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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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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12.11.15 06:57
최근연재일 :
2015.02.25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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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03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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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회색시대-18.뒤엉킨.(6)

DUMMY

인휘와 히르와 다투고 나온 진과 혜인은 말 없이 복도를 걸었다. 하겠다 했다,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은 무겁다. 진은 진대로, 혜인은 혜인대로. 진은 히르가 때린 볼을 만지작 거렸다. 아픈 건 볼이 아니었다. 혜인의 작은 어깨가 축 늘어진 것이 뻔히 보여서, 그래서 아마도 아픈 곳은 다른 곳. 혜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한참 만에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아빠 고집은 알아줘야 해.”


제 고집을 아마도 아빠에게서 물려받았나보다, 하고 홀로 생각하니 픽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여전히 자신은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아비의 그 말이, 우리가 다치면 그 세상은 다 무슨 의미가 있냐는 그 말이 자꾸 가슴에 맺혀서. 혜인은 고개를 한 번 휘젓고 흔들리는 의지를 다잡는다. 혜인은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진을 돌아보았다. 볼을 만지작거리는 그 모습에 에구, 하며 진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댄다.


“우리 아빠 주먹이 많이 세졌어. 살이 찌더니 말이야. 미안해.”

“네가 때린 것도 아닌 걸 뭐.”


나 때문은 아니더라도, 나 때문이기도 하지. 혜인은 그 말은 삼키며 다시 빙그레 웃으며 진의 어깨를 토닥였다.


“뭐, 예상 못한 거 아니었잖아? 힘내서 꼭 성공하자.”

“그래…....”

“인휘 아저씨 곁에는 아빠가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뭐, 기어이 자기 사람만 챙긴다는 양반인데, 그건 해내겠지.”


마지막 말에 박힌 가시는 아비에게 박는 가시가 아니라 제 결심이 박는 가시 같았다. 진은 자신의 어깨를 토닥거리는 혜인의 손을 붙들었다. 거칠고, 작은 손. 참 많은 걸 해온 손.


“너는 괜찮아?”


묻지 말아야 하는데, 묻고 만다. 혜인의 가슴에 히르의 말이 맺혔듯, 진의 가슴에도 마찬가지였다. 혜인은 제 결정이고, 희생이라 생각하지 않다고 했지만, 그랬다 하더라도 그날의 네 눈이, 네 눈물이 여전히 가슴에 맺혀있었으니. 혜인은 그 질문이 조금은 짜증스러운지 얼굴을 찌푸리다가 그냥 다시 웃는다.


“말했잖아. 난 희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혜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몇 가지를 포기할 뿐이야.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건 늘 있는 일이잖아. 그걸 포기해서 더 좋은 결과를 낳는데 보탬이 되는 거지. 그것뿐이야.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렇지 않아?”

“…….”

“뭐,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못 낳겠지만, 더 나은 세상을 낳는데 도움이 되는 거니까, 세상에서 제일 큰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거니까.”


후회하지도 않고, 잘못하지도 않고, 희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가끔씩, 이렇게 찬 바람이 휭하니 가슴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건 무엇 때문일까. 아니, 아니야, 살면서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는 하는 거니까. 그때 그 선택을 거부했으면 그건 그거대로 후회했을 거야. 할 수 있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포기했으면 말이야.


“혜인아…….”


진은 가만이 그 작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결혼, 할래?”


갑작스러운 진의 말에 혜인은 진을 밀쳐내고 눈을 땡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픽, 하고 웃는다.


“너 미쳤니? 동정하니? 동정만 가지고 결혼 해?”

“결혼…은 확실히 급했지만, 음, 너라면 괜찮아, 아니, 좋아, 음, 동정이 아니라…….”


동정이 아니라, 연민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낯간지러운 말도 아니지만, 그냥 네가 가슴 뚫린 목소리로 말하는 게 싫어서 그래. 그런 목소리에 물기가 아니라 온기를 돌게 하는 게 나였으면 좋겠고. 진은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몰라 우물거렸고 혜인은 그런 진의 볼을 쭉 잡아 늘어트렸다. 바보 같아.


“됐어. 야. 멀쩡한 총각 혼삿길 막긴 싫다, 야.”


진은 제 볼을 잡고 늘어지는 혜인의 손목을 붙들고 내려다 보았다.


“내가 싫어서 그런 거 아니면 난 상관없어. 아니, 상관 없는 게 아니라, 아니 상관없는데, 그러니까……. 좋아, 그러니까……”


무엇이 상관 있고 없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너도 알고, 내가 알고 다 알고 있지. 그런 거니까. 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혜인은 그냥, 웃었다. 그냥 웃으며 진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진의 가슴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은 이것만으로 만족이다. 휭한 바람 지나간 가슴 온기로 잠시 채울 정도만, 그 정도만이라면. 어쩌면, 이래서 사람들은 어깨를 맞대고 같이 싸우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해, 혹은 동감을 바탕으로 한 온기. 홀로 싸우자면 가슴 사이로 휭한 바람이 스치니까. 그러니까.


낡은 옷자락, 매캐한 연기, 어두운 거리, 턱까지 차오르게 쉬는 숨, 노곤한 땀 냄새, 비릿한 피 냄새, 시끌벅적한 구호, 병상, 지리하고 지난한 이야기들. 다시 만난 우리들 시간의 색은 그런 것뿐이지만, 같이라서 잊게 되고 혹은 같이라서 그 색뿐이어도 괜찮은 것일지도 모른다.

.

.

.

.

.

.

1714년 9월 3일.


작전은 세워졌다. 요약하자면 왕궁 한 쪽에서 소란을 피우고 별궁에 갇힌 왕세자를 구한다. 진과 혜인은 왕세자를 구하는 쪽이었다. 혜인이 그림을 훔친 경험도 있어, 더 도움이 될 것 같단 판단 하에 결정된 작전이었다. 그때 그림을 훔치러 다닐 때 입었던 아래 위 새카만 사내 옷을 입은 혜인을 본 진은 생각 없이 웃었다가 혜인에게 등짝을 맞았다. 너도 진짜 안 어울리거든, 하며 빽 소리를 지르는 혜인 때문에 진은 또다시 웃고 말았다.


진 역시 새카맣게 차려 입고 등에는 아버지가 챙겨준 그림이 든 통을 매달았다. 그림 몇 장, 종이와 천에 담긴 그림 몇 장이 다지만 무겁기 그지 없다. 무운을 빌어주는 아버지에게 언제 떠나실 예정이라 묻는 말에 인휘는 아직 모르겠다며 가볍게 웃기만 했다. 그저 네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란다면 웃는 아버지 앞에서 더 무어라 말할 수 있었을까.


궁 근처까지는 마차로 이동하기로 했기에 혜인과 진 그리고 구출조에 참여하게 된 아클라가 함께 같은 마차에 탔다. 혜인은 마법진을 파훼할 수 있는 대마법탄이니 시야를 가릴 수 있는 안개탄 따위를 꾸역꾸역 가방에서 밀어 넣는 꼴을 보는 아클라가 이죽거린다.


“반쪽, 그렇게까지 챙길 거 없다. 왕궁 마법진은 마탑에서 설치해서 파훼법은 내가 다 안다.”


반쪽이란 말에 혜인이 얼굴을 찌푸리지만, 익숙한 소리라 금세 표정을 정리했다.


“그래도 제 몸 보호할 정도는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라, 그럼.”


탑주 리히스를 닮아 말 끝이 칼날 같던 이가 저러고 말을 끊고는 긴 한숨을 내쉰다. 진은 언뜻 그의 얼굴을 살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걱정되십니까?”


진의 목소리에 아클라가 다시 픽 하고 웃는다. 인휘라는 화가가 자애롭다더니 아들 놈도 비슷하군, 하며 진의 눈을 살펴보았다. 그 마법을 성공한 자, 천부적인 재능과 마력, 그 눈이 그럴 법 하다는 걸 보여주면서도 조금은 흐릿해 보이기도 한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하기야 이런 세상에서 곧은 눈 가지기가 쉬운가. 여태 본 바에 따르면 이 녀석 하나 두고 오가는 말이 많다. 하여 아클라는 답을 해주기로 한다.


“걱정이 되는 건 오늘 일이 아니라 그 다음이다. 왕궁 내에 협조자도 있으니 일 자체는 어렵지 않을 거다.”

“다음이라 하시면…….”

“마탑이 왕궁 보호를 위해 설치한 마법을 마탑 마법사가 파훼하는 일이다. 왕세자가 왕이 되면, 우리 공을 치하 할 까, 아니면 경계할까?”


진은 입을 다물었다. 뭣도 모르지만 그 정도에 답을 할 수 있을 만큼은 안다.


“아마 이 일이 끝나면 앞으로의 정국에서 마탑은 마탑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왕궁과 지난한 입 싸움을 해야 할 거다. 그는 내 몫이 아니고 스승님이나 다른 마법사들의 몫이 되겠지만.”

“…….”


그러니 이번 일에도 너희들이 선별된 거다. 그들에게도 우리와의 설전은 부담이 될 테니까, 하는 그 말, 아클라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애송아. 그렇기 때문에 소소한 힘을 가진 이들은 집단을 이루지. 홀로 싸우기는 힘들거든.”


진은 그 이야기가 저를 두고 하는 이야기임을 눈치챘다. 아클라는 픽 웃었다.


“나중에 마탑 입단시험이나 봐라. 너 정도면 금방 마법사 자격증 따서 등록할 수 있을 거다.”


아저씨, 아저씨는 권력에의 구속이라며 마탑을 거부했는데 다른 마법사는 다른 권력이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을 거라 말하네요. 아클라는 답을 바라며 한 말이 아니었기에 그저 가만이 듣고 만 있는 진을 내버려두고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차가 어느 길가에서 멈추고, 셋은 내려 왕궁 근처로 가 대기 했다. 동문 근처에서 시위대로 위장한 어느 귀족가의 사병집단들이 소란을 피우면, 그때 마법을 파훼하고 잡입 한다. 단순한 작전인 만큼 상황에 따른 개인의 판단을 중시할 것이며, 진은 통보 받은 내용을 되새기며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혜인 역시 대마법탄과 안개탄을 손에 쥔 채로 만지작 거리며 신호를 기다렸다.


순간 콰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클라가 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준비해라.”


작가의말


다음 연재일이 추석전후라 조금 일찍 들고 왔습니다. 다음 편은 추석 끝나고 업데이트 될 듯하네요. 모두 복 된 한가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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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회색시대-20.아름다운.(2) +3 14.10.09 826 3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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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색시대-18.뒤엉킨.(6) +2 14.09.03 922 21 10쪽
151 회색시대-18.뒤엉킨.(5) +2 14.08.31 915 3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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