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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르카 님의 서재입니다.

W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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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엘사르카
작품등록일 :
2020.05.08 22:18
최근연재일 :
2022.05.0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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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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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글자
39쪽

'재앙' 19.5

DUMMY

에키드나가 만들어낸 그루가 우리에게 주의를 돌렸다. 그의 주변을 뒤덮은 어둠이 새까만 파도처럼 우리에게 밀어닥쳤다. 나는 이미 아틀라스에 탄 채 고도를 높이고 있었다. 그러나 스케이프고트가 밴에 타 있었고, 거리가 너무 멀어졌다간—


나는 밀려드는 어둠을 따라서 날았다. 스케이프고트의 밴이 어디로 날아갈지 추측해서 움직여야 했다.


어둠이 벽에 막혔고 밴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히어로 대부분은 이삼 블록 뒤로 밀려난 상태였다.


심장이 세차게 뛰는 걸 느끼며 나는 눈을 깜박여 앞이 보이는지 확인했다. 그루의 능력이 스케이프고트의 능력을 차단했거나 충격으로 해제했다면, 전보다 더 안 좋은 상태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진형이 흐트러져 있었다. 팽팽했던 전선이 건물 사이사이로 흩어져 있었고, 혼란을 수습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었다. 그나마 한 팀의 리더가 팀원들을 수습해서 이동 방향을 지시하고 있었다. 에키드나의 그루가 다시 공격하기 전에 행동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도 한계가 있었다.


나는 벌레들을 끌어모으며 그루를 막을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거미줄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거미줄 여러 개를 엮어서 길이가 일백 피트는 될 기다란 끈을 만든 다음 벌레들에게 들려주었다.


일 분 뒤에 내가 보낸 가장 빠른 날벌레들이 끈을 그루의 목에 감았다. 나머지는 그를 물어뜯고 독침으로 쏘며 공격했다. 효과는 미미했다. 몸에 달라붙은 벌레들을 쳐 내는 것 외에는 반응도 거의 없었다.


끈을 어딘가에 묶어야 했다. 전신주에 묶을 수도 있었지만, 그래 봤자 움직임을 막기는커녕 방해조차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걸로는 우리 진형이 무너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가 자기 자신을 이동시킬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다.


레전드와 아이돌른과 알렉산드리아가 다른 비행 히어로들과 함께 전선에 뛰어들었다. 사전에 계획해둔 게 분명한 조직적인 움직임이었다. 가장 먼저 날아들어서 상공을 빙 돌던 알렉산드리아가 급강하하며 에키드나의 뒤쪽 다리 하나를 강타했다. 그녀는 접촉하자마자 붙잡혔지만, 자신의 힘과 레전드의 지원사격 덕분에 에키드나에게 집어 삼켜지기 전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알렉산드리아가 빠져나오기도 전에 아이돌른이 행동을 개시했다. 그가 만들어낸 비눗방울 같은 구체는 날아가면서도 점점 크기가 커졌고, 에키드나에게 닿았을 때는 크기가 그녀의 두 배에 달했다. 도로를 완전히 틀어막을 정도의 크기였다. 에키드나 주위의 색채가 흐릿해졌고, 그녀의 움직임이 열 배 가까이 느려졌다.


시간 왜곡이었다. 그 틈에 레전드가 스무 개가 넘는 광선을 발사했다. 곧게 뻗어 나갔던 광선들이 공중에서 휘어지며 에키드나에게 내리꽂혔다. 광선 하나하나가 붙잡힌 사람들을 피하며 몸의 중심만을 노리거나, 살점을 잘라내서 붙잡힌 사람을 구출할 수 있는 정교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광선 하나가 아래로 휘어지더니 갑작스럽게 오른쪽으로 꺾어져서 순간이동하는 그루를 노렸다. 그는 어둠을 이용해 위치를 바꿨고, 내가 묶어 뒀던 끈은 끊어졌다.


나는 벌레들에게 잘린 끈을 들고 그를 쫓아가라고 명령했다. 순간이동 능력자를 묶어 봤자 의미는 없었지만, 능력을 어떻게든 방해할 수 있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발목을 잡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그게 안 된다면 벌레들의 독으로라도 제압해야 했다.


에키드나는 몸을 틀어 피하려고 했지만, 레전드의 광선들은 계속해서 수와 크기를 불리며 그녀를 추격했다. 서른 갈래, 마흔 갈래, 쉰 갈래로 나뉜 광선들이 그녀의 몸을 마치 종잇장처럼 꿰뚫고 있었다. 살점이 불타고 끓어오르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레이저 역시 시간 왜곡의 영향을 받고 있겠지만, 애초에 광속인 만큼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오른쪽으로 도는 듯하다가 왼쪽으로 몸을 날렸지만, 레전드의 조준은 빗나가지 않았다. 아이돌른의 시간 왜곡 효과도 그녀를 따라갔다. 하지만 그래도 에키드나의 이동 속도가 아이돌른의 능력이 뒤쫓는 효과보다는 빨랐다. 뜯겨나간 살점을 땅에 떨어트리면서도 그녀는 천천히 효과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낮게 날아 들어간 알렉산드리아가 신호등을 떼어내서 들어 올렸다.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던 그녀의 모습이 갑자기 사람이 달려가는 정도의 속도까지 느려졌다. 효과 범위 안으로 파고들어 에키드나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슬로모션 같은 공격이었지만 느려진 건 에키드나도 마찬가지였다. 알렉산드리아가 휘두른 철봉에 맞은 에키드나는 제대로 된 타격을 입은 듯했다. 엄청난 충격에 앞발이 공중에 떴고, 그녀는 고통과 분노로 얼굴들을 일그러트리며 높이 일어섰다.


레이저 공격이 알렉산드리아의 주변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녀는 반응조차 하지 않은 채 에키드나의 뒤로 날아가서는 손과 무릎을 써서 구부러진 철봉을 곧게 폈다. 이어서 그녀는 에키드나의 다리에 철봉을 꽂아 넣었다. 히어로 한 명이 붙잡힌 채 발버둥을 치고 있는 위치였다. 레전드의 광선이 살점을 잘라내고 철봉이 지렛대 역할을 한 덕분에 히어로는 풀려났고, 알렉산드리아가 떨어지는 그를 받아서 집어던졌다.


그 모습을 본 다른 히어로들이 시간 왜곡 효과의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경계를 넘는 순간 날아오는 속도가 빨라졌지만, 히어로들은 그를 무사히 받아냈다.


에키드나의 그루가 주변을 어둠으로 뒤덮었고, 레전드는 어둠의 발원지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근처 식료품점의 1층이었다. 내 벌레들이 그루를 찾아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끈을 묶었다. 이제는 일백 피트보다 조금 짧았다. 근처 창문에 묶는다면 움직이려 했을 때 넘어트릴 수 있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그루가 에키드나를 자기 자신에게 순간이동시켰다. 에키드나가 레전드의 공격과 아이돌른의 시간 왜곡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어둠이 그들을 감싸며 에키드나에게 숨을 돌리고 몸을 재생시킬 시간을 벌어주었다.


저 그루를 제거해야 했다. 나는 이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대가 무슨 수를 쓸지 예측해 보았다. 노엘은 다시 전선에 뛰어들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루의 순간이동을 쓰거나···


나는 끈의 반대쪽 끝을 에키드나의 몸에 돋아난 뼛조각에 단단히 묶었다.


아이돌른이 에키드나가 이동한 건물을 손가락 두 개로 가리켰다. 마치 권총을 겨누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걸 본 레전드가 건물 일 층을 향해 레이저를 난사했다.


그루 클론은 근처에 있던 쓰레기통 뒤로 숨으며 몸을 숨겼고, 에키드나는 내가 바랐던 그대로 움직여 주었다. 몸을 날린 것이었다. 끈이 팽팽하게 잡아 당겨졌고, 그녀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휩쓸린 그루 클론이 날아가다시피 끌려갔다.


제대로 된 올가미는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끈은 목에 감겨 있었다. 올가미가 사람을 죽이는 원리가 질식이 아니라 목뼈 골절이라는 내용을 어디서 읽은 적이 있었다. 매듭만 제대로 되어 있고, 높이만 충분하다면.


이번에는 높은 곳에서 떨어트린 건 아니었지만, 목을 감고 있는 끈은 아주 질긴 끈이었고 반대편에 있는 생물체는 그 무게가 십오 톤, 어쩌면 삼십 톤에 달하는 괴물이었다. 가만히 서 있다가 한순간에 시속 오십 마일 이상으로 가속한 그 움직임에 클론은 그대로 축 늘어졌다. 일격에 즉사하거나 무력화된 것이었다. 내 벌레들은 끈을 잘라서 다시 사용할 준비를 했다.


에키드나는 아직 능력을 쓰지 않고 있었다. 망토들을 충분히 흡수했을 텐데도 어떤 이유에선지 힘을 아끼고 있었다. 어쩌면 재생 능력과 복제 능력이 같은 능력이라서 중상을 입으면 클론을 만들지 못하는 걸 수도 있었다. 다른 단점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녀가 뒷골목을 따라 내달리자 하반신의 ‘어깨’가 건물 벽에 부딪히며 여기저기 긁혔다. 그녀가 걷어찬 쓰레기통이 공중을 날았고, 그녀가 부딪힌 비상구의 문이 뜯겨나가며 벽돌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그녀가 내 범위를 벗어나기 직전에 미르딘이 그녀를 막아섰다. 그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히어로 여럿이 그의 주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는 테크톤과 슈발리에도 있었다.


내 주변의 히어로들은 흩어진 조직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스케이프고트가 탄 밴을 운전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방향이 반대였다.


나는 운전하는 망토가 제대로 움직여 주길 바라며 앞 유리에 벌레로 화살표를 그려주었다.


완장이 없는 히어로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다. 완장 없이는 방향도 제대로 알 수 없었고 핵심적인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내가 밴 한 대만을 안내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화살표와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글자 ‘E’와 에키드나의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수백 곳에 걸쳐 수백 번 그렸다. 에키드나의 머리 위에는 내 벌레들이 원과 팔자 무늬를 그리며 규칙적으로 비행했다. 글자들이 떠올랐다. 에키드나, 미르딘, 슈발리에. 슈발리에의 이름을 어떻게 썼더라? E 전에 I가 왔던가? ‘I 다음에 E, C 뒤에서는 반대’라는 원칙이 있었던 것 같긴 했지만, 예외가 너무 많아서 쓸모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내며 다시 싸움이 벌어지는 곳에 집중했다.


에키드나가 미르딘 일행을 향해 돌진했다. 미르딘은 지팡이로 허공에 무언가를 그렸고, 그러자 벌레들을 통해 대기의 진동과 새하얀 광채가 느껴졌다.


그가 그린 문자가 바깥으로 터져나가며 에키드나의 몸 오른쪽을 강타했다. 이동 경로가 꺾인 그녀는 건물에 어깨부터 처박혔고, 건물 옆면을 박살 내며 미끄러지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슈발리에가 자신의 거대한 검을 그녀에게 겨눴고, 방아쇠를 당겼다. 검신으로부터 폭발이 터져 나왔고 에키드나의 머리 중 하나의 미간에 포탄이 꽂혔다. 벌레들의 집단 시야를 통해 피해를 가늠할 수 있었다.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는 것이 보였다.


이 정도로 벌레들에게 집중력을 쏟아붓기에는 내가 너무 지쳐 있었다. 몸의 감각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히어로들에게 에키드나의 위치를 알리는 화살표의 방향을 갱신하는 건 무의식적으로도 어떻게든 가능했지만, 나는 동시에 스케이프고트 근처에도 있어야 했고 비치와 다른 사람들의 위치도 파악해야 했다. 아틀라스는 내가 무의식적으로 내리는 명령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런 탓에 스케이프고트와의 거리가 위험할 정도까지 멀어져 있었다. 일단 자신의 안전을 챙겨야 했다.


하지만 화살표가 일단 통하고 있긴 했다. 이제 히어로들은 에키드나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고, 스케이프고트를 태운 밴도 맞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팀장들이 명령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멀리 보낼 수 있는 망토 하나가 미르딘과 슈발리에에게 정보를 전하고 있었다.


태틀테일은 지상에 있었지만, 전장 쪽으로 이동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녀는 어디선가 손에 넣은 휴대폰을 든 채 끊임없이 말을 하며 정보를 전하고 있었다. 내가 알아들은 건 몇 마디뿐이었다. 그녀에게 주의를 집중할 수는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노엘이었다.


슈발리에와 미르딘은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있었다. 슈발리에의 갑주는 파괴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무기인 캐논블레이드는 비현실적으로 거대했다. 능력을 통해 밀도와 크기를 몇 배로 늘리면서도 마치 원래 크기인 것처럼 다루는 것이었다. 칼을 휘두를 때도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내지르는 주먹은 보기보다 훨씬 더 강한 타격을 가했다.


페냐와 메냐의 능력과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본인이 아니라 장비에 작용하는 능력이고, 조금 더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었다.


한편 미르딘은 다재다능하면서도 강력한 능력을 지극히 파괴적인 방법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수많은 기술을 수시로 바꿔가며 싸웠다. 에키드나가 클론과 살덩어리들을 뱉어내자 미르딘은 허공에 검은 문자를 그려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였고, 그러자 슈발리에와 테크톤은 무기를 땅에 꽂아 자기 자신을 고정하며 끌려 들어가는 동료들을 붙잡아 멈췄다. 곧이어 내 벌레들이 공간의 틈으로 끌려 들어가며 잔해에 으스러졌고, 그 탓에 순간적으로 전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벌레들을 더 들여보내자 슈발리에가 에키드나에게 쉴새 없이 검격과 포격을 가하는 모습이 보였다. 노엘이 그를 짓밟으려 하자 그는 돌연 움직임을 멈추고는 골목길 안으로 몸을 날렸고, 미르딘은 그때까지 빨아들였던 물질을 한순간에 쏘아 보냈다. 살점과 잔해, 시체와 죽은 벌레들을 압축해서 만든 포탄이었다.


두 히어로가 이룬 조합의 가장 큰 장점은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그 덕을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장거리 공격 능력을 갖춘 히어로들은 두 사람이 싸우는 동안 에키드나에게 자유롭게 공격을 퍼부을 수 있었고, 테크톤과 같은 히어로들은 지면을 무너트려서 두 사람을 지원할 수 있었다. 지금은 에키드나의 몸집이 너무 커진 만큼 발을 묶을 수는 없었지만, 넘어트리거나 주위 건물을 무너트려서 잔해를 떨어트리는 건 가능했다.


삼대장이 에키드나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고, 레전드는 세 블록 떨어진 내 눈에도 보일 정도의 레이저 포격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내가 화살표를 그리는 데 쓰던 벌레 중에도 그의 공격에 휘말려 죽은 녀석들이 있었다. 쌍방과실이었다.


에키드나는 사실상 발이 묶여 있었다. 후퇴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좁은 골목길의 벽 사이에 끼어 있는 만큼 뒤로 돌아설 수가 없었다. 아이돌른이 그녀의 뒤쪽으로 감속장을 한 번 더 날려 보냈고, 낮게 날아든 알렉산드리아가 에키드나의 뒤쪽 다리 중 하나의 무릎에 신호등이 달려 있었던 철봉을 찔러 넣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뿐이었다. 나는 현장에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알렉산드리아와 슈발리에가 에키드나를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 건물보다 높은 곳에 글자와 화살표를 띄웠다.


나는 아틀라스를 타고 현장에 접근했다. 삼대장과는 조금 떨어진 위치였지만, 그래도 골목길이 직접 보일 정도의 거리였다.


에키드나는 협공을 당하고 있었고, 도망칠 수 있는 방향은 넷뿐이었다. 하늘은 열려있었지만 위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레전드가 수직으로 내리꽂고 있는 레이저 공격을 뚫어야 했고, 땅속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도로와 그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부숴야 했다. 배수관 같은 공간이 있다 하더라도, 시간을 들여 땅을 파기에는 그녀가 실시간으로 입고 있는 피해가 너무 컸다.


남은 방법이라고는 왼쪽의 벽돌과 오른쪽의 콘크리트뿐이었다. 나는 벌레들을 조심스럽게 벽에 배치했다. 에키드나가 벽을 부수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게 하되, 그녀와 부딪히지는 않을 위치였다. 물론 지금은 복제된 벌레를 걱정할 상황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기를 더 주고 싶지는 않았다.


내 안내를 받은 히어로들이 현장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제는 위험요소를 알려야 했다.


나는 벌레들을 망토들 가까이 보냈다. 벌레 떼가 지나치게 넓게 퍼져 있는 탓에 목소리가 너무 높고 가늘게 들렸다. 전투의 소음 너머로 제대로 들릴지도 의문이었다.


“옵니다.” 벌레 떼가 말했다.


히어로 몇 명이 펄쩍 뛰었다.


“신호에 주의하세요.” 내가 말했다. “벽을 뚫고 나올 테니까.”


전투에 직접 가담하지 않고 골목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는 팀들도 많았다. 나는 화살표와 벌레들의 움직임으로 에키드나가 뚫고 나올 가능성이 큰 벽들을 표시했고, 그녀와 인접한 건물의 벽에는 느낌표를 그렸다.


에키드나의 자제심이 떨어지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슈발리에를 덮치려다가 테크톤과 미르딘, 그리고 원거리 망토 몇 명의 공격에 가로막혔고, 알렉산드리아는 그녀의 뒤를 점한 채 계속해서 철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발톱 하나가 벽돌과 목재를 찢어발겼고 그녀는 왼쪽의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고개를 숙여 몸을 낮췄는데도 일 층과 이 층을 나누는 바닥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녀가 향하는 방향은 전투가 처음 시작되었던 방향이었다. 히어로 대부분은 그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다.


벽돌과 콘크리트를 뚫고 건물을 무너트리며 움직일 수 있는 에키드나였지만, 수많은 망토를 뚫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포스필드가 사방에서 그녀의 움직임을 막았고, 그레이스를 비롯한 강력한 근접 격투가 대여섯 명이 그녀를 기습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근접 전투원들의 제1파가 그녀를 공격한 직후에 크로니클러가 만들어낸 그들의 분신이 에키드나를 다시 한번 강타했다.


에키드나가 뒤로 넘어갔다. 그녀의 눈에는 허공에 떠 있는 레전드와 알렉산드리아, 아이돌른의 모습이 비치고 있을 것이었다.


원거리 포격에 휘말릴 걱정도 없고 에키드나에게 흡수당할 걱정도 없는, 웰드와 원튼을 비롯한 일부 망토들이 주변에 남아 있었다. 그들이 삼대장과 힘을 합쳐 쓰러진 에키드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에키드나가 토사물을 게워 냈지만, 이전과는 형태가 달랐다. 이번에는 클론들이 너무나도 많이 섞여 있어서 액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였다. 네 개의 입으로부터 곤죽과도 같은 점액질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자기 몸보다 더 무게가 많이 나갈 것 같은 양이었다. 전에는 체액 구십 퍼센트에 클론 십 퍼센트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그 반대였다.


겹겹이 쌓인 채 꿈틀거리며 손을 내뻗는 클론들 사이를 레전드의 레이저가 할퀴고 지나갔지만, 에키드나는 이미 몸을 일으키고는 후방의 건물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건물에 다시 충격이 가해지며 벽이 무너져 내렸고, 지상에서는 온갖 초능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상의 망토들이 자신과 팀원들을 지키기 위해 발악하는 것이었다.


남아서 부상자를 도울 수도 있었겠지만, 스케이프고트를 태운 밴이 움직이고 있었고 에키드나를 도망치게 둘 수는 없었다. 상대는 부상이 심했지만, 재생 능력이 있었고 입으로는 계속해서 클론을 뱉어낼 수 있었다. 부상자들은 기동성이 떨어지는 망토들에게 맡기는 편이 나았다. 차라리 에키드나를 따라가는 게 좀 더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래봐야 그리 대단한 도움도 아니겠지만.


에키드나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장 빠른 축에 드는 사람만이 그녀를 따라잡을 수 있었고, 그중에서 다른 사람이 따라잡을 수 있도록 그녀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적었다.


일련의 클론 무리가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모두 망토였고, 알몸에 무장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공격을 견뎌내는 클론들이 많았다. 게다가 그녀에게 붙잡힌 망토 중에는 프리즘과 비슷한 부류의 망토도 있었다. 분신 능력자였다. 수십 명의 모습이 보였는데, 그중에서 분신 능력이 있는 본체는 스무 명 중 하나 정도였고 분신 스무 명 중에 서너 명 정도는 무적이거나 무적에 가까웠다.


나는 클론들이 조직적인 움직임을 갖추기 전에 처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히어로들에게 합류했다. 클론들은 머리와 몸통과 팔다리가 어지럽게 뒤섞인 채 서로 엉켜 있었고, 다들 체액으로 끈적하게 젖어 있었다. 내 벌레들이 그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에키드나를 따라잡은 미르딘이 ‘주문’ 하나를 사용하자, 천둥과도 같은 소리와 함께 에키드나가 모습을 감췄다. 미르딘은 허공에 뜬 채로 움직임을 멈췄다.


규칙적인 호흡과 침착한 모습을 보니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에키드나를 완전히 없앤 게 아니라 잠시 가둔 모양이었다. 슈발리에와 테크톤, 그리고 다른 팀원들을 골목길로 데려오기 위해 사용한 능력과 같은 능력인 것 같았다.


그사이에 우리가 클론들을 최대한 빠르게 처치해야 했다. 이목구비가 온전하지 않은 취약한 모습들이었다. 귀나 코가 없는 클론들도 있었고, 손가락이 없는 클론들도 있었다. 만들다 말았는지 피부가 얇아 반투명한 클론들도 있었고, 머리카락도 숱이 적거나 아예 없었다. 벌레들이 물기만 해도 피부가 젖은 휴지처럼 찢어지고 망가졌다.


내 벌레들이 초소형 수술칼처럼 정밀한 피해를 준다면 레이첼의 개들은 그 정반대였다. 벤틀리는 마치 살아있는 불도저처럼 클론들을 부수며 지나갔다. 전속력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당히 조절한 속도도 아니었다. 조랑말 정도까지 커진 다른 개들도 사슬로 벤틀리에게 묶인 채 녀석의 뒤를 따랐다. 녀석들은 서로와 다투면서도 클론들을 공격해 쓰러트렸지만, 레이첼은 녀석들이 클론을 죽이지는 못하도록 신경을 쓰고 있었다.


바스타드에게 했던 방식과 같았다. 훈련을 끝마치기 전에는 살인에 익숙해지게 하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약한 클론이라도 완전히 무력한 건 아니었다. 그들 역시 능력자였다. 주위의 전투원들에게 달라붙은 벌레들을 통해 사상자 수를 감지할 수 있었다. 히어로 두 명이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고, 죽은 사람도 한 명 있었다.


우리는 완전한 수적 열세에 놓여 있었고 클론 스무 명이 죽더라도 한 사람이 쓰러지면 손해였다. 에키드나가 방금 만들어낸 클론만 해도 백 명이 넘었다. 빨리 해결책을 찾지 않는다면 다음번에는 다시 백 명을 데리고 나타날 것이었다.


적당한 위치에 자리를 잡은 레전드가 에키드나가 남기고 간 클론의 행렬을 따라 레이저를 쏘아 보냈고, 알렉산드리아는 에키드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 날았다. 아무리 튼튼한 클론이라도 그녀가 좌우로 종횡무진 움직이며 날리는 일격을 견디지 못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PRT 밴의 확성기로부터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완장에서 들렸던 것과 같은 목소리였다.


“지금부터 전해 드릴 정보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정보입니다. 에키드나는 폭주한 상태로, 여성 쪽이 아니라 괴물 쪽이 주도권을 쥐고 있습니다. 붙잡힌 망토는 총 열일곱 명입니다. 재생 능력과 클론 생성 능력의 원천은 몸 중심에 존재하는 핵으로, 핵은 생체 물질을 무제한으로 생성할 수 있습니다. 핵으로부터 분리된 신체 부위는 사멸하며, 핵을 파괴하면 전체가···”


태틀테일인가, 라고 나는 생각했다. 알아낸 정보를 전한 것이었다.

밴에서 내린 스케이프고트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웰드를 비롯한 몇 명의 망토가 그에게로 달려왔다. 웰드의 손아귀에는 여성 클론이 붙들려 있었다.


테크톤과 원튼이 그를 부축했고, 스케이프고트는 나를 올려다보고는 손짓을 보냈다.


그가 바닥을 가리켰다.


그냥 말로 하는 게 더 알아듣기 쉬웠을 텐데. 나는 적당한 건물 옥상에 착지했다.


내가 착지하자마자 스케이프고트가 웰드가 잡아 온 클론에게 손을 갖다 댔다.


이전과 같은 감각이 온몸을 휩쓸었다. 온갖 촉감과 경험의 잔재가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착지하라고 한 것이었다. 능력의 제어를 놓치고 추락할 것을 걱정한 것이었다.


견디면 될 일이었다. 나는 것은 힘들더라도 벌레들은 지금도 조종할 수 있었다. 내 벌레들은 전장을 이탈한 클론 하나를 공격하는 동시에 다른 히어로들을 도망자가 있는 쪽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클론이 넷으로 나뉘었고 히어로들이 분신 셋을 처치했지만, 남은 하나가 다시 네 갈래로 나뉘었다.


클론을 막을 생각을 미리 했더라면 주요 교차로를 거미줄로 막아놓고 히어로들이 지나갈 때만 잘라서 열어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녀의 움직임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시야를 가리고 목구멍을 막아서 괴롭히며 다른 히어로들을 데려올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클론과 마찬가지로 몸이 약했다. 벌레의 턱이 그녀의 피부를 종잇장처럼 찢었고, 다른 벌레들이 노출된 경동맥을 물어뜯었다.


그렇게 그녀는 목에서 피를 뿜으며 죽었다. 분신들이 생겨났지만, 분신의 상태도 마찬가지였다.


히어로들이 그녀를 따라잡았다. 그중 하나가 말했다. “쿠즈.”


“···아니야, 자우스터.” 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다른 곳에서는 리젠트가 클론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는 민첩한 클론 하나를 능숙하게 넘어트리고는 나이프를 찔러넣어 일격에 처치했다.


계속해서 감각이 느껴졌다. 이제는 더 깊은 감각들이었다. 맛과 소리와 환상··· 세상 만물이 보였고, 수백만 가지 감각의 파편들이 느껴졌다. 잡음을 뚫고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신의 몸을 떠나서, 벌레들의 감각 속으로 피신해야 했다···


그렇게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았다면 놓쳤을지도 몰랐을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들었을 때보다 미약한 진동이었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초고음이었다. 벌레 중에서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녀석들이 있었다.


네 블록 범위 안에 있는 모든 벌레의 날갯짓이 경고의 말을 합창했다.


“섀터버드다!”


재빨리 반응한 망토들도 있었다. 바이저가 달린 헬멧은 벗어 던져졌고, 무사한 완장은 내던져졌고, 휴대전화는 버려졌다. 포스필드를 세우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가면을 벗어던진 다음 다리 주위로 늘어진 옷감으로 감쌌다.


그러나 싸우느라 그럴 겨를이 없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없는 전자기기를 장비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지난번의 공격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도시에 존재하는 유리의 양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시의 이쪽 절반에 있는 모든 유리로 된 물체가 산산이 조각나면서 거대한 충격음이 들렸고, 파괴의 물결이 해일처럼 우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해일이 지나간 곳에는 수많은 부상자가 남았다. 약해진 공격이었지만, 약한 공격은 아니었다.


테크톤은 갑주의 부품이 망가져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클론과 스케이프고트는 밴의 깨진 앞 유리에 맞아 쓰러져 있었고, 슈발리에는 바이저의 틈 사이로 날아 들어온 유리 조각에 맞아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반쯤 눈이 먼 채로 클론 세 명과 싸우며 팀원들에게 오인 사격을 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나는 몸 상태를 확인했다. 스케이프고트가 쓰러져 있었지만, 숨도 쉴 수 있었고, 눈도 멀쩡하게 보였다.


부상을 클론에게 옮긴 건가? 난 무사한 건가?


확실하게는 알 수 없었다. 혹시 모르니 백오십 피트 범위 밖으로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공격의 방향이··· 섀터버드가 기지에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에키드나한테 잡아먹혔다고 생각했었지만 다른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잠시 기절했을 수도 있었고, 에키드나가 잡아먹었다가 바로 뱉어서 리젠트가 쓰지 못하도록 했을 수도 있었다. 자세한 걸 알기 위해서는 리젠트에게 물어봐야 했는데, 그건 지금은 불가능했다.


지금은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전선이 붕괴한 상태였고, 처음부터 수가 많았던 클론 중에는 아직 무사한 놈들도 많았다. 작은 차이일 뿐이었지만 클론들에게 유리했던 점도 있었다. 알몸인 만큼, 유리로 된 물건을 들고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주요 히어로들은 애써 상황을 수습하고 있었다. 미르딘은 여전히 에키드나를 묶어두고 있었고, 삼대장은 에키드나를 포위할지 클론들을 정리할지 자신들끼리 빠르게 논의를 벌이고 있었다. 레전드는 말하면서도 레이저를 쏘아 보냈고 아이돌른은 푸른 전격을 날려 보냈다.


클론들이 스케이프고트와 테크톤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웰드가 그 주변에 있었지만, 혼자서는 부족했다.


나는 아틀라스의 등에 탄 채 지상으로 내려갔고, 가면을 흔들어서 유리를 털어낸 뒤에 조심스럽게 다시 썼다. 내가 왼쪽으로 내려와 방어선을 형성하자 웰드가 나를 힐끗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웰드가 자신의 손을 긴 칼날로 변형시키며 긴 리치를 활용해 넓은 범위를 방어해 나갔다.


나는 아틀라스 위에서 뛰어내리고는 녀석이 단독으로 자세를 잡게 했다. 녀석이 낫 같은 앞발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잘 싸운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클론들은 약했고 무기가 두 개 더 있어서 나쁠 건 없을 것이었다. 나이프와 삼단봉이 뽑혀 나왔고, 나는 삼단봉을 휘둘러 최대 길이로 늘렸다. 늘어난 리치 덕분에 쓰러진 스케이프고트와 무력화된 테크톤과의 거리를 조금 더 벌릴 수 있었다. 웰드와 아틀라스와 내가 삼각형으로 그들을 둘러쌌다.


지상으로 내려오니 한층 더 강렬한 현실감이 느껴졌다. 능력 면에서도 사람 몸의 위치나 적의 숫자가 더 생생하게 파악되고 있었다. 하지만 눈으로는 어지럽게 뒤섞인 사람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히어로와 클론이 서로 싸우고 있었고, 땅바닥에는 시체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중상자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는데,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벌레들의 범위는 닿았다. 나는 최대한 도우려 애썼다. 내 벌레들이 약점이 보이는 클론들의 눈을 공격했고 피부를 찢으며 상처를 냈다. 약한 클론들은 대부분 처치된 상태였고, 남은 건 곤란한 상대들뿐이었다. 분신 능력자들이나, 빠르거나 단단한 능력자들이었다.


내게 덤벼든 것은 분신 능력자였다. 아까 죽였던 그 ‘쿠즈’인 것 같았다. 몸은 약했지만 싸움 실력이 나보다 능숙했다. 내게는 무기와 방어구가 있었고, 그녀에게는 끈질김이 있었다.


삼단봉이 두개골 하나를 수박처럼 터트렸고 나이프가 흉곽을 잔가지처럼 부러트리며 가슴을 꿰뚫었다. 나는 그녀의 가슴을 걷어차 나이프를 빼냈지만, 또 다른 분신의 무릎을 노린 발차기에 반격을 당했다. 나는 쓰러지면서 그 분신에게 나이프를 휘둘렀지만, 그녀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곧이어 휘두른 삼단봉도 붙잡히자, 나는 다리를 쭉 뻗은 다음 몸을 일으키며 내 머리를 그녀의 머리에 그대로 들이박았다. 내 가면보다 클론의 얼굴이 더 약했다.


분신이 쓰러지자 네 번째 쿠즈가 분신 세 개를 더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날린 발차기에 나는 뒤로 날아가 테크톤의 갑옷에 몸을 기대야 했다. 뒤에 머무르던 쿠즈는 내 벌레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고, 지금 생긴 분신들도 그 상처는 남아 있었지만, 체력은 좀전의 격투가 없었던 일이 된 것처럼 쌩쌩했다.


웰드는 연기를 피워올리는 무적의 남자 클론과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클론의 손이 엄청난 고온인지, 웰드의 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클론이 그를 붙잡았고, 웰드는 그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클론이 웰드의 가슴팍에 손가락을 꽂아 넣자 새하얗게 녹은 금속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장기를 찾고 있었다.


쿠즈 분신들과 싸우는 와중에 벌레를 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웰드 쪽으로 벌레 한 무리를 보냈다. 벌레들이 남자를 뒤덮자 턱이 박히는 살이 느껴졌다.


“등을 공격해, 웰드!” 내가 외쳤다. “앞만 단단하고 등 뒤는 약하다고!”


그 틈을 노린 쿠즈 하나가 내게 주먹을 날렸다. 나는 나이프로 반격했지만, 치명상이 아니었다.


웰드가 한쪽 팔을 풀어서 클론의 뒤로 손을 뻗어서는 칼날로 그의 뒤통수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칼날에 날카로운 톱니가 돋아나며 절삭력을 더했고, 그렇게 어딘가 중요한 부분을 잘라냈는지 클론은 축 늘어지며 쓰러졌다.


그는 내게 몸을 돌려 쿠즈와의 싸움을 도왔다.


레전드의 레이저 포격이 우리 주위를 휩쓸었다. 몇 블록 거리에서 날린 광선이었다. 쿠즈 셋이 레전드의 포격에 맞았고, 웰드가 뛰어들어 네 번째를 찔렀다. 넷 중에 가장 멀쩡한 분신이 진동하더니 다시 넷으로 나뉘었다.


클론의 클론인가, 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전처럼 폐가 상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숨이 차올랐다.


이기고는 있었지만, 너무 느렸다. 섀터버드의 공격에 당한 게 삼 분의 일 정도였고, 그 뒤로 이어진 이 혼란에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 에키드나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분위기로 따지자면 딱 맞아떨어지는 타이밍이었다.


원거리에서 원호해 주던 아이돌른과 레전드는 이제 에키드나를 상대해야 했다. 우리는 알아서 클론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레전드는 거대한 레이저로 에키드나가 토해내는 엄청난 수의 클론들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쿠즈 클론 하나가 고함을 쳤다. “날 엄호해! 방법을 알겠으니까!”


클론 전체의 사 분의 일 정도가 각자 벌이던 싸움을 그만두고 그녀에게 합류했다.


시발, 서로 협력을 하다니.


우리 편은 어떻게든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분투했지만, 이들은 죽이기 어렵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클론들이었다. 내 벌레들이 쿠즈를 공격했고, 나는 몸을 날려 또 다른 둘의 등을 찔렀지만, 다친 무릎 때문에 그 이상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무릎을 꿇은 채 쓰러졌다. 비치와 개들이 무리를 지은 클론들에게 몸을 날려 그들을 찢어발겼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슈발리에도 내 근처에 있었다. 그의 캐논블레이드가 내 귀가 아플 정도의 폭음과 함께 포탄을 쏟아냈고 한 발에 클론 네다섯의 숨이 끊어졌다. 레전드의 레이저가 클론들의 진형을 찢어놓았고, 아이돌른이 시간을 벌기 위해 감속장을 뿌렸다.


부족했다. 시간도, 위력도 부족했다. 클론들이 에키드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나갔다. 레전드와 알렉산드리아, 아이돌른과 미르딘을 향해 클론들이 내달렸다.


고함을 질렀던 쿠즈가 에키드나에게 육박했고, 클론의 목에 혀가 감겼다. 끌려간 쿠즈 클론은 에키드나의 입 바로 앞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슈발리에가 발사한 포탄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빗나간 것이었다.


미스 밀리샤의 소총탄은 명중이었다. 쿠즈의 목을 총탄이 꿰뚫었다.


하지만 즉사가 아니었다. 죽어가는 클론은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에키드나의 몸이 잠시 떨리더니 넷으로 나뉘었다.


노엘이 넷이었다.


상황을 이해하자 숨이 턱 막혔다. 힘겹게 숨을 내쉬면서도 입가가 저절로 떨려왔다.


분신들은 쿠즈가 버린 분신들처럼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시들어가며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수가 넷이었다.


에키드나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발리스틱은 그녀가 뛰어난 전술가라고 말했었지만, 그건 노엘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이건 노엘이 아니라 에키드나였고, 상대는 그런 술수를 쓰기엔 이미 너무 망가져 버린 상태였다.


초능력에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편차가 있었고, 따라서 망토들의 종류도 다양했다. 거의 모든 능력이 공격적인 능력이었고, 거의 모든 능력에는 특정한 용도가 있었다. 그게 일반적이었고, 그게 표준이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본소우가, 크롤러가, 에키드나가, 레전드가, 알렉산드리아가, 아이돌른이, 드래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운 좋게 다른 사람들과는 격 자체가 다른 능력을 손에 넣은 사람들이었다.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편차,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상황에 의해.


그렇게 강력한 사람이 백 명 중 한 명이라 한다면, 에키드나로서는 망토를 백 명 만들어내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한 명쯤은 특출난 능력이 있을 테니까.


에키드나 분신 하나가 몸을 돌리더니 클론들을 깔아뭉개며 우리에게 돌격해왔다. 포스필드가 세워졌고 슈발리에가 그녀를 막기 위해 포격을 쏟아부었다. 모두 최선을 다해 후퇴하고 있었다. 나는 아틀라스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에키드나 분신 둘과 본체는 주요 히어로들과 싸우고 있었다. 쏘아져 나온 혀들을 레전드가 레이저로 잘라냈다. 에키드나 분신들이 클론 없는 토사물을 내뱉었고, 알렉산드리아가 토사물 공격의 대부분을 몸으로 받아냈다.


아이돌른은 전기가 흐르는 푸른 구체를 자신의 주위에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알렉산드리아가 토사물을 막아내지 못할 것처럼 보이자 능력을 감속장으로 교체했다. 그는 감속장으로 에키드나 둘을 감쌌고, 감속장에 붙잡히지 않은 하나가 토사물을 내뿜자 소형 포스필드를 불러내 공격을 막았다.


토사물 속에 숨겨져 있던 공격이 있었다. 토사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유연하고 가느다란 혀가 그의 팔을 잡아챘다.


순식간에 끌려간 아이돌른의 앞에는 자기 자신이 소환한 포스필드가 있었다. 포스필드에 처박힌 그는 강한 충격에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었고, 그 순간 포스필드와 감속장이 사라졌다. 알렉산드리아는 갑자기 빨라진 상대의 움직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분신의 등에 붙잡힌 알렉산드리아는 레전드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살점을 뜯어내고 몸을 빼내려 했지만, 레전드는 자신을 노린 토사물 공격 때문에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물러난 그는 원본 에키드나가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클론들을 처치했다.


바로 다음 순간 에키드나 분신 하나가 알렉산드리아를 붙잡은 분신을 향해 뛰어들었다. 알렉산드리아를 샌드위치처럼 가둔 것이었다.


에키드나 본체가 입을 다물었고, 구토가 멈췄다. 그녀는 아이돌른을 붙잡은 혀를 눌러서 짓밟고는, 이어서 아이돌른 본인을 짓밟았다.


레전드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무리 허물어져 가는 분신이라도 에키드나 셋에게 의미 있는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미스 밀리샤와 내 주변의 히어로들이 멀리서 지원사격을 가했지만, 에키드나 분신들이 몸으로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에키드나 본체는 분신을 물어뜯고 살점을 헤집은 끝에 분신의 몸 사이에 끼인 먹잇감을 찾아냈다. 알렉산드리아였다. 에키드나가 알렉산드리아를 집어삼키며 식도의 근육을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남은 두 분신이 마지막으로 무모한 돌격을 감행하는 것과 동시에 힘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침묵이 흘렀다.


최고 전력 두 명이 붙잡힌 것이었다.


에키드나가 몸을 뒤틀더니 무언가를 뱉어냈다. 마치 목에 걸려 있었던 음식을 뱉어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알렉산드리아였다. 저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라면 틀림없었다. 여자가 몸을 일으키자 한쪽 눈이 없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가다듬어 얼굴 절반을 가렸고, 그러자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코스타-브라운 국장님.” 누군가가 중얼댔다.


PRT의 국장과 알렉산드리아가 동일인물이었다.


난 솔직히 상관없었다. 충격 때문에 멍한 건지, 승산이 없어진 것 같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있어서인지, PRT가 그렇게 부패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미스 밀리샤가 소총을 겨누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알렉산드리아의 이마를 맞힌 총탄이 불꽃을 튀기며 튕겨 나갔다.


알렉산드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노엘이 다시 기침과 함께 무언가를 뱉어냈다.


아이돌른이었다. 원래 못생긴 건지, 신체가 조금씩 변형된 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작아 보였고, 너무나도 평균 이하로 보였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미스 밀리샤가 총탄 두 발을 날렸고, 그는 뒤로 쓰러져서 에키드나의 다리에 몸을 기댔다.


그의 몸이 깜박였다. 그러자 상처가 작아졌고, 몸이 다시 깜박이자 상처가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 깜박거림에 따른 회복이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었다. 그가 다시 일어섰다.


“공격!” 슈발리에의 비명 같은 고함이 얼어붙은 침묵을 깨트렸다. “강해지기 전에, 빨리!”


우리는 그대로 달려나갔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지금 당장 이기지 못한다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작가의말

* 원작 번역 지침에 따른 공지사항.

“This is purely a fan project and I/we lay no claim to the ideas, characters, or story. The real author is J.C. McCrae, aka ‘Wildbow’, and the original version can be found at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The final chapter of Worm was published on 2013. 11. 19. This is a fan translation.”


"이 번역본은 팬의 작업물이며, 번역자는 이 작품의 아이디어,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자는 'Wildbow'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J.C.McCrae입니다. Worm 원작은 http://www.parahumans.wordpres s.com 에서 연재되었으며 2013년 11월 19일에 완결되었습니다. 이것은 팬 번역본임을 밝힙니다."



* 표지 출처 : Ari Ibarra (ariirf.com)

팬아트 작가의 사용 허가를 받은 표지입니다.



* 이 작품의 번역은 2인 비영리 프로젝트입니다. 번역자가 번역을 맡고, 편집자가 검수와 업로드를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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