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마마마마바 님의 서재입니다.

어느 히어로의 죽음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일반소설

마마마마바
작품등록일 :
2019.08.16 17:18
최근연재일 :
2019.09.16 18:05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3,238
추천수 :
192
글자수 :
142,121

작성
19.08.19 17:45
조회
145
추천
7
글자
9쪽

4

DUMMY

4.

아침부터 속이 좋지 않다. 나는 식사도 거르고 일하는 척하며 종이를 내려다본다.


콘티를 짤 때는 항상 종이에 연필로 그린다. 이게 나에게는 편하다.


종이에는 어제 구상해둔 핵맨의 줄거리가 그려져 있다. 어제 생각할 때는 괜찮아 보였는데 지금 보니 엉망이다. 흔해빠진데다가 재미도 없다.


지금은 오후 1시. 동창회까지 4시간. 초조해서 일하기는 글렀다.


나는 일어나 어제 산 옷을 입어본다. 사이즈가 커 엉덩이까지 덮는다. 거울을 보니 풋사과가 있다. 둥그런 녹색 풋사과.


당장 제리에게 전화를 걸어 이 멍청한 계획을 따르기로 한 게 실수였다고 소리치고 싶다. 그러나 참는다.


제리에게 불평해서 뭐가 달라지나. 애초에 동창회에 안가면 그만 아닌가? 가기 싫으면 안 가면 되는 거지. 나는 후드를 내던지고 침대에 대자로 눕는다.


시간은 자꾸 흘러간다. 오후 3시. 다시금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아난다.


다른 사람은 풋사과를 비웃더라도 로즈는 그러지 않을 거다. 무엇보다 로즈가 나를 초청하지 않았는가? 로즈는 나를 만나고 싶은 거다. 이 풋사과를.


오후 4시. 제리에게 문자가 온다.


‘나갈 준비 됐냐. 아니면 벌써 나가서 기다리고 있냐?’


‘나도 몰라.’


나는 그 말만 보낸다. 나도 한 시간 후에 내가 어디 있을지 모르겠다. 한입 베어 먹힌 풋사과가 돼서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을까?


오후 5시. 나는 에인드 펍 문 앞에 있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려고 하는데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동창회면 어떤 분위기지? 졸업파티 같은 건가? 아니면 다들 값비싼 시계를 차고 요즘 얼마나 일이 잘 풀리는지 자랑하는 자리인가?


“이봐요. 들어가던지 비켜줘요.”


말총머리 남자가 말한다. 마치 인생에 대한 격언처럼 들린다. 들어가던지 비켜라.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규칙 아니던가?


난 비킨다. 남자는 나를 쓱 훑어보고 들어간다. 그리고는 밖에 이상한 사람이 있더라고 자기 일행들과 떠들겠지.


생각해보니 이러다가 동창을 마주치는 게 더 어색할 거 같다. 나는 그 생각을 연료삼아 움직인다.


문이 열리고 퀴퀴한 나무와 술 냄새가 퍼져온다. 내부는 약한 조명 탓에 어둡고 벽에는 네온사인이 걸려 있다.


벽 근처에 여러 테이블을 붙여 만든 큰 자리가 있다. 거기서 동창회가 열리는 것 같다. 나는 다가가서 뭐라고 말할지 생각해본다.


여기가 예이츠 동창회가 열리는 자린가요? 예이츠 졸업생을 위한 자리가 여긴가요?


그런데 동창들이 못 알아보면 어쩌지. 나는 그때보다는 더 잘생겨졌을 텐데.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가까이 가자 로즈가 먼저 아는 체를 한다. 그녀는 나를 단번에 알아본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헷갈린다.


“헨리! 여기야. 와~ 네가 올 줄은 몰랐는데. 매년 초대장을 보냈는데 안 나왔잖아.”


로즈는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이다. 활기차고 밝고 분위기를 주도할 줄 알면서도 남을 배려할 줄도 안다.


갈색 머리를 틀어 올렸고 여전히 탄탄한 몸매다. 로즈 델리아가 4명 있어도 나보다 가벼울 것 같다.


테이블에는 40명 정도가 모인 것 같다. 반은 내가 누군지 모르는 눈치다. 반의반은 내가 누군지 생각해내려는 눈치다. 마침내 누군가 말한다.


“그 헨리?”


뒤에 무슨 말이 나올까? 돼지 헨리? 돼지 같이 처먹는 헨리? 냄새나는 헨리?


“그 코믹스 작가 한다는 헨리?”


내 상상보다 현실이 나은 건 처음 본다. 꽤 신선하다. 나는 테이블 끄트머리에 빈자리를 찾아 앉는다.


“이야 반갑다야.”


몇 명이 내게 악수를 청한다. 어리둥절한 기분이다.


나는 그들 중 몇을 알아보았는데 학창시절에 내가 가까이만 가도 기겁을 하던 이들이다.


로즈가 종업원을 불러 나에게도 술을 가져다달라고 한다.


종업원은 나를 뚫어져라 째려본다. 내 옷이 마음에 안 드나? 종업원이 맥주를 내 앞에 놓는다.


“나 네 만화 봤어.”


누군가가 말한다. 남자 목소리다.


“나도 봤지. 재밌더라. m사 만화던가?”


“아냐. 다른 데였어.”


“d사?”


“뭐라더라 아티워키? 아트록스?”


“아트웍스.”


내가 작은 목소리로 정정해준다.


“뭐?”


잘 안 들렸나보다 더 크게 말하자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이다.


“맞아 거기였어. 워터워키. 재밌더라고. 엄청 빠른 사람이 나오는 만화인데.”


남자는 동창들에게 내 만화를 설명한다. 나는 어쩐지 부끄럽다. 그가 설명하는 동안 나는 동창들의 눈을 피하고 로즈를 곁눈질한다.


로즈는 내 만화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다. 좋은 일일까? 남자는 과장을 섞어 이야기를 한다. 마침내 이야기가 끝나자 동창들은 한마디씩 한다.


“그래, 난 네가 잘 될 줄 알았지.”


“학교 다닐 때도 이야기를 그렇게 잘 만들었잖아.”


“야 나도 네 만화 좀 봐야겠는데. 재밌겠다.”


그들의 말보다는 내가 그린 만화가 사실에 더 가까울 거다.


한바탕 신입 환영회가 끝나자 좌중은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서 떠들기 시작한다. 근황, 투자, 날씨, 야구, 듣고 있자니 나보다 초라하게 사는 놈은 없는 것 같다.


정원 딸린 교외의 집과 번듯한 직장과 남편, 아내, 아이들, 그리고 번쩍이는 시계, 목걸이, 귀걸이들.


누군가 우리 테이블을 본다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귀금속에 파묻힌 풋사과. 풋사과는 그 좋아하는 음식들도 먹지 않고 위축되어 쭈그러들고 있다.


그게 영 불편해 보이는지 맞은편의 남자가 말을 건다.


“만화는 잘 되고 있냐?”


남자는 날 잘 안다는 듯이 말하는데 나는 남자가 누군지 모르겠다.


“잘 되지 안 될게 뭐 있겠어.”


나는 대충 대답한다.


“하긴 그렇겠지. 요즘 만화들이 되게 잘나가잖아.”


“그래! 극장 봐봐 다 코믹스 원작 영화들이잖아. m사에 d사에.”


옆 사람이 끼어든다.


“우리 회사는 그 정도는 아니라서.”


“그래도 그런 영화들 덕에 코믹스 보는 사람이 늘었잖아. 헨리도 엄청 쓸어 담겠다야. 부러워.”


맞은편 남자가 말한다.


나는 손사래를 친다.


나와 좀 떨어진 자리에 있는 남자가 우리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있다. 단정한 셔츠에 녹색 타이를 맨 남자다. 그는 취했는지 얼굴이 벌겋다.


“만화 나부랭이가 돈을 벌면 얼마나 벌겠어.”


셔츠 남자가 말한다.


“모르는 소리 마. 요즘 대세 아니냐. 코믹스가.”


맞은편 남자가 말한다. 나는 둘 사이에 끼어서 어색하게 번갈아 둘을 본다.


“돈을 벌려면 사업을 해야지. 아니면 전문직이 되던가.”


셔츠 남자가 맞는 말을 한다.


“틀린 말은 아닌데, 만화도 요즘 벌이가 좋다고.”


다른 사람이 나서서 건배하자고 하자 다툼이 끊긴다. 우리는 잔을 부딪고 마시고 내려놓는다.


그 뒤로는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 몇 번인가 로즈와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그녀는 별 다른 반응이 없다.


작은 손 인사나, 우리끼리의 비밀 신호나, 잠깐 나가자는 말 같은 것도 없다.


내가 그냥 앉아있는 사이에 동창회는 그렇게 끝이 난다.


동창들이 물밀듯이 밀려나간다. 로즈는 남아있다. 나를 곁눈질하는 게 나와 얘기하고 싶은 눈치다. 좋은 얘길까? 마침내 로즈가 다가온다.


“헨리. 오늘 와줘서 고마워.”


나는 용기를 낸다. 로즈의 그 말에 용기가 난다.


“로즈. 혹....... 혹시 졸업 파티 기억나?”


“기억나지. 파티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너랑 만났잖아.”


“그때 내가 한 말 기억나?”


“말? 그때 우린 인사하고 어색하게 서 있다가 헤어졌던 거 같은데.”


“내가 뭐라고 하지 않았어?”


“아닐걸. 네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가만히 있길래 이상하게 생각했었거든. 그래서 분명히 기억나.”


“아....... 그래.”


나는 돌아서서 가려고 한다. 그런데 로즈가 나를 부른다. 좋은 일일까?


“헨리! 번호 알려줘 모일 일 있으면 문자로 알려주게. 우편은 너무 구식이잖아.”


로즈는 자기 말에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는다. 그녀의 이가 빛난다. 손가락에 낀 반지도.


나는 반지를 외면하려 애쓰면서 로즈의 핸드폰에 내 번호를 찍어준다. 로즈는 고맙다고 말하고 전화를 건다.


내 핸드폰에 그녀의 번호가 찍힌다. 나는 고집스럽게 그녀를 로즈 델리아라고 저장한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헤어진다. 나는 다시 우울한 내 빌라로 돌아간다.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을까? 놀랍게도 그럴 수 있다. 인생이란 놀라움의 연속이다. 특히 나쁜 쪽으로는 더욱더.


빌라에 도착하자 입구에 선 남자가 보인다. 멀끔한 얼굴, 정장차림, 오늘은 행거치프는 없다. 제레미 댄스, 그가 내 빌라에 와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어느 히어로의 죽음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2 34(완) +10 19.09.16 123 11 10쪽
31 33 19.09.15 66 4 9쪽
30 32 +4 19.09.14 57 7 9쪽
29 31 19.09.13 49 5 11쪽
28 30 +1 19.09.12 61 6 10쪽
27 29 19.09.11 75 5 9쪽
26 28 19.09.10 90 4 9쪽
25 26, 27 19.09.09 55 6 13쪽
24 25 +2 19.09.08 75 7 9쪽
23 24 19.09.07 67 4 10쪽
22 23 19.09.06 59 4 10쪽
21 22 19.09.05 64 4 9쪽
20 21 19.09.04 65 6 9쪽
19 20 19.09.03 71 5 12쪽
18 19 +3 19.09.02 83 7 9쪽
17 18 +2 19.09.01 95 5 8쪽
16 17 19.08.31 81 6 9쪽
15 16 19.08.30 74 6 11쪽
14 15 +2 19.08.29 85 7 9쪽
13 14 19.08.28 85 5 9쪽
12 13 +1 19.08.27 92 6 8쪽
11 12 +2 19.08.26 94 4 10쪽
10 11 19.08.25 128 7 9쪽
9 10 19.08.24 94 5 10쪽
8 9 +2 19.08.23 104 6 10쪽
7 8 19.08.22 104 6 10쪽
6 6,7 19.08.21 173 6 15쪽
5 5 +2 19.08.20 130 5 12쪽
» 4 +2 19.08.19 146 7 9쪽
3 3 +2 19.08.18 160 8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