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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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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20.03.09 00:15
최근연재일 :
2022.05.27 17:16
연재수 :
6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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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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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
글자수 :
285,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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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31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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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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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11.자매.(3)

DUMMY

제물의 호흡과 눈물과 타액을 마음껏 빨아들였다. 더 나아가 성기가 서로 맞닿는다면, 생명력 전체를 빼앗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물은 그녀의 손길과 생명력을 바치기 좋게 미리 먹어야 했던 미약의 힘에 고통이 더 해졌지만, 그 한 마디, 동생에게 연락하겠다는 말 한마디가 세뇌되지 않는 머리 한구석을 깨워 일으켰다. 그저 밤새도록 유리의 밑에서 바르작거리며 간시히 버텨야 했다. 이른 아침 제물의 시체를 치우려고 들어온 종들이 격노할 때까지.


“놔둬.”


유리를 깨울 수 없는 직급의 종들의 분노와 흥분은 조용했으나, 생명력을 회복하고 예민하게 경계를 하던 유리의 귀에는 잘 들리기만 했다. 유리는 봉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제물을 끌어내려던 종들을 한 손을 휘저어 말고, 종들은 곧바로 손을 떼긴 했다. 그저 주춤거리며 어찌할 바 모르는 듯했지만.


“규율보다 위에 있는 게 내 말일텐데?”


유리의 덤덤하지만 날 선 말에 그들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유리는 종들과 같이 바닥에 꿇어앉은 제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마음에 들어서 그래. 오늘 밤에도 얘 들여보네.”

유리의 말에 종들은 흠칫 놀랐으나 티도 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은 자매님의 뜻에 따릅니다.”


제물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일렁이는 눈빛을 숨길 수 있었다. 유리는 그런 제물의 등을 한번 툭치고 지나가며 종들에게 경고하듯 한 마디 덧붙였다.


“밤새 빨아먹었으니까 괜히 괴롭히지 말고.”

“예. 자매님이시여.”


유리가 욕실로 향하자 종들은 슬그머니 제물을 밖으로 내보냈다. 유리는 부러 뒤돌아 그의 모습 따위는 살펴보지 않았다. 자매들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까.

종을 밖으로 내보내고 남은 종들은 리의 목욕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그 십 년 세월이 뭐라고 이런 시중이 어색한 유리였지만 그저 그 손길에 몸을 맡겨버렸다. 지금은 괜한 신경전을 할 때가 아니니까.


“언니가 뭐래?”


중요한 건 피리아의 목적이니까.


“아, 목욕을 마치시면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그래. 무엇이 있는지 보자. 생명력이 회복되고 목욕까지 마친 유리의 얼굴에는 약간의 홍조마저 돌았다. 그리고 피리아는 그런 유리의 모습이 내심 기꺼웠는지 그녀를 마중하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내 자매, 유리. 제물이 마음에 들었다더구나.”

“응.”


유리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처음은 각별하기 나름이지. 그게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꼭 아는 것처럼 말하네? 언니도 그랬어?”


흰색으로 이루어진 복도를 걸으며 나누는 대화는 성인이 된 보통 자매의 대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리아는 피식 웃었다.


“아니. 나는 아니지만, 우리에게 자매가 한둘 있는 것은 아니니.”


유리는 더 답하지 않았고, 피리아 역시 자매의 변덕에 더 말을 얹지 않았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걸음, 걸음, 유리는 그 걸음마다 하나씩 오래된 기억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잊고 싶어서 묻어두었던 기억이. 그리하여 지금 어디로 가는지를 문이 열리기도 전에 깨닫게 되었다.


“여기는 왜?”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자매들끼리 재회의 인사라도 나누어야지.”


유리의 어깨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게 되었다. 긴장, 그리고 아마도 약간의 공포. 문이 열린다. 유리는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벽을 보지 못한 채.


“언니!”

“자매님!”

“큰 언니!”

“언니!”


열린 문 사이로 수십의 아이들이 웃으며 달려왔다. 그녀들의 허리께에나 올 키의 아이들이. 환하게 웃으면서. 보랏빛 눈을 빛내면서. 똑같은 얼굴을 하고서.




**



유리는 세수를 하다 말고 물에 비친 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보랏빛 눈. 자매들과 똑같이 생긴 얼굴들. 성장하면서 먹고 마시고 보는 것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래도 근본적인 얼굴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가족입니다. 생긴 것도 다르지만 모두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합니다.


그런 소리 따위 적용되지 않는 똑같은 생김새들. 유리는 물에 뜬 제 얼굴이 꼴 보기 싫어서 세숫대야의 물을 마구 휘저었다. 물은 일그러지고 얼굴 또한 일그러지고. 이미 일그러진 얼굴이 다시 일그러져 형편없이 사라지게 되면 좋으련만. 고요를 되찾는 수면 위로 다시 얼굴이 뜬다.


-유리야, 아침 먹자꾸나.


헤르나가 세수를 한다 더니 소식 없는 아이를 찾으러 온 듯했다. 그리고 본 것은 세숫물을 마구 휘젓는 어린 인간 개체.


-아저씨.


아직 아버지가 아니라 아저씨라 부르던 시절. 헤르나는 그런 유리에게 한 발 두 발 다가가 가만히 함께 세숫대야를 바라보았다. 저와 전혀 다르게 생긴 한 천족의 얼굴이 고요한 수면 위에 떠오른다. 다르게 생겼다. 그 모습에 안심이 든다.


-왜 세숫물을 괴롭히고 있었니?


유리는 수면 속의 헤르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얼굴을 닮으면 좋을 것 같아요,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겠지만요. 헤르나는 무릎을 굽혀 수면 속 아이의 얼굴이 아닌 진짜 유리의 얼굴을 가만히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이제는 낯설지만은 않은 온기에도, 유리는 무엇인지 모를 부끄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헤르나는 미소 지었다.


-예쁘단다. 그러니 걱정 말거라.


미추의 문제가 아닌데요, 존재의 문제일 텐데요, 유리는 불만을 입밖으로 차마 내뱉지 못하고 꾸역꾸역 삼켰다. 종들이 알면 놀라겠지. 자매들이 알면 놀라겠지. 일개 천족의 말에 불만도 항변도 하지 않는 제 모습에. 왜 그럴까. 자신은.


-어떤 존재도, 생김새가 그 가치를 결정하지 않아. 너도, 나도.


사실을 이렇게 위로해줄 것을 알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헤르나는 처음부터 그래왔다. 눈물 날만큼 다정하여서. 그 다정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동정일까, 연민일까


-아저씨도, 아저씨 얼굴이 싫어요?


혹은 공감일까. 유리의 말에 헤르나는 제 볼을 유리의 볼에 가져다 대었다. 보드라움이 다정처럼 와닿는다.


-얼굴만 싫었을까. 존재 자체가 부정당했는데.


어떤 존재는 지극하게 떠받들어지고 어떤 존재는 지극하게 부정당한다. 그리고 두 존재 모두 그에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지극하다고 하여 완벽하다는 의미는 아닐 터이니. 지극하게 떠받들어졌다면 애초에 그렇게 강요받지 않아야 했을 것이며 지극하게 부정당했다면 차라리 이미 살해당했어야 했다.


-유리, 어리고 어린 개체야, 나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예뻤으면 좋겠단다, 아니, 예쁘단다.


어리고 어린 개체들은 모두.

유리는 가만히 손을 뻗어 헤르나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아빠 지금 눈 앞의 이 개체들은 절대로 예쁘지 않아요, 예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 어린 얼굴과 똑같은 것들이.


와글와글하던 아이들은 피리아의 쉿하는 소리 한 마디에 모두 입을 딱 다물었다. 피리아는 유리의 어깨를 툭 한번 치며 제 앞에 나서게 했다.


“우리 어린 자매들아.”


피리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소중한 금언이라도 되듯이 모두 열렬하게 피리아를 바라본다. 자신도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우리들의 돌아온 자매란다.”


피리아는 유리의 볼을 잡아 끌고 입을 맞추었다.


“외부에서 성장한 최초의 자매이자 최초의 배신자.”


배신자라는 말에 수십 쌍의 눈이 저를 노려본다. 아무리 아이들이라지만, 그 시선에 유리의 어깨는 다시 한번 굳고 말았다. 피리아는 그런 유리의 긴장이 더 마음에 드는 듯,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배신한 자매에게 죽음이 아니라 자비를 내려주려 한단다.”


자비로운 큰 언니. 어린 자매들은 피리아를 한껏 동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돌아온 자매에게 입을 맞추어주렴.”


피리아는 유리의 어깨를 꽉 눌렀다. 그저 힘만이 아니라, 법까지도 섞어 썼는지 유리의 무릎은 어이없이 꺾이고 말았다. 쿵, 얕은 충격과 함께 대리석 바닥에 유리는 주저앉고 말았다. 유리는 굳이 반항하지 않았다. 생명력이 회복되었다 한들, 아직이니까. 괜한 매질과 고문과 용서를 반복하여 받아 체력을 소비하느니 그냥 이런 장난질에 장단 맞춰 주는 편이 효율적이니까.


“자매님, 용서해드릴게요.”


아이들 중 하나가 와서 유리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애정도 무엇도 없는 의례의 입맞춤. 그러니까 장단을 맞춰주기 쉬운.


“자매님, 용서해드릴게요.”


그리고 줄을 선 아이들이 하나 씩 유리에 입을 맞추며 지나간다. 유리는 거부하지 않았지만, 거부하고 싶었다. 매질과 고문보다 나을까? 과연? 보기도 끔찍한 혐오스러운 것들과 마주하여 입을 맞추는 것이.


-유리, 어리고 어린 개체야, 나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예뻤으면 좋겠단다, 아니, 예쁘단다.


아빠, 난 아빠처럼 자비롭지 못해요. 혐오스러운 것들을 보듬어 줄 만큼 마음 넓지 못해요. 나와 같은 모습들을 용납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난 땅의 인간으로 남아있고, 아빠는 신으로 내세워진 걸까요.


아빠, 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유리는 벽에 나열된 투명한 통 속의 태아들을 못본 척, 아이들의 입맞춤에 가만히 가만히 받아들였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ㅜㅜ 기다려주신 분께 감사과 사과를 전합니다. 별 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저 현생이 너무너무 바빴습니다. 그래도 한 해가 가기 전에 들려 걱정하시고 기다려주신 분들께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다 잘 되는 새해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빈츠님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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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10.수도.(6) 21.06.05 106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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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9.재회.(1) 21.02.14 195 3 11쪽
45 8.사냥.(6) 21.02.08 131 4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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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8.사냥.(2) 20.12.23 129 4 10쪽
40 8.사냥.(1) 20.12.15 154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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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7.비상.(2) 20.10.31 140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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