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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석 님의 서재입니다.

신을 죽이는 화신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범스톤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2
최근연재일 :
2023.08.23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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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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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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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88,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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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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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42화 - 결의서

DUMMY

“섭정······!”


좌중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냉철하고 계산이 빠른 사람들은 그것이 국왕 교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파몬 로페테기 전하의 왕관을 보존하면서 병증 치료가 이뤄질 때까지만 섭정에게 그 권위를 이양한다. 어떤가? 이 정도면 정통성을 충분히 존중하면서 라페니슈 왕국의 왕정을 올바르게 끌고 가기에 충분한 방법이 아니겠나?”


콜린 백작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튀랑 변경백의 의견까지 들어 결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번엔 샹마르소 공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페르난데스 공작께서 말씀하셨듯이 이곳에 모인 귀족 대신들 전원의 결의서를 제출하겠다는 것이라오. 소수의 왕정 회의가 아닌 여기 모인 귀족 대신들 전원 말이오. 결의서에 찬반의 성명을 모두 기록한다면 전하께서도 여론의 향방이 어디로 기울었는지 아시기엔 충분할 것이고 결국 최종 결정은 전하께서 내리시는 것이니 그 왕명에 우리는 따르면 되는 것이라오.”


세인도르 궁정백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유기명의 찬반 성명.’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었다.


과연 삼공작의 권세에 반하는 자들이 누가 있는지 그 실체를 드러내도록 하는 것.


최종적으로 반대표를 던질 거라면 그 후환도 감당해야 할 거라고 공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콜린 백작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결의서 진행 또한 튀랑 변경백의 의견을······.”


끼이익.


그때 만찬장의 문이 열렸다.


콜린 백작이 들어올 사람이 있다면 튀랑 변경백이 아닐까 하여 기대감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것은 안타깝게도 어긋나버렸다.


호르문드 대주교가 들어선 것이다.


“이런, 이런······.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이옵니까?”


그가 말하면서 걸어들어오는데 그의 뒤를 따라 교구의 팔라딘들과 사백응기사단 기사들이 연이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거의 삼십여 명에 이르러 주위를 둘러싸자 만찬장의 공기가 사뭇 위험스럽게 느껴졌다.


호르문드 대주교는 샹마르소 공작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그의 옆에 섰다. 그리고 좌중을 돌아보며 입을 열엇다.


“먼저 오늘의 일에 대해 사과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미사를 진행하면서 로페테기 전하께서 그러한 모습을 보이신 것은 응당 제 책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이난께서 더는 라페니슈 왕국의 왕을 인정치 않는다는 걸 어찌 그리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괜찮아지시길 기다리면서 할 수 있는 걸 다 했으나······.”


호르문드 대주교가 잠깐 입을 닫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작은 한숨과 함께 다시 말했다.


“후우. 그래서 본 대주교는 오늘의 역사적인 선택으로 라페니슈 왕국의 역사가 새롭게 쓰일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만장일치로 선택할 새로운 왕이 탄생하는 날엔 전하를 온전히 보필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대주교직에서 사임할 것을 이 자리에서 말씀드립니다.”


호르문드 대주교가 말을 끝나자 샹마르소가 품에서 두루마리를 들어 펼쳤다. 그리고 두 공작가가 앉은 테이블로 가서 위에 올려놓자 가까이 있던 하인이 다가와 깃펜과 잉크를 놓았다.


“그럼 모두 이곳에 이름과 서명을 남겨주길 바라오. 모두 그렇게 해주시면 두 분의 우려를 담아 섭정 체제 제안의 내용으로 작성하여 로페테기 국왕 전하께 기안하겠소이다. 부디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해주시길 다시 한번 부탁드리겠소.”


세인도르 원장은 천천히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끝났군. 이제 돌이킬 수 없어······.’


콜린 백작도 체념한 얼굴로 털썩 의자에 앉았다.


섭정 통치.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라시드 이왕자의 암살을 기도할 것이고 성공한다면 완전히 망실된 왕위 승계권은 결국 카를로스 로페테기 공작 가문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적법한 절차’일 것이니 로페테기 왕가라는 상징을 유지하면서 왕국의 통치권을 차지하는 것이다.


귀족들이 한 사람씩 일어나 공작가 테이블로 가서 삼공작과 대주교에게 예의를 갖추고 서명하는 발걸음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우당탕.


세인도르 원장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콜린 백작에게 향했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의자가 뒤로 자빠졌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이 다가와 제지하려는데 샹마르소 공작이 손을 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콜린 백작이 씩씩대며 노구를 성큼성큼 이끌었다. 그리고 공작가 테이블로 가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반대 칸도 나누지 않으셨군.”


샹마르소 공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단에 반대를 표기하고 서명하시면 될 것이오.”


콜린 백작은 상단에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그러자 샹마르소 공작이 감탄하면서 말했다.


“오, 찬성하시는 것입니까? 제 설득에 응해주셨군요.”


콜린 백작이 ‘자파 콜린 백작’이라는 이름과 서명을 모두 작성한 후, 샹마르소 공작의 얼굴을 한번 흘겨보았다.


찍.


“음!?”


콜린 백작이 자신의 이름과 서명을 가로지르도록 한 줄을 찍 그어버리자 삼공작과 호르문드 대주교 모두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반대요.”


콜린 백작이 퉁명스럽게 말을 던지곤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만찬장에서 나가려는데 찰스 도멘과 몬토리오 엘티라우스 두 팔라딘이 손을 뻗어 콜린 백작을 붙잡았다.


“썩 비키지 못하겠느냐?”


콜린 백작이 호통을 쳤다.


몬토리오 팔라딘이 검을 반쯤 뽑는데 뒤에서 호르문드 대주교가 외쳤다.


“보내드리지 않고 뭣 하느냐? 나를 호위하라고 데려온 것이지 감히 귀족 대신들을 겁박하라고 너희를 데려온 줄 아느냐?”


“죄송합니다, 대주교님. 용서하십시오, 얼(Earl) 콜린.”


“흥!”


콜린 백작이 콧방귀를 뀌며 만찬장을 빠져나갔다.


샹마르소 공작이 결의서 서명들을 내려다보았다.


콜린 백작 이후로도 서명은 계속 채워졌지만, 찬성 서명 한가운데에 가로줄을 그어버린 반대 서명이 떡 하니 보이는 게 눈에 매우 거슬렸다.


호르문드 대주교도 그걸 내려다보면서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콜린 백작은 미학을 모르는 듯합니다.”


샹마르소 공작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글과 미학보단 바다가 더 어울리는 분이지요.”





* * * *





진 무라트가 초소에 머문 것은 하룻밤이었다.


그는 바로 그곳을 떠나서 더 동쪽을 바라보며 언덕을 내려갔다. 그리고 대로를 따라 걷다가 만난 행상인으로부터 책을 한 권 구매했다.


‘앵켈 제도 견문록’이란 이름의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었다.


진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던 차에 이 책을 조금 펼쳐 읽어보고선 앵켈 제도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앵켈 제도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이란 그 섬의 숫자만큼 다채롭다. ······건너가는데 감수해야 할 위험만큼이나 앵켈 제도는 매력적인 곳이다.”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었다.


“그래, 남자는 바다를 건너야지.”


진이 중얼거리면서 책장을 스륵스륵 넘겼다.


그렇게 걸어가니 속도가 날 리가 없고 내용도 읽힐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진은 꾹 참고 계속해서 걸었고 또 읽었다.


그러다 저녁이 되어서 도착한 마을 여관에 방을 얻어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여관의 1층 카운터에 앉아 스프를 먹고 있는데 뒤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그거 알아? 왕도에서 큰일이 벌어졌다네.”


“무슨 큰일? 전하께서 서거라도 하셨나?”


“비슷하지.”


“비슷해?”


“루이스 왕태자가 에인테스 후작 저택에서 요절한 건 알고 있지? 그래. 그런데 왕태자 장례식에서 로페테기 국왕이 갑자기 광증을 드러낸 모양이야. 괴성을 지르면서 사제를 칼로 베고 자기 자식 관을 쓰러뜨려 시신이 바닥을 뒹굴게 하고 말이야. 엿 된 거지.”


“왕이 미친 거 아냐?”


“그래, 벌써 미친 왕이라고 왕도에 소문이 자자해졌는데 그 때문에 귀족들이 국왕이 더는 왕정회의를 끌고 갈 수 없다고 왕관을 내려놓거나 섭정을 세우라고 결의서를 써서 올렸나 봐.”


“와, 씨팔. 내가 왕이었으면 그 자리에서 다 목을 쳤을 거다.”


“기사단이 다 삼공작 수중에 떨어졌는데 무슨 수로?”


“왜? 트라웃 보트먼 백응기사단장은 몰라도 존 스펜서 사백응기사단 단장은 충신이라서 국왕 편일 텐데?”


“장례식이 있던 다음 날 아침에 해임됐다네.”


“뭐, 해임? 그럼 후임은?”


“보로미르 샹마르소 소공작.”


“씨팔. 지들끼리 다 해 처먹는군.”


딸깍.


진이 스푼을 접시에 내려놓았다.


‘보로미르 샹마르소 소공작······?’


진의 머릿속에 두 가지 기억이 연이어 스쳤다.


기사단 병영 앞에서 보로미르 샹마르소 소공작과 마주쳤던 기억. 그리고 로페테기 국왕을 대면한 응접실에서 벌어졌던 상황까지.


‘스펜서 단장과 보트먼 단장 모두 내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일조한 자들······. 하지만, 스펜서 단장을 해임했다는 건 삼공작이 그를 신임하지 않는다는 건가? 흐음, 그렇겠지. 내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 땐 왕명이 있기도 했으니······, 반대로 이번 일에 대해선 에인테스 후작이 왕을 방문한 자리에 같이 있었으니 기사단에 대한 실권을 빼앗은 거야.’


진은 삼공작이 생각보다 매우 정직하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야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솔직함 뒤에 감춰진 냉혹함이 소름 끼칠 정도였다.


‘······신경 쓰지 말자······.’


진은 동화 한 닢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관을 나와 마을을 벗어났다.


동쪽으로 계속해서 걷는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앵켈 제도에 간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것이 진짜 본심인지는 계속 의뭉스러움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걷다가 문득 정수리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고선 걸음을 멈추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작은 강을 건너는 다리 한가운데에 있었는데 정확히 어디까지 왔는지는 몰랐다.


‘제길, 내가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건지······.’


진은 품속을 뒤적거려 어제 샀던 앵켈 제도 견문록을 들었다.


‘진, 네가 지금 가야 할 곳이 어디냐?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조차 몰라 그저 뭉뚱그려 무지개색이라고 둘러대는 꼴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도 그가 대답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답을 내야 한다.


그때 진의 머릿속에 소피아 에인테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행동을 재촉하는 어떤 명분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으나 딱 한 번 떠올린 그녀의 얼굴이 그의 몸을 억지로 돌려놓고 있었다.


‘······돌아가자. 소피아를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것까지만······.’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만약 그녀와 에인테스 후작 가문이 일찍 왕도를 떠난 상황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앵켈 제도로 떠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왕도에 있어서 위험한 순간에 이를 수 있다면 적어도 그들만큼은 지켜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듯 달려서 떠났던 마을에 도착했다.


하룻밤 묵었던 여관이 시야에 들어왔는데 그 맞은편의 마구간에서 병사들이 말 한 필을 끌고 나오는 게 보였다.


마을 경비대장을 위해 대신 들어가 말을 꺼내온 것이었다.


진이 쏜살같이 달려가 경비대장이 말고삐를 쥐기 전에 몸을 날려 안장에 올라탔다.


“엇!? 이 말 도둑 새끼가, 죽으려고 작정했나? 썩 내려오지 못할까!”


경비대장이 롱소드를 뽑아 드는 순간, 진이 브로드 소드를 꺼내어 오러 블레이드를 일으켰다.


“헉!”


“미안하지만, 좀 빌려 가겠소. 이랴!”


진이 말을 박차고 뛰쳐나가 금방 마을을 떠나버리자 경비대장과 병사 둘이 어안이 벙벙해져서 진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누, 누구지? 설마 튀랑 변경백인가?”


“시팔, 눈깔 삐었나? 존나 젊었던 거 안 보여?”


“······근데 아침에 카운터에서 계집애처럼 스프 홀짝이던 인간 맞지?”


병사들이 당황하여 중얼거리는데 경비대장은 여전히 당황한 기색을 벗지 못하고 석상처럼 그 자리에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움찔거리는 그의 입술은 연신 똑같은 말을 조용히 읊조리고 있었다.


‘봤어, 오러 블레이드야······. 개 쩌네, 시발······.’


작가의말

*7/6 : 일부 단락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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