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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오브덕 님의 서재입니다.

우리의 몸은 꽃을 피우기에 적합하다

웹소설 > 자유연재 > 현대판타지, 공포·미스테리

오브덕
작품등록일 :
2023.04.02 23:26
최근연재일 :
2023.04.10 01:29
연재수 :
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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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9,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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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3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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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05. 대나무

DUMMY

 갑작스럽게 핀 꽃들을 밟으며 대피소로 향하던 길에, 누군가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팔에는 여기저기가 찢어져 피가 나오고 있었고, 눈은 초점을 잃어 언뜻 보면 죽은 사람 같이 보였다.


내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확인해 본 결과, 숨은 잘 쉬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들쳐맸다.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뭐, 어쩔 수 있나? 사람은 살리고 보랬으니까.


 “아, 더럽게 무거운데..”


 뭐, 힘이 그리 세진 않은 나한테는 조금 무리였을지도 모르지만.


 “...근데, 저기. 괜찮은 거 맞죠? 혹시 들리시면 대답이라도..?”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던지라 다시 돌아오지 않는 말에도 그리 신경쓰지는 않았지만, 뿌연 꽃가루 분진들이 날리는 이 곳에서, 여고생 한 명이 반 시체를 짊어지고 걸어간다는 건 너무나 위험한 일이란 건 잘 알았기에 괜시리 외로워졌다.


내 고생이 눈을 꾹 감은 채 내 어깨에 기대고 있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한테 너무 과한 호의일지도 모르지만.. 뭐, 어쩔 수 있나.


 그 후로 투덜거리며 길을 걷다보니 눈 앞에 대피소라는 글자가 보였다. 다 낡아빠져 창문 몇몇이 비어 폐교 느낌이 나는 한 초등학교라는게 문제였지만.


 난 낑낑대며 어깨에 매달리듯 걸쳐있는 여자를 앞으로 안고서 학교의 정문을 살짝 열었다. 문은 녹슨 경첩 때문인지 까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죽 밀렸다.


묘하게 중독성있는 그 소리에 몇 번 더 문을 여닫아보다가, 힘없이 쓰러지는 철문을 보고서 나는 급하게 자리를 떴다.


 “여기, 아무도 없어요? 문 좀 열어주세요! 앞에 사람이 있다구요!”


 정문을 넘어서 학교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서 소리치자 안의 사람들이 뛰쳐나와선 나와 여자를 끌어 들여보내고는 재빨리 문을 닫고 사슬로 칭칭 감아 잠궈버렸다. 그러고는 나에게 윽박을 질러댔다.


 “아니, 학생. 지금 정신이 있는거야? 괴물들이 듣고 쫓아오면 어떻게 하려고..!”


 턱에 달린 수염보다 머리숱이 적은 아저씨가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나는 그런 아저씨의 말을 한 귀로 가볍게 흘리고는, 1학년 1반 교실로 들어가 구석 책상에 내 배낭을 툭 올려두었다.


 “괜찮아요. 그 녀석들, 어짜피 잡초 쪼가리들인데요.”


 내 말에 아까 그 아저씨가 화를 내며 반박했지만, 그 역시 한 귀로 흘린지라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진 않았다. 중간중간 섞이는 욕들은 들리긴 했지만.


 “아, 알았어요. 제가 좀 둔해서 그랬습니다. 앞으로는 안 그럴 테니까, 그만하고 자기소개라도 하는 게 어때요?”  


 “뭐?”


 아저씨는 내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몇 없는 머리카락을 위로 죽 쓸어넘겼다.


 “아니, 다 죽어가는 상황에, 뭐? 자기소개?”


 “넹.”


 웃으며 날린 나의 말에 아저씨는 화를 내며 달려들었지만, 남자 두 명이 아저씨의 두 팔을 잡고 말린지라 나에게 오지는 못했다.


나는 아저씨를 앞에 두고 하던 짐 정리를 마무리했다. 배낭에서 필요한 것들을 얼추 추려놓고, 나는 교실 밖으로 나와 아까 그 여자의 상태를 다시 확인해보았다.


여전히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죽을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그때, 내가 여자의 상태를 찬찬히 확인해보고 있자 아까 아저씨를 말렸던 남자 중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왔다.


 “이 사람, 아는 사람이야?”


 그럴 리가.


 “아뇨, 모르는 사람이죠.”


 내 대답에 의외라는 듯 남자는 나에게 다시 말했다.


 “그럼,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온 거야?”


 “뭐, 그런 셈이죠.”


 “이 사람도, 나무로 변하면 어쩌려고?”


 “에이, 설마요. 변할라면 진작에 변했겄지.”


 몇 번 주고받은 대화에 남자는 나에 대한 분석이 끝났는지 대화를 멈추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위에서 몇 분 동안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곧 계단을 타고 나보다 한 세 살 정도 많아보이는 여자가 빨간 머플러를 목에 감고서 내려왔다.


딱 보니 이 모임에서 한 가닥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왜 그렇게 보였냐고 물어본다면 그냥 이 중에 제일 센 것 같으니까.


 “...너, 이름은?”


 여자가 또렷한 목소리로 나에게 질문했다.


 “솔피. 당신은?”


 “시아. 근데, 너 고딩 아니야?”


 자신을 시아라 소개한 여자는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나는 그 눈빛에 순간 당황했지만, 뭐, 정확히 하자면 쫄았지만. 곧바로 그녀에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응.”


 “근데 왜 자꾸 반말이지?”


 시아는 아까보다 더 거센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나도 질 수 없어 그녀를 노려봤다. 순식간에 복도를 타고 삭막한 기운이 감돌았다.


 “왜 그리 유치한걸로 싸우시고 그러십니까들.”


 그때, 시아가 내려온 계단에서 할아버지 한 명이 내려왔다. 주름 가득한 얼굴에, 머리에는 초록색 모자를 푹 눌러쓴 전형적인 할아버지였다.


 “뭐, 다들 살자고 들어온건데 사이좋게 지내셔야죠.”


 할아버지는 나와 시아 사이에 서 우리가 서로 눈을 못 마주치게끔 하는 듯 쥐고있던 파일 받침으로 내 눈을 슬쩍 가렸다.


하지만 이런 판대기로 내 앞을 막을 순 없었다. 나는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시아를 노려봤다. 기분이 많이 나빠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이름이 솔피.. 라고 했었지? 이쁜 이름이구만. 잠시 나 좀 따라가자.”


 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복도를 터벅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멀리서 나를 쏘아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걸었다.


할아버지의 작은 보폭에 맞추며 걸은지 3분정도, 할아버지는 내 등을 톡톡 두들겨 날 멈춰세웠다.


“음, 여기 정도면 괜찮겄지.”


할아버지는 입고 있던 깔깔이의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파일집에 끼워 내게 건냈다. 정확히 4번 접혀 16쪽이 된 종이에는 이 학교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빨갛게 그려놓은듯한 별표시가 학교의 4층, 6학년 3반 교실에 큼지막히 놓여있었다.


“오, 이 별표는 뭐에요? 나도 6학년때 3반이었는데.”


“우리가 2시간 전에 여기 왔을 때, 교장실에서 찾은 학교 설계도란다. 표시해둔 곳에 뭔가 중요한게 있는 것 같은디, 학교가 낡아서 3층과 4층 사이 계단이 무너져있더구나.”


“음, 음.”


“그래서 말인데, 얘야. 혹시 이 할애비를 좀 도와줄 수 있겄니?”


할아버지는 주름진 손으로 내 두 손을 감싸쥐며 말했다. 할아버지의 얕은 날숨이 손을 타고 전해지는 게 느껴졌다. 뭐, 이 정도 부탁쯤은 가볍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보답은 꼭 해주마. 여기 이 계단을 타고 쭉 올라가다보면 있을게다. 자, 3층까지 같이 바래다줄테니 어서 가봅세.”


할아버지는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그 멜로디에 맞춰 고개를 양 옆으로 끄덕이며 할아버지의 옆에서 걸었다.


끼익거리는 2층 계단을 지나 3층에 도착하자, 3층과 4층 사이를 잇는 2번째 계단이 3개를 제외하고는 다 헐어 무너져버린 상황이 눈에 보였다.


“아, 이거 말하신거에요?”


내 말에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겠니?”


할아버지의 말에는 약간의 불신이 묻어나왔지만, 난 나를 잘 안다. 이정도 높이야 열번은 넘게 왔다갔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다치게 조심해야한다!”


할아버지의 우려섞인 말을 들으며, 나는 무너지지 않은 첫번 째 계단에 발을 걸쳤다.


난간이고 뭐고 다 부서져있던 터라, 벽에 난 홈을 잡고 올라야할 것 처럼 보였다. 검지에 딱 맞는 구멍에 손을 꼭 끼워넣고서 한번에 힘을 줘서-


“흡.”


손가락 두마디로 만들어낸 작은 힘으로 띄운 두 발로, 벽을 강하게 차올리듯 밟는다. 아까 봐뒀던, 비스듬한 윗 계단에서 삐져나온 파이프로 손을 죽 뻗어 감싸쥐듯 잡고, 로프를 타듯 팔을 축으로 온몸을 크게 회전시켰다.


그 반동을 그대로 쥐고서 앞에 간신히 달려있는 2개의 층계로 발을 쭉 차듯이 뻗어서 발가락을 걸치기만 하면 끝이다.


“후우.”


걸친 발에 힘을 줌과 동시에 파이프를 잡고있던 왼손을 강하게 밀며, 거의 눕듯이 달린 몸을 세웠다. 그 과정에서 조금 허우적대긴 했지만 그래도 죽지만 않으면 된거니까.


“걱정은 괜히했구먼.”


할아버지는 내가 무사히 올라간 걸 보고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6학년 3반이랬죠?”


“그래. 왼쪽으로 꺾으면 바로 있을게다.”


할아버지의 말대로, 4층 중앙계단 바로 옆에 교실이 보였다. 먼지가 가득 낀 창문과 삭아서 바스라진 자물쇠는 교실이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는지 내게 말해주는 듯 했다.


계단을 오르느라 묻은 먼지를 탈탈 털고, 교실의 미닫이문을 슬쩍 열었다. 왜인지,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교실의 안은 너무나 어두웠다. 하마타면 교실에 들어가기도 넘어질 뻔 했으니까.


나는 문 옆에 달린 스위치의 전원을 켰지만, 전등이 켜지는 일은 없었다. 시설 점검이란 걸 모르나보다.


어쩔 수 없이 아까 배낭에서 꺼내둔 손전등을 손에 쥐었다. 오랫동안 쓸 일이 없던지라 닦아두지 않아 좀 끈적였지만. 아니, 조금 많이 끈적였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쓸 겨를은 없었다.


달칵, 하는 버튼 눌리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밝아지며 교실 안의 상황이 훤히 들어왔다.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검붉은 피가 마른 자국. 바닥에 흩뿌리듯 그린 듯 펼쳐진 혈흔과 대나무의 대롱에 꿰뚫린, 수분기 없이 비쩍 말라붙은 남성.


이질적이고도 충격적인 광경에, 순간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괴이한 상황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물?”


기괴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날카롭고도 길게 쭉 뻗은 대나무 다발 쪽에서 들렸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 본능이 나에게 여기서 도망치라는 듯 내 심장을 쿵쿵대며 울렸다. 그때, 심장의 박동 사이로 청아한 타음이 들렸다.


엉켜있던 대나무가 서로를 두들겨가며 풀린다. 손전등의 빛이 비추는 원형의 공간에서, 대나무는 내 쪽으로 대롱을 죽 뻗었다.


쾅, 하는 소리와 암막 천을 꿰뚫고 유리창이 깨지는 소음. 피하지 않았다면 저게 내 머리에 박혔겠지.


“·········물.”


대나무는 자신의 대롱을 두어 개 더 꺼내 휘둘렀다. 위험했다. 위험한 상황이다. 지금이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만 한다. 저 괴물같은 나무에게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야했다. 그래, 다시 1층으로 돌아···


“이 할비 부탁은 어떻게 하고 벌써 내려오시려고?”


3층 층계에서 날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어느새 오른손에 작은 권총을 쥐고서 날 겨누고 있었다.



“총이 있으면 자기가 할 것이지···”



“뭐?”


할아버지는, 예상치 못한 반응이라는 양 당황한 어투로 말을 받았다.


벙찐 표정이 참 볼만했지만, 지금은 거기에 집중할 때가 아니었다.


잠시 눈을 다른 데 둔 사이 날아오는 대롱은, 나를 뚫어버릴 기세로 다가왔다. 다행히 몸을 비틀어 피한 덕에 맞지는 않았지만, 살짝 스친 옷깃이 터져나가듯 찢기는 걸 봤을 때 조금이라도 닿으면 크게 다칠 것은 분명했다.


뒤를 돌아 손전등으로 비춘 교실의 문에는, 어느새 삐져나온 대나무의 몸통이 나를 노려보는 것 처럼 나를 향해 기울어 있었다.


마치 자아가 있는 동물처럼, 날 노리고 있었다. 나를 지킬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는 배낭에 있던 물건들을 담아놓은, 내 크로스 백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 5개의 대롱이 나에게로 날아왔다. 다행히 몸을 피해 맞지는 않았지만, 그 때문에 쥐고있던 가방이 떨어지며 손에 들고있던 비상용 로프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나일론 소재의 주황색 로프는, 내 손에 감아쥐어져 그 끝이 휘날리며 어지러운 궤적을 그린다.


생각해야한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도구다운 도구를 어떻게 쓸 것인가.


대롱이 날아오는 시간 간격으로 보아 연속으로 날려대는 건 불가능한 듯 하니, 나무가 쉬고있는 지금, 생각을 해내야한다.


날아오는 대롱을 감싸는 건 대롱의 속도로 봤을 때 불가능하다. 아마 묶으려는 팔도 같이 떨어지겠지. 그러면, 내가 낼 수 있는 최선의 답은.


“···할아버지. 혹시 놀이기구 잘 타셔요?”


“···뭐?”


급작스럽게 던진 올가미의 형태로 묶어 놓은 로프는, 마치 뱀처럼 부드럽게 흐르며 할아버지에게로 날아갔다.


눈 깜짝할 새 날아오는 로프를 나이든 몸으로 반응하기에는 무리일테니, 로프가 그의 몸 바로 앞에 와서야 몸을 숙였다. 몸으로 날아가던 로프는, 아쉽게도 아슬하게 할아버지를 빗겨갔다.


“이게 무슨 버르장머리 없는...!”


허나 내가 노렸던 건, 그가 쥐어든 작은 검정색의 금속물.


“잠시 팔 좀 빌릴게요.”


어느새 팔에 둘러져 조여있는 로프를 뒤늦게 확인한 할아버지가 로프에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그의 팔에 감긴 로프를 마치 낚싯대 다루듯 사방으로 휘두르고 끌어댔다. 양쪽 벽에 몇 번이고 부딪히며 진이 쭉 빠진 할아버지의 손에 간신히 달려있는 권총은, 곧 떨어질 듯 대롱거렸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은데···”


나는 아까보다 더욱 거세게 로프를 흔들었다. 저 괴물이 대롱을 뻗기 전에 해내야했기에 더더욱 힘이 실렸다.


둔탁한 음성이 6번 정도 울렸을 무렵, 드디어 총이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나무는 내게 총을 주울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다시 대롱들을 달그락거리며 나를 겨누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의 공격. 아까보다 더욱 정교하게 짜맞혀진 궤적이었지만 그 덕인지 속도는 전의 절반보다 느리다.


이 정도면 반응할 수 있다. 완벽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피할 순 있다.


먼저 날아오는 3개의 대롱은 내 정면과 양 측면을 감싸듯 지르는 궤적.


내가 왼쪽 벽에 묘하게 달라붙은 모양새였으니, 오른쪽에서 오는 것은 약간이지만 왼쪽의 것보다 느리다.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갑자기 푹 숙여버린다면, 적어도 저게 내 몸을 뚫지는 않겠지. 계산은 끝이다. 이제 그대로 피하기만 한다면···



‘탕-’



“죽으라면 좀 곱게 죽을 것이지···”


내가 고려하지 못한 것. 정확히는 고려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면, 총을 쥐고있던, 분명 의식이 없는 것 처럼 보였던 저 노인. 머리에는 피를 흘리며 발발 떨리는 손으로 겨우 나를 겨눴던 저 사람.


총알은 다행히 나를 지나쳤지만, 문제는 의식의 전환에서 오는 움직임의 공백. 원래 였다면 맞지 않을 대롱에 궤적에 내 몸이 겹쳐있었다.


제대로 꿰뚫리면 죽음이다. 문자 그대로, 어떻게든 피해야한다. 관절을 꺾고, 몸을 뒤틀어서라도.


무리하게 꺾어 괴이한 소리가 나는 무릎은 뒤로하고, 무게중심을 앞으로 옮긴다. 격통에 표정이 일그러지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자세를 최대한 숙이고서, 대롱의 전진을 몸의 외곽으로 받았다. 대롱이 스친 어깨에서 빨간 피가 터지듯 뿜어나왔다.


잠깐의 접촉에 불과했지만 이어지는 고통은 어마어마했다. 반사적으로 상처를 내 오른손으로 지긋이 눌렀다.


“·········물..!”


대나무는 찾고 있던 걸 찾은 듯, 뻗었던 대롱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 대신 내가 흘린 바닥으로 다시 죽 뻗었다. 목 마른 강아지가 물을 핥아먹듯 대롱을 주둥이인 양 바닥에 딱 붙이고 있다가, 안에서 나온 끈적한 점액질에 피를 묻혀 그 째로 빨아들이듯 섭취하고 있었다.


저 괴물에게서 벗어나려면 지금 뿐이었다. 관절이 뽑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무릎을 어거지로 끼워 맞춘다.


아까보다 더욱 끔찍한, 근육과 뼈를 손으로 잡아 비트는 통증이 밀려온다.


참아야한다.


어떻게든 참고서 나아가야한다.


‘까드득.. 우득. 끄득..’


뼈와 관절이 맞물리는 소리가 복도 새를 울렸다.


겨우 다시 맞춘 오른쪽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힘을 주어 일어서본다.


뒤에는 대나무 대롱들이, 앞은 총이 있는 노인네가 내 길을 막고 있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했다. 내가 누굴 이길 수 있을까. 이기진 못하더라도 누굴 상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 짧지 않은 시간 동안의 고민 끝에, 나는 3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모퉁이에 서 노인네를 바라봤다.


그는 아직도 총을 두 손으로 빳빳이 올려든 체 내가 얼굴을 내밀기만을 기다리는 듯 보였다. 그의 집중이 무너질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저기 흩어진 유리조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개중에 적당한 크기의 유리조각을 조심스레 손에 쥐고, 계단의 반대쪽 면으로 힘껏 던졌다. 쨍, 하는 유리 깨지는 소리에 저 노인네가 정신이 뺏긴 지금. 지금이 기회다.


일전에 굽혔던 왼쪽 무릎을 쭉 뻗는 추진을 토대로, 나는 빠른 속도로 모퉁이에서 튀어나왔다.


그러나 내 눈 앞에 있는 건 여전히 날 노리고 있는 검은색의 작은 총구였다.


“새앙쥐 같은 놈···!”


권총의 트리거에 걸린 그의 검지에 힘이 들어간다. 그의 계산과 집중은 완벽했다.


단 한가지만 빼고서.


“···정신이 없긴 없나봐요?”


총이 격발되려던 찰나, 갑작스러운 힘의 작용에 총알의 방향이 아예 뒤틀린다.


그의 팔과 내 손에 감긴 팽팽한 로프가, 그의 팔을 돌려버렸으니, 내가 던졌던 줄이 감긴 손으로 날 조준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반댓손이었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뭐, 이번에는 저 노인네가 멍청했다.


“어이구, 조심하셔요. 그러다 넘어질라.”


내 손에 감긴 로프를 풀릴 일 없게 칭칭 감아 쥐고서, 가슴팍으로 손을 죽 당긴다.


짧게 잡은 로프가 아까보다 더욱 팽팽해지며, 그는 내 힘에 이끌려 앞으로 끌려오는 모양새가 되었다. 저항하려 해보아도,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으로 이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계단을 아래에 두고 푹 쓰러지며 계단을 굴렀다. 굴러가는 속도에 맞춰, 손에 감아둔 줄을 낚시하듯이 쭉 풀어 길이를 얼추 맞춰두고서 그에게 연결된 줄의 가운데를 무너진 계단의 철골에 감았다.


밑으로 죽 뻗어있는 줄을 타고, 위층의 대나무를 뒤로한 체 다시 3층으로 내려간다.


어께의 열상과 억지로 끼워맞춘 무릎에서 웅웅대는 느낌의 통증이 나를 괴롭혔다. 진짜로, 더럽게 아팠다. 이런 고통은 오랜만에 느껴본다.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유일하게 현실적인 자극이 나의 생존이라는 본능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절뚝이는 걸음으로 겨우 내려온 3층의 계단 끝에는 머리를 푹 숙인 체 쓰러져 있는 노인네가 놓여있었다.


걷어진 팔 소매에 보이는 시퍼런 멍들과 푹 눌러썼던 모자를 적시는 피는 이제 바닥에까지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모자를 벗겨 가벼운 지혈을 끝내고, 내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연고와 지혈제를 그의 환부에 발라두었다.


나를 죽이려 한 사람일지라도, 내가 사람을 죽인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더러웠으니까 살려줄 뿐이다. 그냥 그것 뿐이었다.


이 노인네를 죽지는 않게만 해놓을 뿐. 그를 용서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뭐, 그런 내 결심과 내 분노는 별개의 감정이었지만 말이다.


"...생각할수록 열받네."


그의 뒤통수를 후려봐도, 아픈 척도 안하는 사람을 두고 무슨 소용이겠나, 그냥 내 손만 더 아플 뿐이었지.


나는 내 로프에 팔다리가 묶여있는 그를 3층 구석에 앉혀두고서, 다시 계단을 한 층씩 내려갔다. 4층에서 글리는 괴이한 소리의 박자에 맞춘 듯이 터벅거리는 발걸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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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06. 해바라기 23.04.10 13 0 16쪽
» 05. 대나무 23.04.03 18 0 20쪽
4 04. 로벨리아 23.04.02 16 0 9쪽
3 03. 미스틸테인 23.04.02 17 0 12쪽
2 02. 물망초 23.04.02 13 0 16쪽
1 01. 흑장미 23.04.02 32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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