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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마마바 님의 서재입니다.

어느 히어로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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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마마바
작품등록일 :
2019.08.16 17:18
최근연재일 :
2019.09.16 18:05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3,240
추천수 :
192
글자수 :
142,121

작성
19.09.03 18:05
조회
71
추천
5
글자
12쪽

20

DUMMY

20.

로즈를 바래다주고 돌아온다. 길을 혼자서 걷는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만화를 그만두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계속 할만한 상황은 아니다.


비에 젖어 몸이 무거워진다. 내 살 주름 하나하나에 빗물이 고인 게 아닌가 의심된다.


그래도 비는 좋다. 비가 오면 사람들은 자기 발밑만 신경 쓴다. 물에 젖은 액체괴물이 옆을 지나가도 그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비가 오니까.


나는 자유를 만끽하며 걷는다. 모두가 우산에 갇혀있고 나 혼자 자유로운 느낌.


그러나 내일 감기에 걸리면 틀린 것은, 이상한 것은 나였다는 게 밝혀지겠지.


그때까지는 아직 많이 남았으니, 지금을 즐기자. 괜히 물웅덩이에 가서 첨벙거린다. 물이 넘치고 튀고.


별안간 로즈의 모습이 생각난다. 젖어서 착 가라앉은 머리. 들러붙은 옷. 빗물이랑 섞이는 눈물. 엉망이었다. 로즈의 모습도. 내 모습도.


문제는 없다. 어차피 빗속에서는 모든 게 엉망이다. 저기 물이 고인 지붕들, 물을 머금은 잔디, 그 속에서 첨벙거리는 나. 우산 쓴 사람들. 조심스레 달리는 차들. 모두 엉망이다.


그래 어쩌면 이게 진짜일지도 모른다. 원래부터 다 엉망이었을지도 모르지. 어떻게든 치장하고 살고 있지만, 빗물에 씻겨서 화장이 지워지면 본 모습이 나오는 거다.


그래. 다 엉망인거다. 그래도 살아가야지. 엉망인 채로.


익숙한 빌라가 보인다. 나는 침울해져서 빌라에 들어간다.


집으로 들어가 젖은 옷을 벗고 씻는다. 집은 치우다말아서 지저분하다.


나는 정리를 계속 해야 할지 고민한다. 정리를 하지 않으면? 디자인 회사로 가지 않으면? 뭘 할 수 있지? 아마추어 만화가로 다시 시작해야하나?


계좌에는 잔고가 얼마 없다. 따로 저축해둔 것도 없다. 당연하지 나는 계속 일할 줄 알았으니까.


디자인 회사로 들어가는 게 맞다. 어쩔 수 없다. 흠 누구 얘기랑 비슷한데.


아마추어 만화가로 돌아가도 프로가 되기는 힘들 거다. 이미 겪어봐서 안다. 인사담당자들에게 내 소문은 충분히 퍼져있다.


로즈 덕에 왜 만화를 그리고 싶은지 깨달았지만 너무 늦은 거 같다. 현실의 벽이 높게 자라나버렸다. 나 같이 짜리몽땅한 사람이 그걸 넘을 수는 없다.


나는 결국 하던 정리를 계속한다. 코믹스를 쓸어 넣고 피규어를 치우고 하다 보니 봉투 2개가 꽉 찬다.


서랍들도 비운다. 내 세 칸짜리 서랍. 뭐가 들어가기만 하고 나오는 일은 잘 없는 블랙홀 같은 곳이다.


서랍 첫 번째 칸은 작은 팬시상품들로 가득 차 있다. 드힌이 잘되면 팔겠다며 회사에서 견본으로 보내준 것들. 결국 아무것도 팔리지 못하고 여기 처박혀 있다. 나는 그걸 한 움큼 집어 봉투에 넣는다.


두 번째 칸에도 별다른 건 없다. 나는 폐기된 원고들을 보관하는 버릇이 있다. 이야기로 나오지 못한 다른 히어로들이 여기 쌓여있다. 가장 위에 놓인 것은 핵맨이다.


예전에 드힌을 연재하기 전에 구상했던 히어로들도 여기 있다. 불을 뿜는 파이로맨이나 진흙투성이인 머드맨 같은 것들. 흔해서 폐기된 것들.


한창 막막할 때 그렸던 것들이다. 그때는 이런 만화를 그려서 돈을 벌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둘째 칸을 다 비우고 마지막 칸으로 내려간다. 여기에는 뭘 넣어놨는지 기억이 안 난다. 서랍이 다 열리자 그제야 기억이 난다.


드힌이 있다. 내 마지막 서랍에. 드힌이 남아있다.


내가 준비했던 마지막 원고. 나는 찬찬히 그걸 살펴본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드힌은 인질을 구하지 못한다. 드힌은 많은 사람들의 비난에 시달린다. 인질의 가족들은 티비에 나와서 그를 비난하고 그는 술에 절어 지낸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라고 생각한다. 돈 한 푼 없고, 직업도 없고, 이제는 히어로도 아닌 실패자. 그는 다시 홈리스가 된다. 구걸을 한다. 그러다가 골목에서 강도에게 돈을 빼앗기는 사람을 본다.


그는 망설인다. 아무것도 아닌 그가 저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의문을 뒤로 하고 나아간다. 포기하지 않는다.


뛰는 게 오랜만이라 미끄러진다. 넘어진다. 다시 일어선다. 총알도 전처럼 느리게 보이지 않는다. 어깨에 총알이 박힌다. 그래도 나아간다.


결국은 강도를 제압한다. 돈을 빼앗기던 사람이 드힌을 두려운 눈으로 봐도, 드힌은 미소 짓는다.


그는 항상 그런 영웅이었다. 사람들에게 다시 일어나는 법을 알려주는 영웅.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아직은 삶이 있음을 알려주는 영웅. 심지어는 죽어서까지 다시 일어나는 영웅.


나는 울면서 그걸 품에 안는다. 위안이 된다. 다시 일어서는 법. 드힌은 항상 그걸 알려준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낸다. 마신다. 잔뜩 마신다. 결단력이 생길 때까지. 지금 필요한 게 그거니까.


모든 게 너무 답답하다. 내 주변 상황은 나를 옥죄어 온다. 나는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고, 해야 되는 걸 해야 한다.


나는 무너졌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아니다. 로즈라는 친구가 있고, 제리도 있고, 어쩌면 댄스도 친구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언제나 드힌이 나를 위로해준다.


그래 나는 다시 할 수 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드힌은 이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도 일어났다. 나도 할 수 있다. 하고 싶은 걸 한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방식을 가진다.


나는 젖은 녹색 후드를 입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됐다. 술기운이 몸을 감싼다. 가자.


밖에 나오니 비가 그쳐있다. 택시를 타고 익숙한 빌딩으로 간다. 아트웍스 코믹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고, 운이 좋다면 계속 보게 될지도 모르는 회사.


아직 저녁이다. 편집자들은 늦게까지 일할 때가 많다. 특히 마감이 몰리면 그럴 거다.


로비에서 경비가 손을 흔든다. 나는 마주 흔들어 답하고 엘리베이터에 뛰어든다. 3층. 편집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죄송합니다! 한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잘 하겠습니다!”


편집자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편집장실에서 편집장이 고개를 빼꼼 내민다. 책상 앞에 앉아 졸던 제레미가 잠에 취한 얼굴로 나를 본다.


“다시 일하게 해주세요!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허리 숙인 채로 말한다. 편집자들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다. 상관없다. 다시 만화를 그릴 수 있다면. 사람들을 위로해줄 수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잘못했어요! 다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헨리.......”


고개를 슬쩍 들어보니 편집장이 있다.


“여기서 이러면 어떡하나.”


편집장은 나를 안쓰러워한다. 상관없다. 기회를 한번만 더 준다면.


“한번만 더 해보고 싶습니다. 기회를 주세요.”


“여기서 이런다고 뭐가 되겠나?”


“부탁드립니다. 한번만 더 하게 해주세요.”


그때 누가 내 팔을 잡고 끌고 간다. 2명이 한쪽 팔을 각각 잡는다. 제리와 댄스다.


“뭐하는 거야?”


“너를 사회적 자살로부터 구하는 중이지.”


제리가 말한다.


“선배님 취하셨어요? 아 진짜 취하셨네.”


댄스가 내 입 냄새를 맡아보고 말한다.


둘은 나를 엘리베이터로 끌고 간다. 그리고 그대로 택시에 쑤셔 넣고 에인드 펍까지 데려간다.


우리는 테이블을 잡고 앉는다. 익숙한 종업원이 맥주 2잔을 가져다준다. 제리와 댄스 앞에 맥주가 놓인다.


“자 말해봐 뭐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냐? 어제는 디자인 회사에 갈 거라며.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우리 회사에서 1인 시위하기로 한 건데.”


“일단 댄스. 정말 미안해. 저번에 그렇게 말한 거 말이야. 미안해.”


“선배님. 오늘 날 잡고 사과하러 다니기로 한 거예요?”


“그런 거 아냐. 만난 김에 얘기하는 거야. 진짜 미안해.”


“괜찮아요. 별 일도 아니었는데요.”


댄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분 좋아 보인다.


“말 돌리지 말고. 왜 회사에 온 거냐? 아니, 사장님이 해고를 결정했는데 그걸 편집실에서 말하면 뭐가 어떻게 되겠냐?”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편집장님이 잘 말해주시지 않을까?”


“짤린 헨리 작가가 어제 편집실에서 난동을 부리더군요. 뭐 이런 식으로?”


“아니 뭐. 헨리 작가가 반성하는 거 같더군요. 흠....... 우리 작가도 전처럼 많지는 않은데, 어떻습니까, 사장님. 헨리를 복직시키는 게.”


“그렇게 되겠냐?”


“안 되겠지.”


“하기 전에 미리 생각해보지 그랬냐.”


“하기 전에는 좋은 생각 같았지. 게다가 너무 답답했어.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거 같았고.”


“디자인 회사 가기로 했잖아.”


“거긴 안 갈 거야. 나는 코믹스 작가야. 만화를 그릴 거라고.”


“또 고집이냐? 대체 왜 그러는 거냐?”


“모르겠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야. 근데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싶어. 나가서 사람들을 보고, 이야기를 들으면 그 사람들의 우울함이 느껴져. 그러면 나는 그걸 위로해주고 싶어져.”


나는 댄스의 맥주를 뺏어서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잇는다.


“근데 나는 결국 아무 말도 못해. 사람들을 마주보면 입이 열리질 않아. 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만화가 내 유일한 수단이야. 사람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수단.”


“다른 수단도 많아. 디자인도 그 중 하나고.”


제리가 말한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드힌을 봐봐. 그는 가난하지만, 착하고 쾌활해. 우울한 환경에서도 밝으려고 노력하지. 그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어. 사람들에게 괜찮을 거라고 말할 수 있고, 작은 선물도 줄 수 있어. 나는 드힌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대신해주는 게 좋아. 드힌이 사람들을 돕는 게 좋아.”


나는 또 댄스의 맥주를 마신다.


“이게 병신 같다는 건 아는데 내 최선이라고 이게. 그러니 내가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말하지 마.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별 말 안 했어요.”


댄스가 손을 들어 올리며 말한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한다.


“오늘도 로즈가 나에게 울면서 말하는데 나는 아무 말도 못했어. 위로해주고 싶었는데 아무 말도 안 떠올랐어. 나는 내 친구도 위로해주지 못해. 알겠어? 만화가 내 최선이야. 사람들한테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나는 말을 마치고 댄스의 맥주를 마신다. 댄스는 박수를 친다.


“멋진 연설이십니다, 선배님.”


“멋진 연설은 개뿔. 회사 짤린 사람이 술 처먹고 하는 하소연이지.”


제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감명 받은 눈치다. 그는 맥주를 벌컥거리며 마시고는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일어난다.


“넌 술 마시지 마라.”


나는 댄스에게 말한다. 저번처럼 끔찍한 꼴을 보고 싶지는 않다.


“이미 늦었어요.”


댄스는 자기 맥주를 가리키며 말한다. 맥주가 줄어있다. 내가 제리를 보는 동안 마셨나보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나는 제리의 맥주를 마신다.


제리는 좀처럼 화장실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맥주를 한잔씩 더 시켜서 마신다. 취할 만큼 취한 우리 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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