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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르카 님의 서재입니다.

W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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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엘사르카
작품등록일 :
2020.05.08 22:18
최근연재일 :
2022.05.02 23:5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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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963,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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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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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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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글자
50쪽

'이주' 17.8

DUMMY

“잠깐 걸릴 거예요.” 접수대의 여자가 말했다.


트릭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셔도···” 여자가 말을 흐렸다.


“서 있는 게 편하군요.”


“마음대로 하시죠.”


“담배 피워도 되나요?”


“아니요.”


“창문을 연다면—”


여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제 고용주님은··· 아주 까다로운 분이세요.”


“그렇다고들 하죠.”


“담배꽁초가 어디 떨어져 있거나, 담배 냄새가 너무 오래 남는다면 심기가 불편해지시겠죠.”


“이해했습니다.”


“곤란해지는 건 그쪽일 테니까요.” 그녀가 말했습니다.


트릭스터는 걸쇠를 풀고 창문을 열었다. 그는 팔꿈치를 창문에 기댄 뒤에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고, 담배를 피우면서도 신경 써서 연기를 창문 밖으로만 내뱉었다.


창밖으로는 보스턴의 도시 전경과 저 멀리 있는 바다가 보였다. 지난 일 년 하고도 석 달 동안 그가 눈치챈 이 세계만의 특징들이 있었다.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 더 튼튼했다. 건물들은 구조가 보강되어 있었고, 기둥이 조금씩 더 두꺼웠다. 마치 건축가가 무언가 재앙이 닥칠 것을 염두에 두고 설계한 것 같았다. 동시에 창문은 더 큰 편이었고, 고층건물의 경우에는 한쪽 면이 전부 창문인 경우도 많았다.


제스가 어떻게 표현했었더라? 이 세계는 웅장했다. 경외감이 들게 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더 위대한 세계였다. 비유하자면 능선은 더 높았고 계곡은 더 낮았으며, 예술작품들은 더 아름다웠고 극단은 더 극단적이었다. 좋은 게 아니었다. 산을 두 배로 키우고 낭떠러지를 두 배로 깎으면, 어디선가 무언가가 무너질 수밖에 없겠지.


그는 고향이 그리웠지만, 고향은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멀어지는 것 같았다.


“어코드(Accord)님이 당신을 맞이하실 준비가 되셨다고 합니다, 트릭스터.”


트릭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건물 외벽에 담배를 문질러 끄고는 밖으로 던졌고, 창문을 다시 닫고 걸쇠를 채운 뒤에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는 신경 써서 모자를 벗었다.


슈퍼빌런들의 행태는 기묘했다. 그들은 제각기 다른 규칙과 미학과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그 자신을 포함한 그들 전부는 자신만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어코드는 보스턴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인물은 아니었다. 트릭스터가 그에게 접근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겉모습도 슈퍼빌런 같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회사의 CEO 같은 모습이었다. 오직 정교하게 장식된 그의 가면만이 그의 진짜 정체를 내보이고 있었다. 은색 테두리를 두른 어두운 금속 띠들이 서로 겹쳐지며 곡선을 그리고 있는 가면이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기름으로 손질되어 있었고 가르마는 깔끔하게 둘로 나뉘어 있었다. 흰색 양복은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했다. 은색 넥타이핀에는 지문 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았다. 대단한 존재감이었지만, 어코드 본인의 키는 오 피트(152cm)를 살짝 넘는 수준이었다.


트릭스터 역시 신경을 써서 자신의 옷을 세탁하고 머리를 정돈한 상태였다. 도시를 옮길 때마다 행하는 의식이었다. 일단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일이 회담장을 찾는 일이었다. 슈퍼빌런이 열 명 이상인 도시라면 항상 빌런들이 모이는 중립지대가 있었다. 우선 그곳을 찾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에게 전의 도시에서 얻은 돈을 건네며 정보를 얻은 다음 이동하는 것이 정해진 순서였다. 그는 이미 어코드에 대한 정보를 철저하게 수집한 상태였다.


“트릭스터, 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트릭스터가 앞으로 나서며 손을 내밀었다.


어코드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손힘이 강했다.


“필요한 것이라도 있는가?”


“인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아시겠지만 저희 팀은 늘 거점을 옮겨가며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고는 하죠. 현지 세력이 이미 존재하는 곳에 무턱대고 자리를 잡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니, 미리 허락을 구하려고 왔습니다.”


“그렇군.”


“머무르는 걸 허락해 주신다면, 다소의 활동에 대한 허락도 구하고 싶군요. 주로 소매점을 터는 일일 겁니다. 어쩌면 은행 한 곳도요. 모두 당신의 영역에 있는 곳들입니다.”


“혹여나 내가 그것을 허가해 준다 하더라도,” 어코드가 주의의 의미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공짜는 아니지 않겠나, 트릭스터?”


트릭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그럴 생각도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저희가 거친 도시는 리치몬드, 페인, 볼티모어, 그리고 필라델피아입니다. 각각의 도시를 거치면서 저희는 저희가 머무르는 구역의 지배자에게 선불로 현금을 지불했죠. 그리고 각각의 도시에서 수익의 12%, 13%, 12%, 10%를 공유했습니다. 이번에는 선불로 일만 달러, 그리고 모든 수익의 14%를 지불하겠습니다. 머무를 시간을 열흘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주겠다는 뜻의 14%인가. 아첨할 심산이로군.”


“그렇습니다. 머무르는 기간이 더 길기도 하고, 조사 결과 당신이 지배하는 찰스턴 구역이 히어로들의 입김이 약한 편이더군요. 그만큼 더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 겁니다.”


“자네가 방금 말한 수치는 내가 직접 조사해볼 걸세.” 어코드는 세련된 만년필로 메모지에 필기했다. 종이에 선이 없었는데도 어코드의 글씨체는 빈틈없이 깔끔하고 반듯했다.


“거짓말하지는 않습니다.” 트릭스터가 말했다. “그건 죽기 딱 좋은 방법이죠. 저는 삶을 사랑하는 편입니다.”


“그렇게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있긴 하지.” 어코드가 말했다. 그는 만년필의 촉을 쓱 닦고는 뚜껑을 닫았다. 펜은 다시 책상 위에 올라갔다. 책상 위의 물건 배치는 거의 예술이라 할 만했다. 크기와 용도에 따라 물품이 배열되어 있었고, 간격과 각도에 세심한 주의가 기울어져 있었다. 미학적으로도 색깔과 재질이 흐르듯이 사물 하나하나를 통해 이어졌다. 은색과 나무색, 그리고 어두운 자주색이었다.


어코드는 펜의 위치를 살짝 바꾼 뒤에 트릭스터를 다시 바라보았다. “만오천 달러에 십오 퍼센트로 하지. 히어로들이 이곳에 끼어들지 않는 이유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일세. 내가 질서를 유지하기 때문이지. 자네들이 여기서 활개를 치고 다닌다면 내게도 타격이 있을 것이네.”


비싸군. “팀원들과 상의해 보겠습니다.”


“가기 전에 다른 제안을 하나 하지. 혹시 용병 일도 하나?”


“합니다.”


“그럼 의뢰를 하나 맡기고 싶군.”


“무슨 의뢰입니까?”


“특정한 물품을 경쟁자로부터 탈취해 줬으면 하네. 물품의 생김새를 설명해 줄 수도 있고, 사진을 보여줄 수도 있네. 이 일을 맡아 준다면 내 영역에 들어온 것에 대한 비용은 없는 것으로 하지. 그리고 상납금도 10%로 줄이겠네.”


“상대가 누구입니까?”


“블래스토(Blasto). 팅커일세. 이름만큼 폭력적인 성격은 아니지.”


“알고 있습니다. 라틴어로 블래스토는 새싹, 발아, 씨앗이라는 뜻이죠. 지성을 갖고 걸어 다니는 식물을 키우는 식물학자 팅커라고 들었습니다.”


어코드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팅커들이란···. 성가신 존재들일세. 그리고 생물을 다루는 팅커들은 한층 더 성가시지. 그들은 뭔가를 만들면 만들수록 지식과 경험이 쌓이고, 다음번의 무언가는 더 빠르고 더 정교하게 만들어지지. 비유하자면 더 뛰어난 용접기를 만들어서 그걸로 더 뛰어난 전동 드릴을 만들고, 그런 식으로 도구를 계속 발전시키는 셈이네. 그리고 그 과정은 계속해서 반복되지. 블래스토의 작업 도구들을 훔치게. 내가 전리품으로 삼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한다면 그자의 작업은 몇 주나 몇 달은 지체될 것이네. 그자의 다른 작품이나 컴퓨터, 설계도를 파괴한다면 보너스를 주지.”


“자기 공방 안에 있는 팅커를 공격하라니, 위험한 일이군요.”


“아, 보상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나 보군?”


트릭스터는 조심스럽게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블래스토가 그렇게 쉬운 상대였다면 당신이 이미 처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건 그렇군. 흠. 자네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도 일종의 공예가일세. 팅커는 아니지만, 능력으로 수준 높은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알고 있습니다.”


“자네에게 돈뿐만이 아니라 팀원들을 위한 코스튬도 장만해주겠네. 앞으로 일주일 동안 남는 시간이 있을 때 원하는 코스튬에 대한 걸 정리해 보게. 신문을 오리거나 사진을 인쇄하거나 인터넷으로 찾거나 해도 좋네. 굳이 코스튬이나 옷가지일 필요도 없지. 내가 자네의 팀원들과 직접 만나서 원하는 사항을 확인하겠네. 그렇게 한다면 자네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코스튬이 나오겠지.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네.”


그리고 당신은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질서정연한 곳으로 만들 수 있겠지, 라고 트릭스터는 생각했다. 어코드는 씽커였고,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복잡해질수록 지능이 향상되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능력을 통해 그는 집단의 심리나 정치와 같은 복잡한 문제들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고, 지역의 지배자로서의 그는 치명적인 반격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지휘관이었다. 하지만 일대일 싸움에서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능력이었고, 정면 돌격의 경우에도 그리 힘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여행자들이 단독으로 블래스토를 공격하기를 원하는 것이리라고, 트릭스터는 상황을 그렇게 이해했다.


“코스튬은 네 벌이면 충분합니다.” 트릭스터가 말했다. “한 명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요.”

“네 벌이면 충분하다고 했나? 자네들은 분명 일곱 명일 텐데?” 어코드의 말투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의도적으로 밝히고 있었다.


노엘에 대해 알고 있다.


“예, 일곱 명이죠.” 트릭스터는 무심한 척 말했다.


문이 쾅 열렸다. 트릭스터는 몸을 굳히며 상대를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능력을 뻗었다.


선댄서였다. 접수대의 여자가 그녀를 빠르게 따라왔다.


멍청한 짓을, 이라고 트릭스터는 생각했다. 분명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을 텐데.


“트릭스터.”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뒤늦게 어코드를 보았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분명 일대일 회담이라고 했을 텐데,” 어코드가 말했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분노한 목소리였다. 어코드는 접수 담당자를 바라보았다. “들어올 때 주의하지 않았나?”


“주의는 줬습니다.” 담당자가 말했다. “하지만 그대로 쳐들어왔죠.”


“긴급 상황이야.” 선댄서가 말했다. “트릭스터, 우리 지금—”


“입 다물어.”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실린 긴장감과 어코드의 분위기를 본 선댄서도 상황의 심각함을 알아챈 듯했다.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 없이 이런 짓을 저지를 녀석이 아니야. 그만큼 뭔가 심각한 일이 터졌겠지. 하지만 어코드와의 거래를 마치기 전까지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나가 있어, 선댄서. 지금 이야기 중이니까. 어코드 씨가 허락하신다면 빨리 끝내고 나갈 테니까. 우선 사과의 무언가를 건네고··· 네가 할 얘기를 듣지.”


선댄서가 문까지 뒷걸음질을 친 뒤에 몸을 돌려 나갔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코드님.” 접수 담당자가 말했다. 그녀는 문을 닫았다.


어코드는 책상 뒤의 창문으로 걸어가서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트릭스터는 그가 마음을 가다듬는 동안 잠자코 기다렸다. 시간이 길게 느껴졌고, 트릭스터는 대체 무슨 끔찍한 일이 있었길래 선댄서가 잠시 상식을 저버리고 슈퍼빌런 사이의 비밀 회담장에 쳐들어왔는지 상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자면 나는 모순적인 사람일세, 트릭스터.” 어코드가 몸을 돌렸다. 그는 느릿하게, 계산된 어투로 말하고 있었다. 마치 트릭스터가 서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압박을 가하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까?”


“나는 복잡한 일들을 주로 다루는 사람이고,” 어코드는 자신의 가면을 건드렸다. “실제로 그게 특기기도 하지만, 깊게 파고들면 아주 단순한 사람이지.”


“조금만 파고들면 인간은 누구나 아주 단순한 것 아니겠습니까.” 트릭스터가 말했다.


“바로 그렇지. 내가 좋아하는 것은 질서일세, 트릭스터. 질서라는 것은 모든 사물에 제 자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어코드가 책상을 건드렸고, 의자를 미세하게 움직여 제자리에 위치시켰다. “그리고 사람도 마찬가지일세. 자네의 부하가 있어야 할 자리는 이곳이 아니었지.”


“이해했습니다. 제 쪽에서도 배상할 용의가 있습니다.”


“물론 그래야겠지.” 어코드가 말했다. 그는 시선을 올려 트릭스터와 눈을 마주쳤다. “좀전의 관대한 제안을 철회하겠네. 24시간 안에 일만 오천 달러를 내 수중에 전달하게.”


“알겠습니다.” 트릭스터가 말했다. 우리 용돈이 이렇게 사라지는군.


“방금 말했던 의뢰를 수행하고, 보상은 기대하지 말게.”


“예.”


어코드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아가씨는 죽어야겠지.”


트릭스터는 몸을 굳혔다. 이 자식하고는 정말 싸우기 싫은데. “너무··· 서둘러 생각하지 않도록 하죠.”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네, 트릭스터. 사회라는 정교한 기계에 잘 맞아들어가는 사람도 있지. 톱니와 기어, 지렛대와 무게추의 역할을 하는 사람 말일세. 나는 자네도 그런 부류라고 생각하네. 그래서 자네가 바로 마음에 들었지. 자네의 능력조차도··· 균형이 맞는다고 할 수 있지 않나? 위치는 바뀌지만, 본질은 그대로 남지.”


“동감입니다.” 트릭스터가 답했다. 그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어떻게 하면 이 미친놈이 선댄서를 가만 내버려 두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그게 불가능하다면 지금 어코드를 공격해서 죽이는 게 나을까, 아니면 나중에 팀원들을 데리고 오는 게 나을까? 어코드가 아무런 보험 없이 그를 초대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바닥이 무너지거나 벽에서 뭔가가 발사되는 함정이 있을 수도 있었다. 복잡한 것일수록 잘 다루는 어코드의 능력이라면 자택이나 사무실에 그런 설계 정도는 간단하게 집어넣을 수 있을 것이었다. 정보가 있다면 능력으로 어코드를 자기 함정에 빠트릴 수도 있겠지만··· 예상 밖의 무언가일 수도 있었다.


어코드는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부류도 있지. 사방팔방으로 요동치며 자유낙하 하는 부류 말일세. 어디든 부딪혀대며 건드리는 것을 모두 망가트리지. 경험상 화염 능력자들은 대부분 이 부류에 속하고는 하네. 안심하게. 무질서의 원인은 너무 큰 피해가 나기 전에 빨리 제거하는 게 나을 테니.”


트릭스터는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젠장, 빨리 뭐라도 생각해, 크라우스!


“유감이군. 그렇게나 젊은 아가씨인데 말이야.” 어코드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눈치였다.


“만약···.” 트릭스터는 빠르게 생각하며 말했다.


“음?”


“만약 선댄서가 질서 쪽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상황에서 무질서의 진정한 원인이 선댄서가 아니라면요? 저희처럼 다른 힘의 작용에 반응하고 있을 뿐이라면 말입니다.”


“자네도 나와 마찬가지로 상황의 내막을 모르지 않나.”


“그렇죠. 하지만 선댄서가 어떤 사람인진 압니다.”


“팀원이니까 편을 드는 것 아니겠나. 확실한 결단을 내리는 수밖에 없겠군. 자네가 못 하겠다면 내가 하겠네.”


“무슨 뜻인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니, 본인이 보여줄 겁니다.”


“오?”


“잠시 데려올 시간을 주십시오. 그리고 준비할 시간이라도—”


“십 분을 주지, 트릭스터. 이것도 자네 얼굴을 봐서일세.”


“십 분, 알겠습니다.” 트릭스터가 대답했다.


“그리고 혼자 오라고 하게. 정말로 질서 쪽의 사람이라면 본인이 직접 보여주겠지.”


트릭스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침착하게 사무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


문이 닫힌 순간부터 그는 휴대전화의 시간을 확인하며 전력질주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십 분이겠지. 그는 사무실에서 나오는 데 걸린 시간을 뺀 뒤에 타이머를 설정했다.


어코드의 사무실 입구는 길거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골목길에 있었다. 선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트릭스터, 문제가—”


“그만,” 그가 휴대전화를 확인하며 말했다. 칠 분이 남아 있었다. “휴대폰 어디 있어?”


그녀가 벨트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우리—”


그는 능력으로 자신과 그녀의 휴대전화를 바꿨다. “아니. 잘 들어. 네가 방금 끼어드는 바람에 집착증 걸린 완벽주의자 슈퍼빌런의 세계가 어질러져 버렸어. 지금 그것 때문에 그놈이 널 죽이겠다고 하고 있다고.”


“뭐?”


“그리고 상대는 키는 작을지 몰라도 세력이 만만치 않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쉽지는 않겠지. 그러니 나는 네 전화를 써서 다른 팀원한테 상황을 전달받을 거야. 내가 그러는 동안 너는 네 실수를 만회해야 하고, 남은 시간은··· 6분 23초야. 내 휴대폰 화면을 봐. 그게 네 시간제한이야. 가서 화장실에서 머리라도 정돈하고, 깔끔하게 보이도록 노력해. 예뻐 보이는 것보다는 단정하게 보이는 게 중요하다는 걸 기억하고. 타이머가 0이 되면 사무실로 걸어 들어간 다음 발레 루틴을 선보여.”


“발레라고? 크라우스, 내가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발레를 한 건 이 년 전이야.”


“화려한 것보다는 완벽하게 할 수 있는 걸 해. 일단 발레를 한 다음, 끼어든 거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인사한 다음 나와. 만족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거나 네가 뭔가 실수를 하면 그 즉시 건물에 불을 지르고 도망쳐.”


“크라우스—”


“코스튬 입었을 때는 트릭스터라고 불러.” 그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대가 타죽을 걸 걱정하진 마. 분명 탈출로가 있을 테니까. 이제 오 분 사십 초 남았어. 나는 여기까지 오는 데만 삼 분 걸렸어. 빨리 가.”


선댄서가 서둘러 건물 안으로 향했다.


트릭스터는 올리버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리사?” 올리버가 물었다.


“트릭스터야.” 그가 대답했다. 이름을 좀 제대로 쓰라고 이야기를 해야겠어. “무슨 상황인데?”


“코디가 노엘을 건드렸어.”


트릭스터가 얼어붙었다. “얼마나 심각한데?”


“세 번이야, 크라우스.”


“세 번,” 트릭스터가 말했다. “시발. 지금 갈게.”




노엘과 함부로 접촉할 정도로 코디가 멍청하진 않을 텐데.


게다가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트릭스터는 길가의 사람들과 마구잡이로 위치를 바꾸며 지그재그로 이동했다. 지금은 주저할 때가 아니었다. 그가 나타날 때마다 주위의 사람들이 황급히 도망쳤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피해를 줄이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피해를 줄이려고 발버둥 치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어.


직접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서 표적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그는 알몸이었고, 온몸이 종양 같은 혹 덩이로 울퉁불퉁했다. 절뚝거리며 뛰어오는 그는 손에 잡히는 모든 사람을 공격하고 있었다. 팔은 한쪽이 다른 쪽보다 눈에 띄게 컸고, 진물이 가득한 물집이 배 전체를 뒤덮은 채 출렁였다. 턱뼈가 어딘가 어긋나 있는지, 얼굴은 비틀린 채 하품을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한 남자가 그를 밀치고는 두 아이를 안아 들며 도망쳤다.


삼 초 후 그 남자는 다시 그 생물 앞에 나타났다. 페르디션(Perdition)··· 코디였다. 하지만 뭔가가 달랐다. 남자는 다시 그를 밀쳤지만, 페르디션은 그 자리에 없었다. 허공에 대고 팔을 휘두른 남자는 그대로 넘어졌고 기형의 거대한 주먹이 그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남자는 지면에 처박혔다. 다시 일어나지는 못할 것 같았다.


남자가 원래 있었던 곳에는 두 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페르디션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트릭스터는 도망치는 사람 중 하나와 위치를 바꿔 길을 건넜다. 아이들은 도망치고 있었지만, 페르디션은 목표물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여섯 살배기 아이는 세 발짝을 가기도 전에 원래 위치로 되돌아왔다.


“야!” 트릭스터가 외쳤다. “네가 노리는 건 나 아니었나?”


페르디션이 몸을 돌렸고 트릭스터는 바로 다른 누군가와 위치를 바꿨다. 상대에게 한순간이라도 몸을 노출해서는 안 됐다.


사람들 속에 숨어야 해. 기회를 주면 안 되지.


“크라우슈!” 페르디션이 소리쳤다. 입을 완전히 다물 수 없는 탓에 발음이 뭉개져 있었다.


곤란하군.


“죽여버릴 테다! 똥오줌을 지리면서 살려달라고 빌 때까지 괴롭히다 죽이겠어!”


아이는 도망치고 있었다. 트릭스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애는 내 꺼였어! 네가 망쳐버렸다고!” 페르디션이 큰 소리를 내자 목소리는 더욱더 뭉개지며 거칠어졌다.


트릭스터는 몸을 움츠렸다.


“내 경력, 내 친구들, 내 여자! 네가 전부 빼앗아갔어! 넌 도둑놈이야!”


능력이 달라질 때도 있었다. 경험상 강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트릭스터는 페르디션의 능력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추측해 보았다. 지속 시간? 범위? 역행할 수 있는 시간?


돌연 주위가 깜박였다. 사람들의 수가 갑자기 절반으로 줄었다.


트릭스터는 바로 길 건너의 다른 사람과 위치를 바꿨다.


페르디션은 이제야 트릭스터가 있었던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이젠 볼 필요도 없다는 건가?


다시 주변의 광경이 바뀌었다.


나를 포착했다. 이런 식으로 쓰면 능력이 약해지지만, 그래도 나를 계속 뒤로 조금씩 보낼 수 있어.


페르디션은 돌진했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그가 허리춤에 손을 뻗는 순간 다시 주변이 뒤바뀌었다. 페르디션은 한순간에 이십 피트쯤 가까워져 있었다. 트릭스터는 부지불식간에 다시 자신의 위치를 바꾸었다.


—그와 위치를 바꾼 사람이 페르디션의 돌진 경로상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떠올린 건 그다음이었다. 페르디션은 젊은 여자를 땅바닥에 넘어트리고는 그녀를 다시 들어 올려서 벽에 처박았다.


숨이 끊어졌을 것이 분명한 충격이었다.


“크라우슈!” 페르디션이 포효했다.


다시 주위가 뒤바뀌었다. 간격은 십 초쯤이고, 역행 시간은 일 초에서 오 초 정도.


페르디션은 길 한가운데쯤에 있었다.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망치고 있는 탓에 그가 쓸 수 있는 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도망치거나 능력 없이 싸우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고, 허리춤에 있는 가장 큰 주머니의 단추를 풀었다.


페르디션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트릭스터의 위치를 대략적으로만 파악하고 있는 듯, 제정신이 아닌 듯한 커다란 눈으로 주위를 마구 두리번거렸다.


트릭스터는 다른 사람과 위치를 바꿨고, 페르디션이 몸을 돌리는 것을 기다린 다음 다시 위치를 바꿨다.


페르디션은 도로 한가운데에서 인도로 걸음을 옮겼다. 트릭스터의 마지막 두 위치의 중간에 있는 지점이었다.


다음 역행까지는 일이 초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트릭스터는 페르디션이 벽에 내던진 여자의 시신과 위치를 바꾸는 것과 동시에 권총을 뽑아서 발사했다. 총성과 함께 비명도 들려왔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 남은 탄창을 페르디션의 머리와 가슴에 비웠다.


그는 주위에 남아 있는 사람 중 하나와 위치를 바꾼 뒤에 가장 가까운 사람을 붙잡았다. “당신, 차가 있다면 좋겠네. 당신은 지금 나한테 차를 빌려줘야 하거든. 빨리.”




크라우스는 차를 집 앞까지 몰고 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올리버가 그에게로 달려왔다.


이제는 올리버가 그보다 키가 컸다. 젖살도 빠지고 몸도 탄탄해져 있었다. 예전의 크리스 같은 경우에는 왜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있는지 의아할 때도 있었지만, 올리버의 경우에는 의아해할 이유가 없었다. 올리버는 모델 일을 해도 될 정도로 매력적이었고, 운동 신경도 뛰어났고, 똑똑하기까지 했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능력도 대단했다.


하지만 올리버는 여전히 올리버였다. 능력에 의한 점진적인 변화와는 별개로 그의 근본적인 인격은 변한 것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감이 부족하고 사회성이 뒤떨어지는 십 대 소년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는 더 심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올리버의 얼굴과 신체는 그가 생각하는 매력의 기준에 따라 바뀌었고, 그 기준이라는 것은 그가 사람을 새로 만날 때마다 바뀌고는 했다. 그 때문에 그의 얼굴은 매일 조금씩 바뀌었고, 어떨 때는 알아보기 힘들 때도 있었다.


빌어먹을 시무르그, 라고 크라우스는 생각했다. 그들 모두가 각자의 비극을 떠안은 셈이었다. 노엘은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제스는 결국 걷지 못했고, 루크는 날지 못했고, 올리버는 신체와 정신이 변모했을 뿐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마리사는 그렇게나 벗어나려고 애썼던 상황 속으로 다시 떠밀렸다. 원치 않는 삶을 살게 된 것이었다.


크라우스의 비극은 집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코디의 비극이라면···


올리버는 크라우스가 시체를 조수석에서 끌고 나오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들은 현관 안으로 시체를 끌고 들어갔다. 크라우스는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그는 여기 오기 전에 잠시 차를 세우고 코스튬을 벗은 뒤에 시체와 자신을 다른 차 안의 사람들과 바꾼 상태였다. 지금은 대낮이었고 이 동네의 사람이라면 모두 직장이나 학교에 있겠지만, 지나가던 대학생이나 개를 산책시키는 노인이 주위를 지나칠 가능성도 있었다. 그랬다간 일이 복잡해질 것이었다.


이번만큼은 어코드의 말이 맞았다. 일은 단순한 편이 나았다.


크라우스와 올리버는 시체를 거실까지 끌고 갔다. 거실에는 시체가 둘 더 있었다. 변형의 형태나 왜곡된 부분은 달랐지만, 세 구 모두 페르디션의 시체였다. 코디였다.


그는 발리스틱과 제스, 올리버를 바라보았다. “셋인 게 확실해?”


“확실해.” 발리스틱이 말했다.


“노엘은 어때?”


“흥분했어. 네가 이야기해서 달래줘야 해.”


크라우스는 몸을 움츠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시신들을 바라보았다. 이번이 세 번째였다. 계산법에 따라서는 세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라고 할 수도 있었다.


“피해는 얼마나 나왔어?” 크라우스가 물었다. “사상자는?”


“많이 다쳤지만, 내가 쫓아간 놈한테 죽은 사람은 없어.” 제스가 말했다.


“다친 사람이 좀 있어.” 발리스틱이 말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한 명 죽었어.”


“젠장.” 크라우스가 말했다. “내 쪽에서는 최소한 두 명이 죽었어. 지난 가을만큼 심각하지는 않네.”


발리스틱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이···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돼.” 제스가 말했다.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었지.” 크라우스가 지적했다.


“힘이 강해지고 있어.” 제스가 말했다. “그리고 제어하기도 힘들어지고 있지.”


“우리가 고쳐줄 거야.” 크라우스가 다소 힘없는 말을 내뱉었다. “우리가 고쳐줄 거고, 그다음엔 집으로 돌아가면 돼.”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야. 나조차도 내 말을 못 믿겠는데, 팀원들이 믿어줄 리가 있나.


“어디 있어?” 그가 침묵을 깼다.


발리스틱은 일층 침실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떻게 된 거래?” 크라우스가 물었다.


“몰라. 코디도 노엘도 말을 안 해.”


“시발. 좋아. 일단 담배 한 대 피운 다음 어떻게든 해 보겠어.”


“크라우스—” 루크가 말했다. 하지만 크라우스는 이미 현관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는 밖으로 나가 현관 앞의 계단에 걸터앉았다. 그는 천천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는 한 대를 피운 다음 두 대째를 입에 물었고, 어쩌면 세 대까지 피워야 하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잠깐만이라도 조용히 생각해야겠어. 머릿속을 정리해야지.


“크라우스.”


그는 한숨을 내쉬려다가 참았다. 마리사가 올라오고 있었다. “마즈. 어코드랑 잘 된 거 같아서 다행이네. 그렇게 내버려 두고 가서 미안.”


“괜찮아. 차라리 네가 가서 다행이야. 나였으면 못했겠지. 난 못하겠어.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아도 못하겠어.”


크라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어코드는 내가 완벽하진 않다고 했어.”


크라우스는 얼어붙었다. 그녀는 그의 바로 옆의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코스튬을 벗은 평상복 차림이었다. “불태우고 나온 거야?”


“아니.” 그녀가 말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네 말뜻이 이해가 된다고 했어. 노력이 보인다고 했지. 칭찬으로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


“오늘 밤에 만나자고 했어. 아홉 시 정각에. 그리고, 어, 문제의 원인이 내가 아니라면 진짜 범인을 데리고 오라고도 했고. 노엘을 말한 거야?”


“코디야.” 크라우스가 말했다. “젠장.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는데.”


“뭐라고!? 크라우스, 어코드는 코디를 죽일 생각이야.”


“그렇겠지.”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선택지가 없을 수도 있어. 희생양을 넘겨주지 않으면 암살자나 부하들을 보내대겠지. 회담장에 끼어든 것뿐만이 아니야. 어코드의 영역 안에서 일어난 세 건의 유혈사태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해. 노엘이 흥분한 상태니 도시를 뜰 수도 없어. 우리 둘은 어코드의 마음에 든 모양이니, 코디를 넘기고 돈을 두둑이 주면 넘어갈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열흘은 머무를 수 있어. 자금을 모으고, 노엘한테 진정할 시간을 주면 되지.”


“너는 지금 팀원을 죽이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놈은 팀원이었던 적이 없어. 우리 일행의 한 사람이기는 했지. 하지만 우리와 힘을 합친 적도 없고, 순순히 협력했던 적도 없어.”


“우리는 약속을 했어. 맹세를 했었잖아. 언제나 함께 있겠다고. 노엘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함께 노력하겠다고.”


크라우스는 눈을 감았다. “알아. 매 순간 그 약속을 생각해.”


“코디를 넘겨준다면 그 약속을 깨는 거야.”


크라우스는 한숨을 내쉬었고,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는 연기를 코로 내뿜었다.


“크라우스—”


“마즈. 코디가 노엘의 방에 들어가서 의도적으로 노엘을 세 번 건드렸을 리는 없어. 그건 너도 나도 뻔히 아는 사실이야.”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무슨 뜻이야, 크라우스?”


“코디가 우리가 다른 일로 바쁠 때를 틈타서 노엘의 방에 들어간 다음 의도적으로 자극했다는 거야. 세 번의 접촉이 있었다는 건, 그러니까 노엘이 능력을 세 번 썼다는 건 접촉한 게 노엘 쪽이라는 뜻이지. 그리고 폭주한 상태가 아닌 이상 노엘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어. 아마 코디는 심하게 다쳤을 거야. 그렇지?”


“팔다리가 한 짝씩 부러졌어.”


크라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담배를 다시 빨아들였다.


“어째서? 어떻게?”


“목표가 있었겠지. 하지만 노엘의 속도와 힘을 과소평가했던 거야. 아마 둘 중 하나였을 테지. 일부러 노엘을 폭주시킬 생각으로 어떤 행동이나 말을 했던가··· 노엘을 죽이려고 했던가. 어느 쪽이든 코디는 이 모든 걸 끝낼 생각이었을 거야. 우리의 목표를 포기하고, 자유로워지려고 했겠지. 코디는 약속 따윈 좆도 신경 쓰지 않아. 그러니 약속에 의한 보호를 받을 자격도 없어.”


“그런— 그런 건 못 믿겠어.”


“코디가 이기적인 놈이라는 걸 못 믿겠다고? 혹시 평행세계의 다른 코디와 살다가 온 거야?”


“아니. 그래··· 어쩌면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네가 말하는 건 살인이야.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서 죽이는 거라고.”


크라우스는 담배꽁초를 계단 밑으로 던져서 발로 짓밟았다.


“그렇다면,” 그가 말했다. “내가 다른 애들이랑 말해 볼게. 코디와도 이야기해 보지. 혹시 모르니까 말이야. 다른 애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보자고.”


“크라우스, 넌 정말로 코디한테 사형 선고를 내릴 생각이구나.”


“본인도 이렇게 될 걸 각오했을 거야. 그리고 다른 사정이야 어찌 됐든 그놈 때문에 무고한 사람 세 명이 죽은 건 변하지 않아. 그러니 다른 애들이랑 이야기해 볼 거야. 합의해 보지.”


“이건 정말 최악이야, 크라우스. 그래도 코디인데.”


“그래. 좋지 않은 상황이지. 잠깐 쉬는 게 어때?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 노엘이 먹을 식량이라도 구해 오던가.”


마리사가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일이네.”


“그래도 안 할 수는 없어. 그리고 곧 네 순번이잖아.”


“알아, 알아. 하지만 카트를 오로지 고기만으로 가득 채우고 다니면 사람들이 다들 쳐다본다고.”


“누가 물어보면 식당 일을 하는데 도매상이 엿을 먹였다고 해.”


“그래도 보기 이상하잖아.”


“그럼 정육점을 하나 찾아봐. 여긴 뒷마당도 있으니까, 파티용으로 돼지를 두 마리 통째로 달라고 하던가.”


“어쩔 수 없지.” 그녀가 중얼거렸다. “열쇠는?”


크라우스는 열쇠와 담뱃갑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는 열쇠꾸러미를 그녀에게 던져 주고 담뱃갑에서는 담배를 한 대 더 꺼냈다.


“그리고 담배 좀 끊어. 그러다 죽을 거야, 크라우스.”


“알아.” 그가 말했다.


그녀는 차 앞에서 갑자기 몸을 돌려서는 그에게로 돌아왔다.


“뭔데?” 크라우스가 물었다.


“잊어버릴 뻔했네. 어코드가 준 거야. 너한테 전해달라고 했어.”


그녀는 종잇조각을 건넸다.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지역 번호가 달랐다.


“뭔데?”


“너랑 연락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누군데?”


마리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말해두겠는데, 마리사, 어코드 같은 사람을 대할 때는 뭔가를 전하는 걸 잊어버릴 뻔하면 안 돼. 이야기하는 데 끼어들어도 안 되고. 오늘 일은 하마터면 정말 크게 꼬일 수도 있었어.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모르지.”


“나는··· 나는 그런 인간이랑은 관계되고 싶지 않다고.”


“어쩔 수 없어. 다른 방법이 없잖아.”


“알아. 그냥··· 다음번에 비슷한 사람이랑 만나면 난 빠져 있을게. 그냥 뒤에만 있도록.”


“그래. 가서 쇼핑해. 시간 끌어도 돼.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던가, 좀 쉬어. 다른 데로 주의를 돌리는 걸 허락할게. 아니, 명령할게.”


마리사는 차로 향했다.


크라우스는 담배를 조금 피우다가 전화를 걸었다.


“누구인가?”


“어코드님에게 번호를 받았습니다.”


“그럼 자네는 트릭스터겠군. 맞나?”


“맞습니다.”


“여행자들에게 제안을 하나 하고자 하네.”


“지금 어코드님과의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간 탓에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먼저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이건 장기간에 걸친 일일세.”


“저희는 장기간에 걸친 일 같은 건 안 합니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질 않으니까요.”


“자네들의 상황은 잘 알고 있네.”


트릭스터는 담배를 깊게 들이마셨다. “그렇습니까?”


“어코드와는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사이일세. 그 지인과 나 자신의 정보력 덕에 자네들에 대해서도 꽤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었지.”


“마치 협박처럼 들리는 말이군요.”


“주목을 피하려 하는 자네들에게는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안심해도 좋네. 의도는 그 반대이니. 나는 자네들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알고 있네, 트릭스터. 나는 해결책을 제공해 주고자 하네.”


“해결책 말입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세 가지를 줄 수 있지. 나를 위해 일하게. 자네가 내 목표를 이루는 것을 돕는다면 나는 자네가 목표를 이루는 것을 돕겠네.”


크라우스는 무릎에 팔꿈치를 올려놓은 채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는 한 손으로는 담배를, 반대쪽 손으로는 전화를 들었다. “우리 문제에 대해 뭘 알고 있죠?”


“PRT가 알고 있는 것들은 전부 알고 있지. 자네가 갑자기 어딘가에서 튀어나왔다는 사실도, 세인트 메리 병원에 환자로 입원했던 루크 카시우스라는 사람과 노엘 마인하르트라는 사람이 있는데, 어째선지 그 두 사람을 어떤 고등학교의 입학 명부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사실도.”


“다른 데서 살았으니까 그런 거겠죠.” 크라우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루크 카시우스는 왜 거주지를 위스콘신 주의 매디슨이라고 적었다는 말인가?”


크라우스는 신음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안심하게, 트릭스터. 경계할 필요는 없네. 내가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자네에게는 잘된 일이니까. PRT에서 근무하는 내 지인 하나가 자네의 사건을 담당하기로 했고 미르딘과 자네의 조우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요청해갔네. 그 사건은 그대로 묻히겠지.”


“어째서 그렇게 해 줬죠?”


“내게도 나름의 목표가 있기 때문이네. 그리고 충분한 조심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 전문가를 고용할 때는 충성을 보장받을 필요가 있네. 그리고 나는 자네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함으로써 자네들의 충성을 보장받을 생각이네. 사람을 사기 위한 대가는 누구에게나 존재하지. 내가 자네들을 조사한 이유는 그 대가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네.”


“그랬습니까? 그럼 들어나 보죠. 당신이 보기에 우리 대가는 뭡니까?”


“첫째로, 자네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자금을 제공하겠네. 내 휘하에 있는 동안 자네들이 돈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것이네. 설령 일주일에 식료품만 천오백 달러어치를 사야 한다고 해도 말이야.”


“관대하군요.”


“그리고 둘째로, 나는 자네들을 고향으로 돌려 보내줄 것이네.”


크라우스는 담배를 문 채로 움직임을 멈췄다.


“나와 같은 권력자에게는 인맥이 있네. 그리고 그 인맥 중에는 평행세계를 오가는 통로를 만들 수 있는 남자도 있지. 하지만 한 가지 작은 문제가 있네. 그 남자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는 권력이나 자금, 교섭력이 필요하지.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 목표를 달성해야 하네.”


“도움을 받으려면 우선 당신을 도우라는 거군요.”


“바로 그것일세, 트릭스터. 그리고 자네들의 다른 문제는··· 한층 더 까다롭지.”


노엘.


“돕겠다고 했잖습니까.”


“장담은 할 수 없네. 내가 가진 상당한 자산을 총동원하겠네. 그리고 미래의 모든 지원도 약속하도록 하지.”


“두루뭉술하군요.”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교섭을 할 때는 두 번째로 강력한 교섭 재료를 가장 먼저 말하고, 약한 교섭 재료들을 나열한 다음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한 걸 말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네. 그러니 이제 자네들에게 한 가지를 더 제안하겠네.”


“뭐죠?”


전화 너머의 남자가 그에게 그것을 말했다.


일 분 뒤에 크라우스는 전화를 끊었다.


크라우스는 십오 분을 더 계단에 앉아 있었다. 담배 없이 가만히 앉아서 생각한 건 이번이 일 년만이었다.


그는 멍하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크라우스.” 루크가 말했다. “코디를 어떻게 할지 이야기해야 해.”


“나중에.” 크라우스가 말했다.


“무슨 일인데?”


“노엘이랑 이야기해야겠어.”


“지금 상태가 장난 아니야, 크라우스. 네 앞에서 폭주하는 꼴은 다시 못 보겠어. 미친 돌연변이 클론들을 쫓아다니는 짓은 시발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 그게 너라면 더더욱.”


“그럴 일은 없을 거야.”


“크라우스—”


“나중에 이야기하자, 루크.” 크라우스가 말했다. 그는 몸을 돌려 친구를 마주 보았다. “찾고 있던 걸 찾은 것 같아.”


“뭔데?”


“돌아갈 방법. 어쩌면 노엘을 고칠 방법도.”


“어떻게? 누가?”


“브록턴 베이의 어떤 슈퍼빌런이야. 한동안 우리가 자기 밑에서 일해줬으면 한대. 그것 말고도 더 있지만, 일단은···”


“일단은?”


트릭스터는 루크와 눈을 마주쳤다. “노엘한테 먼저 이야기하고 싶어. 지금까지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그래야만 해.”


“우리도 알 자격이 있어, 크라우스. 우리도 너만큼이나 오랫동안 여기에 매달렸어. 희망을 품었다가 배신당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야. 그런 일이 너무 많았지.”


“알아. 알아. 노엘한테 말한 다음 바로 말해줄게. 이번엔 진짜 같아.”


몸을 돌리는 그에게 루크의 표정이 잠깐 눈에 들어왔다. 깊은 슬픔이었다. 크라우스는 멈칫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몇 분이면 돼.” 크라우스가 말했다. “돌아와서 설명할게.”


그는 노엘의 방으로 가서 노크했다.


“저리 가.”


“크라우스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뭔데?”


“들어가도 될까?”


“안 돼.”


“들어가고 싶어. 부탁이야.”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그것을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노엘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박살 난 침대와 찢어진 매트리스가 눈에 보였다. 옷장이 산산조각이 나 있었고, 침대 곁의 탁자 두 개 모두 완파된 상태였다. 멀쩡한 가구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보지 마.” 그녀가 말했다.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옷장의 잔해와 그녀를 등진 채 바닥에 앉았다.


“이야기하러 왔어?” 그녀가 물었다. “말 상대라도 되어주려고?”


“조금 있다 올 생각이었어. 밖은 엉망이야. 코디 일도 있고.”


“이젠 나한테 오는 사람은 너뿐이야. 다른 사람들은 안 와.”


“그렇지. 하지만 그러려고 온 건 아니야.”


“코디가 뭘 한 건지 알아내려고 온 거겠지.”


“그건 이미 알아. 코디는 널 죽이려 했겠지.”


침묵이 흘렀다.


“난 죽을 수 없어, 크라우스. 죽으려고 해 본 적도 있지. 너희들을 자유롭게 해주려고 말이야. 하지만 안 됐어. 아무것도 통하지 않아.”


“그래.”


“나도 그것들 중 하나야. 아니면 그것들처럼 되어가고 있거나.”


“그럴 수도 있겠지.”


“종말초래자.”


소름이 돋았다. 초봄의 한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면 그때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그 괴물들처럼 되는 걸 수도 있고.”


“그것들은 죽을 수 있었어. 네가 하나 죽였다고 했었잖아.”


“아마 죽었을 거라고 했지. 하지만 또 다른 하나가 죽는 걸 봤어. 네 말이 맞겠지.”


“그리고 나는, 내 능력이 강해진다면, 제어할 수 없게 된다면—”


“그렇지 않을 거야.”


“시무르그만큼이나 위험한 존재가 되겠지. 방식은 다르겠지만 말이야. 나한테 누군가가 닿을 때마다 복사본이 뱉어져 나와. 더 추하고, 더 강하고, 더··· 사악해진 모습으로. 강한 히어로가 나와 접촉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 미르딘 같은 히어로가 걸린다면?”


“그럴 일은 없어. 내 말 잘 들어, 노엘. 방금 누군가랑 이야기했어. 해결책이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그녀가 자세를 바꾸는 소리가 들렸다. 몸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전에도 들었던 말이야.” 그녀가 말했다.


“이번엔 진짜 같아. 우릴 돌려보낼 수 있는 장비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게 아니야. 이미 그런 수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고. 차원을 자유롭게 오가는 사람이라고 해. 그리고 이 사람은 인맥이 넓어. 학자나 연구자들과도 연이 닿아 있고, 그중에는 어떤 능력자 여자도 하나 있는데 어코드처럼 뭐든지 아는 그런 능력자라고 해.”


“어코드가 오늘 만났던 그 사람이지?”


“그래. 내가 이야기했던 그 사람.” 크라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해결책은 이미 존재해. 그저 가져오기만 하면 되지.”


“크라우스, 그렇게—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닐 거야.”


“알아. 그렇게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세 번째 제안이 있었어. 우리한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라고 했지.”


“뭐였는데?”


“희망. 희망이야, 노엘.”


“무슨 뜻이야?”


“얼마 전에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자를 포섭했다고 해. 그리고 그 능력자가 말하기를 널 도울 방법이 있다는 거야. 확실하게. 성공률은 낮지만, 자기가 확률을 최대화시켜 보겠대.”


“거짓말일 수도 있어.”


“아니, 들어봐. 이 사람 말에 의하면 시무르그한테도 약점이 있다고 해. 시무르그가 미래를 보지 못하게 할 방법이 두 가지 있다는 거지.”


노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첫 번째 방법은 다른 모든 능력을 거의 완벽하게 무력화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는 거야. 사이언이 이 경우지. 사이언은 예지할 수 없어. 나타날 때마다 모든 법칙을 무시하지. 시무르그랑 싸울 때도 봤어. 사이언의 공격은 시무르그도 손쉽게 피할 수 없었지. 그게 마음을 읽을 수 없어서인지, 미래를 내다볼 수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이언은 분명 시무르그에게도 유효타를 몇 번이나 먹였어.”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크라우스는 계속해서 흥분하고 있었다. 그는 손을 바닥에 대고 눌러서 떨림을 막았다. “그리고 두 번째 방법이 뭔지 알아? 씽커 능력을 사용해서 시무르그의 계획이 틀어지게 하는 거야. 시무르그가 예지 능력을 무력화하는 것처럼 그 반대도 성립하는 거지. 이 사람 말에 의하면, 수많은 갈림길과 가능성을 계산하는 도중에 다른 예지 능력자의 능력이 끼어들면 과부하가 걸린다고 해. 게다가 이 사람은 본인도 예지 능력을 방해하는 능력이 있고, 그 밑의 예지 능력자도 시무르그의 능력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무슨 뜻인지 알겠어? 우리가 그 사람 밑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우리는 자유야. 원인과 결과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세상이 끝장날 것처럼 굴 필요가 없다고. 우린 그런 안식처를 발판 삼아서 돌아가면 돼. 우리 세계로.”


크라우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눈을 깜박여서 어느새 차오른 눈물을 훔쳐냈다.


노엘은 파괴된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스웨터 한 겹만을 걸친 채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있었다. 그가 알던 노엘의 모습 그대로였다.


허리 위로는.


허리 아래로는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거대한 살덩어리 탓에 몸집은 누운 채로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천장에 부딪힐 정도로 커져 있었다. 살덩어리의 반절은 물집처럼 붉게 부풀어 오르거나 주름져 있었고, 나머지 반절은 매끄러웠지만 어두운 초록색과 갈색, 창백한 회색이 뒤섞여 있었다. 앞부분에는 소와 개의 중간쯤 되어 보이는 형태의 동물 머리가 뒤통수부터 코끝까지 튀어나와 있었고, 왼쪽으로는 또 다른 머리가 생겨나고 있었다. 머리들의 양옆으로는 근육질의 다리 두 개가 튀어나와 있었고 그 끝에는 발톱인지 발굽인지 모를 거대한 무언가가 달려 있었다. 강철도 자를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골반의 오른쪽으로부터는 크라우스의 몸보다 큰 손가락 다섯 개가 돋아나고 있었고, 손바닥이라고 할 수 있을 부분으로부터는 그보다 작은 말단부가 솟아나 있었다. 왼쪽 뒤로는 촉수들이 돋아나 있었는데, 그 길이가 어찌나 긴지 거대한 머리와 여러 말단에 휘감겨 말려 있거나 누워 있는 그녀의 몸을 빙 둘러 감고 있을 정도였다. 촉수 중에는 외골격으로 뒤덮여 있는 것들도 있었고, 전부 풀어헤치면 방 전체를 뒤덮어 크라우스가 앉을 자리가 없을 것 같았다. 뼈가 없는 촉수들이었지만, 그녀의 몸무게 전체를 지탱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녀는 그 무엇도 배설하지 않았다. 그저 자라거나, 이미 자라난 부분을 강화할 뿐이었다.


일부러 굶어 죽으려고 한 적도 있었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폭주한 그녀에게 하룻밤 사이에 마흔 명이 목숨을 잃고 만 것이었다. 그때 죽은 사람들의 살점이 지금 그녀의 몸에서 돋아난 거대한 손가락들이었다.


다른 팀원들은 그 사건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그가 애써 소식을 차단하고 사상자 수를 감추며 소란이 잦아들 때까지 계속 자리를 옮긴 탓이었다. 사람이 죽었다는 건 그들도 알고 있었지만, 마흔 명이라는 건 몰랐다.


최악이었다. 그 당시의 크라우스는 한밤중에 집을 나서서 외딴곳으로 향하고는 했다. 다른 팀원들에게 들릴 걱정 없이 그저 울고, 고함을 치고,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모든 분노와 무력감과 죄책감을 분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노엘의 그 거대한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개를 들어 노엘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 역시 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거짓말 같지는 않았어.” 크라우스가 말했다. “이번엔 진짜인 것 같아. 우리한테 주어진 최선의 기회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희망을 품어도 되는 거야?”


“희망을 품어도 되겠지.” 그가 말했다. 그녀에게, 그리고 그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이었다.




해변에 파도가 쳤다.


온몸이 아팠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일어서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졌다. 보도블록 사이의 모래 때문에 미끄러웠다.


그는 몸을 돌려서 누운 다음 윗몸일으키기로 몸을 곧추세웠다. 그는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제스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휠체어를 탄 채 모래사장과 풀밭의 경계선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바다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제—” 그는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숨이 막혀서 다시 크게 들이쉬어야 했다.


“제스!” 그가 외쳤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선댄서가 그의 곁에 쓰러져 있었다. 그는 그녀의 가면을 들어 올려서 그녀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의식을 잃었을 뿐이었다.


그는 텅 빈 공터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병사도, 파라휴먼도 없었다.


갈매기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크라우스는 넘어질 뻔하면서도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스의 휠체어 자국이 보였다. 그녀가 먼저 보고 간 것이었다.


그가 다가가자 갈매기들은 흩어졌다. 그는 발밑에 떨어진 흰 깃털을 담배꽁초처럼 짓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갈매기들이 모여있던 곳에 얼룩이 있었다. 자국이었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피였다. 흘린 사람이 죽었을 게 분명할 정도의 피였다. 시신이 질질 끌려간 듯한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병사들이 시체를 치웠고, 남은 살점들은 갈매기들이 대부분 청소했을 것이었다. 남은 거라고는 작은 두개골 조각들과 뇌였을지도 모를 작은 덩어리들뿐이었다. 보아하니 총탄이 관통하며 두개골을 그대로 조각낸 것 같았다.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알고 있었다. 기절하기 직전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디 서 있었는지도 기억할 수 있었다.


다시 파도가 쳤다. 먹잇감을 빼앗긴 갈매기들이 내는 성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크라우스는 아주 오랫동안 핏자국을 쳐다보았다.


작가의말

최근 일반연재 승급 신청을 했습니다. 별탈없이 잘 진행되면 좋겠네요 :)



* 원작 번역 지침에 따른 공지사항.

“This is purely a fan project and I/we lay no claim to the ideas, characters, or story. The real author is J.C. McCrae, aka ‘Wildbow’, and the original version can be found at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The final chapter of Worm was published on 2013. 11. 19. This is a fan translation.”


"이 번역본은 팬의 작업물이며, 번역자는 이 작품의 아이디어,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자는 'Wildbow'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J.C.McCrae입니다. Worm 원작은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에서 연재되었으며 2013년 11월 19일에 완결되었습니다. 이것은 팬 번역본임을 밝힙니다."



* 표지 출처 : Ari Ibarra (ariirf.com)

팬아트 작가의 사용 허가를 받은 표지입니다.



* 이 작품의 번역은 2인 비영리 프로젝트입니다. 번역자가 번역을 맡고, 편집자가 검수와 업로드를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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