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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르카 님의 서재입니다.

W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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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엘사르카
작품등록일 :
2020.05.08 22:18
최근연재일 :
2022.05.0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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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25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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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58쪽

'탈피' e.5

DUMMY

고개는 높이, 어깨는 당당하게. 어딜 가더라도 원래부터 거기 있어야 할 사람처럼 보일 수 있게 하는 자신 있는 걸음걸이까지.


웅변가, 바람둥이, 사기꾼, 연기자, 좀도둑, 마술사, 그리고 흉악범에 이르기까지, 그에게는 스승이 많았다. 역사, 외교, 경영, 행정, 정보, 암호학, 배우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약학, 회계학, 무역학, 순수과학, 파라휴먼 연구, 그리고 군사, 정치, 경제를 총망라하는 전략과 전술까지, 모두 최고의 전문가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그였다. 설령 배우지 않은 것이 있더라도 어떤 분야든 그럴싸하게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을 정도로 그는 경험이 쌓여 있었다.


어지간히 무모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직업으로 삼지 않을 잡다한 기술도 그는 대부분 어느 정도까지는 익히고 있었다. 음악, 가창, 회화, 작문, 심지어는 무용까지. 가르쳐줄 사람과 배우고자 하는 열망, 그리고 시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무릇 앞장서서 이끄는 자라면 눈앞의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는 법. 자신이 특정 분야에서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지도자 노릇을 할 수 있는 부류의 인간도 세상에는 있었지만, 그는 아니었다.


만물박사처럼 보이는 사람일수록 특별히 내세울 재주가 없다는 말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해당이 없는 말이었다. 확실하게 휘어잡고 있는 것도 분명히 있었으니까.


지금 그의 양옆으로는 그 확실한 것 중에서도 두 사람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특유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우아한 움직임을 눈여겨본 그가 데려온 한 하얀 보디슈트를 입은 왼쪽의 여자는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떻게 찾아냈는지는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습격에 팀원들을 잃고 망연자실한 채 방황하던 그녀는 이제 당당하게 걸으며 동료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사실 진짜 그녀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딘가 깊숙한 곳에 파묻힌 채 무감각하게 잠들어 있는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무감각해져 있는 건 그 옆의 남자도 마찬가지였지만, 형태는 달랐다. 여자와 달리 남자는 자기 자신 그대로였다. 어딘가 어긋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수준의 어긋남 뿐이었다.


그리고 남자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지금 남자가 보여주는 모습은 연기가 아니었고, 억지로 끼워 맞춘 모습도 아니었다. 남자는 어디로 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그런 그에게 표정을 바꿔 끼우는 정도는 가면이 아니라 여러 역할 중 하나에 가까웠다.


남자는 육중한 갑옷을 입은 전사였고, 험상궂은 인상에 거칠게 기른 수염, 그리고 코스튬 곳곳에 달린 모피 탓에 그의 인상은 마치 바이킹과도 같았다. 하얀 옷의 여자가 어색해하거나 할 때마다 남자는 능수능란한 화술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고, 여자가 아무 생각 없이 맞장구를 치거나 함께 웃을 수 있도록 틈을 열어두거나 농담을 섞으며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서로를 오래 알고 지낸 친구와도 같은 모습이었지만, 실상은 남자 쪽이 일방적으로 그런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히어로 두 사람이 모서리를 돌아오며 두 사람을 흘끔 바라보았다. ‘바이킹’이 우스갯소리를 하던 도중이었다.


“···소시지 여섯 개가 맛이 다 달랐다는 거 아니겠어?”


“그게 무슨— 아.”


여자의 얼굴이 새빨개지는 걸 보고 바이킹은 소리 내어 웃었다. 지켜보고 있던 그의 입에서도 무심코 웃음소리가 나왔다.


그러자 바이킹은 갑옷을 두른 팔로 그의 어깨를 힘껏 감싸며 그를 주춤거리게 했다. “뭐야, 댁도 웃을 줄 알잖아!”


“제법 재밌는 농담이었으니까.”


“제법?” 바이킹은 그렇게 물었다. 이윽고 그는 일행을 지나쳐 가는 두 히어로를 향해 눈짓을 보내며 말을 건넸다. “오, 아이언스케일. 잘 지냈나?”


“누구지?” 히어로 한 사람이 발걸음을 멈추고는 말했다.


바이킹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서 코스튬을 바꿨지! 그런데 그 정도로 못 알아보다니, 다음번에도 모른 척하면 화낼지도 모른다고, 친구!”


일행은 모서리를 돌았다.


“아는 사람인가? 아이언스케일이라는 사람은?”


바이킹은 씩 웃었다. “아이언스케일? 몰라. 예전에 자료를 뒤지다가 우연히 얼굴과 이름을 봤을 뿐. 난 기억력이 좋거든.”


거짓말쟁이들은 기억력이 좋을 수밖에 없는 법이지. “쓸데없는 위험이었네. 눈에 띄지 않는 편이 나을 텐데.”


“눈에 띄지 않으려고 그러는 게 오히려 눈에 띄는 거야. 내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데려왔으면 일단 내가 하자는 대로 하자고, 티처.”


티처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해야겠지.”


바이킹은 표정을 지웠다. “긴장했나?”


“편집증이 생기기라도 한 것 같군.” 티처는 말했다. “속으로는 그건 아니라고 자기 자신을 설득하려고 하고 있지만 말일세.”


“왜지?”


“설명하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보지.” 티처는 말했다. “자네는 편집증과 단순한 긴장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나?”


“하나는 마음의 상태고, 하나는 일시적인 감정인가?”


“전자는 정신이상일세.” 티처는 말했다. “대중문화 때문에 인식이 뒤틀려버렸지. 대중문화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정신이상이라는 게 다 그런 식이지 않은가? 우습게 생각하거나, 미화하거나, 과장해서 표현하지. 하지만 현실의 정신질환은 웃을 일이 아니네. 새장에서 오래 지내며 수많은 끔찍한 것들을 봐왔지만, 내가 제정신이 아니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여전히 날 두렵게 하네. 그렇게나 무뎌졌는데도 말이야.”


“그런 것치고는 긴장한 게 아니라 편집증인 것 같다고 자기 입으로 말했던 것 같은데.” 바이킹은 거대한 체구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이 무색하게 느껴지는 섬세한 어조로 말했다.


“차라리 미치광이가 되는 게 나을 수도 있으니 말이야.” 티처는 말했다. 그는 잡생각을 몰아내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직접 침투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 보지?”


“사실상 처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 티처는 순순히 인정했다.


“뒤에 남아있었어도 됐을 텐데.”


“직접 얼굴을 마주하며 관계를 쌓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네.”


“그것도 나한테 맡기면 그만이었을 것 아냐.”


“그랬다간 위험부담이 컸겠지. 다음에도 그렇게 하란 말인가? 그리고 그다음에도?”


“그게 뭐 어때서?”


“직접 이끌지 않는 인간을 어떻게 리더라고 할 수 있겠나. 그리고 난 자네를 신뢰하지 않는다네.”


“내가 뒤통수를 치기라도 할 것 같나?” 바이킹은 물었다.


“나한테는 모든 사람이 내 등에 칼을 꽂을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네.” 티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숨을 쉬었다. “그야말로 편집증이지.”


“이대로 계속 간다면 누군가는 정말로 댁의 등에 칼을 꽂을 날이 오겠지. 자기실현적 예언이라고 들어봤나? 어쩌면 일부러 그러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자네는 겉으로 내보이는 것보다도 더 머리가 잘 돌아가는 듯하군.” 티처는 말했다. “세뇌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남자는 쿡쿡 웃었다.


티처는 고개를 저었다. “곧 방식을 바꿀 생각이네. 누군가가 준비해둔 덫이 있다 하더라도, 아주 오랫동안은 밟을 일이 없도록 말이야.”


“적이 하나뿐이라면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댁처럼 적이 많은 사람이라면···”


“방향을 크게 틀어야겠지.”


“댁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적어도 지금은 상황을 제대로 통제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야. 이쪽이야. 보안 구역이니 조심하라고.”


티처는 감시 카메라를 올려다보았다.


“부하들이 알아서 해 줄 거라면서, 못 믿는 건가?”


티처는 고개를 저었다. “믿고 있네. 그만한 수에 대응할 수 있는 건 드래곤뿐일 텐데, 드래곤은 이쪽에 관여할 수도, 내게 거스를 수도 없는 상태이니 말일세.”


“적어도 댁이 아는 바에 따르면 말이지.”


“그렇지. 빅 시스터를 얕보지는 말도록 하세.”


“참고로 말하자면 방금 그 자세는 편집증이 아니라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해.” 바이킹은 말했다.


곧 바이킹은 자기 휴대폰을 문 옆의 패널에 가져다 댔고, 티처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초록색 불빛이 켜지며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자 티처는 이내 긴장을 풀었다.


바이킹은 걸음을 옮기며 낮게 말했다. “이런 1단계 보안 시설은 엄밀히 말하자면 감방은 아니야. 사면령 덕분에 서류상으로는 잘못한 게 없는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 건물 내부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민감한 정보도 있고, 가면을 벗고 다니는 히어로들도 있으니까.”


“과연, 사고뭉치들이 돌아다녀선 안 될 시설이니 말일세.” 티처의 말에는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


“1단계 보안 시설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어디 나갈 때마다 감시역이 따라붙게 되어 있고··· 카메라도 늘 지켜보고 있지. 보통은.”


티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보였던 사무실들과는 달리 이곳은 거주용 공간으로 되어 있었다. 문이 열려 있고 안쪽이 깔끔하게 청소된, 아직 사람이 들어오지 않은 방들도 보였다.


그런가 하면 꾸며진 모습만 보아도 누군가가 들어와 사는 게 분명한 방들도 있었다. 병뚜껑이나 유리 조각 같은 잡동사니가 만화경과도 같은 기하학적인 무늬로 배치된 방이 있는가 하면, 새까만 가죽과 어두운색의 금속으로 뒤덮인 어떤 방에서는 비싼 향수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의 방 입구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장식만으로 누구의 방인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과 용의 모습이 그려진 병풍이 있었고, 그 위에는 수십 년에 걸쳐 모은 듯한 수많은 핀업 사진이 걸려 있었다. 1950년대의 모델부터 최근의 연예인까지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그 모습은, 장식이라기보다는··· 연구 대상에 가까워 보였다.


캐노피가 달린 침대도 있었지만, 방 밖에서 보이는 거라고는 모서리뿐이었다.


“앤저뉴.” 티처는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긴 다리를 침대 너머로 쭉 뻗으며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을 허리에 올리고 볼을 부풀린 모습으로 앤저뉴는 그를 마주 보았다. 보란 듯이 연출한 모습이었다. 간신히 품위를 지키는 수준의 짧고 하늘하늘한 가운 하나만을 걸친 옷차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언제나 보여주는 쪽이었다. 맨살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언제나 연기와 분장으로 자기 모습을 연출한다는 의미에서.


“괜히 기대했네. 당신이었다니.” 그녀는 말했다. “마법사처럼 차려입은 것도 변장으로서는 조잡한 편이고.”


“굳이 공을 들일 필요가 없었을 뿐이네.”


“부끄럽지도 않나 봐, 연락도 없이 숙녀를 찾아와서는··· 하긴, 당신은 예전부터 예의라는 걸 모르는 인간이었지.”


“그 말대로일세. 그런 걸 원한다면 마르키스에게라도 가보지 그러나.”


“그 인간은 귀족 행세를 하고 싶은 건지 천민 행세를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이중인격이라니까. 아, 혹시 그 이야기를 하려고 찾아온 거야, 티처? 우릴 다시 모으기라도 하려고? 옛날이 그리워지기라도 했어?”


“마르키스도 찾아가긴 해야겠지만, 과거를 회상하기 위해서나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는 아닐세. 몇몇 사람들의 안부를 확인하려 하고 있을 뿐이지.”


“왜?”


“정찰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는 말했다. 앤저뉴가 무언가 극적인 표정을 짓는 걸 본 그는 그녀가 끼어들기 전에 미리 말을 끊었다. “형세 파악일세, 앤저뉴. 이렇게나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시국이라면 괜히 모르는 데 발을 들이기보다는 익숙한 사람부터 확인하는 게 맞지 않겠나.”


“왜 하필 지금이냐고 물어봐야 하는 걸까?”


“관심이 없는 척하는 것 치고는 참 많은 걸 물어보는군.”


“난 따분한 거야, 티처. 이젠 슈발리에도 딱히 관심이 안 생긴다고. 착하게 지내고 있나 확인하러 올 때를 제외하고는 찾아오는 일도 없어졌으니까.”


“그럼 같이 산책이라도 하겠나? 잠시 밖에 나갔다 오는 건 어떤가.”


“그랬다간 자기들은 간수가 아니라고 열심히 선언하고 다니는 여기 간수들이 불만을 표현하지 않을까 싶은데.”


“통금 시간 전까지는 다시 데려오도록 하지. 그전에 그쪽이 먼저 질리지 않는다면 말일세.”


“무언가 꾸미고 있는 게 있는 모양이네.”


“물론이네.”


“그럼 말해줘.”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가운 주머니에 양손을 넣어 보였다. 손이 전부 들어가기엔 너무 작은 주머니였다. “일단 들어보고 흥미가 생기면 그때 소풍이든 뭐든 어울려 줄 테니까.”


바이킹은 티처에게 작게 말했다. “시간을 끌면 곤란해. 혹시 누가 눈치채기라도 했다면···”


그는 말을 흐렸다. 그 이상 구체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었다.


티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태연하게 말했다. “일을 더 크게 벌여볼 생각이네.”


“더 크다니?”


“현재 존재하는 어떤 세력보다 더 큰 세력을 만들 생각이네. 지금까지 봐왔던 어떤 세력보다 큰 세력이 될 수도 있겠지. 극단적인 권력욕이라고 해도 좋네.”


“왜지? 참고로 ‘가능하니까,’는 대답이 안 된다는 걸 알아둬.”


“단순히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일을 벌였던 적은 없네.”


“지금까지 계속 그래왔던 것 아니었어? 적어도 난 그렇게 보였는데.” 앤저뉴는 물었다. 이제 경계심이 풀린 듯 그녀는 연기하는 것을 조금씩 그만두고 있었다.


“많은 일을 벌였던 건 사실이지만 거기엔 언제나 다른 이유가 있었네. 경험 부족 탓에 계획이 미숙했던 건 인정하지만, 어찌 됐든 목적은 늘 달성할 수 있었지. 움직이기 전에 정보를 먼저 모으고 하수인들을 풀어놓았던 건 그때도 마찬가지였네.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수많은 개인과 집단이 서로 어떻게 맞물리고 있는지, 제각기 다른 세력들이 무슨 의도로 움직이고 있는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지.”


“그래서 한 짓이 부통령을 죽이는 짓이었다고?”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 하나를 죽이는 것으로 모든 계획의 방아쇠를 당긴 걸세. 평상시에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봐서는 진상을 알 수가 없지 않나. 의문점들을 해소하고 큰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커다란 파문을 일으켜야 했지.”


“큰 그림이라. 그럼 또 비슷한 짓을 할 거라는 거야? 부통령이나 총리 암살쯤은 되는 일인가 보지?”


“그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되겠지. 어찌 됐든, 그때도 목표는 달성했었네. 국내에서 한 번, 국외에서 한 번 암살 사건을 일으키고 그 반응을 지켜본 덕분에 필요한 정보는 모두 얻을 수 있었지. 행동에 나서려고 했을 때 체포되었을 뿐일세. 덕분에 나는 몇 년 동안 기술을 배우고 지식을 쌓을 수 있었고, 제정신으로 남기 위해 탈출을 계획했던 덕분에 이렇게 나올 수도 있었지. 감사 인사는 받은 것으로 치겠네.”


앤저뉴는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자유의 몸이 된 직후부터 나는 바로 행동에 나섰다네. 얼마 지나지 않아 기회가 찾아왔고 덕분에 나는 큰 보물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 마지막 퍼즐 조각을 찾아냈을 뿐만 아니라 그 힘도 일부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네. 다른 일에도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지.”


“무슨 일을 벌이려 하는 거길래 말을 그렇게 돌린대?”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범죄행위는 아니라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모든 걸 말해버릴 수도 없겠지. 자네가 내가 말한 걸 그대로 남자친구 후보한테 고스란히 전해버릴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서로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니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네, 티처. 정말로 내가 그렇게 일차원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텐데.”


“물론 그렇긴 하지.”


“그런데도 말해주지 않겠다니, 일부러 놀리려고 오기라도 한 거야, 티처?”


“이쪽으로서는—”


휴대폰이 울렸다. 두 번의 짧은 비프음이었다.


“경보 아니야?” 바이킹이 물었다.


“아무래도 제자들의 교란 능력을 과대평가해버린 모양이군.” 티처는 말했다. “어떤가?”


흰옷의 여자는 눈썹을 올렸다. “당장 느껴지는 위협은 없지만, 자세히는 알기 힘듭니다.”


티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일단 적어도 저 문 너머에 파워아머를 입은 경관이 있거나 하진 않다는 의미겠군.


“가도록 하지.” 그는 말했다. “앤저뉴 자네는—”


그는 말을 멈췄다. 고개를 돌린 곳에 앤저뉴는 없었다. 그녀에게 투명화 능력은 없었지만—


그 순간 돌연 솟아오르며 용이 그려진 병풍에 걸쳐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앤저뉴가 입고 있었던 가운이었다. 병풍 반대편에 있는 모양이었다.


“따라오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군.”


“따분하거든.” 그녀는 병풍 너머에서 말했다. “미술품, 음식, 오락거리, 외출 감독자, 필요한 건 다 내어준다지만, 내가 진짜로 원하는 한 가지만은 절대 주지 않으려 드는걸.”


“단순히 소란을 피워서 그 남자가 쫓아오게 할 생각으로 따라오는 거라면···”


“그쪽이랑은 끝났어.” 앤저뉴는 선언했다. 그녀는 높이 세운 옷깃에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를 차려입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자기 손해지, 뭐. 나라고 내 남자친구들이 전부 불행한 일에 휩쓸린다는 걸 모르겠어? 바보도 아니고.”


“저주가 걸려 있다고도 하던데.” 바이킹은 말했다.


그러자 앤저뉴는 거울 앞에서 화장을 고치며 미소를 지었다. “저주라니, 너무하네. 원래 좋은 사랑 이야기라는 건 전부 비극으로 끝나는 법이잖아? 끝이 안 좋았을 뿐 전부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 난 그런 이야기를 많이 겪었을 뿐이야. 그 많은 실연을 겪고도 무사한 건 내가 그만큼 마음이 강하기 때문이겠지.”


“슈발리에한테도 곧 무슨 일이 생길 거라는 건가?” 티처는 물었다.


“그쪽이 겪을 고난은 이제 시작이라고 해야겠지.” 앤저뉴는 자신의 단발머리를 손질하며 말했다. “내 남자친구들보다 더 심한 꼴을 겪게 되는 게 내 전 남자친구들이거든. 슬프게도 말이지.”


몸단장을 마친 그녀는 몸을 돌렸다.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빛이었다.


“자네 말대로 본인 손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녀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싸늘한 눈초리는 변하지 않았다.


“옵니다.” 그의 제자가 말했다. “저희가 들어왔던 문으로 두 명.”


그들은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린 건 그들이 거주 공간 사이사이의 복도로 숨어 들어간 것과 거의 동시였다.


파워아머를 장비하고 전투훈련을 받은 일반인. 용아병들이었다.


여기선 능력이 그리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의 능력은 씽커와 팅커를 만들어내는 것이었지만, 그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고 위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위험이 몇 초 앞까지 다가온 뒤에야 알아차릴 수 있는 예지 능력자는 유용성이 그리 크지 않았다.


적어도 용아병들을 상대로 선수를 차지할 수 있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도망칠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보안 등급을 1단계까지 내리려고 그렇게 고생했는데,” 앤저뉴는 투덜댔다. “끝장나는 건 한순간이네.”


“어차피 돌아올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였네만?” 티처는 그렇게 물으며 모서리를 돌았다. 계단은 봉쇄됐겠지만, 적당한 방에 조용히 숨어 들어갈 수 있다면 빠져나갈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다.


“평판은 중요하다구.” 앤저뉴는 말했다. “‘위험하다’라는 평판이라도, ‘걸어 다니는 재앙이다’보다는 낫지.”


문과 계단이 봉쇄됐다면 남은 탈출 방법은 총 아홉 가지.


“사전 조사 중이었는데,” 바이킹은 말했다. “댁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더라고. 발을 요상하게 움직이면서 간수들한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던가, 그런 말을 하면서 다시 ‘재앙’으로 올리는 게 좋겠다고 하는 것 같던데. 정확히 말하자면 ‘보안 2단계’라고 했으니 재앙까지는 아닐지도 모르지. ‘위험’이랑 ‘재앙’ 사이에 있는 건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


“굳이 말하지 않는 게 좋겠군. 새로 끌어들인 동료가 기분이 상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티처는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앤저뉴도 말했다.


“나는 저들이 자네를 크게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하네. 나한테서 이런 말을 듣는다고 기분이 나아질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은 고맙지만 난 그렇게 위험하지 않은걸. 주변에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고 다닐 뿐이지.”


집착과 자기기만. 정신이상인가? 아니면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연기력이 뛰어난 것뿐일까? 같은 거짓말을 너무 반복한 나머지 스스로도 믿게 되어버렸을 뿐인가?


그들은 빈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마법사 로브의 옷 주머니를 뒤지던 티처는 원반처럼 생긴 장치 하나를 꺼내어 지면에 던져놓았다.


그러자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주위의 모든 조명이 순간적으로 꺼졌고,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벽과 바닥을 따라 전달된 순간적인 충격파가 주위를 뒤흔들었다. 단순한 정전이 아니었다.


순간이동 장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바이킹 차림을 한 남자의 갑옷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사실은 홀로그램이었던 갑옷이 벗겨진 남자는 오직 반바지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다.


“예상보다 제대로 대응하는데.” 반라가 된 바이킹은 말했다.


“시간을 끌어줄 수 있겠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그의 신체는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자기복제였다.


“설마 탈출 계획이 방금 그게 전부였던 건 아니겠지?” 앤저뉴는 말했다. “5분도 못 간 이런 한심한 탈출 시도 때문에 보안 등급이 오르게 된다면 난 정말 화가 날 것 같은데.”


“아직··· 일곱 가지 방안이 남아있네.” 그는 말했다. “여기까지는 상정 내였네. 완전 봉쇄가 아니라 부분 봉쇄인 만큼. 아직 움직일 여지는—”


창문이 닫히고 있었다. 그것도 쇠로 된 셔터가 내려오고 있었다. 불빛이 꺼지고 사방이 가로막힌 탓에 주변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고, 빛이라고는 셔터 사이의 미세한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불빛뿐이었다.


“완전 봉쇄로군.” 그는 말을 바꿨다. “남은 탈출 방안은 일곱 가지로 그대로일세.”


“이것도 알고 있었던 범위 안이기를 바라지.” 앤저뉴는 말했다.


“알고 있었다고 하잖나?” 티처는 쏘아붙였다. “문제 될 것은 없네. 갑작스러운 봉쇄라면 대응 방법은 하나뿐이겠지.”


“대체 무슨 계획인 건데?”


“우선은···” 그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지만, 시계는 작동을 정지한 상태였다. “···일정한 시간 동안 붙잡히는 걸 피해야 하네. 버텨야 하는 시간은 오 분 미만, 문제 될 것은 없네.”


“문제가 안 된다고? 여긴 알려진 모든 차원을 통틀어 가장 거대한 도시에 있는 히어로 팀 중 가장 규모가 큰 팀의 본거지인데?” 앤저뉴는 말했다.


“문제 될 것은 없네.” 그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미안한데 못 믿겠네. 능력을 써 봐도 되겠지만,” 앤저뉴는 말했다. “당신한테는 그런 감정은커녕 인간적인 호감조차도 없는걸.”


“원한다면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라도 내 능력이라도 내어주겠다고 말하고 싶네만,” 티처는 말했다. “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말하면 모욕 이외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없더군.”


“바보 취급이니까.” 그녀는 말했다. “아니면 궁지에 몰린 생쥐 취급이던가.”


“그렇게도 볼 수 있겠군.”


“체포된다면 얌전히 체포되는 수밖에.”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바이킹이 아니게 된 남자가 분신을 하나 더 만들어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총 맞는 것보다야 방이 조금 좁아지는 게 나을 테니까.”


“총에 맞을 일도, 체포될 일도 없을 걸세. 언제부터 내가 엉성한 계획을 짜는 사람이었나? 비상 대처 방안을 많이 준비해두는 건 편의와 유연한 대처를 위해서지, 자기 계획의 성공률을 믿지 못해서가 아닐세.”


“진짜로 화난 것 같은데.”


“십 년 넘게 슈퍼빌런으로 지내면서 온갖 크고 작은 계획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예정대로 성공시켰던 건 기억 못 하고 딱 한 번 문제가 생기니 바로 의심부터 하는 꼴이라니.” 티처는 말했다.


“당신 체포됐었잖아.”


“그땐 허를 찔렸을 뿐이네.” 티처는 말했다.


바이킹의 분신들은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 동양인과 흑인이었다. 세 번째는 거구의 남성으로 변하고 있었다.


원본은 원반처럼 생긴 장비를 여기저기 돌려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문제라도 있나?”


“전력이 나갔어. 알몸으로 싸우게 생겼는데, 이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분신들은 옷만큼은 차려입고 있었다. 피부를 접어서 옷가지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만들어낸 옷은 색도 자유자재로 변하고 있었다.


“상대는 파워아머를 입고 있을 텐데?” 티처는 물었다.


“쓰러트릴 수는 없겠지. 시간이라도 끄는 수밖에.”


티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변신 능력자라,” 앤저뉴는 말했다. “혹시 다른 이름으로 서로 만난 적이 있던가?”


“난 새장에는 들어갔던 적 없어.” 바이킹은 말했다. “사티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지.”


“만나서 반가워.”


님프와 사티르. 신화 속의 만남이로군. 티처는 잡생각을 곧 떨쳐냈다.


“둘이 다가옵니다.” 흰옷의 여자는 말했다.


“좋아.” 티처는 말했다. “이쪽으로 오게.”


여자는 그의 말에 따랐다. 대상에게 더 깊은 영향을 줄 각오를 한다면 이보다 훨씬 강한 능력도 부여할 수 있었지만, 여자가 지금 부여받은 능력은 약한 편이었다. 백치가 아닌 멀쩡한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한 일이었다. 처음 찾아냈을 때 이미 마음이 반쯤 꺾여있던 상태였던 게 다행이었다. 써먹을 수 없는 수준까지 손을 대지 않아도 말을 잘 듣는 것도 그것 덕분이었다.


지금이 더 행복하겠지, 라고 그는 생각했다. 방황하던 사람에게 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정한 방향이 아니긴 했지만.


약한 능력이었던 만큼 해제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티처는 잠시 자신의 내면에 의식을 집중했고, 거기엔 체계적으로 분류해 놓은 수많은 능력이 있었다.


제한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분야에 능력을 집중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가르칠 스승을 만들기 위해서도 쓸 수 있는 능력이었다. 팅커 능력 부여도 원리는 같았다. 평범하게 익힐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지식이나 이론을 주입하면 그것이 곧 팅커 능력이었다. 작업을 시킬 사람 수만 충분하다면 티처는 사실상 팅커나 다름없었다. 인력이 필요하다는 제약과 결과물을 직접 검수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그는 사실상 모든 분야를 다룰 수 있는 저등급 팅커였다.


정신적 능력이라면 그밖에도 부여할 수 있었다. 인지 계통의 능력이라던가, 초인적인 통찰력이라던가, 통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작동하는 천재적인 사고력이라던가.


이번에 여자에게 부여할 능력도 그중 하나였다.


용아병들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장비는 벽을 투시할 수 있었다, 슈트의 강도와 내구도를 따지기 이전에 전투 보조용 컴퓨터만으로도 그들에게 승산은 없었다. 해킹할 방법도 없고, 노릴 만한 취약점도 없는 슈트들이었다.


그의 손이 닿자 여자의 능력은 변해가기 시작했다. 투시 능력, 물체의 내부를 포함한 일정 반경 안의 모든 것을 인식하는 능력이었다.


능력 부여를 마친 그는 품에서 꺼낸 스케치북을 여자에게 건넸다. “지도를 그리게. 사람뿐만 아니라 아까 보여줬던 설계도와 다른 부분이 있으면 모두 표시하고.”


그러자 여자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탓에 그녀는 종이를 눈 바로 앞에 가져다 대야 했다.


“슈퍼히어로 본거지 한복판에 갇힌 채로 포위망은 서서히 좁혀들고 있는데 주변은 새까매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니,” 앤저뉴는 말했다. “슬슬 걱정되기 시작하네.”


“걱정은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저놈들이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야. 당신이 벌이고 있는 짓이 걱정되는 거지. 이런 대응까지 이미 예상했었다면서.”


“그렇다네.”


“그렇다는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나 내 능력을 손에 넣겠다는 것 아냐. 이런 무모한 짓을 벌여야 할 정도로.”


“무모하다는 건 실패할 가능성이 있을 때 쓰는 말이다만.”


“실패할 가능성이 없는 작전이 어디 있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의 불안은 두 마디 말로 잠재워주도록 하지.”


“두 마디?”


“스톡홀름 증후군일세.”


“미녀와 야수처럼, 납치당한 사람이 납치범한테 반하는 그거?” 앤저뉴는 말했다. “공주님이 나오는 영화는 예전부터 좋아하긴 했지만···”


“내게 능력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심리적인 유혹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네.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이 노예처럼 복종하기만 해도 된다는 걸 매혹적으로 느껴버린 거겠지. 말하자면 알코올 중독과도 같은 원리일세.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자네의 경우에는 그 사랑이 오히려 억지력의 역할을 할 수 있을 테고.”


“억지력이라니? 내가 당신한테 반하기라도 한다면 내 능력을 활용하기는 오히려 더 편해질···”


“자네의 남자친구들은 전부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나.” 티처는 말했다. “분명 정신이상이나 집착증 같은 부작용이 있는 거겠지. 그런 건 사양일세. 난 자네를 능력으로 장악하려고 온 게 아니야. 그건 오히려 내 의도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을 걸세.”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때가 되면 말해주도록 하지. 준비는 되었나, 사티르? 계획은 기억하고 있겠지?”


사티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력 좋다고 했잖아.”


“적들과 마주해야 할 때일세.” 티처는 말했다.


사티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모습을 바꾼 분신들을 앞장서서 보냈고, 티처는 순간이동용 장치를 집어 들며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곧바로 갑주를 두른 남자들에게 향했다. 분신에 이끌려 모인 용아병은 총 다섯이었다. 나머지는 주위를 수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할 말이 있다네.” 티처는 말했다.


병사들은 곧바로 그에게 총구를 겨눴다. 분신들은 티처의 주위를 감싸며 몸으로 사선을 막기 시작했다.


“앞으로 몇 분 뒤에 내 제자들은 내가 미리 내려놓은 지시에 따라 네 가지 행동을 할 걸세.”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중 자네들이 가장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건 아무래도 견인 광선이겠지. 지금쯤 근처에서 발사 준비를 하고 있을 걸세. 방아쇠가 당겨진다면 광선은 이 건물 중간을 원통 모양으로 잘라낸 다음 자른 부분을 서서히 끌어당기겠지. 어릴 때 비슷한 놀이를 해본 적이 있지 않나? 나무 블록으로 된 탑에서 블록을 하나씩 빼내는 놀이 말일세. 바닥이 사라진다면 이 건물의 윗부분은 그대로 무너지는 수밖에 없겠지. 옆 건물 위로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유감이겠군. 거긴 작은 병원이 하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만.”


“양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등을 돌려라!” 용아병 한 사람이 말했다.


“참고로 견인 광선을 작동시키고 있는 건 모두 전 히어로일세. 각자의 사정으로 궁지에 몰린 끝에 나를 찾아온 망토들이지. 모두 무고한 사람들이니 공격하는 건 추천하지 않겠네. 관계된 모든 사람이 최악의 결말을 맞게 되도록 손을 써 두었으니 말일세.”


“당장!” 용아병은 소리쳤다.


티처는 몸을 돌렸고, 순간이동 장치를 옆으로 툭 내던지며 양손도 머리 위로 올렸다. “자네들이 우리 탈출용 함선을 요격하기 위해 준비한 함선이 총 몇 대인지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네. 그 함선들을 한 대도 빠짐없이 전부 동원하지 않는다면, 이 건물에 있는 모든 사람을 탈출시키는 건 불가능하겠지.”


용아병 하나가 손을 뻗자 순간이동 장치는 억제 거품으로 뒤덮였다.


“한 대도 빠짐없이 전부일세. 광선에 잘려나간 건물은 그대로 내가 준비한 탈출용 함선 안으로 끌려 들어갈 테고, 건물은 무너지겠지. 건물의 붕괴를 막으려 시도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간 인명피해를 막을 수 없을 걸세.”


용아병 하나가 무릎을 뒤에서 짓밟은 탓에 그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엎드린 그의 귀에 쇠사슬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갑이었다.


“그게 싫다면 한 가지 아주 단순한 대안을 제시하겠네. 분명 지금도 엿듣고 있는 히어로들이 있겠지. 슈발리에인가, 아니면 레전드인가? 내 해커들을 제압한 걸 보아하니 디파이언트일지도 모르겠군. 내 장비의 재밍을 풀기만 한다면 나는 동료들과 함께 순간이동으로 얌전히 떠나주겠네. 괜히 나를 신경 쓸 필요도, 건물이 무너질 일도 없겠지. 견인 광선 쪽 사람들도 남겨두고 가겠네. 선물이라고 생각하게나.”


그는 한쪽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는 걸 느끼며 가만히 기다렸다. 용아병 경관은 어느새 앞으로 돌아와서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체 연산 시스템을 탑재한 검은 갑주의 모습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앤저뉴는 여기서 나가고 싶은 모양이다만, 여기서 더 밀어붙인다면 자네들은 우리를 법정에 세워야 할 걸세. 그리고 그랬다간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보안 등급’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해명해야 하겠지. 물론 재판 자체는 자네들이 아마 이기게 되겠네만, 자기들이 사면령을 내려놓고는 이런 짓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불리해지지 않겠나? 그게 자네들이 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 첫 번째 이유일세.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이 건물이겠지. 다른 시기도 아닌 이런 시기에 본거지이자 눈에 잘 띄는 상징물이기도 한 이곳이 무너져 버린다면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지 않겠나? 수천만 명의 눈에 띄게 될 텐데, 자네들이 그런 심리적인 직격탄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기다렸다. 옆의 다른 용아병은 다른 이들을 포박하고 있었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경관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안면 보호대 한쪽 구석에는 빨간 불빛이 깜박이고 있었다. “세 번째 이유도 말해주도록 하지. 자네들이 나를 어찌어찌 체포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내겐 수많은 제자가 곳곳에 남아있다네. 내가 체포된다면 그들은 모두 죽게 되겠지. 자네들은 그들이 어디 있는지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도 모르지 않나. 자네들이 그래서 얻을 게 뭐가 있겠나? 나를 철창 뒤에 가두는 것?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어차피 사면령이 내려진 지금 자네들이 내게 적용할 수 있는 죄목이라고는 무단침입뿐일세. 이 건물과 수십 명의 목숨,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 올린 평판을··· 나 하나를 막겠다고 전부 내버릴 셈인가?”


“내가 볼 때 당신은 자기 중요성을 실제보다 낮게 평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앤저뉴는 중얼거렸다.


“쉿.” 티처는 말했다. “기껏 설득력이 있는 주장을 내놓았는데 초 치지 말게.”


용아병은 입을 열었다.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고 전해달라신다.”


“수학적으로 생각해보게. 지금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겠는가? 내가 앞으로 아무리 제멋대로 날뛰더라도 그만한 사람을 해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하네만. 감정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용아병의 안면 보호구 구석의 붉은 불빛은 점점 빠르게 깜박이고 있었다. 티처가 힐끗 돌아본 뒤에는 사티르와 앤저뉴가 붙잡혀서 손이 묶여 있었고, 분신들을 포박하고 있는 용아병도 있었다. 나머지는 통로를 감시하고 있었다.


깜박이던 불빛은 돌연 노란색으로 바뀌더니 곧 초록색으로 깜박였고 동시에 순간이동 장치 주변에서는 안개가 터져나왔다. 거품은 순식간에 분해됐고 장치는 숨겨져 있었던 바퀴를 펼치며 티처를 향해 굴러오기 시작했다.


티처는 쓰러지다시피 하며 몸을 날렸고, 그의 어깨는 순간이동 장치에 닿았다. 정전기와 같은 느낌이 그의 몸을 뒤덮었다.


제자들은 이미 그를 맞이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티처는 그들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앤저뉴, 사티르, 그리고 흰옷의 여자 역시 차례대로 이쪽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티처의 제자들은 질서정연하게 그의 주위를 빙빙 돌며 위치 추적 장치와 같은 것들이 붙어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고 있었다. 추적을 피하고자 순간이동 장치의 신호를 교란하는 이들도 있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천장이 높은 어떤 건물이었고, 방의 공간 대부분은 커다란 기계 하나가 차지하고 있었다. 도어메이커 없이 순간이동 거점을 만들기 위해 티처가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었다. 정해진 임무에 따라 주위를 맴돌고 있는 그의 제자들은 총 60명에 달했다.


“어떻게 한 거야?” 앤저뉴는 물었다.


“철저하게 조사한 덕분이지 않겠나.” 티처는 말했다. 제자 하나는 그의 손에 채워진 수갑을 끊고 있었다. “저들은 슈트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네. 앤저뉴 대응 수칙에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슈트들이 있는 한 장비 가동을 방해하는 효과에는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지. 망토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기들 장비까지 꺼버릴 수는 없을 테니까. 슈트가 가까이 다가와서 방해 효과가 풀린 틈에 이쪽의 인원이 장비를 원격으로 조작했던 걸세.”


“그놈들이 순간이동 장치를 보자마자 박살 내기라도 했다면—”


“그랬다간 역시 대응 수칙을 위배했겠지. 팅커 장비는 쏘지 않는 것으로 정해져 있네. 기껏해야 거품으로 뒤덮는 정도지. 드래곤의 데이터 덕분에 분해 약제의 제조법 정도는 간단히 찾을 수 있었네.”


“진짜로 모든 가능성에 전부 대비했을 수는 없었을 텐데.” 앤저뉴는 말했다.


“내 계획은 실패하는 법이 없다네.” 티처는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며 말했다.


앤저뉴는 단단히 화가 난 듯했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이런 미친 짓에 끌어들이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네.”


티처는 잠시 말을 멈췄다.


미친 짓이라.


그러고 보니···


“양동작전은 어떻게 됐지?”


“룽은 십 분 전에 작전을 완수했습니다.” 제자 하나가 대답했다.


“찾아냈다고? 그렇다면 직접 눈으로 보고 싶군. 꼭 크리스마스 선물을 여는 아이가 된 기분이야.”


“지금 띄우겠습니다.”


“특별한 사고는 없었나?”


“하나 있었습니다.” 제자는 말했다. 직설적이었지만 얼굴에는 표정이 드러나질 않았다. 대륙 하나가 파괴된 건지, 룽이 제자 하나를 때려죽였을 뿐인지 가늠할 방법이 없었다.


“보여주게나.”


화면이 켜졌다.


룽은 용병으로서 그의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화면에 나타난 장소는 마치 지하 대피소와도 같은 거대한 시설이었고, 주변에는 쓰러진 망토들이 가득했다. 카메라가 움직이자 룽의 발톱도 살짝 보였고, 키가 워낙 큰 탓에 그의 손은 옆에서 걷고 있는 제자들의 어깨높이까지 올 정도였다.


티처의 능력을 끝까지 거부한 룽은 대량의 현찰과 제자들이 동행하는 걸 허락한다는 조건으로 일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하얀 옷을 입은 제자들은 그가 비싼 값을 치르고 구한 장비를 실어나르고 있었고, 그들은 모두 티처가 내려준 능력 외에도 원래부터 능력이 있었던 이들이었다. 모두 죽으라고 시킨다면 기꺼이 죽을 정도로 그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었다.


주변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경고문으로 뒤덮여 있었다. 표지판은 물론이고 주변 암반에도 해골 그림이 새겨져 있었고, 수사 현장이라도 되는 양 노란 테이프로 가로막힌 곳도 있었다.


룽은 그 모든 걸 무시하고는 변신한 채로 방어선을 그대로 돌파한 듯했다.


모든 계획은 결과적으로 이득이 되도록 구상해야 했다. 지금까지는 의도대로였다. 룽이라는 패를 지금 꺼낸 건 강한 히어로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였다.


룽이 여기서 제거되더라도 통제할 수 없는 요소 하나가 줄어드는 셈이니 상관없었고, 룽이 성공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지금까지 그를 끈질기게 괴롭혀 왔던 의문점 하나가 사라지는 셈이었다.


부하들을 시켜 자료란 자료는 모두 긁어모으며 조사에 조사를 거듭하고, 모은 정보를 직접 정리하기까지 했지만, 추측으로 알아낼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룽은 마지막 철문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금속이 뜯겨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주력은 보내지 않은 건가? 슈발리에나 발키리는?”


“너무 멀리 있습니다, 선생님.”


멀다는 말의 의미가 달라진 시대였다. 어쩌면 다른 차원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군. 그 사고라는 게 뭔지에 따라서는 오히려 큰 불운이라고 할 수도—”


룽이 시설 안으로 들어서자 티처는 말을 흐렸다. 카메라에 달린 조명이 주위를 비췄다.


사티르는 팔짱을 낀 채 뒤로 물러나 있었다.


“저게 뭔데?” 앤저뉴는 물었다.


“격리 구역일세. 그리고 저건 종말초래자가 사용하던 무기지.”


총이었다. 어두운 회색의 총신은 외장재에 다른 재질이 뒤섞이기라도 했는지 희미한 녹색 반점 같은 것이 찍혀 있었고 약실 근처의 옆면에는 깃털에 베인 듯한 흠이 있었지만, 그 밖의 손상된 부분은 없었다.


시무르그가 몇 번씩이나 몸을 날려가며 지켰던 무기였다. 영상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날개로 무기를 감싸서 지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움직임 대부분이 실수처럼 보이도록 우연을 가장하면서까지였다.


시무르그는 주위에 있는 팅커들의 기술을 베낄 수 있을 뿐, 스스로는 팅커 장비를 만들 수 없었다. 티처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시무르그가 참고한 건 지금은 고인이 된 브록턴 베이의 한 팅커였고, 그 설계도도 지금은 티처의 수중에 있었다.


하지만 설계도와는 어딘가가 달랐다.


이 모든 게 함정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의 주위와 영상 속의 룽의 주위에는 시무르그의 간섭을 막기 위한 예지 능력자가 가득했지만, 시무르그라면 누가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태에서도 충분히 함정을 준비해뒀을 수 있었다.


전투 도중에 유실된 이 무기를 찾아낸 히어로들이 내린 결정은 접촉을 최소화하고 어딘가에 봉인해 두는 것이었다.


“잠시 조용히 하게.”


그러자 주변에서 일하던 제자들의 소리는 즉시 잦아들었다.


침묵 속에서 들리는 발걸음이 있었다. 그와 사티르, 앤저뉴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티처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이 영상은 이미 본 거겠지?”


“예.” 컨테사는 대답했다.


룽은 무기의 외장재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철문을 뜯어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거침이 없었다.


마찰음이 들렸다. 룽의 발톱이 유리와 부딪히는 소리였다.


이내 룽은 유리는 그대로 놔둔 채 주위의 금속을 계속 벗겨내기 시작했다.


유리 케이스 안에는 액체가 있었다.


처음에는 표면이 빛을 반사한 탓에 내용물을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카메라는 곧 그 실체를 비췄다.


아기였다. 귀가 크고 코가 동그란 남자아이. 아기치고는 그다지 귀엽다고는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한두 살쯤은 된 듯한 모습이었다. 성장 가속이라니, 시무르그가 그런 기술이 있는 팅커와 언제 접촉했던 거지? 본소우인가?


그것만으로도 심각한 문제였다. 그 아이 팅커는 뭘 알고 있는 거지?


“저게 그 큰 그림인가 하는 그거야?” 앤저뉴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아닐세. 무언가 의문점이 있긴 했지만, 종말초래자가 아이를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지.”


유리 수조에 불타는 손을 가져다 댄 룽은 그대로 유리를 녹여버리기 시작했다. 액체가 끓어오르며 김이 피어오르는 모습도 보였다.


“아니,” 티처는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일의 영상인 만큼 의미가 없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말이 저절로 나왔다. “왜 저런 짓을.”


룽은 손을 뗐다. 액체는 어느새 검붉게 물든 채 펄펄 끓고 있었다.


방울을 튀기는 오염된 물을 뒤로하고 룽은 몸을 돌렸다.


“안심해야 할지, 아니면 겁에 질려야 할지 모르겠는걸.” 사티르는 말했다.


“아까 사고라고 했던 건··· 언제를 말한 거지?” 티처는 물었다.


“이 시점으로부터 10분 뒤에 일어난 일입니다.” 한 제자가 말했다. “보시다시피 무언가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10분간 걷는 모습을 카메라가 따라갈 뿐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빠르게 넘기게.”


영상은 앞으로 감겼다. 룽은 철근 콘크리트로 된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고, 그의 위에서는 빛이 비치고 있었다.


발톱 달린 거대한 발 탓에 계단에서 줄곧 미끄러지면서도 그는 지상까지 올라왔고···


그곳에는 시무르그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이 비늘로 뒤덮인 룽은 덩치가 거의 시무르그와 비슷할 정도였다. 오히려 창백한 피부에 머리가 바람에 날리고 있는 시무르그가 더 인간에 가까워 보일 정도였다.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양쪽 모두 똑같이 괴물이었다.


“대성공이네.” 사티르가 말했다. “이 짓거리 덕분에 우린 전부 죽게 될지도 모르겠어.”


“시무르그가 이동했다고? 종말초래자는 활동을 중지한 게 아니었나? 혹시 그 밖의 공격당한 곳이 있나?”


설마 습격이 다시 시작된 건가? 나 때문에?


“시무르그는 궤도상으로 돌아갔습니다.”


티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금까지 온갖 끔찍한 참상을 봐온 그조차도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불길한 감각은 피할 수가 없었다. 지금 돌아갔다고 해도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다시 휴면기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습격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어쩌면 완전히 다른 행동 양식이 시작된 걸지도 몰랐다.


“이해가 안 되는데.” 앤저뉴는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일세, 라고 티처는 생각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다시 시도할지도 모르겠군요.” 컨테사가 말했다. “직접 활동하지 않게 된 지금 그녀가 어떤 수단을 쓸지는 가늠하기 힘들지만 말입니다.”


티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 생각이죠?” 컨테사는 말했다.


“다시 시도할 것처럼 보인다면 찾아내서 막아야지. 다른 이들도 끌어들이겠네. 히어로들도 말이야. 전임자의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계속 똑같은 일을 하면서 결과가 달라지길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광기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속담이 있긴 합니다.” 컨테사는 말했다.


“저걸 다시 시도할 거라고? 그래서 저게 뭔데?” 앤저뉴는 물었다.


“그것도 알아내야겠지.” 티처는 말했다. “룽이 시체를 파괴하지 않았다면 좋았으련만. 운이 따라준다면 히어로 쪽에서 DNA를 검사해보겠지. 격리 수칙을 지킨답시고 시설을 통째로 폐쇄해 버릴 수도 있겠다만.”


“제가 알아낼 수도 있습니다만,” 컨테사는 말했다.


“도와주겠다는 건가?”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그게 좋겠군요.”


그렇게만 말하고는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지금의 그녀는 명령을 듣는 충견이라기보다는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고양이에 가까웠다.


그래도 그의 밑에서 일하고 있긴 했다. 지금으로서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정리된 것 같군. 다른 특별한 일은 없었나?”


“룽이 연락을 해왔습니다.” 제자는 대답했다.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로, 계약 위반이라고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는 전언을 남겼습니다만.”


“대금을 보내게. 다음에 또 쓸 일이 생길지 모르니.”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르키스에게서도 연락이 왔었습니다. 오늘 언제라도 좋으니 찾아와도 좋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좌표도 받았나?”


“예, 선생님.”


“그럼 나도 가는 거겠지?” 앤저뉴는 물었다.


티처는 고개를 끄덕였다. 휴식이 절실한 상황이었지만, 아직은 멈출 수 없었다. “세인트?”


구석의 제자 한 명이 고개를 돌렸다. 인지 능력이 둔해진 탓에 그가 대답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예, 선생님?”


“드래곤의 코드는 어떤가? 어딘가 달라진 부분은 없는가?”


세인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데?” 사티르는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 중요한 건 아닐세.”


누가 해커들을 뚫었지? 디파이언트의 실력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해커들한테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면, 드래곤이 모르는 사이에 풀려났다는 의미일 텐데.


정말로 편집증인가.


그와 앤저뉴는 순간이동 장치 위로 걸음을 옮겼다.


마르키스는 계단 위에 앉아 있었고, 그의 뒤로는 저택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여름 별장이 보였다. 그의 옆에는 유리병에 아이스티가 담겨 있었고 쿠키 한 접시도 놓여 있었다.


“아이스티라니?” 티처는 물었다.


“아무리 겨울나기라고 해도 너무 더운 곳을 골라버렸다네.” 마르키스는 말했다. “앤저뉴. 연애사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그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앉지 그러나?” 마르키스는 계단을 가리켰다.


티처는 앉았다. 불편하기 그지없는 자리였다. 신체 변형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바로 일 이야기부터 하겠나, 아니면 의미 없는 잡담부터 나눌 텐가?”


“몇 분 전이었다면 바로 일 이야기부터 하자고 했겠지만,” 티처는 말했다. “그러기엔 오늘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진 것 같군. 가족은 잘 지내고 있나?”


마르키스는 몸을 풀며 쿠키 하나를 집어 들었고, 이내 앤저뉴에게도 하나를 건넸다. “차라도 한 잔씩 하겠나?”


티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기꺼이 들지.”


“부탁할게.” 앤저뉴는 말했다.


마르키스는 천천히 채운 찻잔을 두 사람에게 차례대로 건넨 뒤에야 자신의 잔에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말이 나와서 말이네만, 내 딸을 한 번만 더 언급한다면 자네의 전두엽을 제거해주도록 하겠네, 티처.”


티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도록 하지.”


“코로 바늘을 넣어서 전두엽을 찌른 다음 마구 휘저으면 되는 거라고 하더군··· 이쯤 하도록 하지. 자네가 딸아이를 언급하면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나한테는 협박처럼 들릴 테니 말을 아끼는 게 좋겠어.”


“그렇게 하도록 하지.” 티처는 말했다.


마르키스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이니 대답을 해주자면, 딸아이는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는 중일세.”


“그게 무슨 뜻이지?”


“문자 그대로의 의미일세. 악연을 정리하고, 앞으로는··· 아마 또 다른 악연을 쌓게 되겠지. 이전보다는 나아지기를 바라고 있긴 하네만.”


“앞으로 있을 악연이라는 건 아마 자네를 의미하는 거겠지. 은퇴할 생각은 없나 보군?” 티처는 물었다.


“자네라면 멈출 수 있겠나?”


“난 너무 깊이 엮여 있다네. 애초에 그만둔 적도 없었지. 자네라면 꽤 오래 자리를 비웠었으니 이대로 그만둘 수도 있지 않겠나.”


“난 구획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었네. 슈퍼빌런 노릇을 그만뒀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 않겠나.”


“하지만 같이 일하던 사람들과의 연은 모두 끊어지지 않았나. 십일 년을 새장에서 보낸 뒤로는 돌아갈 곳도 없어졌고.”


“난 곧바로 원래 삶으로 돌아갔지만 말이야.” 앤저뉴는 조용히 말했다. “생각보다 외롭더라고.”


“묻고 싶어지는군.” 마르키스는 말했다. “사람이 변한다는 게 정말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나? 내가 변한다면 그 이유는 아마 딸아이겠지. 애초에 딸아이를 잃어버리게 된 이유가 일 때문이었으니.”


“그런데도 다시 일을 시작하겠다고?”


“나르시시즘이라고 생각해도 좋네. ‘마르키스’와 영영 작별하기에는 너무 정이 들었지 뭔가.”


“신화 속의 나르키소스는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굶어 죽지 않았나.” 티처는 말했다. “그것도 하나의 성격 장애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정신이상이 아닌가.”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하는군.” 마르키스는 말했다.


“정말로 다른 이야기인가? 지금까지 큰 그림을 그려온 덕분에 마침내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빌런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네. 모든 계획을 이뤘고, 손에 넣고 싶었던 것은 모두 넣었지. 그러다 보니 이제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게 됐지 뭔가. 자네는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이라고 생각하나?”


“그건 인류 전체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자네와 나를 말하는 건가?”


“둘 다겠지.” 티처는 말했다.


“자네는 이미 생각해둔 게 있는 모양이군. 자네 생각을 먼저 말해주지 않겠나.”


“사람이 변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물었었지.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리 많은 사람과 부대끼더라도 우리 주위에는 언제나 괴물과 미치광이들이 가득했었네. 자네는 그게 정말로 개인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나? 인류의 본성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나? 능력으로 사람을 부려서 연구해 볼 수도 있겠지만, 답을 알아내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든다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 적어도 나는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데, 진실을 모르는 쪽이 결과가 어떻게 되든 자신에게 변명할 수 있을 테니까.”


“이제 자네의 목표 이야기가 나올 차례인 듯하군.”


“망토들이 핵심일세. 사이언에 관한 진실이 드러나면서부터 모든 능력이 어떠한 전체를 구성하는 일부라는 이론이 돌아다니고 있지 않나. 그리고 특정한 능력들이 서로 합쳐졌을 때 얼마나 거대한 위력이 나오는지도 우린 직접 경험했지. 우리가 이긴 것도 결국에는 그것 덕분 아닌가.”


“그렇다고 해야겠지.” 마르키스는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이루고자 했던 것은 전부 이뤘다네. 능력을 마음대로 나눠줄 수도 있고, 막대한 재산도 가지고 있고, 군대라고 해도 될 집단도 거느리고 있지. 적들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도 인생의 흥밋거리 중 하나로써 내가 원했던 거라고 할 수 있겠지.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그보다 더 숭고한 어떤 목표일세. 그 온전한 전체라는 것을 다시 끼워 맞출 수는 없겠나? 적어도 일부분이라도?”


“이러려고 나를 불렀던 거구나.” 앤저뉴는 말했다.


“원하는 건 누구에게나 있다네. 사람을 제대로 모으기만 한다면, 조합을 제대로 정하기만 한다면,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모두가 각자의 목적을 이루는 결과가 나오는 것도 꿈이 아닐세. 악당 짓이 아닌 그보다 더 거대한 목적을 위한 동맹을 만들 수 있겠지.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상대로, 어쩌면 무질서와 혼란 그 자체를 상대로 싸우는 걸세. 사티르는 내게 동조하고 있네만, 대신 막대한 대가를 요구했다네. 자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는 굳이 물을 필요가 없겠지, 앤저뉴?”


“그렇긴 한데.” 그녀는 잠시 집중력이 흐트러진 듯 멈칫했다. 고개를 들며 그는 말했다. “구체적으로 이게 어떻게 도움이 될 거라는 건진 모르겠는걸.”


“우리가 거의 습관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돈과 지위를 탐하는 건,” 티처는 말했다. “그게 힘이기 때문일세. 추상적인 힘이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지 않나. 나는 추상적인 힘이 아닌 조금 더 직접적인 힘을 손에 넣을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걸세. 시대가 변하면서 파라휴먼들이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한 걸음을 더 나아가도 되겠지. 굳이 돈과 지위에 매달릴 필요 없이, 모두가 서로의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직접적으로 협력하는 조직을 만들면 되지 않겠나? 그러기 위해서는 협력을 강제할 수단이 필요하겠지. 능력을 직접적으로 합치거나 공유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는 걸세.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떤 정부나 지배자보다도 높은 곳에 설 수 있겠지.”


“모두가 가장 바라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조직이라.” 마르키스는 말을 곱씹는 듯했다. “그보다 더 두려운 게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모르겠군. 혹시 여기서 내가 거절한다면 날 살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할 셈인가?”


“그러지는 않겠네. 하지만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자네가 만든 비밀결사가 건드려선 안 될 것들을 건드리고 다니는 동안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으라는 말인가?”


“동업자끼리의 예의라고 해도 되지 않겠나.”


“예의라. 어째선지 자네가 그 비밀결사에 내 딸아이를 끌어들이려 한다는 느낌이 드네만.”


“자네의 딸은 성인일세. 자기 뜻대로 행동할 자유가 있지. 안 그래도 나중에 언급할 셈이었네.”


“날 설득하려고 온 거라면 포기하게, 티처.”


“그렇다면 제안하겠네. 적어도 내가 자네의 딸에게 제안을 건네는 것까지는 묵인해 달라고. 본인의 선택에 맡기겠네. 본인이 거절한다면 군말 없이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겠다고 약속하지. 어느 쪽이 됐든 자네는 개입하지 않기만 하면 되네. 개입하더라도 나는 자네를 공격하지 않겠네만, 협력자들까지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흠. 그렇다면 역으로 제안하도록 하지. 자네의 제안은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한 그대로 내가 딸아이에게 전달하겠네. 그다음부터는 본인의 선택에 맡기도록 하지.”


티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에는 힘과 지배인가,” 마르키스는 말했다. 그는 한숨을 쉬고는 쿠키를 베어 물었다.


“어떻게 아니겠어.” 앤저뉴는 말했다. “매혹하든, 위협하든, 권력으로 찍어누르든, 어떤 식으로든 남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도록 하지 않고서는 당신도 살아갈 수 없을 텐데? 하다못해 한 마디 추파를 던지는 것도 결국에는 남에게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서 하는 짓이고, 그렇게 따지면 세상 모든 게 결국에는 남을 조종하거나 지배하기 위해 벌이는 짓이라고 할 수 있겠지.”


“정도의 차이라는 것이 있지 않나.” 마르키스는 말했다. “그걸 생각하지 않고 극단까지 내달렸을 때의 결과는···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누굴 생각하는 건지 알 것 같군.” 티처는 말했다.


“모든 걸 손에 넣은 그녀가 결국에는 어떻게 됐던가?” 마르키스는 물었다. “자네도 생각해보게, 티처.”


티처도 그 말에는 잠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의말

* 원작 번역 지침에 따른 공지사항.

“This is purely a fan project and I/we lay no claim to the ideas, characters, or story. The real author is J.C. McCrae, aka ‘Wildbow’, and the original version can be found at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The final chapter of Worm was published on 2013. 11. 19. This is a fan translation.”


"이 번역본은 팬의 작업물이며, 번역자는 이 작품의 아이디어,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자는 'Wildbow'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J.C.McCrae입니다. Worm 원작은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에서 연재되었으며 2013년 11월 19일에 완결되었습니다. 이것은 팬 번역본임을 밝힙니다."



* 표지 출처 : Ari Ibarra (ariirf.com)

팬아트 작가의 사용 허가를 받은 표지입니다.



* 이 작품의 번역은 2인 비영리 프로젝트입니다. 번역자가 번역을 맡고, 편집자가 검수와 업로드를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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