라의 능력이 필요한 순간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아주 출중한 능력.

밤눈이 밝은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야우라는 냄새에 무척 민감했다.

그리고 불빛은...


"...뭐요."


잠깐 시선이 닿았을 뿐인데, 레샤는 갑자기 옷을 여몄다.

누가 보면 내가 뭐 뺏어가려는 줄 알겠네.


"불 좀 빌리자."


뭐 크게 보면 그다지 다른 것도 아니었으니 레샤의 촉이 아주 날카롭게 들어맞았다, 할 수 있었다.


"불이요...? 저 성냥 같은 거 없는데요..."


레샤는 굉장히 의아하게 대답했다.

나도 참 의아하다.

아무렴 내가 저한테 성냥을 찾겠나. 구태여 그럴 필요 없었다.


"아니 그거 말고 네 정령."


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주제에 괜히 허공을 가리켜 말했다.


"레이크..."


레샤의 말이 질질 끌렸다.

왠지 설교하는 투다.


"정령은 빌리고 빌려주는 그런..."


"알았어, 알았어, 알았어."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나는 그 애를 밀어 바닥문 앞까지 끌고 갔다.


"아닛, 왜 제가 첫 번째인데요...?! 예? 왜 저냐고요...!"


레샤는 격렬히 저항했다.

꼭 구렁텅이로 빠지기 직전인 것처럼 질색을 해가며 저항하는 것이다.


"누구든 첫 번째는 해야 하는 거잖아."


내가 말했다.

괜찮다. 밑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부랑자가 저기를 등불 없이 내려갔을 리도 없고 등불을 가지고 있다면 어둠 속에서 똑똑히 보였을 테니 안전 만전 무반전이다.


"그럼 넌 너 혼자였으면 이럴 때 어떡할 건데."


"안 들어갈 거예요...!"


레샤의 명쾌한 해답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중에 제일 똑똑한 건 역시 얘라니까.

그건 그렇다하더라도 알려줄 건 알려줘야 했다.


"내려가서 너희 불덩이한테 좀 덜 밝게 비춰달라고 해. 너무 밝으면 안 되니까."


나는 레샤의 머리를 꾹꾹 눌러 가며 말했다.

힘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그 애는 꾸역꾸역 사다리에 다리를 걸치는 수밖에 없었다.

한 두어칸 내려갔나. 바닥 위에 머리만 내민 레샤가 거기서 멈췄다.


"레이크. 레이크는 혹시 아십니까?"


게다가 왠지 딱딱한 말투가 되어선 날 노려봤다.


"컴컴한 어둠 속에는... 옴블이라는 귀신이 살아서... 혼자 있는 어린 아이를 발견하면..."


무슨 얘기를 하나 했더니 옛날 괴담 같은 소리였다.

허구헌 날 자기 유리할 때만 어린애야.


"금방 따라갈 테니까 들어가시라고오오."


내가 한 번 더 이마를 누르자 레샤는 결국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 다음은 약속한대로 내가 내려갔다.

곧 허공에 시뻘건 레샤의 얼굴이 나타났다.


"어잇, 깜짝이야..."


나는 지레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화가 난 얼굴이 번뜩이니 그것만큼 무서운 게 없었다.


"그거 조금만 더 밝게 안 되냐?"


일단 물어보자 미약했던 붉은 빛이 한 층 더 밝게 타오르며 작은 불꽃이 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레샤의 정령 셀라임이었다.


그래. 이 녀석들 계약자 이외의 사람들 목소리도 들리는 게 분명하다니까. 괜히 어른들이 혼자 있더라도 말조심하라고 훈계하는 것이 아니다.


그 뒤로 한 사람씩 차례차례 아래로 내려왔다.


셀라임이 만들어내는 불빛은 작고 은은해서 밖으로 멀리 번지지는 않았지만 눈앞의 것들을 식별하는 데엔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물론 그 이상을 볼 수는 없었다.


눈앞에 벽이 있다는 것을 알아도 작은 그림자라도 지는 순간 그게 불확실해졌다. 지금만 해도 벽에 웬 천막이 걸려있는데 불이 반대편이라 뭔지 모르겠다.

조금 더 밝게 해달라고 부탁해야하나. 고작 그 정도로 정령이 만든 빛이라고 알아차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게 뭐지?"


나는 그 천막을 살짝 꼬집어 만져보았다.

생각보다 질감이 투박하지 않았다. 이런 하수구에 걸려 있기엔 다소 위화감이...


"아아, 저에요."


어둠 속에서 들리는 에반젤린의 목소리.

나는 가시에 찔린 것처럼 손을 땠다.


"어, 미안..."


그래. 이런 식으로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는 거였다.

밤눈이 밝은 야우라라면 이런 실수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근데, 혹시 어디 잘못 손 댄 건 아니겠지?

물어보고 다시 사과할까?

아니, 나는 그런 생각은 접어버렸다. 그게 더 이상할 것 같았다.


...잡념이 많아졌다.

집중할 때였다. 내 결정 하나로 대체 몇 명의 사람이 비슷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 벌써 며칠째 프리실라의 모습은커녕 목소리조차 들은 적이 없다.

이번에는 정말 눈에 띄는 진척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부랑자는 초석이었다. 처음 봤을 때도 마치 하수도를 순찰하는 것처럼 돌아다녔으니 산 물건들을 어딘가에 전달하고 나면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이 근처를 배회하고 있을 것이다.

야우라가 말했듯이 길라잡이는 중요했다.

확실히 붙잡을 것이다.


이번에야 말로.


"근데 레샤는 어디 갔지?"


문득 떠오른 나는 놀라 언성을 조금 높여버렸다.

잠깐 한 눈 판 사이에 애가 없어졌다.

혼자 어디 갔을 건 아닐 텐데. 어디로 사라진 거지.


"여기 있잖아요..."


목소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다시 보니 레샤는 어디 간 게 아니라 그냥 내 옆에 계속 있었다. 시간이 지났으니 당연히 어디라도 갔을 거라고 생각한 게 오히려 착각을 불렀다.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보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팔에 무언가 부딪치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사람이리라.


"악."


소리를 들어보니 레샤였다.


"어, 미안."


이상하게 되는 일이 없다.


"어... 일단은 그러니까... 어... 야우라랑 고든은 어딨지?"


찾아보면 금방 알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애들에게 그렇게 물었다.


"뭐래. 여깄잖아."


야우라가 별 걸 다 묻는다는 것처럼 굴어도 당연한 거였다. 그 옆의 고든이라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아줘서 다행이었다.


"아, 그래. 어. 음..."


이제 가자. 들켜서 숨어버리면 귀찮아지니까 가능 한한 조용히 이동해서 붙잡은 다음, 이번엔 봐주는 것 없이 추궁하자.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어디를 저기를 누구는 또 누구는.


나는 한 동안 계속 손만 빙빙 까닥였다.

딱 첫마디만 뜨면 간단한 일인데 그게 안 된다.

좀 더 알아듣기 쉽고 정확하고. 그러면서도 짧은...


에반젤린이 불쑥 내 손목을 잡아 그 정신 사나운 손짓을 멈추었다.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그 애가 말했다.


"아... 뭐... 별 말을 하려던 건 아닌데."


그렇게 주목할 것 까지는 없다고,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네에."


에반젤린은 그런 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음. 가자고. 그 말 하려고."


"네. 그렇게 해요. 가요."


에반젤린은 더 말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무슨 할 말이 더 있으랴, 이게 가자고 해서 가는 건지 아니면 그냥 떠밀려서 가는 건지. 나는 뭔가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수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야우라가 또 내 어깨 위에 무거운 머리를 턱 올렸다.


"아... 머리 아파."


그건 굉장히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야, 너. 할 수 있다며."


"할 수 있는 건 할 수 있는 거고. 아픈 건 아픈 거고."


야우라는 단호했다.


"너도 이참에 알아둬. 우리한테 향수 같은 걸 들이대는 건 아주 큰 무례야. 넌 나한테 절대 그러면 안 돼. 화 낼 거야. 알았어?"


"어. 알았어. 그래서 뭐, 알겠어?"


나는 이상한 소식 말고 희소식에 대해 물었다.


"기다려봐. 지금 무지막지 집중 중이니까."


무지막지 집중 중이시면 나한테 안 이랬겠지?

나는 그 말을 꾹 삼켜 넣었다.


또 얼마나 지났을까.

냄새로 인한 야우라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가던 어느 순간, 그 애가 내 어깨를 당겨 멈췄다.


"엇."


웬일인지 호들갑도 매우 조용했다.

뭔가 알아챘나보다.

나는 묻지 않고 야우라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다른 냄새 나. 포도. 와인?"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야우라는 내 어깨를 놓고 수로 가까이에 가서 쪼그려 앉았다.


"여기서 나는 건가?"


그러다가 또 벌떡 일어났다.


"아닌가?"


또 나에게 묻듯이 이쪽을 보기도 했다.

난 전혀 모르겠다고 대답할까. 얘가 정말 그런 말이 듣고 싶어서 묻는 걸까.


"어쨌든 근처에서 냄새가 난다는 거잖아."


"응. 갑자기."


"저 안인가?"


나는 수로의 샛길을 가리켜 말했다.

다 같은 생긴 변화라면 그나마 그것밖에 없었다.


"가보죠."


불쑥, 에반젤린이 말했다.


"어?"


나는 조금 놀라 되물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려던 거잖아요."


에반젤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긴 했다. 그렇긴 한데.


"그, 사제님. 갑자기 너무 오냐오냐 해주면 버릇 나빠진다는 거. 혹시 아세요?"


"에이, 괜찮아요."


뭔가 열렬한, 그리고 또 무서운 지지를 받아가며 우리는 그 샛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를 더 가며, 그리고 비교적 좁은 통로 안으로 들어오자 야우라는 점점 확신을 가져갔다.


냄새로는 방향을 알 수 없다. 그건 야우라라 하더라도 우리랑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움직이면서 우연히 더 짙어지는 쪽이 있다면 그걸로 가까워졌다고 유추하는 것뿐이다.


생각을 굳히고 앞으로 나가자 금방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짜 빛 말이다. 빛.

등불.


"에이씨..."


욕지거리도 들렸다.

깨진 유리병. 여기까지 오니 그 냄새가 나에게도 느껴졌다.

빈 복도 끝은 마치 하나의 방처럼 약간 넓었다. 그리고 좌측 벽 구석엔 침대를 만들어놓은 것처럼 모포가 여러 겹 쌓여있고 그 위에, 꾀죄죄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깨진 와인 병을 보는 눈빛이 꽤나 비루하다.


"찾았다."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야우라는 또 한 번 힘주어 가리켰다.


부랑자의 시선이 우릴 보았다.

아직 취하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또 봐도 이상하지 않은가.

저런 사람이 사온 술을 여태 마시지 않고 있었다고.

또, 깨진 것 하나에 저리 집착하고 있다고.

사온 물건은 여전히 정리되어 구석에 놓여 있다고.

그런데도 여기에 쓰레기는 없다고.


"너. 나, 나한테 또 무슨 볼 일이야."


날 알아 본 남자는 경계하듯 앉은 채 물러났다.


"궁금한 게 있어서 물어보려고요."


나는 내가 원하는 바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저번에 물어본 건 다 말해줬잖아."


"물건을 많이 샀네요."


"이번에 조금 땄거든."


글쎄, 난 그런 사실을 보지 못 했다.


그것에 대해 별 말 하지는 않았지만 고든의 생각은 달라보였다.

고든은 새삼 나에게 양해라도 구하기라도 하듯 날 뒤로 무르고는 앞으로 나섰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하지만 그것과 반대로 귀찮은 일을 떠맡은 사람처럼 묘한 미소와 함께.


"아니. 진짜, 진짜라니...."


진짜라는 사람이 모포는 왜 뒤집어쓰려는 걸까.


작가의말

뭔가, 대단한 복귀를 한것처럼 떠들어놓고는 직후에 컨디션이 나빠져서 늦었다고 말씀을 드려야할까 굉장히 민망하네요. 이제부터는 쭉쭉 나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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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 드리는 말씀 21.10.02 147 4 2쪽
305 53. 파편의 편파(5) +2 21.01.26 166 3 20쪽
304 53. 파편의 편파(4) +2 21.01.07 137 2 13쪽
303 53. 파편의 편파(3) +2 20.12.31 140 4 27쪽
302 53. 파편의 편파(2) +2 20.12.21 153 4 19쪽
301 53. 파편의 편파(1) +2 20.12.15 136 3 20쪽
300 52. 편파의 파편(6) +2 20.09.19 176 6 24쪽
299 52. 편파의 파편(5) +2 20.09.09 170 3 16쪽
» 52. 편파의 파편(4) +2 20.09.05 144 5 19쪽
297 52. 편파의 파편(3) 20.08.20 138 4 19쪽
296 52. 편파의 파편(2) 20.08.13 144 3 20쪽
295 52. 편파의 파편(1) +8 20.08.07 173 5 17쪽
294 51. 찰박찰박 해(5) +3 20.04.24 187 2 17쪽
293 51. 찰박찰박 해(4) +2 20.04.21 154 2 19쪽
292 51. 찰박찰박 해(3) +4 20.04.13 153 3 20쪽
291 51. 찰박찰박 해(2) +3 20.04.07 156 3 16쪽
290 51. 찰박찰박 해(1) 20.04.07 146 3 12쪽
289 P.S 푹 익혔어 +4 20.04.02 160 3 10쪽
288 50. 삼월의 토끼(5) 20.04.01 151 2 12쪽
287 50. 삼월의 토끼(4) 20.03.27 140 3 14쪽
286 50. 삼월의 토끼(3) +4 20.03.25 154 3 20쪽
285 50. 삼월의 토끼(2) +2 20.03.22 180 3 22쪽
284 50. 삼월의 토끼(1) +2 20.03.17 142 2 15쪽
283 49. 오목과 오목(5) 20.03.13 153 2 16쪽
282 49. 오목과 오목(4) +2 20.03.01 176 2 18쪽
281 49. 오목과 오목(3) +6 20.02.27 157 2 22쪽
280 49. 오목과 오목(2) +4 20.02.21 160 3 23쪽
279 49. 오목과 오목(1) 20.02.19 166 2 26쪽
278 48. 볼록과 볼록(5) 20.02.13 156 2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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