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계의 봉 엘리타
난 그냥 가서 잘까 생각했는데 미쉘의 눈빛은 이미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스미스 백작과 그의 부인이 어떤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기사와 검사들 그리고 성내의 젊은 처녀들을 불러 모아서 파티를 열어주고 있었다.
백작성의 실내는 이미 술이 돌아 분위기가 후끈 달아 올라있었다.
“졸린 데 술도 깰 겸 우리도 홀로 나갈래?”
나는 미쉘에게 춤을 권했다. 미쉘도 흔쾌히 청을 받아들여 우리는 홀에서 같이 춤을 추었다.
미쉘의 상기된 볼을 보니 기분이 야릇했지만 곧 백작부인의 얼굴을 보고는 정신이 들었다.
“어? 당신은?”
백작 부인이 먼저 날 알아보았다. 그녀는 골란 공작 성에서 구해 준 중년 여인이었다.
그녀가 놀라서 내게 뛰어오듯이 다가왔다.
“아!”
“아는 분이야?”
“여보! 이 분입니다.”
“오! 이런. 은인이 오시다니······.”
그녀는 악사에게 손을 흔들어 잠시 음악을 멈추게 하고 말했다.
“여러분, 이 분이 저를 구해주신 은인입니다. 하늘의 용사시죠.”
마족이라고 쌩 원수 취급받다가 분위기가 급 반전했다. 이런 걸 카밀라가 노린 걸까?
백작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백작은 나를 포옹하고는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백작이 시종의 귀에 뭐라고 속삭이자 시종이 나를 한번 보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이도 젊은데 대단한 능력이십니다. 전설 속의 하늘의 용사가 정말 맞으십니다.”
시종이 작은 상자를 가지고 나왔다. 백작이 상자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고 내게 말했다.
“이건 가문의 보물입니다. 사소한 거지만 성의를 봐서 받아 주십시오.”
“가문의 보물을 받을 만한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미쉘이 빨리 받으라고 내 팔을 잡아 당겼다. 그녀를 본 백작이 웃으며 말했다.
“답례이기도 하지만 이건 뇌물입니다. 나중에 저희를 잊지 마시라는.”
“감사합니다. 백작님.”
공손히 절을 하며 미쉘이 덜컥 그 상자를 대신 받았다.
나는 부인께 사정이 있어서 쫓기고 있다고 말했다. 은인을 헤치지는 않을 테니까.
“누가 물어보면 공작가로 돌아갔다고 할게요.”
“네, 고맙습니다. 그리고 귀한 선물 감사합니다.”
“더한 것도 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앞으로 병사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공자는 저희의 영원한 은인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더 붙잡지는 않겠습니다.”
백작과 백작 부인과 인사를 하고 나는 미쉘이 안내해준 여관으로 왔다.
“여기가 제일 깨끗해. 음식도 괜찮고. 하늘의 용사라니 영광이네?”
“우연히 그렇게 된 거야. 난 그런 사람 아니야. 내일 아침에 식사하고 출발. 어때?”
“좋아.”
그녀는 나를 보며 비가 온 후 꽃이 활짝 핀 듯 정말 환하게 웃었다. 여행은 사람을 흥분시키는 기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삶 자체가 어차피 여행이라 그런 걸까?
오딘의 재촉으로 난 그 선물 상자를 열었다. 오딘이 꿀꺽하며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상자를 열자 무지개 빛이 방안에 확하고 퍼졌다. 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손 바닥 두 개 길이의 작은 금속봉이었다. 혹은 밀대? 빛이 퍼진다는 것은 신비한 능력이 봉인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뭘까?”
나는 그 무지개 빛이 퍼지는 봉을 꺼냈다.
[그건······. 마나를 넣어 봐라.]
프란츠가 뭔가를 아는 것 같았다.
난 그 봉을 꺼내 손으로 집었다. 따뜻했다.
[마나를 넣어 보겠습니다]
그러자 봉이 조금 굵어지며 길어졌다. 내가 한쪽 벽으로 물러서자 반대쪽 벽이 닿을 정도로 길어졌다.
“그만. 더 길어지면 벽 뚫겠어. 나가서 해 보자.”
난 피곤했지만 호기심에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
여관을 나와 인적이 없는 바위 위에 봉을 세웠다. 그리고 다시 마나를 흘렸다.
슉!
봉이 하늘로 계속 뻗었다. 어디까지 뻗는 걸까? 어두워서 어디까지 뻗은 건지 잘 보이지 않아서 이번엔 가로로 들고 마나를 주입했다.
쭉쭉 끝없이 길어졌다. 마나만 계속 주입한다면 그 끝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줄어들었으면 좋겠다는 의지를 가지가 봉이 알아서 다시 줄어들었다.
난 수 미터로 줄어든 봉을 들어 나무를 때려보았다. 그러자 나무들이 별다른 저항이 없이 쉽게 부서져 쓰러져 나갔다.
검에 오러를 실어 나무를 베는 것보다 타격의 저항이 훨씬 적었다.
“대단하다. 이게 뭐지? 마법 봉인가?”
[그건 마계에서 있던 것 같은데? 아주 오래전에 신계에서 내려온 봉이라고 했다. 그것 때문에 신계가 다 부서졌다고 했었어. 검으로도 잘리는 의미가 없지. 다시 길어지니까]
“작아질 수도 있나? 작으면 아주 가벼운데 커지면 조금 무거워지네?”
난 이 봉의 이름을 엘리타라고 지었다. 다른 차원의 내 본명이었다.
“라온!”
어제 늦게 자는 바람에 늦잠을 자고 말았다.
“아! 미안. 같이 밥 먹고 떠나기로 했었지?”
그녀는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밥이 문제가 아니야. 제럴드가 그러는데 너 잡으러 로즈 왕국에서 엄청나게 몰려오고 있데. 마법사들과 그랜드 마스터까지 동원되었다고. 어서 도망가!”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나를 드러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백작의 기사들이 일단 막고는 있다고 하는데 곧 뚫릴 거야. 이쪽으로.”
그녀는 날 항구로 안내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대륙의 공적이라고 하데?”
“몰라. 내가 죽일 놈의 마족이라고.”
“휴. 마왕이 이미 대륙을 장악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왜 너에게만 그럴까?”
“마왕이? 넌 내가 마족이라도 괜찮은 거니? 놀라지도 않네?”
그녀는 배에 오르며 나에게 서두르라고 손짓을 하며 말했다.
“올라와서 얘기하자.”
“너도 가려고?”
“난 네가 고용했잖아?”
그녀는 멀리 나무 사이의 인영에게 손을 흔들었다.
“고마웠어! 제럴드! 윙클러! 난 잘 지낼 거니까 걱정하지마! 빨리 장가나 가!”
마족이라는 걸 알았는데도 왜 날 따라오려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 내게는 무척 힘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결코 그녀를 내칠 수는 없었다.
“무슨 돈이 있어서 이 배를 얻었어?”
“네가 낼 거잖아? 난 계약금만 낸 걸? 난 이제 한 푼도 없는 거지 신세야.”
선장이 내게 다가왔다. 아마 내가 오면 잔금을 다 지불할 거라고 했나 보다. 보통 배는 탈 때 돈을 다 받는다. 가다가 작은 배를 내려서 도망가거나 중간에 무슨 사고가 나기도 하니까.
“50골드만 주십시오.”
“너무 비싼 거 아닌가요?”
“어이! 예츠, 빨리 줄 풀고, 닻 올려! 엉덩이 걷어차여 바다에 빠지기 전에.”
크지도 않은 배에 몇 명 되지도 않는 선원. 행성을 한 바퀴 도는 것도 아닌데.
그는 항구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솔직히 비싼 건 맞습니다. 그러나 저희 선원들 생명 수당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장도 내가 쫓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군.
난 선장에게 나머지 잔금을 지불하고 말했다.
“어디까지 가기로 하신 거죠?”
“아가씨가 아직 행선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식량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하는 곳까지만 갈 수 있습니다.”
“우드포레스트 근처까지 갈 수 있습니까?”
“휴. 거긴 너무 멉니다. 중간에 아이리스 항구에 내려드리겠습니다. 거기서 큰 배를 얻으시면 됩니다.”
아이리스 항구라면 파인후작가와 가까운 톨레도 왕국의 항구이다.
[텔레포트로 이동하자]
“그래. 나도 그러고 싶은데 오딘이 마나량이 부족해서 장거리 텔레포트는 안 된다고 한 것 같은데?”
마나를 대량 쓰려면 나노로봇을 쥐어짜야 하는데 그럼 나노 로봇의 활동이 멈추게 된다. 무리수다.
아공간의 보물로 마나석을 대량 구비하고 싶었으나 마탑도 내 적일 확률이 높으니 당장 뚜렷한 방법은 없었다.
“누구랑 얘기해?”
“혼잣말 하는 게 취미야. 내가 마족이라니까 정말 부담 안 되니?”
“아까 배에 타면 얘기하기로 했었지? 나도 일부 마족이야. 할아버지께서 마족이셨어.”
“들으니까 부담이 확 줄어든다.”
“나 말고도 마족의 피가 흐르는 인간들 많아. 몰랐어?”
그녀는 날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런데 책에서는 혼혈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한 책은 없었다. 일부러 누가 없애버린 것 같다.
“응. 고립된 삶을 살았어. 마족에 대해서는 도서관에서 읽은 내용이 다야.”
“나는 마족인 할아버지께서 많은 얘기를 해 주셨어.”
그녀의 눈이 갑자기 붉게 물들었다가 다시 푸른 눈으로 돌아왔다.
마족의 피 때문인가 보다. 그녀는 날 끌고 선원들이 없는 뱃머리로 갔다.
“오해할지도 모르니까. 여기서 얘기해. 프란츠 마황이 인간계로 유배당한 이후로 마계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어. 그 전쟁을 피해서 많은 마족이 인간계로 피신해 왔었어.”
그런 와중에 예지력의 권능을 가진 마왕이 신의 예지를 들었다고 하는데 내용은,
<인간계에 있는 마왕의 핏줄 중에서 마황이 탄생하며 그는 마계와 인간계를 지배할 것이다> 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각성을 시작하면 하늘의 용사라고 불릴 것이라고 했다.
“이런 미친 애디!”
“더 들어봐.”
그녀는 멈추지 않고 열심히 내게 설명을 했다.
“그런데 만일 그의 영을 흡수한다면 그가 그 신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해. 그런데 그 얘기가 죽은 마왕의 영이나 마황의 영을 흡수하면 힘을 얻는다는 걸로도 확대되었어.”
“너는 이런 얘기를 어떻게 이렇게 속속들이 알아?”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그 예지력을 가진 마왕이었으니까.”
“와! 마계에서는 넌 대단한 왕족이네? 그랬구나. 넌 그럼 마족들과 살았어?”
난 마족과 살았다는 엘자가 생각이 났다.
“아니. 권력을 가졌던 마족들은 이상한 소리를 해서 마족들을 혼란에 빠뜨린다고 할아버지를 죽이려 했어. 난 할아버지와 숨어 지내다가 여행을 하던 제럴드가 날 발견했고 검술을 가르쳐 줬지.”
“할아버지와 부모님은 그럼?”
“할아버지는 건강이 안 좋으셔서 돌아가셨고 아빠와 엄마는 웨스트 엘도의 하쿰에서 악마라는 누명을 쓰고······.”
“그런데 넌 참 씩씩하다. 나와 다니면 할아버지처럼 쫓기게 될 텐데.”
“난 한순간도 위험하지 않은 때가 없었어. 괜찮아.”
난 내가 그 예언의 당사자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마왕의 핏줄이라고 해도 이 세계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하늘의 용사라는 말도 에디가 억지로 지은 거니까.
바다를 바라보는 그녀의 옆얼굴이 노을에 붉게 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을 맞아 흩날렸다.
[주인님 말대로 텔레포트는 블랙나이트가 마나를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어서 우드포레스트 근처의 포인트까지는 불가능합니다. 마나석을 얻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확한 좌표 정보도 필요합니다. 제가 가진 정보는 너무 오래된 겁니다]
“자체 마나집성은?”
[그건 시간이 한 달은 더 걸리겠습니다]
미쉘이 혼잣말하는 모습을 보더니 개의치 않고 빵과 차를 가지고 왔다.
난 그녀에게 그동안의 일들을 털어놓았다.
“근데 왜 우리 이모까지 날 죽이려 한 걸까?”
“할아버지는 인간계에 마왕의 세력이 이미 퍼졌다고 했어. 이모님은 일부러 널 보호한 거일 수 있어. 그래서 쉽게 탈출할 수 있었잖아?”
“더 강한 적으로부터 날 보호한 것이었을까?”
“그럴 확률이 높지.”
“그 드래곤은 둘 중 하나겠지? 처음부터 일부러 그랬거나? 아니면 나중에 변했거나.”
단순하나 맞는 얘기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부러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슈뢰딩거가 그 능력에 누구 비위를 맞추면서 산 것도 아니었을 테고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 부류는 아니다.
“한스와 윌리엄은 가문의 뜻에 따라 행동한 거겠지. 다분히 윌리엄은 안타깝지만 첩자였어. 한스는 가문에서 하라는 대로 했을 거야.”
“성녀가 불쌍하군. 나 때문에 추락했어. ”
“성녀는 이미 추락할 운명이었던 것 같아. 신관들이 사지로 몰아넣은 걸 보면.”
“암튼 난 그 신탁의 대상이 아닌 건 확실해. 설명하기 복잡해.”
“난 그런 거 신경도 안 쓰고 상관도 안 해. 설명하려고 애쓸 필요 없어.”
갑자기 선장과 선원들이 소리를 지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크라켄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저희 쪽으로 오는 것 같아서 피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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