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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마마바 님의 서재입니다.

어느 히어로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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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마마바
작품등록일 :
2019.08.16 17:18
최근연재일 :
2019.09.16 18:05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3,236
추천수 :
192
글자수 :
142,121

작성
19.09.02 18:05
조회
82
추천
7
글자
9쪽

19

DUMMY

19.

나는 제리에게 디자인 회사에 갈 거라고 말했다. 제리는 잘 생각했다고 했다. 나는 좋은 생각은 아니지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는다. 나 같은 사람을 원하는 데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우울과 자기연민에 빠져 산다. 내 방은 감옥이 된다. 죄목은 한심함이고 판결은 감금형이다.


밖에는 비가 내린다. 마구 퍼붓는다. 내 기분에 어울리게.


로즈에게서는 문자가 계속 오지만 나는 여전히 답장하지 않는다. 그녀가 지금의 나를 보면 한심함에 기겁을 할 거다.


만화를 그리는 것도 그만 둔다. 다음 이슈를 구상하는 것도 콘티를 짜내는 것도 그림을 그리고 칠하는 것도 대사를 쓰는 것도 다 그만 둔다.


그러고 나니 내 방에는 필요 없는 것들이 많다. 나는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한다. 커다란 봉투를 가지고.


우선 내 코믹스들을 버린다. 왜 이런 걸 모아둔거지? 실패한 물건들을 집에다 쌓아놓으니 이렇게 우울해지지.


아트웍스에서 연재 1주년 기념으로 줬던 드힌 포스터도 치운다. 드힌 피규어와 드힌 액션피규어도 봉투에 넣는다.


만화 그릴 때 참고하려고 샀던 구체관절인형과 테블릿은 한쪽에 잘 놓는다. 디자인할 때도 필요할 테니까.


한참 작업을 하고 있는데 제리에게 전화가 온다.


“업무 중에 전화해도 되냐?”


“점심시간이야.”


시계를 보니 정말 그렇다.


“왜 전화했는데. 내 새 여정을 축하해주려고?”


“아니. 문제가 좀 생겨서.”


“무슨 문제.”


“로즈 베일이 누구냐?”


“로즈? 로즈가 왜?”


“아니 갑자기 회사로 전화해가지고 네 주소를 아냐고 묻더라고.”


“로즈가? 로즈가 왜?”


“나도 모르니까 전화했지.”


“알려줬냐?”


“뭐 친구라길래 뭐.......”


제리가 얼버무린다.


“그걸 왜 알려 주냐.”


“친구가 연락이 안 돼서 걱정된다는데 뭐라 그래 그럼.”


“잘 있다 그래야지. 주소는 회사 방침 상 못 알려 준다 그러고.”


“그러네. 그거 괜찮네. 근데 왜 그때는 생각이 안 났을까.”


제리가 태연하게 말한다. 그는 실실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래서. 로즈랑 친구인 건 맞아? 네가 여자인 친구가 있다고? 혹시 여자 친구냐?”


“꺼져. 로즈랑은 그냥 친구야. 걔는 남편도 있다고. 애도 있고.”


“남편 있어도 여자 친구가 될 수 있지. 안 그래?”


“안 그래. 돌았냐?”


“야 혹시 로즈가 그 졸업파티 때 그 애냐?”


제리에게 그 이야기를 해준 게 후회된다.


“아냐.”


“뭐가 아냐. 딱 맞구먼.”


“아냐 꺼져. 끊어. 집 정리해야해.”


“정리? 드디어 청소하는 거냐? 하긴 나는 네가 어떻게 아직 살아있는지 모르겠다. 그 병균 천지에서.”


“아니. 집 정리한다고. 이제 만화 안 그리니까. 물건들도 좀 치워야지.”


“어차피 대부분은 새 회사에서도 쓸 거 아냐?”


“옛날 코믹스 같은 거 버리려고.”


“왜? 그냥 두지.”


“보고 있기 힘들어.”


“아. 뭐 힘내라.”


제리가 건조하게 말한다.


“야. 로즈한테 전화해서 잘못 알려준 거라고 해.”


“이미 늦었어. 나는 베일 부인 전화번호도 몰라.”


“내가 알려줄게.”


“아. 점심시간 끝났다. 끊는다.”


전화가 끊긴다.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비가 이렇게 퍼붓는데 찾아오겠는가? 로즈한테 나는 그냥 동창중 하나일 뿐이다. 가끔 스케줄 비면 수다나 떨만한 상대. 로즈가 찾아올 리가 없다.


그러나 내 기대는 빗나간다. 내 핸드폰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문자가 무서운 속도로 연달아 도착한다.


‘네 집 앞이야! 나와!’ - 로즈 델리아


나는 지금이라도 창문으로 도망칠까 고민한다.


‘도망치려고 해도 늦었어.’ - 로즈 델리아


‘제리라는 사람한테 주소 물어봐서 찾아왔다고. 빨리 나와.’ - 로즈 델리아


‘나와!!!!!!!!!!!!!!!!!!!!!!!!!!!!’ - 로즈 델리아


‘들어가서 문을 때려 부술 거야!!!!!!’ - 로즈 델리아


‘못할 거 같아?????????????’ - 로즈 델리아


‘두고 보라고!!!!!!!!!!!!!!!!’ - 로즈 델리아


로즈는 제정신이 아닌 거 같다. 힘든 일 있었나? 왜 이러지? 쟈니처럼 도끼라도 들고 오려나?


나는 결국 포기하고 우산을 챙겨 나간다. 로즈가 비를 맞으며 서있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젖어 떨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준다.


“로즈, 미쳤어? 비 맞으면서 뭐해!”


로즈는 내 귀를 잡아당긴다. 이런 걸 보니 로즈가 두 아이의 엄마라는 게 실감이 난다. 나는 그녀에게 질질 끌려 거리로 나선다.


“연락을 하면 받아! 괜찮다는 답장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미안해. 네가 그렇게 신경 쓸 줄 몰랐어.”


“당연히 신경 쓰지!”


로즈는 내 귀를 놓아준다. 끌려오다가 우산을 떨어뜨려서 우리는 둘 다 비를 맞고 있다.


“난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했어!”


로즈가 말한다.


“나도 그랬지. 그래서 힘든 모습 보여주기 싫었어.”


내가 변명을 우물거린다. 로즈는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본다.


“너를 위로할 기회는 줘야 할 거 아니야! 그렇게 무시해버리면 어떡해!”


“미안해. 나는....... 잘 모르겠어. 이런 일들에 서툴러서. 미안해.”


로즈는 한숨을 내쉬고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하늘을 봤다가 땅을 본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다.


“많이 힘들어?”


로즈가 말한다.


“아니. 그냥 뭐 견딜만해.”


내가 웃으며 말한다. 그런데 비가 와서 우는 것처럼 보일 것 같다.


“걸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로즈의 집 방향으로 걷는다. 별 말 없이.


“친구끼리는 힘든 모습도 보여줄 수 있는 거야.”


로즈가 말한다. 나는 잘 모르겠다.


우리는 전에 헤어졌던 그 집 앞을 지나간다. 나는 멈칫한다. 그러나 로즈는 멈추지 않고 걷는다. 계속 걷는다.


“뭐해.”


로즈의 말에 나도 따라 걷는다. 우리는 한참 교외지역을 걷다가 다시 모퉁이를 돌아 도심 쪽으로 걷는다. 갈수록 집들이 작아진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데려다줘서 고마워.”


로즈의 집은 생각보다 작다. 생각보다. 난 대체 그녀가 뭐라고 생각했던 걸까? 완벽한 천사? 제리의 말이 옳다. 나에게는 편견이 있다.


“친구끼리는 진짜 모습도 보여줄 수 있는 거야. 이게 진짜 로즈 베일이야. 네가 경외하던 로즈 베일도 아니고, 잘난 동창들 사이에서 힘겹게 버티던 로즈 베일도 아니고, 진짜 로즈 베일.”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동창회 날에 너는 나를 경외하듯이 보더라고. 나는 그게 좋았던 거 같아. 그래서 한동안 너에게 진짜 내 모습을 못 보여줬어. 넌 내가 뭐든지 할 수 있을 거처럼 봐. 내가 완벽한 것처럼. 근데 진짜 로즈 베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못해.”


로즈의 말에 울음이 섞여든다.


“진짜 로즈 베일은 작은 집에 살아. 남편이 있고 두 아이가 있지. 진짜 로즈 베일의 큰아들은 아파. 병원에서 투병중이지. 근데 진짜 로즈 베일은 아무것도 못해줘. 나는 매일 미안하다는 말만 해. 그 애한테.”


“그런데 네 만화를 봤어. 스플릿맨. 좋더라. 아들도 보여줬어. 좋아하더라고. 자기도 나가보고 싶대. 그 만화 속의 환자처럼. 나는 그 애를 꼭 안아주고 번쩍 안고 나가서 도시를 보여줬어. 이곳저곳. 그랬더니.......”


로즈는 눈물을 닦느라 말을 멈춘다.


“내가 스플릿맨 같대. 아무것도 못해주는 내가 스플릿맨 같다고 하더라니까.”


나는 그녀를 위로할만한 말을 찾는다. 머리가 멈춘 것 같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수많은 대사를 쓰면서 살아왔는데 가장 필요한 순간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미안해 내가 너무 신세 한탄만 했지. 그래도 너는 이런 걸 이해할 거 같았어.”


로즈는 미소 짓는다. 나는 여전히 필요한 말을 찾아 헤맨다. 그녀의 고민을 한 번에 해결해주고 위로도 해주고 행복하게 해줄 말을. 친구에게 필요한 말을. 하지만 내 머리는 돌이 된 것 같다.


“괜찮아. 나도 알아. 네가 위로해주고 싶어 한다는 거. 근데 말이 안 떠오른다는 거 알아. 네 만화를 읽었으니까.”


나는 그제야 깨닫는다. 왜 내가 만화에, 스토리에 그렇게 집착했는지.


마침내 나는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위로를 찾는다. 말이 나오지 않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나는 손을 내민다. 그녀가 내 손을 맞잡고 흔든다.


그러다가 그녀는 나를 확 끌어당겨 안는다.


“친구끼리도 포옹 정도는 해.”


로즈는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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