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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르카 님의 서재입니다.

W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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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엘사르카
작품등록일 :
2020.05.08 22:18
최근연재일 :
2022.05.0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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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3,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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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3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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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글자
53쪽

'맹독' 29.7

DUMMY

불편하기 그지없는 하강이었지만, 불편한 정도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 내려가지 않고 남아서 인류를 절멸시키려 드는 개자식과 얼굴을 마주했다면 불편한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통로는 울퉁불퉁했고 곳곳에 튀어나온 부분이 있었다. 코스튬이 긁혀서 찢어질까 봐 걱정될 정도였다. 뒤따라 내려올 사람들을 위해 일부러 마찰을 준 것 같았지만, 조금 더 내려가자 그런 것도 없었다. 터널은 마치 미끄럼틀처럼 매끄러웠다.


나는 발을 단단히 디뎌서 속도를 늦추며 미끄러져 내려갔다. 팀원들도 비슷하게 내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앞서간 팀원들에게 붙여둔 벌레들 덕분에 통로의 경사나 휘어짐을 미리 파악하고 대비할 수 있었지만, 중간중간에는 아예 십 피트가량을 똑바로 떨어지는 구간도 있었다.


개미굴을 연상시키는 구조였다. 좁은 지하 통로가 불규칙적으로 이어져 있었고, 방향이 마구잡이였다.


가장 먼저 터널의 끝부분에 도달한 것은 커프였다. 막다른 길이었고 거기에는 사람 한 명이 있었는데, 커프는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능력을 실은 주먹을 휘둘러 벽을 산산조각내며 거기 있던 사람과 함께 그 너머로 뛰어들었다.


커프가 벽 너머에 있던 방에 돌입한 순간 공격이 날아들었다. 이어서 돌입한 룽과 카나리아 역시 기습당해 룽은 벽에 몰아 붙여졌고, 어딘가로 내던져진 카나리아는 곧 적에게 붙잡혔다.


바로 뒤에 있는 골렘과 충돌할 위험 때문에 멈춰서 상황을 파악할 시간은 없었다. 이대로 미지의 공간으로 뛰어드는 것 외에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아군에게 붙여 둔 벌레들은 주위를 넓게 훑었지만, 적의 정체와 숫자를 파악하기에는 그 숫자가 너무 적었다.


디파이언트의 나이프도 갖고 있지 않았다. 플로렛이 결정으로 뒤덮어 버린 탓이었다. 나중에 끌고 오거나 수정이 분해되길 기다린 다음 중계기를 동원해 들고 올 수는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벌레들을 보내 나이프를 회수하게 했다.


개들을 추스르느라 들어오는 게 늦었던 레이첼은 이제야 돌입하고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사태에 반응하며 개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순식간에 몸집이 부풀어 오른 개들이 그녀와 매복한 적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터널 안에서 미리 능력을 사용해 둔 것 같았다. 덩치가 큰 건 헌트리스였지만, 변이의 속도와 유연성, 대칭성은 바스타드 쪽이 위였다.


한 무리의 적이 두려운 기색 없이 개들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헌트리스에게 둘, 바스타드에게 둘이었다. 벌레들의 감각에 의하면 젊은 남자였다. 아직 최대 크기는 아니었지만, 사람보다는 훨씬 큰 두 마리를 마주하면서도 적들은 주저하는 기색이 없었다.


개들이 이빨을 맞부딪치며 달려들자 적들은 민첩하게 대응했다. 자신감이 가득한 움직임이었다. 두 사람이 헌트리스의 머리를 붙잡아 옆으로 비틀었고, 나머지 둘은 날카로운 이빨을 피하며 바스타드의 앞발을 붙잡아 들어 올리더니 바닥에 내던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룽이 제압당한 것만큼이나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힘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놈들은 급소를 정교하게 노리고 있었고, 한 놈은 개의 근골로는 대응할 수 없는 방향으로 온몸의 무게를 실어 바스타드의 다리를 억지로 벌리고 있었다.


한편 헌트리스는 머리가 붙잡힌 채 바닥에 밀어 붙여져 있었다. 룽을 벽에 몰아붙이고 있는 여자가 개의 주둥이를 짓밟아 내리꽂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전원을 제압한 것이었다. 다섯 명째의 소년이 개들을 잃은 레이첼에게 다가갔다.


나는 억지로 제동을 걸었고, 곧 테오의 육중한 금속 장화가 내 어깨를 들이받았다.


하강하고 있는 건 여전했다. 속도를 늦췄을 뿐이었다. 남은 시간은 몇 초뿐이었다.


“밑에 매복이 있어.” 나는 말했다.


대답은 없었다. 굴착 작업을 하던 사람이 누군진 몰라도, 수직 방향으로 파다가 재질이 달라진 걸 눈치채고는 다시 올라가서 보고하려 했던 모양이었다. 패닉룸으로 들어가려면 그대로 낙하해야 했고, 나는 그대로 추락해 하마터면 레이첼과 부딪힐 뻔했다.


눈앞에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면도를 깔끔하게 한 건지, 아니면 어려서 수염이 안 난 건지 구분이 안 될 나이의 십 대 소년이었다. 그는 소매를 걷어 올린 하얀 셔츠와 검은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고, 금발을 뒤로 넘긴 모습이었다. 나와 골렘의 모습이 나타나자 그는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겉모습도 그렇고, 싸우는 방식도 그렇고··· 컨테사와 비슷한 능력인가?


소년 다섯의 모습은 모두 똑같았다.


룽과 헌트리스는 알렉산드리아가 제압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렉산드리아의 몸을 뒤집어쓴 프리텐더였다. 룽은 지금도 변신을 거듭하고 있었고 개들의 몸은 부풀어 오르고 있었지만, 딱히 경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바스타드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녀석을 제압한 소년은 몸무게 오백 킬로그램의 맹수를 눈앞에 두고도 표정이 태연했다.


그들 뒤에는 사람이 늘어서 있었다.


박사가 있었고, 시베리안을 거느린 맨튼··· 정확히 말하자면 맨튼의 클론도 있었다. 시베리안은 걸리의 목에 발톱을 겨누고 있었다. 53번도 세 사람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우락부락한 몸이 꽁꽁 묶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넘버 맨은 목 부분의 코스튬이 뜯겨 나간 커프의 경동맥에 볼펜을 들이대고 있었고, 구체는 그의 발밑에 있었다.


넘버 맨과 소년 다섯은 확실히 닮아 있었다. 스무 살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았고, 넘버 맨은 셔츠뿐만이 아닌 제대로 된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 펜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위압감이 느껴지는 정장이었다 — 도무지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콜드론이 복제 인간도 만들었던가? 이것도 비상 계획 중 하나일까?


그리고 맨 뒤에는 창백한 얼굴의 두 청년이 책상 위에 눕혀져 있었다. 한 사람은 눈이 있어야 할 자리가 맨피부로 뒤덮여 있었고, 한 사람은 머리에 붕대를 두껍게 감고 있어 얼굴을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위층에서 들은 정보대로라면 이 두 사람이 도어메이커와 예전에 박사가 언급했던 정보계 능력자일 것이었다.


셔츠를 입은 소년이 다가오자 레이첼은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소년은 주먹을 흘려보냈고, 이어진 발차기를 태연하게 잡아채며 레이첼을 바닥에 내던졌다.


필요 이상의 위력이었다.


땅바닥에 내던져진 레이첼이 등을 구부리고 팔을 움켜쥐며 구르는 모습이 보였다. 신음성을 내거나 하진 않았지만, 저렇게 떨어지는 게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확실히 정도가 지나쳤다. 뼈가 부러진 건 아니겠지?


그는 골렘과 나를 마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비꼬는 듯한 웃음이었다.


“우린 적이 아니야.” 나는 말했다.


“나오자마자 공격했으면서.” 알렉산드리아-프리텐더가 말했다. 그녀는 레이첼을 내려다보았다. “아니지, 공격한 건 쟤 하나뿐인가?”


“바스타드가 털을 곤두세우고 싸움에 반응하고 있었어. 먼저 공격한 건 너희들이겠지.”


넘버 맨의 클론이 그녀를 걷어찼다. 잔혹한 행동에 주저가 없었다.


순간 몸에 힘이 들어갔지만 난 반응하지 않았다. 거칠게 착지한 탓에 아직 숨을 고를 필요가 있었다. 일단 정신을 차린 다음에—


“제압하십시오.” 박사가 말했다.


소년이 다가왔다. 얼굴은 비웃는 표정 그대로였다. 정말이지 재수 없는 얼굴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지금까지 태틀테일을 상대해야 했던 사람들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벌레 떼로 그를 덮쳤다.


소년은 눈을 똑바로 뜬 채 벌레 떼 사이로 똑바로 파고들며 거리를 좁혔다. 벌레들은 몸에 쉽게 내려앉지 못했고, 몸에 달라붙은 몇 안 되는 벌레들의 위치도 급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상대는 눈조차 감고 있지 않았다. 나는 벌레들로 시야를 차단하며 등 쪽의 스프레이를 꺼냈다.


그러나 놈은 손바닥을 뻗어 내 손목의 움직임을 막으며 조준을 방해했다. 능력이 시각에서 나오는 게 아니거나, 내 예상 이상으로 예리한 눈을 가진 모양이었다. 청력인가? 아니면 다른 초감각?


예측을 피해야겠지.


스프레이는 벌레들에게도 치명적이었지만, 난 그 빈틈을 노려 상대를 직접 겨누는 대신에 상대와 나 사이, 벌레들로 뒤덮인 공간에 스프레이를 뿌렸다.


물러나게 할 생각이었지만 계획대로는 되지 않았다. 소년은 몸을 낮게 숙이는 동시에 한쪽 발을 위로 휘두르는 불가사의한 움직임으로 내 가슴을 걷어찼고, 이어서 옆으로 몸을 날리며 스프레이와 골렘의 손을 동시에 피했다.


한순간이었지만 내 발이 땅에서 떨어졌고, 다시 디딘 곳은 레이첼의 종아리 위였다. 나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컨테사와 싸웠을 때와 비슷한 결과였다. 모든 게 아주 정확하게 상대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젠장.


쓰러진 나를 골렘이 엄호하고 있었다. 하얀 셔츠를 입은 소년의 움직임은 민첩하고 효율적이었지만··· 잘 보니 컨테사와 동급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컨테사였다면 골렘의 손을 피하면서도 어떻게든 동시에 공격할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기침을 내뱉었다. 여기서 죽어버린다면···


다들 너무나도 어리석은 짓들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게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멈춰.” 나는 벌레 떼를 통해 말했다.


소년은 나이프를 꺼냈다. 손가락 하나보다 짧은 길이의 칼날이었다.


여전히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순간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이 소년은 하빈저였다.


콜드론이 잭이 남기고 간 클론 일부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넘버 맨이 9인방 출신이었어?


아니,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상대는 규격 외의 정보계 능력자였고, 내가 뭘 날리든 피해버릴 게 분명했다.


나는 다시 스프레이를 발사했다. 이번에는 바스타드를 제압하고 있는 두 소년이 목표였다. 피하더라도 손해를 볼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스프레이를 피해 몸을 날리자 바스타드는 몸을 일으켰다. 덩치는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한층 불어나 있었고, 얼굴과 등 곳곳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나 있었다. 녀석의 으르렁대는 소리는 이제 개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늑대가 내는 소리도 아니었다.


적이 둘 늘어난 셈이었지만, 대신에 이제는 바스타드의 도움 역시 받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알렉산드리아-프리텐더는 헌트리스를 집어 들더니 녀석을 우리에게 집어 던졌다. 나와 골렘, 레이첼과 바스타드는 거대한 몸체에 휩쓸리다시피 하며 반대쪽 벽면으로 몰아 붙여졌다.


룽은 지금도 변신을 이어가며 몸집이 커지고 있었고, 그의 목덜미를 붙잡고 있던 알렉산드리아-프리텐더의 손아귀는 이제 간신히 피부를 꼬집는 정도였지만, 그런데도 룽은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룽은 돌연 박사와 맨튼, 넘버 맨과 소년들에게 손을 뻗으며 불을 내뿜었다. 한순간이었지만 화염이 그들을 뒤덮었고, 알렉산드리아는 그를 바닥에 내던지고는 걷어차서 우리에게로 날려 보냈다.


효과는 없었다. 시베리안의 무적 능력 덕분이었다. 오히려 천만다행이었다. 저들이 룽에게 모두 타죽기라도 했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벌인 모든 짓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을 것이었다.


룽은 반드시 주의해야 할 변수였다. 그의 자존심 때문에 일이 틀어질 뻔했던 것도 벌써 두 번째였다.


“우린—” 나는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룽이 알렉산드리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며 내지른 거친 포효 탓에 내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손힘을 풀어낸 게 아니라 자기 목을 찢어발기다시피 하며 벌인 짓이었다. 혈관이 끊어졌는지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룽은 자세를 취했고 알렉산드리아는 그를 마주 보았다. 무술가의 자세라기보다는 맹수가 사냥감을 덮치기 직전의 자세에 가까웠다. 기도가 손상되기라도 했는지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상대를 흉흉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멈춰!” 누군가가 외쳤다.


나도 목소리의 정체를 바로 떠올릴 수는 없었다. 박사 뒤에서 임프가 그녀의 목에 칼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그녀는 시베리안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박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누구라도 움직인다면 목을 그어 버리겠어. 이건—”


그 순간 넘버 맨의 허리춤에서 무언가가 번쩍였고, 우리가 들어온 구멍의 가장자리에 맞고 튕겨 나간 총탄은 임프가 들고 있었던 나이프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무의미한 싸움이라고.” 나이프를 놓친 임프가 말했다.


시베리안이 다가와 박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더 싸울 생각인가.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멍청한 놈들 같으니.


“사이언이 왔어.” 나는 소란이 잠깐 잦아든 틈을 타 말했다.


그 한 마디에 긴박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박사, 넘버 맨, 심지어는 맨튼의 클론까지 모두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여기 모인 집단은 무력으로든, 정치력으로든, 영향력으로든, 정보력으로든 부정할 수 없는 세계 최강이었지만, 그런 그들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애초에 싸워서 이길 생각은 없었다. 이야기를 전할 기회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지금이 그 기회였고, 그러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게 나을 것이었다.


“당신의 말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박사가 말했다. “이전에 함께 일한 적이 있으니 당신의 능력은 존중하지만, 신뢰하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당신은 분명한 위험인물이고, 아직 이 모든 게 암살시도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군요.”


해석하자면 현실부정이었다. 믿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지금 우리 바로 위에서 내려오고 있다고.” 내가 말했다.


“그건—” 박사는 말을 멈췄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 듯하다가도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습니다.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은 그대로니까요.”


이번에는 현실부정보다는 의심에 가까웠다. 어쩌면 조금은 말이 통한 걸지도 몰랐다.


시설 전체가 거칠게 흔들렸다.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박사는 위를 올려다보더니 나를 다시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머리에 무언가를 꽂아 틀어 올리지 않은 모습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좆된 상황이라는 것 말고 달리 무슨 말을 해야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는데.” 나는 말했다. “일단 사티르는 죽었어.”


알렉산드리아는 마치 얻어맞은 것처럼 움찔하면서 반응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티르의 팀도 죽었어. 이 층, 삼 층, 사 층의 실험체들도 전부 죽었거나 지금 죽어가고 있을 거야. 알렉산드리아의 능력이 있을 테지. 내 표정을 보고 확인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알렉산드리아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예전에 들었던 목소리와는 미묘하게 차이가 있었다. “그 기술은 아직 완전히 익히지 못했는데.”


“괜찮습니다.” 박사가 말했다. “믿도록 하겠습니다. 암살시도라면 그 위험은 제가 감수하도록 하죠.”


“암살시도였다면,” 임프가 방 반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은 진즉에 나한테 죽었겠지.”


박사는 그녀를 힐끗 보았다. “그쪽은 누구신지?”


임프는 한숨을 쉬었다.


“아래로 향하도록 하죠.” 박사가 말했다. “윌리엄, 손님들이··· 몸을 추스르는 동안 기둥을 회전시켜주기 바랍니다.”


맨튼은 컴퓨터 화면 앞에 서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몸을 추스른다’라. 자기네들이 두들겨 패서 쓰러트린 주제에.


맨튼이 무언가 장치를 조작했는지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까 느껴졌던 흔들림이 다시 느껴졌다. 눈에 보이는 건 달라진 게 없었지만, 우리가 딛고 선 공간 자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임은 멈췄고, 레이첼이 개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우린 몸을 추슬렀다. 룽은 온몸이 무쇠로 된 비늘로 뒤덮여 있었고, 긴 목과 떡 벌어진 어깨는 인간보다는 괴물에 더 가까워지기 직전인 것 같았다. 그는 발톱 하나로 목을 눌러 상처를 지혈하고 있었다. 인간이었다면 즉사했을 부상이었지만, 재생 능력과 초월적인 내구력으로 버틴 모양이었다.


헌트리스는 옆으로 비켜났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릿한 느낌이 드는 곳에는 나중에 분명 피멍이 들게 될 것이었다. 그전에 죽지 않는다면 말이지.


다시 주위가 뒤흔들렸고, 몸이 기울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는 맨튼이 아니라 사이언일 것이었다. 강철 기둥이 살짝 기울어졌나? 의도적인 공격일까, 아니면 위층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여파일까?


넘버 맨은 커프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주었고, 그녀는 목 주위의 금속을 재구축하며 갑옷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싸움에 대비해 손목과 어깨 부분에 만들어뒀던 무시무시해 보이는 가시들도 다시 회수되고 있었다.


넘버 맨은 태연하게 미소를 지으며 볼펜으로 가시 하나를 살짝 두드렸다. 바이저 아래로 보이는 커프의 표정은 웃음기 없이 싸늘했다.


정장 셔츠를 입은 소년들은 포로와 부상자들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알렉산드리아는 철제 테이블의 다리를 부숴서 정신을 잃은 걸리의 양손을 등 뒤로 고정한 뒤에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죄송합니다.” 넘버 맨이 레이첼에게 말했다. “클론들의 행패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소문과 추측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존재들이라 그런 거겠죠. 저 시절에도 저는 저렇게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일 처리도 더 효과적이었죠.”


레이첼은 그를 슬쩍 흘겨보고는 그대로 지나쳤다.


불안감이 느껴졌다. 위에서 벌어지고 있을 싸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해답이 눈앞에 있었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나는 손을 뻗었고, 나이프는 플로렛의 수정을 매단 채로 내 손안에 떨어졌다.


박사는 방 반대편의 키패드에 무언가 암호를 입력했고, 시베리안은 바퀴 같은 것을 돌려 그 옆의 문을 열더니 두꺼운 철문을 손쉽게 밀어서 열어젖혔다. 클론이라도 시베리안은 시베리안이었다.


열린 문 너머에는 내 팀 전원이 양옆으로 늘어설 수 있을 정도의 복도가 있었고, 박사는 앞장서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양옆의 벽에는 철사로 된 수납장에 약병들이 쭉 늘어서 있었고, 색깔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용물이 없었다. 남은 건 유리병뿐이었다. 약물이 들어있는 몇 안 되는 약병들은 어지러운 색으로 빛을 산란시키며 벽에 거무튀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만 세어 보아도···


일이백 병은 족히 될 것 같았다.


“저희 비축분입니다.” 박사가 말했다. “거의 모두 소진한 상태죠. 사이언을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이 나오길 기도하며 대가 없이 나눠줬습니다. 이제 여기 남아 있는 건 조합이 불안정한 것들뿐이죠.”


“불안정한 게 나을 수도 있지.” 실로 막대한 수의 약물이었다. 양옆의 벽이 빼곡히 차 있었고, 약병의 수를 센다면 족히 수만 병은 될 것 같았다.


“불안정하다는 건 치사율이 칠십오 퍼센트 이상이라는 의미입니다.” 박사가 말했다. “사용 불가능한 53번을 만들어내는 일도 있었죠.”


“그런 거였나.” 나는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각 약병에는 일련번호에 더해 이름으로 보이는 단어 하나가 적혀 있었다. 나는 남아 있는 약병에 적힌 이름들을 읽어 보았다.


아벨. 아바토어. 액세스. 에이스. 이지스. 에어. 알케미. 에일리어스. 알파. 어메이즈···


“많네요.” 누군가가 말했다.


스베타가 들어있는 구체에서 나온 소리였다.


“상당한 수량이지요.” 박사가 말했다.


“전부 사람들에게 실험한 거겠죠?” 스베타가 물었다.


“예.” 박사가 말했다.


“저는 기억해요.” 스베타가 말했다. “꿈에 고향이 나올 때가 있거든요. 저는 어부의 딸이었어요. 지붕이 납작한 오두막들이 있는 곳이었죠. 주황색 벽돌 뒤로 보이는 회색 산들이 아름다웠어요, 푸른 풀밭이 있었고 바다가 있었죠. 집이 좁아서 동생들과 방을 같이 써야 했지만··· 그래도 좋았어요. 마을에는 제 나이에 맞는 남자애가 없었고, 남편감을 찾아 다른 마을까지 가고 싶지는 않아서··· 혼자서 그림을 그렸고, 그러면 마음이 평온해졌거든요. 그림 그리길 좋아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거기서 평온함을 느끼긴 좀 힘들어졌어요. 촉수 때문에 붓이 부러져 버리거든요.”


“저희 때문에 힘드셨겠군요.” 박사는 스베타를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녀는 빠르게 걸어가며 늘어선 약병들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모국어가 기억나지 않아요, 박사님. 엄마 아빠의 얼굴도, 남동생들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요. 꿈결에 스쳐 지나갈 뿐이죠. 정신병원에 있었을 때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꿈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일기장에 쓰려고 허둥대다가 물건을 부수는 게 일상이었어요.”


박사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림이 그렸다는 사실은 기억나지만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도 기억나지 않아요. 당신이 절 잡아갔던 날도 꿈에 나온답니다.”


“저는 아니겠죠. 분명 다른 사람을 보냈을 텐데.”


“네. 저 같은 사람들을 보내서 저를 잡아갔겠죠. 53번. 낙인이 새겨진 괴물. 악마. 귀신. 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 참 다양하더라고요. 폭풍우가 치는 밤이었어요. 저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그들이 와서 절 붙잡아 갔죠. 옛날이야기가 사실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저는 무언가 기억나지 않는 말을 했고, 당신은 절 실험실로 데리고 갔죠. 그 약물이 절 풀어헤쳤어요. 그러고 나서 당신은 절 아무렇게나 버리고 갔죠. 인간으로서 살아가길 원할 정도의, 딱 그 정도의 기억만을 남겨둔 채로.”


“저흰 당신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준 겁니다.”


“그런 걸 바란 적은 없어요.”


“마을이 폭풍우에 파괴되기 직전이었을 수도—”


“만약 물어봤다면 저는 마을과 함께 폭풍을 견디는 쪽을 선택했겠죠.”


“아니면 전염병이나 기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는 건 그것 때문이었겠죠.”


“그래도 저는 맞섰을 거예요. 제 말을 듣고 있지 않은 건가요, 박사님.” 순간적인 분노였다. 구체가 움찔하며 떨렸다.


“지금은 더 급한 문제가 있습니다.” 박사가 말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만약의 경우를 갖고 따질 때가 아니겠죠.”


“따지는 게 아니에요.” 스베타가 말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차분한 목소리였다. “사실이 그렇다는 거죠. 한 번이라도 물어봤다면, 선택할 기회를 줬다면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을 거예요. 몇 년 동안 잠도 못 자고 떠돌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실수로 죽이고, 자기 몸이 멋대로 움직여서 길거리의 동물들을 죽여서 잡아먹는 걸 보면서 살아가느니···”


“이해합니다.” 박사는 그렇게 대답했다.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저를 욕하고 원망하십시오. 지옥에 떨어지게 될 거라고 저주하십시오. 모든 게 끝난 뒤라면 살아서든 죽어서든 모든 죗값을 기꺼이 치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끝을 내는 게 우선입니다.”


“그런 식으로 넘어갈 수 있으리라고, 그렇게··· 그럴싸한 말로 도망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걸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을 때도 문득 울음을 터트리고는 했어요. 몸을 움직일 때마다, 능력이 항상 제공해주는 정보를 받아들일 때마다 자기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떠올려야 했으니까요. 웰드는 온 세상에 인간다운 즐길 거리라고는 음악밖에 없었어요. 맛도 느낄 수가 없었고, 제가 아무리 세게 달라붙어도 몸이 우그러질지언정 감촉은 하나도 느낄 수가 없었죠. 젠틀 자이언트는—”


“묵혀뒀던 걸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읊을 생각인 겁니까?” 박사가 말했다. 한결 더 신경질적이 된 목소리였다.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 말로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말라면서요. 그럼 행동으로 보여드리면 되겠습니까? 지금 당장 수술칼로 제 얼굴을 찢어발겨서, 여러분의 고통을 저도 느끼면 되겠습니까?”


“그런다 한들 저희가 경험한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죠.” 스베타는 쏘아붙였다. “당신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 고통이라고 해 봤자 몇 년이 아니라 앞으로 몇 분 뒤에 사이언이 내려오기만 하면 그걸로 끝날 테니까.”


“그럼 원하는 게 대체 뭡니까?” 박사가 물었다. 이제는 그녀 쪽이 분노하고 있었다.


시설이 흔들렸다.


이윽고 묵직한 굉음이 들렸다. 벌레들의 감각에 의하면 무너진 것은 우리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바로 그 방이었다. 잔해와 녹아내린 금속, 콘크리트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누구의 지시도 없었지만, 우리는 모두 내달리기 시작했다.


“제 이름을 말해보세요, 박사님.” 스베타는 말했다. 뛰고 있지 않은 만큼 목소리는 숨이 찬 기색 없이 평온했다. “기억을 지우기 전의 옛날 이름일 필요도 없어요. 저를 지하 4층으로 보내기 전에 붙였던 이름을 말해보세요. 연구 가치가 있는 실험체들에게는 이름을 붙여준다면서요? 아니면 사이언의 눈을 속이기 위해 저를 아무렇게나 풀어주기 전에 붙였던 이름이라도 말해보세요. 혹시 기억이 안 나신다면, ‘S’로 시작하는 이름이었는데.”


대답은 없었다.


지금은 계획을 세우고 있어야 할 때인데, 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끼어들지는 않았다.


“지하 3층으로 보내기 전에 기억을 지운다고 들었어요. 샴록이 그랬거든요. 한동안은 숫자밖에 없었죠. 기억나신다면 그 숫자라도 말해보실래요? 당신이 나한테 했던 짓들에 의미가 있었다면, 날 사람을 수백 명 죽인 연쇄 살인마로 만들어서 얻은 성과라는 게 최소한 기억에 담아둘 만한 가치라도 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해보라고!”


뛰는 와중에 박사는 헉헉대면서 말했다. “성공이 있으면 실패도 있는 법입니다. 당신의 경우에는 내구성을 제외하면 실험에 아무런 소득이 없었죠. 조합법 하나가 효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었습니다.”


“그걸로는 부족하잖아!”


넘버 맨이 무언가 말을 하려 했다. “놈이—”


“당신 말고!” 스베타가 쏘아붙였다. “당신은 기억하겠지만, 당신이 아니라—”


“놈이 왔습니다.” 넘버 맨이 말했다.


우리는 제자리에 서서 몸을 돌렸다.


복도 입구가 황금빛 광채로 뒤덮여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어째선지 주위를 둘러싼 빛보다 어두워 보이는 한 형체가 서 있었다.


사이언이었다.


그는 두 발로 걸어서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의 눈은 약병들에 향했다.


곧이어 그는 약병 하나를 세심하게 매만지기 시작했다. 마치 호기심이 동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좆된 것 같은데.” 임프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는 뒤로 천천히 물러섰다.


사이언은 양손을 뻗어 약병 하나를 감싸 쥐었다. 약병을 수납하고 있었던 철사가 조각나며 파편이 힘없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사이언의 능력에 의해 절단된 부분들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저것들은 대체 뭐인 건데?” 골렘이 물었다. “약병들 말이야.”


“초능력입니다.” 넘버 맨은 도움이 되지 않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사이언은 끝없이 늘어선 약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빈 약병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번에는 건드리지 않았다.


안에 들어있던 것의 흔적이라도 더듬는 걸까?


이제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걸리라면 땅을 파서 탈출로를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의식불명이었고 어깨에는 내 팔도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박사의 일행과 싸웠을 때나 커프와 부딪혔을 때 당한 모양이었다.


걸리는 애초에 박사를 습격했던 군중의 일원이었으니, 안전상의 이유로 일단 기절시켜 놓은 걸지도 몰랐다.


도어메이커 역시 마찬가지였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박사.” 나는 말했다. “당신은 능력이 없던 거로 기억하는데.”


“없습니다.” 박사는 말했다. “하지만 이능관은 가지고 있죠.”


“그건 무슨 뜻인데?” 나는 물었다. “잠재력으로는 능력을 각성할 여지가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촉발사건을 겪을 수도 있겠죠. 그리고 잠재적인 능력자가 약물을 복용하는 경우에는 변이 확률이 높아집니다.”


“다른 사람한테 하는 건 괜찮고 자긴 안 된다 이거지.” 스베타가 중얼거렸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능력이 좀 더 능력자 본인의 성향과 잘 어우러지는 편입니다.” 박사는 스베타를 무시한 채 말했다. “성격, 욕구, 그런 것 말이죠. 만일을 위해 각성할 여지를 남겨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위급한 상황에 약물을 복용하는 건 언제든 가능하고 말이죠.”


“내가 보기에는,” 룽이 으르렁댔다. 목에 난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은 탓에 목소리가 가늘었다. “지금이 그 위급한 상황인 것 같다만.”


“안 움직이는데요.” 카나리아가 말했다.


“주의가 쏠려 있는 겁니다.” 넘버 맨이 말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에 비하면 저희는··· 먼지만도 못한 존재일 테니까.”


“치유 능력 같은 게 필요해.” 나는 말했다. 사이언은 약병 하나를 더 집어 들더니 이전의 약병과 함께 감싸 쥐었다.


“치유 능력이라는 건 없습니다.” 박사가 대답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서서히 물러섰다. “치유 능력처럼 보이는 능력이 있다면 그건 순전히 우연의 일치입니다. 원래 다른 방면에 집중된 능력을 어쩌다 보니 치유에도 쓸 수 있게 된 것일 뿐이죠.”


“그럼 팅커 능력이라도.” 나는 말했다.


“팅커 능력은 시간이 걸리잖아.” 커프가 말했다.


“대신 팅커 능력이라면 여러 상황에 대처할 수 있어.” 나는 말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이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을지 모르지.”


“그럴 수도 있겠죠.” 박사는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누군가가 촉발사건을 겪었을 때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겠죠.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잠시 의식을 잃게 될 겁니다.”


“내 개들이 태우고 뛰면 돼.”


“일리가 있군요.” 박사는 대답했다. 사이언이 움직임을 멈춘 걸 확인한 뒤부터 우린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촉발사건이 사이언의 주의를 끌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죠.”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우린 확실하게 죽겠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먼저 저 존재와 거리를 벌리도록 합시다.” 박사가 말했다. “일천 피트 정도 떨어진다면 안전할 것 같군요.”


일천 피트? “이 기지가 그렇게 큰 건가?”


“물론입니다.” 박사가 말했다. “윌리엄.”


“박사님.” 맨튼이 말했다.


“시베리안을 여기 남겨두도록 하죠. 피해를 줄 수 있는지 시험해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맨튼이 말했다.


시베리안이 앞으로 나섰다.


맨튼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어딘가 틀어진, 내가 알고 있는 모습과는 다른 행동이었다. 넘버 맨이 클론들이 자기랑 다르다고 불평했던 게 사실이었던 건가.


그래도 당해도 상관없는 누군가가 뒤를 지켜준다는 게 다행이긴 했다.


우리는 등을 돌렸고, 나는 벌레들을 시베리안에게 붙이며 주변을 관찰했다. 벌레들이 흐릿한 감각으로 황금빛 사내를 눈에 담았다.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놈이 약병을 떨어트렸다는 사실은 유추할 수 있었다. 약병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이 조각났고, 내용물이 사방을 적셨다. 놈은 약병 하나를 더 집었다.


곧이어 놈은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양손에 든 약병을 떨어트려 깨트렸다. 이윽고 놈은 허공으로 떠오르며 약병을 더 집어 들기 시작했다.


“여기입니다.” 다음 층으로 내려간 뒤에 박사가 말했다. “지금까지 이걸 찾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적합한 대상을 찾기 위해 컨테사를 보내둔 상태였죠. 이제 남은 건 세 병뿐입니다.”


탁자 위에 원심분리기로 보이는 장치가 있었고, 약병들은 그 안에 들어있었다. 내부의 액체는 거의 완전히 새까맸다.


“왜지?” 나는 물었다.


“안에 무언가 이물질이 섞여 있습니다. 존재는 인간에게 능력을 내리면서 몇 가지 제약을 걸었고, 어떠한 능력도 자신에게 해를 입히거나 정해진 선을 넘지 못하도록 했지만, 이것들에는 그런 제약이 없습니다. 이것들을 마셔서 촉발사건을 겪은 이들은 자기가 본 환상을 잊지 않았습니다. 아이돌른도 그중 하나였죠. 나머지는 대부분 극단적인 변칙 개체가 되어 특별 수용 시설로 보내졌습니다.”


“극단적인 변이 개체.” 스베타가 말했다.


“희석하기 전에는 쓸모가 없습니다. ‘밸런스’를 가져와 주십시오, 넘버 맨.”


“어디 있죠?” 그는 물었다.


“냉장고에 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탁자 위의 약병을 바라보았다. “저희도 몰랐던 미량의 이물질이 극단적인 변이를 일으켰던 적도 있고, 알고 실험을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도 모르는 사이에 이물질이 섞인 약물을 받은 사람도 있겠죠. 저 구체 안의 친구분 같은 경우에는—”


“제 이름은 스베타에요.” 스베타가 말했다. “당신이 붙여준 이름은 가로트였고, 번호로는 1616번이었죠. 그리고 친구라고 부르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박사님. 저는 언제나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하지만, 당신은 이미 너무 멀리 가버린 게 분명하니까.”


“—스베타 양과 같은 예는,” 박사는 말했다. “아주 드뭅니다. ‘밸런스’가 들어갔다면 더더욱 그렇죠. 극단적인 변칙 개체들은 예외 중에서도 예외고, 지구상의 생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양상의 신체적인 변이를 거치고는 합니다.”


“왜지?” 골렘이 물었다.


박사는 넘버 맨에게서 약병을 받았다. 내용물은 투명했다. 그녀는 깔때기와 집게로 맑은 액체를 새카만 액체 쪽으로 부었고, 분명 처음에 두 약병이 모두 가득 차 있었는데도 약병은 넘치지 않았다. 색깔은 서로 뒤섞이더니 짙은 빨간색으로 변했다.


그녀는 약병을 뒤집어서 고무로 된 곳에 꽂았고, 탁자 옆면의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탁자는 자동으로 흔들리며 내용물을 섞기 시작했다. “이 분 정도 걸릴 겁니다. 혼합한 뒤 층이 분리되기 전에 바로 복용하는 게 좋겠죠. 윌리엄? 상황은 어떻습니까?”


“복도를 따라 날아오며 약병들을 부수고 있습니다.”


“남은 시간은?”


“이동 시간을 고려해 볼 때··· 몇 분은 걸릴 것 같습니다. 삼사 분 정도는 걸리겠죠.”


“혼합이 끝나면 도망치도록 하죠.” 박사는 말했다. 그녀는 약병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당신으로서는 이게 최선의 복수일지도 모르겠군요, 스베타 양. 아무리 밸런스를 추가했더라도 어느 정도의 신체적인 변이는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자꾸 밸런스라는 걸 언급하는데.” 나는 말했다. “그건 뭐지?”


“이물질과 반대되는 성질의 무언가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마 존재가 인간이라는 종을 염두에 두고 조정한 능력 또는 능력 복합체일 겁니다. 다른 약물에 밸런스를 섞음으로써 인간성이라는 성질을 보존할 수 있죠. 어느 정도의 신체적인 변이는 발생하더라도,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변이는 막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능력을 마음대로 만들어낼 방법을 찾아낸 건가.” 골렘이 말했다.


“말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박사는 말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여러분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에 대해 들어봅시다.”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였어. 존재에 대한 정보도 필요했고, 사이언을 상대로 이기기 위해서는 도어메이커가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했지.”


박사는 도어메이커를 나르고 있는 하빈저 둘의 모습을 보았다. “원래라면 도어메이커를 콘수와 함께 투입해 안전하게 사이언을 압박할 생각이었습니다. 최후의 수단 중 하나였죠.”


“당신들은 계획이 참 많았지.” 나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원한다면 말해드리죠. 아니면 당신의 질문에 답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정보를 원하십니까, 위버? 어떤 정보가 있어야 저 존재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나는 침을 삼켰다.


“2차 촉발사건에 대해 듣고 싶은데.”


박사는 인상을 찡그렸다. “수많은 사람이 똑같은 걸 질문했었습니다. 피하기 힘든 유혹인 거겠죠. 희망을 버릴 수는 없을 정도로만 일어나긴 하면서도, 누군가는 실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드문 게 2차 촉발사건이니까 말입니다.”


“원리가 뭔데?” 내가 물었다.


“능력이 발현될 때는 언제나 제약이 따라옵니다. 방금 말했던, 지금까지 저희가 이 이물질을 이용해서 우회하거나 피해왔던 그 제약들 말이죠.” 그녀는 탁자를 두드렸다. “탑승자, 그러니까 능력은 숙주를 보호하려고 시도합니다. 숙주가 자기 능력 때문에 해를 입는 것을 막기 위해서 능력의 범위를 투박하게, 일괄적으로 잘라내죠. 존재가 직접적으로 제약을 설정한 능력은 많지 않고, 제약의 정도는 오히려 그런 능력들이 더 심할 겁니다. 2차 촉발사건이라는 건 거기서 비롯되죠. 탑승자가 단독으로 다른 탑승자들과 접촉해 연결을 형성하고, 숙주를 지키기 위해 집단의 정보를 참조해서 제약 일부를 해제하는 겁니다.”


“그럼 다른 파라휴먼이 근처에 있을 때만 2차 촉발사건이 일어난다는 거야?”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상황은 원래 촉발사건과 비슷한 경우가 많죠. 새로 생겨난 능력은 원래 있었던 제약을 무시하게 됩니다.”


교반기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지는 것이 보였다.


“지금까지 강력한 파라휴먼을 여럿 다뤘을 텐데.” 나는 말했다. “2차 촉발사건을 인위적으로 일으킬 방법 같은 건 없는 건가?”


“몇몇 고객분들께 그런 서비스를 제공한 적은 있습니다. 성공한 일이 있는가 하면 그러지 못한 일도 있었죠.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복잡한 계획을 요구하는 만큼 높은 가격을 불렀었습니다. 무모하게 자금을 끌어오려다 죽은 고객분들이 실제로 계획을 실행한 고객분들보다 많았을 정도였죠.”


“일종의 딜레마였습니다.” 넘버 맨이 말했다. “자금이 충분할 정도로 능력이 강한 사람은 굳이 2차 촉발사건을 바랄 이유가 없었고, 반대로 2차 촉발사건이 절실한 사람은 자금에 여유가 있을 리가 없었죠.”


“2차 촉발사건에 대해서 그리 깊이 연구하려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들리는데.” 골렘이 말했다. “왜지?”


“저희에게 필요한 것은 제약이 아예 없는 능력이었는데, 제약을 해제해봤자 얻는 거라고는 제약이 조금 덜 걸린 능력일 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희에게 필요한 건 제약 없이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막대한 이형의 힘, 그리고 그 힘을 담아낼 수 있는 우수한 개인이었습니다.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사용자한테 문제가 있어서는 안 됐죠. 그렇게 해서 얻어낸 게 아이돌른이었지만, 아시다시피 아이돌른에게는 치명적인 정신적 약점이 있었습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박사가 말했다. “사이언은 어디 있습니까?”


“아직 위층에 있습니다.” 맨튼이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멈춰 선 모습이군요. 다시 손에 약병을 들었습니다.”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따라오십시오. 조금만 더 거리를 벌린 뒤에 이걸 마시겠습니다. 운이 따라준다면 탈출할 방법이 생겨나겠죠.”


“나머지 약병들은 어쩌게?” 내가 물었다.


“저 능력들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특별한 능력이라면 분명 도움이 될—”


“약합니다.” 박사는 말했다. “이물질이 들어있긴 하지만 약한 능력들입니다. 예전에 실험했을 때 하나는 공간을 왜곡하는 방어 능력을 만들어냈고, 하나는 죽는 순간 근처의 다른 파라휴먼의 신체와 능력을 지배하는 능력을 만들어냈었죠. 반면에 제가 지금 들고 있는 이 약물은 공격용 능력 혹은 무버 능력을 발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죠.”


“이미 능력을 갖춘 사람이 약물을 마시면 어떻게 되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박사는 말했다. “생수를 마시는 것이나 다를 게 없겠죠. 당연하지만 저희 쪽에서도 가장 먼저 시도했던 방법의 하나였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탁자 위의 약병들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의 능력을 강화할 방법을 찾아서 여기 왔던 겁니까?” 박사가 물었다.


“그래.” 나는 말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도록 하죠.” 박사가 말했다. “방법은 있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트팩을 이용해 계단을 더 빠르게 내려갔다.


계속 아래로였다.


“놈이 옵니다.” 맨튼이 말했다. “달리 움직임을 늦출 방법이 없습니다. 제가— 시베리안이 싸우겠습니다.”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존재가 맞부딪히는 모습이 느껴졌다. 시베리안은 사이언에게 돌진했지만, 사이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시베리안은 사이언의 신체를 깊게 파고들었다. 서로의 몸이 겹쳐진 모습이 마치 유령 둘이 서로 싸우는 것 같았다,


태틀테일의 말이 맞다면 재생 속도가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인 탓에 저렇게 보이는 거겠지.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시베리안은 사이언에게 끔찍한 피해를 주고 있는 셈이었다. 시베리안은 몸을 날리며 사이언의 몸을 그대로 관통했고, 반대쪽으로 착지한 그녀의 뒤로는 번쩍이는 티끌이 뒤따랐다.


“몸을 완전히 겹쳐.” 나는 말했다. “그래야 비축분을 뚫을 수 있을 테니까.”


맨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넘버 맨,” 박사가 말했다. “전에 준비했던—”


“EM 탐지기 말씀입니까.”


“EM 탐지기를.”


넘버 맨은 옆으로 빠지며 모습을 감췄다.


“이제 다 왔습니다.” 박사가 말했다. 그녀는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가 마지막 방입니다. 시설 전체에서 최하층에 있는 곳이죠.”


계단이 보였고, 그 밑의 육중한 철문이 보였다.


“그럼 막다른 길이라는 건가.” 룽이 으르렁댔다.


“씨발.” 임프가 말했다. “씨발, 빌어먹을.”


룽이 발톱으로 바퀴 비슷한 것을 돌리며 철문을 열었고, 그 순간 넘버 맨은 주걱 같은 모양의 긴 막대처럼 생긴 장치를 양손에 하나씩 든 채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맨튼이 장치 하나를 받아 들었다.


시베리안은 사이언과 몸을 겹친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태틀테일의 말대로 신체를 깎아내고 있는 게 맞다면, 초당 일백 파운드 이상의 살점을 삭제하고 있는 셈이었다. 재생 속도에 따라서는 훨씬 더 큰 값일 수도 있었다. 상대의 강점을 역이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이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놈은 가만히 공중에 뜬 채로 사방에 들어선 약병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시베리안의 공격은 아예 인지하지도 못한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가.” 나는 중얼거렸다.


넘버 맨과 박사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넘버 맨은 장치 하나를 조정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거야 당연하겠죠.” 박사는 말했다. “상대는 외계의 존재잖습니까. 인간의 감정 같은 건 보이지 않을 겁니다.”


“천재지변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죠.” 넘버 맨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인간의 감정이 있으니까 위험한 거야. 인간의 감정이 없었더라면 삼백 년 뒤에나 인류를 위협했을 놈이 갑자기 자아를 찾겠답시고 저렇게 날뛰고 있는 거라고. 감정이 없었다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겠지.”


넘버 맨은 장치를 내 머리 근처에서 이리저리 흔들어 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이윽고 그는 자기 자신의 머리 옆에서 장치를 흔들더니 화면을 읽었고, 이어서 박사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는 룽에게도 같은 짓을 하려고 했지만, 룽은 손으로 장치를 쳐 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상대는 외계의 존재입니다. 추상적인 존재죠.” 박사가 말했다. 그녀는 약병을 바라보았다. “만에 하나 저희가 이 싸움에서 이길 방법이 존재한다면, 그 방법이라는 건 분명 추상적이고 이질적인 방법일 겁니다.”


“문이 걸려서 열리지 않는다.” 룽이 말했다.


“기둥이 떨어진 각도 때문에 기지 전체의 구조적 안정성에 문제가 생겼을 수 있습니다.” 넘버 맨이 말했다. “잠시 시간을 주신다면—”


“알고 있습니다.” 박사가 말했다. “이 기지를 설계한 게 당신이었다면 이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겠죠. 하지만 당시에 당신은 신입이었고, 이런 민감한 일을 맡길 수는 없었습니다.”


넘버 맨은 사실관계를 확인했을 뿐이라는 듯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룽이 온 힘을 다해 철문을 밀었지만, 문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이 녀석 받아.” 알렉산드리아가 말했다.


룽은 의식을 잃은 걸리를 받아들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철문을 힘껏 밀었다. 천장이 갈라지며 먼지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구조적 안정성에 문제가 생긴 탓에 문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넘버 맨이 말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천장이 무너질 겁니다.”


“상관없다.” 룽이 말했다. “물러서라. 무너지면 뚫고 갈 테니.”


골렘은 고개를 저었다. “뚫고 갈 수야 있겠지만, 시간이 부족할 거야. 가뜩이나 한시가 급한데.”


박사는 약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부한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말했다. “이해도 못 할 추상적인 무언가 덕분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힘을 통해서 이길 수는 없는 걸까.”


“훌륭한 마음가짐입니다만,” 넘버 맨이 말했다. “당신이 지금 찾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을 겁니다, 위버.”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면 이미 얻었을 수도 있겠죠. 2차 촉발사건을 이미 겪었기 때문에 다시 겪을 수가 없는 겁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연속으로 촉발사건을 겪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의외로 흔한 일이죠. 촉발사건의 충격 때문에 곧바로 2차 촉발사건이 이어지는 겁니다.”


“아니야.” 내가 말했다.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무슨 다른 방법이 있는지는 몰라도 2차 촉발사건은 아닐 겁니다.” 넘버 맨이 말했다. “동료분들을 제가 살펴볼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전에는 컨테사를 통해서 2차 촉발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정확히 어떤 일이 있어야 하는지 파악했습니다만.”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안됐네.” 임프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게 여기에 기대를 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기로 미리 마음먹었었는데도.


박사는 검은 고무로 된 약병의 마개를 딴 상태였다.


그 순간 시베리안이 우리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맨튼이 말했다. “놈의 반격에 시베리안이 당했습니다.”


사이언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는 약병이 늘어선 통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었고, 황금빛 광채가 퍼져나갔다. 한순간의 깜박임이었지만 벌레들의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그 강렬함은 마치 직접 눈으로 보는 것 같았다.


모든 약병이 동시에 산산이 조각났다.


유리와 약물이 어지럽게 떨어져 내렸다. 날개가 젖은 벌레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사이언이 움직이고 있었고, 그의 몸에 닿은 벌레들은 죽어 나가고 있었다.


넘버 맨에 손에 들려 있던 장치가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깨졌습니다.”


깨졌다고?


룽이 불꽃을 만들어 주위를 밝혔다.


박사의 모습이 보였다. 약병을 들고 있었던 손과 목 주변이 피투성이였다.


“박사님, 손이.” 맨튼이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깊은— 깊은 상처는 아닙니다.”


침묵이 흘렀다.


“마시긴 한 거야?” 나는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거의 마시지 못했습니다.”


나는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핥아 먹으면 안 되나?


아니, 그건 불가능했다. 스키드마크였는지 뉴터였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예전에 저 약병을 처음 봤을 때 누군가가 했던 말이 있었다. 일부만 복용하면 안 된다고.


박사도 완전한 능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었다. 반만 마신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능력이 반만 생기나? 왜곡된 능력이 생기나?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좋아.” 내가 말했다. “시베리안··· 문 옆으로 통로를 뚫어줘.”


맨튼은 마치 그 말에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시베리안은 능력으로 암석을 분쇄하며 벽을 뚫기 시작했다. 그 밖의 일행은 계단을 올라갔다. 사이언이 있는 방향이었다.


“얘들아.” 임프가 말했다.


룽이 몸을 틀며 그녀에게 불빛을 비췄다.


임프의 손에는 스베타의 구체가 들려 있었고, 그 구체는 곳곳이 갈라져 있었다. 균열은 빠른 속도로 번지고 있었다.


나는 수정에 뒤덮인 나이프를 꺼냈다. “룽?”


그는 발톱 하나로 나이프를 움켜쥐었고 나는 하마터면 손이 불탈 뻔했다. 수정은 으스러졌고, 나노가시에 발톱이 잘려나간 룽은 신음을 흘렸다.


나는 나이프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고, 분해 효과를 껐다가 다시 켜 보았다.


켜지는 데는 4초가 걸렸다. 어딘가가 막혀서 정비가 필요해진 모양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절반을 뚫었습니다.” 맨튼이 말했다. “무너질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계단 위에서 사이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도망을 칠 곳도 없었다.


“혹시 3차 촉발사건이 있을 수는—” 나는 말했다.


“그런 건 없습니다.” 박사가 말했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없습니다.” 박사가 말했다. “앞으로도 지금 가진 능력이 전부일 겁니다.”


“그런 건가.” 나는 말했다.


“그래도 혼자는 아니네.” 임프가 말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 능력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건 너뿐만이 아니거든.”


계속해서 요동치던 구체는 어느새 깨지기 직전까지 갈라져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체는 끝내 부서지고 말았다.


스베타가 바닥에 떨어지며 촉수가 풀려나왔다. 기다란 촉수가 계단 위로 뻗어 나가며 사이언을 휘감기 시작했다.


“저놈한테만 집중해.” 그녀가 말했다. “안 돼, 제발, 저놈한테만 집중해. 지금 여기에는 나랑 저놈밖에 없어. 우리 둘밖에 없는 거라고.”


다른 사람들은 시베리안이 판 땅굴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레이첼, 임프, 카나리아, 박사의 일행···


“안 돼···” 스베타가 말했다.


박사가 땅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촉수 하나가 피투성이가 된 박사의 손을 휘감았다.


박사는 비명을 내질렀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손을 휘감은 철사 같은 촉수 주위로 피가 배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스베타의 촉수들은 계속해서 풀려나왔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박사를 노리고 있었다.


“누군가 한 사람은 희생해야 했어요.” 스베타가 속삭였다. “사이언 하나에만 집중하게 할 수가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당신을 선택하는 게 최선이네요.”


촉수가 박사의 몸통을 휘감았고, 무자비하게 조여들기 시작했다.


박사는 곧 비명 대신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스베타는 박사를 칭칭 휘감으며 촉수로 완전히 뒤덮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사가 있었던 자리에는 여자애의 얼굴이 달린 번데기 같은 물체만이 남았다. 피가 그 주위에 고여 있었다.


사이언은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물러나지 않고 벌레들로 분신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저번에도 통하지 않았던 방법이었지만, 어쩌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이언은 벌레들을 그저 지나쳐 갔다.


나는 나이프를 들고 사이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휘두른 칼날이 놈의 목을 베었고, 몸통을 헤집고 지나갔다.


엄청난 양의 연기가 피어오르며 시야를 자욱하게 가렸다.


사이언은 나를 옆으로 밀쳐내고는 그대로 문을 향해 나아갔다.


곧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직감한 나는 벌레들을 총동원해 당장 도망치라는 경고를 전했다.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질 정도의 발악이었다.


나는 촉수들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스베타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사실상 패닉 상태에서 막무가내로 저지른 짓이었다. 가느다란 촉수 한두 가닥이 내 팔뚝을 휘감았고, 내 손과 팔은 그대로 으스러지며 곤죽으로 변했다.


새로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팔인데, 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생각했다.


사이언은 철문을 밀어젖혔다. 천장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바로 그 철문이었다.


바로 다음 순간 무언가가 우리를 철문 너머로 거세게 집어 던졌고, 나는 어딘가 부딪혀 즉사하는 꼴을 면하기 위해 제트팩을 급히 가동했다. 그러나 대신 충격을 흡수해준 것이 있었다. 스베타가 촉수들을 거미줄처럼 펼치며 모두의 몸을 받아낸 것이었다.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철 기둥 때문에, 혹은 설계 오류 때문에 손상되었던 기지의 구획 하나가 통째로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자욱하게 피어올랐던 먼지가 내려앉았고, 그러자 눈앞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


사이언이 여기 온 이유.


놈의 짝이었다.


작가의말

* 원작 번역 지침에 따른 공지사항.

“This is purely a fan project and I/we lay no claim to the ideas, characters, or story. The real author is J.C. McCrae, aka ‘Wildbow’, and the original version can be found at http://www.parahumans.wordpress.com. The final chapter of Worm was published on 2013. 11. 19. This is a fan translation.”


"이 번역본은 팬의 작업물이며, 번역자는 이 작품의 아이디어,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자는 'Wildbow'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J.C.McCrae입니다. Worm 원작은 http://www.parahumans.wordpress.com 에서 연재되었으며 2013년 11월 19일에 완결되었습니다. 이것은 팬 번역본임을 밝힙니다."



* 표지 출처 : Ari Ibarra (ariirf.com)

팬아트 작가의 사용 허가를 받은 표지입니다.



* 이 작품의 번역은 2인 비영리 프로젝트입니다. 번역자가 번역을 맡고, 편집자가 검수와 업로드를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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