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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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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12.11.15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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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5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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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21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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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회색시대-19.젖은.(1)

DUMMY

1714년 9월 7일.


마구잡이로 마력을 쏟아 부은 덕에 진은 이틀 만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떠나자고 말한 만큼, 얼른 몸을 추슬러야 했다. 다리 끝 손 끝 기운 하나 남지 않았지만, 겨우 벽을 붙들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아저씨와 아버지에게는 민망하지만 사과를 하고, 떠나야겠다.


-난 내 주변 사람만 편하면 다야.


이건 나와 주변사람 때문이 아니야. 이건, 온당하지 못한 권력 싸움이니까, 우릴 도구로 보는 사람을 위해서 싸울 이유는 없는 거니까.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림의 해방이 아닌 거니까. 이제, 온전히 아니까, 그런 거니까.


“난, 음, 여전히 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 역시 있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긴 해.”


혜인이 말에 진은 눈을 날카롭게 뜬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도 아깝기도 하고, 여전히 나를 거기서 증명하고 싶어. 그런데, 뭐, 나한테 최우선은 너랑 인휘 아저씨니까.”

“너는 남고 싶은 거니?”


그날 왕세자를 구하며 참담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익숙하기도 한 것이었다. 참담함이 익숙해진 일상이란 것은 조금 슬프지만. 혜인은 진이 귓가에 속삭였을 때는 당장 그러마, 라고 했음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갈등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혜인의 답이 늦자 진은 얼굴을 찌푸리지만 혜인은 제 생각을 계속 이었다.


“사실 도망가더라도 무언가 달라질 거라 생각하지 않고, 애초에 높은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어디서든 벌어 질 수 있는 일이니까. 차라리 끼어들어서 제대로 해내고 인정 받는 것, 인정이란 말은 이상하다, 아무튼 내 몫을 찾을 수는 있을 테니까.”

“넌, 네가 이용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고 있어. 알고 있어. 그런데 모르고 시작한 것이 아니었고, 어디 가든 내 한 몸으로는 당연히 벌어질 일이었으니,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 진행된다면야.”

“넌 지금 이게 네가 원하는 길이야?”

“내게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건데? 난 그냥 너 따라간다고 했잖아?”


애초부터 갈등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구나. 진과 혜인은 마법사 협회를 나와 인휘와 히르가 있는 곳을 향해 가는 길에 원하지 않게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다. 혜인이도 떠난다고 했음에도 이리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은 아마도 온전히 이 아이의 뜻이 아님을 알아서일테다. 지금껏 제 뜻을 몰랐고 겨우 세운 뜻이 틀린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넌 두려운 거니, 아니면 진심인 거니.


“아깝다고? 넌 나한테 그랬잖아. 실패가 두려워서 그림을 못 그리냐고. 실패하면 처음부터 다시 세우면 된다고 네가 그랬잖아.”


그 말에 혜인은 입을 다물고 진을 바라보다 고개를 팩 돌리고 빠른 걸음으로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혜인아.”

“조용히 해. 거리 분위기도 안 좋은데 조심성 없이 목소리 너무 높였어.”

“아…….”


그러고보니 왕세자가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한다. 왕은 분노하여 왕세자를 역적으로 이름 짓고 누구 다른 먼 친척 하나를 새로 왕세자로 세울 것이라 했다. 그리고 내전이 발발한 것이란 소식에 능력 있는 자들은 벌써부터 피난 준비를 하고, 없는 자들은 숨을 만한 곳 찾아 식탁 밑에 들어가 달달 떠는 형국이었다.


“심문소는 이름을 신군(神軍)으로 변경한다더라. 웃기지?”


혜인이 물어다 준 소식에 진은 저기 보이는 심문소 지부 하나를 바라보았다. 그 검은 옷 무리들은 이제 군이 된다고 한다. 신을 위한 군대라 이름 짓지만, 현세의 왕을 위한 군대라. 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아버지와 아저씨를 만나고,


“일리스비 님. 에르시테나 님.”


그들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틸리 공자의 비서관이 있었다. 주춤, 진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무슨, 일이시죠?”

“많이 편찮으셨다 들었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 예.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자께서 두 분과 나누실 말씀이 있다 하니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와 할 이야기 따윈 없다. 그 결이 같은 사람들과는 할 말이-.


“참, 인휘 화백님께서도 걱정을 많이 하시더군요. 해서 저희 저택으로 모셨습니다.”


-난 내 주변 사람만 편하면 다야.


왜 그의 말이 떠올랐을까. 진은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바닥난 마력과 체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진의 손을 꼭 붙든 혜인의 손 역시 떨리고 있었다.

.

.

.

.

.

.

.

.

.

.

“아버지!”


세이즈는 오랜만에 뵙게 된 아버지, 임 바르시 공에게 달려갔다. 서로 생사를 알고 있다고는 하나 만날 수 없었다. 공식적인 가족관계는 파기 된 상태이기까지 했다. 이제야, 내전이 임박한 이제야 모두가 눈 가리고 아웅하던 손을 집어치운 이제야 만난 두 부녀의 눈에는 눈물이 살며시 고였다.


“그간 고생했다.”

“고생은요, 저야 편하게 지냈는데요.”


편했지요. 제 목숨 값이 비싸게 만들어주신 아버지 덕에 가문 이름 덕에 살아남았지요. 세이즈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가족의 안부를 묻고 제 안부를 전해주는 이야기 끝에 임 바르시 공이 다른 말을 꺼냈다.


“그간 은신하여 사느라 고생했을 터, 이제 대중 앞에 몸을 내보일 때가 되었지.”

“예? 무슨 뜻이지요?”


세이즈는 당황을 감추려 애쓰지만 표정이 쉽사리 정리 되지 않았다. 아버지와 자신. 가는 길이 다른 사람들. 그리움의 끝에 달라붙은 그 불안감이 자신의 심장을 때리기 시작했다. 임 바르시 공은 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을 꼭 붙들었다. 한없이 고왔던 손은 가고 없고 거친 나무 껍질 같은 손의 느낌이 전해져 왔다.


“네가 다른 아이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었느냐? 글 때문이 아니었느냐?”

“글이야 가명이지만 계속 쓰고 있었고, 저는 원래도 편집을 주로 하고 있었어요.”


세이즈의 말에 임 바르시 공이 허허 웃으며 한참 마른 세이즈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시민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쓰거라.”

“시민 참여라 하심은…….”


아비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끝내 모른 척 하고 싶어졌다. 알고 있다. 아버지와 가문이 이 일에 뛰어 든 것은 예술을 위한 것이 아님을. 그럼에도 참여한 것은 가문의 명목과 자신의 명목이 달라도 중간까지는 손을 잡고 갈 수 있기에. 하지만 아버지께서 저리 말씀하실 줄은 몰랐다. 그도 자신에게 직접.


“참전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국왕이 병사로 징집한 인원이 꽤 된다 하던데, 우리 역시 참전을 독려하도록 해야지. 국왕파가 억지 참전으로 비난 받고 있는 이때, 자발적 참전을 유도하도록 한다면…….”

“싫습니다.”


세이즈는 아버지의 말을 단박에 끊었고, 임 바르시 공은 딸의 그런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치켜 떴다. 세이즈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제게 이 내전의 의미 앞뒤를 완벽하게 설명한 글을 요구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 글이 아니라면 전 쓸 수도 없고, 쓰기도 싫습니다.”

“세이즈 임 바르시!”

“전 이제 가문 사람이 아니니 가문 이름으로 명하실 수는 없어요.”

“넌 지금 누구의 피 값 위에 살아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때 죽은 영애, 영식들 가문의 뜻을 반할 참이냐!”

“아버지야 말로요! 아버지와 왕세자 저하야 말로요! 저 거리에서 죽고 다친 학생들의 피 값 위에 있는 것 아닌가요? 모두 예술의 해방을 위해서 그랬어요. 다른 가문의 자제들이라고, 다 가문과 같은 뜻은 아니었어요!”

“헛된 이상주의를 꿈꾸느냐!”

“아니요. 저는 현실주의자입니다. 다만 그 현실이 길고 오래 걸릴 뿐이지요.”


세이즈는 서늘한 눈으로 아비를 바라보고 임 바르시 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민하지만 순진한 딸아이, 평민 아이들과 몇 번 놀고, 같잖은 지식인이란 놈들과 어울리더니 기어이 이 사단이 난 듯했다. 현실을 모르는 어린 아이의 고집 센 주장 앞에서 치켜 뜬 눈 꼬리를 내리고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세이즈. 그래서 우매한 백성들로 무엇을 이룰 수 있으리라 보느냐? 또한 그 시위들이 너희 힘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익히 알고 있지 않느냐? 자금도, 보호도 다 힘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아니요, 아버지는 틀리셨어요. 백성은 우매하지 않아요. 단지 우리가 기회를 빼앗아 왔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버지, 돈과 권력이 달려 있을 때만 사람들이 목숨을 거나요? 아니요, 신념과 추상적이어도 분명한 목표 때문에 목숨을 걸기도 해요.”

“허, 누가 말이냐?”


아비의 말에 세이즈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저요.”


딸의 답에 임 바르시 공은 입을 다물었다.


“제가 그래왔어요. 그래요, 비싼 목숨 값 덕에, 아버지 덕에, 가문 덕에 목숨을 잃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버지, 제가 심문소에서 고문을 당하고, 여태 먼저간 친구들이 꿈에 나와 울고 있어도 계속 이 일을 작으나마 해나가는 건, 왕세자를 위해서도, 권력을 위해서도 아니에요. 그림 때문이고, 예술 때문이에요. 아니, 그림 덕이고, 예술 덕이에요. 제가 여태 버틴 것은.”


그래요, 아버지. 내가 예술을 구원할 것이라 착각한 날도 있었죠. 하지만 말이에요, 그날 깨달았어요. 우리가 예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우리를 구원하고 있음을 말이에요. 그렇기에 제 생각은 더 단단해지고 제 의지는 흔들리지 않는 거에요. 아버지, 저보다 그림을 본 세월이 더 기셨던 분이, 더 오래 그 기억을 가지신 분이, 어째서 모르시는 거죠.


“세이즈, 넌 현실을 잘못보고 있는 게다.”

“그 현실이란 것, 잘못된 현실을, 계속 현상으로 유지해야 할 이유가 있는 건가요?”

“넌 가문을 배신하는 게다.”

“제가 하는 일이 아버지 일에 최소한 방해는 되지 않을 거에요.”


끝까지 지지 않는 딸의 얼굴을 보는 임 바르시 공의 얼굴이 차츰 일그러지지만 세이즈는 그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셨지요. 두려워하라고, 두려운 만큼 용기를 내라고. 전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는 것뿐이에요.”


세이즈가 예를 올리고 물러가는 동안, 그는 침묵만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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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회색시대-20.아름다운.(2) +3 14.10.09 825 35 9쪽
159 회색시대-20.아름다운.(1) +1 14.10.08 1,079 35 9쪽
158 회색시대-19.젖은.(4) +3 14.10.06 1,050 25 9쪽
157 회색시대-19.젖은.(3) +4 14.10.04 881 27 11쪽
156 회색시대-19.젖은.(2) +1 14.09.27 761 34 10쪽
» 회색시대-19.젖은.(1) +2 14.09.21 702 2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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