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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르카 님의 서재입니다.

Worm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SF

완결

엘사르카
작품등록일 :
2020.05.08 22:18
최근연재일 :
2022.05.02 23:5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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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963,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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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0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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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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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글자
36쪽

'고치' 20.2

DUMMY

하긴 일이 쉽게 풀릴 리가 없었다. 드디어 모든 게 정리되나 싶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타이밍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게다가 장소도 고등학교라니.


태틀테일과 그루는 곧 특사들과 만날 예정이었으니 부를 수 없었다. 포레스트는 고등학교에서 어슬렁거리기에는 나이도 너무 많았고 눈에도 너무 띄었다. 리젠트나 임프나 비치는··· 사태를 수습하는 게 아니라 일을 더 크게 벌이게 될 것이었다.


나는 샬롯을 추궁했다.


RT:

지금 보고 있어?


샬롯:

아니요. 여긴 전파가 안 닿아요. 문자 보내려고 나온 거예요.


생각해보니 아르카디아 고등학교에는 패러데이 차폐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학생들이 수업 중에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지 못하게 하기 위한 장치였다.


RT:

뭘 하고 있었는데?


샬롯:

복도에서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 사람들한테 봤냐고 물어보고 다녔고.


샬롯: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물어봤는데 그렇게 잘 아는 사이는 아니라고 말했어요. 그런 사람치고는 너무 끈질기길래 연락한 거예요.


RT:

잘했어.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지시했을 행동 거의 그대로였다.


RT:

에릭이 혹시 금발에 푸른 눈이야? 당장이라도 숨차서 쓰러질 것처럼 말을 하고?


샬롯:

네.


예상대로였다. 그렉이었다.


샬롯:

지금은 쉬는 시간이에요. 곧 돌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계획을 세울 시간은 없었다. 태틀테일과 내가 고안해둔 암호들과 통신법 때문에 귀중한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RT:

혹시 소란을 피우진 않는지 들어가서 확인해 봐. 가능하다면 내가 학교에는 안 왔지만, 나중에 만나겠다고 말해주고.


샬롯:

네.


기다리는 동안 나는 빨래를 마친 매트리스를 위층으로 끌고 올라갔다. 매트리스를 발코니에 내걸기 위해 옷을 차려입기 전에 전화가 한 번 더 울렸다.


샬롯:

갔어요. 수업 시작. 소란을 피운 것 같지는 않아요.


젠장.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아직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RT:

다음 수업이 뭐야?


샬롯:

영어요.


RT:

이제 됐어. 내가 가서 찾아낼게. 필요하다면 부르겠지만 걱정하지 마. 잘 했어.


나는 그렇게 그녀를 수업으로 돌려보냈다. 샬롯을 너무 깊게 끼어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유능한 조력자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죄책감도 적지 않게 느껴졌다. 최악의 시기에 시에라가 그랬던 것처럼 샬롯은 내 빈자리를 메워 주고 있었다. 아빠 집에서 머무르는 나를 대신해 영역을 관리하면서 그녀는 받는 돈의 배 이상으로 일해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돈을 더 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수상해 보일 거라는 말과 함께 그런 제안을 거절했다.


태틀테일을 통해서 장학금이라도 연결해 주면 어떨까. 그럴 자금은 충분했다. 태틀테일은 코일의 모든 자산을 획득한 상태였고, 코일의 여러 가명과 유령회사들도 어렵지 않게 손에 넣은 상태였다. 시내에 있는 차원 간 통로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도시가 살아나기 시작한 덕분에 땅값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특사들이 브록턴 베이에 처음 들어왔을 때 우리에게 보내온 상당한 액수의 현금도 있었고, 그들은 지금도 도시에 머무르는 대가로 우리에게 매달 수천 달러를 내고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게 빌런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관례인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의 영역에 들어올 때는 일을 대신 처리해 주거나 선물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예의 바르게 허락을 구하고 존중을 표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수만 달러를 평범한 선물로 건네줄 수 있다는 건 자금줄이 튼튼하고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였다. 덕분에 우리는 태틀테일이 불평하는 걸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운이 따라준다면 그들과 비슷한 이들이 더 나타날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을 신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운동화와 탱크톱, 그리고 헐렁한 운동복 바지를 걸쳤다. 허름한 옷들은 침대에 펼쳐놓았고, 신분증과 휴대폰과 나이프는 신경을 써서 챙겼다. 나이프는 대놓고 차고 다닐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양말에 끼워 넣고 바짓단을 내려서 숨겼다.


주목을 받지 않고 교실에 있는 그렉을 끌고 나와서 이야기를 나눌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지 못한다면 점심시간까지 기다려야 했고 그랬다간 아빠와의 약속이 미뤄질 것이었다. 곤란한 상황이었다.


버스의 배차 간격은 길었다. 무사한 차량의 수가 적었고 무사한 운전자도 적었다. 도로가 망가진 탓에 시간도 더 오래 걸렸다. 그래도 이십 분 정도면 양호한 편이었다.


나는 혼자서 신경질을 냈다. 예전에도 영역을 떠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거대한 위협을 상대하기 위해서였었다. 고작 이런 일로 영역을 떠난다는 게 생각 이상으로 거슬렸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처리하기 곤란하기까지 했다. 대체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지?


세계 최악의 미치광이들과도 맞서봤고, 불타는 집에 갇혀도 봤고, 눈이 멀었던 적도 있고, 척추가 부러져서 전신이 마비되었던 적도 있고, 정신 나간 팅커한테 살해당할 뻔한 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에, 사람도 내 손으로 죽여봤는데, 고작 학교로 돌아가는 것 때문에 지금 불안해하고 있는 건가.


긴장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예전의 사고방식이 돌아오려 하는 게 느껴지자 나는 그 우스꽝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한낮이었고, 버스는 거의 비어 있었고, 나는 방금 일어난 사람처럼 기지개를 켰다. 사람 한두 명이 나를 힐끗 바라보았지만, 나는 이제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한결 나은 기분이었다. 마치 예전의 짐을 물리적으로 내려놓은 것 같았다.


버스의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나는 숨을 길게 내쉬며 햇빛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서늘한 바람과 따뜻한 햇볕이 어우러졌다. 어차피 가는 도중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 차라리 마음 놓고 쉬는 게 나았다.


아르카디아 고등학교가 보였다. 브록턴 베이 최악의 시기에도 봐 왔던 건물이었지만, 이제는 상당한 노력 끝에 어느 정도 복구가 진행된 모습이었다. 새로 단 창문은 마치 곤충의 겹눈처럼 빛을 오묘하게 반사했고, 중간에 보강재 같은 걸 끼워 넣었는지 육각형 무늬 같은 게 보였다. 교문은 다시 지어져 있었고, 갈라진 곳은 메워져 있었고, 무너졌던 곳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하얀 타일과 햇빛을 받아 빛나는 유리가 깔끔한 인상을 자아내고 있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었다. 수업은 시작된 상태였지만 학생 마흔 명 정도는 밖에 모여 앉아 이야기하거나 휴대폰을 만지거나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옛날 보드워크의 ‘경비’를 떠올리게 만드는 차림의 성인 대여섯 명 정도가 교문과 학교 곳곳의 탁 트인 장소에 배치되어 있었다. 경비원? 자원봉사자인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학생들은 크게 두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 집단은 예상대로 새 옷이나 편한 여름옷을 차려입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집단이었다. 몇 달 전이었다면 그들의 웃음소리가 나를 비웃는 거라고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이성적으로는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줄곧 알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지금의 나는 익명성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사람들이 나를 주목한다는 게, 은밀하게 나를 파악하고 움직임 하나하나를 관찰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실제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반면에 두 번째 집단은, 마흔 명 중에 서른다섯 명 정도가 속해있는 다수 집단은 분위기가 달랐다. 그들은 시에라와 샬롯, 펀과 포레스트였다. 제시와 브라이스, 테일러와 대니 히버트였다. 남았던 사람들이었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새 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지난 몇 주와 몇 달을 버텨오며 해지고 낡은 옷들을 입고 있었다. 그 흔적이 몸에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몇 주 동안 잠을 설치며 생긴 주름, 그리고 몇 날 며칠을 야외에서 보내며 칙칙해진 피부와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중에는 한두 명은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한 명은 대놓고 허리에 나이프를 차고 있었고, 레이첼과 비슷한 건장한 체격의 여자애 한 명은 테이프를 감은 봉 같은 걸 든 채 나무 그늘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콕 꼬집어 말할 수 있는 특징이 있는 건 아니었다. 몇몇 단서와 특유의 분위기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두 집단 사이의 간극을 놓치지 않았다. 다섯 명 정도의 활기찬 이들은 남았던 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있었다.


“지금 온 겁니까?” 교문의 경비원 하나가 내게 물었다.


“네.”


그는 나를 진득하게 살폈고, 그 눈길에 나는 팔과 어깨의 노출과 탱크톱이 배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의식했다. 나는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여유롭게 눈을 마주쳤다. 징그러웠다.


“가진 무기 있습니까?” 그가 물었다.


“네.”


“들어가려면 무장은 해제하십시오.”


무기를 챙긴 건 습관이었을 뿐이었다. 이런 습관이 생긴 게 나뿐만은 아닐 것이었다. 나는 양말에 손을 뻗어 나이프를 칼집째 꺼냈다. 이런 대화가 평범하게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많은 걸 의미하고 있네.


나는 나이프를 건넸다. 말싸움하며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뭐죠?”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적응하는 거겠죠. 전부 안으로 들여 보내야 하는 건지 물어봤지만, 교장 선생이 며칠 정도는 긴장을 풀 시간을 주라고 합디다.”


“긴장을 풀 시간이라.”


그는 나이프를 힐끗 보았다. “아직 제대로 집행하지 않는 규칙들이 많습니다. 중간에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피우거나 수다를 떨고 바람을 쐬는 애들이 많죠. 그리고 저것들은 그리 오래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는 건물 입구 근처의 한 무리를 보고 있었다. 지친 분위기나 경계심이 느껴지지 않는 이들이었다. 일이 꼬이기 시작했을 때 도시 밖으로 도망쳤던 사람들일 것이었다.


나만 보이는 게 아니구나, 라고 나는 생각했다.


“겁먹은 거겠죠. 나나 그쪽한테는 햇볕이 좋은 날이지만, 저것들한테는 거지 소굴 같은 도시 한복판으로 나온 걸 테니까.” 내가 대화를 이어가지 않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들어갈 거라면 사무실을 찾아가십시오. 그쪽에서 수업을 배정해줄 테니까.”


“네.” 내가 말했다. 수업을 들으러 온 게 아니라고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건물 입구 앞에 섰을 때쯤에는 나보다 어린 학생 세 명이 같은 경비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시 질문이 오갈 것이었다.


경비가 있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장 해제를 거부한 학생 두 명도 분명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었다. 이제는 분위기 자체가 뒤틀려 있었고 그들은 어떻게든 그걸 중재하기 위해 힘쓰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아르카디아 고등학교에 딱 한 번 와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고 벌레들을 조심스럽게 활용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학생들이 천 명 이상 돌아다니는 익숙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나는 지금까지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지시했던 벌레들의 움직임을 일부러 억눌러야 했다. 복도를 따라 날아가는 파리 떼가 눈에 띄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바깥에서 봤던 것처럼, 아직 교실에 들어가지 않았거나 쉬려고 밖으로 나온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거나 혼자 서 있었다.


그들에게 길을 물어볼 수도 있었겠지만, 일부러 대화를 피하려 하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건 내 장기가 아니었다. 복도의 교차점마다 배치된 제복 차림의 직원들이라면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길 안내는 벽에 붙어있었다.


나는 벽에 붙어있는 종이를 힐끗 보았다. 문장 부호 없는 짧은 문장 밑에 커다란 검은색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싱입생은 사무실로


이곳이 그래도 어느 정도는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을 거라는 희망이 오타를 보는 순간 조금 수그러든 것 같았다.


벽에 붙어있는 다른 유인물도 눈에 띄었다. 내용이나 제목 때문이 아니라 그 옆의 벽에 마커 펜으로 그려진 낙서 때문이었다.


유인물의 제목은 ‘주변의 동향을 알아두십시오’였다. 낙서가 있는 유인물은 레이첼에 관한 내용이었다. 종이의 모서리가 찢겨나가 있었고 그 자리에는 개가 그려져 있었다. 웃고 있는 개 위에는 ‘알긴 뭘 알아’라는 말풍선이 그려져 있었다.


레이첼의 부하가 한 거라면, 그야말로 어울리는 짓이었다.


나는 이채로움을 느끼며 사무실로 향했다.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윤이 나는 복도는 수백 쌍의 발자국으로 지저분해져 있었고, 밝은색의 게시판과 트로피 전시장은 마치 당장이라도 싸움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듯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경비원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사방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학생 중에는 무기를 휴대하고 있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큰 그림에 나 자신이 미친 영향이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나는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늘 근처 갱들의 세력과 영향력을 체감했었다. 사소한 구석마다 드러나는 것들이 있었다. 벽에는 갱의 표식을 그린 낙서가 있었고, ABB가 가입이나 보호비를 강요할 경우 어디로 신고하면 되는지 동양인 학생들에게 알리는 유인물들도 붙어있었다. 특정 색깔의 옷이나 특정한 표식을 걸치고 다니는 불량한 아이들도 늘 곁에 있었다. 십 대 학생이 노란색 옷을 입거나, 성인이 8번 당구공의 문신을 하고 있으면 거기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었다.


물론 아르카디아 고등학교는 완전히 청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였고 사람들이 어느 정도 긴장을 풀기 전까지는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학교에서 갱의 표식이 눈에 띄지 않는 건 열한 살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제 제대로 된 갱이라고는 우리뿐이었다. 그루, 태틀테일, 비치, 리젠트, 임프, 파리안, 그리고 나. 사람들이 막연하게 두려워하며 거스르지 않기 위해 신경을 쓰는 존재는 이제 다름 아닌 우리였다. 물론 우리는 전에 있었던 이들보다는 나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사람들이 우리를 다른 사람에게 경고해야 할 정도의 위협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벌레들로 느껴본 적도 있었고, 나 자신에 관한 소식을 파라휴먼 게시판과 신문 기사로 접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접해보니 색다른 느낌이었다. 사회 전반의 축소판이라고 여겨지는 고등학교라는 익숙한 장소까지 내 행동의 영향이 닿은 것을 보니 묘한 느낌이었다.


네 명의 학생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가 지금 하는 생각과 그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 사이에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동시에 워드가 여기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그들은 내 얼굴을 보았을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얼굴이 아니라 뒤틀린 클론의 얼굴이긴 했다.


다시 모든 게 꿈 같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학교라서 ‘테일러’로서 생각하게 되는 걸까? 그래서 새삼스럽게 망토들의 세계의 기이함이 더 체감되는 걸까?


학생들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여학생 한 명에게 고갯짓으로 인사했고 그녀는 인사를 돌려주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빨리 일을 마치고 빠져나가야 했다.


사무실에는 학생들이 많았고, 그 이유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망토들이 있는 것이었다. 나는 거의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아다만트(Adamant)와 시어(Sere)였다.


“이봐요!” 탁자 뒤의 여자가 시끄러운 와중에 큰 목소리로 말했다. 사무원이라고 보기에는 위압감이 상당했다. “줄 서세요! 슈퍼히어로 구경은 나중에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일주일 내내 있을 거라고요!”


물론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사무원들은 대충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요청을 받거나 정보를 전해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더욱 앞으로 모여들 뿐이었다.


나는 빙 돌아갈 생각으로 방 반대편까지 건너갔다.


나는 시계를 힐끗 보았다. 10시 40분이었다. 아빠한테서 전화가 오기까지 이십 분 정도 남았을 것이었고, 운 좋게 버스가 와주더라도 제시간에 돌아가기는 힘들 것이었다. 약속을 미루고 점심을 늦게 먹어도 되겠지만, 나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여러분,” 아다만트가 자신감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웰 교장 선생님의 말씀대로 줄을 서 주세요.”


이번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지만 그래도 거기서 거기였다. 느슨한 행렬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사방에서 사람들이 팔꿈치를 들이대거나 밀쳐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인파에 휩싸이는 것을 원래부터 싫어하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다른 불쾌한 기억들도 떠올랐다. 본소우가 내 위에 올라탔던 기억, 그리고 거대한 괴물의 살점 안으로 끌려 들어갔던 기억. 정말로 불편한 상황이었고, 그 불편함에 어느새 주위의 벌레들이 무의식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학교에 다녀서는 안 될 이유 중 하나였다. 무의식적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바람에 눈에 띄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나는 기다리며 아다만트와 시어의 모습을 관찰했다. 아다만트는 당연하게도 금속으로 된 코스튬을 입고 있었다. 금속 고리와 판금이 사슬로 느슨하게 연결된 방어구를 검은 전신 슈트 위에 걸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는 레비아탄 때도 참전했을 것이었고, 소속은 레전드가 이끄는 뉴욕팀일 것이었다. 적어도 예전에는 그랬다는 의미였다. 이제 레전드는 없으니.


시어는 아다만트와 달리 천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마치 사막 유목민 같은 새하얀 로브를 입고 있었고, 그 위에는 세밀한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코나 입의 구멍 없이 하얀 판에 파란 렌즈만을 끼운 가면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멋을 내기 위한 디자인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장갑과 가면 주위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습기였다. 마치 겨울철에 내뱉은 숨결처럼 창백한 수분이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거의 그루를 반전시킨 듯한 모습이었다.


아다만트의 능력에 대해서는 근접 격투형이라는 정도밖에 몰랐다. 반면 시어의 능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몇 달 전에 인터넷에서 그가 깡패 몇 명을 무자비하게 쓰러트리는 영상을 봤던 덕분이었다. 망토 중에서는 손에서 불을 뿜는 이들도 있었지만, 시어의 능력은 그 정반대였다. 그는 과격할 정도의 속도로 주변의 수분을 자기 자신에게 끌어들일 수 있었다. 상대가 갑옷을 입고 있든 포스필드 뒤에 있든 상관없었다. 그의 능력에 당하면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지는 것이었다. 보호국의 여론 형성이 아니었다면 빌런 딱지가 붙었을지도 모를 능력이었다.


나는 그들이 보호국에 남은 이유가 무엇일지 한가한 틈을 타 생각해보았다. 최근 사건들 때문에 별다른 말도 없이 보호국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있었고, 레전드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만약 그럴 상황이 온다면 이 둘과 어떻게 싸워야 할지도 상상해보았다. 아다만트는 사슬로 이어진 갑옷의 형태가 거의 묶어달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시어는 조금 까다로울 것이었다.


“거기 검은 곱슬머리 분, 다음 차례에요.” 가장 가까운 사무원이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주의를 돌리고는 탁자로 다가갔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연락해야 할 사람이 있어요.”


“개인정보를 누설할 수는 없는데요.”


“긴급한 상황이더라도요?”


“중요한 소식을 전해야 한다면 방송을 할 수도 있는데요.”


“아니요. 그건 지금 필요한 것의 정반대예요.”


“정 안 되겠다면 점심시간에 찾으면 되겠죠.”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다른 용무가 없으시다면 지금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데요.”


“수업에 등록하는 절차가 어떻게 되죠?”


“예전 시간표를 알려주시면 거기 맞춰서 배정해드릴 거예요. 핵심 과목의 수업은 교실에서 진행하지만, 기타 과목은 시스템이 조금 달라졌죠.”


“기타 과목이요?”


“수학, 과학, 체육, 그런 핵심 과목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과목이요. 기타 과목은 컴퓨터실에서 수업해요. 과제와 쪽지시험, 그리고 컴퓨터를 이용한 문제풀이를 통해서 진도를 빠르게 나가게 될 거예요. 질문이 있다면 컴퓨터실 앞에 모여 있는 선생님들한테 하면 되고요.”


“2교시에 있는 수업을 전부 알려달라고 하는 건 안 되겠죠?”


그녀는 내게 엄중한 눈길을 보냈다.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건 좋은 생각이 아닐지도 몰랐지만 난 최대한 빨리 그렉을 찾고 문제를 해결한 다음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최선의 경우라면 아빠와 점심도 무사히 같이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렉이 무슨 수업을 들었었지?


그가 스페인어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었지만 몇 년 전처럼 느껴지는 기억이었다.


“세계시사—”


“학년이 어떻게 되죠?”


“10학년이요. 세계시사, 스페인어···”


영어는 아니겠지. 영어는 샬롯도 듣고 있고, 그렉이 거기 있었다면 슬쩍 나와서 내게 또 연락했을 테니까.


“···역사와 음악이요.” 나는 마지막으로 컴퓨터실이 아닐 것 같은 수업 두 개를 지명했다.


“세계시사는 기타 과목이에요. 오늘은 4교시네요. 지금은 역사 수업 시간이에요.”


그녀가 자판을 두드리자 인쇄물이 나왔다.


“이름이나 신분증은 필요 없는 건가요?”


“누가 오고 누가 안 올지 알 방법이 없어요. 일단은 모두 받아들인다는 게 방침이죠. 일주일 동안 최대한 진도를 따라잡으세요. 일주일 후에 전원의 수준을 파악하는 평가가 있을 테니까요. 그 이후에는 우선순위에 따라 수업이 배정될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해지는 게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나는 그녀가 건넨 종이를 받고 사무실에서 나갔다.


일단 컴퓨터실부터, 라고 나는 생각했다. 정말 꺼려지긴 했지만 나는 컴퓨터실의 위치를 찾기 위해 벌레들을 움직였다. 평소의 운수를 생각한다면 키드 윈이 벌레들의 이상 동향을 파악하는 감시체계를 구축해 놓았다든지 하는 이유로 바로 들킬지도 몰랐다.


첫 번째 컴퓨터실은 꽝이었다. 교실로 들어갔지만 아무도 말을 걸거나 길을 막지 않았다. 나이든 교사 하나가 빈자리를 가리킬 뿐이었다.


나는 교실을 가로지르며 학생들의 모습을 살폈다. 여전히 허탕이었다. 나는 뒷문을 통해 나갔다.


두 번째 컴퓨터실에는 엠마가 있었고 그녀의 주위에는 몇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금발로 염색한 머리는 뒤로 모아 한 갈래로 땋아져 있었고 옷은 모두 새것이었다. 그들은 컴퓨터로 동영상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벌써 무리를 끌어들였다는 게 놀랍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런 흡인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교사가 지나간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들었다가 내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녀가 눈을 조금 크게 뜨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걸어서 그녀를 지나치고 있었다. 지금 중요한 건 엠마가 아니었다. 나는 길을 피해 다닐 생각으로 파리 한 마리를 그녀의 가방에 들여보낸 뒤에 교실을 나섰다.


나는 십 분 정도를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시간의 흐름이 예민하게 느껴졌고, 학교와는 관계없는 긴장감이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망할 자식 같으니.


마침내 나는 체육관에서 그를 찾아낼 수 있었다. 체육관은 긴 탁자와 컴퓨터가 배치되어 임시 컴퓨터실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미 시간은 열한 시를 넘은 상태였다. 아빠한테 언제 전화가 올지 몰랐다.


나는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를 본 순간 그의 표정이 변하는 모습은 마치 기대하던 선물의 포장지를 뜯는 어린아이 같았다. 맙소사, 샬롯이 걱정했던 이유가 있었다. 이 자식한테는 은밀함이나 자제력이라는 게 먼지 한 톨만큼도 없었다.


그는 문을 가리켰고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나는 그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문으로 향했다.


적어도 다들 보는 앞에서 ‘스키터!’라고 소리치지는 않았나.


“진짜 올 줄은 몰랐어, 네가—”


감탄과 무절제한 흥분이 뒤섞인 그 모습을 본 나는 접근 방법을 정하고 달려들었다.


“너 지금 나 스토킹해?”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아니,” 그가 말했다. “찾은 이유는—”


계속 말하게 둬선 안 돼. 그랬다간 서로에게 곤란한 말이 나올 때까지 계속 떠들겠지. “그럼 원한이 있는 거겠네. 내가 언제 원수라도 졌나?”


“아니야!”


“넌 나랑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잖아. 네가 내 정보를 집요하게 캐묻고 다녔다고 친구가 그러던데.”


“그런 게 아니었어! 도와주려고 했던 거야!”


도와주려고 했다고?


나는 그가 중요한 내용을 내뱉지 못하게 하려면 질문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곧이어 나는 레이첼을 소환하는 듯한 느낌으로 말했다. “네 도움 따윈 필요 없어.”


“난—”


“오히려,”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런 말을 들으니까 기분 나쁘네.”


“알아!” 그는 지나친 강세를 담아 말했다. 속삭임이라기에는 너무 흥분한 목소리였다. 기분 나쁘다는 말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내 정체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젠장.


“그렉.” 나는 그를 밀어내듯이 한 손을 어깨에 올렸다. “넌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나랑 그렇게 다르지도 않잖아.” 그가 말했다. 이젠 어리둥절한 듯했다.


“어떻게 비슷하다는 건데?” 내가 물었다. 안전한 질문이었다. 그렉이 자신도 능력자라는 고백을 해 오지만 않는다면.


“우리 둘 다··· 사람들이랑 어울리지 못하잖아. 책 읽는 것 좋아하고.” 설득력이 없는 대답이었고, 표정을 보니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한 모양이었다.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상대라서 다행이었고, 생각을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한다는 점은 더더욱 다행이었다. “컴퓨터도 좋아하고.”


적어도 그렉이 심성이 착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 상처가 될지도 모를 말을 피하느라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그가 하려는 말은 간단했다. ‘우리 둘 다 패배자였다’라는 말을 대놓고 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가 조금 더 혼자 허둥대도록 내버려 두었다. 완전히 마음을 무너트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감이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내게는 유리했다.


“넌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나는 강조를 위해서 말을 반복한 뒤에, 재빨리 말을 보탰다. “네가 이러는 바람에 나는 오늘 하루를 망쳤어.”


그는 마치 내가 따귀라도 날린 것처럼 반응했다.


“난 도와주려고 했던 건데.” 그가 말했다.


“난 무서웠어.” 나는 계속해서 그의 양심을 역이용하는 작전을 펼쳤다. 자괴감이 들었다. “갑자기 친구가 원수라도 진 것처럼 날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문자를 보냈다고.”


“그게 아니라···” 그는 말을 흐렸지만 이미 열의는 수그러든 상태였다. 그는 마치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축 처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너라는 걸 알았을 때 든 생각은 네가 화가 나서 날 해치려 하고 있거나, 나한테 이상한 집착이라도 생겨서 스토커가 됐다는 생각이었어.”


표정이 보였다. 공포와 당황이었다.


“맙소사, 그렉—”


“아니야. 이건 그런 게 아니라—” 그는 숨 가쁘게 말했다. 표정을 보니 거짓말이 분명했다. 그런 감정이 적어도 일부는 관여했을 것이었다. “그렇게 빠져 있었던 것도 아니야, 예전에 잠깐, 그것 때문이 아니라—”


“나 남자친구 있어.” 최대한 빨리 말을 끊으려고 하던 와중에 무심코 튀어나온 말이었다.


강아지를 걷어차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렉은 조용해졌고 나는 그 틈을 타 마음을 다잡고 여기서 무슨 말을 할지 계획하기 시작했다.


복도를 걸어가던 남학생 하나가 걸음을 멈췄다. 나보다 키가 조금 작은 빨강 머리였다. 우리 사이의 분위기가 틀어진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괜찮아요.” 내가 말했다. “해결 중이에요. 개인적인 일이죠.”


“그게—” 그렉은 말을 하려 했다가 남학생을 보며 말을 멈췄다. 아무리 그렉이라도 낯선 사람 앞에서 말을 내뱉을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남학생은 우리를 번갈아서 보더니 내게 묘한 눈길을 보냈다. 그가 도시에 남아 있었던 쪽이라는 것은 힐끗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나 다른 몇몇 사람들과는 달리 햇빛은 그다지 쐬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지난 몇 달 동안 집이나 대피소에 틀어박혀 있었을지도 몰랐다. 실내에 있는 게 가장 안전했을 것이었다.


그도 나를 보며 그런 것들을 느끼고 있을지 몰랐다. 물론 내게는 지켜야 할 비밀이 있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그래도 고마워요.” 나는 그가 무언가를 알아내기 전에 재빨리 그렇게 말했다.


최대한 친절하게, 빨리 갈 길이나 가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걸음을 옮겼다.


“그렉,” 내가 말했다. “나는 널 해치고 싶지도 않고 적이 되고 싶지도 않아. 지난 몇 달 동안 여긴 아수라장이었어. 넌 도시 밖으로 나가 있었지?”


“그랬지.” 그는 그렇게 말했다가 말을 멈추고 눈을 피했다. “도시의 가장 끝자락에 있었어. 캡틴스 힐의 반대편에.”


여기랑 거기 사이에는 산 하나가 있을 텐데, 라고 나는 생각했다. 사실상 도시 밖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의미였다. 브록턴 베이의 일부라고 치기도 어려운 지역이었지만, 그렉이 그곳도 ‘도시 안’이라고 생각해왔을 이유는 짐작이 갈 것 같았다.


“그럼 도시 밖이었네.” 내가 말했다. “상관없어. 오히려 그게 똑똑했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넌 여기가 어땠는지 잘 모를 거야. 이제 내가 바라는 건 평화와 안정뿐이야. 이번에 가까스로 살아남으신 아버지랑 같이 지내고 싶어. 갈등도, 소란도 원하지 않아.”


“난 도와주려고 그랬던 거라고!” 그가 항의했다.


“그렉—”


이번에는 그가 내 말을 끊었다. “내가 알아냈다면 다른 사람도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나는 어깨너머로 뒤를 돌아보며 엿듣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초파리 몇 마리가 로커에서 나와 모서리 너머를 확인했다.


“그렉, 네가 지금 알아냈다고 생각한 게 뭔데?”


“너 스키터잖아.” 그가 속삭였다.


“아니야, 그렉.” 내가 조용히, 침착하게 말했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네가 어떤 사람인지 추측하고 있는 걸 봤어. 그걸 보고 나도 스키터가 현실에서 어떤 사람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 딱 느낌이 온 거지.”


이건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말 중에서 가장 끔찍한 말이었다. 아예 불가능한, ‘나도 능력자고 네 머리카락의 유전자를 써서 네 아이를 임신했어,’ 같은 소리를 제외한다면.


“지금 느낌 하나 가지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거야?”


“느낌만이 아니야. 전부 맞아떨어진다고!”


“오늘은 아빠랑 같이 있을 생각이었어.” 내가 말했다. “그게 오늘 하루의 유일한 목표였다고. 이 지옥 같은 도시에서 몇 달을 보내고 나서 이제야 긴장을 풀고 편히 쉬나 했는데, 지금 추측 하나 때문에 날 끌어들인 거야?”


“다 맞아떨어진다고. 나이, 위치, 성격, 그리고 학교에서의 그 촉발사건도—”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촉발사건?”


“그래, 그때—”


“그게 뭔데?” 내가 물었다.


그는 내 대답을 해석하려는 듯이 말을 멈췄다. 무의식적으로 설명을 시작하려는 듯 열의가 잠깐 샘솟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그 열의는 바로 모습을 감췄다.


“모르는 척하는 거지?” 그가 말했지만, 이미 자신감은 꺾여 있었다.


“우리 아빠가 다친 게 망토들 때문이라는 건 알고 있는 거야?” 내가 물었다. “두 번이나 입원하셨어. 첫 번째는 섀터버드, 두 번째는 시청에서의 폭발이었지. 난 초능력이라면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아. 다른 이야기는 해도 슈퍼히어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


젠장. 아빠까지 동원해서 상대를 속이다니, 사기꾼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망토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이 이야기도 못 하잖아.”


“내가 빌런이라는 이야기 말이야? 좀 모욕적이지 않아? 아니야, 그렉. 유감이지만 네가 틀렸어.”


“하지만 신체 비율이, 겉모습이—”


“틀렸어.” 내가 말을 반복했다. 동정심이라면 이미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말에 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 맞아떨어졌었는데.” 그가 작게 말했다.


과거형이었다. 이미 내가 의도했던 대로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빠르게 빠져나가서 아빠를 만나는 것뿐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가만히 서서 그렉의 대답을 기다렸다.


“미안해.” 마침내 그는 말했다.


“넌 나쁜 놈은 아니야, 그렉.” 내가 말했다. “네가 바랐던 사람이 아니라서 미안해.”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조심해. 학교 잘 다니고. 언젠가 다시 보자.”


“아버지가 건강하셨으면 좋겠네.” 그가 말했다.


“고마워.”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 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속였다는 사실과 속인 방식 양쪽 모두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다른 선택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 내가 순순히 모든 걸 인정하고 경고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기라도 할 걸 기대했나?


아마 그랬을 것이었다.


나는 학교 정문으로 향했다. 기분은 최악이었지만 이제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위급상황은 처리한 것이었다. 샬롯한테 문자를 한 통 보낸 다음 아빠랑 만날 생각을 하면 될 것이었다. 당장 떠나고 싶었다. 내가 이곳에서 얻을 거라고는 부정적인 생각밖에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테일러가 된 느낌보다는 엠마가 된 느낌이 더 강하다는 점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엠마가 건물 입구 앞에 새 친구들과 무리 지어 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옆으로 돌아서 계단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문제는 교문이었다. 낮은 담벼락이 학교 전체를 두르고 있었고, 주목을 받으면서까지 뛰어넘고 싶지는 않았다. 주차장 쪽의 출구는 내가 지금 가려는 방향의 반대 방향에 있었고,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도망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 걸지도 몰랐다. 적당히 피해 가는 거라면 몰라도 오 분이나 십 분쯤을 지체하며 한 블록을 통째로 돌아가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교문으로 향했다.


엠마는 나를 보고는 중간에 끼어들었다. 빌어먹을 년. 당연히 일을 벌이겠지. 쉽게 풀리는 법이 없다니까.


그녀는 나와 교문 사이에 섰다. 그녀는 거의 장난스럽기까지 한 움직임으로 내가 방향을 트는 것에 맞춰 오른쪽으로 갔다가 왼쪽으로 다시 돌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멈췄다.


“이것 봐라, 이것 봐라.”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이 상황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 듯했다. “날 피해 다니려던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짜증에 벌레들이 순식간에 반응하는 것이 조금 무서웠다. 머릿속의 절반은 싸우라고 말하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무시하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벌레들은 싸우라는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무시하라는 목소리는 의식적으로 힘을 보태줘야 효과가 있었다.


진정으로 내 증오를 산 사람은 이 세상에 몇 명 되지 않았다. 그중 마지막 한 놈에게는 머리에 총알을 박아줬었다.


하지만 엠마는? 그녀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 점이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작가의말

* 원작 번역 지침에 따른 공지사항.


“This is purely a fan project and I/we lay no claim to the ideas, characters, or story. The real author is J.C. McCrae, aka ‘Wildbow’, and the original version can be found at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The final chapter of Worm was published on 2013. 11. 19. This is a fan translation.”


"이 번역본은 팬의 작업물이며, 번역자는 이 작품의 아이디어,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자는 'Wildbow'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J.C.McCrae입니다. Worm 원작은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에서 연재되었으며 2013년 11월 19일에 완결되었습니다. 이것은 팬 번역본임을 밝힙니다.



*표지 출처 : Ari Ibarra (ariirf.com)

팬아트 작가의 사용 허가를 받은 표지입니다.



* 이 작품의 번역은 2인 비영리 프로젝트입니다. 번역자가 번역을 맡고, 편집자가 검수와 업로드를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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