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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KaHaL 님의 서재입니다.

극랑전(極狼傳)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KaHaL
작품등록일 :
2023.10.09 20:25
최근연재일 :
2024.05.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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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3.11.0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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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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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자
12쪽

15화. 선(線) (5)

DUMMY

병신새끼의 송장을 치우고, 아라부카를 불러 몇 가지를 지시한 천중은 여송연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들고 별관의 문을 나섰다. 송화루의 별관은 귀빈관이다. 루주인 송문이 귀빈이라 판단한 인물 외에는 들이지 않는다.


그 귀빈이란 것이 이전에는 하남호문의 곽가 삼형제였고, 지금은 천가방의 천중이란 사실이 굉장한 역설이지만, 어쨌든 그 이전의 귀빈들은 송문의 철저한 고객관리에 만족한 편이었다.


그 옛날 공자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곧 임금은 임금답게, 쪼다는 쪼다답게. 어쨌든 돈이든, 힘이든, 권력이든 뭐든 간에 배부르고 등 따신 것 말고 다른 것을 걱정할 수 있는 여유가 보장되는 이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과 달라야 한다. 그런 차별이 있어야 힘 있는 자들도 약간의 만족감을 바탕으로 ‘자비’란 걸 베푸는 법이다.


송문은 그런 이치를 잘 알았다.


“햐, 니미. 좋구만.”


천중은 여송연 끝을 꾹꾹 눌러 씹으며 말을 뱉었다. 이렇게 여송연을 만 궐련지(捲煙紙)를 꾹꾹 눌러 씹으면, 그 안의 담뱃잎들이 꽉 죄이면서 본래의 맛과는 다른, 뭔가 색다른 맛이 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천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송화루의 별관을 노려보았다.


“아아아···주 좋아.”


천중은 스스로 약간은, 아니 상당히 미쳤다고 자각을 하는 사람이다. 미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그 미친놈들 사이에서도 가장 미친놈이 필두(筆頭)를 차지하는 것이 이 바닥의 법칙이니, 당연히 천중은 상당히 미쳐야만 했다.


그러나 적갈패 시절에 필두였던 그자만큼은 아니다. 어째서 그놈 대신 자신이 살아남았을까?


천중은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그리고, 그래왔기에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믿었다.


물론, 운칠기삼(運七技三)이란 개소리가 있지만, 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또한 실력이다. 미쳐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라도, 스스로 어느 정도 미쳤는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그래야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선을 넘지 않을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선을 잘 지키는 놈은 오래 살아남는다.


바스락!


“으흠, 오셨습니까.”


여기서 멋대로 천중의 배후를 잡고, 드러내어 인기척을 낼 사람은 몇 없다.


‘하나가 아니라 둘. 하나는··· 떡대고, 다른 하나는··· 늙은이?’


아무래도 인기척을 감추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것 같다. 천중은 무인이라기보단 군인에 더 가까웠지만, 무예를 아예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런 천중이 보기에, 이 늙은이─ 아니, 노승의 발놀림은 분명, 무예를 아예 모르는 평범한 노인의 것이다.


“하룻밤 내내 떡 방앗간 떡메 치는 소리가 요란했는데, 어째들 괜찮으셨는지?”

“속세와 궤를 달리한 지가 언제인데, 이제 와 추잡한 인간의 육신에 마음을 내어주겠는가?”


떡대가 입을 열었다. 광천사자(曠天使者)─ 백련교 최강의 무인이자, 천하삼절 모두와 손속을 겨루고도 승부를 내지 못한 절대고수. 강호에 오대호법이란 공포를 새겨넣은 장본인이다.


그럼, 이 노승은 누구지?


눈칫밥으로 따지자면, 송화루가 아니라 정주의 덕화루에서도 구첩반상을 받을 자신이 있었던 천중은 광천과 그 옆에 선 노승의 관계를 어림짐작하기 시작했다.


‘이자가 바로 그 광야사자(曠野使者)? 입술에 앉은 파리 잡을 힘도 없어 뵈는 노친네지만, 백련교의 오대호법 중 수장이라지. 머리가 비상하게 좋은 건가? 아니면··· 다른 뭔가 있나?’


광천의 태도를 보면 답이 나왔다.


광천은 마치 이 노인을 보필하듯, 그를 보좌하고 서 있다. 천하의 백련교 오대호법이 호위와 시종을 자처할 사람이 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 아마도 백련교의 교주, 아니면 백련교의 성녀인 ‘백련성화(白蓮聖花)’ 정도 아닐까?


그러나 백련교의 교주는 200년 전 모습을 홀연히 모습을 감춘 이래, 계묘년에 백련교가 재래할 때조차 그 명맥을 잇지 못했다. 그리하여 교주를 대신해 계묘년 당시에 교를 이끈 이가 바로 백련성화로 불리는 성녀였다.


그리고─


‘오대호법의 수장이라는 늙은이가 한 명 있었지.’


광야사자(曠野使者). 혹은, 부동명왕.


일전에 광천은 ‘아찰라나타(不動明王)의 영을 전하노라’며 소리친 적이 있다. 말하자면 이 늙은이, 광야사자야말로 200년간 주인이 없었던 백련교를 다시 일으켜 세운 장본인이 아닐까?


어이쿠, 하며 천중은 얼른 생각을 끊었다. 휴지(休止)가 너무 길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복마전(伏魔殿)과 같은 백련교지만, 독심술을 쓰는 놈은 아직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동명왕을 뵈옵다니, 생에 다시 이르기 어려운 영예이옵니다.”


천중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예스러운 태도로 포권을 취해 보였다. 노승은 그저 반장을 올려 답을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호칭하실 때는 광야사자라 불러주시게. 사자께서도 그걸 원하시니.”

“예, 그러겠습니다.”


분명 둘 사이에서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는데도 의사를 대신 전달하는 걸 보니, 그 빌어먹을 전음입밀(傳音入密)의 수법을 쓰든가··· 혹시 어쩌면 진짜 독심술을 익혔는지도 모른다.


천중은 다시 한번 조심, 또 조심해가며 입을 열었다.


“이 이른 시간에 어인 일로 행차십니까?”

“시주가 이번 거사를 선도(先導)할 것임을, 광륜사자께 전해 들었다네. 하니, 소승이 시주를 찾을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아무래도 할 일을 미리 알려주지 않은 것을 탓하러 온 게 아닌가 싶다. 천중은 내심 불평을 늘어놓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속내를 꾹, 억눌렀다.


“그저 송구할 따름입니다, 선사. 옮길 사람은 많은데, 또 피할 눈도 많다 보니 이거 정신없이 움직이느라 선사님들께 미리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소승이 비록 이 세상과는 다른 법도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자라 하지만, 그 정도도 이해 못 할, 머리 굳은 자는 아닐세. 시주께서 애써준 덕분에 하오문, 염천호의 눈을 피해 이곳 공의현까지 교(敎)의 호법들을 무탈하게 들일 수 있었으니 말일세.”

“아유, 당치도 않은···.”

“하여 소승은 시주를 나무라려는 게 아닐세. 그저 일의 향방과··· 몇 가지 의문점을 해결하러 온 것이지.”

“아하, 그러셨습니까.”


천중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백련교의 호법이란 작자들은 당최 그 속을 짐작하거나 헤아리기가 너무 어렵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바라는 것이 없다. 아니, 바라는 것의 결이 너무 다르다.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든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평범한 욕구와 욕망이 아니라, 무슨 도솔천(兜率天)이니, 미륵의 하생(下生)이니 뭐니 하는 기괴한 것만을 바라고 믿는 자들이다.


힘이 없다면 그저 광인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일이겠으나, 이들은 힘을 가졌다. 그것도 압도적이고, 온 세상이 두려워할 만한 힘을.


“일의 향방이라면··· 이틀 전 준비했던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단지 사흘간의 유예를 얻었을 뿐이지요. 다른 의문점은 무엇이 있으십니까?”

“시주는 이미 두 차례나 실패하지 않았는가.”

“···예. 그랬었지요.”


나무라려는 것이 아니라며? 천중은 울컥, 치미는 것을 꾹 눌러 삼키고 답했다. 뭐, 사실이긴 하다.


처음에 미친개를 죽여 공의현에 소요를 일으키고, 마침 미친개의 옆에 있던 한성채를 볼모로 잡아 한현보를 털어먹으려던 계획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제갈민 때문에 실패했다.


두 번째, 한설총을 죽이려던 계획 역시, 실패했다. 구보신개의 등장은 사실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다. 그가 벌써 몇 달 전부터 한현보 주변을 어슬렁대고 있었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구보신개─ 아니, 구보신개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머리는 염라왕이다. 그 무식한 미친 거지가 마치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이곳저곳에 파고들 수 있는 건, 놈의 뒤에 천하제일의 정보상(情報商)인 하오문주 염천호가 있기 때문이다.


염라왕 염천호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그 얼마나 갖은 고생을 했던가?


한설총이 한현보와 공의현을 떠나 정주로 갔던 그 처음 기회를 놓친 것이 여러모로 뼈아픈 일이다. 물론, 하남성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천호인 진량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이긴 하지만.


그리고 방법은 모르겠지만, 광륜이 그 책─ ‘약왕서’에 대한 정보를 빼돌렸다. 무려, 그 염라왕으로부터 정보를 빼돌린 것이다. 그것 역시 앞선 두 번의 실패가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천중의 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실패한 가운데에 용케 공을 세웠다 하여, 실패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설총이란 자가, 교의 일을 훼방할 만한 자던가?”

“···예?”


천중의 예상과는 전혀 뜻밖의 이야기가 나오자, 천중은 얼빠진 표정으로 광천에게 되물었다. 그러나 광천은 그저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천중을 빤히 바라볼 뿐, 다시 대꾸해주지 않았다.


잠시 멍한 정신으로 그를 바라보던 천중은 얼른 제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뜻밖의 말씀이라─ 한설총이라면··· 글쎄요. 감히 백련교의 일을 훼방할 정도로 대단한 자는 아니겠지요. 그런 자가 어디 흔하겠습니까? 천하삼절이나, 뭐··· 적어도 천검 정도는 되어야 감히 백련교에 맞서 대항할만한 자라 할 수 있겠지요.”


광천은 잠시 그 투실투실한 뺨을 오물거리며 소리 없이 불호를 외더니 물었다.


“하면, 시주께서 보시기에 그자는 어떠한 자이던가? 이미 두 차례나 시주에게 실패를 안겨준 그자를 시주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


천중은 광천의 두꺼운 몸통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슬그머니 손을 내리고 주먹을 쥐었다.


“아주 까다로운 놈입니다.”

“까다롭다?”

“소인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단 하나뿐입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일견 단순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썩 맞아떨어지는 편입니다.”

“그래, 어떤 기준을 적용하시는가?”

“넘어선 안 되는 선(線)을 넘느냐, 넘지 않느냐. 바로 그것입죠.”

“···선. 선이라. 진공가향···.”


광천이 불호를 외우자, 천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선을 몰라서 넘는 놈들은 멍청한 놈들입니다. 상대할 가치가 없지요. 그 선을 알고서도 멋대로 넘은 놈들은 일견 용감해 보이지만, 미련한 놈들이지요. 이런 놈들은 쉽습니다.”

“그렇군. 듣기에 아주 옳으신 말씀일세.”

“혹, 그 선이 있음을 알고 그 근처에도 다가가지 않는 놈이 있다면, 이런 놈들은 겁쟁이죠. 위험하지도, 똑똑하지도 않은 놈들입니다. 그러나, 만약 넘어서는 안 되는 그 선을 알고서 아슬아슬한 위치까지는 가되 넘지 않는 놈이 있다면···.”


천중은 얼굴을 살짝 숙여 그늘진 눈가에서 안광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매우 위험한 놈입니다. 이런 놈들은 상대하기가 쉽지 않지요.”

“한설총이 그러한 자다?”

“제가 본 바로는 그리합니다. 해서, 놈은 썩 상대하기가 쉽지 않은 놈이니, 아무래도 미련한 놈, 멍청한 놈, 겁쟁이들 사이에서는 단연 머리가 될 자격이 있지요.”

“그렇군. 아주 설득력이 있는 말씀이셨네. 과연, 광륜사자께서 시주와 함께 일을 도모하고자 하신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

“과찬이십니다. 소인이야 그저 왈패 나부랭이에 불과하지요. 광륜선사께서 소인을 너무 높게 보신 겁니다.”

“흐하, 흐하핫, 아닐세, 아니야.”


광천은 삿갓 챙을 숙여 입만 드러낸 채 말 한마디를 남겼다.


“역시, 광륜사자께서 사람을 보는 눈이 있으신 게지. 본교의 지복일세, 지복이야. 무생노모.”


불호와 함께 광천과 광야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잠시 두 사람이 서 있던 자리를 쳐다보던 천중은 꾹 쥐고 있던 오른손을 펴들었다. 오른손의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했다.


“···귀신이 다 곡할 노릇이군, 빌어먹을.”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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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23화. 천하지회(天下之會) (1) +1 23.11.21 497 9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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