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주간 이윤후

민간군사기업 블랙 레벨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퓨전

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3.04.16 12:56
최근연재일 :
2014.02.18 12:00
연재수 :
128 회
조회수 :
838,549
추천수 :
16,202
글자수 :
790,195

작성
13.05.18 13:30
조회
12,678
추천
154
글자
18쪽

3장 [리엔] -05-

DUMMY

“컴퓨터라고요?”


태민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관심을 보이자 사장이 손으로 상자를 밀어주었다. 바로 앞에 상자를 가져온 태민은 귀걸이를 만져보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그래서 영어로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손가락으로 귀걸이를 가리키고 손가락을 비비는 걸로 대신했다. 사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스펀지 위에 올려진 보라색 귀걸이는 두 개의 부품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 개는 본체였고 다른 하나는 뚜껑 같았다. 맨눈으로는 아무리 봐도 싸구려 플라스틱 같았지 컴퓨터처럼 보이지 않았다.


“누나, 이게 정말 컴퓨터일까요?”


태민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깜짝 놀랐다. 예원이 한 손에 송곳같이 생긴 물건을 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뭐예요. 그건?”

“귀 뚫는 도구.”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가 소름 끼쳤다.


“아직 이거 단다고 하지 않았다고요!”

“오호, 그럼 사장님이 직접 주는 상을 그냥 버리겠다는 거야?”

“얘기가 왜 그렇게 되죠?”


바로 그때 사장이 손짓으로 제지하자 예원이 일부러 입에서 칫 소리를 내며 물러갔다. 위험에서 벗어난 태민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사장이 손에서 귀걸이를 가져가더니 본체와 뚜껑을 양손에 쥐고 태민의 왼쪽 귀에 가져갔다. 그러자 찰칵 소리와 함께 귀걸이가 귓볼에 붙었다.


태민은 갑자기 머리가 빙빙 도는 것을 느꼈다. 눈앞도 흐려졌다. 몸에 힘이 조금씩 사라지더니 이내 눈꺼풀마저 스르르 감겼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감촉도 없었다. 물에 가라앉듯이 몸이 천천히 녹아 내렸다. 다음 순간, 태민은 숨을 몰아 쉬면서 눈을 떴다.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잠깐 동안 의자에 몸을 기댔던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예원은 걱정보다는 사장에게 귀 뚫는 도구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아니. 귀걸이면 당연히 귀를 뚫어야지. 저런 걸 가져오는 게 어디 있어?”

“난 미리 그런 도구를 챙겨서 온 네가 무섭다.”


사장은 예원의 도끼눈을 피하면서 고개를 태민에게 돌렸다. 정신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그는 아까보다 훨씬 밝은 미소를 지었다.


“어때? 기분은?”

“기분은 어때?”


뒤에서 예원이 사장의 말을 통역했다. 미묘한 차이가 있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말이었다. 태민은 눈을 깜박이면서 사장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말이 들리네?’

“태민. 지금 내 말 알아들을 수 있어?”


태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통역하려던 예원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고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사장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좋아. 그럼 확인도 할 겸 문제를 하나 내볼게. 너희 나라 수도는 어디야?”

“서울이요.”

“맞아?”


사장이 고개를 돌려 묻자, 예원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얼굴에 드러내며 말했다.


“넌 한국에 지부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나라 수도도 몰라?”

“우리 회사 지부가 한둘이라야지. 답이나 가르쳐 줘. 맞아. 틀려?”

“맞아.”

“맞다고 하네. 제대로 작동하나 보다.”


예원은 들고 있던 귀 뚫는 도구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화가 난 듯 뒤로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태민은 달리 잘못한 것도 없는데 불가항력적으로 그녀의 눈치를 보며 사장에게 물었다.


“이 귀걸이는 실시간 번역기인가요?”


바로 대답을 해줄 것처럼 웃던 사장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예원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그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예원이 머리 위로 반짝이는 전구를 띄우며 말했다.


“저거 듣기는 되도 말하기는 안 되는구나?”


사장은 순순히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사람의 뇌까지 만질 수는 없잖아.”

“그 말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얘기야?”

“흠. 상대방의 동의만 있으면야 불가능하지는…. 아니, 이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 그래. 태민이는 귀걸이가 실시간 번역기인지 물어봤어.”


드디어 답을 받아낸 사장은 시선을 태민에게 되돌렸다.


“그건 단순한 번역기가 아니야. 내가 아까 컴퓨터라고 했지만 그건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 말이었고, 사실은 뭐랄까. 고성능 인공지능이라 해야 하나?”

“…AI?”


인공지능이라 말하려다 말은 번역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급히 영어 단어로 바꿨다. 그 판단이 적절했다는 건 사장의 얼굴을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래. 영화 같은 데서 자주 보지? 스스로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며, 진화해 나가는 프로그램. 우리는 벌써 오래 전에 그것과 비슷한 것을 만들어왔어. 기술적인 한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라졌지. 하지만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어. 인공지능을 작동시키는 에너지원이었지.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가 만든 인공지능은 그 구조가 깨끗하지 않아. A와 B가 얽히고 B가 C가 얽혀있는데 C가 A에 간섭하는 등 아주 난장판이지. 결국 구현은 성공했지만 인공지능은 작동을 시작하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세상의 모든 정보를 빨아들였어. 인공지능이 작동한 시간은 단 1.028초. 그 시간이 지나자마자 연구소 전체가 정전이 되어버렸지.”


태민은 사장의 설명을 아주 감동 깊게 듣고 있었다. 사장이 하는 말을 이해해서도 아니고, 그들의 업적이 대단하다고 느껴서도 아니었다. 단지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데서 온 감동이었다. 사장은 그 감동을 오해하고 말을 계속했다.


“레가니움이 발견되기 전까진 인공지능 계획은 완전히 중지된 상태였어. 사실 발견되고 난 이후에도 인공지능보다는 다른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장비들이 우선시 됐지. 예를 들면 함공모함이라던가, 열차포, 한창 개발 중인 레이저 건도 있었고. 만약 재하가 아니었더라면 인공지능 계획은 지금도 어디 구석에 처박혀 있었을 거야.”

“한재하 말인가요?” “한재하 말이야?”


예원이 심심했는지 거의 통역사 수준으로 동시 통역을 해줬다.


“그래. 한재하. 그 천재가 자신의 몸에 흐르고 있는 레가니움으로 인공지능을 실행시킬 수 있도록 계획하고 설계했지.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귀걸이도 재하가 설계한 거야.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거지.”


태민은 왼쪽 귓볼에 낀 귀걸이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매끄러운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사장이 계속 말했다.


“하지만 재하는 반년 전에 갑자기 모습을 감췄어.”

“네? 어째서요?” “왜?”

“우리도 몰라. 아무 말도 없이 홀연히 사라졌어. 하지만 천재는 일반 사람들이 따라 할 수 없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잖아? 나는 언젠가 그가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어.”

“사원 사랑이 대단한 사장님이시네.” 예원은 심심함이 극에 달했는지 의자에 앉은 채 태민에게 다가와 귀걸이가 달린 귀를 잡아당겼다. “결국 프로그램이니까 복사하면 되잖아.”

“미안하지만 그게 안 돼. 아까도 말했듯이 이 인공지능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거고 앞으로도 하나일 거야.”

“원리가 뭐길래 무조건 하나라는 거야?”

“그건 기업 비밀.”

“나 한국지부 관리자거든요?”

“그래도 안 되는 게 있는 거야. 그나저나 태민. 혹시 인공지능의 목소리가 들리진 않나?”


태민은 귀를 기울여 봤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사장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직 네 안의 자원을 탐색하고 있는 건가 보다. 때가 되면 인공지능이 스스로 너에게 말을 걸 거야. 유용하게 쓰일 거야. 내가 보장하지.”

“그런데 말을 들어보니 굉장히 중요한 물건인 것 같은데. 정말 제가 받아도 되나요?”


이번엔 예원이 동시에 통역하지 않았다. 대신 손으로 턱을 만지면서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사장에게 한 방 먹이면서도 태민의 의사를 전달할 문장을 떠올리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실패했는지 결국에는 입을 삐죽 내밀고 그대로 말을 전했다. 사장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표정으로 태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 물건이 중요하긴 하지만 태민, 너는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야. 그걸 기억해.”

“아, 감사, 땡큐….”


사장은 소리 없이 웃더니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었다.


“미리 말하는데 이번 건 선물이 아니야.”


그가 테이블 위로 올린 건 영롱한 푸른빛을 품고 있는 레가니움 원석이었다. 다만 김건진이 실험 때 보여준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원석은 사람 주먹만 한 크기였다. 사장이 유리 상자 안에 들어있는 원석을 보며 말했다.


“이게 현재 지구 상에 존재하는 레가니움 원석 중 가장 커다란 거야. 태민, 네가 어렸을 적 살던 마을에서 발굴된 거지.”


태민은 그 말에 한동안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다시 떠올라 속이 불편했지만 겉으로는 괜찮은 척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태민이 불편해하고 있는 걸 눈치챈 예원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화가 난 이유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장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나는 태민이 이 원석을 간단하게 조사해줬으면 해.”

“얘는 한재하씨 같은 연구원이 아니야. 몇 달 전까지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는데 뭘 조사해?”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말이야. 연구원들처럼 자세한 조사를 원하는 게 아니라. 이 원석을 보고, 만지고 해서 느낀 것만 가르쳐줘. 어때. 이 정도면 괜찮잖아?”


큰 기대를 품고 있는 사장의 눈은 도저히 거절의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실 지금 귀에 매달고 있는 물건만으로도 이미 꽤 큰 빚을 진 기분이었다. 태민은 힘겹게 웃으며 잠시 레가니움 원석을 들여다봤다. 기분 탓이었을까. 원석은 엄밀히 따지면 단순한 돌덩이에 불과했지만 마치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를 본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신기하게도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하겠어요.”


생각이 오래갈 거라 생각하고 있던 예원은 한 박자 늦어 “하겠대” 하고 통역했다. 사장은 눈을 반달 모양으로 만들며 유리 상자의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지문, 안구, 목소리 인식의 과정이 끝나자 뚜껑이 완전히 열렸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 상자에는 너무 과분한 보안 절차였다.


사장은 뚜껑을 벗겨 낸 상자를 태민에게 밀었다.


“좋아. 마음껏 조사해봐.”


태민은 기대와 공포, 호기심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면서 원석에 두 손을 가져갔다. 손가락 끝이 원석에 닿기 직전,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꿈틀거렸다. 그것은 지금 당장 멈추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손은 무시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원석에 손끝이 닿았다.




※※※




사람 키만큼 쌓여있는 쓰레기와 냄새 나는 물이 고여 만들어진 웅덩이가 있는 어둡고 더러운 골목이 보였다. 바로 위에서 기차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불안하게 흔들리는 철로를 밟으며 지나갔다. 태민은 고개를 돌리다가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립지만 괴로운 장소가 나타났다.


태민이 서 있는 곳은 어렸을 적, 친구들과 함께 놀았던 산골 마을의 학교였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었다. 학교를 내려다보던 뒷산 대신 동화에나 나올 법한 푸른 동산이 주변에 펼쳐져 있었다. 멀리서는 파도가 넘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던 그때, 운동장 한가운데서 홀로 놀고 있는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그 뒷모습은 분명 어렸을 적에 남몰래 좋아했던 그 여자아이였다.




※※※




“김태민! 정신 차려!”


다시 눈을 뜨자 첫사랑의 뒷모습 대신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손바닥이 보였다. 얼굴이 옆으로 꺾였다. 너무 아프면 아픔 조차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탁이니까 빨리 일어나라고!”

“누, 누나! 저 깨어났… 컥!”

“아, 이런.”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뺨을 한 대 더 날린 예원은 이목구비를 최대한 활용해 미안함을 표시하며 몸 위에서 내려왔다. 태민은 방금 전까지 예원이 올라가 있던 배가 자유를 찾아 부풀어 오르는 걸 느끼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동양인 간호사와 허락도 없이 청진기를 가슴에 갖다 대서 깜짝 놀라게 한 젊은 백인 의사, 그리고 지극히 평범하게 진찰실이라 말해주는 도구들과 벽장식이 보였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태민은 벽에 기대고 서 있던 예원에게 물었다.


“사장님은요?”

“사장? 패트릭 그 자식은 네가 기절하고 여기로 실려온 뒤에 곧장 돌아갔어. 내일 또 중요한 회의가 있다나.”

“그래요. 어쩔 수 없죠.”

“어쩔 수 없긴. 너 20분이나 기절해 있었어. 알아?”

“20분이요?”


태민은 자신이 그렇게 오랫동안 기절해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더러운 골목과 옛날 학교를 봤던 시간은 모두 합해봐야 1분이 되지 않았다.


‘왜 그런 것들을 본 걸까.’


태민이 두 가지 장소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분이 가라앉지 않아 씩씩대는 예원에게 의사가 말했다.


“별다른 이상은 없어.”

“그거 정말이야? 얘 그냥 픽하고 기절한 게 아니라 갑자기 벽으로 튕겨 나갔다고. 그것도 엄청 세게.”


그제서야 태민은 자기가 어떤 방식으로 기절했고, 왜 진찰실로 실려왔는지 알게 됐다. 의사는 말을 해줘도 불안해하는 예원을 진정시킬 요량으로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했다.


“괜찮다니까. 사실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강력한 싸대기를 날렸지.”


그 말에 뒤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간호사가 쿡하고 웃었다. 예원은 얼굴을 붉히며 의사를 노려보다가 문을 열고 진찰실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밖에 있을 테니까 옷 챙겨 입고 나와.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어.”


예원이 문을 쾅 닫고 나가자 의사가 웃으며 말했다.


“이해해줘. 네가 기절해 있는 동안 괜찮다 괜찮다 말해도 계속 걱정했거든.”


반사적으로 ‘예’라고 대답하려던 태민은 의사가 영어로 말한 걸 눈치채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귀걸이는 여전히 왼쪽 귀에 걸려있었다.


옷을 챙겨 입고 진찰실을 나오자 손에 묻은 물을 털어내며 화장실에서 나오는 예원이 보였다. 그녀는 손뿐만 아니라 얼굴에도 물기가 가득했는데 가볍게 세수를 한 모양새였다.


“괜찮은 거 확실하지?”

“예. 어지러운 것도 없고, 어디 아픈데도 없어요.”

“좋아. 그럼 바로 한국으로 돌아간다.”

“예? 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내 생각에는 아마도 아닐 걸.”


텅 빈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예원의 걸음은 더 이상의 변수는 사양하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단호했다. 태민은 그 점이 불안했지만 아무래도 확실한 대답을 들어야 속이 뚫릴 것 같았다.


“설마 제가 24시간 20분 동안 기절한 건 아니죠?”


그러자 예원이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도착하고, 오늘 돌아가는 거야. 미리 알려주지 않아서 미안.”


불편했다. 항상 살갑게 대해줬던 사람이 갑자기 싸늘하게 변하는 것만큼 불편한 것도 없었다. 태민은 예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장이 하라는 대로 원석을 만지지만 않았다면, 만지기 직전 머릿속에서 울렸던 목소리를 따랐다면 기절하는 일도 예원이 걱정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가 감정을 조절할 수는 없었다. 이해와는 별개로, 태민은 예원이 자신은 차갑게 대하는 것에 화가 났다.


예원도 자신의 감정 때문에 사이가 나빠지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를 하기로 했다. 배려란, 자기가 왜 화가 났는지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다음부터는 누군가 무엇을 하라고 하면 잘 생각해보고 받아들여.”

“누나가 시키는 것도요?”


가슴을 치는 말이었지만 동시에 웃을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래. 나라도.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네 건강이니까.”


두 사람은 복도를 막고 있는 철문 앞에 섰다. 여전히 느리게 열리는 철문 사이로 홍콩 지부로 내려올 때 통과했던 에스컬레이터 복도와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비행기로 이곳 입구까지 같이 이동했던 두 명의 백인 남자였다.


“늦었어. 고양아.”


스티븐이라 불렸던 남자의 말이었다. 태민은 순간 번역기가 고장 난 건 아닌지 걱정했다. 하지만 이들이 예원을 ‘캣’이라 불렀던 것을 기억해내고 단순한 번역 오류란 걸 알았다.

예원은 에스컬레이터 옆에 서 있는 대원들에서 스티븐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미안. 늦은 만큼 빨리 가자.”


풀어낸다고는 해도 여전히 쌀쌀한 말투였다. 스티븐은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는 예원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고양이가 화가 꽤 많이 났네.”


그 말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던 대머리 백인이 대답했다.


“우리 귀중품께서 사장 때문에 기절했다잖아. 고양이 입장에서는 화낼 만도 하지.”

“아무튼 사장님 때문에 항상 고생하는구나. 안 그래. 긱?”


긱이라 불린 대머리는 이를 보이며 웃더니 태민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며 에스컬레이터로 걸어갔다. 두 사람에게 자신이 귀중품이라 불린다는 것을 안 태민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장난기가 섞인 말이 아니었다면 한국어든 되지도 않는 영어를 쓰던 간에 어떻게든 항의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긱이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주면서 말했다.


“가자. 우리 상사님 화내신다.”


단순하고 간단한 행동이었지만 이 때문에 두 사람에 대한 적대심은 꽤 줄어들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9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민간군사기업 블랙 레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8 7장 [비록 신을 믿진 않지만] -06- +5 13.07.11 6,014 136 10쪽
37 7장 [비록 신을 믿진 않지만] -05- +6 13.07.09 5,834 111 9쪽
36 7장 [비록 신을 믿진 않지만] -04- +10 13.07.06 6,471 105 11쪽
35 7장 [비록 신을 믿진 않지만] -03- +18 13.07.04 6,914 116 11쪽
34 7장 [비록 신을 믿진 않지만] -02- +16 13.07.02 7,492 121 13쪽
33 7장 [비록 신을 믿진 않지만] -01- +12 13.06.29 8,688 121 13쪽
32 외전 [고고학의 종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나] +17 13.06.27 8,476 112 11쪽
31 6장 [결심] -05- +20 13.06.25 9,609 133 12쪽
30 6장 [결심] -04- +12 13.06.22 9,138 135 17쪽
29 6장 [결심] -03- +7 13.06.20 9,603 123 13쪽
28 6장 [결심] -02- +12 13.06.18 10,008 138 12쪽
27 6장 [결심] -01- +10 13.06.15 10,632 136 12쪽
26 5장 [대화의 밤] -05- +11 13.06.13 11,299 139 10쪽
25 5장 [대화의 밤] -04- +17 13.06.11 12,375 161 10쪽
24 5장 [대화의 밤] -03- +8 13.06.08 12,024 132 13쪽
23 5장 [대화의 밤] -02- +8 13.06.06 10,240 132 11쪽
22 5장 [대화의 밤] -01- +7 13.06.04 30,863 142 12쪽
21 4장 [불운을 넘어서] -05- +10 13.06.01 14,838 159 9쪽
20 4장 [불운을 넘어서] -04- +7 13.05.30 10,145 132 11쪽
19 4장 [불운을 넘어서] -03- +8 13.05.28 10,471 139 11쪽
18 4장 [불운을 넘어서] -02- +9 13.05.25 10,485 136 12쪽
17 4장 [불운을 넘어서] -01- +8 13.05.23 10,881 132 11쪽
16 3장 [리엔] -06- +7 13.05.21 11,042 139 14쪽
» 3장 [리엔] -05- +9 13.05.18 12,679 154 18쪽
14 3장 [리엔] -04- +6 13.05.16 12,037 129 14쪽
13 3장 [리엔] -03- +8 13.05.14 11,940 136 12쪽
12 3장 [리엔] -02- +8 13.05.11 12,053 143 12쪽
11 3장 [리엔] -01- +7 13.05.09 12,909 155 10쪽
10 2장 [위험은 언제나 가까이에] -05- +14 13.05.07 13,313 172 12쪽
9 2장 [위험은 언제나 가까이에] -04- +6 13.05.04 14,140 160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