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엘사르카 님의 서재입니다.

Worm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SF

완결

엘사르카
작품등록일 :
2020.05.08 22:18
최근연재일 :
2022.05.02 23:55
연재수 :
304 회
조회수 :
205,240
추천수 :
11,290
글자수 :
4,963,018

작성
20.10.20 10:17
조회
391
추천
30
글자
34쪽

'재앙' 19.2

DUMMY

일단은 멈추고 싶었다. 그루의 상태를 살펴야 했고 내 상처도 돌봐야 했다. 하지만 히어로들이 평소처럼 지독하게 잘못된 결론을 내려서 내게 피해가 돌아오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 걸려 있는 건 살인 혐의였다.


나는 두 번 시도한 끝에 일어설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최대한 당당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지만, 지금 내 모습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그루가 어둠으로 자신을 가리듯이 벌레들을 망토처럼 뒤집어썼다.


내가 다가가자 미스 밀리샤와 웰드는 말을 멈췄다.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돌렸지만, 나를 막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피하는 사람이 많았다. 길을 비켜준 건 아니었지만, 적당한 구실을 대고 자리를 옮기거나 눈을 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순간이었지만 학교에 온 듯한 기분도 들었다. 물론 이번에는 주의가 끌린 사람들이 내게 다가와 부딪히는 게 아니라 피하고 있었다. 종소리는 없었고, 조용한 가운데 바람 소리와 차 소리, 그리고 내 주위의 벌레들이 내는 윙윙대는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브록턴 베이 밖까지 내 평판이 퍼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내 모습이 그 정도로 꺼림칙한 모습이라서 그런 걸까?


“스키터.” 웰드가 미스 밀리샤와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를 보고 말했다.


“구해줘서 고마워.” 내가 말했다.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히어로다웠어. 빚을 졌네.”


“임프가 와서 태틀테일의 말을 전했어. 상당한 설득력이었지. 몸은 괜찮나?”


나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침묵이 유용한 도구라는 사실을 배우고 있었다. 침묵만으로도 많은 의미를 전할 수 있었고 상황이 불리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말을 많이 할수록 피로와 부상을 더 많이 드러내게 될 것 같았다.


“임프가 괴멸적이라는 표현을 썼었어.” 웰드가 말했다. “자제력이 하나도 없는 클론이 네 능력을 휘두르고 다니게 됐을 때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말이야. 그루의 클론 때문에 생길 문제들은 또 어떻고. 네 클론이 날뛰면 수백 명 이상의 대량 학살이 벌어지겠지만, 그루의 클론이 날뛰면 우리가 완전히 져 버릴 수도 있지.”


“그리고 그루의 클론은 지금 최소한 한 명 이상은 살아남았다고 추정하고 있죠.” 미스 밀리샤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이상으로 위험한 망토도 얼마든지 있어요. 히어로들이 끼칠 수 있는 피해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라면 어떻겠어요?”


웰드가 미스 밀리샤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사태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도 할 수 있겠죠.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을 때 일부 파라휴먼들이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얼핏 보면 얌전해 보이는 능력도 제대로 통제하지 않으면 큰 참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그런 의미에서는 제 능력도 얌전한 축에 드는 거겠죠?”


“아니요.” 미스 밀리샤가 말했다. “그런 것 같지는 않네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동의하거나 반박할 생각이 없었고, 그녀와 웰드는 그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당신의 팀이 완장을 벗었더군요.” 미스 밀리샤가 말했다.


“네.” 내가 대답했다.


“규칙을 아주 유연하게 해석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제가 분명히 경고했는데도 말이죠.”


“그것과도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온 거예요.” 내가 말했다.


“말씀하시죠.” 그녀가 말했다.


“클론이 말한 것들이 있었죠.” 내가 말했다. “그쪽에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제 쪽에서도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적어도 한 가지 중요한 정보는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죠.”


“그때 의식이 있었다고?” 웰드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웰드가 말했다. “클론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어. 심리전으로 아군을 분열시키려는 수작이었겠지. 지금까지의 네 모습을 생각해 보면 클론도 그럴 능력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난 나쁜 뜻은 없었어. 보고를 안 할 수는 없었을 뿐이야.”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나는 벌레들만으로 미스 밀리샤의 자세를 살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나는 TV나 영화를 볼 때마다 단지 진실을 말하는 것만으로 해결될 문제 때문에 일이 꼬이는 장면들이 정말 싫었다. 그래서 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지 못했다. 자리에 앉아서 서로의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 해결될 오해 때문에 생기는 비극적인 전개나 시트콤 같은 장면들 모두가 거슬렸다.


나는 이번 일이 그런 비극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토마스 캘버트가 코일이었어.” 내가 말했다. 두 사람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폭동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뭐라고?” 웰드가 물었다.


미스 밀리샤가 팔짱을 풀고는 벨트에 엄지손가락을 걸었다.


“토마스 캘버트는 능력자였어.” 내가 말했다. “평행우주를 만들어내서 자기 행동에 따른 결과를 볼 수 있었지. 그 능력으로 안전하게 돈을 엄청나게 불려서 용병을 고용했던 거고, 여행자들과 우리를 고용했어. 언더사이더를 고용했다고.”


미스 밀리샤는 다시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섰다. “코일에 대한 정보와는 맞아떨어지지만, 토마스 캘버트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군요.”


“그 능력 덕분에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안전해졌어요. 코일이 도와준다면 무슨 일을 하든 두 번의 기회가 있었으니까, 그만큼 계획의 성공률이 높아졌죠. 그 덕분에 도시를 지배할 수 있었어요. 도시가 수중에 들어온 시점에서 ‘코일’이라는 캐릭터는 쓸모가 다했고, 그래서 그런 자작극이 벌어졌던 거예요. 그 기자들의 죽음도 거짓이었고, 그 상황 전체가 꾸며낸 연극이었죠. 죽었던 건 대역이었어요.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캘버트의 끄나풀이 시장에 당선되었고, 피고 지부장이 해임되었고, 캘버트가 새 지부장으로 임명됐죠.”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일을 벌인 셈이군요.” 미스 밀리샤가 말했다.


“몇 년에 걸쳐서 꾸민 일이에요. 파고 들어간다면 단서가 나올지도 모르죠. 사건에 휘말렸던 기자들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던가, 수상한 자금 흐름이 나온다던가. 모든 게 캘버트가 꾸민 일이었으니까요. 생각해 보세요.”


나는 손가락을 꼽으며 논점을 말했다. “캘버트는 언더사이더와 여행자를 통해서 브록턴 베이의 모든 불법적인 활동을 통제한 다음 주변 도시들로 영역을 넓혀 나갈 생각이었어요. 코일로서는 돈과 권력을 이용해 주변의 기업들을 조종하고 있었죠. 지금까지 벌어졌던 대부분의 도시 재건 사업에서는 건축회사도 토지도 코일의 소유였어요. 계속 손해를 보면서도 돈을 투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돈을 다른 곳에서 끌어오고 있어서였죠. 그리고 정부는 끄나풀들을 통해 조종하고, 히어로들은 PRT의 새 지부장이라는 자리를 이용해 조종할 심산이었어요.”


“그래서 죽인 겁니까?” 미스 밀리샤가 물었다. “클론의 말이 사실이었군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내가 말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 게 서로를 위해서 좋을 것 같네요.”


“네가 죽였으니까 말이지.” 웰드가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부와 논의해야겠군요.” 미스 밀리샤가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이번에 저희가 맺은 사실상의 휴전협정이 당신을 지켜주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제가 당분간은 당신에게 간섭하지 않는 쪽으로 의견을 내 보겠습니다. 도움이 될지도 모르죠.”


“그러지 않는 게 좋겠어요.” 내가 미스 밀리샤에게 말했다.


“뭘 말이죠? 의견을 내는 것 말인가요?”


“상부에 보고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저희가 완장을 벗은 이유는 태틀테일이 받은 느낌 때문이었거든요. 지금 설명하기엔··· 너무 복잡한 이야기에요.”


“무리해서라도 설명을 듣고 싶군요.” 미스 밀리샤가 말했다.


여기서 설명했다가는 태틀테일의 능력의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었고, 지금까지 우리에게 순순히 협력해 줬던 시카고 워드가 문책을 당할 위험도 있었다.


말을 돌려 볼까? “태틀테일은 아이돌른이 다른 꿍꿍이속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었어요. 저도 그런 느낌을 받았죠. 가까이 다가갔을 때 아이돌른이 노엘에게 이야기하는 게 들렸어요. 지금까지 코일이 벌이고 있었던 일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했죠.”


“아이돌른이?” 웰드가 물었다.


미스 밀리샤는 내 어깨를 붙잡고는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히어로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까지 데리고 갔다. 나는 엿듣는 사람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굳이 저항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와서는 내 귀에다 대고 말했다. “설명하세요.”


내가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의 효과였다. 오히려 나와 다른 팀원들한테 더 심각한 문제가 생기려고 하고 있었다.


“콜드론이 뭔지 아시나요?” 내가 물었다.


“그런 소문이 있죠.” 미스 밀리샤가 말했다. “강한 파라휴먼들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있었던 소문이에요. 가끔 그 이름을 언급하면서 거대한 음모나 권력 유착이 벌어지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 있죠. 그럴 때마다 대규모 수사가 펼쳐졌고, 매번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철저하게 밝혀졌을 뿐이었어요.”


나는 가면 뒤로 인상을 찌푸렸다. “콜드론이 아니라면 신체가 변형된 파라휴먼들은 어떻게 설명할 거죠? 달팽이 그레고르나 뉴터 같은 사람들은?”


“저도 있죠.” 웰드가 말했다. 그는 우리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렇죠.” 내가 말했다. “허풍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지금까지 콜드론이 관련되었던 상황이 너무 많았어요. 상인들은 마시면 능력을 얻게 되는 약을 가지고 있었고, 가방에는 콜드론과의 계약서가 담겨 있었죠. 폴트라인 일당이 서류를 들고 떠나기 전에 조금 읽어봤었어요.”


“누가 그걸 마시고 능력을 얻는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이 있나요?” 미스 밀리샤가 물었다.


“아니요.”


“그 이름 하나가 널리 퍼져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을 뿐이에요. 가끔 자기 이득을 위해서 그 이름을 빌리는 사람들이 나올 뿐이죠.” 미스 밀리샤가 말했다.


“그럼 아이돌른은 왜 코일이 콜드론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고, 노엘을 만들어낸 게 콜드론이라고 말했던 거죠?”


미스 밀리샤가 입술을 오므렸다. “그건 모르겠네요. 당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죠.”


“거짓말을 할 거였다면 조금 더 그럴싸한 말을 지어냈겠죠.”


“너무 규모가 커서 검증하는 데 한세월이 걸릴 거라는 걸 알고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죠. 저희 쪽에서 그러는 사이에 이 상황이 해결되면 당신들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테고요. 팀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당신은 그런 경우가 많다더군요. 확인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논증으로 자신을 보호하곤 하죠.”


“논쟁을 벌일 생각은 없어요.” 내가 말했다. “캘버트가 코일이었다는 걸 못 믿겠다 하더라도 상관없어요. 지금은 가진 패를 전부 보여줘야 할 때라고 생각했을 뿐이죠.”


“실제로 살인 혐의를 인정하는 건 빼고 말이지.” 웰드가 말했다.


“그래.” 내가 말했다.


“만약에 당신 말을 믿는다고 가정한다면, 저희가 어떻게 하길 바라죠?” 미스 밀리샤가 물었다.


“지금으로서는,” 내가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요. 평소대로 하면 되겠죠. 하지만 제 말을 기억하시고, 주위를 잘 살펴보세요.”


“그런 다음에는요? 주위를 잘 살펴본 결과, 캘버트와 코일에 대한 정보를 철저하게 수사한 결과 당신을 체포해야겠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순순히 체포당할 건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지는 않겠죠.”


“그럼 이렇게 찾아온 진짜 이유는 이기심이군요.” 미스 밀리샤가 말했다. “행동을 바꿀 생각도 없고, 사람을 죽인 걸 사실상 인정하고도 넘어가기를 바라지만··· 저희 쪽에서는 당신이 전해 들은 말에 따라 행동하라는 건가요.”


“이기적으로 보인다면 어쩔 수 없죠.” 내가 말했다. “그게 그쪽의 방식이라면요. 하지만 이제는 저도 큰 욕심이 없어요. 다이나는 구했죠. 이제는 영역의 사람들을 지키고, 도살장의 9인방이든 코일이든 에키드나든 공격해 오는 사람들을 막고 싶을 뿐이에요. 믿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자기 자신을 변호하려고 한 소리는 아니에요. 클론이 한 말은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겠지만, 제가 지금까지 한 말 중에서 알리바이나 교섭 재료가 될 만한 말은 없어요.”


“저지른 죄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구실을 붙이고 있잖아요.” 미스 밀리샤가 말했다.


“혐의를 인정한 적은 없어요.” 내가 지적했다.


“무슨 의미인지 알 텐데요.”

“구실일 수도 있겠죠.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부터 아이돌른의 말을 조금 더 조심해서 듣거나, 캘버트의 사생활을 파헤칠 때 주의를 더 기울이면서 코일로 이어지는 게 있는지 살피게 될 수도 있겠죠. 똑똑한 놈이었지만, 그 정도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어딘가에서는 경계가 흐려질 수밖에 없어요. 진실이 밝혀진다 해도 제가 얻을 건 없어요. 하지만 그쪽은 많은 걸 얻을 수 있겠죠.”


“그럴 수도 있겠죠.” 미스 밀리샤가 말했다.


“경험으로 하는 말인가?” 웰드가 물었다. “경계가 흐려진다는 건?”


나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가 내 얼굴을 봤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걸 말할 수는 없지.”


“하긴,” 그가 말했다. “내가 관심이 있어서 하는 이야기야. 나는 처음부터 숨겨진 정체라는 걸 가질 수가 없었으니까.”


“솔직히 내가 볼 때는 그리 아쉬워할 일도 아니야.” 내가 말했다. 나는 아빠를 생각했다. 아빠도 경계가 흐려지는 바람에 피해를 봤던 걸까, 아니면 도시 전역에 일어난 사건들에 휩쓸렸을 뿐인 걸까?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이쯤에서 끼어들어야겠네요.” 태틀테일이 말했다. 모서리를 돌아온 그녀는 미스 밀리샤에게 고개를 돌렸다. “스키터를 좀 데려가도 될까요?”


미스 밀리샤는 말없이 손을 휙 흔들었다.


태틀테일은 나를 데려가는 도중에 미스 밀리샤가 말을 했다. “사실을 말한 건진 모르겠지만···”


그녀는 말을 흐렸다. 나는 말을 하려 했다가 입을 다시 다물었다. 침묵이 더 안전했다.


“···사실이라면, 고맙습니다. 모든 걸 의심하고 증거를 요구하는 건 원래 제 방식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어요. 팀원들 때문에라도 누군가를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으니까요.”


“사람들을 이끈다는 건 힘든 일이죠.” 나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태틀테일은 우리가 가는 방향을 가리키더니 내 옆에서 같이 걸었다. 웰드와 미스 밀리샤가 멀어져갔다. 노엘이 날 무력화하기 위해 주입한 정체불명의 질병은 이미 사라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문제 일부에 불과했고, 몸 상태는 여전히 최악이었다. 안 그래도 체력이 바닥에 가까웠는데 방금 있었던 싸움까지 더해지자 완전히 녹초가 된 상태였다. 배가 고팠고, 목이 말랐고, 삼십 분만 눈을 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나보다 몸 상태가 멀쩡할 게 분명한 태틀테일은 내 왼쪽으로 반걸음쯤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지극히 의도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그 옥상에서도 똑같이 행동했었다. 나를 리더로, 존중받아야 할 사람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교묘한 위치 선정이었다. 태틀테일도 무서운 사람이었다. 나와는 방향성이 아주 달랐지만, 그래도 무서운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의식적으로는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그녀가 보이는 경의 비슷한 것은 그런 분위기를 자아낼 것이었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번에 입은 부상이 심한 것일 가능성도 있었다.


“스키터.” 태틀테일이 말했다. “이쪽은 스케이프고트야.”


나는 벌레들로 청년 히어로를 살폈다. 그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키가 특별히 작은 게 아니라면 워드의 일원일 것이었다. 코스튬은 로브였는데, 파나시아보다는 미르딘의 로브에 가까웠다. 로브 밑으로 들어간 벌레들은 보호구를 찾아냈다. 전투용 코스튬인 모양이었다. 그의 가면은 금속으로 추정되는 띠 같은 것으로 머리에 연결되어 있었다. 들어 올릴 수 있는 가면 같았다. 이마에 있는 띠 양옆으로는 휘어진 뿔이 달려 있었다.


“스케이프고트?” 내가 물었다. “치료사야?”


“아니.” 스케이프고트가 말했다. “하지만 치료는 가능하지. 어떤 의미로는.”


“‘어떤 의미로는’이 정확히 무슨 뜻이지?”


“섬세한 작업이야. 치료는 아니지. 고통은 멈추고 상처도 사라지겠지만, 깨지기 쉽고 지속시간이 한정되어 있어.”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내가 말했다.


“지속시간이 다하면 특정 조건을 만족하지 않는 한 상처가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보통은 더 심해져서 돌아오지. 회복도 더 느리고.”


“지속시간이 얼마나 되지?” 내가 물었다.


“한 시간에서 여섯 시간 정도.”


“조건은?” 내가 물었다.


“중간에 효과가 깨지지 않을수록 상처가 돌아오지 않을 확률이 높아져.”


“앉아.” 태틀테일이 말했다. 나는 앉았다.


스케이프고트가 내 손을 건드렸다. 온갖 감각이 느껴졌다. 열기, 냉기, 진동, 수많은 옷감과 피부의 질감,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느껴졌다. 피부에 닿는 코스튬의 질감이 점점 강렬해지더니 날카로워지며 감각을 뒤덮었다. 나는 펄쩍 뛰며 손을 빼냈다.


“괜찮아.” 태틀테일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태틀테일이 설명했다. “스케이프고트의 능력은 양자 레벨에서 작용해. 평행세계를 뒤져서 다치지 않은 상태의 너를 찾은 다음에 붙여넣는 거야. 붙여넣는 게 가능할 정도로 차이점이 적은 것들을 찾아야겠지.”


“다친 부분만 제외하고 말이지.” 내가 말했다. 계속해서 감각이 휘몰아쳤다. 코스튬이 피부에 닿거나 땅이 발바닥에 닿는 감각이 전기 충격처럼 강렬하게 느껴졌다.


태틀테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은 다른 차원과 가능성 속에 존재하는 스키터들로부터 멀쩡한 부분을 갖다 붙이고 있어. 스케이프고트 본인의 몸이 그 연결 통로 역할을 하고 있지.”


“이거 안전한 거야?” 내가 물었다. 효과가 점점 강해졌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진정해.” 스케이프고트가 말했다. “흥분할수록 효과가 약해지니까.”


진정해야지. 나는 벌레들에게 주의를 돌렸다. 나는 녀석들이 느끼는 것을 느꼈고, 녀석들이 보는 것을 보았고, 녀석들이 듣는 것을 들으며 자신의 몸에서 벗어나려 해 보았다. 지금까지 여러 번 시도해 봤던, 마치 명상 같은 방법이었다.


“잘못하면 효과가 깨질 수도 있어.” 태틀테일이 말했다. “뭔가에 부딪히거나 큰 충격을 받거나 또 다치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아마 더 심해지겠지.”


이런 상황에서 긴장을 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말하려던 찰나에 태틀테일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쳐선 안 된다니,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싸우라는 거야?”


“안전하게 있어야겠지. 그리고 스케이프고트에게서 백오십 피트 이상 떨어지면 안 돼.”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데.”


“그만둘 수도 있는데.” 스케이프고트가 말했다. “별로 감사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지금 상태도 몸 가누기 힘든 건 마찬가지야.” 태틀테일이 그를 무시한 채 말했다.


“토사물의 병균 때문에 그랬던 거야. 이제 풀리고 있어.”


“이대로 계속 가겠다는 거야?” 태틀테일이 물었다. “늑골 골절에, 상한 폐에, 피로, 타박상···”


“손이 묶인 채로 싸우게 되는 것보다는 낫지.” 내가 말했다. 그리고 이 느낌도 싫어. 스케이프고트의 능력은 느낌이 최악이었다.


“하지만 그런 몸 상태로는 아예 싸울 수 없을 거야.”


“이제 상관없는 이야기야.” 스케이프고트가 말했다. “이미 되돌리기는 늦었으니까.”


한순간에 모든 감각이 멈췄다. 온갖 느낌이 갑자기 사라지자 몸 전체가 소리굽쇠처럼 떨리는 것 같았다. 귀에는 이명이 들렸고, 시야 곳곳에 반점이 보였다.


나는 눈을 떴지만, 앞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하얀 안개가 아니었다. 가면의 렌즈를 닦자 말라붙은 토사물과 피가 떨어져 나갔고, 시야가 또렷해졌다.


나는 몇 번 눈을 깜박인 뒤에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앞이 보였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눈이 멀었었다고!?” 스케이프고트가 소리쳤다.


나는 스케이프고트를 내려다보았다. 코스튬은 흰색과 금색이었고, 가면은 새하얀 염소 머리가 금빛 띠에 연결된 형태였다. 로브는 흰색이었고, 허리띠는 금색에 버클은 염소 머리였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쓰러져 있었고 소리를 지른 탓에 마구 기침을 하고 있었다.


“분명 언급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태틀테일이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물었다.


“아, 다른 사람한테서 떼어낸 부상이 자기한테 붙는 거야. 네가 지금 쓰고 있는 눈은 스케이프고트의 원래 눈이랑 평행세계의 스키터의 눈을 반반씩 합쳤다고 생각하면 돼. 대충은. 설명하기가 좀 힘드네.”


“지금 이러고 돌아다니라는 거야?” 스케이프고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다시 기침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우리 다른 팀원들도 치료해 주지.” 태틀테일이 말했다. “그런 다음에는 우릴 따라와. 그 능력을 공격적으로 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볼 테니까.”


“맙소사.” 스케이프고트가 말했다.


“그래 봤자 일시적이잖아.” 태틀테일이 말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고는 말을 덧붙였다. “돈도 많이 받았으면서.”


부패한 히어로일까, 아니면 단순한 기회주의자인 걸까,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태틀테일이 이럴 자금이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코일의 병사들에게 뇌물을 먹이고 내보낸 것도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태틀테일이 코일의 사업을 전부 유지하고 있긴 했지만, 코일의 모든 자금과 인맥을 집어삼키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자칫하면 코일의 치명적인 실수를 되풀이하게 될 수도 있었다.


스케이프고트가 숨이 몰아쉬며 기침하는 동안 다른 미성년자 히어로들이 우리에게 모여들었다.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꽃무늬가 새겨진 코스튬을 입은 여자애였다. 머리카락은 분홍색이었고, 장미의 꽃잎처럼 스타일링이 되어 있었다. 집에서 자다가 불려 나왔을 텐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록색 옷을 입고 커다란 망치를 든 남자애도 있었고, 철갑을 입고 바이저 양옆으로 지느러미가 달린 남자도 있었고, 갈색 코스튬에 양초 문양을 새긴 남자애도 있었다. 그레이스와 원튼의 모습도 보였다.


“무슨 일이야, S.G?” 여자애가 물었다.


“난 내 능력이 너무 싫어. 너무, 너무, 너무 싫다고.” 스케이프고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원튼과 그레이스가 그를 부축했다. 그를 일으키면서 그레이스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멀었다고?” 그녀가 물었다.


“그랬었지.” 내가 말했다.


“헤어진 이후에 그런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 내가 말했다.


그녀는 내게 묘한 눈길을 보냈다.


나는 말을 멈추고 그녀가 알아서 결론을 내리게 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스케이프고트를 내려다보았고, 나는 말을 돌렸다. “그쪽은 괜찮은가 봐? 노엘이 남긴 후유증은 없어?”


“아주 멀쩡하지.” 그녀가 말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다. 머리카락은 젖어 있었고 검붉은 색에서 누런색까지 걸친 다양한 노엘의 체액이 코스튬 곳곳에 말라붙어 있었다. 전에 어땠을지는 내가 알 방법이 없었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은 피곤해 보였다. 일찍 일어나서 그런 걸까, 아니면 감정적으로 지친 걸까?


내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적어도 내 코스튬은 검은색과 회색인 만큼 찌꺼기가 도드라지진 않을 것이었다.


느끼기에는 많이 나아진 것 같았다. 행복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익숙해져서 오랫동안 무시해 왔던 근육통과 통증이 사라진 상태였고, 덕분에 노엘 안에서 봤던 환상도 이제 그리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태틀테일의 말대로, 스케이프고트와의 협력은 필요한 일일지도 몰랐다. 이걸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그녀의 말대로 스케이프고트 옆에 붙어서 안전하게 활동하는 것도 할 용의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자.” 내가 말했다. 내가 두고 온 그루의 상태가 마음에 걸렸다. “그레이스, 원튼, 따라올 건가?”


“우리가 받은 명령은 그대로 남아있어.” 그레이스가 말했다. “너희와 동행하라는 명령이지.”


“좋아. 그럼 벤틀리를 데려와서 스케이프고트를 태우면 되겠네.”


태틀테일이 고개를 저었다. “벤틀리가 뛰어다니는 걸 생각하면 충격이 너무 심해. 너나 벤틀리가 맞으면 그대로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야.”


“밴을 한 대 구해서 조수석에 태우는 건?” 내가 물었다.


“전에 구했던 밴이 어떻게 됐는지 생각해 봐.” 태틀테일이 말했다.


“정 안 되면 억제 거품으로 뒤덮어서 보호하지, 뭐.” 내가 말했다. “그렇게까지는 안 됐으면 좋겠네. 가자.”


나는 스케이프고트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태틀테일이 내 손목에 손을 올리며 막아 세웠다.


“네 몸이 유리로 되어 있다고 생각해.” 그녀가 말했다. “힘쓰지 말고, 다치지 말고, 무리하지 마.”


“그건 좀 극단적인데.”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케이프고트로부터 손을 뗐다.


스케이프고트를 부축하기 위해 사람이 두 명 필요했다. 그레이스가 한쪽, 태틀테일이 반대쪽을 맡았다. 부상을 넘겨받는 과정에서 더 심해진 건가?


나는 지금까지 놓친 모습들을 관찰하고 정보를 모으는 데 집중했다. 건물의 잔해 주위로 모여있는 히어로들의 모습이 보였다. PRT 대원들이 주위를 돌며 엄청난 양의 억제 거품을 들이붓고 있었다.


벌레들의 감각대로라면 총 여든 명이었다. 그중 공중에 떠 있는 사람은 여덟 명 정도였다. 그런 만큼 아이돌른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레이스처럼 그의 코스튬도 말라붙은 체액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삼사 층 정도의 높이에 떠 있었고, 강한 바람에 망토가 휘날렸다.


망토를 소화하기란 쉽지 않았다. 몸에 달라붙는 때도 있었고, 잘못된 방향으로 휘날리거나 팔에 걸리는 경우도 많았다. 망토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위엄이 필요했다. 아이돌른은 그걸 가지고 있었다.


망토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이렇게나 적은데도, ‘망토’는 파라휴먼 전반을 가리키는 속어였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나도 얼마 전에 짧은 망토를 입고 다녔던 적이 있었다. 어깨만 가리는 수준의, 멋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한 망토였었다. 벌레를 숨길 공간을 마련하고 조금이나마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은 없었지만, 오히려 다행이었다. 아이돌른의 모습이 보이는 지금이라면 신경이 쓰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자신감을 표출해야 할 상황에 나한테 망토를 소화할 능력이 있는지 고민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 자리에 빌런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눈이 보이는 만큼,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던 게 공상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언더사이더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루 옆에 무릎을 꿇었다. 임프가 그의 옆에 있었고, 리젠트와 비치는 근처에 서 있었다. 리젠트가 내게 고갯짓을 했고 나는 같은 몸짓을 돌려주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말했다. 나는 우릴 따라온 히어로 셋을 바라보았다. “팀원들끼리 사적인 대화를 좀 해야겠어.”


주위와 코스튬으로부터 모여든 벌레들이 우리를 감싸며 움직이는 장막을 만들었다. 나는 장막을 점점 넓게 퍼트려서 그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원튼이 그레이스에게 스케이프고트의 부축을 맡기고는 벌레 떼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벌레들이 그의 코와 귀와 입으로 들어가자 그는 콧김을 뿜으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몇 초 더 그에게 그 감각을 느끼게 한 다음 벌레들을 물렸다. 그는 다시 시도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조용해졌어.” 임프가 말했다. “대답을 안 해. 만지려고 하니까 움츠러들었어.”


“에키드나 안에 있으면 환상이 보여.” 내가 말했다. “촉발사건 때의 상황이 보이거나, 살면서 끔찍했던 순간들이 보이지.”


“아.” 임프가 말했다. “이런.”


나는 그루를 보았다. 그는 어둠을 그러모은 채 멍하니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앉은 자세를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의 어둠이었다. 나는 그것이 본능적인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감정을 억누르고 내면의 세계에 잠길수록 그의 주위의 어둠은 진해졌다.


이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가 옆에 무릎을 꿇은 나로부터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


“임프.” 내가 말했다.


“왜?”


“집으로 데려가 줘.”


“하지만··· 나도 도울 수 있잖아.”


“알아.” 내가 말했다. “지금까지 많은 도움이 됐지. 하지만 그루는 여기 있어서는 안 돼. 이 상태로는 안 돼. 촉발사건 때의 일을 떠올린 거라면 네가 안심시켜줘야 해.”


“그 촉발사건이랑 관련이 있는 건 너였잖아.” 임프가 말했다. 거의 고발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말했다. 나는 그녀의 가면의 새까만 렌즈를 쳐다보았다. “내가 데려갈까? 그럴 수도 있어. 내가 가면 태틀테일이 언더사이더를 지휘할 거고, 넌 여기 남아서 클론들을 계속 암살하면 돼.”


그녀는 나이프를 뽑아서 빙글 돌렸다. 그 선택지를 고려하고 있는 듯했다.


“어찌 됐든,” 내가 말했다. “빨리 선택해야 해. 네가 남지 않겠다면 나도 서둘러야지.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벌레들을 모아야 하니까.”


그녀는 그루를 힐끗 내려다보더니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리젠트와 레이첼은 우리를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한편 나는 그루를 바라보았다. 나는 정말로 여기서 빠지고 싶었다. 시각을 다시 잃어버리고 몇 주나 몇 달을 그 상태로 보내야 한다고 해도, 지금 그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줄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환상이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마네킹이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그 환상이었다. 다들 나를 믿고 있었는데 실패해버렸던 그 환상이었다. 기묘하게도, 이 순간만큼은 그 환상의 기억이 나를 안심시켰다.


그 순간 나는 임프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새까만 렌즈가 내 노란 렌즈를 마주했다.


“리더는 너야.” 임프가 말했다. 대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손을 뻗어 그루의 손을 잡았다. 그는 움찔하며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전에 내가 손을 꽉 잡았다.


“그루.” 내가 말했다. 나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키터야. 테일러야. 내 말을 들어줘.”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너는 아이샤와 함께 돌아가, 알겠지? 나도 네가 뭘 봤는지 알 것 같아. 뭘 경험했는지 알 것 같아.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을 기억해, 알겠지? 넌 실패하지 않았어. 바랐던 걸 이뤘다고. 아이샤도, 나도, 너 자신도, 전부 네가 구한 거야.”


그는 손을 잡아당기며 떨어지려 했지만 나는 그를 계속 붙들었다. 그의 주위로 어둠이 점점 차올랐다.


“이제 마지막 부분만 남았어. 그때처럼 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돼. 그곳에서 벗어나. 그게 최선이야. 등을 돌리고, 끔찍한 일이 있었던 그곳에서 벗어나는 거야. 알겠지? 아이샤를 따라가. 둘이서 집에 가는 거야.”


나는 일어서며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는 저항했다.


“동생을 집에 데려가.” 내가 말했다.


나는 다시 손을 잡아당겼고 이번에는 그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의 손을 아이샤의 손에 단단히 쥐여 주었다. 나는 손을 잡은 채 떠나는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고, 눈으로 보이지 않게 된 다음에는 벌레들의 흐릿한 시야로 계속 따라갔다.


장막을 형성하던 벌레들이 내게로 모여들었다. 젊은 히어로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고, 태틀테일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지원군이 오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와 레전드가 미르딘, 슈발리에, 아이돌른과 합류하고 있었다.


최대 전력이었다. 드디어 이번 사태를 S급으로 취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태틀테일에게 다가갔고 리젠트와 비치도 나를 따라왔다. 다양한 크기의 개들이 비치를 따르고 있었다. 녀석들의 목줄에 달린 사슬이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여기저기 상한 모습의 테크톤이 저 멀리 보였다. 그레이스와 원튼이 그에게 향했고, 스케이프고트가 그들의 부축을 받는 이상 나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주위로 주요 히어로들이 스쳐 지나갔고, 그들 주위로 모여든 인파도 보였다. 그들을 힐끗 보는 순간 태틀테일이 씨익 웃는 모습이 시야 가장자리를 스쳐 지나갔다.


순간 불안감이 들었다. 많이 본 적이 있는 미소였다. 뭔가 일을 벌이기 전에 엠마가 짓는 웃음과도 비슷했다. 그러나 나를 겨냥한 미소는 아니었다. 나는 태틀테일의 팔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말을 꺼내고 있었다.


“콜드론.” 그녀가 말했다. 정확하게 히어로들한테까지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아이돌른은 미동도 하지 않으며 모르는 척을 했고, 알렉산드리아는 아주 살짝 움직였다. 갑자기 목소리를 들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레전드는 우리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태틀테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잠깐 입술을 오므리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태틀테일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녀는 내게 속삭였다. “세 명 다 알고 있어.”


잠재적인 적이 세 명 추가됐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작가의말

* 원작 번역 지침에 따른 공지사항.

“This is purely a fan project and I/we lay no claim to the ideas, characters, or story. The real author is J.C. McCrae, aka ‘Wildbow’, and the original version can be found at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The final chapter of Worm was published on 2013. 11. 19. This is a fan translation.”


"이 번역본은 팬의 작업물이며, 번역자는 이 작품의 아이디어,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자는 'Wildbow'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J.C.McCrae입니다. Worm 원작은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에서 연재되었으며 2013년 11월 19일에 완결되었습니다. 이것은 팬 번역본임을 밝힙니다."



* 표지 출처 : Ari Ibarra (ariirf.com)

팬아트 작가의 사용 허가를 받은 표지입니다.



* 이 작품의 번역은 2인 비영리 프로젝트입니다. 번역자가 번역을 맡고, 편집자가 검수와 업로드를 맡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5

  • 작성자
    Lv.45 코푼코뿔소
    작성일
    20.10.20 10:33
    No. 1

    태틀테일 심리전이 대단하긴 한데 삼대장중 한명이 살인멸구 한다고 달려들면 언더사이더 애들 한시간도 못버티는거 아닐까 하네.
    드래곤 물리친 것도 드래곤이 정부 명령 없이 살인 할 수 없다는거 이용해서 기책으로 물리친건데 가장 큰 비밀을 숨기려고 학살하기로 마음먹은 삼대장이 대놓고 공격하면 어쩌려구 이런 도발을 하는걸까? 이것도 다 계산된 결과인가??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69 구슬하늘
    작성일
    20.10.20 10:51
    No. 2

    그렇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 터틀테일이 계산한대로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60 엘스트
    작성일
    20.10.20 11:23
    No. 3

    드디어 눈 회복!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9 kr*****
    작성일
    20.10.20 12:50
    No. 4
  • 작성자
    Lv.31 Spocus
    작성일
    20.10.20 21:36
    No. 5

    진짜 재밌습니다 ㅎㅎ 테르테일 대단하네요.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Worm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17 '고치' 20.4 +16 20.11.27 513 33 28쪽
216 '고치' 20.3 +8 20.11.24 543 32 33쪽
215 '고치' 20.2 +9 20.11.20 447 30 36쪽
214 '고치' 20.1 +11 20.11.17 504 30 37쪽
213 '재앙' 19.z (막간 : 엠마) +13 20.11.13 526 35 51쪽
212 '재앙' 19.y (막간 : 파라휴먼 게시판) +15 20.11.13 533 31 36쪽
211 '재앙' 19.7 +11 20.11.10 478 32 53쪽
210 '재앙' 19.6 +11 20.11.06 479 38 36쪽
209 '재앙' 19.5 +8 20.11.03 451 29 39쪽
208 '재앙' 19.4 +3 20.10.30 429 32 34쪽
207 '재앙' 19.x (막간 : 블래스토) +12 20.10.27 504 29 48쪽
206 '재앙' 19.3 +7 20.10.23 394 36 31쪽
» '재앙' 19.2 +5 20.10.20 392 30 34쪽
204 '재앙' 19.1 +11 20.10.16 456 29 43쪽
203 '여왕' 18.z (막간 : 에키드나) +8 20.10.13 442 32 46쪽
202 '여왕' 18.z (막간 : 폴트라인) +5 20.10.09 487 26 47쪽
201 '여왕' 18.8 +9 20.10.06 473 33 35쪽
200 '여왕' 18.7 +10 20.10.02 409 26 32쪽
199 '여왕' 18.z (막간 : 심리치료사, 제시카 야마다) +10 20.09.29 490 28 55쪽
198 '여왕' 18.6 +6 20.09.25 457 31 30쪽
197 '여왕' 18.5 +4 20.09.22 419 26 28쪽
196 '여왕' 18.y (막간 : 크루세이더) +5 20.09.22 412 26 40쪽
195 '여왕' 18.4 +5 20.09.18 416 29 36쪽
194 '여왕' 18.3 +7 20.09.15 446 30 34쪽
193 '여왕' 18.x (막간 : 세계 최강의 남자) +15 20.09.11 585 37 31쪽
192 '여왕' 18.2 +9 20.09.08 436 28 29쪽
191 '여왕' 18.1 +3 20.09.04 497 34 30쪽
190 '이주' 17.8 +5 20.09.01 490 28 50쪽
189 '이주' 17.7 +4 20.08.28 416 25 43쪽
188 '이주' 17.6 +7 20.08.25 427 27 5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