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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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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12.11.15 06:57
최근연재일 :
2015.02.25 07:03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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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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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4
글자수 :
818,771

작성
14.08.24 00:00
조회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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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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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회색시대-18.뒤엉킨.(4)

DUMMY

상인 조합의 시위가 있다 하던데, 어쩐지 거리에 검은 옷 입은 사내들이 보이지 않았다. 시위가 시작하기도 전에 와 있거나 시작할 때 즈음부터 들이닥치던데, 오늘은 드문드문 치안대만 있을 뿐이었다. 진과 혜인은 오히려 그것이 더 불안하여 그네들이 어디 숨어있을까 싶어 주변을 더욱 경계했지만 어수선한 사람들의 모습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이상하네.”


혜인의 눈치는 치안대쪽으로 향했다. 왜, 심문관이 아니라 치안대지. 저 놈들도 위험하긴 매한가지지만, 저들은 어쩐지 ‘적’으로 인식 되지 않았다. 도망치던 나날 중에 군부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치안대는 치안대이고 군부는 군부이다.


“알겠다.”

“응?”


상인들은 행진하며 구호를 외칠 뿐이었고 치안대는 우물쭈물 거리며 그네들이 멀리 걷지 못하도록 더 앞으로 가지 마시오, 마시오 하며 뒤로 물러서게 할 뿐이었다. 그러니 마법사가 힘쓸 일이 없어 주변을 눈치껏 둘러보던 진이 전단지 하나를 들고 흔들었다. 쉽게 쓰인 짧은 전단지, 혜인은 그를 받아 읽어내려 갔다. 상인이 활동하기 힘든 수상한 세월이다, 국가 경제 우려, 왕세자의 복권을 통해 안정적인 국정 이룩, 운운. 그를 읽어 내려가던 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구나.


“그림 이야기가 없구나.”


그림 이야기 없이 왕실 운운했으니 심문관들이 나설 자리가 없었다. 하기야, 쓸 데 없이 뺄 힘도 없었고. 마법사들이 여태 연좌시위를 하는 판에야. 치안대도 기실, 거리가 소란해지는 것 때문에 나왔을 뿐, 역심 운운할 수가 없었다. 저들도 지금 어느 곳에 줄을 대고 어찌 움직여야 할지 모르기에. 상인들은 나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왕세자 복권과 관련된 구호를 외쳤다. 그곳에 그림은 없었다.


그곳뿐만이 아니었다. 거리를 휩쓸게 된 화제는 온통 왕세자였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해왔고, 할 것임에 관한 이야기였다. 현왕의 등극 이후로 강해진 교황청과 그로 인해 심문관들의 난행, 그로 입은 피해. 그림의 이야기는 멀지만, 삶의 이야기는 가깝다. 그러하므로 눈 앞에 있는 것을 떠든다. 색을 꿈꾸는 이들 또한 그랬다.


현실.


사각의 화폭을 벗어난 현실의 이야기. 그가 왕이 되면 쉽사리 이루어질 꿈. 그러하므로 그의 구명이 우리의 꿈. 하지만 또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 또한.


현실.


그가 왕이 된다 하여 이는 이를 수 있는 것인가. 권력의 속성. 완전한 자유를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懷疑). 우리 손으로 쟁취하지 못한 것에 대한 한계.


이 모든 것들은 혀끝과 혀 끝에 달라붙어 치고 박는다. 말과 말이 치고 박아 남는 것은 말 뿐. 모두가 혼란스럽고 늦여름의 더운 해는 사람을 지치게 한다.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을 이제는 식히고 싶다. 좀 더 가깝게, 좀 더 쉽게.


“저를 찾으신다고요?”

“예, 마법사님. 그리고 일리스비 마법사님도.”


혜인과 진은 저를 찾아온 라인 알 틸리 공자의 비서관의 뒤를 따라갔다. 어디 시위에 보탬이 되라 하면 사람을 보내거나 딸랑 종이 한 장 날아오는 것이 다인 것을 굳이 비서관이나 되는 사람을 보내니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오랜만들일세.”


저 사람의 짙은 색은 더 깊어진 듯했다. 저 짙은 색이 무어였더라,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색, 하지만 어둡고 깊은 푸른, 여기까지 생각한 진은 주춤했다. 아버지의 그림과는 다르다, 아버지의 그림이 더 짙고 더 어둡고 더 두려워도, 이 느낌도 과히 좋지 않았다.


“무슨 일로 찾으셨는지요?”


혜인이 그래도 안면이 더 있던 터라 말을 이끌고 진은 멈칫한 걸음을 다 잡으려 애썼다. 아버지의 경고, 아저씨의 경고가 순간순간 떠올랐다. 명확하지 않은 이야기들이었지만, 그만큼 명확하지 않은 불안감이었다.


“궁중 회의에서 다시금 왕세자의 저하의 복위를 청원했지만, 국왕전하께서는 이를 거부하시고, 세자 폐위를 준비 중이시네.”


거리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만큼 저 위에서도 떠들었나 보다. 말과 말 사이에 남은 것을 말뿐이니, 다음에 청하는 것은, 말이 아닐 터.


“해서 왕세자 저하를 별궁에서 구출하고 전의를 다지기로 했네. 그 구출 작전에 자네들의 힘이 필요하네.”


흔들리지 않겠다고 했다. 갈등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힘이 필요하단 말에 냉큼 예, 하고 답하지 못하는 것은 보아온 것이 있고 들어온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하던 말들, 그림이 없는 이야기, 힘, 금권, 상인, 협력, 반목, 그런 단어들, 그리고 권력.


“아무래도 생각하는 방향들이 있겠지.”


혜인마저도 당장에 대답하지 않은 것은 진과 같은 것을 보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후회하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았다. 갈등하지 않았다. 다만 육감이란 것, 본능이란 것이 자신의 발목을 붙들었다. 둘의 그런 반응에 틸리 공자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자네들 아버지, 스승 되는 히르 마법사가 얼마나 권력을 혐오하는지 아는 바지. 내 소싯적에도 그 분이 마탑에의 등록을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했었네.”


언젠가 리히스가 언급한 적이 있었다. 헛된 이상주의자가 신념을 꺾고 권력과 손을 잡는 것이 얼마나 비참했을지 생각만해도 고소해서 웃음 난다며.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 이었을까. 눈 앞에 있는 자는 무엇을 잃을 예정이고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그런 분께 가르침을 받았으니 나를, 권력자라는 것을 경계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네.”


히르의 말을 이해해서 답을 안 한 것이 아니었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듣고, 본 것들이 손을 뻗어 입을 막게 했을 뿐이었다. 틸리 공자는 웃음을 짓는다. 저 웃음,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포근한 듯, 이해하는 듯 보이는 웃음이었지만, 몰에게 어느 학원생이냐고 묻던 대학생의 얼굴에서 본 그 비아냥을 떠올리게 하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말일세, 권력이란 것이 항시 부당한 것인지 되묻고 싶네.”


애초에 권력, 이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고 있다. 그저 힘이라는 것, 억누를 수 있는 힘, 많은 것을 차지할 수 있는 힘이라는 것, 그것 이상은 모른다. 살면서 겪어온 힘이란 으레 그런 것이었다. 총, 칼, 검은 옷, 그것이 힘의 전부였다. 그래서일까, 그래서 힘이란 것을, 권력이란 것을 부당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었을까.


“권력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동시에 실제적인 힘이지. 그러므로 누구의 손에 어떻게 사용되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우리가 의지를 가진다면 충분히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힘이야. 백성을 위해서 말일세.”


-역사 이래로 권력이 예술과 자유의 편이었던 적은 없었다


히르가 했던 말. 정말, 없었나, 모른다. 그런 것. 그림이란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그것만이 전부였을 따름이다. 지금 이 알량한 힘을 가진 채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것은 그저 아버지와, 혜인이, 그리고 사람들,


-나는 주변 사람만 편하면 다야.


진은 흠칫 놀라 제 상념을 끊었다. 아니야, 그런 것이 아니야, 그림 그릴 수 있는 세상, 색으로 가득 찬 세상을 다시 한 번 가지고자, 그런 거야. 그런 것.


“왕세자 저하가 보위에 오르시면 많은 것이 변화될 거야. 교황청은 축소 될 것이고, 물론 그 법도 철폐가 되지. 권력이 없다면 그 통제는 어찌 조정할 것인가. 힘은 힘으로 맞붙어야 하지 않겠나? 자네들도 동지들이 거리에서 애먼 피를 흘리는 것 마음 아프지 않나? 언제가 될지 모르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은 결국 사람을 지치게 하고 일상을 추구하게 되네. 아니, 일상 뿐이면 다행이지, 오히려 지금까지 해왔던 행위를 혐오하게 되지. 또한, 말해보게. 모든 사람들이 자네들의 시위를 찬동하던가?”


거리에서 시위 때마다 눈을 흘기던 사람들, 지쳐서 배신한 자들. 없다 말할 수 없었다.


“또한, 권력이란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힘이 아니겠는가?”


현실. 뼈아픈 단어지만, 저 이가 말하는 현실은 다른 현실인 듯하다. 우리의 현실은 한계고 저이의 현실은 이상의 완성이다. 다른 말을 하고 있지만, 결국 현실이란 단어에 마음이 울리고 만다. 한계였으니까. 사람들의 외침과 흘리는 피로 무너지지 않은 거대한 어떤 것, 그것에 맞붙을 수 있는 거대한 어떤 힘을 말하고 있으니, 그러하니.


“하겠습니다.”

“오!”


더 이상 갈등하지 않는다 했으니까, 흔들리지 않는다 했으니까. 우리의 사각을 넘을 수 있는, 그 사각의 틀을 망치로 깰 수 있는 그런 힘이 있으니. 그러하니. 진의 대답을 들은 혜인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게 가장 빠른 길일 거야, 그러니까.


“좋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힘써 보세.”


틸리 공자는 하하 웃으며 둘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그 손을 잡았을 때, 문득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진아, 손이 없다는 것은 말이다, 손을 잡을 수 없다는 의미와 같을 게다.


이 사람이 잡은 내 손은 아마도 마법이란 힘이 있는 손이겠지. 힘이 없었다면, 마법이 혜인에게도 내게도 없었다면, 이 사람은 누구의 손에 손을 뻗었을까. 아버지의 그림이 필요해 불렀지만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사람일 뿐이기에, 아니, 그림은 필요 없기에 이곳에 있다, 라 말하기 위해 세워두었을 뿐이었다.


“저…….”


진이 조심스레 라인 알 틸리 공자를 부르고 그가 바라보았다. 진은 그 모든 의문과 상념을 집어 삼키고 다른 말을 꺼냈다.


“아가씨께서는, 무탈하십니까?”

“음? 내 딸 말인가?”


틸리 공자의 눈썹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저 이와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대여섯살의 어린 숙녀. 하얀 꽃, 나비를 떠올리게 하던 천진한 소녀에게 줄 놀이용 책상을 핑계 데고 만났지.


“그 분께 어울리는 책상을 만들어줄 수 있는 날, 그런 세상이면 됩니다.”


무언가를 의미해서 한 말은 아니었으되, 입 밖에서 말로 이루어진 순간 그것은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 말이 말로 부딪혀 말만이 남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어떤 의미가 되어버린다. 공중에 붕 뜬, 뜬 구름같은, 그러나 때로는 명확한 그런 말. 하지만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가는 각자가 다를 수도 있다. 틸리 공자의 일그러진 눈이 웃음으로 바뀐다.


“하하하하, 그래, 그거면 됐지.”


그 웃음은 웃음같이 들리지 않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72 지나가는
    작성일
    14.08.24 00:36
    No. 1

    으... 불길한 느낌이 드는데요. 진도 혜인도 무사하기를.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Rainin
    작성일
    14.08.24 00:44
    No. 2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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