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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시의 집필공방

은퇴한 킬러는 지킬 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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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시
작품등록일 :
2023.05.10 17:17
최근연재일 :
2023.05.18 18:40
연재수 :
9 회
조회수 :
217
추천수 :
5
글자수 :
41,382

작성
23.05.12 18:40
조회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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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Chapter 1.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3)

DUMMY

Chapter 1.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3)



소녀는 호흡을 가다듬고 애써 밝게 말했다.


“네, 네! 저는 괜찮아요. 그냥 잠시 놀랐을 뿐이에요.”


자신이 괜찮다는데 덧붙여 뭐라 말하는 것도 실례.


남자는 소녀가 도시를 구경하기 쉽게 고쳐 안았다.


“우선 미용실부터 들르지. 나도 이발한 지는 시간이 꽤 됐으니.”


소녀의 머리카락은 긴 백금발.

화이트 블론드를 전문으로 하는 미용실은 그리 드물지 않다.


적당히 커다란 곳에 들어가면 될 터.

남자야 스포츠머리로 짧게 깎을 생각이었다.


딸랑.


도시 풍경에 푹 빠진 소녀를 안은 채 미용실에 들어서자 점원 두 명이 다가왔다.


“예약은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합니까?”

“오, 마침 예약이 빈 직원이 여럿 있습니다. 머리는 어떻게 자르실 건가요?”

“저는 짧게 밀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 애는······.”


남자는 말끝을 흐리며 소녀를 바라봤다.


“혹시 원하는 종류라도 있나?”


도리도리.

미용실조차 처음인 소녀가 그런 걸 알고 있을 리 없었다.


고민하던 남자는 책장에 놓인 10대 머리 스타일 잡지를 가리켰다.


“저 책자를 아이에게 주고 원하는 대로 해주시죠.”

“종류에 따라 가격이 많이 올라갈 수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러고 보니 행색이 좀 후줄근했다.

값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이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상관없습니다.”

“그러면 안쪽으로 이동 도와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점원을 따라 밝은 조명이 있는 의자에 소녀를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는 형태가 되었다.

다만 보이는 건 자기 자신뿐.

그러나 그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남자와 소녀는 닮은 구석이 많았다.


“어이, 친구. 짧게 밀 생각이었다면 차라리 이발소를 가는 게 낫지 않아? 이런 곳은 단순한 면도질에도 괜히 프리미엄이 붙어서 비싸기만 하다고.”


덩치가 산만 한 직원이 카트를 끌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직원의 태도라기엔 다른 미용실을 권장하는 모습이 아이러니하긴 했지만, 손님을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오지랖이다.


남자는 표정에 변화를 주지 않고 대꾸했다.


“이런 곳에라도 돈을 쓰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절반도 못 쓸 것 같거든.”

“뭐? 하하, 이거 생각보다 대단한 분이 오셨군. 멋지게 밀어줄 테니 팁은 죽기 전에 다 쓸 수 있을 만큼만 주라고.”


위이잉.

전기면도기가 돌아가자 남자의 머리오리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앞은 딸이야? 예쁘네. 친구랑은 하나도 안 닮았는데. 분에 넘치는 아내를 만났나 봐.”


남자는 거울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넘기는 잡지를 받친 다리가 앞뒤로 동동거리고 있었다.


“뭐, 그렇지. 지금은 죽었지만.”

“······그거참 유감이네.”


분위기가 단번에 숙연해졌다.

뒤로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남자도 딱히 대화를 더 이어갈 생각은 없었다.


‘겉보기에는 아빠와 딸인 편이 자연스럽겠지.’


이발이 끝나자 남자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뒤쪽 의자에 앉아 소녀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소녀는 마음에 드는 걸 찾았는지 어느새 다른 직원의 손길에 머리를 맡기고 있었다.


이제야 시작하는 걸 보면 고민을 많이 한 건가.

아니면 타인의 손에 머리카락을 맡기기까지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던 걸까.


‘단발이군.’


어쨌든 시간은 널널했다.

남자는 소녀의 얼떨떨한 표정을 보며 미용이 끝날 때까지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



짧게 다듬은 일자 머리에 단발로 내린 머리카락이 양쪽 볼을 덮는다.

금백색의 광택이 각도에 따라 절묘하게 빛났으며 부드러운 웨이브가 매끄럽게 느껴졌다.


소녀는 남자에게 다가가 다소 어색한 몸짓으로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아빠, 어때요?”

“아······. 예쁘군.”


아빠라니.

순간 혀를 씹을 뻔했다.


그 직원과의 이야기를 들은 건가.

아저씨라고 불렀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겠지만, 확실히 생소한 느낌이었다.


“아빠도 잘 어울리네요.”


소녀가 배시시 웃었다.

남자는 계산을 마치고 직원들에게 넉넉한 팁을 쥐여 주었다.


그렇게 문을 나서려는 찰나.

덩치 큰 직원이 남자에게 소리쳤다.


“저기, 친구! 아직 결혼도 안 해본 내가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자신의 감정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마.”


소녀를 안은 남자의 발이 우뚝 멈췄다.


“슬픔이나 상실감이 있어도 그건 당연한 거라고. 그런 감정들이 당장은 응어리질 수 있어도, 너무 오래 끌어안지는 않았으면 해. 친구 아내도 분명 그렇게 생각할 거야.”


뒤를 도니 직원의 걱정 담긴 눈동자가 보였다.


“언제 사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친구를 위해서도, 딸을 위해서도.”


애초에 결혼 같은 거 한 적 없다만.


‘그래도······ 일상이라.’


남자는 소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새겨듣지.”


딸랑.


미용실에서 나오자 소녀가 툭 내뱉듯 말했다.


“도시는 무정하고 차갑다고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따뜻하네요.”

“배운 사람들이니까. 정이 많은 사람도 곧잘 보이지.”


무언가를 고민하듯 눈동자를 굴리던 소녀가 불현듯 물었다.


“아저씨는 도시 출신이에요?”

“······그렇게 보이나?”

“헹, 아니요.”


그러면 그렇지.


“그래도······.”


뒷말이 이어지자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소녀는 남자에게 안긴 채 그의 재킷 자락을 손에 꼭 쥐었다.


“따뜻해요. 아저씨는.”


따뜻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람일 수가 있었나?


“······백화점이 가까워서 다행이군. 이곳은 사람이 많지 않으니 이제 걸어도 된다.”

“네에.”


쇼핑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남자는 편한 생활복을 같은 디자인으로 여러 벌 골랐고, 소녀는 백화점 직원의 추천을 받아 나이대의 여자아이들이 입을 만한 옷들을 맞춤별로 구매했다.


이름 있는 브랜드였는지 가격이 좀 나가던데.


옷차림을 보고 편견이라도 가졌던 걸까, 계산할 때 직원들의 벙찐 얼굴은 웃기지도 않았다.


“의외로 부담스러워하진 않는군.”

“죽을 때까지 펑펑 써도 절반도 못 쓸 정도로 많다며요? 이럴 때라도 팍팍 써야죠.”

“펑펑 썼을 때를 가정한 건 아니었는데.”


남자는 양손에 든 쇼핑백들을 물끄러미 보더니 입을 열었다.


“넌 이 돈의 출처가 뭐라고 생각하지?”


캐주얼 복장을 한 채 어디서 본 건 있는지 빙그르르 돌던 소녀가 돌연 멈추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피겠죠.”


피.

생명.

살인의 대가.


지금까지 남자가 마음 놓고 소비 생활을 즐길 수 없었던 이유였다.


“······아저씨. 그거 알아요?”


소녀가 남자를 올려다봤다.


“아저씨는 제 의뢰를 세 번이나 거절했었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화제를 돌리려는 건가?


“솔직히 처음에는 밉기도 했어요. 왜 나만 거절당할까. 내게는 지옥을 벗어나는 게 허락되지 않는 걸까. 타깃의 힘이 약하다고도 보내봤고, 가진 돈이 많다고도 보내봤어요. 하지만 전부 거절당했죠.”

“······.”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이름 모를 킬러의 가치관에는 의뢰의 난이도나 돈 같은 것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구나.”


7세 소녀가 떠올리기에는 사고의 깊이가 달랐다.


어른스럽다.

그리고 아이가 어른스러운 건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저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어요. 아내와─”

“아내와 아이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매일 술에 찌들어 사는 30대 남자를 죽여주세요.”


그것은 슬픈 일이었다.


“그리고 여러 증거 자료와 인적 사항이 함께 적혀 있었지.”


소녀는 빙그레 웃었다.


“기억하시네요. 맞아요. 그렇게 보냈더니 바로 움직여주시더라고요.”

“죽어도 싼 자였으니까.”

“바로 그거예요. 아저씨가 생각하기에 그 사람은 죽을 만해서 죽였던 거잖아요? 아니면 아저씨를 죽이려고 했다거나. 둘 다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요.”


어쩔 수 없었다, 라.


옛말에 1명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1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20여 년간 1만의 삶을 손수 매듭지은 입장으로서 말하자면, 남자는 여전히 살인자일 뿐이었다.


“내 행동을 정당화할 생각은 없다. 죽을 만하긴 했지. 하지만 사실 내게 심판할 자격은 없는 거였어. 그러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넣어둬라.”


소녀가 진실로 저런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다면 애초에 소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리 힘이 약하더라도 그것을 초월하는 지능이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시면서도 킬러로 활동하신 이유는요?”


소녀의 질문에 남자의 입이 열렸다가 아무것도 뱉어내지 못하고 천천히 닫혔다.


소녀는 그런 가치관을 따르지 않았음에도 결국 의뢰를 신청했다.


그 누구에게도 자격은 없지만, 그렇기에 더욱 절실한 것.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가슴이 뜨거워졌다.


“물론 도덕적으로 옳은 일은 아니죠. 그런데 만약 아저씨가 없었다면 아저씨가 죽인 사람의 수만큼 살인자가 나왔을 거예요. 세상은 혼란에 빠졌겠죠. 간접 살인? 에이, 그것까지 따지면 온 세상 사람들이 전부 살인자겠구요.”


킬러는 약간의 돈을 받고 자신의 양심을 판다.


하지만 의뢰를 해결하고 집에 돌아가던 어느 순간, 남자는 느꼈다.


내겐 더 이상 팔아치울 양심이 남아 있지 않다고.


“단단히 비틀렸지.”

“질서와 균형에는 언제나 비틀림이 숨어있는 법이죠.”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냐.”

“꼭 배워야만 아나요?”


소녀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아니었어요. 그때는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저는 결국 제 어머니를 죽였어요.”

“어쩔 수 없었군.”

“네. 어쩔 수 없었죠.”


소녀가 피식 웃었다.


“그냥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살자고요. 어쨌거나, 태어났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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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Chapter 1.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9) 23.05.18 10 0 10쪽
8 Chapter 1.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8) 23.05.17 11 0 10쪽
7 Chapter 1.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7) 23.05.16 15 0 11쪽
6 Chapter 1.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6) 23.05.15 17 0 10쪽
5 Chapter 1.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5) 23.05.14 19 0 11쪽
4 Chapter 1.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4) +1 23.05.13 23 1 11쪽
» Chapter 1.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3) 23.05.12 27 1 10쪽
2 Chapter 1.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2) 23.05.11 29 1 11쪽
1 Chapter 1.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1) +1 23.05.10 67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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