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엘사르카 님의 서재입니다.

Worm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SF

완결

엘사르카
작품등록일 :
2020.05.08 22:18
최근연재일 :
2022.05.02 23:55
연재수 :
304 회
조회수 :
205,371
추천수 :
11,292
글자수 :
4,963,018

작성
20.11.06 18:41
조회
479
추천
38
글자
36쪽

'재앙' 19.6

DUMMY

클론 아이돌른의 주된 관심사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완전무장한 히어로 군단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자신이 알몸이라는 게 더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가 알렉산드리아를 건드리자 그녀의 몸이 깜박였다. 깜박거림이 잦아들자 그녀는 코스튬을 입고 있었다. 긴 망토와 보디슈트는 흰색이었고, 굽이 높은 구두와 팔꿈치까지 오는 장갑이 있었다. 멋들어진 헬멧 뒤로 긴 머리카락이 흘러나왔고, 가슴에는 무너진 탑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폐허가 된 등대였다. 색이 반전된, 원래의 알렉산드리아를 조롱하는 모습이었다.


저 깜박거리는 능력이 불길했다. 치료에, 코스튬까지···


아이돌른의 클론이 다른 무언가를 하기 전에 레전드가 그에게 레이저를 발사했다. 아이돌른의 가슴을 꿰뚫고 지나간 레이저가 에키드나의 다리 하나를 찢어발기며 그녀를 주저앉게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론이 하늘로 떠올라 레전드를 가로막았다. 그가 광선의 궤도를 바꾸자 알렉산드리아도 따라 움직여 광선을 막았다. 레전드가 광선을 두 갈래로 나눠서 공격하자 클론은 그에게 달려들었다. 레전드는 등을 돌려 도망쳤다.


에키드나가 우리에게 돌진해왔고, 아이돌른은 깜박거리며 몸을 복구했다.


우리 측의 전선은 어떻게든 에키드나의 움직임을 늦추려 노력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너무나도 커진 에키드나는 이제 자동차도 짓밟거나 튕겨내며 지나갈 수 있었다.


슈발리에가 그녀를 정면으로 가로막았다. 그가 한쪽으로 내뻗은 캐논블레이드가 점점 커지는 모습이 보였다.


둘 사이의 거리는 일백 피트 정도였고, 이젠 칠십오, 오십—


그의 검도 계속해서 커지고 있었다.


그는 칼날을 내려 지면에 가져다 댔다. 날카로운 칼날이 도로에 깊숙이 박혔고, 칼끝은 에키드나를 향했다. 그 상태로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지면에 단단히 박힌 칼날 덕분에 반동을 감당할 수 있었고, 거대한 포신만큼 포탄의 파괴력도 대단했다.


에키드나는 쏘아져 나온 포탄을 피해 옆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완전히 피하기에는 속도가 모자랐다. 여덟 개의 다리 중 세 개가 핏덩이로 변해 흩어졌고, 몸 한쪽의 다리를 전부 잃은 그녀는 지면을 따라 미끄러지며 계속해서 육박해왔다.


슈발리에는 자신을 덮쳐오는 에키드나의 모습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에키드나가 미끄러져 오는 궤적을 가만히 기다렸다가 다시 포탄을 발사해 다리 몇 개를 더 산산조각냈다. 포탄의 충격이 그녀를 막아 세웠고, 그녀는 다리 두 개만이 남은 채 빙 돌아 등을 돌린 자세로 멈춰 섰다.


여성 히어로 하나가 에키드나에게 얼음 결정 몇 개를 집어 던졌고, 결정들은 그녀에게 닿는 순간 폭발적으로 부풀어 올라 빙하처럼 거대해졌다. 에키드나가 재생할 공간을 줄이기 위한 것일 수도 있었다.


슈발리에는 땅에 꽂혀 있던 길이 이십오 피트의 검을 뽑아서 노엘, 그러니까 에키드나의 등에 돋아난 인간의 상반신을 향해 휘둘렀다. 노엘의 몸이 괴물로부터 잘려 나왔고, 그는 칼을 비틀어서 검신으로 그녀의 몸을 받아냈다. 이어서 그는 칼을 옆으로 휘둘러서 노엘을 멀리 날려 보냈다.


날아가서 땅에 부딪힌 것만 해도 치명상을 입었을 법한 충격이었지만, 노엘은 죽지 않았다. 그녀는 끈질기게 미약한 발버둥을 이어갔지만, 곧 몸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슈발리에는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하려 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아이돌른, 그리고 자원해서 싸우러 온 망토 열일곱 명이었다. 포탄도 같은 의도로 발사했던 걸까? 갇힌 사람은 다치지 않도록?


슈발리에가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그에게 다시 공격이 날아왔다. 불타는 손과 무적의 몸을 갖춘 클론이 그에게 뭔가를 던지고 있었다. 길가에 세워진 자동차를 뜯어낸 다음 녹아내린 금속을 집어 던지는 것이었다.


그는 갑주에 묻은 금속을 긁어냈지만,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누군가가 돌을 던졌고, 평범하게 날아오던 듯한 돌은 얼음 망토가 만들어낸 빙하 하나를 통째로 산산조각냈다.


나도 벌레들을 들여보냈다. 내 주변으로 벌레들이 흘러넘치며 빙하와 망토들 사이사이로 움직일 길을 찾아냈다. 바퀴벌레가 눈의 점막을 물어뜯었고, 말벌이 주요 혈관 근처의 살을 물어뜯었다. 독침이 민감한 점막을 노렸고, 개미들이 최대한 효율적으로 살점을 뜯어내기 위해 힘을 합쳤다.


더 많은 벌레가 클론 아이돌른의 방향으로 향했다. 그러자 날벌레들이 돌연 힘을 잃고 주춤하더니 날지 못하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질식이었다. 진공 상태였다.


아이돌른이 능력을 정한 모양이었다. 그는 본체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코스튬을 입고 있었다. 검은 후드와 헐렁한 긴 소매가 달린 검은 코스튬이었고, 코스튬의 틈새마다 창백한 주홍색 광채가 새어 나왔다.


깜박거리는 저 능력은 스케이프고트의 능력과 같은 원리인가? 범위가 더 넓은 건가? 원하는 상태를 직접 검색할 수 있나? 다치지 않은 상태, 옷을 입은 상태처럼?


좋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저 능력으로 자신이 내려받은 능력도 조작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그는 걸음을 내디디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비행보다는 부유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거기에 더해 주변에 진공이 있는 걸 보니··· 기류 조작이었다. 공기를 조작하는 것이었다.


미스 밀리샤의 총격이 아이돌른에게 명중했고 총에 맞은 그가 비틀거렸다. 그러나 그의 몸이 깜박였고, 그러자 그는 총에 맞지 않은 상태가 되어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총기의 종류를 바꾼 미스 밀리샤가 양손으로 돌격소총을 쥔 채 그를 향해 난사했다.


처음에는 명중이었다. 아이돌른은 방어구로 총탄을 막아내며 깜박임으로 피해를 되돌렸다. 하지만 서서히 총탄이 빗나가기 시작했다. 급소를 향하던 총탄이 점점 몸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나중에는 완전히 빗겨나가기 시작했다.


총탄의 궤도가 바뀐 이유는 바로 다음 순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아틀라스의 날개가 갑자기 양력을 상실하는 것이 느껴졌다가, 바로 다시 공기가 돌아왔다. 곧이어 갑작스러운 맞바람이 나와 아틀라스를 덮쳤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고도를 높이며 아이돌른 클론과의 거리를 벌렸다.


벌레들 덕분에 효과의 범위는 파악할 수 있었다. 폭풍의 범위는 내 능력 범위의 사 분의 삼 정도였고, 분명 기류의 움직임을 통해 사람들의 위치 또한 감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진공의 범위는 그를 중심으로 일백 피트 정도였다. 그는 숨을 쉬기 위해서 얇은 실처럼 압축한 공기를 마스크 안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다른 클론들도 진공에 피해를 받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쓰러지거나 서둘러 도망치는 클론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돌른은 피아를 가리지 않고 있었고, 그것이 그를 훨씬 더 위험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클론들과 싸웠던 지점에 접근하고 있었다. 부상자가 많은 곳이었다. 진공에 휩싸인다면 오래 견디지 못할 사람들이었다. 정확히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중상자는 작은 충격만으로 생사가 갈릴 수 있었고 이건 작은 충격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레이첼!” 내가 외쳤지만, 폭풍 때문에 아무도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상관없었다. 내 벌레들은 하나 된 목소리가 아닌 수백 명의 귀에 속삭이는 수만 갈래의 목소리가 되어 날갯짓했다. “레이첼! 와서 부상자를 대피시켜! 다른 사람은 물러나세요! 팀원을 데리고 물러나세요! 진공으로 둘러싸여 있어요!”


땅을 박차고 달려나간 히어로들이 서둘러 부상자들을 대피시켰다. 레이첼은 전장 외곽의 클론들을 막고 있었지만, 내 명령을 듣고는 이쪽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그 클론들은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클론들이었다. 쿠즈 몇 명이 보였고 손이 불타는 남자는 없었다. 클론이 빠져나간다면—


나는 얼음 능력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에키드나 주변에 더 많은 얼음을 깔고 있었지만, 바람 때문에 결정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클론을 막기 위해 도움이 필요해요. 이쪽으로 와주세요.”


내 벌레들이 방향을 가리켰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슈발리에에게 뭔가를 소리쳤지만, 목소리는 전해지지 않았다. 그녀는 내 지시에 따라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날아갔다.


슈발리에의 부하인 모양이었다. 나는 슈발리에에게 말했다. “당신 쪽의 얼음 망토가 클론을 상대하러 갔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적어도 뒤를 봐주던 그녀가 다른 곳으로 갔다는 건 인지했을 것이었다.


사람들의 속도가 너무 느렸다. 게다가 몸 성한 사람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 쓰러진 사람은 열 명 중에 서너 명 정도였지만, 혼자서는 옮길 수 없는 부상자도 많았고 테크톤 같은 경우에는 평범한 힘으로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이돌른은 위험한 거리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레이첼이 부상자를 향해 달려오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혼란에 빠졌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부상자 옆에 멈춰 서서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개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괜찮아요.” 내가 전했다. 하지만 아이돌른의 기류 탓에 소통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구출 작전이에요.”


개들은 그녀의 명령을 따른다기보다는 벤틀리의 행동을 따라 하고 있었다. 아직 훈련이 부족한 녀석들이었고, 일이 있을 때마다 데려오지 않는 이유가 있는 녀석들이었다. 이러다가 히어로가 죽기라도 한다면 좋게 보이지 않겠지만, 애초에 부상자를 옮기는 것 자체가 커다란 위험이었다. 응급처치 교습에서도 부상자를 절대로 옮겨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었다.


물론 이건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죽을 게 거의 확실한 장소로부터는 어떻게든 빼내야 했다.


레이첼이 부상자를 구출한 덕분에 아이돌른 클론의 범위 안에는 쉬운 표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공세를 멈추고 에키드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를 뒤덮었던 얼음은 압축된 기류에 의해 부서지고 깨져서 파편을 사방에 날리고 있었고, 그 파편들이 다시 기류에 휘말리며 얼음을 깨트리는 데 힘을 보태고 있었다. 얼음이 점점 더 갈라지자, 에키드나는 남은 두 다리로 몸을 일으켰다.


얼음 조각으로 뒤덮인 다리의 잔해가 점점 재생하고 있었다. 근육과 뼈가 자라나며 살점이 부풀어 올랐고, 뼈가 살을 뚫고 나오며 발톱과 외피로 자라났다.


노엘의 몸도 다시 생겨난 상태였다. 그녀는 팔로 자신의 상체를 감싸 안고 있었고, 눈을 감은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슈발리에가 아이돌른을 향해 포탄을 발사했지만, 포탄은 공중에서 휘어지더니 에키드나에게로 향했다. 자라나는 중이었던 에키드나의 말단 하나가 파괴되었지만, 그 말단을 붙잡고 있던 얼음도 깨져서 부스러졌다.


아이돌른이 슈발리에에게 압축된 기류를 발사해 그를 날려 보냈다. 아이돌른의 범위 안에 있는 대기가 공기저항을 줄이는 형태로 움직이며 그를 더욱 멀리 데려갔다.


슈발리에가 내 범위 밖으로 날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땅에 닿기도 전이었다.


레전드와 알렉산드리아는 상공에서 계속해서 싸우고 있었다. 범위 안에 들어올 때마다 느낄 수 있었다. 레전드는 오래 날수록 빨라지고 있었고 덕분에 알렉산드리아와 거리를 벌릴 수 있었지만, 공격하기 위해 비행을 멈추면 바로 알렉산드리아가 거리를 무섭게 좁혀왔다.


결과적으로 레전드는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급선회할 때를 기회 삼아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대부분의 공격을 피했지만, 그녀가 레이저를 맞을 때마다 레전드는 그 틈을 타 거리를 벌리거나 멈춰 서서 빠져나가려는 클론들을 처치했다.


클론이 하나라도 빠져나간다면 재앙이었다. 원본의 가족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고, 무고한 민간인이 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내 벌레들이 클론들의 시야를 빼앗고 약점을 노리며 공격하고 있었지만 내 벌레들로 어찌할 수 없는 클론들은 레전드에게 맡겨야 했다.


미르딘은 에키드나를 가두느라 힘을 소진했는지 레전드와 알렉산드리아보다 낮은 곳에서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하늘로 떠올라 에키드나와 아이돌른 클론을 뒤에서 덮쳤다.


그가 지팡이를 아이돌른에게 겨누자 클론이 모습을 감췄다.


클론이 압축했던 공기가 한꺼번에 팽창하며 미르딘을 멀리 날려 보냈다. 에키드나도 쓰러져 굴러가며 주차된 자동차 몇 대를 깔아뭉갰다. 일단 진공은 사라진 것이었다.


미르딘이 지면에 내려앉았다. 에키드나와 클론들에게 능력을 쓰지 않는 것으로 보아 힘이 떨어져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아이돌른의 클론이 몸을 돌려 미르딘을 보았다. 아이돌른이 미르딘을 진공 범위 안에 가두기 위해 접근하며 전투가 펼쳐졌다. 클론은 맞바람과 돌풍으로 미르딘의 비행을 방해했고, 미르딘은 공격을 피하거나 막아내면서도 아이돌른을 지면 근처에서 빨아들인 잔해와 에너지 폭발로 아이돌른을 거침없이 공격했다.


에키드나의 상처가 아물고 있었고, 우리는 슈발리에가 이탈하고 주요 전력 대부분이 무력화된 상태였다.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


팅커 하나가 지면에 기계들을 설치해 놓은 상태였다. 포스필드가 겹겹이 펼쳐져 있었고, 팅커와 에키드나 사이에는 다섯 겹의 장막이 있었다. 그의 능력은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에키드나의 전력을 다한 공격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적어도 벌레들에 의하면 건드리기만 해도 치명적인 포스필드였지만, 에키드나에게는 약간 거슬리는 수준을 넘지 못할 것이었다.


클론들을 처치한 얼음 능력자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에키드나 주위로 더 많은 빙벽을 세웠지만, 상처를 회복한 에키드나 앞에서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더 강한 게 필요했다.


나는 주위의 부상자들을 둘러보았다. 구출된 이들도 있었고, 죽거나 다친 그대로 쓰러져 있는 이들도 있었다. 웰드가 키드 윈과 스케이프고트를 들고 있었고, 거구의 망토가 테크톤을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부족했다. 이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가 진짜 종말초래자라도 되지 않는 한 노엘을 육탄전으로 저지할 수는 없었다.


만약 흡수하는 게 가능하다면 오히려 에키드나가 레비아탄이나 시무르그를 상대로 근접전에서 우위를 점할지도 몰랐다.


두려운 생각이었다.


주변에 있는 망토들은 모두 낯선 사람뿐이었다. 붉은 번개를 뿜어내는 여자가 있었는데, 벼락에 맞은 아군들은 다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속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적은 있는 것 같았지만 누군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소년도 있었다. 나타나서 부상자를 붙잡은 다음 사라졌다가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다시 나타나는 식이었다. 순간이동은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일 뿐이었다.


레이첼이 쓰러진 망토 여럿을 데리고 다가왔다. 나는 낮게 내려와 그들을 눕히는 것을 도왔다. 개 한 마리가 강해진 힘으로 너무 세게 문 탓에 방어구가 부러지고 갈비뼈가 골절된 듯한 사람도 보였다. 누군가가 언젠가는 눈치챌 게 뻔했지만, 나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레이첼을 경계하거나 엉뚱한 데 정신이 팔리게 둘 수는 없었다. 적어도 남자는 살아있었다. 진공 안에 내버려 두고 온 것보다는 나은 결과였다.


아이돌른의 클론은 미르딘에게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벽에 몰아 붙여진 미르딘은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돌풍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돌른은 그 틈을 타 진공의 범위가 닿을 정도로 미르딘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내가 미르딘에게 붙여 뒀던 벌레들은 빠르게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미르딘은 공격을 멈추고 도망치는 데 전력을 기울였지만, 아이돌른이 그를 붙잡아 지팡이를 쳐 내고는 벽에 몰아붙였다. 진공을 이용해 질식시키려는 것이었다. 사람이 질식사하는 데는 이 분 정도가 걸린다고 알고 있었지만, 그건 폐에 공기가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아이돌른의 범위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미르딘의 발버둥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그 순간 미르딘의 목을 붙잡고 있던 아이돌른의 손이 미끄러졌고 미르딘은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다시 기류가 터져 나오며 미르딘을 벽에 몰아붙였지만, 진공이 풀리고 기류가 흘러들어온 만큼 미르딘도 이제는 숨을 쉴 수 있었다.


리젠트가 그쪽을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리젠트가 한 짓일까?


하지만 미르딘은 질식의 여파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아이돌른 가까이에 추락해서는 엎드린 자세로 쓰러졌고, 자신의 가슴팍을 움켜쥐더니 축 늘어졌다.


아이돌른이 똑바로 섰고 미스 밀리샤를 비롯한 여러 망토가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아이돌른은 깜박거림으로 몸을 회복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번에도 방어구가 총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본체가 입는 것의 복사본이라면 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의 방어구일 것이었고, 그가 깜박거릴 때마다 옷도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전처럼 그의 주위로 향하던 공격이 엉뚱한 곳으로 휘어지기 시작했다. 능력을 사용한 것이었다. 총격과 레이저 공격이 멈췄다. 아이돌른이 공격을 미르딘에게로 보낼 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내 벌레들이 긴 끈을 든 채 날아들었다. 나는 쓰러진 미르딘에게 다가가는 아이돌른의 목에 끈을 감았지만, 끈을 묶을 만한 곳이 없었다. 나는 자동차의 사이드미러에 끈을 묶었다.


그는 한 걸음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깜박거렸다. 그가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했다는 듯이 끈이 풀려나왔고, 그는 미르딘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그를 다시 묶으려 했지만, 의미가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원튼이 아이돌른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부정형의 폭풍으로 변한 그가 잔해와 먼지를 휘날리며 달려들었고, 아이돌른이 날린 돌풍에도 그의 속도는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아이돌른이 깜박이자 칼날이 휘어진 단검이 그의 손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원튼이 닿기도 전에 그는 미르딘의 가면을 붙잡고는 턱을 들어 올렸다. 단검을 쥔 채였다.


그의 손이 경련하며 단검을 떨어트렸다. 리젠트였다.


바로 다음 순간 그가 다시 깜박이자 손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고 칼날도 원래 위치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미르딘의 턱밑에 단검을 찔러넣었다.


다음 순간 원튼이 그를 덮쳐서 단검을 쳐 내며 그 칼날을 이용해 아이돌른을 난도질했다.


붉은 번개를 쓰는 여자가 구출팀을 이끌며 내 옆을 지나쳤다. 우리 편에 남은 망토는 사십 명에서 오십 명 정도였지만, 그중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이삼십 명 정도였다.


한쪽 팔로는 히어로 두 명을 안아 든 채 반대쪽 팔로는 삽을 지팡이처럼 짚고 있는 걸리의 모습이 보였다.


클록블록커가 그 두 히어로 중 하나였다. 부서진 가면 뒤로 완충재가 보였다. 다른 망토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초록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에 도미노 무늬의 가면을 쓴 사람이었다.


“잠깐.” 내가 말했다. “괜찮은 거야?”


“라무스는 무사하지만, 클록은 죽을지도 몰라.”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어깨너머로 클론 아이돌른을 힐끗 보았다. 원튼에게서 벗어난 그는 깜박이며 신체 부위를 하나씩 정상으로 되돌리고 있었다.


재생 능력의 한계였다. 특정 부위에 집중된 회복인 만큼 전체적인 피해에 약한 것이었다. 벌레들로 공격할 수 있었다면 피해를 줄 수 있었을지도 몰랐지만, 방어구에는 빈틈이 없었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진공이라는 문제도 있었다.


“클록블록커.” 내가 말했다. “정신이 들어?”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바람 때문에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아직 있구나.”


무슨 뜻이지? 내가 살아있다는 게 놀랍다는 건가? 도망치지 않았다는 게 놀랍다는 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싸움을 바랐다.” 휘몰아치는 강풍에도 불구하고 말이 똑똑히 들렸다. 내 벌레들이 말한 것도 아니었다. “너희가 나를 시험하기를 바랐다.”


아이돌른이었다. 이전에 보여줬던 마음가짐 그대로였다. 에키드나와 혼자 싸우려 했던 이유를 말하고 있었다. 뒤틀리고 왜곡되어 원래의 의도가 잊혀버린 상태였지만.


“더 격분시키고, 더 몰아붙여야 하겠나? 너희가 모든 망설임을 벗어던지고 내게 모든 힘을 쏟아부을 수 있도록, 더 많은 고통을 주고 더 많은 동료를 짓밟아야 하겠나? 다른 방법으로 공격할 수도 있겠지. 이야기를 들어보는 건 어떤가?”


에키드나가 클론 한 무리를 더 토해냈다. 손이 불타는 남자가 하나, 슈발리에에게 돌을 던지던 능력자가 둘, 그리고 알렉산드리아가 하나 있었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일어섰지만 공격하지 않았다. 아이돌른의 말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콜드론은 우리가 설립했다. 삼대장이 설립했다. 넘버 맨. 윌리엄 맨튼. 박사. 우리는 사람들에게 능력을 판매했다.”


“안 돼.” 클록블록커가 말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늘어난 능력자들로 종말초래자들에게 맞설 수 있으리라고, 그렇게 우리 자신을 속였다. 하지만 시베리안과 섀터버드를 만들어낸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였고, 능력을 판매해 그레이 보이를 만들어놓고 통제를 벗어나자 막지 못한 것도 우리였다. 그밖에도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에키드나는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온 여러 끔찍한 실수 중 하나일 뿐이었지.”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그를 공격했다가는 입을 막으려 드는 콜드론의 첩자로 의심받을 것이었다. 노엘의 모습이 보였다. 몸통에 달라붙어 있었던 팔은 양옆으로 축 늘어져 있었고, 그녀는 긴 머리가 얼굴에 휘감긴 채 아이돌른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PRT를 만들어 비능력자들의 통제를 받는 양 꾸몄지만, 그 우두머리는 알렉산드리아였다. 우리는 언론을 조작했고 국가를 조작했다. 전부 힘을 위해서였지. 우리는 다른 차원에 침입해 사람들을 납치해 왔고 그들을 실험체 삼아 약물을 연구했다. 실패작들은, 결과가 잘못 나온 것들은 어떻게 했느냐고? 버렸다. 무조건 이길 수 있는 적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은품으로 팔아치웠지.”


아이돌른은 고개를 돌려 괴물 모습의 파라휴먼 하나를 바라보았다. 피부와 머리카락이 새빨간 소년이었다. 클론이 입을 열었다. “너희는 그런 괴물들이다. 홈쇼핑에서 무언가를 주문했을 때 몇 달러를 더 내면 딸려오는 기념품 수건, 너희는 그런 존재였다.”


레전드가 무언가를 외쳤지만 바람 때문에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클론의 추격을 피해 끊임없이 날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새로 생겨난 알몸의 알렉산드리아도 날아올라 그를 쫓아갔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이 의미심장했다.


나는 걸리를 보았다. 돌연변이로 뒤틀린 얼굴은 북받친 감정으로 한층 더 일그러져 있었다.


“거짓말이야.” 내가 말했다. “진실을 비틀어서 실제보다 나쁘게 보이게 한 거라고.”


걸리는 작게 신음할 뿐이었다.


“전부 지어낸 건 아니겠지.” 클록블록커가 말했다. 그의 얼굴 근처에 벌레들이 없었더라면 그다음 말은 강풍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의 진실은 있을 거야.”


“처음부터 속임수였다.” 아이돌른 클론이 말했다. 기류 조작 능력이 그의 목소리를 우리 귓가까지 전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속아 넘어갔던 거다. 한 사람이 능력을 구매할 때마다 연구를 위해 무고한 사람이 죽거나 괴물로 변했고, 너희가 어떤 선행을 베풀더라도 그 죗값은 지울 수 없을 거다. 다른 사람들은 또 어떻지? 이상을 실현하고 세상을 구하겠다는 입바른 소리에 속아 넘어간 바보들이지 않나. 너희는 전부 멍청이들이다.”


그 말과 함께 바람이 가라앉았다. 에키드나가 몸을 틀자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지만, 이윽고 침묵만이 흘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졌어.” 클록블록커가 말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걸리가 고개를 떨어트린 모습이 보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사상자가 계속 나오고 있었고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에키드나는 처음보다 오히려 더 강해진 상태였고 우리가 처치할 수 없는 클론들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와 아이돌른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사기가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니,” 클록블록커가 내 말을 끊었다. “졌다고. 이번 싸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어쩌면 이 싸움은 이길 수도 있겠지. 사이언이 온다면 말이야. 하지만 큰 그림을 봐. 이건 돌이킬 수 없어. 보호국이 사라진다면, 전 세계의 히어로들을 한 자리에 모으기 위한 노력이 사라진다면 다시는 사람들을 모으지 못할 거야. 이 분노, 그리고 팀원이 약물을 먹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 이 상태로 어떻게 다음 종말초래자를 상대할 수 있다는 건데?”


“어떻게든 될 거야.” 내가 말했다. “방법은 찾으면 돼.”


그는 기침 같은 소리를 내더니 신음을 내뱉었다. “젠장, 웃기지 말라고.”


“웃기다니?”


“네가 낙관주의자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런 걸까? 사실 히어로들이라서 더 심하게 동요하고 있는 걸 수도 있었다. 나는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다른 언더사이더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이점은 우리에게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똑바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우리 빌런뿐이었다. 하지만 태틀테일과 그루와 임프는 다른 곳에 있었고 리젠트와 레이첼은 무슨 대단한 일을 벌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레전드는 알렉산드리아 둘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고, 아이돌른은 우리를, 바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키드나가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는 것도 보였다. 나와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에키드나가 아니었다. 노엘이었다.


“네 도움이 필요해.” 내가 클록블록커에게 말했다.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싸우라는 게 아니야.” 내가 말했다. 나는 등 뒤에서 권총을 꺼내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에키드나가 날 잡으러 오면 머리 뒤를 겨냥하고 쏴. 거기만 방어구가 없어. 다른 데를 맞으면 살 수도 있고, 다시 붙잡히고 싶지는 않으니까.”


“붙잡힌다고?” 그가 물었다. “뭘 하려는 거야?”


나는 멈칫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 혹시 모르니까. 이것도 낙관주의라고 할 수 있겠네.”


“스키터?”


나는 히어로들 사이에 섞여 있던 벌레들을 모아서 하늘로 날려 보냈다. 시선을 끌 수 있을 정도로 자욱한 벌레 떼였다.


할 거라면 최대한 효과적으로 해야 했다.


처음 이 싸움이 시작됐을 때, 이기기 위해 사람을 희생시켜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 누군가의 생명을 버린다는 생각을 했을 때도 나는 항상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 내가 되리라 여겼다.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는 없는, 그래서는 안 되는 짐이었다.


이젠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이제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얼어붙은 광경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건 나뿐이었고, 벌레들이 어지럽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어 있었다. 노엘도 마찬가지였다.


“노엘!” 나는 소리쳤다. 벌레 떼가 내 목소리를 멀리까지 퍼트렸다. 아이돌른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퍼졌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내게 몸을 돌렸다.


“노엘 맞지? 에키드나가 아니라?”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벌레 떼가 나와 그녀 사이로 장막처럼 모여들었다. 내 모습을 감추고, 만약 돌진해 온다면 몸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처음에 거래를 제안했었잖아. 포로 한 명을 언더사이더 한 명과 교환하겠다고. 지금도 성립하는 거래인가?”


그녀가 몸을 틀며 거대한 발톱을 크게 벌리는 것이 보였다.


“어차피 넌 죽은 목숨이야.” 그녀가 말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네.


“거래를 받아들인다면 직접 죽일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 그리고 어쩌면 다른 히어로들이 살고 싶은 마음에 다른 언더사이더를 알아서 넘겨 줄지도 몰라.”


“팀원이 죽어도 상관없다고?”


“알아서 살아남겠지.” 내가 말했다. “조건은 간단해. 나와 아이돌른을 교환하겠어. 그것뿐이야.”


“저들을 전부 속인 사람을 말이야?” 그녀는 사람들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돌려받고 싶을까?”


“원하진 않겠지.” 내가 말했다. 나는 벌레들을 통해 모두에게 말을 전했다. “하지만 필요해.”


이 사태를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이 치명적인 사기 저하를 떨쳐내고 클록블록커가 말했던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주요 히어로들의 중요성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었다. 과거에 저질렀던 짓들과는 별개로 그들은 미래에 있을 종말초래자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었다. 필요하다면 내 목숨을 걸 수도 있었다. 그걸 확실하게 알릴 수만 있다면 죽어도 상관없었다.


노엘이 아이돌른을 뱉어냈다. 그는 코스튬을 입고 토사물로 뒤덮인 채 바닥에 엎어졌다. 그는 다른 히어로들이나 나보다 빠르게 몸 상태를 회복했고, 허공으로 떠올라 보호국 히어로들에게로 향했다.


상공의 히어로 몇 명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히어로 두 명에게 붙어 있던 벌레들을 통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 마디, 한 음절이었다. “아아.”


그는 몸을 돌리며 주위를 살피더니 레전드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클론 아이돌른의 그의 뒤를 따라왔고, 그러자 원본이 비행을 멈췄다. 레전드를 도우러 갔다간 클론을 끌어들이는 꼴이었다. 그는 자신의 클론을 마주 본 채 건물 옥상에 내려앉았고 레전드와 두 알렉산드리아 클론의 싸움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이제 도망가겠지.” 노엘이 내게 말했다.


“도망 안 가.”


“뭔가 속임수라도 쓰겠지. 넌 겁쟁이니까. 무능하니까. 이기적이니까. 그래서 우리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코일을 죽였었잖아.”


“코일은 괴물이었어. 그래서 죽였지.” 내가 말했다. 이번에는 목소리를 퍼트리지 않았지만, 어차피 의미는 없었다. 그녀의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렸을 것이었다. “도망 안 가.”


레이첼이 벤틀리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달려오려 하고 있었다. 내 벌레들이 그녀의 앞을 막아 두 걸음도 채 나가기 전에 멈춰 세웠다.


“그럼 어떻게 끝장내줄까?” 그녀가 물었다. “토사물로 뒤덮은 다음 클론들이 널 찢어 죽이는 걸 모두와 함께 감상해줄까?”


“누가 날 구하러 올지도 모르지.” 내가 말했다. “그래도 히어로니까. 여자애가 맞아 죽는 걸 보고 있으면 힘들지 않겠어?”


“그럼 직접 죽여줄게.”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에 으르렁거림이 섞여들었다. 에키드나가 끼어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네가 못 견디고 도망치기 시작하면 그땐 저 사람들도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겠지. 내가 널 찢어 죽인다면 저들도 날 막지 못할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돌진해왔다. 점점 좁혀지는 거리와 함께 땅이 울려왔고, 히어로들은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내가 말했던 대로 거래를 통해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눈을 감으며 벌레들로 레이첼을 다시 가로막았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당장 도망치거나 숨어서 살아남으라고 본능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는 대신에 나는 벌레들로 클록블록커의 귀에 속삭였다. “네 능력을 써.”


능력을 쓸 만한 대상은 하나뿐이었다. 그는 총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내가 총에 연결해 놓았던 기다란 거미줄도 함께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 실은 노엘과 나 사이를 자욱하게 뒤덮은 벌레들에 의해 들어 올려져 있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벌레들의 감각에 의지했다. 정신을 몸 밖으로 빼내듯이. 그렇게 해야 가만히 있을 수 있었고, 내가 가만히 있어야 허공에 고정된 거미줄을 향해 달려오는 에키드나가 계속해서 달려올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거미줄의 두께는 면도날의 가장 얇은 부분보다 두세 배쯤 두꺼운 정도였다. 그리고 클록블록커의 능력으로 고정된 이상 그 얇은 거미줄은 절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절대로 끊어질 수 없었다. 설령 아프리카코끼리보다 세 배는 무거울 법한 괴수가 부딪혀 오더라도.


그녀는 거미줄에 닿자마자 멈추려 했지만, 관성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오히려 앞발을 지면에 단단히 꽂아 넣은 탓에 몸이 더 예리하게 반으로 갈라졌을 뿐이었다.


반으로 갈라진 그녀의 몸이 내 양옆으로 쓰러졌다. 최대한 노력했지만, 충격에 몸이 비틀거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클론 아이돌른을 공격하세요.” 서둘러 노엘의 양분된 몸으로부터 물러나면서도 나는 벌레들을 통해 미스 밀리샤에게 말했다. “최대한 센 걸 날려서.”


클론 아이돌른은 우리를 향해 팔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팔에 감아 놓았던 거미줄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노엘과 나 사이에 있었던 거미줄과 같은 가닥이었다. 그는 빠져나가려 했지만, 목에도 거미줄이 걸려 있었다.


그는 빠져나가기 위해 깜박이기 시작했다. 한쪽 팔이 풀려났고, 다시 또 한쪽 팔이 풀려났다.


미스 밀리샤가 로켓 발사관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로켓을 발사했을 때 우리 편 아이돌른은 이미 레전드를 구하기 위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클론 아이돌른은 거미줄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채 로켓에 직격당했다. 폭발 자체의 위력도 위력이었지만, 거기에 더해 폭발의 충격파가 그의 몸을 얇은 거미줄에 대고 짓누른 것이었다.


평소에 한 줄짜리 명대사를 떠올리는 재주가 있었다면 지금이야말로 좋은 기회였을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어디 한 번 이것도 깜박거려 보시지’정도였다.


“두 조각을 잘 보세요.” 내가 계속해서 노엘로부터 물러나며 벌레들을 통해 말했다. “태틀테일이 재생 능력의 중심이 되는 핵이 있다고 했으니까, 재생하는 쪽에 핵이 있겠죠. 그쪽을 노려서 파괴하면 돼요. 이길 수 있어요.”


에키드나의 몸이 부풀어 오르며 거대한 종양 같은 것들이 솟아 나왔다. 잘려나간 반쪽을 재생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였고 히어로들은 모든 원거리 화력을 거리낌 없이 쏟아부을 수 있었다. 원튼과 웰드가 뛰어들어 사람들을 구출하고 핵을 찾기 위해 그녀의 몸을 찢어발겼다. 그들이 주는 피해보다 재생 속도가 더 빨랐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많은 망토가 풀려나왔고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들 수 있었다.


반대쪽은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떨어져 나간 살점이 말라붙으며 갇혀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났고, 망토들은 한 사람씩 그들을 구출해나갔다.


에키드나가 몸을 비틀더니 억지로 몸을 날려 허물어져 가는 반쪽과 재결합했다.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열한 명이 풀려난 상태였지만 그녀는 몸을 재구축하고 있었다. 같은 술수를 다시 쓸 수는 없겠지만, 이대로 발을 묶는 건 가능할지도 몰랐다.


나는 클록블록커를 힐끗 보았다. 어느새 의식을 되찾은 스케이프고트가 그를 치료하고 있었다. 걸리가 데려간 모양이었다. 그는 날 보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똑같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뒤쪽에서 벌레들이 다가오는 PRT 밴을 감지했다. 나는 그들이 태틀테일과 폴트라인 일당이기를 바랐다. 포탑 위에는 검을 어깨에 걸친 슈발리에가 올라타 있었다.


이길 수 있어, 라고 나는 생각했고, 이번에는 나도 내 말을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특정 망토 집단의 움직임이 신경 쓰였다. 클록블록커를 내려놓은 걸리는 다른 히어로들과 거리를 벌린 채 섰다. 그녀는 웰드와 붉은 피부의 소년에게 다가갔다. 콜드론이 만들어낸 이들이 따로 서 있는 것이었다.


전장 어디를 봐도 사람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 드물었다. 다들 거리를 두는 듯 멀찍이 떨어져 있었고,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사기도 회복된 것 같지 않았다. 환호성도 들리지 않았고, 팀장들도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갈라진 것이 노엘이 갈라진 것만큼 결정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작가의말

* 원작 번역 지침에 따른 공지사항.

“This is purely a fan project and I/we lay no claim to the ideas, characters, or story. The real author is J.C. McCrae, aka ‘Wildbow’, and the original version can be found at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The final chapter of Worm was published on 2013. 11. 19. This is a fan translation.”


"이 번역본은 팬의 작업물이며, 번역자는 이 작품의 아이디어,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자는 'Wildbow'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J.C.McCrae입니다. Worm 원작은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에서 연재되었으며 2013년 11월 19일에 완결되었습니다. 이것은 팬 번역본임을 밝힙니다."



* 표지 출처 : Ari Ibarra (ariirf.com)

팬아트 작가의 사용 허가를 받은 표지입니다.



* 이 작품의 번역은 2인 비영리 프로젝트입니다. 번역자가 번역을 맡고, 편집자가 검수와 업로드를 맡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Worm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17 '고치' 20.4 +16 20.11.27 513 33 28쪽
216 '고치' 20.3 +8 20.11.24 543 32 33쪽
215 '고치' 20.2 +9 20.11.20 448 30 36쪽
214 '고치' 20.1 +11 20.11.17 504 30 37쪽
213 '재앙' 19.z (막간 : 엠마) +13 20.11.13 526 35 51쪽
212 '재앙' 19.y (막간 : 파라휴먼 게시판) +15 20.11.13 534 31 36쪽
211 '재앙' 19.7 +11 20.11.10 478 32 53쪽
» '재앙' 19.6 +11 20.11.06 480 38 36쪽
209 '재앙' 19.5 +8 20.11.03 452 29 39쪽
208 '재앙' 19.4 +3 20.10.30 429 32 34쪽
207 '재앙' 19.x (막간 : 블래스토) +12 20.10.27 505 29 48쪽
206 '재앙' 19.3 +7 20.10.23 394 36 31쪽
205 '재앙' 19.2 +5 20.10.20 393 30 34쪽
204 '재앙' 19.1 +11 20.10.16 456 29 43쪽
203 '여왕' 18.z (막간 : 에키드나) +8 20.10.13 443 32 46쪽
202 '여왕' 18.z (막간 : 폴트라인) +5 20.10.09 487 26 47쪽
201 '여왕' 18.8 +9 20.10.06 473 33 35쪽
200 '여왕' 18.7 +10 20.10.02 409 26 32쪽
199 '여왕' 18.z (막간 : 심리치료사, 제시카 야마다) +10 20.09.29 491 28 55쪽
198 '여왕' 18.6 +6 20.09.25 458 31 30쪽
197 '여왕' 18.5 +4 20.09.22 419 26 28쪽
196 '여왕' 18.y (막간 : 크루세이더) +5 20.09.22 413 26 40쪽
195 '여왕' 18.4 +5 20.09.18 417 29 36쪽
194 '여왕' 18.3 +7 20.09.15 446 30 34쪽
193 '여왕' 18.x (막간 : 세계 최강의 남자) +15 20.09.11 585 37 31쪽
192 '여왕' 18.2 +9 20.09.08 436 28 29쪽
191 '여왕' 18.1 +3 20.09.04 498 34 30쪽
190 '이주' 17.8 +5 20.09.01 491 28 50쪽
189 '이주' 17.7 +4 20.08.28 417 25 43쪽
188 '이주' 17.6 +7 20.08.25 427 27 5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