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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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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20.03.09 00:15
최근연재일 :
2022.05.27 17:16
연재수 :
6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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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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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9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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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10.수도.(2)

DUMMY

10여 년 만에 돌아온 수도는 같으면서도 달랐다. 거대한 건물과 복잡한 도로, 수많은 존재. 그러나 그 안에 깔린 분위기는 달랐다. 그 어릴 적 도망치기 위해 달렸을 때 억울했다. 나는 이렇게나 힘든데, 저들은 아무렇지 않게 웃고 지낸다는 것이. 당신들의 평안함이 누구의 희생으로 쌓아 올린 것인데. 그런 억울함. 그런 억울함이 들 만큼 평안해 보이던 존재들.


그러나 지금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똑같이 수많은 존재가 도로를 메우고 일상을 영위하고 있지만, 그 안에 깔린 기묘한 두려움과 긴장감. 루안의 눈을 통해 종종 수도가 굉장한 불안에 휩싸여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골목에 몸을 숨기고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은 굉장히 달랐다.


“흐아아악!”

“어디 야수족이 증명서도 없이 돌아다녀!”


인간 병사 하나가 야수족 하나를 창 손잡이로 야수족의 목덜미를 후려치는 광경에 일행의 발걸음이 멈췄다.


“시, 심부름 나온 노예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거짓말하지 마라! 지금 노예는 주인의 동행 없이 어디에도 못 다닌다!”

“아닙니다, 여기 노예 인장!”

“가짜잖아 이 새끼야!”


퍽퍽, 변명 따위 필요 없다는 듯이 다시 폭력이 가해진다.


“이······.”


베이셰의 눈에서 불이 타오르고 한걸음 나오려고 한다. 유리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막았다. “안 돼요.”


“윽”


베이셰는 고집 피우지 않았다. 단지 유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서가 아니었다. 병사의 수가 대적하지 못할 만큼 많아서만이 아니었다. 하나, 둘 인간족을 죽인다고 이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그러나 눈앞의 폭력을 그냥 넘기기에는 울분이 끓어오른다.


“두 분 다 잘 들으세요.”


그런 베이셰의 심정 따윈 바로 읽힌다는 듯 유리가 다시 한번 강한 어조로 말했다. 오빠와 자신은 아버지를 구한다는 목표가 있지만, 저 둘은 그저 오빠를 따라온 이들일 뿐이었다.


“수도에서 저런 상황은 이제 비일비재할 거예요. 그때마다 여러분을 말릴 수는 없어요.”


그것은 야수족인, 노예해방군인 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최우선으로 오빠를 보호하는 것 말고는 신경 쓰지 마세요.”

“유리야! 난 그렇게 약하지 않아!”


유리는 오라비의 항변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저는 그걸 생각하고 여러분의 동행을 허락한 겁니다.”


넷 사이에 잠시 침묵이 일었다. 인간이 명령하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 베이세는 주춤 입술을 씹었으나, 동행하는 동안 그녀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그저 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바바하네는 소리 내 알겠다고 답했다. 그녀의 목표는 아들과의 동행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쉽게 수긍하는 일행의 모습에 유리는 말이 잘 통하는 이들이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자, 이제 가볼게요. 가능한 저는 저 병사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해요. 그런데, 만약에 마주치게 된다면, 노예인 척해주세요. 기분 나쁘겠지만.”


사실 오는 길에 두어 번 해본 일이라 어렵지는 않았다. 바바하네와 베이세도 처음의 거부감과 달리 잘 따랐고.


“그런데, 수도 길 잘 알아? 어디부터 가게?”


다른 문제가 더 중요한 상황인 것이다. 하셀의 지적에 유리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저 멀리 보이는 하얀 신궁, 그곳을 넘어야 갈 수 있는 천족의 주거지로 가는 길. 날개 없는 종족에게는 홀로 가길 불가능할 길. 도움이 필요한 곳.


“일단, 고레이 스승님이 소개해 주신 분을 찾아가서 간단하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아.”


고레이가 출발 전에 준 소개장을 떠올린 하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지?”

“잠깐만.”


유리는 가만히 자리에 서서 눈을 감았다. 맞잡은 두 손 사이로 가만히 빛이 솟았다 가라앉았다. 두근, 두근, 두근, 핵이 느껴진다. 땅이 느껴진다. 완전한 자매가 아니었기에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여기, 돌아온 땅의 맥이 느껴지고 있었다. 하나하나, 땅에서 땅으로 연결되고 물과 물이 연결된다. 하나, 하나, 이 땅의 맥박이 자신의 맥박과 같이 느껴진다. 몸 구석구석으로 이어진다.


-나의 자매들이여.


유리는 그 부름을 무시한다. 그들이 여전히 자신을 찾고 있다면 이것으로 연결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막을 수 없다. 자신의 의사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저 자연의 법칙과 같은 것이다. 유리는 긴 숨을 들이쉬고 발을 가만히 땅에 대었다. 하나, 둘 빛에 빛이 땅속으로 들어가고 땅속의 어둠이 몸으로 돌아온다. 이제 이 길은 모두 자신이다. 유리는 눈을 떴다.


“가자.”


유리가 골목 밖으로 분연히 걸음을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토록 수많은 길에 수많은 존재, 눈을 번뜩이는 존재가 있지만, 유리가 앞선 길 뒤를 따라가는 동안 그들과 어깨는 커녕 시선도 부딪히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들 시선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게 된다. 마치 이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가 얼마나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를 때 인도하실지어다, 신이시여, 우리가 신이며 우리의 육체가 곧 신체로다, 인간을 이끄시는 분이시여.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외진 곳에 있는 탑 앞에 멈추어 섰다. 여태껏 그들은 시선을 피했지만, 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의 시선만큼은 피하지 못했다. 괴상한 일행의 모습에 경사는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요?”


힐끗, 셋이 유리의 눈치를 보지만, 유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모자를 벗었다. 순간 병사와 유리의 시선이 마주했다. 그 순간 어억,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먹도 쓰지 않고, 마법도 쓰지 않았는데.


“길을 열라.”


그는 기어가며 문 옆으로 물러났다. 유리는 잠시 무릎을 굽히고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는 두려움에 떨며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잊어라. 이곳에 자매들이 온 것을.”

“이, 잊습니다.”


끔뻑, 끔뻑, 그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멍하게 앉아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사이에 유리와 일행은 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뭐야 이거?”

“저게 뭐야?”


가장 놀란 것은 하셀이었다. 자신의 동생이 강하고 똑똑한 것은 알고 있지만 이런 재주가 있는 것인지. 몰랐으니까. 아니, 재주라고 가벼이 말해도 되는 것인지. 유리는 재촉하는 하셀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였다.


“별거 아니야. 저 사람은 나의 권위라는 힘에 눌린 거야.”


하셀은 유리의 말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어 입을 헤벌리자, 유리는 짧게 웃었다.


“내 눈을 보면 저렇게 내 말을 듣게 되어있어.”

“그럼, 지금까지 그 방법을 써서 뭐든 할 수 있었잖아?”

“아니. 다 통하는 건 아니고.”


유리는 문 쪽을 힐끔 돌아보더니 중얼거렸다.


“몇 가지 조건이 있어. 여기서 성공 확률이 높고. 또 하찮은 놈들만 가능해. 자신의 생각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벌레 같은 존재들에나 사용할 수 있지.”


뚝, 하셀의 걸음이 멈췄다. 유리는 앞서 걷다 일행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고 돌아보았다.


“왜 안 와?”

“유리······.”

“응?”


가볍게 답하는 동생의 모습이 낯설었다. 우리 가족을 제외하고는 신경도 안 쓰고 매정하고 무심한 동생이란 건 알고 있지만, 누군가를 그토록 경멸하고 하찮게 취급하는 얼굴이, 지금의 얼굴이 너무나도 다른 이 같았다. 수도에 들어온 이후로 계속 느끼는 그런 위화감.


“아니, 그. 아냐.”


마치. 노예를 보는 인간 주인의 시선이 떠올랐다. 어렸을 적, 자신을 벌레 취급하던 그 시선과 닮아있었다. 유리는 가족을 노예를 보는 시선 따위로 절대 보지 않을 것이다. 유리는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럴 힘이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 잠깐 누이가 너무 멀리 보였기에.


“어서 올라가자.”

“아, 어.”


귀하디귀한 마법사들에게 배정된 탑 중 하나, 그러하기에 벽에는 글자가 빼곡했다. 베이셰와 바바하네는 이 공간이 낯설게 느껴져 자꾸 쭈뼛거리며 힐끔거렸고, 하셀 역시, 괴상한 불편함을 느꼈다. 어쩌면 인간에게만, 인간 중에서도 귀한 존재에게만 배정된 곳이라 그러할 테지. 아니면, 유리 역시 그런 귀한 인간 존재라는 걸 깨달아서일지도.


“여기인가.”


꼭대기에 도착한 유리는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시오?”


예스러운 어투와 달리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레이 씨의 소개로 왔습니다.”

“누구요?”


덜컥, 방문이 열렸다. 그녀는 넷이나 되는 일행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과는 별개로 유리의 아래위를 훑어보다 눈을 보고 주춤 뒷걸음을 쳤다. 그리고 바로 유리의 발아래 엎드렸다.


“자매님을 뵙습니다.”


다시 한번 하셀은 당황하고 말았다. 어쩌면 아버지를 구하러 가는 이 길 동안 우리는 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지. 어쩌면, 누이가 베이셰에게 처음 보였던 경계심도 어쩌면. 이제야


“나는 자매로서 온 것이 아니라 고레이의 제자로서 온 것이니, 예를 피할 필요는 없다. 일어나라.”


여자는 유리의 말에 주춤거리며 일어났으나 허리는 펴지 않았다. 유리는 고레이의 소개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주지만 미미한 불안함을 느꼈다. 자신을 ‘자매’로 모시는 이라면, 그들 역시 떠받들 것이고. 루안의 경외심을 이용하듯 이 사람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우리를 불리하게 이끌게 될 것인지. 유리는 상념을 지웠다. 어차피 당장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열어 읽어라.”


유리의 하대에 여자는 고레이의 소개장을 열었다. 가만히 읽어 내려가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소개장을 끝까지 다 읽은 여자는 짧게 웃었다.


“원하신다면 모든 문자를 쓰실 수 있는 분이 고레이의 제자라 하시니 이상했습니다.”

“그렇지.”



읽지 못한 소개장 안에 있는 것은 자신의 과거 이력 정도라고 생각한 유리는 무심하게 답했으나.


“당신을 불쌍한 아이라 하시니 도와주라 하시는군요.”


소개장에 늘어놓은 것은 하찮은 인간이 베푸는 동정이었나 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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