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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르카 님의 서재입니다.

W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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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엘사르카
작품등록일 :
2020.05.08 22:18
최근연재일 :
2022.05.0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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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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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51쪽

'탈피' e.2

DUMMY

네로는 의자에 기대앉은 채 탁자에 발을 올리고 있었다. 부하들은 죄를 저지른 사람 몇 명을 붙잡아 그의 ‘집무실’로 끌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상처투성이인 상체를 그대로 드러낸 채 팔다리에만 갑옷을 걸치고 있는 거구의 사내가 그 모습을 비치고 있을 것이었다. 그의 투구에는 눈구멍이 X자로 뚫려 있었고, 투구 한가운데의 도끼날과 같은 장식은 이마에서부터 턱까지 이어져 있었다. 가면 너머로 엿보이는 수염과 긴 머리카락은 갈색이었다.


그의 양옆에 놓인 화로 덕분에 그의 모습은 짙은 연기에 뒤덮인 채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금은 엄청난 속도의 확장 공사 때문에 오히려 베어낸 나무를 전부 처리할 방법이 없을 정도였다. 일부는 목재로 만들고 나머지는 껍질만 벗겨서 통나무집을 짓는 데 쓰더라도, 가공 과정에서 나오는 막대한 양의 나무쪼가리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톱밥이나 합판을 만드는 데 투입된 인력도 있었지만, 노동력이 부족한 탓에 대부분은 땔감으로 쓰는 수밖에 없었다.


첫 겨울이 오면 새로 생겨난 정착지들은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었다. 계속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잃은 사람의 수에 비해 지낼 곳이 부족한 건 6개월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죄인들— 노예들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끌려 들어왔다. 그와 눈을 마주친 이들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잠옷 차림인 이들도 있었고, 속옷 바람으로 끌려온 이들도 있었다. 집에 들이닥친 부하들이 다짜고짜 트럭에 실어서 여기까지 끌고 온 탓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가득했다.


그는 천천히 그들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루칸이 먼저 말을 꺼냈다. “물건이—”


“급한 일인가? 사람이 죽었어?”


“아니. 그건 아닌데—”


“아니면 물건에 뭔가 큰 문제가 생겨서 우리가 죽게 생겼나?”


“아니. 뭔가 불순물이 섞여 들어간 것 같은데. 환자가 나오고 있어.”


“그럼 나중에 이야기하지.”


루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내가 언제 의미 없이 잔인한 짓을 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네로는 죄인들에게 말했다.


그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 하나 긴장을 푸는 기색이 없었다.


“일하면 일하는 대로 증표를 주잖나.” 네로가 말했다. 그는 수납장을 열고는 증표가 달린 쇠사슬 한 뭉치를 탁자 위에 거칠게 올려놓았고, 쨍그랑대는 소리에 죄인 하나는 몸을 움츠렸다.


“이게 우리 시스템이라고. 일일이 모든 걸 관리할 수는 없어. 거주지, 식료품, 의약품··· 다 하나하나 손보려 하면 일 처리만 느려지지. 그래서 이것들을 쓰는 거 아니야.” 그는 증표 더미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증표 한 개만큼만 일하면 일주일 치 생필품을 받을 수 있도록 해 뒀잖아. 더 편한 집도, 사치품도, 나나 부하들에게 건의사항을 전달할 권리도 전부 이걸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해 뒀을 텐데.”


그는 죄인들을 한 명씩 쳐다보았다. “그러니 증표 없이 물건을 가져간 놈들은 도둑놈이라고 해야겠지. 식당에서도 무전취식을 하는 놈이 있으면 밥값만큼 설거지라도 시키지 않나? 너희도 그렇게 해 주지. 처벌을 내린 다음에는 루칸에게 넘길 거야. 노예처럼 묶인 채로 죽지만 않을 만큼 일하게 해 주지. 너희가 훔친 것이나 다름없는 증표만큼의 일을 할 때까지 말이야.”


그는 부하를 향해 손짓했다. 루칸은 엽총을 들고 있었고, 충혈된 한쪽 눈에서는 붉은 광선이 끊임없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루칸은 음흉하게 웃었다.


끌려온 사람들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도망치려고 해봤자 소용은 없을 거다. 내가 예전에 불리던 이름은 퍼서큐터(Persecutor), ‘추적자’였어. 능력을 얻기 전부터 사람을 찾는 건 내 전문이었지. 이런 일이 한 번 더 생기기라도 해서 끌려왔는데 내가 얼굴을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인생이 아주 고달파질 거야. 이번에 도망치기라도 한다면 말할 것도 없겠지. 알겠나?”


죄인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이제 이렇게 돌아가는 세상이야.” 네로는 말했다. “결국에는 너희도 내가 필요해서 이렇게 된 것 아니었나? 적응하라고.”


“적응하라고?” 끌려온 사람 중 하나가 말했다. 제대로 씻지 못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노인이었다. 조금 술에 취한 듯한 목소리기도 했다. “초능력 하나 덕분에 그 자리에 있는 놈 주제에.”


네로는 반응하지 않았다. “혹시 내 부하들이 못 찾은 증표라도 들고 있었나?”


“있을 리가 있겠냐? 아흐레를 내리 일했는데도 아무도 증표를 주지 않았는데. 그다음 일주일 동안은 어떻게 일하라는 거지?” 남성은 쏘아붙였다.


“나를 똑바로 보고 이야기할 권리는 증표 세 개짜리였을 텐데.”


“그럼 처벌이라도 내리시지, 할 말은 해야겠으니까. 네놈이 우두머리 행세를 하는 건 무슨 특별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야. 해만 끼치는 주제에 필요하긴 뭐가 필요하다는 거지? 네놈 없이도 우리는 우리끼리 잘 지내고 있었어. 운 좋게 비집고 들어온 깡패 놈 같으니.”


네로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팔꿈치를 탁자에 올렸다. 팔뚝의 황금빛 동심원 표식을 드러내는 자세였다. “능력을 얻는 만큼 잃게 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나 본데, 늙은이. 우린 모두 대가를 치렀어. 전쟁에 끌려 들어갔고, 수많은 사람을 잃었지. 능력을 각성하는 조건이 뭔지도 모르나 본데, 나한테 말대꾸를 하고 싶으면 한번 직접 겪어본 뒤에나 이야기하라고. 그게 안 된다면 납작 엎드려서 굽실대는 법이나 빨리 배우던가. 적어도 나는 공평하기라도 하지 않나?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말이야.”


“네놈 부하들은 이 주를 일해야 일주일 치 식량을 주겠다 하고 있어. 챙겨온 귀중품을 멋대로 가져가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성상납까지 요구하는 놈들도 있지. 공정하다고? 알고 있었으면 거짓말쟁이고 모르고 있었으면 병신새끼겠군. 부하들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뜻일 테니.”


끌려온 사람 중 십 대 정도로 보이는 남녀가 노인을 걱정스럽게 힐끔거리고 있었다. 네로는 남자의 말을 곱씹으며 그 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곧이어 그는 루칸을 힐끗 보았다.


루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총을 든 그는 끌려온 사람들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붉은 광선은 죄인들의 몸 위를 더듬듯이 훑고 지나갔다. 그들은 몸을 움츠렸다.


네로의 궁정 광대 역을 맡은 훌리건이 잔가지나 나무 부스러기가 가득 담긴 가방을 든 채 모습을 드러낸 건 그때였다. 그가 화로에 땔감을 집어넣자 불씨가 튀고 연기가 피어오르며 방의 분위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고, 그제야 끌려온 사람들은 본 훌리건은 하던 일을 멈추고는 네로를 바라보았다.


네로는 그에게 손짓했다. “그만, 훌리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루칸에게 다가가 그를 마주했다. 키가 한 뼘 가까이 큰 네로가 갑옷을 입은 채 루칸을 내려다보는 모습은 위압감이 상당했다.


“이런, 들켜버렸네.” 루칸은 조금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 말대로야. 지금까지 난 네 뒤통수를 신나게 갈기고 있었지. 미안하게 됐네, 퍼서큐터.”


“믿었던 네가 그런 짓을 할 줄이야.” 네로는 그렇게 말하고는 쿡쿡 웃으며 죄인들을 바라보았다. “아쉽게 됐네, 노친네. 다음부터는 이간질을 시도하기 전에 좀 더 알아보라고. 저 녀석과 나는 코드네임도 맞춰서 지을 정도로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니까. 또 수작 부릴 거라도 있나?”


노인은 딱히 실망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디 해볼 테면 해 보시지.”


“정말 멍청한 짓을 하는군.” 네로는 말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동요한 듯 갑자기 멈췄다가, 서서히 커지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영역 안에서 살면서 규칙을 어기고, 보는 앞에 대고 날 모욕해 놓고는, 도발까지 하겠다?”


노인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저 둘은,” 네로는 이전에 반응했던 두 남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눈은 노인에게서 떼지 않은 채였다. “저 노친네랑 같이 있었나?”


“아니.” 노인은 말했다.


“그래.” 루칸은 대답했다. “다 같은 곳에 웅크리고 있었지.”


네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노친네는 건드리지 마. 가둬만 두라고. 대신 아이들은···”


“안 돼.” 노인은 말했다. “안 돼!”


“대신 저 둘을 본보기로 만들도록 하지.” 네로는 말했다. “머리를 밀고 문신을 새겨. 커다랗게,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그가 손을 맞잡자 허공에서는 빙글빙글 도는 무언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파편이 하나둘씩 생성되며 마치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어떤 장치가 완성되고 있었다. 긴 바늘, 잉크 주입구, 손잡이··· 이윽고 구멍이 숭숭 뚫린 잉크병 세 개도 생겨났고, 허공에 한 방울씩 맺힌 잉크가 그 안으로 스며 들어간 뒤에는 병의 구멍도 막혔다.


“얼굴이나 목이면 될까?” 루칸이 물었다.


“멈춰!” 노인은 울부짖었다.


네로는 손을 내밀었고, 루칸은 장치를 받아들었다. 잉크병은 여전히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고, 루칸은 마지막 한 회전을 마친 그것들을 받아들었다.


두 십 대를 향해 다가간 네로는 그들의 턱과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능력의 파편들이 그들의 몸 내부를 향해 모여드는 듯했지만, 그가 손을 뗐을 때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다. “어느 쪽이든 좋겠지. 둘 다 하던가. ‘네로의 소유물’ 같은 문구에 내 가면 그림이라도 그려 넣던가, 아니면 확실하게 ‘아빠 감사합니다’라고 쓰던가.” 네로는 말했다. “‘해 볼 테면 해보시지’ 같은 말까지 들었으니까, 가볍게 몽둥이찜질도 좀 해 주고··· 혹시 물건은 전부 팔았나?”


“아직 좀 남았어.” 훌리건은 말했다. 그는 빈 가방을 든 채 히죽 웃고 있었다. 구경이라도 하러 온 것 같았다.


“그럼 이 노친네 아들딸한테도 듬뿍 나눠 주도록 하지. 공짜 좋아하는 놈들이니까 좋아하겠네.”


“안 돼! 제발! 멈춰!”


네로는 울부짖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애비한테 돌려보내기 전에 확실하게 조져놓으라고. 약만 앞에 들이대면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하겠다고 애원할 정도로.”


노인은 힘을 잃고 축 늘어졌지만, 옆 사람의 족쇄와 이어진 쇠사슬 탓에 그는 쓰러지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네로가 지목한 남녀는 훌리건과 루칸이 다가오자 움츠러들었지만, 쇠사슬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들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쇠사슬이 당겨졌기 때문인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어떤 본능적인 반응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자 훌리건은 훌쩍 뛰어올라 천장을 거꾸로 걸어서는 그들 바로 옆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손에는 열쇠가 들려 있었다.


훌리건은 둘의 족쇄를 풀기 시작했고, 루칸이 엽총의 총구를 들이대자 다른 사람들이 물러나며 쇠사슬은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삼촌!” 남자애 쪽이 소리쳤다. 그는 패닉에 빠진 듯했지만, 훌리건은 겉보기보다 힘이 센 편이었다.


“나머지는 가볍게 두들겨만 주고 풀어 줘.” 네로는 말했다. “일을 못 하게 되면 곤란하니까. 그쪽은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난 사람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여길 제대로 굴러가게 하려는 거거든, ‘삼촌.’ 나 정도면 아주 관대한 편이지. 더 악랄한 놈들이 저 밖에 얼마나 많은데.”


노인은 충격에 빠진 듯 조카들이 발버둥 치는 모습과 네로의 모습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루칸은 훌리건에게 문신 기기와 잉크병을 던져 주었다.


“삼촌!” 남자애 쪽이 소리쳤다.


문이 쾅 닫혔고, 노인은 마치 그 문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반응했다.


“나머지 놈들도 내가 마음에 들진 않겠지. 앞으로도 내가 딱히 좋아지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겨울을 날 거고, 추워도 어떻게든 일해서 영역을 늘릴 거다. 도망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그 과실을 누릴 수 있겠지. 여기는 다른 구획보다는 훨씬 나은 곳이 될 테니까.”


이제는 그들도 네로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어쩌면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귀를 기울이는 것보다는 그편이 그나마 낫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다른 데는 어떤 줄 알아? 텅 빈 집에 불을 피워놓고 옹기종기 모여만 있는 놈들이 부지기수야. 땔감을 구하러 교대로 나갈 때를 제외하고는 먹을 걸 아끼면서 죽어라 틀어박혀 있지. 어디 한 구석에서 어린애나 노인이 이불에 똥오줌을 지르든 말든 최대한 무시하면서 말이야. 우린 이미 앞서나가고 있는 거야, 알아? 공구도, 따뜻한 옷도 준비해 뒀으니 겨울에도 일할 수 있다고. 봄이 올 때쯤이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제대로 된 주택에서 살 수 있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여기로 넘어오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겠지.”


그는 늘어선 사람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때가 되면 나한테 고마워하게 되겠지. 물론 인정하고 싶진 않을 거야. 딱히 내가 좋아지지도 않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나한테 감사할 날이 올 거라고.”


대답은 없었다. 위협으로 기를 죽이는 데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데려가, 루칸. 앞으로도 도둑질하는 놈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똑똑히 알리고, 들어가서 쉬게 해. 내일 또 일해야 하니까. 물건 이야기는 그다음에 하지.”


루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총을 든 손으로 손짓했고, 줄 선 사람들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두 남녀가 끌려간 자리에는 빈 족쇄만이 남아 있었고, 몇몇 사람은 노인을 부축하기 위해 다가섰다.


하나둘씩 그들은 모습을 감췄다.


네로는 그들 모두가 나간 것을 확인한 뒤에야 투구를 벗었고, 머리카락을 가다듬으며 가려운 수염을 매만졌다.


곧이어 그는 다시 탁자 뒤로 돌아가서는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러나 의자의 위치가 예상했던 것과 달랐다. 그의 몸은 손쓸 새도 없이 그대로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쇠사슬이 목을 잡아챘고 그는 허공에 붙들린 꼴이 되었다. 엉덩이는 뒤로 기울어진 의자에 걸쳐져 있었지만, 발이 땅에 닿지 않고 있었고 목은 쇠사슬에 의해 억지로 들어 올려져 있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는 탁자 모서리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어느새 그의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수갑은 그의 양 손목을 의자 팔걸이에 묶고 있었다. 갑옷을 입은 손목이 아닌 갑옷의 끈에 채워진 수갑이었지만, 벗을 방법이 없는 건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리를 높이 들어 탁자의 아랫면에 닿은 발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목의 압박감을 풀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발을 박차서 앞으로 몸을 날린다면···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거기서 더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걸?”


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쇠사슬의 반대쪽 끝을 양손으로 붙잡은 채 탁자 위에 앉아 있는 여자가 있었다. 천장에 갈고리가 있었고, 그의 목을 옥죄고 있는 쇠사슬은 그 갈고리를 통해 여자의 손까지 이어져 있었다. 지금 그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게 이 여자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녀의 가면에는 파충류처럼 양옆으로 길게 찢어진 입이 그려져 있었지만, 그 무늬는 목에 두른 두꺼운 스카프에 대부분 가려져 있었다. 가면의 새까만 눈 또한 길쭉하게 찢어져 있었고, 머리 위에는 한 쌍의 구부러진 뿔이 나 있었다. 가면 뒤로는 오밀조밀하게 땋은 검은 머리카락이 그대로 보였고, 복장은 슈트와 카고바지는 물론이고 그 위에 걸친 재킷까지 모두 새까만 색이었다.


“아래를 한번 보시지.” 임프는 말했다.


고개가 잘 돌아가지 않았지만, 네로는 최선을 다해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바닥에는 큼지막한 나무판자가 놓여 있었고, 판자에는 날카로운 못과 칼날이 수도 없이 꽂혀 있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배치였다. 이대로 뒤로 넘어간다면 목덜미와 뒤통수에 구멍이 못해도 스무 개는 뚫리게 될 것이었다.


온몸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의자가 미끄러지거나, 여자의 팔에 힘이 빠지기라도 한다면···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어떤 상황인지 이해한 것 같네.” 여자는 말했다. “생선 꼬치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가만히 있으라고. 우리는 지금부터 대화를 나눌 거니까.”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좋아. 대화인가. 돈이라면 얼마 되지 않지만 있어. 겨울을 날 식량도 있지. 허리띠를 졸라맨다면 여유분이 없진 않을 거야. 그리고 영역도 있지. 물건도 있고.”


“일단 그 물건이라는 것 말인데.”


“전부 가져가도 된다.”


여자는 한숨을 쉬었다. “필요 없어. 애초에 누가 장난친 불량품이라는 것도 알고 있거든?”


“방금 들었나?”


“아니. 장난친 게 나거든.”


“아.”


“물론 방금 듣기도 했지. 하지만 난 그쪽 재산에는 관심 없어. 오히려 그 반대지.”


“네 물건을 팔 생각으로 내 걸 망가트린 건가.”


“제발 입 좀 다물고 있으면 안 될까?” 여자는 물었다. “이 대화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난 팔에 힘이 빠질 것 같은데. 혹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니?”


“알겠다.”


그녀는 뾰족한 구두 끝을 의자 앞에, 그러니까 그의 양쪽 무릎 사이에 올려놓았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야. 그쪽은 지금 마약을 팔고 있잖아. 근데 나는 그게 개인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이해는 하지? 그리고 나는 강제로 문신을 새긴다거나 공포로 사람을 억누르는 것도 좀 별로라고 생각하거든.”


“아. 자경단 행세인가.”


“아닌데? 제발 입 좀 닥치고 있으면 안 될까? 난 자경단 행세랑은 거리가 아주 먼 인간이야. 그러기엔 거창한 명분 같은 걸 따지고 있을 만큼 참을성이 있질 않거든. 계속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면 짜증 난다는 이유만으로 이 쇠사슬을 놓아버릴지도 모르겠는데.”


“그게··· 음.” 그는 말했다.


“원래는 여유롭게 물건만 엉망진창으로 만든 다음 명함 하나 남기고 가려고 했거든? 나도 정해진 행동-의식이라는 걸 만들어 보려고 했지. 암살자가 아니라 그 뭐냐, 아무도 모르게 다 때려 부수고 다니는 인간이라는 평판이 있으면 어떨까 해서.”


“‘행동 양식’ 아닌가?”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이런!”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천장의 갈고리와 쇠사슬은 거칠게 맞부딪쳤고, 네로의 몸은 순간적으로 푹 꺼졌다.


뒤로 넘어가려던 몸은 곧바로 쇠사슬에 다시 붙잡혔고, 네로는 몸이 멈춘 뒤에야 뒤늦은 비명을 질렀다.


“내가 뭘 말하려고 하고 있었더라? 아, 맞다. 그런데 그쪽이 하는 짓을 보니까 그렇게는 못 놔두겠더라고. 일 처리 방식이 너무 낯이 익지 뭐야.”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영역을 지배하고 공포로 사람들을 장악하는 방식은 지금까지 많이 봐왔어. 다들 자연스럽게 잘 하더라고. 그런데 그쪽이 지금 하는 짓은 아무리 봐도 조금 부자연스럽다는 말이지.”


“난 원래 이랬다.” 네로는 말했다.


“헛소리하지 마셔. 어차피 이런 짓을 벌일 법한 사람은 뻔하니까. 세상이 이 꼴이 된 이후로 실력자라고 할 만한 사람은 몇 명 남지도 않았거든? 그중에서도 완전한 진실을 아는 사람이나 어느 정도 이상의 정보력을 갖춘 사람은 더더욱 드물지. 설마 아직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할 셈인가? 바보 행세하지 말고 빨리 불어. 누가 뒤를 봐주고 있는지. 이런 사업을 벌이는 데 외부의 지원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


“난 능력으로 물건을 만들 수 있다. 공구, 재료, 무기, 뭐든지 만들 수 있다고. 지금까지 물자가 부족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만.”


“5초 줄게. 나로서는 솔직히 그냥 놓아버리고 대신 훌리건한테 물어보면 그만이거든.”


“훌리건?” 그는 훌리건이 나갔던 쪽을 쳐다보았지만, 앞에 놓인 탁자 탓에 그 너머는 보이지 않았다.


“대답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닐걸.”


“루칸은 어떻게 됐지?”


마치 그 말에 대답하듯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임프는 네로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적이 흘렀다.


“들어들 와!” 임프는 외쳤다.


그러자 문은 열렸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세 사람의 어린아이였다. 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애는 금발이 헝클어져 있었고, 그보다 어린 검은 생머리의 여자애는 열 살 정도로 보였다. 검은 단발의 마지막 여자아이는 그보다도 일이 년은 더 어려 보였고, 어딘가 고삐가 풀린 듯한 미소를 얼굴에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은 하나같이 검은색이었다.


네로는 목에 힘을 풀고는 고개를 축 늘어트렸다. 그의 입에서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문 좀 닫아줄래?” 임프는 물었다.


금발 남자애가 문을 닫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여자아이는 한껏 내달리더니 책상을 뛰어넘다시피 하며 임프에게 그대로 달려들었다.


임프가 쇠사슬을 놓치는 모습을 상상한 네로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상황을 요약해줄게. 내가 지금 여기 네로랑 이야기를 좀 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선가 비린내가 나는 것 같단 말이지. 방법이 너무 익숙하단 말이야.”


“어느 부분이 익숙하다는 건데?” 금발 남자애는 물었다.


“내가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 녀석이랑 방식이 비슷해도 너무 비슷해. 그렇다고 보고 배웠다기에는 이 자식을 내가 그때 그 근방에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말이지. 어딘가 이상해.” 임프는 말했다.


네로는 목이 졸린 와중에도 끼어들었다. “배후 같은 건 없어! 몇 번을 말해야 믿을 건데!”


“그런데도 이 생선 대가리는 끝까지 잡아떼고 있으니 내가 화를 안 낼 수가 있나.” 임프는 말했다.


“‘비린내’에 이어서 ‘생선 대가리’라니,” 금발 남자애는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컨셉이야?”


“오,” 임프는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내 교양 수준이 너희를 뛰어넘는 날이 온 건가?”


검은 생머리를 한 여자애는 방을 조용히 가로지른 끝에 네로 옆에 다가가 섰다. 여자애는 이윽고 그를 내려다보며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니모(Nemo)가 아니라 네로(Nero)예요.”


“응?” 임프는 물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잠깐, 뭐라고? 진짜? 이런, 젠장!”


금발 남자애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안 돼! 씨발! 내가 준비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의자가 안 미끄러지도록 바닥에 못을 박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린 줄 알아? 저 지랄 맞은 갈고리는 또 어떻고! 그런데 알고 보니 이름을 헷갈린 거라고? 씨발!”


“저기.” 네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설마 그대로 놓아버릴 생각은 아니지? 어린아이들한테 그런 잔인한 광경을 보여주면 안 되는 거잖아.”


가장 어려 보이는 여자애는 책상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네로를 쳐다보며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고삐가 풀린 듯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자 임프는 여자애의 스웨터 후드에 발을 걸어 뒤로 끌어당겼고, 이내 두 다리로 여자애의 목을 감아 단단히 붙잡았다. 여자애는 저항하지 않았다.


“웃기려고 한 소리 맞지, ‘네로’?” 금발 남자애는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린애 둘을 때리고 고문하라고 자기 입으로 말한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너희들 전부 파라휴먼이었나.” 네로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말투도 말투였지만, 아이 중 하나는 몸을 움직이면서 팔뚝의 금빛 문양을 자연스럽게 내보이고 있었다.


임프는 애초에 다른 데 정신이 팔린 듯했다. “젠장. 아니, 잠깐··· 그럼 ‘네로’는 누군데?”


“로마의 황제였어.” 금발 남자애는 말했다. “듣기로 군주로서는 수준 이하였다는데, 영역을 지배하겠다는 인간이 왜 그런 이름을 고른 건지 모르겠네. 뭐, 역사학자들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로마가 불타는 동안 자기는 악기를 연주하면서 구경했다는데.”


“으,” 임프는 말했다. “물고기랑은 전혀 관계가 없는 놈이었잖아. 잠깐, 혹시 네로라는 놈이 자기 엄마랑 했다는 그놈인가?”


“자기 엄마를 죽였던 거로 알고 있는데.”


“그럼 생선이랑은 더더욱 관계없잖아. 씨발!”


“이제 다른 방법이 없겠네요.” 긴 생머리의 여자애는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아래로 뻗은 엄지손가락을 네로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놓아주는 수밖에.”


“살인은 안 돼, 줄리엣.” 남자애는 말했다.


“살인은 안 돼.” 임프도 말했다. 말투로 볼 때 지금까지 같은 말을 한 게 한두 번은 아닌 것 같았다. 곧 그녀는 아래로 눈을 돌렸다.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플로?”


단발 여자애는 고개를 끄덕이자 임프는 다리를 풀었다. “훨씬 낫네. 자세 때문에 팔이 아파지고 있던 참이었거든.”


“그럼 제가 대신 들게요.” 줄리엣은 여전히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또 속을 줄 알고? 우린 이야기나 계속하자고, 네로. 다른 어떤 황제처럼 뒤에서 찔려서 죽고 싶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는 게 좋을걸?”


금발 남자애는 ‘그저 그런데’라는 뜻을 담은 손동작을 지어 보였다.


“꺼져.” 임프는 말했다. “악당다운 대사를 매번 생각해내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이제 슬슬 포기하세요.” 줄리엣은 말했다.


“이번만큼은 나도 줄리엣과 같은 생각이야.” 금발 남자애는 말했다. “이런 짓이 어울리는 사람은 따로 있—”


임프는 순간적으로 능력을 억누르는 걸 멈추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완전히 잊지는 않을 정도의 간격이었다.


그녀는 숨을 고르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우린 이야기나 계속하자고, 네로. 내가 원하는 답을 내놓는 게 좋을걸? 그러지 않는다면 마지막에 악기라고는 네가 비명 지르는 소리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자 금발 남자애는 엄지손가락을 내리며 소리 없는 야유를 보냈다.


임프는 다시 능력을 썼다.


“빨리 불기나 하시지, 황제 폐하.” 임프는 지친 듯 말했다.


“말할 게 없다고 몇 번을 말해.”


“사실 지금 이 상황에서 답은 둘 중 하나야.” 임프는 말했다. “그쪽이 정말 설득력이 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정신 지배를 당하고 있거나. 후자라면 넌 어차피 죽어 마땅한 놈이고, 전자라면··· 또 왜 그러는데?”


금발 남자애는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전자’가 먼저 와야지. ‘후자’가 나중이고.”


임프는 다시 능력을 썼다.


“사실 지금 이 상황에서 답은 둘 중 하나야.” 임프는 말했다. “그쪽이 정말 설득력이 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정신 지배를 당하고 있거나. 전자라면 넌 어차피 죽어 마땅한 놈이고, 후자라면 그것대로 대화를 더 나눠봤자 의미가 없겠지.”


“그게 아니라,” 네로는 투구 너머로 눈을 크게 뜬 채 말했다. “내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걸 수도 있잖아!”


“만약 정말로 그런 거라면,” 임프는 말했다. “나중에 죄책감 정도는 가져주지.”


“혹시 내가 지금 쇠사슬 때문에 머리에 피가 안 통하고 있는 것 아니야? 갑자기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떠오르는데, 이 상태로 말을 하라니···”


“그건 그쪽 사정이고,” 임프는 말했다. “센다.”


“할 말이—”


“오···” 임프는 말했다. “사··· 삼··· 이···”


“티처야.” 네로는 갑자기 말했다.


“끝까지 입을 다물 생각인가 보네요.” 줄리엣은 마치 귀지를 파내려는 사람처럼 손가락으로 자기 귀를 후비며 말했다. “어쩔 수 없죠.”


“티처라고?” 임프는 물었다.


“저기, 쇠사슬 놓는 거 잊어버렸어요.” 줄리엣은 말했다.


“쉿.” 금발 남자애는 그렇게 말하고는 줄리엣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이제 그만하고 다음번을 노리렴. 다음번엔 죽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잖니.”


네로는 아이들에게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서둘러 설명을 시작했다. “티처. 티처가 계획을 쥐여 주고 이렇게 하라고 알려줬어. 자기 말에 따르기만 하면 능력으로 못 만드는 물자도 구해주고, 정교한 위조가 필요한 문서나 현금도 가져다주겠다고 했지. 티처는 내 능력도 강화해 줬어. 원래는 다트 같은 몇 가지 물건만 만들 수 있었고, 그걸로 사람 위치를 추적하는 정도가 고작이었지. 나는 내가 만든 물건의 위치는 추적할 수 있어서—”


“이제는 또 말이 너무 많아졌네.” 임프는 말했다. “차라리 그게 낫긴 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조금은 집중해줬으면 하는데.”


“그, 그래.”


“계획이라는 게 있었다고?” 임프가 물었다.


“지침이 있었어. 특정 시각까지 해야 할 일의 목록이 있었지. 일주일에 한 번씩 나는 보고서를 보냈고 티처는 새로운 지시사항을 보냈어. 다른 사람들도 있어. 내가 성공할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 여러 사람에게 제각기 다른 지침을 보내고 있다고 했지. 성공한다면 계속 지원해 주겠지만, 실패하거나 정보가 샌다면 버리겠다고도 했고.”


“그놈으로서는 누구 하나만 성공하더라도 권력자를 배후에서 조종할 수 있게 되는 셈이겠네.” 임프는 말했다.


네로는 고개를 좌우로 젓는 듯하다가 이내 끄덕였다. “그게— 그럴 수도 있겠네. 티처는 자긴 권력을 위한 권력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어. 배후에서 암약하는 사람이 왕관까지 쓸 수는 없는 법이라고 하면서.”


“그야 당연히 그렇게 말했겠지. 듣는 사람이 왕관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인데.” 금발 남자애는 말했다.


“그건 모르겠어.” 네로는 말했다. “그— 그쪽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진짜로, 모, 모른다고.”


“알고 있는 건 그게 다야?” 임프는 물었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게 좋을걸?”


“또— 또 뭘 알고 싶은 건데?”


“마약은? 어디서 구했지?”


“NY-C에서 구했어.”


“지금이 쓸데없이 폼이나 잡고 있을 때는 아닌 것 같은데.” 임프는 말했다.


“뭐? 아니, 그게 아니야! 뉴욕 시티가 아니라 뉴욕-C를 말한 거야. 거기 섬에 마약 카르텔이 있어.”


“능력자는 얼마나 있지?”


“리더가 트럼프야. 그것 때문에 워든들도 섣불리 손을 못 쓰고 있다고 들었는데.”


임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너희 셋이 나 대신 기억해두고 있어 줘.”


“그리고 여기서 ‘너희 셋’이라는 건 나를 말하는 거겠지.” 금발 남자애는 말했다.


“왜 사무엘한테만 시키는 거죠?” 줄리엣은 특유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믿음직스럽잖아요.”


“더 자세하게 좀 말해 보라고, 황제 양반.” 임프는 말했다. “정 안 되겠으면 창의적으로 지어내기라도 하던가. 내가 듣고 싶을 법한 이야기를.”


“그··· 아니. 더 생각나는 게 없는데.”


임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가. 그럼 이제 마무리해야겠네.”


“너무 오래 이야기했어.” 사무엘은 말했다. 그는 줄리엣을 힐끗 보며 말을 이어갔다. “이제는 능력을 쓰더라도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을 텐데.”


“괜찮아.” 임프는 말했다. “플로를 쓰면 되니까.”


모두의 시선은 단발 여자애에게로 향했다.


“저기,” 네로는 말했다. “저 아이는 정체가 뭔지 혹시 물어봐도 될까?”


플로는 정말 허락한 게 맞는지 물어보기라도 하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며 꼼지락대고 있었다.


“시작해.” 임프는 말했다.


플로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네로를 향해 몸을 날렸고, 힘이 너무 들어간 탓에 하마터면 그대로 반대편의 못과 칼날 위로 떨어질 뻔한 플로는 쇠사슬을 거칠게 잡아챈 끝에야 네로의 가슴팍에 올라탈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더해진 무게를 감당하는 건 순전히 임프의 몫이었다.


“씨발!” 임프는 욕설을 내뱉었다. “플로, 좀!”


네로의 가슴에 올라탄 어린 여자애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이빨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미소였다.


“혹시— 혹시 내 얼굴을 뜯어먹으려는 건 아니겠지?” 네로는 물었다.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제 규칙을 말해야지.” 사무엘은 임프에게 말했다.


“일단 첫째, 마약 금지.” 임프는 말했다. “마약과 관련된 거라면 보는 것도,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만지는 것도, 직접 하는 것도, 거래하는 것도 전부 금지야. 멀쩡한 사람들 인생 망치고 다닐 생각은 이제 접어두라고.”


네로는 몸을 움찔거리더니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파란 하늘! 파란 하늘 꿈이! 드리운 푸른 언덕에!”


“우리가 생각했던 벌칙은 이게 아니었는데,” 사무엘은 말했다. “분명—”


“아기염소 여럿이! 풀을 뜯고 놀아요! 해처럼 밝은 얼굴로!”


사무엘의 표정이 풀어졌다. “아, 끝까지 부르는 건가. 그럼 좀 낫지.”


“빗방울이 뚝뚝뚝뚝 떨어지는 날에는!”


“그러니까, 네로,” 임프는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잔뜩 찡그린 얼굴로!”


“—우리가 정한 규칙을 어길 때마다 그쪽은 매번 이 짓거리를 똑같이 해야 한다는 소리야.”


“엄마 찾아 음매! 아빠 찾아 음매! 울상을 짓다가!”


“아니, 이거 생각보다 긴 노래였네.” 임프는 하려던 말을 잊어버린 듯 그렇게만 말했다.


자기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사태에 네로는 두려움에 빠진 듯했다. 그는 눈동자만을 열심히 굴리며 번갈아 가며 네 사람 모두에게 필사적인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해가 반짝! 곱게 피어나면! 너무나 기다렸나 봐!”


임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봐준답시고 얼굴에 칼자국을 내봤자 얼굴을 꿰맨 숙적이 생길 뿐이거든. 오히려 악명만 높여주는 일도 있고.”


“폴짝폴짝 콩콩콩! 흔들흔들 콩콩콩!”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아기염소 노래를 부르는 놈으로 만들어 버리면—”


“신나는 아기염소들!”


“—계속 빌런으로 살아가기가 훨씬 고달파지지 않겠어?”


노래를 마친 네로는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율동까지 같이 해야 한다면 더더욱 그렇겠지.” 사무엘은 말했다. “방금 보니까 손이랑 허리도 멋대로 움직이려 하는 것 같던데.”


임프는 한숨을 쉬었다. “플로. 제발 다음부터는 설명을 다 들은 다음에 벌칙을 정하자.”


사무엘은 말을 보탰다. “‘타잔의 십 원짜리 팬티’ 때랑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어쩌려고 그래. 저번에 멈추게 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고.”


“멈추게 하는 건 언제든 가능하잖아.” 줄리엣은 조용히 말했다. “임프의 규칙을 깰 뿐이지.”


플로는 아무 말 없이 활짝 웃는 얼굴 그대로 네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둘째,” 임프는 말했다.


“제발, 안 돼.”


“플로, 이번에는 어겼을 때 가진 무기와 통신기기를 전부 버린 다음 ‘일리아드’를 한 시간 동안 암송하게 만들어 버려. 그사이에 공격하는 건 당연히 안 되고.”


“제발,” 네로는 말했다.


“둘째, 사람을 공격하는 것 금지.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도 금지. 다른 사람의 재산에 손을 대거나 손을 대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도 금지야.”


“안 돼!” 네로는 외쳤다. “그냥 맞아 죽으라는 거잖아! 이게 죽이는 거랑 뭐가 다른데!”


“그건 그쪽 사정이지, ‘노친네’.” 임프는 말했다. “알아서 잘 해 보라고. 샘, 얘 풀어주는 것 좀 도와줄래?”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 노릇을 하는 것도 참 힘드네.” 사무엘은 말했다. “저리 가, 플로. 불쌍한 놈 그만 괴롭히고.”


플로는 폴짝 뛰어내렸고, 의자가 휘청이자 네로는 비명을 질렀다.


샘은 못과 칼날로 가득한 판자를 발로 밀어서 치웠고, 임프는 의자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이제 끝났어.” 임프는 말했다.


네로는 슬금슬금 물러나다가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다가온 줄리엣을 보고는 얼어붙었다. 그녀는 언제 주웠는지 못이 잔뜩 박힌 판자를 자기 가슴 가까이 집어 들고 있었다.


임프는 갑옷을 입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쪽이 하고 있던 짓거리는 내 옛날 친구에 대한 모욕이었어. 어설프게 흉내나 내고 말이야. 덕분에 나도 취미활동을 하나 새로 시작하게 됐네. 나중에 티처랑 연락이 닿으면 전해줘. 가는 곳마다 내가 뒤집어엎고 다니는 게 싫으면 남의 방식을 베끼지나 말라고. 알겠지?”


네로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난 그 유산을 지키고 싶거든.” 임프가 말했다. “본인이 없어진 만큼 이제는 우리 책임이 됐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으니까 오른쪽 아래의 서랍 좀 열어봐.”


“내가 졌어.” 네로는 말했다. “애초에 목에 쇠사슬이 걸렸을 때부터 졌던 거였어. 싸우지도 못하고··· ‘특정한 사업’도 하지 못하게 되다니.”


“배우는 속도가 빠르네.” 사무엘은 말했다.


임프는 방을 가로질러 가서는 훌리건과 남매가 들어갔던 방의 문을 열었다. “가 봐. 이제 감시하고 있을 필요 없으니까.”


끌려갔던 남매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서랍,” 임프는 말했다.


천천히 탁자로 다가간 네로는 서랍장을 열었다.


그 안에는 조잡한 봉제 인형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하얀 인형은 은빛 왕관을 쓰고 있었고, 입술은 빨갛게 칠해져 있었다.


“가끔 확인하러 올 건데,” 임프가 말했다. “난 규칙이 하나 있어. 그 인형은 이제부터 그쪽의 생명선인 거야, 알겠어? 먼지 한 톨 묻지 않게 관리하라고.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조져버릴 테니까.”


네로는 인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지?”


“원래 내가 좀 불가사의한 존재거든.” 임프는 갑자기 피로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곧 다시 찾아올 테니까 인형이나 잘 관리하고 있어.”


발걸음을 돌리려던 임프는 돌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생선 어쩌고 했던 이야기는 잊어버리는 게 좋을 거야. 어디서 이야기라도 했다간···”


네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임프는 일행과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전직 빌런이 된 네로는 허름한 인형을 멍하니 내려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세 아이는 출입구 옆에 걸어뒀던 재킷을 다시 뒤집어썼다.


그들은 함께 춥고 어두운 바깥으로 나섰다. 쌓인 그대로 얼어붙은 눈은 그들의 발밑에서 바스러졌고, 플로는 마치 바람과 포옹이라도 하려는 듯 양팔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순간 균형을 잃고 쓰러지려던 그녀를 붙잡아준 것은 사무엘이었다.


“인형은 리젠트인 거야?” 사무엘은 스카프를 매만지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


“무슨 의미인 건데?”


“기념하는 거지.” 임프는 말했다. “사이언이 원본 브록턴 베이를 날려버렸을 때 기념비가 날아가 버렸거든. 왠지 짜증이 나더라고. 다른 이야기지만, 난 어린 시절이 참 거지 같았어. 물론 너희도 공감할 수 있겠지만.”


“세상에, 어떻게 알았죠?” 줄리엣은 물었다.


“뛰어난 직감 덕분이지.” 임프는 맞받아쳤다. “너희 꼬맹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정상적이어서 평범한 사람은 알아챌 수가 없잖냐.”


“꼬맹이라니, 나보다 두 살밖에 더 안 먹었으면서?” 사무엘은 물었다.


“어쨌든,” 임프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어린 시절이 거지 같았던 바람에, 몇 명 안되는 친한 사람들을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다는 거야. 이해 가지?”


사무엘이 “그렇지,”라고 말하는 것과 동시에, 줄리엣은 “아니요.”라고 말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못한다는 건 참 엿 같은 일이야. 능력 이야기가 아니라 그 전부터 그랬거든. 그리고 애초에 난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도 잘 못 해서··· 너희들 말고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다 없어져 버렸거든.”


“대부분 죽었죠.” 줄리엣은 그렇게 말했고, 사무엘은 팔꿈치로 그녀를 찔렀다.


“대부분 죽었지.” 임프는 동의했다. “그러니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무덤에 꽃 한 송이 올려놓고 우는 부류의 인간도 아니고. 차라리 그랬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


“기억을 남기려는 거?”


“이대로 사라져버리는 건 싫으니까, 뭐라도 해 보려는 거야. 방법은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있지. 적어도 그 한 친구는 모든 게 끝난 지금이라도 공정한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그리고 네 형 같은 경우에는···”


“인형을 떠맡기는 게 그런 뜻이었다고?” 사무엘은 물었다.


“본인은 이해했을 거야.” 임프는 말했다.


“그건 다행이네.” 사무엘은 말했다. “나는 이해 못 하겠거든.”


“하, 그 녀석은··· 사람 신경을 일부러 긁는 걸 좋아했거든. 샤— ‘샤덴프로이데’라고 했던가?”


사무엘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였다.


“그래! 이래야지! 샤덴프로이데. 발음까지 완벽했다고.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별것도 아닌 사소한 걸 가지고 사람들을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걸 좋아했을 것 같아서 그래. 그게··· 그 녀석의 장점 중 하나였지. 하여간 뒤가 구린 녀석이었어.”


“아이샤는 장-폴의 뒤가 구린 게 취향이었다네.” 줄리엣이 말했다. “이해했지, 플로?”


플로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쓰레기 같은 녀석들 같으니.” 임프는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었거든? 역겨운 소리 좀 그만하지?”


사무엘은 얼굴이 가려지도록 플로의 스카프를 정리해주고는 그 위로 귀마개를 뒤집어씌웠다. “대충 비슷한 뜻이었겠지. 돌아가면 다른 아이들한테도 전해줄게. 그런 페티시라고.”


“진짜로 그럴 것 같아서 무섭네.” 임프는 말했다. “애초에 너희는 페티시니 하는 걸 어떻게— 아니다. 당연히 알겠지. 추워서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가게 된 건가.”


“물론 추위 때문이겠지.”


가장 체격이 작은 플로는 체력이 떨어진 듯했다. 임프는 그녀를 들쳐메서 업고는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눈은 계속해서 바스락거렸다. 밤이었지만 눈이 달빛을 반사하고 있는 탓에 주위는 마치 방금 해가 진 것처럼 밝았고, 눈이 어둠에 적응했는지 이제는 건물의 윤곽도 비쳐 보였다. 하나같이 실용성만을 중시한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모습의 건물들이었다.


“가족 말고 플로렌스를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만지는 사람은 네가 처음인 것 같네.” 사무엘은 말했다.


“그리 무섭지도 않은걸.”


“무섭지 않다, 라.” 사무엘은 말했다. “한 번은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을 할 때마다 자기 이마를 때리라는 암시를 건 적도 있었어. 경찰관 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자기 입술을 깨물어야 했지. 능력을 각성 못 한 네이선이라는 남동생도 있었는데, 걔는 플로렌스랑 싸운 다음부터 방에 들어갈 때마다 먼저 제자리에서 열 바퀴 돌아야 했고 음식을 한 입 먹을 때마다 100부터 0까지 거꾸로 숫자를 세어야 했어.”


“살이 빠졌죠.” 줄리엣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지.”


임프는 그들의 수다를 무시했지만, 기분은 조금 나아진 듯했다. 샘은 무언가를 말하는 듯했고, 무언가를 말하다가 또 팔꿈치로 얻어맞은 줄리엣은 높낮이 없이 한마디 말을 보탰다.


싸움이 나지 않도록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임프의 눈앞을 순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건물 옥상에 자리를 잡은 한 그림자였다.


“혹시 느껴져?” 임프가 물었다.


“뭐가?” 샘은 물었다.


“안 잡히는 건가.”


“적이야?”


“모르겠는데.” 임프는 대답했다. 그녀는 플로를 내려놓고는 의문의 인물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상대에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썅년.” 임프는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봐.”


그녀는 능력을 억누르고 있던 것을 멈췄고, 그러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의 표정은 혼란스럽게 변했다.


그 모습에 마음은 조금 울적해졌지만, 셋은 그래도 서로 잘 뭉치고 있었다. 원만한 형제자매라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팀이었다. 기지에는 아이들이 더 있었다. 이제는 그들의 그녀의 가족이었다.


그녀는 눈밭을 가로질러 건물 사이의 골목으로 들어섰다. 각도가 달라진 탓에 임프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내리는 눈발을 살피며 그림자가 정말로 거기 있기는 한 건지 다시 한번 확인해야 했다.


몇 분이 걸렸지만, 마침내 그녀는 건물 밖의 비상계단을 타고 옥상에 올라섰다.


쌓인 눈을 발로 차서 치운 그녀는 섀도우 스토커의 흐릿한 형체 옆에 걸터앉은 뒤 능력을 억눌렀다.


그들은 하트브레이커의 세 아이가 눈에 파묻힌 거리를 따라 걸어가는 모습을 잠시 그렇게 함꼐 바라보았다.


“쟤네들을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섀도우 스토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응하며 몸을 날렸다. 임프는 움직이지 않았다. 피할 필요는 없었다. 발사된 화살이 실체를 갖추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고, 여긴 너무 가까웠다.


옥상 건너편까지 몸을 날린 섀도우 스토커는 무기를 겨눈 채 미동도 없이 임프를 노려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임프는 눈이 쌓인 언덕과 나무들로부터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쟤네들을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크게 후회하게 될걸.”


“내가 노리는 건 너였어.” 섀도우 스토커는 말했다.


“더 멍청한 짓이네.” 임프는 대답했다. “쟤네는 평범한 아이들이 아닌 데다 심지어 몇몇은 날 좋아하기까지 하는데. 정말 말벌집을 들쑤시는 짓을 하겠다고?”


“어차피 의미 없는 이야기야. 쏠 이유가 없어서 쏘지 않았을 뿐이었으니까.”


임프는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이 주변에 빌런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우릴 노린다니, 이유가 있는 모양이구나.”


“끝맺지 못한 일이 조금 있거든.”


“혹시 리젠트를 얘기하는 거야? 나랑 리젠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라면 우린 서로 아주 친해질 수 있겠는걸. 서로 매니큐어도 칠해주고, 언젠가 꼭 해보고 싶었던 파자마 파티도 하고, 내가 리젠트가 얼마나 좋았는지 이야기하면 넌 그 자식을 얼마나 죽이고 싶었는지 말하면 되겠지. 방식은 다르지만, 어찌 됐든 실연을 당했다고 할 수 있는 서로를 위로해 주다가, 술이라도 한두 잔 들어간 뒤라면 그때는···”


섀도우 스토커는 석궁을 겨눈 채 미동도 없었다.


“별로야? 흥미 없어?”


“본인한테도 들었나 보지?”


“뭘? 설마! 진짜로 둘이 나 몰래 사귀었던 사이였던 거야?”


“뭐? 아니야!”


“저런. 실망이네.”


“이게 무슨 헛짓거리지? 일부러 날 자극하려고 한다는 짓이 유혹하는 척인가?”


“난 만나는 사람 모두한테 그런 식으로 말해. 네가 재미가 없을 뿐이지.”


“계속 내가 네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말을 건다면 문제가 생기게 될 것 같은데.”


임프는 하트브로큰 세 사람이 자동차 하나 없는 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망할 걸 너도 팔에 달고 있는 건가.”


임프는 팔의 금빛 문양을 내려다보았다. 사이언에 맞섰던 전투의 생존자들이 달고 다니는 표식이었다.


“볼 때마다 표적처럼 생겼다는 생각이 드네.”


“화나나 봐?”


“우리 힘으로 거둔 승리도 아니었는데 뭘 자랑처럼 차고 다니는 거야. 우린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했을 뿐이었다.”


“그 녀석한테 말이지.” 임프는 말했다.


“자기 능력도 아니었잖아.”


“아니, 100% 자기 능력이었는데? 이건 믿어도 좋아. 나는 직접 봤거든.”


섀도우 스토커는 고개를 돌리고는 석궁을 다시 집어넣었다. “됐어. 그럴 가치도 없을 것 같으니.”


“다행이네.” 임프는 말했다. “마지막까지 걔를 얕본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지? 나도 얕보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얕보이고 싶은 마음이야.”


“신경 긁지 마.”


“그렇지만 너무 재밌는걸? 그리고 어떻게 보면 참 일이 멋지게 풀리기도 했잖아. 넌 걔를 끝까지 기억하게 될 몇 안 되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사건의 자초지종도 어느 정도 아는 편이고 말이야. 걔가 샤덴프로이데를 즐기는 부류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면 나름 뿌듯해하지 않을까? 네가 그것 때문에 심통이 났다는 건 덤인 셈 치고 말이야.”


“아니니까 집어치워.” 섀도우 스토커는 말했다.


“‘끝맺지 못한 일’이 있다고 말한 건 어디의 누구였더라? 과거를 잊은 사람의 태도가 아닌 것 같은데? 굳이 따지자면 잊기는커녕 떠올리기만 해도 화가 나서 뭔가 주먹으로 치고 싶어지는 사람의 태도 아닐까?”


“헛소리 집어치워.” 섀도우 스토커는 말했다. “입을 화살로 꿰매버리기 전에.”


“정말 무심하기 그지없는 반응이구나.”


“난 살아있어. 그년과는 다르게.”


“네가 앞으로 온 힘을 다해 남은 인생을 전부 바치더라도 — 물론 넌 시도조차 하지 않겠지만 — 넌 걔가 이룬 일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거야. 계속 이런 식으로 살기나 하겠지. 혼자서 사냥꾼 행세하면서 악당 몇 명 때려잡으면 자기만족이라도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사람들이 너를 기리며 팔에 무늬를 새기는 일 따위는 없겠지.”


“그게 언제부터 히버트를 기리는 무늬였지?”


“누군가에겐 아니겠지.” 임프는 말했다. “각자에게 다른 의미가 있을 테니까. 잃어버린 고향 차원을 기리는 의미일 수도 있을 테고, 극복한 시련을 상징하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나한테 이 무늬는 언제나 테일러를 기리는 무늬일 거야.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겠지. 앞으로 이걸 볼 때마다 넌 테일러를 떠올리게 될 테고, 그 업적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싫어도 생각하게 될 테니까.”


섀도우 스토커는 다시 석궁을 겨눴지만, 임프는 이미 능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섀도우 스토커는 멍하니 서 있다가 석궁을 다시 수납했고, 제자리걸음을 하던 그녀는 돌연 성난 소리를 내지르며 쌓인 눈을 걷어찼다. 허공에 흩뿌려진 눈이 다시 천천히 떨어지는 모습은 하찮기 그지없었다.


풀 곳이 없는 분노였다.


임프는 슬쩍 웃으며 다시 지상으로 향했다.


그녀는 멀리 세워둔 차까지 달려갔다. 사무엘은 조수석 문에 기대 있었지만, 임프는 반대편으로 가라고 그에게 손짓했다.


“뭔데?” 그는 물었다.


“네가 운전해.”


“방법도 모르는데?”


“그럼 배워야겠네.”


“사방이 빙판인데.”


“어차피 사륜구동이고 시간은 오래 걸리더라도 상관없어. 어차피 사람은 감지할 수 있잖아. 부딪쳐봐야 벽이겠지.”


“벽에 부딪히는 건 괜찮고? 뭐, 상관없어. 그런데 왜 이러는 건데?”


“책을 읽고 싶어서.”


“책?”


임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무엘은 마지못해 운전석으로 향했고, 두 어린 여자애는 뒷좌석에 앉았다.


시동을 켜는 데만 몇 초가 걸렸다. 차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임프는 무릎을 양팔로 감싼 채로 담요를 뒤집어썼고, 태블릿을 꺼냈다. 태틀테일에게서 문자가 온 듯했다.


모이자고?


“아이샤의 유산 프로젝트.” 임프는 말했다. “교양 있는 멋있는 슈퍼빌런 되기, 제··· 몇 단계인지 잊어버렸네.”


사무엘이 한 마디를 보탰다. “말하는 걸 보아하니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서 기쁘네.”


“도로에나 집중해, 자식아. 어차피 서두를 생각은 없었어. 리젠트와 임프 2인조가 가졌을 위용을 나 혼자 재현해내는 게 목표였으니까. 그런데 뭘 읽지?”


“‘해저 2만 리’ 어때.” 사무엘은 말했다.


“좋지.” 임프는 태블릿을 내려다보았다. 너무 빨리 시선을 내린 탓에 그녀는 사무엘이 씩 웃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작가의말

* 원작 번역 지침에 따른 공지사항.

“This is purely a fan project and I/we lay no claim to the ideas, characters, or story. The real author is J.C. McCrae, aka ‘Wildbow’, and the original version can be found at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The final chapter of Worm was published on 2013. 11. 19. This is a fan translation.”


"이 번역본은 팬의 작업물이며, 번역자는 이 작품의 아이디어,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자는 'Wildbow'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J.C.McCrae입니다. Worm 원작은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에서 연재되었으며 2013년 11월 19일에 완결되었습니다. 이것은 팬 번역본임을 밝힙니다."



* 표지 출처 : Ari Ibarra (ariirf.com)

팬아트 작가의 사용 허가를 받은 표지입니다.



* 이 작품의 번역은 2인 비영리 프로젝트입니다. 번역자가 번역을 맡고, 편집자가 검수와 업로드를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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