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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르카 님의 서재입니다.

W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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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엘사르카
작품등록일 :
2020.05.08 22:18
최근연재일 :
2022.05.02 23:5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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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7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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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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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글자
52쪽

'티끌' 30.4

DUMMY

나는 드래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 주위가 젖어 있었고 제대로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다. 몸이 축 늘어지거나 잔뜩 긴장해 부들부들 떨거나 둘 중 하나였다. 온몸이 저렸고, 근육이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예전에, 그러니까 나와 엠마가 친구 사이였던 중학생 때 집에 놀러 가서 당시 유행했던 이야기대로 장난을 쳐봤던 적이 있었다. 어두운 방에서 거울 앞에 서서 자기 얼굴을 계속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지 않은 채 어떤 여자의 이름을 — 지금은 어째선지 생각나지 않았다 — 계속 부르면 유령이 나온다거나 하는 이야기였다.


놀랍게도 실제로 비슷한 일이 벌어지기는 했었다. 거울 속의 내 얼굴이 찢어질 듯 일그러지며 뺨과 이마가 시커멓게 물들고, 입이 마치 누가 꿰맨 듯 사라지는 모습이 보이자 나는 그만 방 밖으로 도망치고 말았었다.


왜 그렇게 보였는지는 나중에 책에서 찾아본 뒤에야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지. 찾아보기만 하면 문제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기만 하면 해결할 수 있었던 시절이. 사실은 환상이었던 것이었다. 언제나 실체의 일부분만을 보면서 빈틈이나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제멋대로 채워 넣는 인간의 뇌 때문이었다.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 마치 최면을 걸듯 이름 하나를 반복하는 데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으면, 이목구비의 일부만을 인지한 뇌가 공포와 상상력, 그리고 최근에 들은 피 튀기는 무서운 이야기를 바탕으로 빈틈을 알아서 채워 넣은 결과가 그 기괴한 광경의 정체였던 것이었다.


요점은 사람의 정신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한계와 약점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클레어보이언트와 감각을 공유하기 이전에도 이미 내 정신은 한계에 몰려 있었었다.


드래곤은 무언가 말을 했다. 걱정스러워하면서도 단호한 말이었고, 말꼬리가 올라간 것으로 볼 때 말의 내용은 질문인 듯했다.


나는 양팔을, 그러니까 잘린 팔과 클레어보이언트의 손을 잡은 멀쩡한 팔 양쪽을 들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가 다시 팔을 떨궜다.


드래곤은 조용히 무언가 다른 것을 말했다. 대답이었다.


클레어보이언트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에도 어느 정도는 기술이 필요한 것 같았고, 방법을 전해 듣지 못한 나로서는 스스로 익히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드래곤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자니 중학교 때의 그 거울과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초점이 맞지 않은 부분들을 중심으로 무언가가 빈틈을 채워 넣고 있었다.


눈치채기 힘들었지만 무언가가 있었다. 감각이 닿지 않는 곳을 내 파편이 기억으로 메꾸려고 하는 걸까? 아직은 환각이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내가 가장 집중해서 보고 있는 드래곤이나 그 밖의 사람들, 망토들, 전투, 이런 것들은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었지만, 아무도 없는 들판이나 산맥, 넓디넓은 바다 같은 곳들은 조금씩 모습이 뒤틀리고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도시는 무언가 모습이 뒤엉켜 있었다. 아니지, 도시 특성상 조금만 뒤틀려도 알아보기가 쉬워서 그런 걸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내가 미쳐가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시간이 없어.


나는 손을 들어 새장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우리 발밑이었다. 지금 이곳과 새장 사이에는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시설이라는 위명에 걸맞게 텅 빈 진공, 억제 거품, 포스필드를 비롯한 온갖 안전장치들이 갖춰져 있었다. 허공에 매달린 시설물과 확대/축소 팅커에 의해 확대된 벽 사이에는 드넓은 진공 공간이 놓여 있었고, 나는 그 모습에 그만 현기증을 느끼고 말았다. 뒤틀린 감각 때문에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팔이 떨리고 있었다. 팔뚝의 근육에는 힘이 너무 들어가 있었고, 손의 근육에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질 않고 있었다.


나는 드래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내뻗었던 손바닥을 뒤집으며 손을 쥐었다. 동시에 새장 안에는 포탈 하나가 더 생겨났다.


드래곤은 몸을 굳혔고, 내가 포탈로 이은 방은 억제 거품으로 뒤덮였다.


드래곤은 이전과 똑같은 조용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의사소통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몸짓만으로도 뜻은 알 수 있었다. 나는 목적을 선언했고, 상대는 그걸 거절했다는 것, 그것만큼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그대로 달려들어서 기체의 주둥이나 다리를 끌어안고 싶었다. 내게 조종당하고 있지 않은 무언가에 몸을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약점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지구-베트의 화산지대로 포탈을 열어 용암이 드래곤의 기체 위로 떨어져 내리도록 해 보았다. 포탈은 가장자리에 용암이 닿자 작동이 해제되며 사라졌지만, 용암 한 뭉텅이는 그대로 드래곤 기체 위로 흘러내려 ‘목’ 부분을 스쳤다.


그러자 드래곤은 곧바로 ‘날개’ 부분의 제트 엔진을 가동하며 반응했고 순식간에 오른쪽으로 오십 피트의 거리를 벌렸다. 그녀는 발톱으로 암벽을 붙잡은 뒤에 추진기를 계속해서 가동하며 기체를 암반에 단단히 들이박고 있었다.


이렇게 되나. 그럼 방법을 바꾸는 수밖에.


드래곤 쪽에서도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총열이 나를 겨누는 중이었다.


나는 그녀가 내게 뭘 발사하려는 건지 확인하지도 않은 채 일단 포탈을 열었다. 벼락이었다. 허공에 생겨난 둥근 영역을 따라 눈에 보일 정도의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아마 전류가 흐를 길을 만들기 위해 대기를 이온화한 모양이었다.


포탈 너머로 들이친 벼락은 사이언의 등에 내리꽂혔고, 나는 놈이 반응하기 전에 곧바로 포탈을 다시 닫았다.


그러자 드래곤은 주포의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총열이 한데 모이며 그 뒤의 기계장치의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나는 내 바로 뒤에 포탈 하나를 열었다.


곧이어 드래곤은 억제 거품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대량 분사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난사. 이 산꼭대기 전체를 거품으로 뒤덮으려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의 무차별 사격이었다.


나는 포탈을 타고 지구 반대편쯤에 있는 곳으로 몸을 피했다. 이스탄불의 비잔틴 타워였다. 세상에서 세 번째로 높은 건물이었던가. 주위에는 폐허가 된 도시와 온갖 오염물과 잔해로 시커멓게 물든 수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반격을 가했다. 총기를 들고 있거나 원거리 공격 수단을 갖춘 모든 파라휴먼이 일제히 내가 그들의 코앞에 연 포탈을 통해 사격을 가했고, 그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드래곤 바로 옆으로 이어져 있었다. 총알, 레이저, 에너지, 얼음, 벼락, 쇳덩이. 드래곤의 기체는 물론이고 그 뒤의 암반까지 완전히 파괴할 정도의 위력을 담은 공격이 작렬했다.


나는 산사태에 깔려 죽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무리를 모두 대피시켰고, 씽커와 팅커들만을 내게로 끌어들이며 나머지 무리는 산맥 곳곳으로 재배치했다.


드래곤은 드론을 투입하고 있었다. 이번엔 함선이 아니라 수만 기에 달하는 소형 무인기였다. 내 제트팩에 쓰인 것과 같은 반중력 패널을 장착한 농구공보다도 작은 드론들이 이쪽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저것들 각각이 서로 다른 무기를 탑재하고 있을 거라는 건 이미 겪어 봐서 알고 있었다. 억제 거품, EMP 파동, 폭발물, 최루탄, 그밖에도 많았다.


이건 일반적인 싸움이라기보다는 전쟁에 가까웠다. 양쪽 모두가 방대한 자원과 군대에 가까운 전력을 갖추고 있었고, 동원할 수 있는 잠재적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한쪽이 녹다운을 당하는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지금은 상대에게 포기를 강요할 수 있을 정도의 손해를 입혀야 싸움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드래곤에게는 약점이라고 할 것이 없었다. 한 지점을 공격하는 것만으로는 그녀를 제거할 수 없었다. 사실 그녀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할 가능성이 컸다. 상대가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드래곤이 자기 의지로 이 싸움을 포기한다는 게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반대로 내 쪽은 애초에 드래곤이 물리적으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내 승리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나를 이기려면 드래곤은 내가 지금 지배하는 모든 망토에 더해 앞으로 지배할 모든 망토까지 제압해야 했다. 드래곤에게 그렇게까지 할 의지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내 군대를 부수지 말아줘. 제발 그렇게까진 할 수 없다고 해 줘. 그렇게 된다면 난 완전히 실패한 셈이겠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나 자신을 이렇게 망가트리고, 빌런으로서 죽게 된다니.


사이언을 상대로 한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곳에만 집중해야 했다. 흐려지는 시야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드래곤과 사이언을 동시에 신경 써야 한다면 안 그래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더 힘들어질 것이었다.


드론들이 접근하자 내 군대는 요격을 시작했다. 드론들은 회피기동을 펼치고 있었다. 넓은 시야를 통해 나는 드래곤이 드론들을 어떻게 조종하고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었다. 완전 동시 조종은 아니었지만, 그 시차는 굳이 따져봤자 의미가 없을 정도로 짧았다.


나는 예지 능력자와 정보계 능력자를 비롯한 씽커들의 힘을 빌려 최선의 접근법을 찾기 시작했다.


신유가 드래곤의 공세가 향하는 대략적인 방향을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신유의 눈을 통해 보는 전장에는 형형색색의 흐릿한 선이 곳곳을 수놓고 있었다. 이쪽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이동 중인 드론이 몇 기인지, 저쪽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이동 중인 드론이 몇 기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택할 이동 경로까지 모두 보였다. 1차 공세는 기동성을 빼앗기 위한 공세였고, 2차 공세는 전과 확대를 위한 공세였다. 선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보병’이나 ‘기병’ 같은 이름표를 붙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감각과 신유의 시야를 종합해서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봤을 때···


드래곤은 나를 직접 공격하려고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려는 거지?


열일곱 기의 함선이 격납고에서 발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도 전투 기체가 아닌 신속 대응 및 구출용 기체였다. 분명 사이언과의 직접 전투에 투입하는 것보다 예비대로 남겨두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해서 남겨둔 기체들일 것이었다.


드래곤의 공세 방향이 선명해지면 선명해질수록 신유의 감각은 그녀의 약점 역시 선명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그중에는 너무 멀어서 클레어보이언트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도 있었다. 지구 대기권 밖에 있는 것은 클레어보이언트에게도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그러나 나머지는···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었다. 나는 부대 하나를 육군 기지로 보냈고, 고열을 방출해 폭약을 터트리며 중력 파동으로 그 폭발력을 조작해 한 방향으로 쏘아 보냈다. 목표는 근처에 드래곤이 건설해 둔 데이터센터였고, 결과는 완전 소멸이었다.


죄송해요.


반응은 곧바로 나타났다. 드래곤이 다른 곳에 주의를 돌리며 드론들의 움직임이 단조로워지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대형 함선들을 움직여 각 데이터센터의 방어에 나서고 있었다.


사람이 관리 중인 시설도 있었다. 데이터베이스 전체가 드래곤의 것으로 인식되는 것으로 볼 때 아마 드래곤이 데이터 관리 업체를 통째로 인수한 듯했다. 냉각된 시설에 줄줄이 늘어선 서버들의 모습은 마치 공동묘지의 묘비와도 같았다. 영하에 가까운 기류가 바닥을 통해 솟아오르며 더운 공기를 밀어내고 있었고, 실내의 공기 흐름은 언제나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고온과 저온이 항상 강풍 수준의 속도로 뒤섞이는 극도로 정교한 설계 방식이었다.


아직도 시설 안에 남아 있다는 점에서 관리 인력의 성격 역시 엿볼 수 있었다. 이런 시설 안에 만약을 대비한 생활 공간을 갖춰 놓다니, 거의 편집증에 가까운 준비성이었다.


사실 어쩌면 그게 합리적인 판단일지도 몰랐다. 이 세상엔 끔찍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나는 포탈을 열어 관리 인력을 조종했다. 화면에 떠오른 글자를 읽을 수가 없는 탓에 나는 조금 더 직접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건물을 사방팔방으로 헤집고 다니며 스위치를 마구 조작하고 플러그를 뽑으며 단단히 닫혀 있었던 문들을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는 양판 망토 셋을 보내 C.U.I의 궁전 밖에서 그랬던 것처럼 열기를 방출하게 했다. 저건 냉각기··· 망토 하나를 더 보내 파괴해야겠지. 드래곤의 신속 대응 기체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죄송해요, 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나는 드래곤이 관리하는 데이터베이스 곳곳의 화면과 계기판 곳곳을 들여다보았다. 계기판은 하나같이 빨간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숫자는 커지고 있었고, 게이지는 꽉 차도록 치솟고 있었다.


드래곤이라면 분명 방법이 있겠지, 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분명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데이터만은 보존할 수 있도록 준비해둔 방법이 있을 거야. 나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시설 하나를 파괴할 때마다 그녀는 통제 범위를 좁히며 남은 설비들을 더더욱 혹사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포탈을 열었고 내 휘하의 원거리 공격수들은 다시 한번 일제 사격을 가했다. 이번의 출구 지점은 대기권의 끝자락이었고, 목표는 인공위성이었다.


삼십 초의 일제 사격이 이어진 뒤에야 신유의 능력은 그곳에 약점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내 휘하의 다른 씽커 능력 역시 비슷한 정보를 전하고 있었다. 인공위성이 폭발하는 모습이 보인다는 보고를 올리는, 완벽에 가까운 시력을 갖춘 어떤 망토도 있었다.


드래곤의 내면이라고 할 수 있는 계기판들은 한층 더 극단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제발 멈춰주세요, 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이상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나 드래곤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공세를 재조정한 뒤에 한층 더 격렬하게 덤벼들었고, 드론들은 최전선의 내 망토들과 접촉하며 그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마취제, 전기충격, 억제 거품과 최루탄이었다.


나는 그 공격을 그대로 방관했다. 상대가 더 효과적인 전술을 생각해내기 전에 우선은 후속타가 어떤 식으로 들어올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제2파가 접근해왔고, 드론들은 무리를 조종하기 위해 내가 열어둔 포탈을 향해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나에게로 바로 통하는 포탈들이었다. 저 크기로는 통과할 수 없을 텐데···?


그 순간 드론들은 외부 부품들을 벗어 던지며 급가속했고, 절반의 무기만을 든 채 반중력 패널로 내게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나는 드론들이 통과하기 직전에 포탈들의 위치를 재조정했고, 드론들은 허공을 갈랐다.


신유의 능력이 제3파의 존재를 알려왔다. 공격이라기엔··· 신유의 능력은 제1파를 보병, 혹은 창병으로 인식했었다. 제2파는 기병이었었다.


제3파는··· 공성 병기라고? 신유의 능력이 그은 선들에서는 고의성과 파괴력이 느껴졌지만, 동시에 그 방향성은 직접적이지 않고 어딘가 분산되어 있었다.


나는 드론들을 향해 화력을 집중했고, 그러자 포스필드가 펼쳐지며 드론들을 보호했다. 양판을 제외하고 포스필드를 뚫을 수 있는 내 휘하의 망토는 많지 않았고, 일일이 뚫기에는 드론의 수가 너무 많았다.


드론들은 기계로 된 다리를 펼치며 지면을 단단히 디뎠고, 곧이어 사각뿔 같은 형태로 펼쳐지며 그 꼭짓점으로부터 푸른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 포탈들은 강제로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내가 비잔틴 타워로 몸을 피하려고 열었던 그 포탈을 포함해 방금 닫았던 여러 포탈이었다. 닫으려고 해도 닫히지 않았다.


드론들이 쳐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포탈을 하나 더 열어젖히며 신유에게 장치 하나를 건넸고, 곧 나머지 무리 모두를 이끈 채 포탈로 드론들의 사격을 막으며 그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신유는 곧바로 티처의 장치를 가동했고, 그 주변의 모든 포탈은 일시에 가동을 정지했다.


드래곤이 내게 접근할 방법이 사라진 것이었다.


나는 계기판과 게이지들의 모습을 확인해 보았다. 내가 공격을 가할 때마다 드래곤의 얼마 남지 않은 설비에는 극한에 가까운 부하가 걸리고 있었다. 애초에 사이언이 동부 해안에 입힌 괴멸적인 피해 때문에 처음부터 멀쩡하지 못했던 드래곤이었다. 우리 둘만의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이미 반쯤 불구가 되었던 건 나나 드래곤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이언에게 온 힘을 집중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싸우고 있다는 점도 나와 똑같았다.


데이터센터 하나를 파괴할 때마다 대략 사 퍼센트 정도의 부하가 걸린다고 가정한다면··· 아니. 숫자를 제대로 계산할 수가 없었다. 눈으로 보고 어림짐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데이터센터를 하나를 더 노렸다. 포탈을 통한 일제 사격이 무인으로 관리되고 있는 시설 하나를 또다시 덮쳤다.


그러자 내가 지금까지 지켜보고 있었던 화면들은 하나둘씩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직 공격하지도 않은 서버들까지도 냉각 작용이 멈추며 조명이 꺼지고 있었고, 네모반듯하게 초록색으로 켜져 있던 계기판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불빛이 한꺼번에 꺼지는 계기판이 있는가 하면 무작위로 곳곳이 검게 물들고 있는 계기판도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마치 얼어붙은 듯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만 해요,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쯤 하면 됐잖아.


백업 서버 정도는 있을 거 아냐. 그것들까지 꺼버리면 어떡해. 당신은 잠깐 죽어 있다가 전원 스위치만 켜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잖아.


최소한의 활동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그녀도 생명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심장박동 없이 살아남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드래곤 역시 최소한의 소프트웨어를 가동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불빛은 계속해서 거침없이 꺼지고 있었다.


드래곤이 몇 명의 사람에게 잇따라 통신을 보내는 모습이 보였다. 슈발리에를 비롯한 히어로들 각자에게 그녀는 몇 마디씩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이어서 그녀는 디파이언트에게는 조금 더 긴 메시지를, 티처와 세인트를 향해서는 신랄한 몇 마디를 전했다.


세인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티처는 자기 휴대폰을 들어 올려 화면을 몇 번 두드리더니 이내 휴대폰을 든 손으로 경례를 올려 보였다.


산꼭대기의 드론들은 모두 지면으로 얌전히 내려앉았고, 기체들은 멀리 물러나 천천히 착륙했다. 미동도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디파이언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사이언이 괴성을 내지르며 공격해왔고, 디파이언트는 거기에 곧바로 반응하며 함선 하나를 직접 조종하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마지막 불빛이 꺼진 건 그때였다.


나는 수많은 기계가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는 모습을 바라보며 멍하니 제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냉각 팬이 멈춘 서버 설비는 상상 이상으로 후덥지근했고, 데이터센터들은 모두 완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고도가 너무 높았던 탓에 착지하지 못한 드론들은 그대로 추락했다. 거기에 맞아 함께 추락한 내 휘하의 망토도 한두 명 있었다. 드론의 몸체에 직접 맞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미안해요.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내가 떠올린 생각이 아니었다. 기억이었다.


능력이라도 그렇게 말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목에 무언가가 걸린 듯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목구멍에 걸린 것이 점점 부풀어 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고, 하마터면 클레어보이언트의 손을 놓아버릴 뻔했다가 그래선 안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도어메이커와 클레어보이언트의 손을 움직여 입이 드러나도록 가면을 끌어당겼다. 곧이어 목구멍에 걸렸던 것처럼 느껴졌던 것은 토사물이 되어 쏟아져 나오며 내 발치에 흩뿌려졌다. 고통스러웠지만, 그 고통은 너무나도 미미했다. 현실감이 들지 않는, 여전히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계산 실수였나?


티처 때문에 취약해졌던 건가?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이제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다시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걸로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다면 다시 뭔가를 토해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편이었는데, 친구였는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싶었다. 왜 협력해 주지 않았냐고, 왜 마지막까지 다른 놈들과 똑같이 굴어야 했냐고. 동시에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이들을 혐오하기에는 나 자신도 다를 게 없었다. 똑같은 처지였다.


지금은 그 모든 감정을 잠시 접어두고 사이언에게 주의를 돌려야 할 때였지만, 한편으로는 이대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게 이제와서 무슨 의미가 있는데. 구할 게 뭐가 남아 있지?


정신이 온전했다면 상반된 생각으로부터 타협점을 찾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못했다. 몸이 마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신적 지주가 있었지. 뭐였더라? 태틀테일, 레이첼, 임프··· 그루의 오두막. 포탈의 육각 무늬는 어느새 엉망이 되어 있었다. 드래곤과 싸우며 모양을 신경 쓰지 않고 포탈들을 마구 여닫은 탓이었다. 신경을 더 쓸 필요가 있었다. 자기 자신의 감정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상태라면, 주변의 단서를 통해 심리 상태를 추측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나는 육각 무늬를 다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또 뭐가 있지?


나는 미리 정해 뒀던 정신적인 지주들을 계속 떠올려 보았다.


엄마··· 묘지의 모습이 보였다.


옛날 집···


옛날 집이 어디였더라?


도로가 너무 엉망이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무너진 잔해뿐이었고 건물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랜드마크까지 전부 사라져 버린 이 도시에서 집 하나를 찾아내기란 불가능했다.


미리 정해 뒀던 버팀목에 의지해 나아갈 생각이었지만, 분명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을 무언가를 떠올리지 못하게 됐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마음이 한층 더 흔들릴 뿐이었다.


지금의 나는···


지금의 나는··· 뭐였지?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분명 어떤 단어나, 상징이나, 개념을 떠올리려고 했을 텐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당황하지 마, 라고 나는 생각했지만, 머릿속의 그 목소리부터가 당황하고 있었다. 침착하지 못했다. 숨이 점점 가빠지고 있었고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머리까지 영향이 갔는지 똑바로 생각하기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당황하지 마, 라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같은 말을 반복하자 조금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야. 방금 건 정상이었어. 하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고.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상황에서 단어 하나가 갑자기 떠오르지 않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잖아.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싫더라도 해야 해, 라고 나는 되뇌었다. 사이언을 막아야지.


포탈이 열렸다.


내가 지시한 것이 없었는데도 그랬다.


탑승자인가? 이제부터는 알아서 움직이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드론들이 움직였다.


디파이언트인가?


아니면 다시 주도권을 빼앗아온 세인트?


포탈을 통해 쳐들어온 드론들은 순식간에 신유를 쓰러트리며 내게 날아들었다.


티처도 세인트도 내 쪽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지금은 사이언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포탈을 열어 드론들을 요격하며 날아드는 최루탄과 억제 거품을 흘려보냈다. 반응속도가 조금 느려진 것 같기도 했다. 아직도 내면이 혼란스러워서일까, 아니면 상대가 누구인지 아직 몰라서 그런 걸까.


씽커는 신유 말고도 있었다. 양판의 능력 증폭 덕분에 그들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도 한결 쉬워진 상태였다. 꼭두각시 인형으로 비유하자면 손에 더 잘 맞게 된 것이었다. 나는 드론들을 조종하는 존재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씽커들의 능력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몸을 가누기가 한층 편해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거나 환각에 빠졌던 순간들은 모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던 순간들이었었다. 전투나 대화가 아닌, 그사이에 끼어 있었던 순간들.


갈등이 필요했다. 편해지기 위해서는 분쟁의 현장 한가운데에 있어야 했다.


그게 나였다. 언제나 내게는 적이 있어야 했고, 목표가 있어야 했다. 상식이라는 게 조금이라도 통하는 세상을 만든다는 그 목표를 향해 갈 방법이 눈앞에 있었을 때야말로 나는 가장 빛나는 존재였었다. 사람들을 통제하고, 방해물을 제거하고, 앞길을 막는 이들을 찍어누르고.


그게 내 방식이었다. 혼돈과 광기야말로 언제나 내 무대였었다.


아니,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늘 그랬던 건 아니잖아.


능력 없이 그저 테일러였던 시절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갈등을 피해 다녔었잖아. 어떻게든 버티려고만 하며 지냈을 텐데.


그렇다면 이 모든 건 탑승자 네가 벌인 짓인 걸까?


당연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드론들은 계속해서 날아들었고 나는 재차 방어에 힘썼다. 나는 무리를 불러모아 방어선을 형성했다.


그러자 드론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임을 바꾸기 시작했다. 포탈을 통과했다가 그대로 방향을 꺾어 건물을 빙 돌아오며 내 등을 노리는 드론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부대를 다시 움직여 그것들을 가로막아야 했다.


이번에 다시 열린 포탈들은 내 의지대로 닫을 수가 없었다. 지금 보니 드론들은 표시등이 모두 꺼져 있었다. 렌즈도 어두웠고, 반중력 패널을 제외하고는 동력이 공급되고 있다는 표시 자체가 없었다. 원격 조종이라고 하는 걸까?


불은 꺼졌지만, 멀쩡히 작동하고 있다, 라.


나는 돌연 웃었다. 기괴한 소리였다. 내가 낸 웃음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런 미친, 불빛만 껐던 거였어!


세인트가 아니었다. 티처도, 디파이언트도, 그 밖의 어떤 세력도 아니었다.


나는 계속 웃었다. 현기증과 가빠진 호흡에 걷잡을 수 없는 웃음까지 더해지자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드래곤이었어.


씨발, 처음부터 드래곤이었다고. 이런 장난을 치다니. 이렇게 날 속여넘기려 하다니. 내가 자기 시스템을 감시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불을 끄고 팬까지 멈춘 뒤에 과열로 터지는 장비가 나오지 않도록 모든 걸 최소 동력으로 돌리고 있었던 건가.


건물을 빙 돌아온 드론 하나가 자폭하며 창백한 스파크를 내뿜었고, 그러자 일대에 있던 모든 포탈은 그 형태가 뭉개지며 이차원보다는 삼차원에 가까운 모습으로 구겨지기 시작했다. 이내 포탈들은 한꺼번에 모습을 감췄다.


한순간에 군대의 지휘권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 군대에 둘러싸여 있는 상태 그대로.


빌어먹을 팅커 놈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보다 더 좆됐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날아갈 듯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를 내 손으로 죽여버린 게 아니었으니까.


가장자리 쪽의 망토들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드론들이 포위망을 형성하는 와중에도 가장자리 쪽의 망토들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웃고 있었다. 클레어보이언트의 손을 마치 마지막 버팀목이라도 되는 것처럼 붙잡은 채.


가장자리에 서 있었던 망토들은 서서히 물러나며 여기저기서 서로 부딪히고 있었다.


그 순간 웃음소리가 돌연 멈췄고, 내 입에서는 어떤 소리가 터져나왔다. 포효. 비명. 알아들을 수 있는 의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마음속 어딘가에 끈질기게 남은 분노와 절망감을 마지막 한 움큼까지 끌어올려 내지르는 소리였다.


나는 범위 안의 모든 사람에게 드론들을 공격하라고 지시하면서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목이 아파 왔고 숨이 넘어갈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내 비명은 멈추지 않았다.


드래곤은 이제야 드론들을 통해 무언가 방송을 송출하고 있었다. 저건 영어일까. 높낮이가 노래처럼 다채로운 저 언어는 아마 중국어일 것이었다. 이쪽이 퍼부은 공격이 작렬하며 터져 나온 폭발과 충격파 탓에 드래곤의 말은 대부분 전해지지 못했다.


가장자리의 망토들은 마치 멍하니 있다 갑자기 분위기를 파악한 사람처럼 조금 전까지 싸우고 있었던 드론들을 계속해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모두 티처 부하나 양판의 부대원이었던 만큼 이들 중에는 세뇌를 당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자기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선택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이들이었다. 그들은 만국 공통의 언어라고 할 수 있는 분노에 잠긴 함성과 내가 그나마 조종하는 몇몇 망토들의 행동을 보고는 분위기에 휘말리고 있었다.


드래곤을 처리해야 한다는 문제는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드론의 움직임만 봐도 그녀의 의도는 명백했다. 그녀는 본체라고 할 수 있는 나를 제거할 심산이었다. 그리고 그 목표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드래곤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제거해야 했고, 드래곤의 시설을 모조리 날려버리는 방식은 쓸 수 없었다. 드래곤을 두 번 죽이는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심리전이라니 정말 엿 같은 짓을 벌여주는구나, 드래곤.


그러나 악의를 담아서 한 생각은 아니었다. 이제는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안심하고 있었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감정이라기보다는 생리적인 상태처럼 느껴졌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씩 처리해야겠지.


일단 드래곤부터.


드래곤이 착륙시켰던 기체들은 하나둘씩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종말초래자들을 상대로 함께 싸웠던 적도 있었다. 한동안 길드는 우리 측의 가장 강력한 전력 중 하나였었다. 드래곤이 전투 불능이 되었을 때 일어났던 사태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인공지능이 조종하는 기체가 파괴되는 건 그리 큰 손실이 아니었지만, 주력 기체가 파괴되었을 때는···


나는 기체의 배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중 어느 것을 제일 안전하게 지키고 있지?


하나는 전장 한가운데에서 다양한 종류의 포스필드를 만들어내며 사이언의 공격 위력을 최대한 줄여보려고 하고 있었다. 일단 사이언을 바다 위로 끌어내긴 한 것 같았지만, 사이언은 주변의 사람이 줄어든 만큼 소수의 표적에 더 많은 화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놈이 수면을 내리칠 때마다 해일이 밀려들며 직접 공격한 것 이상의 피해를 주고 있었고, 레비아탄은 한쪽 팔다리와 머리 대부분을 잃은 채 물가에 앉아 피해를 복구하고 있었다.


장거리에서 지원 사격 중인 기체가 두 대 더 있었다.


그리고 구름 위에는 또 한 대의 기체가 초장거리에서 사이언에게 레이저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드론들은 내 방어선을 뚫어내기 직전이었다. 내게 지배받지 않고 있는 망토들이 제멋대로 싸우며 쉽게 무너지고 있는 탓이었다. 애초에 정신이 온전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도어메이커의 능력이 슬슬 회복되려고 하고 있었다. 포탈을 다시 만들어내는 건 가능했지만, 속도가 느렸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망토들을 다시 지배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죄책감을 느낄 시간은 없었다. 사실 생각할 시간 자체가 없었다. 내가 선택의 무게를 실감한 건 단 한 순간이었다. 이게 통하지 않는다면, 난 아무 이유도 없이 모두를 방해한 셈이 되겠지.


난 드래곤의 함선 중 가장 사정거리가 긴 기체의 뒤로 포탈을 열었다. 반대쪽은 내 군대의 머리 위로 이어져 있었다. 나는 내 지배하에 있는 모든 사람의 화력을 포탈 너머로 퍼부으며, 동시에 포탈을 더 열어 망토들을 다시 지배하기 시작했다.


드래곤은 쏟아져 내리는 포화를 피해 선회했지만, 기체는 이미 크게 손상되어 있었다. 나는 포탈을 옮겨 공격을 이어갔다.


완파된 기체가 추락하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드래곤의 다른 기체들의 움직임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드론들이 다시 추락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번에는 속임수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새장 안에 포탈을 열었고, 이번에는 드래곤도 나를 막지 못했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억제 거품은 없었다.


드론들의 비살상무기에 제압당한 망토는 오륙십 명 정도였지만, 새장에서 새로 지배한 사람은 모두 칠백마흔세 명이었다.


쓰러진 오륙십 명도 시간만 지나면 다시 싸울 수 있었다. 이득이었다.


나는 능력자들을 분류하는 일을 탑승자에게 맡긴 뒤 그중 일부를 방어선으로 보내 수비를 돕게 했다.


장애물 하나를 넘어선 것이었다. 적어도 당분간 드래곤은 움직일 수 없었다. 재부팅이 끝나더라도 똑같이 다시 제압하는 데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드래곤이 언제 다시 살아나 내 발목을 잡을지 알 수 없는 만큼 완벽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죽여버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는 다른 망토들을 사로잡을 생각으로 세상 전반에 주의를 돌렸지만, 아무것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사이에 내 시야에 비치는 수많은 차원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져 버린 탓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이 너무 많아 억지로 초점을 맞춰야 했다.


이 눈에 비치는 세상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진흙탕 같이 뒤섞인 감각을 다시 다잡는 것은 곧바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걸렸다. 몇 분이라는 끔찍하게 귀중한 시간 동안 사이언은 알렉산드리아에게 맹공을 퍼부었고, 나는 사이언이 실제로 차원과 차원 사이의 경계를 찢어발기고 있는 게 아니라 내 감각이 혼선을 겪고 있는 거라는 사실을 거듭 되뇌며 가만히 보고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고, 그러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지른 비명 탓에 목이 따가웠다.


처음에는 느린 속도였지만, 탑승자에게 연산을 맡기고 나서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어딘가 숨어있던 망토들. 로그들. 가장 중요한 때에 우리를 버리고 도망친 탈영병들. 그밖에도 능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코스튬을 입어본 적도 없는 망토들도 생각보다 많았다. 능력을 은밀히 사용해 왔던 로그, 혹은 아예 능력을 쓰지 않고 살아가던 로그들이었다.


은퇴한 망토들도 있었다. 늙어서 은퇴했다기보다는 부상이나 다른 이유로 업계를 떠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능력은 그나마 이쪽이 더 발달해 있었지만, 형편없이 녹슬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본소우가 만들어낸 도살장의 9인방도 보였다. 도망치거나 낙오된 클론들은 어딘가 숨어 지내거나 이곳저곳에서 암약하고 있었다. 마네킹 하나와 지금까지 함께 지내왔던 듯한 댐젤 둘에, 나이트 해그-닉스 혼종, 그리고 크롤러-브리드 혼종도 있었다.


그들 거의 모두가 내 지배하에 놓였을 때쯤에 나는 다른 차원들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우리 기준으로는 삼류도 되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구-알레프에도 망토는 있었다. 선댄서, 제네시스, 발리스틱도 거기서 지내고 있었다. 선댄서와 제네시스는 은퇴한 듯 평범한 복장이었지만, 발리스틱은 코스튬을 차려입고는 호화로운 펜트하우스에서 지내고 있었다. 나는 포탈을 열어 그들을 지배했고, 올리버만을 남겨두었다.


그 밖의 다른 차원들에는 능력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마 포탈을 타고 넘어온 경우가 대부분일 듯했다. 망토가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세상도 있었다. 그나마도 그중 절반은 53번들이었다.


괴물.


나는 고개를 흔들며 눈을 깜박였다.


하나같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한 어떤 망토 집단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듯한 어떤 차원도 있었다. 그들의 세상에는 온통 같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고, 그 깃발에 그려진 건틀릿 모양의 상징물은 어떤 여자의 코스튬에 새겨진 것과 같았다. 그녀는 목 주위를 흰 털로 감싼 푸른색의 코스튬을 입고 있었고, 알렉산드리아와 견줘도 될 정도로 존재감이 강렬한 육중한 망토도 걸치고 있었다.


나는 그들 모두를 지배하려 했지만 푸른 옷의 여자는 내 능력을 막아냈다. 그녀가 무언가 말을 할 때마다 그녀의 범위 안에 있는 모든 망토가 내 지배를 떨쳐내고 있었다.


고작 스무 명, 별 의미도 없는 숫자였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고작 이 정도 때문에 뜻을 굽히고 타협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나는 포탈을 열어 카나리아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슈트를 입고 부상자들을 잔뜩 들쳐 맨 채 바쁘게 날아다니던 모습 그대로 얼어붙었다.


곧 그녀는 부상자들을 내려놓고는 포탈을 타고 이쪽으로 날아왔다.


곧이어 그녀는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가 조종하고 있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내 노래였다. 짧은 노랫말이 빠른 박자로 뚝뚝 끊기는 듯하더니 긴 고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가사는 영어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내 입에서 나올 법한 괴성도 아니었다. 카나리아가 자신의 능력을 노래를 통해 투사하는 것이 느껴졌다. 음 하나하나와 노랫말의 음절 하나하나가 능력의 표현이었다.


나는 그녀를 가까이 끌어들여 양판의 능력 증폭 범위 안으로 들여보냈다. 카나리아의 능력은 원리를 알고 있는 나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나는 푸른 옷의 여자가 지배하는 이 별세계의 망토들에게 포탈을 열어 카나리아의 노랫소리를 들려주며 다시금 그들을 지배하려 시도해 보았다.


동시 공격이었다. 푸른 옷의 여자는 내 능력에 저항할 수 있었지만, 완전히 막아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주도권이 내게 넘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능력에 대해서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영거리에서 자기 자신에게 작용하는 일종의 트럼프 능력으로 마치 사이언처럼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조정할 수 있었고, 장거리 염동력도 다룰 수 있었다, 목소리가 아닌 존재감으로 작동하는 카나리아와 비슷한 정신계 능력도 있는가 하면, 일정 시간 동안 순간적으로 강해질 수 있는 축전지 같은 능력도 있었다.


이 여자는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사이언을 상대로 확실히 먹힐 법한 능력은 없었지만, 그래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다른 망토들은··· 약하지는 않았다. 판을 뒤집을 만한 능력은 없는 것 같았지만 다들 한 가닥씩은 하는 강자들이었다.


슬리퍼. 발코니에 놓인 의자에 혼자 가만히 앉아서는 책을 소리 내어 읽고 있는 그의 모습도 보였다.


나는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건드려봤자 손해만 볼 게 뻔했다.


나는 지금까지 지배한 이들을 하나둘씩 전장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죄수, 노예, 미치광이, 겁쟁이, 괴물, 망가진 이들. 그들은 자기들끼리 뭉친 채 앞뒤와 양옆, 지상과 상공을 가리지 않고 방어선의 다른 세력들 사이의 틈을 메우기 시작했다.


문은 계속해서 열렸고, 내가 사로잡은 이들은 계속해서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티처는 마치 제집을 드나들듯 입구를 지키는 히어로들을 지나치며 콜드론의 기지로 들어가고 있었고, PRT 휴대폰처럼 보이도록 개조한 자기 휴대폰을 든 채 거기에 무언가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받는 사람은 보호국과 길드의 주요 구성원 전원이었다.


컨테사는 잠들었다가 이제 깨어나려는 듯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긴장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바닥에 앉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 같았다.


지주. 버팀목은··· 육각형, 태틀테일, 레이첼, 임프, 그루.


옛날 집은 다시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대신할 것을 찾아야 했다. 집이 안 된다면, 아빠의 예전 직장이라도? 아니, 그것보다는 더 가족을 상징할 수 있는 게 필요했다.


언덕 위의 시골집, 주위에는 장미 넝쿨이 가득하고, 할머니가··· 아니. 이건 내 기억이 아니었다. 나는 할머니는 몇 번 본 적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내가 방금 떠올렸던 광경은 예전에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었다.


소름이 끼쳤다. 방금 그건 마치 현실의 추억처럼 느껴졌었다. 제때 정신을 다잡지 못했다면 그대로 잘못된 기억을 버팀목으로 쓰게 되었을까? 마치 그게 처음부터 나라는 존재의 일부였던 것처럼?


생각에 잠긴 탓에 나는 내가 전장으로 걸어 나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의도했던 행동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미스 밀리샤가 내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익솔트가 서 있었다.


티처의 말에 반응한 것이었다.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


곳곳에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보호국의 히어로들, 워드의 팀장들이었다. 그들 모두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음색을 통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글라스티크 웨이녜가 돌아온 나를 반기고 있었다.


감상적인, 마치 노래하는 듯한 음성. 그녀도 어떤 의미에서는 만족한 듯했다. 그녀는 어느 산의 꼭대기에 앉아 있었고, 혼령 셋을 거느리고 있었다.


내 군대는 어느새 대부대가 되어 있었다. 모두 삼천 명. 내 주위를 두른 포탈은 이제 서른 겹이었다.


티처의 말에 태틀테일이 대답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 역시 내게 직접 보였다. 착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목소리가 너무나도 많이 들려왔다.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정신이 방황하고 있었다. 파라휴먼 기준으로 지금 내 휘하에는 막강한 군대가 있었다. 어쩌면 여기 있는 사람 모두를 죽일 수 있을지도—


잠깐.


방금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나는 누구 하나도 죽이고 싶지 않았을 텐데.


글라스티크 웨이녜는 지금도 내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이 목소리 때문인가?


아니었다. 그것만큼은 거의 확실했다. 지금 내게는 정신계 공격을 미리 경고해줄 수 있는 씽커가 일일이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대부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막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대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했지만,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할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체스를 두는 것과 같았다. 한 수 한 수가 중요했고 내 차례에는 단 한 기물만을 움직일 수 있었다. 어디부터 가야 하지? 어디부터 가야 반격을 피할 수 있지?


일단 여기는 아니었다. 나는 몸을 돌려 포탈 너머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태틀테일이 밖으로 나섰다. 그녀는 내가 거느린 군대를 쭉 훑어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크게 뜬 눈이 보였다. 조금은 충격을 받은 걸까.


아니야— 아직은···


생각이 뚝뚝 끊기는 것 같았다.


태틀—


나는 머릿속에 단단히 못박아 뒀던 버팀목들을 하나하나 필사적으로 되짚어 보았다. 이것들이 날 지켜줬어야 하는 건데, 날 묶어줬어야 하는 건데.


아직.


아직이야.


시간이 없었다.


당장 움직여야 했다. 행동해야 했다. 편해지기 위해서는 뛰어들어야 했다.


정말로 위협이 되는 건 글라스티크 웨이녜뿐이었다. 일단 그녀가 먼저였다.


문제는 저 혼령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한 여자 혼령은 모습만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고 몸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 목적으로 보이는 코스튬을 입고 있었다. 글라스티크 웨이녜의 능력에 의해 왜곡된 탓에 그녀의 모습은 코스튬과 신체를 구분할 수가 없었고, 그 때문에 그녀의 모습은 생전보다 오히려 더 외설스러워 보였다.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일단 제정신이 아니라는 점만큼은 확실했다.


보호장구를 갖춘 미식축구 선수처럼 몸이 온통 울퉁불퉁한 남자 혼령도 있었는데, 다시 보니 그 울퉁불퉁한 것은 모두 근육이었다. 거기에 더해 그 근육은 갑옷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갑옷은 다시 가시로 뒤덮여 있었다. 뒤집어쓴 헬멧은 그의 눈까지도 가리고 있었고, 남자는 글라스티크 웨이녜의 발치에 앉아 있는데도 앉은키가 얼마나 큰지 글라스티크 웨이녜의 모습은 그의 몸에 가려져 눈동자 아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한 사람의 여자는 거기 정말로 있는지 없는지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몸이 깡말라 있었다. 분명 글라스티크 웨이녜의 능력에 의해 뒤틀린 모습일 것이었다. 지금 입술을 달싹이며 내게 글라스티크 웨이녜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는 것이 그 여자였다. 스크리머와 비슷한 능력인가.


공격하려 한 그 순간 경종이 울렸다. 내 지배하에 있는 망토 중 열두 사람의 위기감지 능력이 동시에 위험을 경고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고 상대 쪽에서는 갑옷을 입은 혼령이 위험을 경고했다. 그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글라스티크 웨이녜는 단호하게 단 한 마디를 말했다.


예지 능력자, 그것도 겉모습으로 미루어 볼 때 수비적인 계열의 예지 능력자였다.


이미 내가 공격해올 것을 예상했던 것이었다.


깡마른 여자가 손을 움직이자 바람이 실체를 갖추며 고속으로 날아들었다. 너비 이 피트에 길이 십 피트, 돌풍이라기보다는 공성추에 가까운 형태의 공격이 내게 일직선으로 엄습해왔다.


나는 포탈을 열어 그 너머로 몸을 피했지만, 바람기둥은 포탈을 따라 나를 그대로 쫓아 들어왔다. 격한 기류에 온몸이 뒤흔들렸고 나는 하마터면 클레어보이언트의 손을 놓칠 뻔했다.


나는 그대로 지면을 굴렀다. 어떤 의미에서는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는 지금 이 상태가 도움이 되고 있었다. 호흡이 흐트러지기는 했지만, 쓸데없이 반사적으로 몸을 굳히기라도 했다면 근육이 찢어지거나 했을 수도 있었다.


요정 여왕은 이미 내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상태였고, 내가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는지도 모를 수가 없었다. 이대로 능력을 써버리기에는···


하얀 이에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짓고 있는 저 외설적인 차림의 여자의 능력은 뭐지?


바람기둥 하나가 더 날아들었다.


내 군대는 바람기둥 앞을 온갖 수단으로 가로막았다. 방어막, 화염, 수정으로 만든 방벽까지.


그러나 바람기둥은 그 속도를 전혀 늦추지 않고 그 모든 방해물을 그대로 통과하고 있었다. 나는 기둥이 날아들기 전에 내 앞의 포탈을 닫아 버렸다.


그러자 바람기둥은 방향을 휙 바꾸더니 가장 가까이 있는 내 휘하의 망토에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대처하려 했다면 대처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 봤자 끝까지 어떻게든 날 쫓아올 거라는 생각에 나는 클레어보이언트의 손목을 단단히 부여잡고 그에게도 내 손을 붙잡게 했다. 단순히 손을 맞잡는 것보다 더 안전한 방법이었다.


바람기둥은 순간적으로 압축되며 조종용 소형 포탈을 뚫고 나를 덮쳤다. 첫 번째 공격만큼의 타격은 아니었지만, 아픈 건 마찬가지였다.


요정 여왕은 끝말이 묘하게 울리는 그 고압적인 목소리 그대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격노했다기보다는 모욕을 당했다는 듯한 반응이었지만, 분노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전장의 다른 사람들도 반응하고 있었다. 글라스티크 웨이녜를 제지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태틀테일은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게— 저게 내 이름이었던가?


요정 여왕은 바람기둥을 만들어내던 마녀를 거두고는 또 다른 혼령 하나를 불러내려 하고 있었다. 빈틈을 노릴 생각을 한 나는 휘하의 원거리 공격수 중에서도 특별히 강한 축에 드는 망토 하나에게 그녀를 공격하게 했다. 착탄점 주위에서 중력 붕괴를 일으키는 탄환을 발사하는 능력이었다.


그러자 갑옷을 입은 혼령이 움직였고, 외설적인 복장을 한 여자는 거기에 곧바로 반응하며 아지랑이 같은 장벽으로 중력 탄환을 막아냈다. 탄환을 발사한 남자가 내부에서부터 붕괴하며 몸이 산산조각이 난 것은 그와 거의 동시였다. 주위가 피로 젖었다.


직접적인 공격은 저렇게 되는 건가. 나는 포탈을 조금 떨어진 곳에 열어서는 카나리아가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러나 혼령은 방벽을 계속 유지했고, 카나리아는 노랫말을 이어가지 못한 채 격통에 몸부림치며 피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능력 반사에 예지 능력자··· 그리고 새로 불러낸 혼령은 다름 아닌 아이돌른이었다.


내가 포탈을 옆에 바로 연다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도어메이커가 당하는 건가? 아니면 반사의 여파가 나까지 미치는 걸까?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몸을 일으켰다. 내게는 군대가 있었지만, 단순하게 화력으로 뭉개려고만 한다면 그 군대는 한순간에 전멸할 수도 있었다.


저 방벽을 뚫기 위해서는 규칙을 깨는 공격이 필요했다. 포일? 불확실한 도박에 걸기에 포일의 능력은 너무 귀중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무언가가 분명히 있을 텐데···


나는 포일을 움직이는 대신에 알렉산드리아, 그러니까 프리텐더를 조종했다. 흑막 알렉산드리아를 조종하고 있는 프리텐더를 조종하는 흑막이 됐네. 곧이어 나는 그 옆에서 싸우고 있던 레전드와 두 외국 망토, 그리고 무어드 나흐 역시 사로잡았다.


사이언을 상대로 직접 싸우며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 다섯 명이었다.


곧이어 나는 다섯 사람을 일직선으로 세워놓았다. 벌레들로 권총을 겨눴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미끼를 문 사이언은 광선을 발사했고 나는 재빨리 모두를 움직여 피했다.


글라스티크 웨이녜의 혼령들은 곧바로 위험을 경고했고, 방벽이 펼쳐졌다.


사이언의 몸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반사에 정통으로 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은 요정 여왕의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혼령들은 파괴되지만 않았을 뿐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나는 그녀를 똑바로 일어서게 한 뒤에 혼령들을 거두고는 셋을 새로 소환했다. 사이언이 가한 충격을 틈타 포탈을 열어 그녀를 사로잡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나는 포탈을 열어 다시 지구-김멜로 향했다.


미스 밀리샤가 저격 소총을 내게 겨눴지만, 내가 포탈을 여는 것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이어서 나는 모든 수비 전력을 차례대로 사로잡았다. 저항하는 이들도 있었고 습격을 예측한 이들도 있었지만,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이미 내게는 너무나도 많은 병력과 너무나도 다양한 능력이 있었고, 여기 있는 누구도 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도저히 남는 공간이 없을 때까지 포탈들을 계속 만들어냈고, 한계에 도달한 뒤에는 포탈의 크기를 줄이며 재배치했다. 얼마 남지 않은 빈틈 역시 나는 남김없이 포탈로 채웠고, 그 여분의 포탈들을 다른 세계로 이으며 벌레들을 있는 대로 끌어모았다.


그렇게 모은 벌레들은 내게 사로잡힌 망토들의 주위로 날아들며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그들의 등 뒤나 발치로 몰려들었다.


나는 수많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오천 명의 눈이 내 눈이었고 그 수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오천 명의 입으로 나는 숨을 쉬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었다.


나는 태틀테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파나시아가 있었다.


그녀는 나와 파나시아 사이를 가로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나는 손을 힘없이 떨어트렸다.


저 능력을 손에 넣는 것보다는 버팀목으로서의 태틀테일의 역할이 더 중요해.


버팀목이라···


엄마의 무덤··· 분명 브록턴 베이에 있었지?


그래, 브록턴 베이. 그곳을 찾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휘하의 망토들이 사이언의 공격에 휘말리지 않도록 피하는 데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포탈이 사이언의 능력에 휘말리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도 중요했다.


무덤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또 뭐가 있었지. 그래, 힘을 상징하는 육각 무늬 망토가 있었지.


그건 무사했다.


태틀테일.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더 떠올릴 수가 없었다.


이것만으로— 이것만으로 어떻게든 해야 했다.


이제부터였다. 마침내 모두가 힘을 합치고 있었다.


작가의말

* 원작 번역 지침에 따른 공지사항.

“This is purely a fan project and I/we lay no claim to the ideas, characters, or story. The real author is J.C. McCrae, aka ‘Wildbow’, and the original version can be found at http://www.parahumans.wordpress.com. The final chapter of Worm was published on 2013. 11. 19. This is a fan translation.”


"이 번역본은 팬의 작업물이며, 번역자는 이 작품의 아이디어,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자는 'Wildbow'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J.C.McCrae입니다. Worm 원작은 http://www.parahumans.wordpress.com 에서 연재되었으며 2013년 11월 19일에 완결되었습니다. 이것은 팬 번역본임을 밝힙니다."



* 표지 출처 : Ari Ibarra (ariirf.com)

팬아트 작가의 사용 허가를 받은 표지입니다.



* 이 작품의 번역은 2인 비영리 프로젝트입니다. 번역자가 번역을 맡고, 편집자가 검수와 업로드를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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