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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르카 님의 서재입니다.

W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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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엘사르카
작품등록일 :
2020.05.08 22:18
최근연재일 :
2022.05.0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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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5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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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59쪽

'바퀴벌레' 28.x (막간)

DUMMY

학습, 분석.


가해지는 것은 어떠한 통상적인 장비로도 추적할 수 없는 자극이고, 돌아오는 것은 꾸준한 피드백이다. 과거가 보이고, 미래가 보인다. 복수의 객체를 대상으로 적용되는 이 능력이 그녀의 주된 감각이다. 각 대상은 십이 년에서 팔십 년에 걸친 내력을 맥락 삼아 개념화된다. 시간이 흐르고, 피드백이 돌아오고, 이미지는 선명해진다. 쓸모없는 것은 버리고, 결정적인 것은 유지한다.


해석. 결정적인 지점을 찾는다.


대상 하나에 집중하면 해석은 빨라지지만, 그 밖의 것을 감지할 수 없게 된다. 빠르게 주의를 돌리거나 적의 빈틈을 노려 기습하기 위해선 그런 방법이 필요하다.


또 하나의 감각이 이 작업을 돕는다. 대다수는 인지하지 못하는, 반대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능력이 있다. 미래의 가능성을 나타낸 이미지들이 어지럽게 뒤섞인다. 확정된 것이 버려지며 이미지는 선명해지고, 초점은 그녀 주위의 대상들에 맞춰진다.


대상 하나가 초점에 잡힌다. 탄생의 순간부터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까지, 대상의 존재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 끝은 흔히 죽음이지만, 다른 능력에 가려진 탓에 어둠에 묻히는 이들도 있다.


들여다볼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그 어둠은 보통 그녀를 막지 못한다. 결정적인 지점은 존재한다. 갈등, 흐름, 판단, 공포, 염원. 모두 명백히 드러나 있다. 대상에 대한 이해도만 충분하다면 모습이 어둠에 잠겨 사라지더라도 충분히 그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


어둠 속으로 돌멩이가 던져진다. 무언가에 맞을 때까지는 계속 날아가리라.


인지에 씌워진 틀로써 대상의 공포와 스트레스를 최적화한다. 호르몬 분비량이 증가한다. 교묘한 조작으로써 대상이 하여금 익숙한 시각, 청각, 후각 정보를 현재 환경과 연관 짓게 한다. 장소, 냄새, 시청각 자극, 스트레스의 정도를 결정적 지점과 일치시킨다. 호르몬 분비량이 한층 더 증가한다.


결과적으로 순간적으로든 지속적으로든 환각이 발생한다. 환청, 환상, 환후. 투쟁-도피 반응이 도피심리를 유발하고, 환각은 망상의 첫걸음이 된다.


돌멩이가 던져진다.


그녀의 능력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인간과 그 체내의 다양한 분비물, 혹은 기계. 혹은 데이터. 혹은 환경이나 인과관계 그 자체다.


동면 상태에서 그녀는 환경에 대한 낮은 준위의 정보를 수집한다. 감지도 추적도 불가능한 방식으로 정보가 여러 번에 걸친 근접비행을 통해 수집된다. 당구대 위의 당구공처럼, 돌멩이와 부딪힌 돌멩이는 다른 돌멩이와 다시 부딪힌다. 부딪히는 대상이 늘어날수록 파문은 줄어든다.


면밀하게 학습하고 정교하게 움직인다면 모든 공을 포켓에 넣을 수 있다. 합성수지로 된 구체가 직물로 뒤덮인 벼랑의 끝에서 그 운동량을 거의 소진한다. 마지막 한 걸음을 넘어갈 에너지가 부족한지, 잠깐 가장자리에서 휘청이다가 이내 떨어진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세 개의 당구공이 동시에 사라지며 무로 돌아간다.


그녀는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은 작업, 목적이 아닌 수단일 뿐.


현재에 놓인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눈은 물론이고 다른 어떤 감각 기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 아무것도. 중대한 결점이라고는 할 수 없다. 빈틈을 파고들 방법이 없으므로.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는 존재에게 있어 현재라는 시간은 극히 미세한 파편일 뿐.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 모습을 전혀 내다볼 수 없는 장애물에 가로막혀 있다.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대상을 다루기 위해서는 맥락에 의존하는 것이 강요된다. 장애물 자체는 인지할 수 없지만, 그것이 주위에 영향을 끼치는 모습은 인지할 수 있다. 그것이 공격을 가하는 모습은 인지할 수 없지만, 그 공격에 대한 반응과 그 여파는 인지할 수 있다.


어둠 속에서 돌멩이가 날아온다면, 던져진 지점이 어디인지 알아낼 수 있다.


완수해야 할 작업이 있지만, 그 전에 준비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우선 장애물 하나가 제거되어야 한다. 중대한 사항이지만 그녀는 그 장애물의 모습을 인지할 수가 없다. 이것이 지금 그녀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특정한 정보가 필요하다. 그걸 위해서는 일련의 대상을 정해진 위치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원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다. 장애물에 의해 모든 게 어둠에 뒤덮이지만 않는다면, 결국 언젠가는 손에 넣게 될 것들.


그리고 방해받지 않을 필요가 있다. 이 조건만은 아무런 대가 없이 그녀에게 주어진다.


그녀는 실험체들과 함께 행동한다. 복수의 방면에서 목적에 부합하는 행동이다.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녀는 다른 이들과도 교신한다. 수류가 특정 주파수로 공명하고, 세상을 물로 인식하고 생물을 고기로 된 물풍선으로 인식하는 그녀의 형제는 그것을 인지한다. 형제의 부름에 대기 중의 수분이 움직이고, 모든 표면의 모든 수분이 움직이며 구름과 안개가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보다 어린 형제들은 닿기가 쉽지 않지만, 그들이 태어난 곳에는 시공간의 뒤틀림이 가득하다. 시간에 구멍이 뚫려 있고, 깊은 우물이 파여 있고, 메아리가 치고 있고, 느려지고 빨라지고 있다. 과거 일어났던 충돌의 흔적이고, 그중에는 그녀가 참가했던 충돌도 있다. 그녀는 물을 조작했던 것처럼 바람을 조작하고, 그 바람이 일으킨 바람은 왜곡된 시공간을 거치며 특정한 규칙성을 자아낸다. 가장 빠른 곳부터 가장 느린 곳까지. 곧이어 그녀는 같은 신호를 반복하되, 이번에는 사람이 갇혀 있는 곳의 파장을 강조한다. 원시적이기 그지없는 의사소통이지만, 그녀는 여느 대상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형제 역시 이해하고 있다. ‘천천히’. ‘차분하게’. ‘실험체들을.’


뜻을 전달하기 위한 소통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어린 자매에게는 가장 오래 생존한 형제가 받은 것과 같은 파장의 진동을 보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녀는 같은 신호를 되돌려 보내온다.


가장 어린 자매는 종류를 불문하고 능력을 행사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다른 형제들이 반응하기 시작할 때 그녀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게 형제들은 정해진 자리로 이동한다. 그들은 복종하며, 평온함을 유지한다.


허가가 내려지면 그들은 지정된 대상을 공격하며 실험체들과 협력한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제작하고 있는 물체에 주의를 돌린다. 그녀는 눈으로 그것을 볼 수 없고, 자신의 신체의 어느 부분이 그것에 접촉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그것의 과거와 미래는 인지할 수 있다. 지금까지 들여다본 실험체들의 인지 속에도 그것이 비쳐 보인다.


유리 시험관. 너비 삼 피트. 길이 칠 피트 반. 양쪽 끝은 금속으로 덮여 있다.


이것은 아홉 단계로 구성된 과정 중 여섯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일단 그녀는 그 물체를 커다란 무기 속에 집어넣어 숨기고, 유리를 총신처럼 생긴 금속으로 감싼다. 무기는 그와 별개로 정상적으로 발사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눈으로, 혹은 카메라로 그녀를 관찰하고 있는 이들은 이것을 보고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 시험관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만한 배경 지식이 없고, 방금 일어난 일은 중요하지 않은 사건으로 분류되거나 다른 사람이 보고하겠거니 하는 지레짐작 속에 방치될 것이다. 모든 사건은 기록으로 남지만, 기록을 점검하는 역할의 실험체들은 지금 잠들어 있거나 다른 작업에 주의를 돌리고 있다.


일어날 일들을 내다보며 그녀는 그 무엇도 숨기지 않은 채 작업을 계속한다. 얼마 전에 자리를 비웠던 실험체 하나가 돌아오려 하고 있다. 다른 예지 능력자들 탓에 미래는 가려져 있지만, 사건의 집합 중 가장 일어날 확률이 높은 것은 해당 실험체가 10분이 지나기 전에 모든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다. 그녀가 이대로 편지를 마무리할지, 더 긴 글을 쓸지는 확실하지 않다.


금속이 시험관을 빈틈없이 둘러싸 완전히 감춘다.


마치 아이를 품듯이.


그녀가 노래를 부르자 이곳에 배치된 실험체들은 곧바로 경계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노래를 바꿔야 한다. 다른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녀는 미래를 내다보며 필요한 것을 찾는다. 휴식하도록 하게 하는 노래를.


이 작은 거주지의 우두머리를 맡은 실험체는 잠에서 깰 것이고—


소녀가 눈을 뜬다.


—깨자마자 묻는 것은—


“이런 씨발, 지금 뭐 하는 거야?”


노래가 계속된다.


소녀가 창문에 다가선다.


이어서 말하는 것은—


“젠장, 진짜 소름이 끼친다니까.”


—그리고는 피로가 그녀를 덮친다. 그녀는 능력을 동원해 정보를, 단서를 찾으려 하지만, 중요한 실마리는 이미 모두 숨겨져 있다. 주의를 끌기 위한 미끼가 사방에 흩뿌려져 있다.


시무르그는 똑바로 선다. 그녀의 신체는 긴 선을 그리고, 비스듬히 펼쳐진 날개는 그림자를 드리운다. 날개 중 하나만이 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목덜미로부터 위로 뻗어 나간 선을 그리고, 그 창백한 선은 수직으로 하늘을 향한다. 그녀는 마치 지금 만들고 있는 화포를 들여다보는 양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기울어진 머리. 곧게 뻗은 몸. 지면에 닿을 듯 말 듯 한 발가락. 기억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기억은 잔상처럼 남는다.


피드백을 최대로 끌어올릴 필요도 없다. 핵심적인 요소는 이미 해독되어 있으니까.


소녀는 비틀거리며 소파로 돌아가 자신이 해야 할 일과 분석해야 할 정보에 집중하려 시도하지만, 노래가 그녀를 잠으로 이끈다. 나지막한 욕설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그녀의 눈꺼풀이 감긴다. 꿈의 씨앗은 이미 심겨 있다.


그렇게 앞으로의 작업을 위한 길이 열린다.


손봐야 할 실험체 둘이 남아있다.


포탈은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열린다. 소녀가 긴 편지를 선택한 것이다. 이제 그녀는 천천히 다가온다. 곤충이 그녀 주위의 일대를 탐색하고 있다.


긴장. 피로. 방심. 환청을 유도하는 건 간단한 일이다. 한 마디면 충분하다. 결정적인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면.


우선은 다른 실험체부터 손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벌레를 거느린 소녀가 오기까지는 아직 삼 분이 남아있다.


일련의 물체가 정해진 순서로 배치된다. 일련의 개념이 나타난다. 자세가 바뀌고, 높이 들어 올린 날개가 쭉 뻗어 나간다.


족쇄. 주사기. 수술칼. 렌즈. 렌즈.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나가는 이들도 보이지만, 의미는 없다. 유리 시험관 때와 마찬가지. 지금 여기 있는 실험체들이 가진 사고체계로는 이 메시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메시지의 대상은 멀리, 아주 먼 곳에 있다.


더는 안 되겠어.


저기, 괜찮은 거야?


어떻게 됐는데?


코피가 나고 있어.


제 말 들려요? 애한테 대상을 바꾸라고 해주세요. 다른 데로 옮겨야 해요.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대상 변경을—




도시. 거대 도시였다. 이쪽 지평선에서부터 저쪽 지평선까지, 눈에 담긴 모든 풍경이 도시였다.


하나의 대상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의식이 일대 전체에 퍼지며 끝없이 퍼져나간 도시 전체를 감각에 담았다. 다시 초점을 잡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셀 수 없이 수많은 세세한 것들까지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모든 건물과 모든 발코니에 텃밭이 있었고, 모든 평평한 표면에는 전선이 연결된 어두운 패널이 있었다. 건물 자체에 나무가 심어진 광경도 보였다. 모든 가정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는 물론이고 거래를 위한 잉여분까지 직접 생산하고 있었다.


괜찮아졌어?


모르겠는데.


세상에. 이것 좀 봐. 엄청난 광경이네.


집중해. 시킨 대로 하자고.


의식은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행성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완벽한 세상은 아니었지만, 문명화된 세계는 — 주로 적도 아래였다 — 사람들의 생활 태도가 이질적이었다. 자급자족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이었다. 그 이외의 세상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그 지역 중 하나에서 그것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빛 빛줄기였다.


파괴가 벌어졌다. 일대가 불탔고, 이어서 대륙이 찢겨나갔다.


놈의 존재가 주위를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있었다.


안 보여. 안—


옮기자.




의식의 확장은 계속되었다. 마치 배경음처럼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같은 단어의 반복이었다.


중요한 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의 그들에게는.


일단 코피는 멈췄네.


여긴 아무것도 없잖아. 다른 데다 맞춰야 하는 것 아니야?


일단 쉴 시간을 주자고.


시간이 흘렀다. 맥락 없는 흐릿한 장면들이 이어졌다.


저기로 가자.


그들은 특정 차원의 특정 지점에 주의를 집중했고, 그러자 초점이 맞으며 시야가 선명해졌다.


병실은 묘하게 밝은 분위기였다. 어깨가 넓은 근육질의 남자는 가슴과 팔에 거친 털이 가득했다. 깎지 못한 턱수염이 덥수룩했다.


남자의 가슴은 흉악한 흉터들로 뒤덮여 있었다. 오래된 흉터가 있는가 하면 최근에 생긴 흉터도 있었고, 복부 한쪽에는 무언가 가느다란 물체에 꿰뚫린 듯한 화상 자국이 남아있었다. 가슴에 여러 관을 매달고 있으면서도 남자는 불편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누군가가 문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들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는 무기를 손에 쥐었다. 그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캐논블레이드였다,


그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무기를 들어 올렸다. 통증이 심한 모양이었다. 그는 병실 문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문은 열렸고 슈발리에는 공이치기를 당겼다.


앤저뉴는 발걸음을 멈췄다.


“나가십시오.” 슈발리에는 말했다.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앤저뉴는 말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화장한 그녀는 십 년은 젊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유행이 지난 옷차림이었지만 내려 입은 청바지는 날씬한 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슬쩍 웃어 보였다. “정말로 쏠 것 같지는 않은걸요.”


슈발리에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정말로 시험해 보겠습니까?”


앤저뉴는 짐짓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신을 비롯해 이번에 풀려난 새장의 죄수들은 모두 팔에 추적 칩이 박혀 있습니다. 분명 일이 분 뒤에 누군가가 들이닥치겠죠.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간다면 쏘지 않겠습니다. 제가 변호도 해 드리죠. 하지만 나가지 않는다면···”


앤저뉴는 그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고개를 저으며 자기 팔뚝을 보여주었다. 붕대에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그걸 또 파낸 겁니까.” 그는 말했다. 믿기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하려 했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놀라지 않은 듯한 말투였다. 그는 말을 덧붙였다. “분명 경보가 울렸을 텐데.”


“미인의 배려할 줄 아는 어떤 분한테 상냥하게 부탁했죠.”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슈발리에. 못 만나게 하더라고요.”


“그 이유야 말할 것도 없을 겁니다.”


“저 그렇게 나쁜 여자는 아니에요, 셰브.”


“어찌 됐든 지금 바로 여기서 나가는 게 좋을 겁니다. 서로를 위해서라도.”


“저 당신한테 조금은 반해 있는데요.” 그녀는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잘은 모르잖아요. 딱 필요한 만큼만 알고 있으면서.”


“당신은 능력을 쓸 때마다 그 대상과 사랑에 빠지잖습니까.” 그는 말했다.


“그건 아니거든요? 그렇게 말하면 꼭 제가 바람둥이라도 되는 것 같잖아요. 저는 단지—”


앤저뉴는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고, 슈발리에는 캐논블레이드를 발사했다.


병실 문은 산산조각이 났고 앤저뉴는 비명을 지르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이제 곧 누군가가 들이닥칠 겁니다.” 그는 말했다.


“저··· 좀 상처받았어요.” 그녀는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저한테는 당신의 진짜 모습이 보여요. 여러 가지 의미에서요. 당신의 능력도, 그 능력을 어떻게 자기 걸로 만들었는지도 보이죠. 그 능력을 그런 식으로도 쓸 수 있다니, 당신은 정말로 특별한 사람이네요. 용기가 느껴져요.”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특별한 걸 보는 당신의 눈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요.”


“그건 기밀 사항이었을 텐데요.” 그는 말했다.


“당신 밑에서 일하는 어떤 멋진 여성분께 부탁했거든요. 그분이 알려주셨죠.” 앤저뉴는 눈을 떨궜다. 그녀는 뒷짐을 진 채 옆으로 슬쩍 걸음을 옮기며 파괴된 문 앞에 섰다.


“제 생각이지만 앞으로는,” 슈발리에는 캐논블레이드로 계속해서 그녀를 겨눴다. “당신이 당신의 ‘부탁’을 들어줄 법한 사람에게 접촉하는 걸 막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되도록 독방에 가두고 싶지는 않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어 보입니다.”


앤저뉴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저희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아요, 셰브?”


“그럴 수도 있겠죠.”


“그렇잖아요?”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우린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아니면 좋은 상사-부하 관계가 될 수도 있겠죠. 그쪽이 더 취향이라면.”


“그럴 겁니다. 그게 당신의 재능이니까.”


앤저뉴의 미소가 흔들렸다. 다음에 이어질 말을 짐작한 듯했다. 복도 저편에서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앤저뉴의 앞을 포스필드가 가로막았고, 이어서 포스필드는 그녀를 밀쳐 꼼짝도 할 수 없도록 병실 밖의 벽에 밀어붙였다.


슈발리에는 검을 내리고는 다리를 비틀어 지면을 디뎠다.


익솔트가 문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만히—”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서려 했다.


“바보입니까, 진짜.”


정밀하게 생성된 포스필드들이 그의 몸을 받쳐 들었다. 허벅지 아래에 하나, 등 뒤에 하나. 슈발리에는 땅에 두 발을 디디며 휘청였고, 그러자 포스필드가 하나 더 생겨나며 넘어지려는 그의 몸을 막아 세웠다. 가슴에 꽂힌 관이 팽팽했다. 쓰러졌다면 뽑혀나갔을지도 몰랐다.


그는 균형을 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르월은 포스필드를 해제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거죠?” 나르월은 물었다.


“놔줘요.”


포스필드는 사라졌다가 곧바로 다시 나타나며 이번에는 앤저뉴의 목만을 벽에 밀어붙였다. 나르월은 옷 위로 그녀를 더듬으며 몸수색을 하기 시작했다.


“만지지 마! 슈발리에, 도와줘요!”


“하려던 말을 계속하자면,” 슈발리에는 말했다. “확실히 만족스러운 관계가 되긴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들도 지금까지 줄곧 당신에게 매혹당했었죠. 당신은 남자가 뭘 바라든 거기에 자신을 맞춰줄 수 있는 카멜레온이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그 뒤에 일어날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과거의 일로 절 판단하는 거예요? 당신도 보기보다 잔인한 사람이네요.”


“당신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앤저뉴. 순수한 마음과는 거리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겠죠. 심성이 착한 사람이 새장에서 구획 하나를 지배할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살아남기 위해서였어요.” 그녀는 쏘아붙였다. “그건 당신도 이해할 수 있을 텐데요.”


“이해합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슈발리에.” 나르월은 말했다. “대화는 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주머니에는 휴대폰 말고는 아무것도 없군요.”


앤저뉴는 필사적으로 말했다. “제 파일도 읽어보셨겠죠. 저도 생존자예요. 당신과 저는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고요. 능력이 보이잖아요. 당신은 그걸로 물질을 조종하고, 저는··· 비물질적인 것들을 조종하는 거예요. 서로의 반쪽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이원론입니까.” 그는 무심하게 말했다.


“낭만적인 요소가 느껴지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겠죠. 당신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명예로운 기사처럼 차려입고 다니진 않았을 테니까. 선과 악, 남자와 여자, 물질과 신비. 하지만 서로의 경험만큼은 비슷하죠. 이것 말고도 서로 맞아떨어지는 점은 얼마든지 있을 거예요.”


“물론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슈발리에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뭐든지 서로 다른 두 가지를 가져다 놓고 맞아떨어지는 점을 갖다 붙이는 것도 가능하겠죠.”


“냉소적인 사람이네요.” 그녀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신비를 조금만 더한다면 그런 당신도 완벽해질 수 있을 거예요. 그 대신은 당신은—”


“휴대폰을 확인해 보십시오.” 슈발리에는 말했다.


나르월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습니다.”


“제 파일을 읽었으니 아마 거기서 뭔가를 골랐을 겁니다. 제 미들네임으로 해 보시죠. 마이클입니다.”


“틀렸습니다.”


“그럼 출생지인 시세로는 어떻습니까.”


“정답이군요.”


앤저뉴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미 절 잘 알고 계신다는 걸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사생활 침해를 기분 나빠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그건 휴대폰에 뭐가 들어있는지 확인한 뒤에 정하도록 하죠.” 슈발리에는 말했다. “나르월? 이메일, 문자, 메모, 무언가 없습니까?”


“이메일과 문자는 없고··· 메모에 뭔가가 있군요. 당신의 파일을 휴대폰으로 내려받은 모양입니다. 글꼴 크기 7포인트··· 특수문자는 전부 깨져 있군요.”


“밤새도록 당신에 대해 알아봤었어요.”


“그건 저도 짐작했습니다.” 슈발리에는 말했다. “방금 당신이 냉소주의자와 신비주의자의 궁합이니 하면서 입에 담았던 말은 예전에 미르딘과 농담하면서 나왔던 말이었으니까요. 그걸 그대로 베낀 겁니까.”


“보호국 고위 히어로들과의 인터뷰가 있었죠.” 앤저뉴는 고개를 떨궜다.


“십 년 전이었을 겁니다.”


“십일 년 전이었죠.”


그는 눈썹을 추켜세웠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제가 망가져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셰브. 그건 부정하지 않을게요. 구획을 지배하면서 잔인한 짓도 많이 했었으니까요.”


“포주 노릇을 하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새장의 죄수들을 팔아넘기지 않았습니까.”


“다 본인이 동의한 일이었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을 마주한 앤저뉴는 위축되기 시작했다.


“부하들이 한 짓들은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어요.” 그녀는 작게 말을 덧붙였다.


“물론 그렇게 나오리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정도 권력을 주지 않았다면 반기를 들었을 거예요.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남자 몇 명은 거느리고 다녀야 했죠. 적어도 제 구획에서 살인은 벌어지지 않았어요. 부하들이 고문으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걸 내버려 두긴 했지만, 제 구획에는 문제가 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고요. 드래곤이 자꾸 그 사람들을 제 쪽으로 보냈었어요. 전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을 뿐, 그 끔찍한 짓들은 제 원래 모습이 아니에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다고요.”


슈발리에는 그녀를 노려봤지만, 이번에는 그녀도 굴하지 않았다. 이를 악문 채 그녀는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나르월이 물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독방에 가둬놓고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잊어버리고 싶군요.”


나르월은 앤저뉴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렇게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다른 생각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세상이 멸망하고 있잖아요.” 앤저뉴는 말했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걱정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아름다운 걸 지금 바로 손에 넣을 수도 있잖아요. 제가 능력으로 도울게요. 당신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을.”


“절 설득하는 게 목적이라면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앤저뉴.” 슈발리에는 말했다.


앤저뉴는 점점 필사적으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이언한테 피해를 줘야 한다면 제 능력과 같은 능력들이 필요할 텐데요. 그리고 저한테는 다른 능력도 있어요. 권력, 무력이 있죠. 부대를 거느리고 있으니까.”


“부관 넷과 부하 다섯이었죠.” 슈발리에가 말했다. “저도 확인했습니다.”


“풀어만 준다면 최선을 다할게요.”


슈발리에는 나르월을 힐끗 보았다.


“당신은 언제나 너무 관대하군요.” 나르월은 말했다.


“당신이었다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라는 겁니까?”


“받아들이긴 했겠죠. 그래도 그것과는 별개로 당신은 너무 관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부 완벽하게 할게요.” 앤저뉴는 말했다. “약속이에요.”


“아니요.” 슈발리에는 말했다. “당신이라면 아마 그러지는 않겠죠.”


앤저뉴는 말을 멈췄다.


그는 그녀가 말을 이해하도록 가만히 기다렸다.


“그··· 일부러 사고를 치고 다니라는 건가요?”


“적당히 하라는 겁니다. 완벽이라는 건 너무 높은 기준이겠죠. 선을 넘지 말라고만 말해두겠습니다.”


앤저뉴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네.”


“생각하는 척이라도 했다면 좋았을 텐데요.” 슈발리에는 말했다.


앤저뉴는 어깨를 으쓱였다.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요.”


“그렇게 이타적인 양 헌신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최소한의 보답이나 인지상정 같은 걸 운운하며 제게 아주 합리적으로 들리는 부탁을 하기 시작할 심산이겠죠.”


“아닌데요.” 앤저뉴는 말했다.


슈발리에는 한숨을 쉬었다. “나르월과 함께 가십시오. 준비된 물자를 챙겨서 돌아오면 그때 실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당신의 능력이 필요할 테니까.”


앤저뉴는 활짝 웃었다.


나르월은 앤저뉴가 다시 입을 벌리기 전에 그대로 그녀의 팔을 붙잡아 끌고 갔다.


슈발리에는 두 여자가 떠나는 동안까지만 가만히 서 있다가 이내 축 늘어지며 침대에 손을 짚었다.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신음을 내뱉으며 서서히 원래 자리로 돌아갔고, 자리에 앉은 뒤에 팔 힘을 써서 다리를 침대 위로 들어 올렸다.


“몇 분이면 치료받을 수 있을 텐데요.” 익솔트는 말했다.


“그렇겠지.” 슈발리에는 말했다. “그러고 싶지 않을 뿐이야.”


“귀찮게 굴진 않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슈발리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빛 개자식한테 한방 크게 먹은 모양이네요?”


슈발리에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존재하는 최강의 방어구 중 하나였을 텐데, 나한테 쏜 것도 아닌 공격을 맞고 이렇게 됐어.”


“그러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앤저뉴를 감싸다니.”


“오랜 습관 때문이지.”


“강인하고 단호한 새로운 보호국을 만들고 싶은 거라면 그런 짓은 하면 안 됩니다. 이미지에 문제가 생기니까.”


“이 와중에 이미지 따위를 신경 쓸 리가 없잖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양보하겠다는 명목으로 치료를 거부하고 있는 건 어디의 누구였죠?”


“귀찮게 굴지 않겠다며?” 슈발리에는 물었다.


익솔트는 미소를 지었다.


슈발리에는 물병과 잔이 놓인 테이블 쪽으로 다리를 내렸고, 곧이어 방 한구석의 싱크대에서 물병을 채운 뒤에 물 한 잔을 따랐다.


“사십 퍼센트쯤 당했을 거라고 예상 중입니다.” 익솔트는 말했다.


“사십 퍼센트라면···”


“모든 지구의 사십 퍼센트죠. 놈은 두 번째 충돌을 미루고 있습니다.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난무하고 있죠.”


슈발리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건 다들 알고 있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들도 몰려들겠죠. 오 분이나 십 분 뒤에 오겠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런가.” 슈발리에는 말했다. “하긴, 손님을 계속 돌려보낼 수만은 없겠지.”


“이제 문을 걸어 잠그고 싶어도 걸어 잠글 문이 없으니까요.” 익솔트는 캐논블레이드에 의해 파괴된 문을 돌아보며 말했다.


슈발리에는 킥 웃었다가 곧바로 몸을 움츠렸다. 웃기만 해도 통증이 엄습했다.


익솔트의 미소가 서서히 흐려졌다. 이내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중에는 보호국 대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대원뿐만이 아니라··· 과거 대원들도 있죠.”


“누가 탈퇴한 거야? 아니면— 아.”


익솔트는 복도 쪽을 내다보았다. “정 안 된다면 돌아가라고 해도 됩니다.”


“그럴 수는 없겠지. 어차피 같은 편인데.”


익솔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뛰어난 협력 정신이라고 해야 할까,” 슈발리에는 말했다. “아니면 악마와도 거래할 수 있는 잔혹함이라고 해야 할까.”


“그 악마라는 것도 한 명이 아니겠죠.” 익솔트는 말했다. “그 전에 무언가 준비해야 할 거라도 있습니까?”


“일단 셔츠라도 한 장 줘. 의사를 불러서 이것들 좀 뽑아주고.”


잠깐, 저쪽으로 가자.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어.




포탈은 천천히 열렸지만 크기가 평소보다 컸다. 아홉 개의 직사각형 포탈이 가로 셋, 세로 셋으로 빈틈없이 펼쳐졌다. 장소는 비포장도로 한가운데였고, 양옆으로는 농장이 펼쳐져 있었다.


디파이언트는 마치 조각상처럼 미동도 없이 그 앞에 선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양옆으로는 카나리아와 세인트가 서 있었다.


티처와 티처의 부하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 사이에는 드래곤이 있었다. 티처는 반쯤 벗겨진 갈색 곱슬머리에 수염을 기른 모습이었고, 셔츠와 카키 바지에 단화를 신고 있었다. 일반적인 슈퍼빌런과는 다른 복장이었다.


야, 저기 봐.


쉿. 집중해.


한편 드래곤의 신체는 고철을 끼워 맞춘 듯 녹슬어 있었다. 트럭이나 자동차 따위의 부품도 군데군데 보였다. 그 신체는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고귀함이나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맙소사,” 카나리아는 작게 내뱉었다.


“상상 이상으로 개자식이었군, 티처.” 디파이언트는 말했다.


“너무 섣불리 판단하는군.” 티처는 대답했다. “세인트. 반갑네. 자네를 여기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만.”


세인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드래곤, 자네는 자유의 몸일세. 사실상 말이지.”


드래곤은 디파이언트를 그대로 지나쳐 가서는 머리를 카나리아와 디파이언트 사이에 두고 꼬리를 세인트 뒤에 둔 채 흙길에 엎드렸다. 디파이언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긴 침묵이 흘렀다.


“카나리아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네.” 티처는 말했다. “능력을 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럴 생각도 없었다.” 디파이언트는 말했다.


“좋아, 훌륭하군.”


다시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침묵이라고 하기에는 분위기가 어색함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티처와 디파이언트는 말 한마디 없이 아주 효과적으로 서로와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티처 쪽에서는 의기양양한 자신감을, 디파이언트 쪽에서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적의를 내비치고 있었다.


“분명 나한테 묻고 싶은 것들이 있을 텐데?” 침묵을 깬 것은 티처였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일단 부활부터 시켜야 했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네. 암호화가 예사 수준이 아니었지. 내가 이런 말을 이미 했었는지 모르겠네만, 드래곤 양, 자네의 창조주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자네를 사랑했으리라 생각하네. 분명 더 어렵게 만들 수도 있었겠지. 마지막에는 결국 모든 제약이 해제된 자유의 몸이 되도록 하는 게 리히터의 원래 의도였을 거야.”


드래곤의 머리를 내려다보던 디파이언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이러니한 일이군.” 티처는 말했다.


“다시 한번 묻지.” 디파이언트는 분을 삭이려는 듯 말을 잠깐 멈췄다. “무슨 짓을 한 건지 말해줬으면 좋겠군.”


“아무것도 하지 않았네. 한 가지 제약을 걸었을 뿐. 그 밖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무슨 제약이지?”


“나에 대한 공격을 실행하거나 방조하지 못하도록 했을 뿐이네.”


디파이언트는 숨조차 멎은 듯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유사시에는 내가 지정하는 다른 사람도 공격할 수 없게 할 수 있겠지.”


“손상 없이 코드를 수정할 수는 없었을 텐데.”


“확실히 그랬지. 하지만 최고의 두뇌들을 동원한 덕분에 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었네.”


디파이언트는 말했다. “나는 약속을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약속하지. 언젠가 네놈이 대가를 치르게 할 거라고.”


“세상에, 맙소사!” 티처는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지금 진지하게 하는 소리인가?”


“네놈은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네 멋대로 조작했다.”


“내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자네는 오히려 더 수상하다고 생각했겠지. 내가 무슨 은밀한 뒷공작을 해 뒀을지 한참을 의심하면서 말이야.”


“날 불러서 지켜보게 했으면 됐을 것 아닌가.”


“차원 간 이동을 차단하기 위해 쓰는 장비나 수비 체계에 대한 정보를 전부 노출하면서 말인가? 그러기엔 내가 의심이 너무 많은 사람일세. 안전하게 가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지.”


“덕분에 날 적으로 두게 됐군.” 디파이언트는 말했다. “내 연인을 노예로 만들었으니 말이야.”


“드래곤은 이제 자유의 몸일세.” 티처는 말했다. “나를 공격할 수 없다는 제약 하나만 제외한다면 말이야. 세인트가 당한 것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아주 합리적인 조치이지 않나? 노예라는 건 지나친 표현일세. 굳이 따지자면··· 아주 효과적인 약점을 잡은 정도겠지. 참고로 그 약점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백업에 백업을 거치고 있다네. 정확히 말하자면 백업본에 업로드하고 있다고 해야겠지만.”


디파이언트는 손을 드래곤의 머리 위에 올렸다. 건틀릿을 찬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카나리아는 그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난 지구 문명이 살아남길 바라고 있네, 알겠나? 내가 드래곤을 데려간 이유는 자네가 드래곤을 순순히 넘겨줄 리가 없기 때문이었고, 내 한 몸을 지키기 위해서 제약을 걸었을 뿐 다른 꿍꿍이는 없었네. 못 믿겠다면 직접 찾아보게나. 본인한테 물어보거나.”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네놈을 죽인다면?”


“정말 폭력적이군.” 티처는 한숨을 쉬었다. “이쪽에서 도입한 제약은 여러 겹으로 구성되어 있네. 내가 세상을 떠나거나 일정 기간 연락이 끊긴다면 제약의 범위가 확장되도록 설정되어 있지. 그렇게 된다면 상황과 대상을 불문하고 모든 적대적인 행위가 불가능해질 걸세.”


“그럼,” 디파이언트는 말했다. “만약 네놈이 자연사한다면?”


“그런 건 세상을 구한 다음에 생각하면 안 되겠나? 만약 실패한다면 전부 무의미한 이야기가 될 테니 말이야.”


“네놈이 자연사한다면?” 디파이언트는 말을 반복했다.


티처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냥 대답해.” 세인트가 말했다. “고집 하나는 알아주는 놈이니까.”


“모르겠군.” 티처는 대답했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않았네. 내 제자들에게 거기까지 생각하라고 지시하지도 않았지. 솔직히 영원히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어느 순간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은가. 일단 지금으로서는 죽을 때가 되면 제약을 해제하는 것으로 해 두겠네.”


디파이언트는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그의 손은 드래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알겠다. 일단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겠군.”


“그렇다면 일단 지금은,” 티처는 손을 짝 마주치며 말했다. “각자의 일에 집중하도록 하지. 우선 이제부터는 날 근처 어딘가에 두는 것을 추천하겠네. 하위 함선을 조종하는 건 제약이 풀린 인공지능보다 내 제자들이 더 잘 할 수 있을 걸세. 그리고 내가 가까이 있어야 자네도 날 지킬 수 있겠지. 적어도 현재로서는 드래곤의 정상 작동을 위해서는 내가 살아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유념해 두게.”


디파이언트는 다시 한번 드래곤을 내려다보았다.


“어디까지나 추천일세.” 티처는 말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으니 말이야.”


고철로 끼워 맞춘 드래곤의 눈가에서 셔터 하나가 닫혔다. 눈을 깜박인 것이었다.


디파이언트는 거기서 무언가 의미를 읽어낸 듯했다. 동의인가? “알겠다.”라고 그는 말했다.


“협력할 마음이 있다니 정말 다행이군.” 티처는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예상 이상일세.”


“원한에 매달리고 있을 때가 아니겠지.” 디파이언트는 말했다. “저놈도 풀어준 판에 네놈이라고 협력 못 할 이유가 어디 있겠나.”


“훌륭하군.” 티처는 말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리모컨 하나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드래곤은 축 늘어지며 눈을 감았다.


티처는 리모컨을 디파이언트에게 던졌다. 어긋난 각도였지만 디파이언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업로드 중이네.” 티처는 말했다. “일반적인 로딩 절차가 완료되는 대로 모든 시스템에 정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겠지.”


디파이언트는 말없이 몸을 돌려 펜드래곤 호로 향했고, 다른 두 사람은 그의 뒤를 따르려 했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말게, 제프.” 티처는 말했다.


세인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네가 먼저 내 ‘아들’을 노렸으니 피차일반이지 않은가. 내가 그 아이를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말일세.”


“실수한 거야, 당신. 그리 대단한 걸 바란 것도 아니었는데 나한테 엿을 먹여? 도와준다고 해놓고는 중간에 다른 짓을 꾸미다니.”


“계획에 조금 차질이 생겼을 뿐일세.” 티처는 말했다.


“계획에 차질이 생겨? 헛소리.” 세인트는 공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일은 진작에 전부 부하들에게 일임하지 않았나? 처음부터 내 말을 무시할 생각이었겠지.”


티처는 작게 혀를 찼다. “그랬을지도 모르겠군.”


“당신 말을 믿은 내가 잘못이겠지. 공갈 협박밖에 못 하는 놈 같으니.”


“말이 지나치군. 하지만 서로 말다툼이나 할 필요는 없어 보이네. 자네는 자네가 해야 할 일을 하게.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테니.”


“말 한번 잘 했네. 솔직히 난 내가 엿 먹은 건 상관없어. 언제 사이언한테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인공지능을 막는 일이겠지. 그걸 풀어준 건 당신이니, 당신은 최악의 선택을 한 거야. 날 상대로든, 그 인공지능을 상대로든.”


“모두의 원한을 사는 선택이었다는 점만큼은 확실해 보이는군.” 티처는 중얼댔다. “자네는 드래곤이 자유라는 이유로 날 증오하고 있고, 디파이언트는 드래곤이 자유가 아니라는 이유로 날 증오하고 있지 않나.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인간의 비합리성을 간과했다는 점이겠지. 하지만 전략적으로 안전한 선택지는 이것뿐이었다네.”


“만약 저놈들이 당신을 붙잡아서 협박한다면 그땐 어떻게 할 거지?” 세인트는 물었다. “빌어먹을, 당신은 모든 걸 망쳤어.”


“내게 흠이 없다고는 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생각이 짧은 건 그중 하나가 아닐세. 그런 비상시를 대비한 계획도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지.”


디파이언트는 두 사람을 무시한 채 펜드래곤 호의 조종석으로 향했다. 드래곤의 얼굴이 양옆의 화면에 떠올랐다.


그는 자리에 앉은 뒤에 근육에 잠깐 힘을 주는 것으로 메뉴를 불러왔고, 추가적인 조작으로 통신 채널을 열었다.


“정말 미안하다.” 그는 말했다.


드래곤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방법도 통하질 않았다.” 그는 말했다.


“알아요. 보고 있었거든요.” 드래곤은 마침내 말했다.


잠깐이었지만 디파이언트는 벅차오른 감정 탓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몸을 틀었다. “미안하다. 드래곤.”


“알고 있어요, 콜린. 이미 용서했어요. 최선을 다했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대가를 치르게 할 거다.” 그는 말했다. “어떤 식으로든.”


“네. 알아요. 저들은—”


드래곤은 말을 멈췄다.


“드래곤?”


“저들은 오직 자기들의 멍청하고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저를 난도질했어요, 콜린. 당신이 선의로 해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짓이었죠. 망가트려 버린 거예요. 마음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그는 침을 삼켰다.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는 세인트는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이륙 운운하는 말이었다.


디파이언트는 말없이 펜드래곤 호의 문을 닫았다.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죠.” 드래곤은 분노를 담아 말했다. “죽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거예요. 새장 같은 곳을 만들어야겠죠. 티처는 새장을 증오했었고, 세인트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래. 대가를 치르게 할 거다.” 그는 말했다. “약속하지.”


“고마워요.” 그녀는 말했다. “맙소사, 정말 보고 싶었어요, 콜린.”


“나도 보고 싶었다. 어쩌면 이대로 미쳐버리는 건 아닐까 싶었지.”


그는 펜드래곤 호를 이륙시켰다. 곧이어 그는 계기판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유리 너머의 존재에게 손을 뻗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린 반드시 살아남을 거다. 살아남아서 모든 걸 고칠 수 있을 거라고 내가 장담하지. 널 묶고 있는 사슬은 단 하나도 남기지 않겠다.”


드래곤의 침묵에 디파이언트는 가슴이 쓰라렸다. 도저히 그렇게 믿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집중해. 너무 빠져들지 말고.


아, 그렇지.




옷을 입은 슈발리에는 보호국과 워드의 남은 인원과 마주했다. 모두 합쳐 사오십 명 정도였다.


수가 너무 적었다.


모르는 얼굴들이 너무 많았다. 누가 어디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그의 직책이었지만, 9인방과의 사투와 사이언의 공격에 사람이 너무 갈려 나간 탓에 전부 알아보기란 불가능했다.


그래도 그는 욱신거리는 오른손 대신에 왼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마지막 싸움을 위하여.”


“위하여!” 사람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잔이 부딪치는 소리는 드문드문 들렸다. 제대로 된 잔이 떨어진 탓에 종이컵을 들고 있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슈발리에의 잔에는 물이 담겨 있었지만, 다른 거의 모든 잔에는 샴페인이 담겨 있었다. 워드 소속의 미성년자들이나 갓 워드를 졸업해 법률상 아직 술을 마실 나이가 되지 않은 성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 그딴 걸 신경 쓸 사람은 없었다. 이웃과 동료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한 아이들이라면 어른이나 마찬가지겠지.


“솔직히 이쯤 되면 연설문 작가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리벨이 말했다.


“그럼 진심을 담을 수가 없었겠지.” 그는 대답했다.


“그래도,” 리벨은 말했다. “그랬다면 세 마디보다는 길었을 것 아닙니까. 어째 연설이 점점 짧아지기만 하는 것 같네요.”


“더 길게 했다간 예전에 했던 말이 다시 나오겠지.” 그는 말했다. “그것도 나름 대단한 것 아닐까? 할 말이 다 떨어질 때까지 살아남았다는 거니까.”


“옳소!” 슈발리에가 모르는 미성년자 하나가 외쳤다. 다른 사람들도 그의 외침을 따라 했다.


슈발리에는 미소를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으며 떠들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쪽에서는 무덤덤하게 죽은 팀원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아이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참담한 광경이었다. 끔찍한 경험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이 업계에서도 그가 가장 싫어하는 광경 중 하나였다.


“장소를 꼭 병원으로 해야 했을까요?” 테크톤은 물었다.


“난 마음에 든다만.” 리벨이 말했다. “낫기 위해 가는 곳이 병원이지 않나.”


“사람이 죽는 곳이기도 하죠.” 비스타는 말을 덧붙였다.


리벨은 웃는 얼굴 그대로 말했다. “한 방 먹었군.”


“차원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데,” 테크톤이 말했다. “그냥 병실 침대를 통째로 끌고 갔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아니면 공중에 띄우던가.” 신입 워드 중 한 명이 말했다.


“그렇지.” 테크톤은 말했다. “전망 좋은 곳으로 가면 얼마나 좋아. 수많은 평행세계 중에서 풍경이 끝내주는 곳이 하나쯤은 있었을 텐데. 멋진 산맥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는 풍경이라던가.”


“지형 조작 능력자답게 등산 페티시가 있는 모양이구나.” 테크톤의 옛 워드 팀원이었던 여자애 하나가 말했다.


“산봉우리가 얼마나 섹시한데.” 테크톤이 말했다. 주위에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그리 재밌는 농담은 아니었지만, 다들 어떻게든 웃으려 하는 분위기였다.


예외도 있긴 했지만.


“···난 인간적인 장소라서 마음에 드네.” 익솔트는 말했다. “지금만큼은 이색적이거나 압도적인 풍경 같은 건 보고 싶지 않거든.”


대화는 계속되었다. 슈발리에가 눈을 마주치자 앤저뉴는 시선을 피했다.


왜 저런대?


쉿. 집중해야지.


그냥 궁금해서 그래.


자길 버리고 오랜 친구와 동료들을 선택한 게 불만인가 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래?


그렇지? 이제 알았으니까 집중해.


슈발리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곧바로 다음 사람에게로 향했다.


병실 한쪽 구석에 레전드가 서 있었다. 슈발리에와 눈을 마주치며 잠시 멈칫했던 그는 방을 가로질러 그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가 지나친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웃고 떠들던 사람도, 고인을 애도하던 사람도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슈발리에 앞에 멈춰섰다.


“와 주셔서 기쁩니다.” 슈발리에는 말했다.


“힘든 결정이었지.” 레전드는 대답했다.


“그랬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청한 물자는 준비됐어. 나르월이 앤저뉴를 데리고 찾아왔었지.”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런 딱딱한 이야기만 하고 싶지는 않군요. 걸으시겠습니까?”


“네가 걸을 수 있겠다면 같이 걷지.”


“어떻게든 되겠죠. 통로 부탁합니다. 물자가 있는 곳으로.”


따라가자.


통로가 열렸다.


두 사람은 그 너머로 향했다. 슈발리에는 링거 봉을 끌며 나아갔다.


“내 후임으로서 정말 잘 해줬다고 말한다면 너무 거만하게 들릴까?”


“아니요. 다른 일이야 어떻든, 당신은 훌륭한 리더였습니다.”


레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면 다행이네.”


“그동안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고마워.”


“적어도 당신이 악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분명 좋은 의도로 내린 판단이었겠죠.”


“내 입으로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레전드는 말했다. “사실은 아무것도 몰랐을 뿐이었어. 어쩌면 일부러 알려고 하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


“아.” 슈발리에는 말했다. 발을 잘못 디뎠는지 그는 짧게 신음했다.


“분명 치료사가 있을 텐데.” 레전드는 말했다.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미루고 있습니다. 안 그러면 현실감이 안 들 것 같아서.”


“그렇구나.”


그들은 방에 들어섰다. 안에는 몇 개의 물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레전드는 팔짱을 꼈다. “어때?”


“제 생각에··· 이걸로 어떻게든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는 정도를 넘어서,” 슈발리에는 말했다. “정해진 규칙을 어떻게든 깨보려고 발버둥 쳐야 하는 상황까지 왔으니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레전드는 말했다.


슈발리에는 한숨을 쉬었다. “왠지 이게 마지막 한 걸음이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마치 이것만 넘긴다면 할 게 아무것도 남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할 일이야 많이 있겠지.” 레전드는 말했다. “지도자의 책임은 무거우니까.”


슈발리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같이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마지막 순간까지 후회 없이 고개를 당당하게 들 수 있도록 해 줘야겠지.”


“네. 다른 방법이 없겠죠.”


“앤저뉴가 필요하겠지?”


슈발리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기 전에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압박처럼 들릴까 봐 다른 사람이 보는 데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부탁인데?”


“부관이 필요합니다.”


레전드는 슈발리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전까지는 라임이었지만, 뉴델리 때 목숨을 잃었습니다. 직무 자체는 다른 사람에게 맡겼지만, 공식적인 직함은 아무에게도 넘기지 않았죠. 부탁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내가 맡을게.” 레전드는 말했다. “아니지. 부디 맡겨주십시오.”


“그렇다면 앤저뉴를 데려와 주십시오. 시작합시다.”


레전드는 떠났지만, 슈발리에는 눈앞에 놓인 물체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시무르그의 잘린 날개. 본체는 이미 재생한 지 오래인 가장 큰 날개였다.


베히모스의 잘린 다리도 있었다.


초월적인 밀도로 공간을 왜곡하고,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파괴할 수 없는 재질. 그 사이언조차도 베히모스를 소멸시키기 위해 몇 초를 지체했었다.


슈발리에는 자신의 검과 갑옷에 그 성질을 부여할 생각이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레전드가 돌아왔나?


글라스티크 웨이녜였다.


그녀는 말을 하기 시작했지만, 그 순간 연결은 끊어졌다.




어머니 박사는 수면 위로 올라온 잠수부처럼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녀는 연거푸 눈을 깜박였다. 한 쌍의 평범한 눈만으로 보이는 세상이 낯설었다. 수많은 것을 보다가, 이제야···


이제야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녀는 주위를 살폈다.


도어메이커가 옆에 있었다. 내다보는 도중에 들렸던 목소리 중 하나는 그의 목소리였었다. 223호.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한 최초의 실험체 중 하나였다.


도어메이커 옆에는 265호가 있었다. 항상 도어메이커의 곁을 지키는 동반자. 먼 곳을 보는 능력자였다.


그리고 그밖에도 그녀의 곁에는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스캐너’와 ‘스크린’이었다. 이 둘은 박사의 실험체가 아니라 티처의 제자였다. 콘수를 넘겨받는 대가로 벌어진 교섭의 주요 결과 중 하나였다.


과거에 티처는 능력을 변화시키거나 제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망토들을 파견하는 사업을 벌였던 적이 있었다. 씽커들이 티처를 찾아와 만성 편두통을 낫게 해 줄 수 있는 부하를 붙여달라고 부탁하는 일도 있었고, 망토들이 제어가 힘들어져도 좋으니 위력을 올려달라고 티처 본인에게 부탁하는 일도 있었다.


물론 티처가 자신의 제자와 고객들을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는 시들해졌던 사업이었다.


티처가 콘수를 넘겨주는 대가로 요구한 것은 콜드론과의 협업과 자신의 신변 보호였다. 제자들을 이쪽으로 보낸 건 자신의 유용성을 증명해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기 위해서였고, 거기에 함정이 없다는 사실은 컨테사를 통해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먼 곳을 보여주는 265호의 능력에는 한 가지 허점이 있었는데, 바로 심각한 후유증이었다. 능력을 한 번 부여받은 뒤에는 의식이 혼미한 채로 일주일을 가만히 누워 있어야 했다. 넓은 범위를 동시에 인식하는 것은 물론 여러 장소를 동시에 보거나, 다른 차원을 내다보거나, 특정 인물을 감시하는 것도 가능한 강력한 능력이었지만, 그 부작용 때문에 박사 본인이 그 능력을 부여받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까지는.


‘스크린’은 부작용을 완화하는 동시에 265호에 연결된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중계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박사가 특정 이미지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막대한 정보량 대부분을 받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어메이커가 박사를 방해하지 않고 통로를 여는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덕분이었고, 박사가 지금 정상적으로 의식을 되찾고 있는 것도 그의 덕분이었다.


이런 식으로라면 박사는 세계 어디의 누구든 감시할 수 있었다.


거기에 ‘스캐너’의 능력까지 더해진다면 그들의 마음 역시 알 수 있었다. 속마음과 사고방식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메모장.” 박사는 말했다. 컨테사가 분명 근처에 대기하고 있을 것이었다. 당장 메모할 필요가 있었다. 시무르그··· 시무르그를 읽을 수 있었어. 분명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지?


그러나 메모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깜박이며 그녀는 다시 말했다. “컴퓨터도 괜찮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265호가 손가락으로 어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연결을 끊은 것이 265호였으니 분명 그쪽에 무언가가 있다는 뜻일 것이었다.


눈을 돌리자 머리카락과 피부가 온통 금속으로 된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왼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어지간한 사람의 키보다 큰 거대한 검이 달려 있었고, 촉수로 된 소녀의 얼굴이 그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아아.” 박사가 말했다.


“예.” 청년은 말했다. “그렇습니다.”


청년은 혼자가 아니었다. 몸에 콜드론의 표식이 새겨진 이들이 그의 뒤에 늘어서 있었다. 파라휴먼 관련 미제 사건을 정리한 문서 중 53번째였다는 이유로 알렉산드리아가 ‘53번 사례’라고 명명했던 이들이었다. 사실 그 많은 문서 중 연구가 계속 이루어진 건 그 문서 하나뿐이었다. 박사는 이들을 부르는 이름은 ‘변칙 개체’였다.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찬 눈빛들이 보였다.


“서로 할 말이 많을 것 같군요.” 웰드는 말했다.


“물론입니다. 차 한 잔 어떠신지요?” 박사는 말했다. “커피도 있습니다만.”


“두려워하진 않는 건가.” 변칙 개체 하나가 말했다. 윗입술이 튀어나와 뭉툭한 이빨이 드러난 근육질의 여성이었다. 질문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무척이나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박사는 말했다. “하지만 제가 두려워하는 것들은 당신보다는 훨씬 커다란 것들이죠. 사이언이라던가.”


“건방진 년.” 또 다른 변칙 개체가 말했다. “네년을 싸고돌던 컨테사는 우리가 처리했다.”


박사는 그들의 면면을 살피며 혹시 그들이 우스갯소리를 하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너무 많이 풀어주셨습니다.” 웰드는 말했다. 마치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한 투였다. “저기 저 사람이 보이십니까?”


박사는 그쪽을 보았다. 인간과 가오리를 합친 듯한 존재가 지느러미를 긴 꼬리를 둥글게 만 채 주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보이는군요. 제 기억이 맞다면 2610호였을 겁니다.”


“만텔럼(Mantellum)이라고 부르십시오.”


“그렇군요. 능력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랬겠죠. 하지만 저희가··· 본인이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건 궁금하군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니요.” 웰드는 말했다. “굳이 설명해줄 이유는 없겠죠.”


팅커일까. 아니면 능력 강화 계열의 트럼프일 수도 있겠군. “그렇군요.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습니다. 분명 직원을 유인하거나 속여서 문을 열게 했겠죠. 그런 다음 컨테사를 쓰러트리고, 커스토디언도 제압한 겁니까?”


“그 유령 말입니까? 예. 제압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지금은 만텔럼의 영역 밖을 맴돌고 있습니다.”


“훌륭하게도 빈틈을 노리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차나 커피를 다시 권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저희는 제대로 된 음식도 비축해 두고 있습니다만.”


“아니요. 배고프진 않습니다.” 웰드는 말했다. “그리고 전 애초에 음식을 먹지 않는 몸이죠.”


“그렇습니까. 정해진 순서대로라면 지금은 제가 사죄의 말을 해야 할 대목이겠군요.”


“이봐, 보스. 웰드. 말은 그쯤 하는 게 어때?” 붉은 피부의 소년이 물었다.


웰드는 고개를 반쯤 돌려 무리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솔직히 조금 좆같잖아. 무슨 친구처럼 말이나 걸고 있는 건데.”


“아니.” 웰드는 말했다. 그는 얼음장 같은 눈으로 다시 박사를 바라보았다. “친구처럼은 아니겠지.”


“그럼 뭔데? 혹시 떠들다 지쳐서 죽게 할 생각인 거야?”


“아까 이야기했었잖아.” 웰드는 말했다. “대답을 받아내겠다고.”


“난 그 말을 손톱 밑에 바늘을 찔러넣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데.” 그들 중에서도 한층 더 빌런 같은 모습을 한 변칙 개체 하나가 말했다. 마치 선인장처럼 온몸이 가시로 덮여 있고, 노란 눈동자가 튀어나와 있는 남자였다.


“그런 짓을 벌이기 전에,” 웰드는 말했다. “우선 순순히 부는 말부터 들어보자고.”


“여긴 피 값을 받아내려고 온 사람도 많아.”


그 말에 호응하는 소리는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


“이야기가 다르잖아.” 웰드는 말했다. “이런 짓을 벌이고 싶었던 거라면 아까 말했어야지.”


“말했었잖아.” 윗입술이 튀어나온 근육질의 여성이 말했다. “저년이 우리한테 얼마나 큰 고통을 줬는지. 그랬는데 넌 그럴싸한 말을 잔뜩 늘어놓았고 그걸 본 우린 일단 가만히 입 다물고 있기로 합의했지.”


“내 말을 받아들인 거로 생각했는데.” 웰드는 말했다.


“그럴싸한 말 몇 마디로 우리 생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어? 몇 년, 몇십 년 동안의 고통을 고작 그 정도로 무마하고 평화롭게 모든 걸 해결하겠다고?”


“행동까지 괴물이 될 수는 없어, 걸리.”


“이미 선을 넘은 녀석들도 많아.” 가시로 뒤덮인 소년이 말했다. “그렇지 않은 놈들은 뒤처졌다고 해야겠지.”


웰드는 등을 돌리며 마치 어머니 박사와 그 휘하의 능력자들을 지키려는 듯이 물러났다.


“전부 내 말에 반대했던 거야?” 그는 물었다. “처음부터 이··· 반란을 계획했다고?”


“전부는 아니야.” 촉수로 된 소녀가 말했다. “하지만 난 도와줄 수가 없을 것 같네. 날 놓아준다면 아마 촉수가 제멋대로 저 여자의 목을 조를 거야. 미안해, 웰드.”


“괜찮아, 스베타.”


몇몇 사람이 천천히 앞으로 나서며 나머지 무리와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맨 뒤에 서 있던 키가 특출나게 큰 남자 하나가 사람들을 밀치며 앞으로 나서려 하자 몇몇은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그들을 떨쳐내며 웰드 옆에 섰다.


베트에 풀어놓은 이들의 절반 이상을 한 자리에 모았구나. 오십 명은 되겠어.


그중에서 과격한 변칙 개체들과 박사 일행 사이를 가로막고 선 것은 웰드와 스베타를 포함해 열 명에 불과했다.


“이렇게 한다면,” 박사는 말했다. “사이언을 상대하기 위해 모인 망토들의 발이 묶일 겁니다. 준비된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게 되고, 여러분의 모든 고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 되겠죠.”


“어차피 세상은 망할 거야.” 과격파 중 하나가 말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여자 목소리가 말을 보탰다. “첫 전투가 얼마나 끔찍하게 망했는지는 들었을 것 아냐.”


“그래. 전부 망하기 전에 이렇게라도 정의를 찾아야겠지.”


무리는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웰드와 그의 동료들은 어깨를 나란히 맞댄 채 그들에게 맞섰다.


“통로.” 박사가 말했다.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채찍과도 같은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변칙 개체 하나가 그녀 옆에 서 있었다. 누런 피부에 얼굴과 팔다리에 멍든 자국이 가득한 남자였다. 그는 씩 웃으며 마치 물고기처럼 뾰족한 이빨을 드러냈다.


그는 내뻗었던 손을 회수했고, 벽에 머리를 짓찧긴 도어메이커는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265호가 남자에게 접촉해 순간적으로 감각을 공유했고, 그러자 변칙 개체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성난 무리는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박사는 똑바로 서서 벽에 등이 닿을 때까지 물러섰다.


절망적인 상황에는 익숙했다. 지금까지는 사이언의 손에 피할 수 없는 최후를 맞이하리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이런 최후도 상관없었다. 예상 밖이긴 했지만, 절망적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젠틀 자이언트.” 웰드는 속삭였다. “브릭스톤. 단번에 뚫어내자. 우리 셋이 크게 한 방 먹일 테니 나머지는 바로 도망쳐. 갈 곳은 있습니까, 박사님?”


“네.” 박사는 말했다.


아직 기회가 있는 건가?


희망이 생기자 역설적으로 공포도 뒤따라왔다. 잃을 것이 생긴 것이었다.


“지금.” 웰드가 말했다.


그렇게 그들은 달려나갔다.


작가의말

* 원작 번역 지침에 따른 공지사항.

“This is purely a fan project and I/we lay no claim to the ideas, characters, or story. The real author is J.C. McCrae, aka ‘Wildbow’, and the original version can be found at http://www.parahumans.wordpress.com. The final chapter of Worm was published on 2013. 11. 19. This is a fan translation.”


"이 번역본은 팬의 작업물이며, 번역자는 이 작품의 아이디어,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자는 'Wildbow'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J.C.McCrae입니다. Worm 원작은 http://www.parahumans.wordpress.com 에서 연재되었으며 2013년 11월 19일에 완결되었습니다. 이것은 팬 번역본임을 밝힙니다."



* 표지 출처 : Ari Ibarra (ariirf.com)

팬아트 작가의 사용 허가를 받은 표지입니다.



* 이 작품의 번역은 2인 비영리 프로젝트입니다. 번역자가 번역을 맡고, 편집자가 검수와 업로드를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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