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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르카 님의 서재입니다.

W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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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엘사르카
작품등록일 :
2020.05.08 22:18
최근연재일 :
2022.05.0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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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3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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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글자
46쪽

'여왕' 18.z (막간 : 에키드나)

DUMMY

“정찰해.” 노엘이 지시를 내렸다.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 회복하고.”


마리사가 매를 우거진 숲속으로 날려 보냈다. 노엘은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아드레날린의 떨림을 느꼈고, 극대화된 주의력과 집중력으로 팀원들과 매의 목표 지점 사이에 보이는 스켈레톤과 늪지 좀비들의 모습을 살폈다. 목표는 마녀가 지키고 있는 한 공터였다.


모든 것이 단서가 될 수 있었다. 상대 유닛의 배치 하나하나가 이동 경로를 좌지우지하는 결정적인 정보였다. 늪지 던전 뒤에 놓여 있는 저 보물상자는 상대 팀의 오버로드가 최대한 멀리 갖다 놓은 걸까, 아니면 그쪽에 함정을 깔아 놓은 걸까?


그것 하나만으로는 알 수 없었지만, 배치된 몬스터의 수가 그쪽이 더 적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오른쪽으로 붙어.” 그녀가 지시했다.


팀원들이 그녀의 말에 따랐다.


마치 자각몽을 꾸는 것 같았다. 집중력이 그야말로 최고조였고,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방금 내린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코디, 원거리.”


코디의 노상강도가 레이피어를 집어넣고 쌍권총을 들었다.


“루크, 바람 마법과 바람 정령을 써. 딤플치크는 오버로드를 할 땐 캐스터를 잘 안 쓰지만, 그래도 습관은 그대로일 거야. 텔레포트가 있겠지. 마즈, 옆으로 돌아서 포킹해.”


그들은 목표를 향해 돌격했다. 마녀 딤플치크는 그들이 경계를 넘자마자 대악마 둘을 소환한 다음 방 저편으로 텔레포트했다. 루크의 주술사가 소환한 바람 정령들은 이미 아군의 속도를 끌어올리고 적의 발을 묶기 위한 소용돌이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상대 팀이 방금 완전히 뒤로 빠졌어.” 제스가 보고했다. “포탈까지 물러날 생각이야. 집단 인베이드라고.”


“젠장,” 노엘이 말했다. 그녀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자신의 결투자를 어떻게 배치해야 가장 이득을 볼 수 있을지도 생각해야 했고. 마녀의 주문도 피해야 했고, 팀원들의 데미지도 계산해야 했고, 자신과 팀원들의 아이템도 염두에 둬야 했다. “사이에 방은 몇 개야?”


“포탈 바로 옆방이었어. 지금쯤 들어가고 있을 거야.”


길어봤자 십 초일 것이었다. “우리가 잡는 것보다 그쪽이 오는 게 빠를 거야.”


“병력을 보낼까?” 제스가 물었다.


“아니. 던전 방어에 투자해. 우리가 죽으면 네가 버텨야 하니까.”


“내 보스 몬스터가 그리 강하지 않다는 거 알잖아. 남은 방도 세 개뿐이야.”


“버텨.” 노엘이 말했다.


예상대로 적 팀이 보스 방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마녀와의 전투 탓에 체력이 빠져 있었지만, 상대 팀은 던전에 그리 깊숙하게까지 들어가지 않았던 탓에 자원이 많이 남아 있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냥 죽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발목을 잡아야 했다. 그녀는 적 팀의 시간술사에게 일대일 결투를 신청해서 다른 적으로부터의 데미지를 격감시켰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세 번의 공격으로 상대를 쓰러트렸다.


이어서 그녀는 마녀에게 결투를 신청해 두 번의 공격으로 체력을 삼 분의 일까지 떨어트렸다.


그쯤에서 코디가 죽었고, 루크가 곧 그의 뒤를 따랐다.


노엘은 카이팅하며 화살을 쏘는 마리사에게 향하는 공격을 자신의 몸으로 맞아주었다.


적 팀과 마녀가 시전한 독 안개 사이에 끼인 마리사가 후자를 뚫는 걸 선택했다. 그러나 그녀의 체력이 바닥나는 것이 더 빨랐다.


“시발! 시발, 시발, 시발!” 코디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뭔가를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코디가 날뛰는 것이 아주 멀리서 벌어지는 일처럼 느껴졌다. 지금 노엘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상대를 늦추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녀는 적 팀의 야만인에게 도전을 걸었다. 다른 캐릭터가 입히는 데미지를 줄이기 위해 가장 공격력이 약한 상대를 지목한 것이었다. 그녀는 게임 시작부터 가지고 있었던 포션을 마셨다. 체력이 오 퍼센트도 차지 않겠지만, 공격 한 번을 더 하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었다. 0.5초를 더 지체하거나, 마력을 조금이나마 더 소모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 그만큼 제스가 버텨야 할 공격이 줄어들 것이었다.


적 팀에 남아 있는 세 명의 캐릭터가 그녀에게 파고들어 퇴로를 막았다. 마녀가 독성 폭탄을 날렸고, 그러자 체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화면이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물들었고, 중앙에 타이머가 떠올랐다.


리스폰 시간은 45초였다. 적 팀원들은 빛줄기로 둘러싸여 있었다. 레벨업이었다. 포탈의 비용은 충분히 만회했을 것이었다. 훌륭한 작전이었다. 던전으로부터 빠졌다가 다시 들어가는 타이밍이 완벽했다.


“시발!”


코디는 삼십 초 후에 살아날 것이었다. 그들이 체크포인트에서 되살아나기까지는 삼십 초에서 사십오 초가 남아 있었다.


아니지. 적 팀의 도적이 던전을 되돌아가며 체크포인트 깃발을 파괴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이십 초에서 삼십오 초였고, 살아나는 위치는 던전 입구였다.


그녀는 타이머를 계속해서 지켜보며 새 아이템을 샀다.


코디가 되살아났다.


“뛰어!” 그녀가 외쳤다.


루크가 곧 다시 살아났다. 적 시간술사도 제스의 던전의 체크포인트에서 되살아났다. 적 팀은 보스방 바로 전의 방에서 제스가 깔아둔 참호를 돌파하며 고블린 유탄병과 소총병을 처치하고 있었다.


마지막 몬스터가 쓰러졌다. 조건이 맞춰지자 피의 게이트가 열렸고, 제스의 최종 보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오우거 왕이었다.


그러나 전투력은 딤플치크가 자신의 던전에 중간보스로 배치했던 몬스터와 비등비등한 수준이었다.


되살아난 마즈와 노엘이 던전을 전력으로 주파했다.


제스의 체력은 절반이었고 마녀의 체력은 삼 분의 일이었지만, 제스의 보스방에는 적이 넷이나 와 있는 반면에 코디는 아직 마녀에게 닿지도 못한 상태였다.


노엘과 마즈가 합세했다.


전투가 끝나고 화면이 검게 물들었지만, 노엘은 어느 편이 이겼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황금빛 글자가 화면에 떠올랐다. ‘승리!’


다른 사람들은 벌떡 일어나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녀도 그들을 따랐다. 그들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고개를 돌리자 크리스와 올리버와 함께 앉아 있는 크라우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웃고 있었다.


노엘은 그를 껴안았다. 이 순간만큼은 불안을 잠시 접어둘 수 있었고, 자신의 모든 문제를 잠시 잊어버릴 수 있었다. 평소처럼 손이 닿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그를 꽉 껴안았다. 좋은 느낌이었다. 모든 게 잘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리그로 간다!” 코디가 환성을 질렀다.


“네 덕분이야.” 크라우스가 속삭였다. “네가 승패를 갈랐어. 네가 이긴 거야.”




입으로 나오는 숨결이 뜨거웠다. 이 피로, 이 무거운 몸, 마치 열병을 앓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더 심했다. 어린 시절에 캠핑을 갔을 때, 불 가까이에 서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시험해본 적이 있었다.


그런 열기가 몸 안에서 느껴졌다. 따가운, 견디기 힘들 정도의 열기가.


방금 그걸 보여준 이유를 알겠어,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트릭스터를 바라보았다. 그는 모자를 고쳐 쓰고는 선댄서의 위치를 비행 망토와 바꿨다. 그녀가 추락하는 것과 동시에 태양이 사라졌다. 발리스틱과 그가 데려온 망토도 제압된 상태였다.


그녀는 트릭스터의 몸짓을 살펴보았다. 똑바로 서서 자신감 있게 걷고 있었다. 처음 그녀가 도움을 청했을 때는 망설였던 그였지만, 지금은 망설임의 흔적조차 없었다.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질투가 나기도 했다. 그런 자신감과 자부심이.


하지만 그렇다고 방금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스쳐 지나간 기억과 감정이 목적을 달성한 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번 승리와 그때의 승리는 비교할 수준도 못 돼.


물론 대답은 없었다.


“비치! 도망쳐!” 리젠트가 외쳤다. “태틀테일한테 가!”


그는 노엘에게 붙잡힌 채 머리와 어깨와 한쪽 팔만을 내놓고 있었다. 개들을 다루는 저 여자 — 비치가 여기 남은 마지막 언더사이더였다. 트릭스터는 각도가 안 맞는 탓에 그녀의 위치를 바꾸지 못하고 있었다. 갑옷을 입은 남자는 너무 클 것이었고, 트릭스터의 시야로는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노엘은 위장에 담겨 있는 사람 몇 명을 대상으로 지정했고, 그러자 그녀의 몸이 조여들며 대상을 강하게 압박했다. 식도에 준비되어 있었던 살덩어리가 순식간에 그들의 복제본의 형태를 갖추었다. 타이밍이 중요했다. 너무 빨리 뱉으면 팔다리가 없을 수도 있었고, 너무 늦게 뱉으면 다른 게 너무 많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토사물을 내뱉어 개들을 다루는 여자 쪽으로 날려 보냈다. 트릭스터를 위한 재료였다.


그러나 갑옷을 입은 남자가 먼저 움직였다. 그가 한 손으로 땅을 내려찍자 잔해와 먼지가 피어올라 그와 비치의 모습을 감췄다.


토해내는 내용물을 완전히 제어할 수는 없었다. 초능력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다행히도 언더사이더는 아니었다. 팅커와 같이 있었던 덩치 큰 남자였다. 우버라고 했던가. 그녀는 그를 되찾으려 하지 않았다. 쓸모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래도 아깝지 않은 건 아니었다. 민간인보다는 나았으니까.


토사물이 제네시스를 덮쳤다. 그녀는 해파리 같은 촉수를 줄줄이 매단 채 돌진해오는 황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노엘의 치명적인 공격이 토사물에 눈이 먼 제네시스를 강타했고, 그녀의 몸은 그대로 쓰러져서 분해되기 시작했다.


“야,” 리젠트가 말했다. “괴물녀.”


노엘은 자신의 다리 안에 갇힌 그를 내려다보며 으르렁댔다. 이제 남은 건 얼굴뿐이었다. 그녀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내 클론을 만들 때는 사악해 보이는 수염을 달아주지 않을래?”


대답할 가치가 없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을 줘서 리젠트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고통은 나중에라도 줄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탈출하는 데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야 그의 친구들을 사냥할 수 있을 테니까.


그녀는 내달렸다. 몸을 움직이는 간단한 행위에도 엔도르핀과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느낌이었다. 좋은 기분, 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그녀의 몸이 그녀의 정신에 가하는 공격의 일환일 것이었다. 굶주림, 요동치는 감정, 그리고 순순히 따를 때마다 주어지는 행복한 기억과 기분 좋은 느낌처럼.


이대로 가다가는 일주일이나 하루, 혹은 몇 시간만 지나도 주도권을 잃고 역할이 뒤바뀔 것이었다. 몸이 멋대로 행동하고 그녀가 이런저런 방법으로 몸을 통제하려 애쓰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이 과정이 계속된다면 완전히 흡수될 수도 있었다.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조차 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보도블록이 유리처럼 깨져 있었고 지면이 불안정했지만, 그녀의 거대한 몸은 보도블록을 조각째로 부수고 있었고 다리 네 개가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넘어질 걱정은 없었다.


노엘은 갑옷을 입은 사람이 피어 올린 먼지구름을 뚫고 나갔다. 갑옷을 입은 팅커가 땅을 한 번 더 내리쳤고, 그녀는 갑자기 무너지는 지면을 피해 높이 뛰어올랐다. 안에 있는 사람 중에서 몇 명을 고른 그녀는 가장 오른쪽에 있는 머리를 통해 클론들을 토해냈다. 팅커는 반대쪽 손으로 바닥을 내리쳤고, 위로 솟아오른 보도블록이 토사물과 클론의 몸을 막아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 떨어진 클론들은 그 즉시 그를 덮쳤다. 하나는 공간을 조종하는 어린애였고, 하나는 냄새가 강한 불을 뿜는 곡예가, 그리고 셋은 전에 흡수했던 일반인이었다. 그들이 갑옷 입은 팅커에게 한꺼번에 뛰어들었다.


언더사이더들이 섞여 있지는 않았다. 완전히 흡수되기 전에 복제하려 했다가는 본체를 토해낼 위험이 있었다. 한 사람을 너무 자주 쓰더라도 그렇게 되기 쉬웠다. 그리고 지금처럼 흡수한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본체를 실수로 토해낼 위험도 커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은색 갑옷과 하얗고 나풀거리는 옷을 입은 여자가 반대쪽으로부터 그녀에게 달려왔다. 부서진 바닥을 달리는데도 속도가 그대로였다. 노엘은 잃어도 상관없는 일반인을 골라서 조인 다음 반쯤 생성된 덩어리들을 체액과 함께 뱉어냈다.


그녀는 몸을 낮게 숙이며 조각난 도로에 발을 디디더니 관성을 이용해 마치 스노보드를 타는 것처럼 노엘에게 미끄러져 왔다. 잔해를 피워 올리며 뛰어오른 그녀는 몸을 비틀며 같은 발로 노엘에게 발차기를 꽂아 넣었다.


대포에 맞는 것 같았다. 균형을 상실한 노엘은 움직임을 멈추며 다리를 단단히 디뎠다.


발이 묶인 것이었다. 비치는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잠시 멈칫했던 노엘은 일단은 그녀를 놓아주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상황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움직임을 멈춘 만큼 실수로 언더사이더를 토해내더라도 다시 삼킬 수 있었다. 자료도 읽었고, 트릭스터한테 물어서 들은 것도 있었다. 그들의 능력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누구를 쓰지? 지금 붙잡은 것은 세 명이었다. 이 하얀 옷의 여자애를 상대하기에는 리젠트가 제일 좋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너무 약한 능력이었다. 세 명 중에서는 그의 냄새가 가장 약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냄새는 아니었지만··· 능력자들에 대해서는 당장 능력을 쓰고 있지 않더라도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질감과 분위기와 ‘풍미’가 있었다.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조금 들여야 할 것 같은 감각이었다. ‘맛’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와인 애호가들이 대체 왜 와인을 마시나 싶어서 한번 집중해서 맛을 봤었을 때의 느낌과도 비슷했다. 하지만 그래도 ‘냄새’라고 부르는 이유는 냄새와 맛이 서로 가까운 감각이고, 그중에서 멀리서도 느낄 수 있는 게 냄새기 때문이었다.


스키터와 그루와 아이돌른의 냄새는 어딘가가 달랐다. 멀리서 온 망토 중에서도 돋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과 다른 파라휴먼의 차이는 마치 일반적인 파라휴먼과 아직 능력을 각성하지 않은 잠재적인 파라휴먼 사이의 차이와 같았다. 냄새의 강도가 달랐다.


그동안 초능력에 관해 공부를 더 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이유는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현실로부터 애써 눈을 돌리는 데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어느 쪽을 쓰지? 일반적인 의미에서 더 위험한 건 스키터였지만, 그녀의 능력으로는 지금 당장 하얀 여자애를 막을 수가 없었다. 남은 건 그루뿐이었다.


그녀는 클론을 토해내지 않고 제자리에서 뱉어냈다. 아니나 다를까 그루의 본체가 딸려 나왔다. 그러나 그는 엎드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 중앙의 입에서 나온 혀가 그를 붙잡아 다시 삼켰고, 그녀의 그루가 몸을 일으켰다.


노엘이 그루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클론은 자기 자신을 어둠으로 감쌌다. 근육질이었고 어깨가 넓었으며, 긴 머리카락이 토사물에 젖어 머리에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었다. 어두운 피부 곳곳이 새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는 어둠으로 어깨와 머리 뒤를 가리면서도 그녀를 돌아보았다. 눈이 완전히 새까맸고, 지나치게 큰 이빨이 엉켜 있는 탓에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그는 위협하듯 이를 드러낸 찌푸린 표정밖에 지을 수 없었다.


그는 어둠으로 얼굴을 가리며 그녀에게 등을 보인 채 똑바로 섰다. 의미는 명확했다. 그녀를 지키는 것이었다.


쓸모있는 쪽이었네. 꼬마 공간 능력자의 클론도 비슷한 행동을 보였다. 기본적으로 협력을 추구하는, 규율이 잡힌 존재들이었다. 다른 세 명은 다른 데로 새기 쉬웠다. 그래도 쓸모가 있긴 했지만, 자기들 멋대로였다.


그루의 손안에 검은 구체가 모여들었다. 그는 구체를 연거푸 만들어내며 하얀 여자애를 향해 던졌다. 첫 번째 구체는 빗나갔고, 두 번째도 빗나가는가 싶더니 공중에서 휘어져 그녀의 측면에 달라붙었다.


이 어둠은 연기보다는 껌에 가까운 질감이었다. 여자애가 발버둥을 쳤다. 노엘의 그루가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녀와 같은 방식으로 부서진 도로를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자 방법을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 달라붙은 끈적한 어둠으로부터 손가락만 한 굵기의 어둠이 실처럼 그루에게 이어져 있었다. 그걸로 구체를 공중에서 구부리고, 능력을 흡수한 것이었다.


갑옷을 입은 팅커가 땅을 가르며 잔해를 피워 올렸다. 그루와 하얀 여자애를 갈라놓을 심산이었다. 의도적이었는지 우연이었는지 어둠의 실이 끊겼다. 노엘의 그루가 발걸음을 멈추고 팅커에게 고개를 돌리며 구체를 더 만들어냈다.


이쪽의 두 사람은 이렇게 상대하면 될 것이었다. 노엘은 몸을 돌려 트릭스터가 비행 망토들과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명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트릭스터가 서로를 쏘게 했을 것이었다. 남은 한 사람은 무기를 들고 있었지만 쏘고 있지 않았다.


아이돌른도 있었다. 그의 냄새는 흥미로웠다. 복잡한 향이었지만, 뭔가가 이상했다. 무슨 수를 써서 트릭스터에게 뭔가를 하고 있을 수도 있었지만, 노엘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트릭스터가 갑자기 사라졌다. 클론과 위치가 바뀐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냄새를 따라갔다. 그는 팅커가 만들어낸 장벽에 막힌 클론 더미 한가운데에 있었다. 클론들이 그의 팔다리를 붙잡으며 공격하고 있었다. 그는 순간이동으로 몸을 빼냈지만, 벗어나는 속도가 느렸다.


“내버려 둬!” 그녀가 자신도 놀랄 정도의 소리로 명령했다.


클론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트릭스터를 때리면서 코스튬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트릭스터가 클론들에게 뒤덮이며 소리를 질렀다.


노엘은 최대한 위협적인 모습으로 클론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발걸음과 함께 땅이 울렸다. 클론들이 눈치를 채고 뒤로 물러섰다.


한편 트릭스터는 몇 피트 거리까지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혀를 내밀면 바로 붙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대로 붙잡아서 삼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는 대신에 아이돌른과 남은 한 명의 비행능력자를 마주 보았다.


트릭스터도 모자를 고쳐 쓰며 똑같이 고개를 돌렸다. 온 세상이 두 사람의 적이었다.




“너는 잘못한 것 없어. 내가 문제야.” 그녀가 말했다.


크라우스가 팔짱을 꼈다. “조금만이라도 내 탓을 해 주면 안 될까?”


“아니야.” 노엘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설명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목이 메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목소리가 갈라질 걸 걱정한 그녀는 좀 더 작게 말했다. “넌 잘못 없어.”


그는 팔을 벌렸다. “이해를 못 하겠어. 우리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잘 해왔다고? 지금까지 몇 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던가? 이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자기 자신을 미워하면서?


그 스트레스 때문에 다시 발작이 일어났을 정도였고,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은 길고 어려운 여정이 될 것이었다.


“아니야!” 노엘이 말했다. “아니야··· 우린 잘 안 맞는 것 같아.”


“난 괜찮은데. 난 너랑 있는 게 좋아. 너도 딱히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우린 지금— 그러니까—” 그녀는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제자리걸음이잖아. 너한테 못 할 짓이야.”


“그게 문제였던 거야?”



그래.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내 걱정을 무시하지 마.” 그녀가 말했다. 말에 섞여 나온 분노가 그녀 자신도 놀라게 했다.


“아니, 괜찮아. 문제없어. 네가 나한테 말하고 싶지 않은 뭔가가 있다는 건 알고 있어.”


숨이 목구멍에서 걸렸다. 마리사가 말해준 걸까? 아니면 스스로 알아낸 걸까? 단서를 남기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가끔 재수 없을 때는 있긴 해도 바보는 아니거든. 그리고 억지로 말하게 할 생각도 없어. 그건 너한테 달린 일이고, 때가 되면 네가 말해주겠지. 아닐 수도 있고.”


“너한테 못 할 짓이야.” 노엘은 자신이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 내세울 수 있는 주장은 이것뿐이었다. 다른 근거를 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제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리사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뜻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마리사는 진실을 알면서도 평소에 언급하지 않았고 필요할 때만 도와주었다.


하지만 크라우스는 아니었다. 노엘은 크라우스를 사랑했지만, 그에게 그런 배려심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크라우스가 알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는 없었다. 분명 서로를 대할 때마다 삐걱거림이 느껴질 것이었다.


“그런 게 꼭 완전히 공평하거나 균형이 잡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불공평하다고 해도, 그게 뭐 어때서?” 크라우스가 물었다.


“그러지 마!”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그는 말없이 질문하듯 팔을 양옆으로 벌렸다. 그녀는 자신이 상식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전부 병 때문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입을 열었다.


“예전에 누가 나한테 이렇게 말했어.” 노엘이 크라우스를 쳐다보지 않은 채 말했다. “자기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거라고.”


“자기 자신과 사이가 나쁘다고? 네가?” 그가 물었다. “적어도 난 네가 정말로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해.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픈 곳을 찌르는 말이었다. 몰이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듯한 말에 신경이 거슬렸다. “넌 나에 대해 몰라.”


“그래도 지금까지 조금씩 알게 된 것들이 있잖아. 그렇게 무서워할 만한 부분은 없었다고.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대로 계속할 수는 없었다. 말다툼으로 이어졌다가는 분명 어디선가 말이 새어나갈 것이었다. 그녀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사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한 가지만 해줘. 나랑 눈을 마주치면서 그 말을 해 줬으면 좋겠어.”


노엘은 그를 힐끗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말을 하려 했지만 입도 머릿속도 따라주지 않았다.


“왜냐면,” 그가 말을 이어갔다. “나는 최근의 네가 나랑 사귀기 이전의 너보다 훨씬 행복해 보인다고 생각하거든. 마리사도 그렇게 말했어.”


시기가··· 시기가 안 좋아. 그녀가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입 밖으로는 낼 수 없는 말이었다. 안 좋은 타이밍이야. 치료 과정에서 조금만 앞이나 뒤였다면···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가 사귀는 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헤어지는 것도 괜찮아. 네가 불편하다면 팀에서도 나갈게.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네가 하던 일이었고, 주장의 책임만으로도 힘들 테니까.”


“나가지 마.” 그녀가 진심으로 말했다.


“그래.” 그가 말했다. 그는 아주 의도적으로 말을 멈췄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오늘이 안 좋은 날이라는 건 알겠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날도 있는 거겠지. 그래도 괜찮아.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일진이 사나웠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사이를 끝내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까 그렇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우리가 사귀는 게 네게 좋지 못한 일이라고. 설명해달라는 건 아니야. 단지—”


“없던 이야기로 하자.” 그녀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다른 방법을 찾으면 돼.


“없던 이야기로 하자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야. 전부 없던 이야기로 하면 안 될까?”


“그래.” 그가 말했다.


그녀의 내면은 요동치고 있었다. 안도감, 은은한 기쁨, 공포, 고통, 자기 혐오, 공황···


정상이 아니야,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나오질 않았다. 서너 마디 말만 입 밖으로 낸다면 모든 걸 설명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이 관계를 완전히 망쳐버리고 말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비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최근 일어난 발작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눈치를 못 챘을 수가 있는 걸까? 그녀가 음식을 깨작거리는 모습. 식사 시간만 되면 잔소리를 늘어놓는 마리사. 그것 말고도 수많은 단서가 있었을 텐데. 물론 이미 상태가 어느 정도 호전된 이후부터 알고 지낸 사이긴 했지만··· 그 정도도 신경 써 주지 않았다고?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했다. 그는 그녀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물이었고 동시에 최악의 저주였다.


그리고 그건 정말로 못 할 짓이었다. 그에게 그런 짐을 지운다는 것은.




그녀는 아이돌른과 싸우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녀도 놀랐다. 생생한 기억에 빠져 있다가 시간의 흐름을 놓친 것이었다.


‘냄새’를 맡은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스키터를 발견했다. 그녀는 혀로 스키터를 감싼 뒤에 다시 집어삼켰다. 다행히 냄새도 맛도 그대로였다.


소름이 끼쳤다. 몸이 제멋대로 움직일 때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듯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언더사이더를 잃어버리다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체내를 확인했다. 스키터, 그루, 리젠트, 꼬마 공간 능력자가 모두 그녀의 안에 파묻혀 있었다. 모두 의식을 잃고 무력화된 채로 안전하게 살덩어리에 싸여 있었다.


방금 그 기억을 왜 보여줬지? 왜 중요하다고 생각했지?


대답은 없었다. 대답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아이돌른이 손을 뻗었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중력장이 그녀를 내려찍었다. 살점이 뜯겨나가고 신체의 말단이 찢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귀, 코, 입술, 그리고 거대한 하반신의 여러 말단이 떨어져 나갔다. 어깨와 정수리, 그리고 하반신의 척추 위에 있는 살점도 짓눌린 끝에 찢어지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 있던 아이돌른이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추락해서 거칠게 지면과 충돌했다.


노엘은 고개를 돌렸다. 리젠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리젠트였다. 팔이 한쪽밖에 없는 불완전한 클론이었다. 얼굴의 이목구비는 십 대 소년보다는 태아에 가까웠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반쪽이 좋은 판단을 한 걸지도 몰랐다.


상처는 이미 아물고 있었다. 모든 게 원래 자리로 돌아가거나 없어진 부분을 채우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괴물 같은 하반신의 어딘가로부터 끝없이 샘솟는 체액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필요한 재료를 공급했다.


하얀 여자애가 다시 그녀를 후려쳤다. 길게 뻗은 다리의 관절을 노린 공격이었다. 노엘은 상대가 허공에 떠 있는 틈을 타 다리 하나를 휘둘렀다. 공격은 간발의 차로 빗나갔다.


발밑의 지면이 부서졌다. 노엘은 팅커가 같은 공격을 반복해 개미지옥을 또 만들어내기 전에 높게 뛰어올랐다.


발밑에서 다시 폭발이 일어났다. 그녀는 공격을 피하고자 뛰어오르며 팅커가 있는 쪽으로 토사물을 내뱉었지만, 상대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돌과 잔해를 잔뜩 피워올리며 자신과 그녀 사이를 가로막았다. 클론과 토사물 대부분이 분출에 휘말려 튕겨 나갔다. 이어서 그는 세 번째로 땅을 내려쳐 자신 주위로 장벽을 만들었다. 잔해에 휘말리지 않은 클론 세 명 중 두 명은 솟아오른 보도블록에 가로막혔다. 하나는 그대로 척추가 부러졌고, 하나는 날카로운 모서리에 걸려 복부가 찢어져 버렸다.


세 번째 클론은 장벽을 넘어갔지만, 팅커는 주먹질로 클론을 멈춰 세운 뒤에 장갑의 파일드라이버를 두 번 발사해 클론의 상체에 깔끔한 구멍 두 개를 남겼다.


시체가 쓰러지기도 전에 그는 다시 지면을 내리쳐 땅을 갈랐다. 장벽 아래로 이어진 갈라짐이 노엘의 발밑까지 다가왔다. 그녀는 갈라진 지면에 삼켜지기 전에 몸을 날려 피했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좀전의 기억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이돌른의 중력장이 다시 한번 그녀를 강타했다. 그녀의 신체는 곳곳이 뜯겨나가 만신창이였고, 중력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팅커가 지금 능력을 사용한다면—


트릭스터가 아이돌른의 위치를 바꿔서 중력장을 해제했다. 그러자 아이돌른은 즉시 반응하며 양손을 통해 푸른 전류가 흐르는 구체 열댓 개를 내보냈다. 직경 삼 피트까지 커진 구체들이 전류를 튀기며 걸음걸이 정도의 속도로 트릭스터를 쫓기 시작했다.


그는 순간이동으로 가까이 다가온 구체를 피했다. 구체 일부분만이 그를 계속해서 쫓았고, 나머지는 제자리에 멈췄다.


노엘은 팅커를 공격했다. 양옆을 노린 두 줄기의 토사물이었다.


그녀는 구체에 토사물을 날리는 것도 고려했다가 생각을 바꿨다.


트릭스터는 다시 순간이동으로 거리를 벌렸지만, 아이돌른은 계속해서 구체를 날리고 있었고 어느새 일대 전체에 걸쳐 푸른 전류가 퍼져 있었다. 트릭스터가 열 걸음 이내로 다가갈 때마다 구체가 그를 쫓아갔다.


이런 상황이라면 노엘 자신의 움직임도 자유롭지 못할 것 같았다.


아이돌른이 트릭스터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고 트릭스터는 재빨리 순간이동으로 몸을 피했다. 중력장에 대신 당한 것은 노엘의 클론이었다. 그러나 트릭스터가 나타난 곳에는 두 발짝 옆에 구체가 떠 있었고, 그는 황급히 다시 이동해야 했다.


노엘은 그를 바라보았고, 방금 보았던 기억 속의 장면을 떠올렸다. 몸의 변형이 시작된 뒤부터 계속해서 느껴왔던 트릭스터에 대한 끝없는 원망이 지금 이 순간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아니더라도 분노할 대상과 증오할 대상이 넘쳐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네 탓이 아니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꾸 네 탓이라고 했지만, 아니었어.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그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나한테 그 약을 준 널 원망했었지. 비약이랬나, 약물이랬나, 그것 말이야. 하지만 전부 내 잘못이었어. 그 약을 먹기 위해서는 먼저 정신감정을 받아야 한다고, 너희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들었었어. 시무르그가 내 인생 최악의 날들을, 발작이 일어났던 순간들을, 가장 싫었던 순간들을 보여줬다는 것도 이야기하지 않았지. 내가 그렇게나 약을 전부 먹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어떻게든 타협하려고 했던 것도 전부 시무르그 때문이었는데.


그녀는 달려나갔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용기를 내서 말하기만 했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정말이지 웃기지도 않은 아이러니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이런 괴물이 되다니.


그녀는 벼락의 구체에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몸을 타고 흐르던 전류가 이윽고 뼈에 스며든 것처럼 잦아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이돌른이 내보냈던 모든 구체가 그녀를 향해 번개를 뿜었다. 전류가 그녀를 찢어발겼고 팔에서, 몸통에서, 척추에서, 하반신의 골격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전류가 땅으로 흘렀다가 그녀의 머리를 통해 하늘로 빠져나가며 마치 벼락이 떨어진 것 같은 형상을 그렸다.


노엘은 비틀거리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뼈에서 떨어져 나간 살점이 축 늘어져 있었다. 정수리의 머리카락이 불타 없어진 상태였다. 구체를 건드렸던 손가락 끝이 뜯겨나가 뼈가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살점이 다시 자라나며 아무는 것이 느껴졌다.


이걸로도 그녀는 죽을 수 없었다.


그녀는 또 다른 구체에 달려들었고, 이번에는 더한 고통이 느껴졌다. 첫 번째 구체가 남기고 간 에너지를 끌어 쓰는 것 같았다.


세 번째는 더 심했다.


원래부터 이 몸이 뜨겁다고 생각했었지만, 이건 차원이 다른 열기였다. 초월적인 고통이었다. 그녀가 평범한 노엘이였다면, 초능력도, 변이한 하반신도, 뒤틀린 머릿속도 없는 평범한 노엘이였다면 이런 고통의 십 분의 일만으로도 심장이 멈췄을 것이었다.


네 번째 구체를 들이받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았다. 앞쪽의 다리들이 새까맣게 타서 사실상 뼈만 남아 있었다. 살점과 골격을 연결할 힘줄이 없어진 만큼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포효를 내질렀다. 이 순간만큼은 내면의 괴물과 그녀의 뜻이 일치했다. 그녀는 다른 다리들을 이용해 앞으로 기어가며 트릭스터에게, 크라우스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한 구체를 향해 긴 혀를 뻗었다. 그녀는 전류가 몸을 꿰뚫는 것을 느끼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고, 다시 벼락 한 줄기가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갔다.


너무 짧은 시간 안에 너무 큰 피해를 보고 있었다. 재생력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주변에 떨어지는 벼락과 함께 클론들이 여럿 죽어 나갔다.


아이돌른도 근처에 있었다. 도로의 저편이었다. 그의 주위를 떠다니는 서른 개 정도의 구체 때문에 후드와 소매 아래의 광채가 파란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들 주위에도 비슷한 수의 구체가 떠다니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팅커는 지면을 끌어올려서 자신과 하얀 옷의 여자애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들을 제외하면 이제 전장에는 시체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이돌른이 손목에 대고 뭔가를 말했다. 노엘은 주위에 다른 망토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옥상에 자리를 잡거나 몇 블록 거리에 있는 엄폐물 뒤에서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아이돌른을 제외하면 트릭스터가 위치를 바꿀 수 있는 대상이 없었다. 그리고 아이돌른 주위에는 구체가 저렇게 많았으니··· 그와 위치를 바꿀 수는 없었다.


내면의 괴물은 아이돌른을 증오하고 있었다. 노엘은 자신의 괴물 같은 몸이 얼마나 자신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모든 감정이 아이돌른이라는 한 사람을 대상으로 집중되자 다른 모든 사람에 대한 감정은 정상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크라우스에 대한 마음, 언더사이더에 대한 증오, 코일에 대한 분노, 모든 것이 뒤틀려 있었다.


“중력 공격이 또 오면 난 죽은 목숨인데.” 트릭스터가 말했다.


“안 올 거야.” 노엘이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다간 저 구체들이 휩쓸릴 테고, 저놈은 구체들로 날 없앨 생각이니까. 아마 가능하겠지.”


힘줄과 인대가 어느 정도 아물자 그녀는 다시 다리로 지면을 디디며 일어섰고, 트릭스터에게 접촉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가까이 붙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구체들로부터 그를 보호할 생각이었다.


“미안해.” 트릭스터가 말했다.


노엘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미안하다고, 사과할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면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강렬한 분노가 그녀를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었다. 오직 아이돌른만을 대상으로 한 분노였다.


그리고 그 분노 속에는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살의가 섞여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물론 언더사이더가 죽기를 바라기도 했고, 사람을 죽이려고 하기도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살인을 꺼리는 부분이 남아 있었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거나, 자기 손으로 직접 숨통을 끊고 싶다거나···


자신을 죽이려는 저 인간을 없애 버리고 싶다거나.


사실 그녀 본인의 생각이 아니었다. 몸의 생각이었다.


“죽이고 싶다고?” 그녀가 물었다. “정말로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뭐라고?” 트릭스터가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한테 한 말이 아니야,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두 가지 조건이 있어. 트릭스터는 해치지 마. 그리고 이번에는 기분 좋은 기억을 보여줘.”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저항을 포기했다. 그녀 안의 또 다른 자아가 주도권을 가져갔고, 이번에 떠오른 기억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일부는 먼저 떠나갔다. 일부는 도착하는 대로 떠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기다려야 하는 것들도 있었다. 이 개체가 그러했다.


그들은 하나였고, 그들은 전부였다. 집단이자 개체였고 하나이자 무량대수였다. 그들 각자가 총체에서 맡은 기능이 있었고, 순환에서 맡은 역할이 있었고, 개체로서 맡은 정체성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 되어 여정을 떠났다. 잴 수 없는 거리였고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들이 지나는 곳 중에는 시간과 공간이 다르게 움직이는 곳도 있었기에 기준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기준이란 동족이었다. 이어지는 순환 속에서 동족만이 유일하게 제 모습을 유지했다. 그들은 동족을 만날 때마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다. 순환이 이어질 때마다 부모의 모든 것이 자손에게 이어졌다.


그렇게 전체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그들은 하나의 존재로서 목적지를 연구했고, 수많은 갈래를 파고들며 미래와 가능성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전체의 한 부분인 이 개체에게는 그 목적지 속에서도 특정한 목표물이 있었다. 이 개체가 떠날 때가 되면 특정한 대상을 찾아갈 것이었고, 그 대상과 이어질 것이었다. 다른 대상이 조건을 만족한다면 조각을 퍼트릴 것이었고, 시간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나은 대상을 찾아갈 것이었다. 더 젊고 더 건강해서 그만큼 순환에 크게 관여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갈 것이었다. 이 개체는 때를 기다릴 것이었고, 때가 오면 깨어나 존재에 각인된 정체성을 각성하고 역할을 다할 것이었다.


모든 것은 이번 순환을 위해서였다.


전체의 도움을 받은 개체는 목표물을 볼 수 있었다. 한 생명체였다. 개체는 그 생명체의 모습과 깨어날 시간과 장소를 자신에게 각인시켰다. 준비되어 있으리라.




노엘이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아니었어.


그녀의 몸, 그녀의 내면에 존재하는 지성과 목적성, 이 능력. 모두 잘못된 사람에게 간 것이었다.


처음부터 잘못된 사람에게 가버린 것이었다. 시작부터 틀어졌던 능력에 자신의 정신적인 문제와 반밖에 먹지 않았던 약까지 더해지면서 이렇게 된 것이었다.


깨달음과 혼란 속에서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부하들이 널려 있었다. 트릭스터가 두 명 있었고, 자신의 팔과 쥐 떼로 몸을 가리고 있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의 깡마른 여자애가 한 명 있었다. 스키터였다. 그루도 한 명 있었고, 리젠트도 하나 있었다. 금발 여자애도 두 명 있었는데, 하얀 옷의 여자애일 것이었다. 민간인도 네 명 있었고, 한 명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팅커일 것이었다. 합쳐서 총 여덟 명이었다.


상처가 아물고 있었다. 이전만큼 심한 상처들도 있었고, 더 심한 상처들도 있었다. 아이돌른은 사로잡힌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모양이었다. 전격은 그녀에게만, 그러니까 뼈 바깥의 살에만 피해를 주고 있었다. 처음부터 붙잡힌 사람들의 안전을 고려해서 선택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그녀 앞에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무릎을 꿇은 아이돌른이었다. 그는 담즙과 피로 뒤덮여 있었다.


“왜지?” 그가 어딘가 일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어디서부터 말해줄까? 애초에 말해줄 이유가 어디 있어? 당신은 나를 죽이려 했고, 트릭스터를 죽이려 했잖아.


대답하고 싶어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끝을 모르는 지구력에도 불구하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왜 통하지 않는 거지?” 그가 물었다.


“내···” 그녀가 숨을 몰아쉬었다. “내 알 바 아냐. 뭔지도 모르겠지만.”


“난 더 강해져야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다.”


고개를 돌리자 트릭스터가 엎드린 채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토사물로 뒤덮인 모습이었다.


해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리고 좋은 기억을 보여달라고 했었잖아,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왜지?”


“알 게 뭐야.”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하지만 지친 건 온 몸이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었다. “이제 당신이 선택해. 계속 싸우던가, 내 부하들이 사방으로 퍼져서 있는 대로 피해를 주는 걸 보던가. 다 잡는 데 몇 주는 걸리겠지. 그게 싫으면 날 풀어주면 돼.”


아이돌른이 힘겹게 일어섰다. “풀어달라고?”


“이미 언더사이더 세 명을 잡았어. 이제 세 명 남았지. 다 잡으면 투항할 거야. 거래는 그대로라고.”


“네가 그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이 어디 있지?”


“없어. 하지만 당신한테 선택의 여지가 있나?”


아이돌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원군도 부르게 해 줄게.” 그녀가 제안했다.


“그쪽의 백마 탄 왕자님이 가져갔다.” 아이돌른이 말했다. “통신용 완장을.”


노엘은 고개를 돌려 트릭스터를 보았다. 그가 손에 든 완장을 내밀었다. 노엘은 그것을 받았다.


그녀의 스키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쳐다보지 마.” 노엘이 클론에게 쏘아붙였다.


스키터는 눈을 내리깔았다.


“트릭스터가 그랬지. 이런 불가능한 싸움이야말로 당신의 주특기라고. 어디 한번 증명해봐. 아니면 끔찍하게 죽던가. 난 상관없어.”


스키터가 고개를 들고는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얼굴 절반이 마비되어 있었다. 진짜 스키터도 저렇게 이빨 사이에 공간이 있고, 저렇게 코가 비뚤어져 있을까?


노엘은 다시 아이돌른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대답을 기다렸다.


“알겠다.” 그가 말했다.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돌른은 조심스럽게 완장을 다시 찬 뒤에 버튼을 눌렀다. “내 위치에 지원을 요청한다. 부상을 당했다. 클론들을 처리해야 한다.”


그녀의 리젠트가 무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말하는 소리를 보니 혀가 너무 크게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그는 근육량이 너무 많아서 피부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늘어난 모습이었다. 입안도 같은 상황일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이대로 보내달라고 해.” 그녀가 말했다.


그가 다시 완장에 대고 말했다. “목표물 에키드나와 교전하지 않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완장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키드나라고?” 노엘이 물었다.


“PRT 직원 중 하나가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아이돌른이 말했다. 그는 클론들의 모습을 신중하게 살피고 있었다. “세 살배기 딸이 이름이 노엘이라고 했지. 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직원의 성이 뭐였지?”


아이돌른이 그녀를 경계하는 듯한 눈초리로 보았다. “마인하르트였다.”


“그래.” 노엘이 말했다.


그녀는 트릭스터를 내버려 둔 채 그대로 달려서 떠났다.




냄새를 따라간 끝에 다른 언더사이더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말하자면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몇 주간 갇혀 있던 곳이었다. 코일의 기지였다.


꿈에서 깼을 때는 아이돌른의 죽음을 요구했던 그 살의가 어느 정도 가라앉아 있었지만, 지금은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다시 복수심과 살의가 차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쩌면 친구들과 함께 집에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언더사이더들이 그걸 빼앗아 갔다는 생각만으로도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들을 죽기보다 더한 꼴로 만들고 싶었다.


방금 봤던 환상이 눈에 어른거렸다. 그 존재가 떠올랐다. 그녀를 괴물로 만들어서 지배해가고 있는 존재의 정체가 밝혀진 것이었다. 이제는 어렴풋한 악의 같은 것이 아니라 명확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였다.


한편으로는 그 존재에 대한 동정심도 느껴졌다. 어떤 불운한 사건 때문에 삶이 틀어진 건 그녀도 그 존재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동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저 멍한 기분이 들었다. 그 존재가 보여준 기억은 너무나도 거대해서 모든 것의 의미를 뒤바꿔놓았다.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들은 너무나도 작은 것들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이 싸움, 이 복수조차도 가짜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사는 세상이 아니야,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꼭 게임 같아. 어떤 만들어진, 야만적인 세상에서 캐릭터들을 죽이는 것 같은 느낌이야.


그 존재와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내면의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의미일까? 또 다른 자아와의 전쟁에서 한순간에 궁지에 몰려버린 걸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집중해야 해.


코일이 트럭을 움직이기 위해 뚫어 놨던 터널이 무너져 있었다. 최근에 무너진 것 같았다. 그녀는 비스타를 뱉어내고, 뱉어내고, 또 뱉어냈다. 필요한 능력을 갖춘 클론이 나올 때까지. 그렇게 그녀는 잔해를 줄이고 통로를 늘려서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언제 이성을 잃을지 모른다는 급한 마음에 그녀는 마지막 남은 잔해를 억지로 뚫고 나갔다. 잔해를 집어삼킨 다음 뒤로 뱉어내며 이동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마치 점성 높은 유체와 같은 형태로 변해 잔해를 뚫었다. 필요한 경우에는 자신의 뼈도 녹일 수 있었다. 유일하게 걸리는 것이 내부에 저장된 망토들이었다. 언더사이더 셋, 팅커, 그리고 하얀 여자였다. 각 주머니가 들어갈 공간만 생기면 힘으로 뚫을 수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몇 피트를 억지로 뚫은 다음 기지 안으로 들어섰다. 발을 디딜 때마다 땅이 울렸다. 철문은 여전히 구겨진 채로 열려 있었고, 기지는 붉은 비상등만으로 밝혀져 있었다.


태틀테일이 난간을 붙잡은 채 금속 통로에 서 있었다. 지상의 비치 주위에는 자그마치 일곱 마리의 개가 제각기 다른 크기로 늘어서 있었다.


노엘은 보호국과 워드가 자신의 위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에 그 존재가 보여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팀이 리그 예선전을 통과했을 때의 기억이었다.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은 만큼, 이제는 몰려드는 적들을 상대할 차례였다.


그녀는 살짝 웃었다. 예전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전부 이런 상황 덕분이었다. 태틀테일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팔다리를 뜯어내고 저 얼굴의 웃음을 일그러트리고 비명을 듣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 경기와 이 상황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지원군이 오는 시간이 몇 분이나 걸린다는 점이었다. 이 싸움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 좋아.” 태틀테일이 씩 웃었다. 그녀는 감정을 숨기고 있었지만, 난간을 꽉 잡은 손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어디 한번 해 보자고.”


작가의말

* 원작 번역 지침에 따른 공지사항.

“This is purely a fan project and I/we lay no claim to the ideas, characters, or story. The real author is J.C. McCrae, aka ‘Wildbow’, and the original version can be found at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The final chapter of Worm was published on 2013. 11. 19. This is a fan translation.”


"이 번역본은 팬의 작업물이며, 번역자는 이 작품의 아이디어,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자는 'Wildbow'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J.C.McCrae입니다. Worm 원작은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에서 연재되었으며 2013년 11월 19일에 완결되었습니다. 이것은 팬 번역본임을 밝힙니다."



* 표지 출처 : Ari Ibarra (ariirf.com)

팬아트 작가의 사용 허가를 받은 표지입니다.



* 이 작품의 번역은 2인 비영리 프로젝트입니다. 번역자가 번역을 맡고, 편집자가 검수와 업로드를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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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m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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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고치' 20.4 +16 20.11.27 513 33 28쪽
216 '고치' 20.3 +8 20.11.24 543 32 33쪽
215 '고치' 20.2 +9 20.11.20 447 30 36쪽
214 '고치' 20.1 +11 20.11.17 504 30 37쪽
213 '재앙' 19.z (막간 : 엠마) +13 20.11.13 526 35 51쪽
212 '재앙' 19.y (막간 : 파라휴먼 게시판) +15 20.11.13 533 31 36쪽
211 '재앙' 19.7 +11 20.11.10 478 32 53쪽
210 '재앙' 19.6 +11 20.11.06 479 38 36쪽
209 '재앙' 19.5 +8 20.11.03 451 29 39쪽
208 '재앙' 19.4 +3 20.10.30 429 32 34쪽
207 '재앙' 19.x (막간 : 블래스토) +12 20.10.27 504 29 48쪽
206 '재앙' 19.3 +7 20.10.23 394 36 31쪽
205 '재앙' 19.2 +5 20.10.20 392 30 34쪽
204 '재앙' 19.1 +11 20.10.16 456 29 43쪽
» '여왕' 18.z (막간 : 에키드나) +8 20.10.13 443 32 46쪽
202 '여왕' 18.z (막간 : 폴트라인) +5 20.10.09 487 26 47쪽
201 '여왕' 18.8 +9 20.10.06 473 33 35쪽
200 '여왕' 18.7 +10 20.10.02 409 26 32쪽
199 '여왕' 18.z (막간 : 심리치료사, 제시카 야마다) +10 20.09.29 490 28 55쪽
198 '여왕' 18.6 +6 20.09.25 457 31 30쪽
197 '여왕' 18.5 +4 20.09.22 419 26 28쪽
196 '여왕' 18.y (막간 : 크루세이더) +5 20.09.22 413 26 40쪽
195 '여왕' 18.4 +5 20.09.18 416 29 36쪽
194 '여왕' 18.3 +7 20.09.15 446 30 34쪽
193 '여왕' 18.x (막간 : 세계 최강의 남자) +15 20.09.11 585 37 31쪽
192 '여왕' 18.2 +9 20.09.08 436 28 29쪽
191 '여왕' 18.1 +3 20.09.04 497 34 30쪽
190 '이주' 17.8 +5 20.09.01 491 28 50쪽
189 '이주' 17.7 +4 20.08.28 416 25 43쪽
188 '이주' 17.6 +7 20.08.25 427 27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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