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시대-18.뒤엉킨.(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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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걸 허락했다고?"
라인 알 틸리와 만나고 온 진이 인휘와 이야기를 하던 중 히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충분히 예상했다. 스승이자 이웃의 아저씨는 기껍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진의 대답에 히르는 기가 막힌다는 듯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마탑 놈들을 끌어드릴 줄 알았는데, 너를? 하, 이놈들 보게. 내가 다시 거절하마."
"아니요. 전 할 겁니다."
진이 물러 서지 않자 히르는 설명해보라는 듯 턱을 까닥였다. 인휘도 침중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늦은 여름 밤 벌레 소리가 침묵을 가로 지른다.
"그게 답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 다른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시위로 인해서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지치고 다치고 시위 때마다 진압은 더 거칠어 졌습니다."
이웃의 아저씨, 가 아니라 스승에게 하는 답이었기에 히르 역시 친구의 아들이 아닌 제자에게 하는 물음을 한다.
"왕세자가 구출되면 그 다음 수순이 뭐라고 생각했느냐? 전쟁이다. 내전이야. 내전으로 죽는 사람이 많겠느냐, 시위로 죽는 사람이 많겠느냐?"
"내전에서 사람은 죽겠지만 최소한 그들도 죽겠죠."
"최소한? 내전으로 흘리는 우리 피는 최소냐, 최대냐?"
"전 대등한 입장에서 싸울 수 있다는 점을 말한 겁니다."
기실 내전에 관해서 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답을 이어가며 떠올렸을 따름이었다. 또한 그 답이 맞다 생각했다. 일방적으로 쫓기고 밟히는 것이 아니라 눈을 마주치고 싸울 수 있는 힘. 나의 마법만으로,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 힘을 왕세자가 줄 수 있으리라.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잃을 것이 무엇인지 모를 이들이 돈을 주었고 힘을 주어왔는데 무어 그리 다를 것이라고 스승은 저리 말하는가.
"권력 대 권력은 대등할 수 있지. 하지만 권력에 종속 된 사람은 결코 대등해질 수 없다."
"권력이란 게 솔직히 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게 틸리 공자고 알 아마스 공같은 분을 뜻하는 거라면, 지금까지와 뭐가 다릅니까? 이용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자금을 이용하고, 몇 가지 힘을 이용 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진짜 권력이 등장하면 사정이 다르다. 모든 걸 다 잡아먹는 힘이야."
"왜 깨끗한 권력이 없다 생각하십니까?"
권력이 뭔지 모른다 제 입으로 말해놓고선 이런 질문이라니. 진은, 그리고 히르 또한 그 질문을 누가 했는지 쉬이 눈치챘다. 진은 히르가 뭐라고 말하려는 것을 채갔다.
"알 아마스 공도 우리를 언젠가 잡아 먹는 겁니까?"
"진아."
인휘가 드물게 엄격한 목소리로 진을 부르며 인휘가 히르의 말 끝을 이어간다.
"알 아마스 공께서는 권력을 권력으로 향유하시는 분이 아니다. 지킬 것이 있어 이용하시는 분, 여타 다른 이들과 다르시다."
그들은 그리 안 믿으며 알 아마스는 어찌 믿느냐는 소리가 목 끝까지 차오르나 그는 참아 넘겼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 잔재주 피워봤지만 차마 제 겪은 진실을 거짓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알 아마스 공께서 이런 사태를 일찍이 예견하시고, 내게 맡기신 것이 있다."
히르는 품 속에서 서류를 꺼냈다. 인휘조차도 처음 보는 것이니 진 역시 모를 도리 밖에.
"도피할 때 유용하게 쓰일 거라 하셨다."
눈만 깜빡이는 둘에게 히르는 긴 한숨을 내쉰다.
"도피할 때 유용하게 쓰일 거라 주신 예금증명서와 신분증이다."
"아저씨!"
"히르!"
공은 아마도 이런 두 부자의 반응을 예상해 제게 주셨던 게지. 히르는 서류를 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
"발을 빼려면 지금 뿐이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어."
"잠깐만, 잠시만."
인휘는 골치 아파지는 머리를 잡으며 빠르게 말을 쏟아내는 히르를 막았다. 저들이 이곳에 자신을 데려오고, 피하지 않겠다 먼저 나섰다. 피 흘리는 이들을 보고 입으로라도 붓을 문다 했다. 뚫어지지 않았던 벽은 얽매인 아들 덕에 나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다시 묶인 사각의 선, 그 안에서 짓밟혀 꿈틀거리는 진. 뚫고 나올 수 없다면 함께하겠다 했다.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듯 벗은 도망치자 한다.
"지금 네가 뭐를 걱정하는지는 알겠지만 너무 갑작스럽잖아."
"내가 뭐를 걱정하는지 알면 갑작스러워도 받아드릴 거야. 걸린 건 네 아들과 내 딸의 목숨이야."
가진 것 없는 자가 동아줄처럼 붙들고 있는 힘이란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권력자들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것인지 익히 알고 있다. 그리하여 십 년 전 벗은 도망쳐야 했고. 하지만 말이야, 히르, 내 친구여, 다시 도망치란 말이더냐.
인휘는 아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이 아이가 있었지. 신념, 그림, 예술, 죄다 아들의 고통 앞에서 이미 한 번 다 무너뜨렸거늘 어디 두 번은 못할까.
"진아…….”
"지금 도망가면 여태 해왔던 일은 다 뭐가 되는데요?"
아비가 저 부르는 말 못 들은 척 진은 목소리를 높였다.
"아저씨도 혜인이도 도망가서 계속 쫓겼다면서요? 어르신께서 주신 돈이 있어도 얼마나 어디서 버틸 수 있는데요?”
“최소한 여기서 이용당하는 것 보다 낫지. 자유의지인데.”
“제 의지가 아니라 아저씨의 의지잖아요! 그리고, 혜인이가, 혜인이 그 고생을 하는데……”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진의 고개가 돌아갔다.
"히르! 뭐 하는 짓이야!"
인휘는 제 아들을 감싸며 히르에게 소리를 지르지만, 흥분한 히르는 듣지 못한 채 벌개진 눈으로 진에게 비명처럼 외친다.
"그 개 좆같은 새끼들이 혜인이가 알량한 힘이 있다 하니 그 개새끼 침실에 밀어 넣었다! 그걸로 지금까지 해온 거면 충분하지!"
여적 눌러왔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게 달콤한 말로 유혹해 끌어 들인 걸로 부족하여 뭐를 더 원하느냐. 히르의 분노에 눌린 진이 주춤하고 침묵이 흐르려는 찰나,
"아니. 아빠. 그건 내 선택이었어."
찰나를 깨버린 건 혜인이었다. 바깥에서 듣다 못해 들어온 것. 혜인이는 찬 눈을 하고 아비를 본다.
"다시 말하지만 그 사람들 때문에 결정한 게 아니었어. 아빠는 마법사니까 알잖아? 남 핑계 대지 않는 것이 마법사라며? 그게 어떤 위험을 가져올지 모르고 한 일도 아니고, 희생 없이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도 알고, 난 그리고 이걸 희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넋 빠진 년."
"아빠가 추구하는 게 뭔지 알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언제 이룰 건데? 어떻게 이룰 건데? 시위에 나간 동지들 다 죽고 나면? 이 개 같은 세상 언제 어떻게 바뀌는데? 아빠 말대로 권력이랑 관계 안 짓고 우리 힘으로 만든 세상은 천국이 될 수 있어? 그런 거야?"
히르의 입술이 떨렸다.
"네가, 너희들이 다 다치면, 그 세상이 다 무슨 소용인데......."
아비의 젖은 목소리에 혜인은 잠시 흔들리지만, 외려 진은 이를 콱 물었다.
-난 내 주변만 편하면 다야.
아니, 아니어야 해. 우리는 아니어야 해. 우리는 그리 하지 말아야 해. 우리는 그리 되지 말아야 해, 우리는 세상과, 예술과-
진은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인휘와 눈이 마주쳤다. 참담함, 무언가 모를 참담함. 진은 겨우 허리를 곧게 펴고 히르가 준 서류를 갈무리해서 인휘에게 내민다.
"아버지, 아저씨. 저희는 할 겁니다. 위험하시면 도망가세요. 나중에 일이 다 끝나면 찾아가든 하겠습니다."
"진아!"
"듣기로는 외국은 자유로워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하니 아버지 작품 활동도 자유롭게 하실 수 있을 거에요. 아버지가 원하시는 사각 없는 그림을 자유롭게 그릴 수 있을 겁니다."
흔들리지 않는다 했으니까, 갈등하지 않는다 했으니까. 진은 서류를 인휘의 품에 떠안기듯 넘겨주고 혜인의 손을 붙들고 나가버렸다.
"씨발!"
쿠당탕 소리와 함께 의자가 넘어졌다. 히르는 손에 집히는 데로 의자를 집어 던져가며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인휘도 말릴 생각하지 않았다. 제게 손이 있었더라면 아마 함께 던졌을 것이다. 무너진다. 세계가, 세상이 이리 쉽사리 무너질 줄 누가 알았겠느냐.
“히르…….”
한참 만에 씩씩거리며 진정하려는 히르에게 말을 걸어보지만 히르는 손을 들어 인휘의 말을 막았다. 지금 자칫하면 다 부셔버릴 지도 모른다. 인휘는 히르의 그런 모습에 물음을 삼켜야 했다. 혜인이 침실 운운한 것은 대체 무엇이기에 조카처럼 생각하는 진을 그리 때렸는지, 우리는 이제 어찌 해야 하는지.
“일단, 흥분이 지나쳐서 진이 때린 거 미안하다.”
겨우 진정한 히르가 사과부터 하자 인휘는 결국 묻지 못했다. 아마도 그럴 만큼 저 마법사를 뒤흔들 만큼 중요한 문제였겠지. 히르는 인휘의 품에 담긴 서류를 도로 제 손에 담아 팔락거리며 뒤져본다. 이미 여러 번 확인하고 또 확인 한 것. 알 아마스 공이 왕세자가 왕 앞에서 했다는 이야기를 따로 편지에 적어 보낸 것은 때가 되었다는 의미였으리라.
“그리고 우리는 도망갈 준비를 해야겠다.”
“히르! 그게 무슨 소리야!”
“알잖아? 우리는 이제부터 아이들의 짐이 될 거다. 얽매이는 쇠사슬이 될 거라고.”
인휘는 입을 다물었다. 히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서 다문 것 하나, 그리고 정작 짐이 되는 것은 자신 뿐임을 알아서. 그래, 자신이란 짐이 없으면, 진의 선택권은 늘어나게 될 것이다. 혹여 후에 다 그만두더라도, 혹여 후에 다 포기하고 싶어지더라도. 자신은 늘 그래왔듯 아들의 짐이었을 뿐이었다.
“헌데…….”
“음?”
“그런데, 내가 도망침으로써 생기는 짐은 어쩌면 좋은 거지?”
도망친 비겁한 화가 인휘 일리스비의 아들 진 일리스비. 자유예술연맹의 도망자, 신의를 져버린 자. 제가 그 똥물을 뒤집어 쓰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혹여 그는 아이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이미 아비의 유명으로 매를 뒤집어 쓴 세월이 십 년이었는데, 또 다른 유명으로 옭아매지 않을까, 그 생각이 미친다. 히르 또한 인휘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 팔락거리며 보던 서류를 책상에 던지듯 놓으며 긴 한숨을 내쉰다.
“제기랄. 이럴 때는 신념 있는 사람이 부럽다.”
진실로 부럽다. 뜻하는 바대로 온 몸을 부딪히고 온 몸이 개박살 나도 당당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부럽다. 그리고 또한 두렵기도 하다. 두 홀아비는 자식걱정에 뜬 눈으로 밤을 세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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